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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4월 4일, 분열과 갈등의 끝이어야 한다

━ 이틀 뒤 헌정사 세 번째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 ━ 갈등과 반목 증폭 안 되게 성숙하게 대비해야 대한민국이 헌정사 세 번째로 경험하는 격변의 순간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헌법재판소는 어제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의 선고를 4일 오전 11시에 한다고 밝혔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2004년 5월 14일), 박근혜 전 대통령(2017년 3월 10일)에 이어 세 번째 맞는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일이다. 윤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한 지 111일 만으로, 앞선 두 대통령 때 걸린 기간(63일, 91일)을 훌쩍 넘긴 최장 기록이다. 헌재가 선고일을 잡았다는 건 8인의 헌법재판관이 어느 정도 결론에 합의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결정문은 선고 당일 확정될 전망이다. 그만큼 섣불리 결론을 예측하기 힘든 상황이다. 헌재가 어떤 결론을 내리든 대한민국은 격동의 시간에 접어들게 된다. 탄핵이 인용(윤 대통령 파면)되면 60일 이내에 대선을 치러 6월 초 새 대통령을 맞는다. 탄핵이 기각 또는 각하되면 직무정지 상태였던 윤 대통령이 복귀한다. 여소야대 상황에서 여야 대립은 격화하고 개헌 등 다양한 이슈를 놓고 정치적 격랑이 펼쳐질 것이다. 정치권을 비롯한 대한민국 전체가 격랑을 넘어야 한다. 8년 전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심판 선고일이 결정된 다음 날의 중앙일보 사설 제목은 ‘3월 10일, 분열과 갈등의 끝이어야 한다’였다. 날짜를 4월 4일로 바꿔도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다. 이틀 뒤의 선고로 지금의 분열과 갈등이 화해와 승복으로 바뀔 수 있기를 대부분의 국민은 바라고 있다. 정치권도 헌재의 택일을 반겼다. 대통령실은 “차분하게 헌재의 결정을 기다릴 것”이라는 입장을 냈다.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도 선고 기일이 잡혀 다행이라고 했다. 그러나 여야 모두 자기 진영의 승리와 상대의 승복을 바란다. 어제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헌재는 특정 결론을 유도하는 민주당의 공세에 절대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했고, 박찬대 민주당 원내대표는 “지금의 내란 상황을 진압하고 종식할 최고의 판결은 의심 없이 내란 수괴 윤석열의 파면뿐”이라고 말했다. 선고일 결정 직전까지 정치권은 불안하게 돌아갔다. 특히 인용 대 기각(또는 각하)이 5대3의 교착 상태에 빠졌다는 확인되지 않은 전망에 극한 대립 상황이 됐다. 민주당은 진보 성향인 마은혁 재판관 후보자 임명을 주장하며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재탄핵을 추진했고, 18일 임기가 끝나는 문형배·이미선 재판관의 임기를 연장하는 법안도 추진했다. 국민의힘은 대통령에게 지명권이 있는 두 명의 후임 재판관을 권한대행이 임명하는 전략을 세웠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기각이나 각하 시) 대한민국 전역이 군사계엄에 노출되고 국민들이 저항할 때 생겨나는 그 엄청난 혼란과 유혈사태를 도대체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냐”는 말까지 했다. 헌재 선고 결과에 따라 폭발할 수 있는 갈등 포화 상태인 여론 앞에 ‘유혈사태’와 같은 선동적인 발언을 던지는 행위는 정치권이 자제해야 한다. 선고 당일 발생할 수 있는 불상사에도 전 국가적인 대비가 필요하다. 경찰은 헌법재판소 인근을 일반인 접근을 불허하는 ‘진공 상태’로 만들기로 했다. 헌재 인근 반경 100m가량의 농성 천막 등이 철거될 예정이다. 헌재 인근 지하철역 등에는 선고 당일 일부 출입구를 폐쇄한다는 안내문이 붙었다. 위험물을 취급하는 주유소나 공사장 등도 선고 당일 폐쇄될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 모두가 헌정 질서 회복이라는 시험대 앞에 다시 섰다.

2025-04-01

[사설] 불리하면 다 비관세 장벽…‘자국 우선주의’ 미국의 얼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상호관세 발표를 앞두고 공개된 미국 무역대표부(USTR)의 ‘2025 국가별 무역장벽 보고서’(NTE 보고서)는 미국발 관세전쟁이 심상치 않을 것임을 예고했다. 미국은 보고서를 기준으로 ‘상호주의’에 입각해 나라별 관세 부과 계획을 2일(현지시간) 발표한다. 트럼프는 이날을 ‘미국 해방의 날’이라고 불렀지만 무역 상대국엔 혼돈과 불안의 시대가 본격화하는 날이다. 보고서는 수입차 배출가스 규제부터 약값 정책까지 한국을 상대로 다양한 ‘무역장벽’을 거론했다. 대부분 이미 불만을 표했던 것들인데, ‘절충교역’처럼 이번에 처음 제기한 것도 있다. 절충교역은 외국에서 1000만 달러 이상의 무기나 군수품, 용역 등을 살 때 반대급부로 계약 상대방으로부터 기술 이전이나 부품 제작·수출 등을 받아내는 교역 방식이다. 기술 이전 등을 아예 요구하지도 말라는 것 자체가 불공정하다. 미국산 소고기 수입 월령 제한은 2008년 양국 간 합의에 따른 것이다. 미국은 과도기적 조치가 16년간이나 유지된 점을 문제 삼고 있지만 30개월 이상 소고기가 수입되면 이미 미국 소고기의 최대 수출국인 한국 시장에서 인기가 오히려 떨어질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네트워크 망사용료 관련 법과 온라인 플랫폼 규제법도 국내외 사업자의 규제 격차 등을 고려해 균형 있게 볼 필요가 있다. 조금이라도 불리하면 무조건 무역장벽으로 몰아가는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는 자제돼야 한다. 다만, 한국의 화학물질 관리 관련 법령 등 국내 기업조차 과잉 규제라고 지적하는 부분은 규제 완화 차원이나 미국과의 양자협상을 위해 선제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국내외 불확실성이 커지는 어려운 시기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은 어제 이재용 삼성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과의 경제안보전략 TF 첫 회의에서 “정부가 할 수 있는 지원 조치를 긴급하게 마련하겠다”고 했다. 한 대행은 어제 상법 개정안에 거부권도 행사했다. 기업 경쟁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재계의 우려를 고려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한 대행의 말처럼 임박한 상호관세 충격을 줄이려면 정부와 기업, 국민이 원팀으로 민관 협력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4대 그룹을 비롯한 우리 기업도 과감한 도전과 혁신의 정신을 보여주기 바란다.

2025-04-01

[정운찬 칼럼] 철인 대통령 이승만을 다시 생각한다

2025년 3월 26일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탄생한 지 꼭 150년 되는 날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에 주목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안타까웠다. 그래서 나는, 과거 이 칼럼에 썼던 것과 일부 중복을 무릅쓰고,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승만 대통령의 면모를 소개하여 그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배재학당에서 공부한 20대 청년 언론인 이승만은 고종 폐위를 음모했다는 독립협회 사건에 연루되어 1899년 1월 한성 감옥에 투옥되었다. 자유를 빼앗기고 고문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그의 타오르는 열정은 1904년 『독립정신』 집필로 표출되었다. 『독립정신』은 당시 조선의 문제점과 주변 열강의 움직임을 분석하고 조선 사람들이 해야 할 일들을 제시하며 조선 왕정 체제를 민주 공화정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나중에 대한민국 제헌헌법의 건국이념으로 이어졌다. 태평양전쟁 예견해 미국인들 감탄 한미방위조약으로 번영 기초 마련 공산주의 본질 꿰뚫는 혜안에 경의 그가 보여준 통찰력과 리더십 절실 이승만은 1904년 8월 석방되어 고종의 밀사로 미국에 갔다가 그곳에 남아 유학을 했다. 그러나 조선 독립을 꿈꾸는 그의 미국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조지워싱턴대(학사), 하버드대(석사), 프린스턴대(박사)를 졸업했지만, 당시 미국 지식인 사회는 일본에 경도되어 일본에 적대적 언행을 서슴지 않았던 이 박사의 입지는 매우 좁았다. 그러나 워싱턴과 하와이를 오가는 그의 독립운동 여정은 지칠 줄 모르는 지구력과 대담함으로 가득했다. 이승만 박사의 탁월한 통찰력은 태평양전쟁을 예견한 『일본의 가면을 벗긴다(Japan Inside Out)』(1941)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박사는 1882년 조선과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미국이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1905년 ‘가쓰라 태프트 밀약’으로 일본의 조선 지배를 방조한 것을 비판하는 한편, 일왕 숭배에 기반한 군국주의 정신과 당시 국제 정세를 고려할 때 일본이 곧 미국을 침공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당시 미국 사회에서 이 박사의 경고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적었다. 그러나 불과 반년 뒤 실제로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자 일본의 침략을 예언한 책으로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나중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펄 벅 여사가 서평을 쓸 정도였다. 이승만 박사는 해방 후 미명(未明)의 조선 사회에 새롭고 올바른 정치체제를 성공적으로 도입한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이 박사가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1948년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기반한 근대 국민국가 수립은 어려웠고 세워졌더라도 단명(短命)했을 것이다. 이 박사는 북한이 남침하자 미국의 힘을 빌려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구했다. 또한 미국의 대책 없는 휴전 계획에 맞서 반공포로 석방과 같은 뚝심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이끌어냈다. 그것은 지난 70여 년에 걸쳐 북한의 남침 억제와 한국 번영의 기초가 되었다. 공산주의 확산을 앞장서서 막아낸 이 박사의 반공 노선은 구한말 조선에 간여(干與)하는 러시아에 대한 반감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서자 러시아에 대한 반감이 반공사상으로 바뀌었다. 이 박사는 하와이에서 1923년 3월 『태평양잡지』에 ‘공산당의 당(當)부당(不當)’이란 논설을 썼다. 그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프랑스 혁명과 미국 공화제 성립 이후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신분 계급제도가 혁파되고 노예 해방이 이루어져 인민의 평등주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자본주의 발달로 빈부격차가 생기고 경제적 노예 계층과 계급제도가 만들어졌다. 공산당이 이를 평등하게 하자는 주장은 옳다. 그러나 균등하게 나누자는 주장은 틀렸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러시아 혁명이 발발한 지 불과 6년 만에, 또한 1차 대전 후 많은 유럽 지식인이 이를 따르는 마당에, 공산주의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반공사상을 확립한 이 박사의 혜안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부 수립 후 반공사상과 함께 평등사회 실현, 교육과 상공업 진흥을 통한 부국건설 등을 국가이념으로 삼았다. 모두 오늘날 우리가 향유하는 자유대한민국의 바른 초석이다. 이승만 박사는 대다수 조선 백성이 들어보지도 못했던 자유민주주의의 본질을 이해했던 가치 지향의 정치가였다. 그래서 그는 4·19 혁명 일주일 후 ‘부정을 보고도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것’이라며 깨끗이 권좌에서 물러났다. 다행히도 2012년 10월 이승만 박사의 모교인 프린스턴 대학은 그를 위해 강의실 하나를 재단장하여 이승만 홀(Syngman Rhee Lecture Hall)로 명명했다. 그리고 해마다 ‘이승만 박사 추모 강연’을 개최하기로 했다. 세계는 바야흐로 미·중·EU·러 등 여러 강대국이 대립하는 다극체제 시대로 달려가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는 철인 대통령(philosopher president) 이승만이 보여준 통찰력과 리더십이 절실히 필요하다.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전 서울대 총장

