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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수 야구인생, '열차'는 지금 오르막길 가고 있다

ML 주전 타자 꿰차는데 9년 '역시 기회의 땅' 성공의 가도

아들에겐 야구·농구 등 모두 가르쳐 볼셈이에요
대중음악 관심 많아…소시·카라 한번 보고 싶어



촬영 및 제작: 조인스아메리카 www.koreadaily.com 촬영일: 2010-04-27


험난한 줄 알면서도 그는 가시밭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피투성이가 되더라도 사람들의 발자취가 없는….

아직 부를 거머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미국 팬들이 모두 알만한 스타가 됐다고 보기에도 이르다. 하지만 이 모든 게 바로 그의 눈 앞으로 다가온 것만은 사실이다. 그가 미국 땅을 밟은 지 올해로 딱 10년. 처음엔 미국이란 나라가 자신에게 엄청난 고통만 안겨준 곳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젠 "많은 사람들이 미국을 두고 '기회의 나라'라고 하잖아요. 왜 그렇게 부르는 지 이젠 알겠어요"라고 말할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간판타자로 우뚝 선 추신수(27). 지난 27일 애너하임 에인절 스타디움에서 '폭주기관차' 추신수를 만났다.

추신수는 2000년 6월 미국 땅을 처음 밟았다. 당시 그는 돈과 명예를 위해 온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오로지 자신의 실력이 세계 최고의 무대라는 '메이저리그'에서 어디까지 뻗을 수 있을 지 직접 확인해보고 싶어서였다.

메이저리그 주전 타자 자리를 꿰차는 데는 무려 9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잖아요. 사실 그동안 미국에서의 생활이 너무 힘들어 한국에 돌아가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고통스런 시간들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다고 확신합니다."

그는 미국에 대한 생각도 바뀌었다. "미국에서는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면 모든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곳이라고 생각해요. 야구 선수 뿐 아니라 일반 사람들도 재능이 있고 성실하다면 미국 등 해외에서 도전해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고 힘주어 말한 부분에선 '희망'이 느껴졌다.

그동안 박찬호 김병현 등 한인 투수들은 메이저리그에서 나름 성공을 거뒀지만 포지션 플레이어 가운데 성공한 사례는 한명도 없다. 추신수는 개척자의 길을 걷고 있는 셈이다.

메이저리그에 오르며 그에게 붙은 별명은 '추추 트레인.' 자신의 독특한 별명에 그는 웃음부터 터트렸다. "처음엔 '내가 왜 기차지?'하고 의아해 했죠. 나중에 기차가 달릴 때 미국에선 '추~추~'라는 의성어를 쓴다는 걸 알았죠. 힘있고 빨리 달리는 느낌이어서 저랑 잘 맞는 별명인 것 같아요"라며 만족해 했다.

추신수는 올해 드디어 전국구 스타로 떠오를 조짐이다. USA투데이는 28일 '추신수 인디언스의 미래를 이끈다'는 제하의 기사에서 추신수의 맹활약을 집중 조명했다.

지난해 아메리칸리그에서 유일하게 20-20(20홈런 20도루)에 3할 타율을 기록한 추신수는 28일까지 팀 내에서 규정 타석을 채운 타자 가운데 타율(0.338) 홈런(4개) 타점(15개) 출루율(0.452) 도루(4개) 등 공격 전 부문에서 1위를 달리고 있다.

▶'패밀리맨' 추신수

추신수는 경기가 없는 날이면 가족과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가족으로부터 필드에서의 힘을 얻는다고. "사실 와이프가 나보고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그래요. 쉬는 날엔 거의 집에만 있거든요. 원래 또 집에 있는 걸 좋아하는 편이구요. 가끔 와이프 애와 함께 드라이브 나갈 때도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저 혼자 있을 때는 밖에 거의 안 나가는 편입니다."

큰 아들 무빈(5)이하고 시간을 보낼 때가 가장 행복한 시간. "야구를 슬슬 가르치기 시작했죠. 농구 등 여러 가지를 다 시켜보려고요. 내가 어려서부터 야구만 했기 때문에 다른 스포츠는 잘 몰라요. 여기 선수들은 다른 스포츠에도 관심을 많이 보이는 데 사실 그런 면에선 약간 후회가 되기도 해요"라고 말했다.

원정경기 때 아내 하원미 씨가 간혹 경기장을 찾아온다는 그는 "와이프가 오면 당연히 힘이 나죠. 한인팬 수천명이 찾아온 것과 같은 효과를 느낍니다"고 말했다. 하지만 바빠서 1년에 두 세 번 밖에 경기장을 찾아오지 못한다고 한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고마운 사람 역시 "아내"라고 말했다.

"항상 고맙고 미안해요. 운동선수 와이프라는 게 사실 굉장히 힘들거든요. 항상 떨어져있고 애만 보면서 살잖아요. 그래도 불평안하고 항상 응원해줄 때 그 때가 제일 고맙습니다." '부인을 위한 가장 좋은 선물이 뭐냐'는 질문에 서슴치 않고 "부상없이 야구를 꾸준히 잘하는 게 가장 큰 선물 아니겠습니까?"라고 반문했다.

