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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바루기] ‘효과’의 발음 [효꽈] 괜찮다

말할 때 누구보다 발음을 정확하게 해야 하는 직업이 아나운서다. 그러다 보니 아나운서는 사전에 나와 있는 표준발음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발음하도록 훈련하고 방송에서도 그대로 구현한다. 문제는 일반인이 보편적으로 발음하는 것과 다른 표준발음을 사전에 맞추어 하다 보니 듣는 사람이 불편한 경우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바로 ‘효과’다. 일반인은 대체로 [효꽈]라고 말하지만 아나운서들은 예외 없이 [효과]로 발음한다. 특히 TV에서 예전에 유도 경기를 중계할 때 아나운서가 “우리 선수가 효과[효과]를 하나 얻었습니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있었다. 유독 아나운서만 [효과]라고 하니 듣는 사람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이처럼 그동안 효과[효과] 발음이 일반인의 언어 생활과 동떨어진 것이어서 불만이 적지 않았다. 다행히 국립국어원은 이 발음을 [효꽈]로도 할 수 있다고 표준발음을 변경했다. 그러니까 이제 억지로 [효과]로 발음하지 않아도 된다.   ‘관건’과 ‘교과’도 마찬가지다. 이 역시 사전에는 [관건]과 [교과]로 발음한다고 돼 있었기 때문에 억지로 이렇게 발음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거북함이 따랐다. 국립국어원은 ‘효과’와 함께 이들 단어의 발음도 된소리를 인정해 사전에 추가했다. 앞으로는 아나운서든 일반인이든 이들 단어를 편리한 대로 [효꽈] [관껀] [교꽈]로 읽어도 된다. 우리말 바루기 발음 유도 경기 언어 생활 이들 단어

2024-12-23

[삶의 뜨락에서] 유연함의 단호함

며칠 전에 손녀딸(4살 반)을 봐주고 있었다. 아직 어리지만 손재주가 제법인 그 애와 팔찌와 목걸이를 만들고 있었는데 10대들 것이어서 재료의 양과 종류가 엄청나게 많았다. 디자인 샘플을 스마트폰으로 보아가며 차근차근 순서대로 엮어가던 중에 한 조각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완벽주의자인 내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찾고 있으니 “할머니 이걸로 대체하자. 그리고 I need a break, I'll be back”하며 자리를 뜬다. 4살 반짜리 여자아이의 현명한 결정과 행동에 고지식하고 유연성이 없는 이 할머니가 한 방 얻어맞았다.   일 년 전에 우리 온 가족 8명이 모였을 때가 떠올랐다. 쇼핑몰 근처에 있는 아이스크림 백화점(?)에 잠깐 들렀는데, 생전 처음 보는 아이스크림 종류와 토핑이 정말 1000가지도 넘는 듯했다. 어린이들을 유혹하기 좋게 사인과 벽화가 휘황찬란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긴 줄에 서서 한참 동안 기다린 후 손녀 차례가 되었다. 판매원이 “What would you like?”하고 묻자 손녀가 “I want a brownie”한다.   “Excuse me?”하고 판매원이 다시 물으니 “I want a brownie” 단호하게 말한다.     큰 아이스크림 그릇에 조그마한 피스의 brownie는 정말이지 빈약하고 우스꽝스러웠다. 그때 나도 배보다 눈이 고파 큰 용기에 여러 가지로 화려하게 장식된 아이스크림을 받아들고 그 크기에 압도당해 “할머니 것 좀 줄까?” 하니 “Nope” 하면서 단칼에 거절한다. 우리 가족은 물론 그 광경을 목격한 주위 사람들까지도 웃음을 참느라 진땀을 뺐다. 참 기특하고도 자신의 의사표시가 분명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한 살 때부터 데이케어에 다닌 그 애의 행동이 자신만의 개성인지 아니면 미국교육의 결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나이까지 살아온 나보다 유연함과 단호함을 갖춘 그 애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오늘 오전 요가 시간에 강사가 끝맺음으로 이런 말을 했다. “오늘 여러분은 몸의 유연성을 위해 여기에 왔지만 이에 못지않게 마음의 유연성도 중요합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 듯이 유연한 몸에는 유연한 마음이 깃듭니다.”   당연하고도 지당한 말이다. 바위는 세월과 풍파에 견디며 둥글어진다. 다시 말해 모난 부분이 곱게 다듬어진다. 우리 인간도 세월이 가면 둥글어지고 곱게 다듬어지는 걸까.     젊었을 때 많은 좌절과 번민으로 고통스러울 때 빨리 성숙한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른이 되면 당연히 지혜로워진다고 믿었다. 살아보니 지혜롭다는 말은 다양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지혜로운 어른이 되기 위한 요소 중에 유연성은 단연 으뜸이다. 교과서에 쓰여있는 대로 혹은 학교에서 배운 대로 밀고 나가면 현실과 많이 부딪히게 된다. 좌절과 실망이 심하면 절망하기도 한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현실감이 없는 불가능한 일에 매달려 발버둥치는 일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고 포기할 건 빨리 포기하는 것도 하나의 지혜다.   그렇다고 포기 후에 자책하고 자학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다. 일에는 항상 차선이 있는 법이다. 유연성을 다른 측면에서 살펴보면 지나친 자기 합리화로 빠질 경우도 있다.     이솝 우화엔 이런 내용이 있다. 높이 있는 포도를 따 먹을 수 없을 때 '저 포도는 분명 신맛이 날 거야'라고 포기하는.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도 않고 그것을 정당화시키는 자기 합리화도 바람직하지 않다. 최선을 다했는데도 이룰 수 없고 얻을 수 없고, 갈 수 없다면 목표를 바꾸거나 다른 길을 찾아 실현 가능한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사람의 능력은 제한되어 있고 우리 모두 원하는 것을 다 얻을 수는 없다. 누구나 좌절하고 견뎌야 하는 시간도 있게 마련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한번 선택한 삶을 끝까지 우기는 것이 아니라 도중에 잘못도 인정하고 이를 반복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사람이다. 세상에는 꿈에 도달하기 위한 수많은 길이 있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정명숙 / 시인삶의 뜨락에서 유연 단호 아이스크림 백화점 아이스크림 그릇 아이스크림 종류