2025-04-01

[안혜리의 시시각각]"저주받으리라, 법률가들이여"

해도 해도 너무한다. 진영·성별·세대와 무관하게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발동과 탄핵 소추 이후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그리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관련 형사재판 과정을 지켜본 국민 대다수가 아마 이런 심정이었을 거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법조 카르텔이 작동하는 전관예우의 위력, 정치의 사법화 사법의 정치화…. 사법과 권력의 이런 부정적 상호작용에 대해 알 만큼 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돌아가는 형국을 보니 한국은 지금 법기술자들 끼리끼리 소소한 부와 특권을 나눠 먹는 정도가 아니라, 법을 앞세워 보통 사람의 상식을 우롱하는 지경까지 왔다. 헌재 탄핵심판 정파성으로 갈등 이재명 재판도 정치적 이해 시비 법이 상식 우롱하면 조롱 당할 뿐 과장이 아니다. 우선 헌재. 헌재가 어제(1일) 드디어 윤석열 대통령 탄핵 선고 기일을 4일로 발표했다. 작금의 헌재 재판관 8인 체제가 어떻고, 왜 9인 완전체가 돼야 하며, 혹은 2인 퇴임 후 6인만 남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등등. 지금껏 여야는 친민주당 성향으로 알려진 마은혁 헌재 재판관 임명을 윤 대통령 탄핵 심판 때까지 막거나 강행하기 위해 서로 위헌이네 뭐네, 절차적 정당성이 어떠하네를 다투는 시끄러운 법적 공방을 벌였다. 온갖 복잡한 법 지식과 용어가 난무하며 대중을 헷갈리게 했지만, 결국 이런 거다. 입맛에 맞는 재판관 넣고 빼기로 재판 결과를 내 편 유리하게 만들겠다는 떼쓰기, 좀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아예 재판 결과를 바꿔버리겠다는 힘겨루기다. 양쪽 다 헛심 쓴 게 아니다. 오히려 그 위력은 거대 의석을 차지한 민주당이 무리하게 탄핵했던 이진숙 방통위원장과 한덕수 국무총리 탄핵심판에서 헌재 재판관들의 정치적 성향으로 정확히 갈린 결과를 통해 이미 입증됐다. 법 모르는 대중은 바로 이 지점에서 이런 궁금증을 품을 수밖에 없다. 판사에 따라 죄의 유무가 갈린다면 대체 법은 무슨 소용인가. 유감스럽지만 새삼스런 얘기도 아니다. 지난 2018년 법조 종사자(판·검사, 변호사 등)를 대상으로 한 전관예우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 절반이 전관예우를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기소 여부와 재판 결과까지 바꾼다고 답했다. 이런 불편한 현실을 몰랐다면 또 모를까, 윤 대통령 탄핵심판 과정을 통해 온 국민이 이를 목격한 마당에 법의 신뢰는 이미 무너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달 서울고법의 이재명 대표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항소심 역시 마찬가지다. 1심에선 이 대표가 다음 대선에 출마할 수 없는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의 중형이 나왔다. 그런데 재판부가 판단을 180도 바꿔야 할 정도의 새로운 사실 하나 없이 그저 판사가 달라졌다는 이유만으로 2심에선 무죄가 나왔다. 대중이 기대하는 법의 일관성과 예측 가능성이 무너졌다는 측면에서도 문제지만, 재판부의 무죄 판결 사유가 더 기가 막히다. 이 대표가 선거 과정에서 "국토부 협박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백현동 부지 용도를 변경했다"고 발언한 건 거짓이라는 검찰 기소에 대해 재판부는 "상당한 압박감을 과장한 표현일 뿐 허위로 보기 어렵다"고 했다. 무죄의 근거로 어떤 그럴듯한 법 조항이나 판례가 쓰였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법 모르는 대중 눈높이에선 궤변으로 보일 뿐이다. 현재 의회 권력을 움켜줬고 또 미래 권력까지 거의 손에 쥔 유력 정치인이 아닌 일반 형사재판 피고인이었다면 과연 재판부가 이렇게까지 속내를 헤아려 판결했을지 의문이다. 이처럼 법이 상식에 한참 못 미친다면 대체 법의 쓸모는 무엇인가. 일찍이 미국 법학자 프레드 로델 예일대 교수는 32살에 쓴『저주받으리라, 너희 법률가들이여!』(1939)에서 법률가들을 일컬어 "특수한 법 지식으로 무장하고 난해한 말장난을 첨가해 대중에 군림하는 고급 사기꾼"이라며 "재판은 법적 원칙이 아니라 정치적 이해관계, 그리고 자의적 판단에 따라 달라진다"고 했다. 100년 가까이 지난 지금 한국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비판이다. 법이 상식을 우롱하면 로델이 그랬듯 국민도 법을 조롱한다. 4일 탄핵심판이 상식으로 충분한 세상이라는 걸 보여주길 기대한다. 안혜리(ahn.hai-ri@joongang.co.kr)

2025-04-01

"빚 1경원 눈앞인데 땜질 연금개혁…자식들 좀 생각하자" [강찬호의 뉴스메이커]