그는 한국 대중문화에 상당히 관심이 많다고 한다. 소녀시대 카라 등을 직접 만나보고 싶다고 밝혔다. 또 클리블랜드 경기에 시구자로 한 명 초대하고 싶다면 "영화배우인 남동생 민기를 초대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인생 바꾼 선수권대회

메이저리그 구단들이 추신수에게 관심을 보이게 된 것은 2000년 캐나다 에드먼턴에서 열린 제19회 세계청소년 야구선수권 대회 때.

당시 한국 대표팀의 4번타자겸 에이스로 활약했던 추신수는 93~94마일을 넘나드는 강속구를 뿌려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을 놀래켰다. 추신수는 18이닝 동안 32탈삼진 5실점의 눈부신 활약으로 한국의 우승을 이끌었다. 최우수 투수에 대회 MVP까지 수상했다. 결국 2000년 6월15일 시애틀 매리너스와 135만 달러에 입단계약을 체결했다.

시애틀 코치진은 프리배팅 때 홈런을 펑펑 치던 그의 모습을 보고 타자로서의 잠재력을 더 높이 평가 타자로 전향할 것을 권했다.
"만약 투수로 계속 뛰었다면 더 빨리 메이저리그에 오를 수 있었을거에요. 아시안 투수들이 성공한 사례는 있었지만 타자들은 아주 드물어서 고민을 많이했죠. 하지만 한국에서 워낙 팔을 많이 써 토미존 수술은 피할 수 없었을 거에요."
지금 투수로 뛴다면 구속이 얼마 나올 것 같냐고 묻자 "그래도 90마일 정도는 나올걸요"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최대난적 이치로
추신수는 시애틀의 특급 타자 스즈키 이치로가 앞을 가로막아 빅리그 진출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시애틀이 이치로를 중견수로 옮기고 추신수를 우익수로 기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지만 이치로가 포지션 변경을 거부해 무산됐다. 결국 추신수는 2006시즌 도중 클리블랜드로 트레이드됐다.
불운은 끊이질 않았다. 2007년 9월에는 왼쪽 팔꿈치 인대접합(토미존) 수술을 받았다. 그 때문에 베이징올림픽 대표팀에도 뽑히지 못해 병역혜택도 받지 못했다. 당시 한국행을 심각하게 고려했다고 한다.
2008년 5월31일 추신수는 재활을 마치고 빅리그로 복귀했다. 초반엔 플래툰시스템에 묶였지만 점차 실력을 검증받은 추신수는 그해 9월 타율 4할 5홈런 24타점으로 아메리칸리그 '이달의 선수'로 선정됐다. 클리블랜드는 그해 시즌을 마친 뒤 구티에레스를 이적시켰다. 2009년 추신수는 팀의 중심타자로 자리를 굳히며 선수생활에 드디어 꽃을 피웠다.
▶오랜 마이너 생활이 버팀목
그는 "지금도 간혹 힘들 때면 마이너리그 때를 생각합니다. 그 때만 생각하면 어떤 것이든 극복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리고 덕분에 다른 선수들을 더 이해할 수 있게됐죠"라고 말했다.
추신수는 야구 이외에 좋아하는 스포츠가 전혀 없다. 현재 NBA에서 최고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르브론 제임스(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경기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다른 선수들이 보니까 가끔 TV로 같이 보기는 해요. 간혹 캐벌리어스 티켓을 받는 데 다 친구들에게 줘요."
클리블랜드라는 도시에 사는 게 어떠냐고 묻자 그는 "한인들이 거의 없어 다소 불편하고 외롭습니다"고 솔직히 말했다. '만약 야구 선수가 아니었다면 무엇을 했을 것 같냐'는 질문엔 한참동안 생각하더니 "야구 이외의 다른 인생? 상상이 도저히 안가네요"라고 대답했다. 천상 야구인인 모양이다.
원정에 나갈 때 가장 큰 애로사항은 '음식'. "다 잘 먹는데 혼자 있다보면 귀찮을 때가 많죠. 한식도 직접 해 먹을 수 있는데 손이 너무 많이가서 항상 사먹게되요." 또 보약은 먹지 않지만 홍삼을 먹으며 체력보강을 한다고 밝혔다.
징크스가 전혀 없다는 그는 최근 유명세에 대해 "내가 유명하다는 걸 느껴본 적은 없습니다"라면서 "아직 내가 미국서 수퍼스타는 아니잖아요"라며 웃었다.
그는 미국에 살면서 야구를 잘해서 사람들이 알아봐줄 때 한국인으로서 가장 큰 자긍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얼마 전엔 미국 사람들이 내게 태극기를 그려보이며 한국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 데 그 때는 정말 뿌듯했어요."
'어떤 선수로 기억되고 싶냐'고 묻자 그는 골몰히 생각하더니 "모든 경기에 열심히 하고 최선을 다하는 그런 선수로 기억해줬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습니다"고 힘주어 말했다.
에인절 스타디움= 원용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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