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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케인의 '4가지 얼굴'…부시와도 오바마와도 차별화 작전

개혁가 매케인

버락 오바마의 '변화'에 맞서 존 매케인이 내세우는 가장 강력한 장점은 바로 워싱턴의 부정부패 척결에 앞장서온 '개혁가'로서의 실전 경험이다.
매케인은 지난 1999년에 열린 의회 청문회에서 텔레콤 업계의 막강한 로비를 지적하며 연방의회의 부패를 비판했고 2002년에는 캠페인 재정 개혁안을 통과시켰다.
이 개혁안은 기업이나 단체가 정치인에게 기부할 수 있는 금액의 한도를 규제함으로써 특정 이익단체에 무제한 기부를 허가했던 기존의 '소프트 머니' 제도를 철폐했다. 개혁안을 통과시키는 과정에서 동료 상원의원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지만 매케인은 "연방의회가 잃어버렸던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라고 정당성을 주장했다.

매케인은 또한 이어마크(earmark)로 불리는 지역특혜를 앞장서서 비판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내 책상을 거치는 모든 이어마크 예산안을 거부하겠다"며 "나는 그들의 친구가 아니라 보안관이 되어 쓸데 없는 예산낭비를 철저히 막겠다" 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본인 스스로도 24년간의 상원의원 경력 동안 애리조나에 특혜를 부여하는 예산안을 한번도 요구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밖에도 로비스트 공식활동의 투명성을 요구하고 의원들이 특정 기업의 항공기를 이용할 경우 탑승료를 내도록 추진하는 등 연방상원의 윤리 개혁에 앞장섰다.



공화당의 이단아

매케인은 ‘공화당의 이단아(maverick)’로 알려져 있다. 다양한 이슈에 대해 반드시 당의 성향을 따르기 보다는 자신의 신념대로 올곧은 길을 걸어오며 얻은 별명이다.

우선 현재는 지지하고 있지만 조지 부시 대통령이 제안했던 세금 감면 정책에 대해 2001년과 2003년에 두번이나 반대표를 던졌다.
공화당의 복음주의 세력이 강력하게 지지하는 ‘동성애자 결혼을 금지하는 헌법 수정안’에 대해서도 “연방 차원이 아닌 주정부에서 결정할 문제”라며 반대했고, 태아를 이용한 줄기세포 연구는 반대하면서도 2006년 성인의 줄기세포 연구에 연방 지원금을 부여하는 법안에는 찬성한 바 있다.
또한 2007년에도 “매우 고통스럽고 어려운 사안이었다”며 출산 클리닉에서 폐기될 예정인 태아를 연구에 사용하는데 찬성했다.

자신의 믿음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초당파적인 노력도 불사해 공화당원들의 비판을 감수하기도 했다. 파인골드 의원과는 캠페인 재정 개혁안을, 2004년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존 케리 의원과는 베트남과의 관계 정상화에 힘썼다. 매사추세츠의 에드워드 케네디 의원과는 서류미비자들의 합법적인 신분 취득을 돕는 포괄적 이민 개혁안을 공동 추진했다.

매케인의 이같은 성격은 어린시절부터 드러났다. 해군 아버지 덕에 자주 이사를 다녀야 했던 매케인은 “늘 ‘새로온 전학생’이었던 나는 누구도 가볍게 생각하지 못하도록 미리 강한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고 과거를 회상했다.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불의를 보면 상사에 맞설 정도로 매케인의 ‘독자행보’는 젊은 시절부터 이어져 왔다.

베트남 참전 영웅

존 매케인의 인생 역경은 ‘전쟁 영웅’이란 네 글자로 대변된다.
1958년 해군사관학교 졸업이후 조종사로 복무하던 그는 1967년 여름 베트남전에 파병돼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첫 고비는 그해 7월 29일 일어난 포레스탈 화재사건이다. 당시 134명이 사망한 이 사건에서 그는 타고있던 A-4 스카이호크 공격기의 연료탱크가 오발된 미사일에 맞아 목숨을 잃을 뻔 했다.

3개월 후, 다른 부대에 배치된 그는 하노이에 세워진 발전소를 폭파하는 임무에 도전했다. 매케인은 “부대의 자랑이 될 기회였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위험한 상황에서 폭탄 투하를 우선하다 그의 공격기는 격추됐고, 간신히 살아났지만 ‘하노이 힐튼’으로 불리는 호아 로 포로수용소에서 5년간의 구금생활을 시작한다.
당시 해군제독이던 매케인의 아버지는 베트남전을 지휘하는 태평양 사령관이었고, 북베트남군은 이 사실을 협상카드로 사용하기 위해 매케인에게 일찍 풀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매케인이 수감된 순서대로 풀려나는 미군의 전쟁포로 규정을 지키기 위해 조기석방 제의를 거절했다.

다리와 양 팔이 부러졌고 수용소에서도 구타를 받아 건강이 악화됐던 매케인은 5년간 더 고통을 겪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되돌아보면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결정”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1973년 석방될 때까지 혹독한 고문과 정신적 고난을 견뎌내야 했던 그는 ‘깡’만으로 넘어서지 못하는 벽에 부딪혔다. 이 시기를 거치며 파티를 즐기고 해군사관학교에서도 말썽만 부렸던 매케인은 비로소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허한 ‘인간 매케인’으로 거듭났다.

외교 전문가

리치 윌리엄슨 전 수단 특사는 최근 “매케인에게 외교분야에 대해 조언하는 것은 타이거 우즈에게 골프 코치를 하는 것과 같다”고 발언했을 만큼 매케인의 가장 두드러지는 전문분야는 외교 및 안보 정책이다.

이라크·아프가니스탄전과 최근 다시 부각되는 러시아와의 갈등으로 인해 매케인의 외교분야 경력은 오바마의 ‘경험 부족’을 비판하는 공화당 진영의 가장 효과적인 강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매케인은 22년간 이어진 해군 복무시절 베트남전 참전경험을 바탕으로 94년 연방상원에서 베트남에 대한 수출 금지 조치를 철회하고 관계정상화를 추진하도록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코소보 사태가 발발한 1999년에는 오바마의 러닝메이트인 바이든 의원과 공동으로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에게 전쟁수행에 관한 전권을 위임하는 코소보 결의안을 채택시키기도 했다.

1995년부터 2001년 까지 무역위원회의 위원장을 지냈으며 현재 군사위원회에서 위원장 바로 다음 서열인 선임 상원의원을 맡고 있다.
매케인은 2003년 이라크전에 찬성표를 던졌으며 이라크에 더 많은 군인을 파병해 지역 안정을 도모하는 ‘서지’작전에 찬성한다. 조지 부시 대통령의 ‘테러와의 전쟁’ 법안을 모두 지지했으며 섯부른 철군을 반대하고 있다.

북한에 대해서는 최근 “북한의 핵프로그램은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도록 종식돼야 한다”고 밝혀 비핵화를 위해 강경노선을 취할 것임을 시사했다.

이밖에도 대통령에 취임하면 쿠바에 수출금지를 계속할 뜻을 밝혔으며 중동 평화를 위해 직접 팔을 걷고 나설 것을 약속했다. 이스라엘에 군사물자와 기술지원을 늘리고 위협을 가하는 이란에 대해서는 경제제재를 가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주장한다.

정하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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