국민의힘 박수영 의원 - 전 여당 연금개혁특위 위원장이 본 연금개혁안 문제점 “여당 의원 108명 중 절반 넘는 56명이 반대·기권표를 던졌어요. 전례가 없습니다. 이건 아버지가 아들 지갑에서 돈 빼 쓰고, 아들은 굶어 죽어도 모르겠다는 처사예요.” 정부가 보험료율(내는 돈)을 13%로, 소득대체율(받는 돈)을 43%로 각각 올리는 골자의 국민연금 개혁안을 1일 국무회의에서 공포했다. 이 장면을 누구보다 착잡하게 지켜본 이가 있다. 지난달 21일 국민의힘 연금개혁특위 위원장에서 사퇴한 박수영 의원(재선, 부산 남구)이다. 그 전날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국민연금 개혁안에 대한 항의 차원에서 짭짤한 보직을 스스로 그만둔 박 의원을 그의 국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소득대체율 3%p나 올려 연금 고갈 불 보듯 지도부, 특위 의견 무시하고 야당과 ‘밀실합의’ 청년들 불안감 엄청나, 지금이라도 수정 마땅 민주당, 민노총 구성원 대신 국민 생각해야” 지도부 “억울하면 네가 대표해” Q : 사퇴라는 극약처방을 할 만큼 절박했나요. A : “특위 위원들을 매주 모아 학자들 초청해 3시간씩 12번에 걸쳐 36시간을 공부했어요. 국회에서 국민연금을 가장 잘 아는 조직이 됐고, 합리적인 안을 만들어 지도부에 보고했는데 깡그리 무시하고 민노총과 더불어민주당 주장 판박이나 다름없는 안에 합의해준 거예요. 피가 거꾸로 솟는 심경에서 사표를 던졌습니다.” Q : 구체적으로 무엇이 문제입니까. A : “이건 ‘청년세대 착취법’입니다. 소득대체율을 현행 40%로 고정해도 연금 고갈을 못 피하는데 이걸 43%로 올린 데다 자동조정장치마저 뺐으니 재정 파탄이 불 보듯 합니다. 민주당에 ‘여야가 특위를 만들어 한두 달이라도 공부한 뒤 결론을 내자’고 촉구했는데 그들은 ‘소득대체율을 50%까지 올리자’는 말만 반복했어요. 그런 안을 발의한 의원이 3명이나 돼요. 다른 민주당 의원들도 45%를 주장했어요. 민노총 주장과 똑같아요. 노무현 대통령이 갖은 고생 끝에 40%로 내린 소득대체율을 민주당이 올리는 데 앞장섰으니 노 대통령이 하늘에서 뭐라고 할까요. 여론이 좋지 않으니 민주당이 결국은 43%로 내렸지만, 그밖엔 민노총 주장을 죄다 받아줬어요. 기금이 고갈되면 정부가 세금으로 메꾸라는 요구를 받아준 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정부가 메꿔주면 연금 개혁을 할 이유가 없어져요. 연금공단은 보험이 아니라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점에서 사회주의나 다름없는 조직이 돼 버리는 거죠. 이러면 정부 재정이 엄청나게 들어갈 겁니다.” Q : 어느 정도인가요. A : “장기적으로는 ‘경’ 단위가 될 거라고 해요. 당장 지금 적자만 3000조원에 달합니다. 국민 한명 한명이 연금을 받다 어느 나이에 숨진다고 가정하면, 그때까지 받을 돈의 총액(충당 부채)이 그 정도 돼요. 이걸 정부가 어떻게 감당하겠냐고 5번 넘게 지도부에 보고했고, 의총에서 15분 특강까지 했어요. 의원들이 고개를 끄덕여요. 그러니까 표결에서 그 많은 의원이 반대나 기권표를 던진 거예요. 양당 원내대표가 합의한 사항인데 여야를 떠나 84명이 반대나 기권한 건 초유의 일입니다.” Q : 지도부 반응은 어땠나요. A : “지난달 21일이었죠. 진성준 민주당 정책위의장이 ‘자동조정장치 수용 거부’를 선언했기에 합의가 될 리 없다고 여겼는데 오후 2시에 열기로 한 본회의가 돌연 2시간 연기되더군요. 이 사이에 양당 지도부가 몰래 만나 전격 합의한 거죠. 국회의장도, 양당 원내대표도 광을 내고 싶었는지 밀실 합의를 한 거예요. 지도부에 항의하니 ‘당신이 3선 의원 돼 원내대표 되면 바꿔라’고 하는 거예요. 기가 막혔죠.” Q : 정부가 거부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는데요. A : “양당이 합의했으니 거부권 행사는 반대합니다. 내년 1월 1일 발효까지 남은 9개월 동안 변화를 끌어내려고 조만간 출범할 국회 연금특위에 3040 의원들을 투입하자는 아이디어를 냈어요. 여당 특위 위원 6명 중 절반인 3명이 김재섭·이용태·우재준 등 개혁안에 반대한 30대 의원들이죠. 반면 민주당은 특위 위원 7명 중 30대 의원이 1명뿐인 데다 기권한 의원 1명 빼면 6명 모두 찬성한 이들이에요. 이걸 보면 민주당은 위원회 시늉만 하다가 접으려 할 겁니다. 21대 국회 때도 연금특위 19개월 끌다가 빈손으로 끝냈거든요.” 청년들 “여당 믿었는데 지지 철회” Q : 민주당이 왜 청년을 위한 연금개혁에 소극적일까요. A : “청년들은 ‘아버지가 아들 지갑 뜯어가는 악법’이라고 난리에요. 힘들게 번 돈 연금으로 냈다가 나중에 못 받을 거란 불안감이 엄청나요. ‘국민연금 청년 행동’이란 청년 단체가 있는데, 국회에서 내 주선으로 4번이나 기자회견을 하면서 현행 연금체계의 문제점을 똑 부러지게 짚더군요. 그런데도 여야 지도부가 개혁안을 전격 통과시키니까 이 똑똑한 청년들이 ‘여당에 실낱같은 기대를 했는데 지지를 철회하겠다’고 해 안타까웠죠. 이대로 가면 국민연금은 2056년 바닥납니다. 개정해도 8년 더 연명할 뿐이에요. 지금 20~24세 청년들은 지급연령인 65세가 돼도 못 받는다는 얘기죠. 국민연금은 장기간 고액 봉급 받은 이들이 절대 유리해요. 민노총 구성원들은 공공기관·대기업 소속이라 월급이 많고 가입 기간도 길지만, 중소기업에 취직한 청년들은 보수가 낮고 이직도 심하니 받게 될 연금은 훨씬 적어요. 그런데 민주당의 주 고객은 2030 세대가 아니라, 민노총이니 그들에 유리한 연금 개혁안을 미는 거죠.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크게 기여한 게 민노총 아닙니까? 그러니 그들 주장하는 대로 들어주는 거라고 봅니다. 일례로, 내는 사람은 매년 0.5%포인트씩 8년간 올려 내게 되는데 받는 사람은 내년부터 바로 43%를 받는단 말이에요.” Q : 타개책은 뭘까요. A : “연금은 지속 가능성이 우선이에요. 민주당은 은퇴자들이 국민연금에서 기존소득의 절반을 받으면 생활이 된다면서 소득대체율을 50%까지 올리자는 입장입니다. 그러려면 정부 지출이나 직장인들의 부담이 엄청나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대신 국민연금에선 기존소득의 40%만 충당하고 퇴직·개인연금에서 각각 10%씩 충당해 직장 다닐 때 소득의 60%를 은퇴 이후 지급받는 방안을 추진해야 합니다.” Q : 퇴직연금과 개인연금 활용방안을 설명해주신다면. A : “퇴직연금은 고용주가 부담하는데, 직장인이 퇴직할 때 목돈으로 받는 방식이라 체불되기 일쑤였어요. 따라서 퇴직연금도 직장인 재직 시 매달 은행에 적립하게 유도하고, 퇴직 후 연금 형태로 받아가도록 법제화해야 합니다. 고용주에게 세금혜택 등 인센티브를 주면 실현이 가능해요. 개인연금도 세금 혜택으로 가입을 유도하면 수익이 나오니 선순환이 가능합니다. 금융위원회와 논의했는데, 긍정적이에요. 여기다 기초연금까지 총 4개의 ‘우산’을 만들면 정부 부담은 적어지고 국민의 은퇴 후 연금은 늘어나 안정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됩니다.” Q : 기초연금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A : “소득 하위 70%에 기초연금을 똑같이 줄 필요가 없어요. 정말 힘든 분들은 소득 하위 25% 밑의 ‘상대적 빈곤층’이죠. 고령층이 많고 극단적 선택 비율도 높아요. 이들에게 더 많이 주는 역진적 구조로 기초연금을 개선해야 하는데 표 떨어질까 봐 건드리지 않고 있어요. 이러면 그 부담이 죄다 다음 세대에 지워집니다.” ‘친구야, 단식 그만해’, 최상목의 만류 박 의원은 지난달 2~6일 마은혁 헌법재판관 후보자 임명에 반대하면서 단식 농성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단식까지 할 만큼 절박한 문제였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마 후보는 여야 합의 몫인데 야당이 일방적으로 뽑은 인사이니 절대 임명돼선 안 된다고 봤어요. 한데 야당이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당시)에게 엄청난 압박을 가하길래 당초엔 여당 의원 전원이 하루씩 릴레이 단식을 하기로 했어요. 내가 첫 번째로 나서겠다고 했는데 언론이 ‘하루 단식은 웰빙 다이어트’라고 비판하니까 의원들이 ‘욕먹을 바에 하지 말자’고 접더군요. 그런데 지난달 1일 ‘최 대행이 4일 국무회의에서 마 후보를 지명할 것’이란 소문이 돌길래 2일 아침부터 홀로 단식에 돌입했죠. 최 대행은 서울대 법대 82학번과 행시 29회 동기로 43년 지기란 점이 의무감으로 작용했어요. 사흘 연속 단식을 이어갔더니 최 대행이 4일 오전 국무회의에서 마 후보 임명을 보류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이튿날엔 최 대행이 내게 사람을 보내 ‘수영아, 마 후보 임명 안 할 테니 단식 끊어라’고 호소하더군요. 또 존경하는 중학교 은사가 ‘살아서 싸워야지’란 문자도 보내주셨길래 ‘이만하면 뜻을 이뤘다’고 판단해 나흘 만에 단식을 중단했죠.” 강찬호(stoncold@joongang.co.kr)

2025-04-01

10년 생존 암환자 100만명 육박…전립선∙폐암은 적은 이유 [신성식의 레츠 고 9988]

최성균(83) 사단법인 미래복지경영 이사장은 대장암·전립샘암 생존자이다. 2011년 대장암(3기c) 진단을 받아 45㎝ 잘라내고 항암 치료를 받았다. 그렇게 암세포를 잠재웠다. 발병 10년이 되던 날에 친구들이 '암 극복 고기 파티'를 열어줬다. 그런데 2022년 7월 전립샘암이 찾아왔다. 허리·견갑골 등 뼈 3곳, 림프샘 등에 퍼진 말기(4기 후반)였다. 서울대병원 비뇨기과 곽철 교수에게 표적항암제 치료를 받고 관련 지표가 정상 범위로 돌아왔다. 그는 40년째 당뇨병을 앓고 있고, 심장 스텐트를 두 개 시술했다. 최 이사장은 "'움직이는 종합병원'이지만 토론회 축사를 하고 친구들을 만나고, 끊임없이 활동한다"며 "암을 의식하지 않고 산다"고 말한다. 35%가 10년 넘게 생존 중 국립암센터에 따르면 암에 걸린 후 10년 넘게 생존한 환자가 91만 5755명(2023년 1월 1일 기준)이다. 20년 넘은 사람도 10만 7864명이다. 이들은 전체 암 유병자(암을 앓고 있는 사람, 258만 8079명)의 35.4%이다. 암 발병 평균연령 첫 분석 전체 63세,전립샘·폐 70대 암 원인의 30~35%가 음식 "전문적 식단 관리 나서야" 암센터는 위·대장·폐·유방·전립샘 등 한국인의 대표 암 유병자를 5년 초과~10년 이하, 10년 초과~20년 이하, 20년 초과로 나눠 분석했다. 위·대장·유방암은 5~10년보다 10~15년 유병자가 많다. 위는 5~10년이 9만 6718명, 10~15년이 12만 4243명이다. 다만 셋 다 20년 넘은 사람은 적어진다. 전립샘·폐는 양상이 다르다. 세월이 갈수록 뚝뚝 떨어진다. 전립샘은 5~10년 3만 8762명, 10~15년 2만 7509명, 20년 초과는 851명이다. 폐암은 5~10년 유병자에서 10~15년으로 가면서 36% 줄고, 20년 초과로 가면서 88% 줄었다. 전립샘 71.6세, 폐 70.2세 암센터는 이런 차이의 원인을 발병 연령에서 찾는다. 2022년 발생한 암 환자(28만여명)의 평균 연령은 63세이다. 은퇴하고 국민연금을 받기 시작하는 즈음에 암에 맞닥뜨린다. 유방암 환자의 평균 연령은 55.1세로 가장 젊다. 50대 발병률이 높은 현상과 일치한다. 위(66.5세), 대장(64.6세)은 60대 중반에 찾아온다. 문제는 '70대 암'인 전립샘암(71.6세), 폐암(70.2세)이다. 늦게 발병하니 10년 넘는 유병자가 뚝 떨어진다. 암 발병 연령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박은혜 국립암센터 암등록감시부 선임연구원(예방의학 전문의)은 "고령에 암이 발병하면 치료 합병증이 생기기 쉽고, 심장·뇌혈관 질환 같은 다른 병이 빈번하게 생겨서 장기 유병자가 많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위·대장·유방암은 5년 생존율이 높아 장기 생존자가 많다. 전립샘암(96.4%)은 더 높지만, 연령 요인이 더 크게 작용한다. 폐암은 5년 생존율(40.6%)마저 낮다. 장기 생존 시대에 암 환자는 어떻게 보내야 할까. 경기도 성남시 조성제(61)씨는 2017년 11월 위암 진단을 받고 위를 통째로 잘라냈다. 이후 암은 별문제 없다. 먹는 게 문제다. 좀 많이 먹으면 소화가 안 된다. 설렁탕 같은 국물을 많이 마셔도 화장실로 향한다. 달고 맵고 짠 음식은 아주 조금 먹는다. 발병 전보다 몸무게 10㎏ 줄었다. 병원에서 "회복에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그런데 8년째 그대로다. 게다가 체지방이 너무 적다. 조씨는 "닭가슴살 같은 걸 먹어도 체중이 늘지 않는다. 뭘 어떻게 먹어야 할지 궁금한데 병원에 가도 물어볼 데가 없다"고 말한다. "햄·소시지 섭취 제한해야" 암 생존자의 가장 흔한 궁금증은 먹거리이다. '커피 마셔도 되나, 빵은, 국수는, 생선회는, 상추쌈은 먹어도 되나? 고춧가루 써도 되나. 대한암예방학회·국립암센터는 지난달 28일 '암 예방을 위한 건강한 식생활 실천 전략' 심포지엄에서 암 생존자의 먹거리 궁금증을 소개했다. 김병미 국립암센터 암예방사업부장은 "국제암연구소는 암의 30%가, 미국 국립암협회지는 35%가 음식에서 온다고 본다"고 소개했다. 보건복지부가 2006년 제정한 암 예방 10대 수칙에 먹거리 권고가 들어있다. '채소·과일 충분히 먹고, 균형 잡힌 식사하기' '짜지 않게 먹고, 탄 것 먹지 않기' 이다. 일본 수칙에는 '위·식도를 위해 뜨거운 것을 식혀서 먹기'가 있다. 김 부장은 "암 예방·역학 전문가 15명을 조사했더니 식습관 변화를 반영해 가공육(소시지·햄 등), 패스트푸드·가공식품, 적색육 섭취 제한을 새로 넣자고 제안했다"고 소개했다. 교육상담 1회만 수가 인정 김소영 암센터 임상영양실장은 "세계 공통의 영양 지침은 과일·채소·전곡(whole grain,현미·통밀·귀리 등) 섭취"라면서 "그러나 모든 환자에게 적용하는 데 고민할 게 있다"고 말한다. 김 실장은 "대장 절제술을 받은 78세 환자에게 과일·채소·전곡을 권장했는데, 고섬유 음식이 소화가 안 되고 배설에 장애가 생겼다"며 "환자의 다양한 특성과 요구를 반영하기 힘든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전문가의 관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건강보험 지원은 빈약하다. 암 환자 교육 상담료 수가가 약 2만4000원이다. 치료 부작용, 일상생활 관리법, 음식 등을 교육하는데, 단 1회만 지원된다. 암 장기 생존 시대에 이래저래 고민할 게 많다. 신성식(ssshin@joongang.co.kr)

2025-04-01

[조민근의 시선] 우물 안 정치, 내수용 정책

“한국이 자본시장 선진화를 추진한다면서 공매도 거래를 전부 금지했다는 게 실은 낯부끄러운 일일 수 있다. 비판도 받아야 하면 받겠다” 지난해 11월 홍콩에서 열린 해외 투자설명회에 참석한 이복현 금감원장은 연신 진땀을 흘려야 했다. 한국 증시의 ‘밸류업’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투자를 독려하고자 나선 자리였다. 그런데 현지 투자자들의 관심은 1년째 이어지는 ‘공매도 금지 조치’에 쏠렸다. 선진 증시로 발돋움하겠다면서 어떻게 ‘글로벌 스탠다드’도 따르지 않느냐는 얘기였다. 그럴 것이 당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공매도를 금지한 국가는 한국과 튀르키예, 단 두 곳뿐이었다. ‘밸류업’의 진정성까지 의심하는 외국인 투자자들 앞에서 공매도 금지가 ‘불가피한 선택’이라던 이 원장도 결국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해외서 웃음거리 된 공매도 금지 세상 바뀌는데 규제는 제자리 정책도 글로벌 경쟁력 챙겨야 공매도 금지는 결국 시행 1년 반만인 지난달 31일 풀렸다. 주식을 빌려 판 뒤 주가가 내려가면 갚아 차익을 얻는 공매도는 국내외 기관 투자자가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쓰는 보편적 투자기법이다. 시장 전체의 효율을 높이는 순기능도 있다. 이상 급등하거나 거품이 낀 주식을 찾아내 빠르게 적정 가격을 찾아가게 만드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장은 주가를 떨어뜨리니 개인 투자자들에겐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다. 특히 당시 급등세를 타던 2차전지 주가가 공매도에 번번이 브레이크가 걸리자 원성은 더 커졌다. 국회 청원이 올라갔고 급기야 총선을 앞둔 여당도 동조하고 나섰다. 전격적인 금지 조치 뒤 대통령실이 직접 나서 “불법 공매도를 뿌리 뽑겠다”는 명분을 댔다. 빈대 잡으려 초가삼간 태우자는 얘기였다. 실제 공매도 금지 조치가 남긴 결과가 그랬다. 2차전지 주가는 대부분 당시의 반 토막이다. 시장 전체로 봐도 마찬가지다. 공매도 금지 기간 코스피는 8% 오르는 데 그쳤다. 같은 기간 30% 가까이 상승한 미국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 지수 등 주요국 증시와 비교하면 초라한 성적이다. 외국인이 슬금슬금 빠져나가면서 이들이 보유한 시가총액 비중은 뚝 떨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개인 투자자 비중이 과도한 시장인데, 그나마 큰 손들이 빠져나가며 토양은 더 척박해졌다. ‘개미 지옥’이 ‘개미 천국’이 되긴커녕 이제는 개미들 마저 짐을 싸 미국 증시로 옮겨간다. 그 사이 우리 증시의 체질을 바꿔 줄 ‘선진시장 지수’편입은 더욱 멀어졌다. 선진시장은 현재 우리가 속한 신흥시장에 비해 규모가 크고 안정적인 장기 투자자금이 움직이는 곳이다. 하지만 키를 쥔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은 지난해 6월 한국을 신흥국 시장에 그대로 남겼다. 그러면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로 “공매도 금지 조치로 시장 접근성이 제한됐다”고 콕 집었다. 실제 업계 관계자들이 현장에서 맞닥뜨린 반응은 더욱 냉소적이었다. 우리 경제 규모나 인프라를 들어 설득이라도 하려 치면 “국내 정치 이슈로 증시 제도를 흔드는 나라가 어떻게 선진시장에 들어갈 수 있냐”는 핀잔만 돌아왔다고 한다. 한국 경제는 ‘소규모 개방경제’라는 숙명을 안고 있다. 높은 대외 의존도와 개방성은 양날의 칼이다. 치명적 약점으로 꼽히기도 하지만 그 개방성이 오늘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수출 상품과 서비스뿐 아니라 정치와 정책의 글로벌 경쟁력이 중요한 이유다. 하지만 당장 표에 눈이 어두워 밖을 보지 못하는 ‘우물 안 정치’, 국제적 흐름과 동떨어진 ‘내수용 정책’은 오히려 갈수록 기승이다. 비단 공매도만이 아니다. 각종 규제와 세제를 글로벌 기준에 맞춰 손보는 일은 도무지 진척될 기미가 없다. 국가의 명운을 건 반도체 패권전쟁이 한창이지만 반도체 연구인력에 대한 ‘주 52시간 근무제 예외’ 적용은 결국 무산됐다. 업계 관계자는 “해외 경쟁국은 갖가지 특례와 인센티브를 부여하며 뛰라고 독려하는데, 우리 정치권의 노동시장 인식은 여전히 1960년대 전태일 시대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고 한탄한다. 그 사이 국내 굴지의 기업들은 하나, 둘 첨단 제조시설을 미국 등 해외로 옮겨가고 있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연일 관세 폭탄을 흔들어대니 기업으로선 별다른 방법이 없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온통 국내 문제에 정신이 팔린 채 세계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어떤 대비가 돼 있는지 제대로 챙겨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가 4일로 예정되면서 계엄과 탄핵 사태도 마무리 국면을 향한다. 이제는 정말 밖도 좀 쳐다볼 때가 됐다. 조민근(jming@joongang.co.kr)

2025-04-01

[시론] 탄핵 정국 노리는 폭력·테러 대비 충분한가

가짜 뉴스가 기승을 부리고, 듣고 싶은 뉴스만 듣는 확증편향 현상이 확산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사회경제적 양극화와 정치 진영 논리의 고착화와 관련이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폭력을 부추기는 사례도 잦다. 특히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 사건에 대해 헌법재판소의 선고(오는 4일)가 당초 예상보다 늦어지면서 ‘찬탄파’와 ‘반탄파’의 집회가 거칠어졌다. 질서 유지를 담당하는 경찰에 폭력을 행사하고 국회의원에게 계란을 투척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급기야 정치 갈등을 틈타 주요 정치인과 법관에 대한 ‘협박성 공격 예고’도 잇따르고 있다. 헌재 선고 늦자 폭력 우려 커져 테러방지법의 테러 개념 협소해 테러행위에 가중처벌 조항 필요 한국 사회가 정치 이념 차이에 따른 ‘심리적 내전’ 상태에 진입한 것은 오래전의 일이라지만, 윤 대통령 탄핵 사태가 여기에 기름을 부은 듯하다. 그래도 사생결단식 충돌이나 물리적 폭력을 사용하는 행위는 공동체의 질서와 안정을 해치기에 절대로 방치하면 안 된다. 무엇보다 여야가 헌재의 결정에 승복하겠다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정치적 휴전을 모색하고, 냉각기를 가져야 한다. 경찰은 기동대를 대규모로 투입해 두 정치 진영의 집회와 시위 군중을 분리하거나 필요할 경우 강제 해산하고 있다. 충돌 우려가 높은 헌재 주변에 차벽을 빈틈없이 세워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다만 일반 시민의 통행 불편과 자영업 등 민생에 끼칠 피해를 최소화하는 노력도 병행해야 한다. 탄핵 사건을 맡은 헌재 재판관이나 민감한 정치 사건을 담당하는 판사의 신변 안전을 위해 경호팀을 배치하는 등 안전 관리에도 빈틈이 없어야 한다. 검·경은 불법 행위자들에 대해서는 엄정하고 신속하게 법적 조치를 해야 한다. 아울러 이참에 테러 위협을 규제하는 법 제도를 완비할 것을 제안한다. 탄핵 심판 인용으로 윤 대통령이 파면될 경우 흉기와 인화 물질을 갖고 난동을 피울 것이라는 글을 SNS에 올린 30대 청년에게 형법 제116조의 2에 규정된 ‘공중협박’ 혐의로 구속영장이 신청됐으나 최근 수원지법에서 기각됐다. 구속의 상당성에 대한 소명이 부족하다는 것이 기각 사유였다. 공중협박죄는 지난 2023년 경기도 성남시 서현역과 서울 신림역 살인 사건 등 이상 동기 범죄가 잇따라 발생하고, 정보통신망을 통해 공중을 대상으로 한 협박 사건이 이어지자 현행 형법만으로는 대응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에 따라 신설된 죄목이다. 그런데 이번에 첫 구속영장이 기각됐으니 경찰은 법원의 기각 사유를 검토해 수사 방향을 점검하고 영장 재신청 여부를 검토해야 할 것이다. 차제에 2016년 제정된 테러방지법의 문제점도 보완해야 한다. 현행법을 보면 테러의 개념이 협소하다. 미국과 유럽은 테러의 개념과 행위를 폭넓게 규정하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형법은 폭탄이나 독극물 테러는 물론이고, ‘대중의 공포를 유발할 의도로 다른 사람을 위협하는 행위’도 테러로 본다. 영국의 대테러법은 정치·종교·이념적 대의 추구의 목적을 가진 테러 외에 ‘정부에 영향을 주거나 공중 또는 공중의 일부에 대한 협박’도 테러로 규정한다. 하지만 한국의 현행 테러방지법은 공중 협박의 목적을 ‘초과 주관적 구성요건’으로 정하고 있어, 목적범이란 점을 입증하지 못하면 테러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불특정 다수의 생명이나 안전에 대한 무차별적 위협을 테러의 정의에 포함하는 방향으로 법을 개정해야 한다. 테러 해당 여부를 규명하는 판단 체계도 미비하다. 이 때문에 테러 의심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관계 기관들이 테러 여부를 신속히 판단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테러 방지 대신 일반형사법적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 조속히 테러 해당성 판단 절차와 공표 방법을 명시해야 한다. 테러방지법 제9조는 대테러 조사 및 테러 위험인물 추적에 관해 명시하고 있으나, 그 내용이 일반적·추상적이다. 시행령엔 관련 규정이 없다. 그렇다 보니 대테러 조사가 행정조사에 가깝게 운영되고 있어 테러 예방에 한계가 있다. 테러 혐의자를 대상으로 하는 만큼 구체적인 실행 절차와 수단·방법을 마련해야 한다. 강제력 행사도 엄격한 조건 아래 허용할 필요가 있다. 이 밖에 선진국처럼 가중처벌적 성격이 담긴 별도의 테러행위 처벌 근거와 함께 테러선동죄도 신설해야 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제성호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2025-04-01

[고영경의 아세안 워치] 미국과 골든아워 이어가는 베트남의 실용외교, 한국에도 도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함께 하루 종일 골프를 칠 의향이 있다.” 지난 1월 베트남 총리 팜 민찐의 이 발언은 베트남의 실용적 외교 전환을 보여준다. 그는 미국 플로리다주 팜비치에 있는 트럼프의 저택 마러라고 리조트 방문 가능성까지 언급했다. 일본의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증명했듯 골프 외교는 트럼프와의 관계 개선에 효과적인 통로다. 대미 무역흑자 3위국인 베트남 규제 바꿔 통신 분야 투자 허용 미국산 항공기, LNG 수입 확대 지난달 26일 베트남 정부는 일론 머스크의 스타링크 서비스를 전격 승인했고, 이틀 뒤인 지난달 28일 트럼프 그룹은 베트남 파트너사와 함께 15억 달러 규모의 골프장·주거 단지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미국이 주요 무역 대상국을 ‘더티(dirty) 15’라 지칭하며 관세 압박을 강화하는 상황에서도 미-베트남 관계는 골든아워를 이어가는 듯하다. 베트남 경제는 지정학적 위기와 미·중 무역 갈등 속에서 가장 큰 수혜를 입은 국가로 평가된다. 2024년 경제 성장률은 7.09%를 기록했는데, 이는 2022년(8.02%)에 이어 최근 5년간 두 번째로 높은 성장률이다. 세계은행은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의 6%에서 6.6%로, 싱가포르 은행인 UOB는 7%로 상향 조정했다. 베트남의 2024년 무역수지 흑자는 247억7000만 달러로 대미 무역흑자가 약 1043억 달러에 이른다. 여기에는 중국 기업이 베트남으로 이전한 효과도 포함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과거 베트남을 “중국보다 더 나쁜 무역 불공정 국가”라고 지칭한 이유다. 베트남 정부는 이에 대응해 중국의 우회 수출을 차단하기 위한 원산지 검증 시스템을 강화하고, 미국 기업의 투자 환경 개선을 위한 법과 제도 정비에 나섰다. 트럼프의 관세 발표 직후에는 산업무역부 장관이 미국산 농산물 수입 확대, 록히드마틴 군 수송기 도입, 보잉 737 맥스 200대 구매 이행, 미국산 LNG 수입 확대를 약속했다. 팜 민 찐 총리는 미국-아세안 기업협의회 대표단과의 간담회에서 무역 불균형 해소를 위한 구체적 조치로 미국산 농산물과 에너지 수입 확대, 원산지 검증 강화, 베트남 시장경제지위(MES) 인정 요청 등을 제안했고, 경제 사절단은 미국을 방문해 트럼프가 중시하는 에너지 및 항공 분야에 초점을 맞춘 41억 달러 규모의 양해각서(MOU)와 계약을 체결했다. ‘대나무 외교’로 미·중 관계 전략적 관리 베트남의 강점은 세 가지다. 첫째, 투 람 서기장 체제로의 전환 과정에서 정치적 안정을 유지했다. 2024년 7월 응우옌 푸 쫑 전 서기장 서거 후 순조로운 권력 이양에 성공했다. 둘째, ‘국가 도약의 시대’ 비전 아래 2030년 고·중 소득국, 2045년 고소득국 목표를 제시하고 정부 기관 35~40% 감축 등 과감한 구조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셋째, ‘대나무 외교’로 불리는 유연한 균형 외교다. “고양이가 검든 희든 쥐만 잡으면 된다”는 중국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처럼, 베트남은 미국과의 관계를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하면서 대 중국 관계도 전략적으로 관리하는 균형 외교를 펼치고 있다. 그리고 국익을 위해서라면 기존 원칙도 과감히 수정한다. 전통적으로 통신 분야에서 외국인 투자를 엄격히 제한해 왔지만, 트럼프와 친밀한 머스크의 스타링크를 위해 외국인 100% 소유 위성 인터넷 서비스를 관련 규제까지 바꿔가며 특별 허용한 것이 대표적이다. 트럼프 1기 때 일본이 자동차 관세 면제를 받는 데 당시 아베 총리의 골프 외교가 일정 부분 기여했다는 평가가 있지만, 베트남의 경우 무역 구조와 중국과의 밀접한 관계를 고려할 때 골프 외교만으로 관세 위협을 완전히 피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2일 발표될 미국의 신규 관세 조치에서 베트남이 타격 대상이 될 가능성도 존재한다. 그러나 최악의 시나리오에서도 베트남은 미국과의 경제 협력 강화를 통해 피해를 최소화할 여지가 있다. 베트남의 강점은 튀르키예와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경쟁 신흥국이 정치적 혼란을 겪는 동안 상대적으로 안정된 정치 환경과 경제 성장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애플과 인텔, 나이키 등 미국 대기업이 대규모로 진출해 있어 미국 내 산업계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 베트남이 트럼프의 공세를 잘 헤쳐나가는 것은 한국 경제와 별개인 문제가 아니다. 트럼프 시대의 통상 압력 앞에 한국과 베트남은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 두 나라 모두 수출 의존도가 높고 미국 무역수지 적자의 주요 원인국으로 지목되고 있다. 현재 베트남은 대미 무역 흑자 3위, 한국은 8위를 기록 중이다. ‘한-베-미’ 경제 연결성 활용 전략 필요 한국과 베트남이 경제적으로 깊은 관계인 만큼 베트남의 성공은 우리 기업의 성공과 직결된다. 한국은 베트남의 최대 투자국이자, 한국 기업이 가장 많이 진출한 국가이기도 하다. 베트남 기획투자부 집계로는 1만여 개의 한국 기업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베트남 외국인 투자 누적액 1위 국가도 한국이다. 제조업 가치 사슬에서도 두 나라는 긴밀히 연결돼 있다. 한국에서 핵심 부품을 조달하고, 베트남에서 최종재를 생산해 미국 등 세계 시장에 수출하는 구조가 형성돼 있다. 대표적으로 삼성전자는 베트남 내에 6개 생산 공장과 연구·개발(R&D)센터를 운영하며, 베트남 전체 수출액의 14%를 차지할 정도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트럼프 위기를 헤쳐갈 답은 ‘한국-베트남-미국’ 간 경제적 상호 연결성에 있다. 이제 우리는 베트남의 외교 레버리지 지혜를 빌려 와야 할 때다. 베트남은 유연한 ‘대나무 외교’로 트럼프의 심기를 읽고, 국익을 도모하는 실용주의를 보여주고 있다. 베트남도 고조되는 통상 압박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 한국의 원산지 시스템 도입 등이 필요하다. 불확실성의 시대, 한국과 베트남이 서로 강점을 주고받는 전략적 협력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고영경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디지털통상 연구교수

2025-04-01

[이은혜의 마음 읽기] 믿음을 잃었는가

‘믿음을 잃었는가?’ 영화 ‘콘클라베’에서 한 추기경이 자신의 직분을 내려놓으려 하자 다른 추기경이 던진 질문이다. 묻는 이의 얼굴에는 염려가 서려 있으나 한편 이해한다는 표정도 있다. 종교는 인간에게 오래된 화두지만 내 지인들 삶에는 최근에야 고요히 스며들고 있다. 게다가 그들 대부분은 우연히 철학 공부를 하던 중 이런 내면의 끌림을 경험했다. 철학은 왜 공부할까? 근본적인 질문을 하기 위해서다. 잔가지를 떨어내고 중심을 향해 가다 보면 철학은 ‘존재’를 묻는 데까지 이른다. 2년여 전 하이데거를 읽을 때 가장 어려운 건 ‘존재’ 개념이었다.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난 나는 어릴 적부터 창조주이자 만유의 주재자인 신에 대한 관념을 형성했다. 자라면서는 신에게 저항했음에도 존재자의 바탕이 되는 존재는 계속 ‘신’으로 상상되었다. 주변의 지적에 따르면, 이것은 부모의 영향으로 신앙인이 된 자녀들에게 생기는 폐해였다. 철학과 종교는 삶 반성하는 틀 확신 해체, 자신 낮추는 데 도움 삶을 삶 자체로부터 인식해야 인문학 공부를 할 때 가장 쉬운 포지션은 무신론자가 되는 것이다. 근현대 학문과 언어 논리의 대부분이 그들의 편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철학과 문학은 신학적 주제를 계속 끌고 들어온다. 몇 달 전 한강과 카프카에 관한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강의를 들었는데, 그는 두 작가의 작품을 ‘신은 전지전능한가, 신은 선한가’라는 질문 속에서 해석하는 가운데 신학자 손호현의 『악의 이유들』을 읽어보라고 권했다. 태어나 한 번도 신자인 적 없던 내 지인은 철학 공부를 하면서 세례받을 결심을 했고(물론 인과관계는 아니다), 또 다른 문학인도 발길을 끊었던 교회를 다시 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빠져나올 출구를 찾았다면 그들은 그곳을 입구로 여겼다. 내가 거기서 척박한 시간을 보냈다면, 그들은 평안한 시간을 보낸다. 무신론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신앙인도 아닌 나는 주위 사람들이 하나둘 바뀌자 내가 모호함 속에서 깊이를 추구하기보다 지적으로 불성실한 상태임을 깨달았다. 빠져나온 자는 멈추고 거기서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치열했던 저항은 곧 안락한 무사유가 된다. 그러니 불신자는 신자보다 더 철저히 탐구할 필요가 있다. 그러지 않으면 본질상 무신론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무 생각 없는 자본주의자가 되기 쉽다. “양질의 무신론자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데니스 터너의 지적처럼 무신론자들은 신앙인의 신념 체계를 세밀히 들여다보지 않기에 많은 경우 비판할 자격이 없다. 더욱이 요즘은 무신론자들이 잡신을 믿는 추세가 더 강하고, 그것의 대부분은 물질적 욕망에 밀착해 있다. 이럴 때 철학은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이성뿐 아니라 몸과 감정에 대해서도 다시 사고하라고 촉구한다. 이것은 종교로의 귀의와는 상관없으며, 다만 이글턴이 강조하듯 “종교는 오만하게 거부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끈질기게 해독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때로 이성은 합리성과는 무관한 것들을 인정할 때라야 더 견고해진다. 철학과 종교는 비슷한 면이 많다. 우리 대부분은 경험에 의거해 직관대로 살아간다. 또한 직관을 멈추고 분석과 추론으로 경험을 재구성하기도 한다. 그 일은 종종 반성적이며 고통을 수반하는데 철학과 종교는 그 과정에서 틀이 되어준다. 게다가 철학은 ‘확신’의 모양새를 취하지 않는다. 어떤 이념이 시대를 주도할 때 철학자들은 늘 균열을 내는 역할을 자처했다. 니체는 사람을 미치도록 만드는 것은 의심이 아니라 ‘확실성’이라 했고, 아도르노는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을 해체하는 게 철학 본연의 임무라고 말했다. 믿음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신의 존재를 확신하기보다 믿기로 결심하고 헌신하는 것이다. 더 이상 젊지 않은 육신일 때 인간은 세계에 대해 이런 태도를 갖는 경향이 높다. 지식을 쌓아 대적하기보다는 자신을 낮추고 사심을 품지 않는 존재 방식을 고민한다. 그러한 시간 속에서 이성이 또렷함으로 차오를 때 서서히 신앙과 헌신도 결심하는 것이다. 철학과 종교는 둘 다 미래를 상정하면서 현재를 결단하는 ‘카이로스의 시간’ 속에서 무엇을 염려하고 보살필지 알아차린다. 종교인들도 칼날 위에 사는 것처럼 스스로를 돌아보고 가다듬겠지만, 철학자 김영민이 평생 수행자의 모습을 견지하는 것, 철학자 김상봉이 진보적 사유와 ‘영성’의 관계를 재점검하는 것 역시 철학과 종교가 밀착해 있음을 보여주는 한 사례일 것이다. 물론 여전히 종교는 비판받을 여지가 많다. 무신론자들이 기독교를 탐구하지 않는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너무 많은 자아, 너무 적은 타자를 지녔기 때문이다. 이럴 때 아마 철학이 종교에 반성의 계기를 줄 수 있을지 모른다. 특히 이 세상 너머 신의 공간은 잠시 접어두고 삶을 삶 자체에서부터 인식하려는 시도는, 비록 신을 전제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무신론적이지도 않다. 이런 태도가 종교를 구하든, 철학을 구하든, 자신을 구하든 할 것이다.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2025-04-01

[노트북을 열며] 탄핵은 야당의 힘만으로 오지 않는다

야당이 ‘윤석열 복귀 프로젝트’의 주범이란 낙인을 붙였지만, 사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은 12·3 비상계엄의 불법성을 입증한 장본인이다. 그는 지난해 12월 11일 국회 본회의에 출석해 “(계엄 전) 국무회의 자체가 많은 절차적·실체적 흠결을 가지고 있었다”고 단언했다. 이 발언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에 고스란히 담겼다. 30번째 탄핵 표적이 된 최상목 경제부총리는 한때 여권에서도 ‘배신자’ 소리를 들었다. 헌재를 ‘8인 체제’로 만들어 재판관 한두 명이 반대하더라도 대통령 파면이 가능한 구조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당시 국민의힘은 “탄핵 협박에 굴복했다”고 비난했다. 가족도 “세상이 어차피 여권 사람으로 보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느냐”며 만류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 부총리는 “하루라도 빨리 정치적 불확실성과 사회 갈등을 종식시켜야 한다”며 두 재판관을 임명했다. 찬탄과 반탄으로 갈라진 대한민국이지만, 지난 4개월을 돌이켜보면 불법계엄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진영을 넘어 노력한 사람들이 눈에 띈다. 한 대행과 최 부총리 이전엔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 표결에 참여한 국민의힘 의원 18명이 있었다. 한밤중 여의도로 뛰어와 비상계엄에 항의했던 시민들, 그리고 ‘인간 병기’라 불리는 707특수임무단 앞에서 카메라를 내려놓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민주당을 돕기 위해 그랬을까? 천만의 말씀.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대통령 탄핵은 야당의 힘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제도 취지가 그렇다. 소추 단계에서 국회의원 3분의 2가 동의해야 탄핵 절차가 개시된다. 헌법재판소에선 재판관 6명이 “대통령을 파면할 만큼 헌법·법률 위반이 중대하다”고 판단해야 한다. 정치학자들은 초당성과 대중성을 탄핵의 성공 요건으로 꼽는다. 당파를 초월하는 탄핵 연합이 폭넓게 꾸려져야 하고, 대규모 탄핵 찬성 시위도 특정 정당이 아닌 시민들이 이끄는 형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민주당은 탄핵의 문은 열어젖혔으나, 과정 관리엔 무능했다.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 툭하면 ‘내란 세력’ 운운하면서 탄핵 연합의 폭을 좁혔다. 특히 ‘5대 3 데드락설(設)’에 급발진해 줄탄핵이니 임기연장법이니 쏟아낸 건 보기 민망한 수준이었다. “정치는 정치인들이 하는 것 같지만 사실 국민이 하는 것이다. 역사와 국민을 믿는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즐겨 쓰는 말이다. 하지만 다수 민주당 의원들이 진짜로 국민을 믿을까. 전체 국민 대신 목소리 큰 지지층만 바라본 건 아닐까. 민주당의 조급증을 보며 다시 드는 의문이다. 오현석(oh.hyunseok1@joongang.co.kr)

2025-04-01

[로컬 프리즘] 탄핵 국면에 잊힌 국민의 권리

경기도 광역의원 4·2 재·보궐선거 유세 현장에서 만난 한 정당 관계자는 “이렇게 관심받지 못하는 선거는 처음”이라고 했다. 지난달 20일부터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됐지만, 유권자들의 반응이 시큰둥해서다. 명함을 돌리며 인사하는 후보자를 외면하거나, “시끄러우니 저리 가라”며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선거 트럭에 올라 큰소리로 지지를 호소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아 머쓱하게 차를 돌린 것도 여러 차례. ‘2일에 재·보궐선거가 열린다’는 것을 모르는 시민들도 부지기수였다. 유권자들의 무관심은 사전투표율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지난달 28~29일까지 진행된 재·보궐선거 사전투표의 투표율은 7.94%였다. 지난해 열린 10·16 재·보궐선거(8.98%)나 2023년 4·5 재·보궐선거(11.01%), 10·11 보궐선거(22.64%)보다 저조하다. 수도권의 한 후보 캠프 관계자는 “평일에 치러지는 재보궐 선거라 관심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것이라곤 생각도 못 했다”며 “이대로면 역대 최저 투표율을 기록할 수도 있다”고 답답해했다. 선거 캠프 관계자들은 무관심 원인을 “현 정치 상황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지난달 24일엔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의 탄핵소추안에 대한 헌법재판소 결정 선고가 있었다. 이틀 뒤인 26일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항소심 선고가 열렸다.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심판 선고기일(4일)이 언제 확정되느냐도 관심사였다. 한 후보자는 “선거 공약보다 탄핵 등 중앙 정치권 이슈를 묻는 유권자들이 더 많았다”고 한숨을 쉬었다. 여야 지도부가 총출동해 지지를 호소하던 모습도 이번 선거에선 찾아볼 수 없었다. 축구장 6만7562개 규모인 4만8239㏊의 산림을 태운 경남·경북 산불 피해로 지원 유세 일정이 속속 취소됐다. 선동 정치에 대한 혐오 등으로 투표를 포기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 유세 현장에서 만난 50대 여성은 “경제도 어렵고, 산불 등으로 뒤숭숭한데 광역·기초 의원 후보들까지 탄핵 기각·인용 등 정치 이슈를 언급하며 편가르기를 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투표를 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고 했다. 2일 치러지는 재·보궐선거는 부산교육감을 비롯해 서울 구로구청장, 충남 아산시장, 경북 김천시장, 경남 거제시장, 전남 담양군수 등 5곳에서 기초단체장을 선출한다. 광역의원 8명과 기초의원 9명도 뽑는다. 지역 발전 등 나의 삶에 가장 밀접하게 영향을 미치는 지역 일꾼을 뽑는 선거인 거다.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선생은 ‘참여하는 사람은 주인이요. 그렇지 않은 사람은 손님’이라고 했다. 투표가 국민의 권리인 동시에 의무이자, 정치권력에 대한 강력한 견제 수단이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최모란(choi.moran@joongang.co.kr)

2025-04-01

[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고요하지만 고요하지 않은

주말, 만 세 살 조카와 동물원에 다녀왔다. “기린 보고 싶어, 얼룩말 보고 싶어” 노래하던 조카는 눈앞에 등장한 상상 속 친구들에 흥분의 도가니. 판다 접견 중 후이바오를 나무 위에 남겨둔 채 엉금엉금 땅으로 내려오는 루이바오를 보며 “혼자 두고 가지 마” 안타까워하는 조카에, 어머 어머 감성천재인가봐, 늙은 고모는 삭신이 쑤시는 고통을 잊었다. 이런 조카와 같이 보고 싶은 작품이 애니메이션 ‘플로우’(사진)다. 라트비아의 긴츠 질발로디스 감독이 만든 이 애니의 주인공은 작은 고양이. 갑자기 닥친 홍수로 위기에 처한 고양이는 정처 없이 떠다니던 배에 올라타고, 같은 배에 탄 카피바라·여우원숭이·골든리트리버·뱀잡이수리와 함께 난관을 헤쳐간다는 이야기다. 이 영화엔 대사가 없다. 장대하게 펼쳐진 자연 풍광 위로 각 동물의 울음소리만 계속된다. 처음엔 이게 뭔가 싶지만 점차 동물들의 울음소리가 인간의 언어로 번역돼 들리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골든리트리버의 “왕왕”은 “어이, 괜찮아?”로, 고양이의 “냐옹”은 “와, 살아있었구나”, 여우원숭이의 “꽉꽉”은 “너 뭐야, 짜증 나”라는 식. 왜 이런 재앙이 닥쳤는지, 인간들은 다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다. 모든 걸 관객의 상상에 맡긴 채, 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연대하는 동물들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시끄러운 세상 속, 낯선 존재에 감정 이입해 울고 웃는 드문 경험. 올해 아카데미에서 장편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국내 개봉 13일 만에 누적 관객 수 11만명을 돌파하며 예상외의 흥행 기록을 쓰고 있다. 이영희(misquick@joongang.co.kr)

2025-04-01

[최훈의 심리만화경] 기후 변화 때문에 와인이 독해졌다고?

“네? 기후 변화요?” 와인바에서 요즘 나이가 들어서인지 예전에 맛있었던 포도주가 입맛에 안 맞게 됐다고 했더니, 실제로 요즘 포도주 맛이 조금 변했다는 말을 해 주었다. 전반적으로 도수가 높아지고 있다는데, 놀랍게도 그것이 기후 변화 때문이란다. 최근 온난화 현상 때문에 포도 재배지들의 평균 기온이 올라갔는데, 이 때문에 포도의 당도가 높아진 것이 그 이유라고 한다. 갑자기 기후 변화의 문제가 내 옆에 성큼 다가온 것 같은 기분에 소름이 돋았다. 기후 변화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이 새로운 사실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기후 변화는 나와 조금 거리가 있어 보였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심리적 거리와 연관지어 설명한다. 환경 변화 위기는 단기간의 문제가 아니라 천천히 진행되어 먼 훗날 발생하는, 시간적 거리가 먼 사건이고, 빙하가 있는 곳이나 숲이 우거진 해외의 어떤 곳에서나 벌어지는 공간적 거리가 먼 사건이며, 심각한 결과가 실제로 나타날 것 같지 않은 실재적 거리가 먼 사건으로, 나와 심리적 거리가 먼 것으로 지각된다. 심리적 거리가 먼 사건들에 대해서는 대상을 ‘왜?’의 차원에서 바라봐, 본질적인 목적·가치·이념 같은 핵심 의미에 집중하는 추상적인 사고를 하고, 반면에 수단·절차 등에 초점을 맞추는 구체적인 사고로 발전시키기 어렵다. 따라서 기후 변화 위기 인식을 실질적인 환경 보호 행위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기후 변화와 나의 심리적 거리를 좁힐 필요가 있다. 애주가인 내가 포도주를 통해 기후 변화를 체감했듯이,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근접화), 나와 관련된(개인화), 구체적(구체화)인 사례를 통해 설명되는 것이 효율적이다. 며칠 뒤면 식목일이다. 예전같이 휴일도 아니고 곳곳에서 나무 심기 행사를 하는 것도 아니어서 나무 심으러 갈 것 같진 않지만, 쓰레기 분리수거와 1회용품 사용 줄이기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나무를 심어보려 한다. 푸른 지구 포에버! 최훈 한림대 교수

2025-04-01

[레이 패리스의 마켓 나우] “필요시 추가조치”로 시장 달래는 중국정부

중국이 최근 경기둔화에 대응하기 위해 정책 방향을 바꾸었다. 내수 활성화로 올해 경제 성장률 목표 약 5%를 달성하기 위해 재정적자 비율을 역대 최고 수준인 국내총생산(GDP)의 4%로 상향 조정했다. 필요하면 적자율을 더 높인다는 입장이다. 소비촉진과 더불어 경기 부양책의 핵심은 부동산 시장 안정화다. 중앙정부는 지방정부가 특수채 발행으로 남아도는 주택을 사들이도록 허용했고 가격 상한선을 없애기로 했다. 또 부동산 시장 안정을 위해 전국 기금을 만들 계획이고, 토지 사용권과 도시 거주권도 개혁하려고 한다. 금융 정책 측면에서는 완화 기조가 지속될 전망이다. 중국 인민은행(PBoC)은 올해 은행 지급준비율(RRR)과 기준금리를 각각 약 0.5%포인트 내릴 가능성이 높다. 최근 소비자물가지수(CPI)가 13개월 만에 하락세로 전환되면서 디플레이션 우려가 커진 만큼, 추가적인 통화 완화 정책이 시행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정책 전환 이후 중국과 홍콩 증시는 흐름이 안정적이다. 특히 AI 주도로 인터넷·기술 부문이 강세를 보이며 시장을 주도하고 있으며, 경기순환주도 투자 기회로 떠오르고 있다. 시멘트·철강 부문은 인프라 투자 확대의 영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건설기계 부문은 장비 교체 수요 증가에 따른 수혜가 예상되며, 유제품 부문 역시 소비 회복과 원재료 가격 정상화에 힘입어 성장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 같은 흐름은 소비재 부문에서도 감지되고 있다. 전자상거래·헬스케어 등에서 신호가 긍정적이다. 일부 애널리스트는 보조금과 국유은행의 자본 확충을 위한 자금 조달 규모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중국 정부는 필요할 경우 추가적인 부양책을 시행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이번 부양책은 2008~2010년 금융위기 당시처럼 대규모 지원을 단행하는 방식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시행될 가능성이 크다. 향후 중국경제의 성장세를 결정짓는 변수 중 하나는 미·중 무역 관계다. 시장에서는 중국 해운업에 대한 미국의 추가적인 압박 정책과 미국 우선주의 정책 재검토 등 일련의 무역 이슈를 주목하고 있다. 이에 대한 중국의 대응책은 4월 말 정치국 회의에서 논의될 것으로 보이지만, 실질적인 정책 조정은 7월 이후에나 가능할 전망이다. 결국 중국은 소비촉진과 기술산업 육성을 핵심 전략으로 삼고 있으며, 필요하면 추가적인 부양책을 시행할 가능성이 크다. 다만 정책 기조가 점진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 만큼 시장의 기대와 온도 차가 있을 수 있다. 향후 몇 달 동안 중국 정부가 추가적인 조치를 내놓을지, 그리고 그것이 시장 기대를 충족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 될 것이다. 레이 패리스 이스트스프링 수석 이코노미스트

2025-04-01

[오경아의 행복한 가드닝] 멜버른 플라워쇼에서

마음이 불편했지만 산불 소식을 등지고 호주로 향했다. 호주 방문의 가장 큰 목적은 멜버른 플라워쇼다. 매년 3월 마지막 주, 국제플라워쇼가 개최되는데 남반구 최대 규모의 정원쇼다. 행사장은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칼톤가든으로 1800년대 박람회 개최를 위해 만들어진 건물이 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이 건물과 바깥 정원에서 플라워쇼가 열린다. 인파를 예상해 이른 아침부터 서둘렀다. 들어서자마자 너른 정원을 가득 채운 사업체들의 부스가 보였다. 각각의 부스에서는 정원에 필요한 도구·용품들이 눈길을 자극하고, 건물 안에서도 정원생활자를 유혹하는 행사가 이어졌다. 그간 수많은 국제 플라워쇼를 찾아다녔지만 이번 멜버른 플라워쇼는 매우 신선했다. 그 이유는 바로 플라워쇼의 주인공이 ‘호주 자생식물’이기 때문이었다. 북반구와 남반구의 식물은 매우 다르다. 고생대 때에는 아프리카·아메리카·호주가 하나의 판으로 붙어 있었다. 그래서 원래는 같았던 식물이지만 서로 멀어져 다른 기후에 적응하며 그 모습이 매우 달라지게 된다. 호주 식물의 특징은 ‘가뭄에 적응한 식물’이라는 점이다. 잎은 가늘고 좁아진 데다 가시가 생겨나고, 가죽처럼 빳빳하고 두툼해졌다. 몸통이 병 모양으로 부풀고, 키 낮은 덤불의 형태로도 바뀌었다. 물을 최소한으로 쓰고, 저장하기 위함이었다. 식물들에겐 가뭄만큼 치명적인 것도 없다. 죽음의 기후를 이겨내고 끝내 살아남은 호주의 식물들. 유칼립투스·캥거루의발톱·뱅크샤…. 낯설지만 아름다운 자생식물이 가득했다. 강해서 살아남고, 풍요로워 강해진 것이 아니라, 죽을 만큼 힘들게 살아내었기에 아름답고, 강해졌다. 플라워쇼에서 돌아오니 이제야 산불이 진화된 듯싶다. 산불은 꺼졌지만 그 고통이 얼마나 갈런지. 다시 또 살아남아 강하고 아름다워지자고 응원을 보낸다. 오경아 정원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2025-04-01

[삶의 뜨락에서] 삶은 달걀 껍데기를 벗기다

어제저녁 맷돌에서 3시간 꾸었다는 달걀 2개를 지인으로부터 받았다. 아침에 커피를 내리고 달걀 2개를 재봉틀 옆 공간에 놓고 앉아서 물 한 잔을 마셨다. 그 귀한 달걀을 챙겨주는 친구의 배려다.     달걀 속이 보통 달걀과 다르다. 하얀색이 아니고 누런색이다. 씹는 맛도 물컹하지 않고 존득존득하다. 달걀을 보면서 기다림으로 채운 수고와 정성이 느껴진다. 누군가의 수고로움이 배를 채우고 허기진 마음도 따뜻하게 한다.     달걀을 삶는 일은 기다림으로 시작된다. 삶은 달걀의 껍데기가 잘 벗겨지려면 냉장고에서 꺼낸 후 잠시 상온에 두어야 한다. 달걀 표면에 이슬이 송송 맺힐 즈음 끓는 물에 조심스럽게 집어넣고 7분쯤 끓이다가 찬물에 잠시 식힌 후 꺼내면 삶은 달걀이 완성된다.     아이들을 키우는 일도 기다림이 필요하다. 쉽게 자라는 듯 보이지만 어느 순간 방황하는 시기가 있다. 사춘기도 있고 힘들어할 때는 기다려야 한다. 인생이 쉽게 자라겠는가. 푹 삶는 기간도 있고 힘들게 지나야 하는 때도 있기 마련이다. 그럴 때 함께 기다려주는 부모가 되어야 함을 알게 된다.   톡톡 책상에 달걀을 두드린 후 껍데기를 벗기는데 오늘따라 잘 떨어지지 않는다. 출출한 배는 얼른 먹을 것을 달라며 보채건만 서두를수록 껍질은 조각이 난다. 껍질과 함께 흰 살점이 떨어진다. 달걀은 점점 곰보가 되어간다.     똑같은 조건으로 삶아도 하나씩은 있다. 달걀 모양을 지키기 위해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껍데기를 조각조각 벗긴다. 인내심이 필요하다.     조각난 달걀 껍데기를 하나씩 천천히 벗기는 동안 사람들과의 관계가 떠오른다. 껍데기가 잘 떨어지는 달걀처럼 손발이 척척 맞거나 생각이 통하는 이들은 만남부터 즐겁다. 만남이 기다려지고 헤어질 때도 아쉬움이 남는다. 함께 만들어 내는 결과물도 만족할 만하다. 하지만 토를 다는 이들은 만나기 전부터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그렇다고 무작정 관계를 내팽개치지는 못하기에 힘을 빼고 느릿느릿 관계를 이어가야 한다. 수고와 정성이 필요하다. 부족한 부분을 안아가야 할 때도 있고 손해를 봐야 할 때도 있다. 단순한 공감을 넘어 진지한 소통의 힘을 발휘해야 한다.   달걀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주식이고 값도 싸고 영양은 풍부하고 어디서나 쉽게 살 수 있었던 달걀이 아주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값이 천정부지다.     지난 주말 채소가게에 갔었는데 어느 중년 부인이 2팩 달걀을 카트에 넣었다가 1팩을 다시 내놓는 광경을 보았다. 오랫동안 양계장을 운영하는 남미 사람이 있다. 일 년에 한두 번 닭장 청소를 하는 사람에게 닭똥을 모아 달라고 부탁을 한다. 친절하게도 버리지 않고 쓰레기 비닐 백에 넣어 야무지게 묶어서 준다. 닭똥은 운반하기가 무겁고 냄새가 심하지만 채소밭에 뿌리면 깻잎이 손바닥보다 넓고 색깔이 진녹색으로 반짝반짝 빛이 난다. 닭을 그 자리에서 잡아 주기도 하고 달걀을 판매한다. 아침에 내놓으면 오후에는 없다. 주위 사람들이 바로 구매하기 때문이다.   변화무쌍한 날씨를 닮은 하루를 살아내기가 생각처럼 녹록지 않다. 인내심으로 천천히 달걀의 껍데기를 벗기듯 촘촘한 하루를 살아내야만 한다. 때론 기다림을 배우고 때론 수고스러움을 익힌다. 어쩌면 내 손에 쥐어지는 것보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 버리는 것들이 더 많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누군가의 허기진 영혼을 채워 주는 삶은 달걀이 된다면 마음이 행복해진다. 호주머니의 두둑함보다 마음의 풍요로움이 행복지수가 높다. 행복은 소박하고 가까이에 있다. 양주희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껍데기 달걀 달걀 껍데기 보통 달걀 달걀 표면

2025-03-31

[타임머신] 만우절 농담과 리처드 닉슨

1992년 4월 1일, 미국인들의 귀에 믿기 어려운 소식이 들려왔다. 74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탄핵 위기에 몰려 불명예 퇴진했던 리처드 닉슨(사진) 전 대통령이 라디오를 통해 대선 출마 선언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는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고, 다시 저지르지도 않을 것입니다.”   짐작하다시피 이것은 만우절 농담이었다. 미국의 공영 라디오 방송국 NPR이 닉슨 성대모사 배우를 출연시켜 청취자를 상대로 장난을 쳤다. 언론이 이래도 되는 걸까. 여기에는 나름의 역사와 전통이 있다. ‘걸리버 여행기’로 유명한 풍자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가 매년 제작·판매하던 연감에 ‘아이작 비커스태프’라는 허구의 유명 천문학자를 등장시키고 그가 죽을 날짜를 적어놓은 것이 시초로 여겨진다. 스위프트는 가짜 기일에 가짜 부고를 내보내고 심지어 이틀 후에는 팸플릿의 형태로 애도문을 발행하면서 날짜를 만우절과 딱 맞췄다.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만우절 장난 보도다.   매년 딱 하루, 거짓말이 허락되는 날. 대체 왜 이런 풍습이 존재하는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학자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장난과 농담의 순기능은 분명하다. ‘선을 넘는’ 농담은 우리 사회의 상식이 무엇인지, ‘넘으면 안 될 선’이 어디에 그어져 있는지, 웃음을 통해 가르쳐준다. 사실 보도를 자부심으로 여기는 정론지일수록 매년 심혈을 기울여 만우절 농담을 하는 이유다. 진짜 뉴스의 가치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일부러 가짜 뉴스를 만드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대통령이 느닷없이 비상계엄을 선포하더니, 거짓말로 유죄 판결이 났던 사안이 무죄가 되는 등 만우절 농담이 어도 웃기 힘든 뉴스가 쏟아지고 있다. 가짜 뉴스만 못한 진짜 뉴스는 이제 신물이 난다. 정치는 국민에게 시시한 농담과 소소한 일상을 돌려 달라. 노정태 / 작가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타임머신 만우절 리처드 만우절 농담 리처드 닉슨 만우절 장난

2025-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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