2024-12-23

[이 아침에] 너 몇 살이니?

며칠 전 소그룹의 연말 모임을 하려고 일식 뷔페에서 모였다. 특별히 수요일엔 10% 시니어 디스카운트가 있어서 조금이라도 아끼려고 수요일로 잡았다. 그래봐야 2불 남짓 절약이지만, 연금 받는 은퇴자의 사는 방법으로 합당하다 생각했다.   나와 띠동갑 위인 팔순 넘으신 멋쟁이 선배님이 조금 늦게 오셨다. 입구에서 계산하지 않고 직진해서 우리들이 모여 앉은 곳으로 와서 함께 식사를 시작했다. 도우미 청년이 선배님의 밥값 계산서를 가져왔다. 일반 어른요금이 찍혔기에 시니어 할인으로 계산해 달라고 요청했다.   젊은 도우미가 선배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대뜸 “How old are you?” 하는 바람에 모두 웃었다.   블루진 상하의에 모자를 쓰셔서 젊어 보였나 보다. 그 원초적인 질문은 적어도 65세 이하로 보인다는 말과도 통하므로 다음 모임의 밥값은 선배님이 쏘시기로 했다. 기분 좋은 착각이 아닌가.   큰수술 후 머리가 하얗게 센 나는, 염색약이 신장 이식 환자에겐 안 좋다기에 흰머리로 산 지 오래다. 머리칼 때문에라도 나이보다 훨씬 많게 보는 이들이 있다.     가끔은 남편을 아들로 보니 난감하기도 하다. 옆에서 내 수발을 드는 남편을 보고 “착한 아드님을 두셨네요!” 하고 염장 지르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모르고 한 소리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남편이 젊어 보이는 편도 아니기에 억울하다. 그런 내게 “너 몇 살이니?” 했다면 골든벨이라도 울릴 작정인데 그럴 리 없는 현실이 아쉽다.   맥도널드의 커피를 사러 드라이브 스루로 갔더니 말 안 해도 시니어 값 받는다고 “대박!”이라며 좋아하던 때도 있었건만, 이젠 나이만큼만 봐줘도 만족하겠다.     생일이 12월이라 평생 억울하게 애먼 한 살을 더 먹었다. 올 봄 여고 동창들이 졸업 50주년 기념으로 한국에서 모인다며 별칭 칠순 합동잔치라고 했다. 그 칠순이란 말 때문에 심사가 뒤틀렸다. 나는 아직 칠순이 아니라고! 공연히 꼬장 부리느라 가기 싫었다. 심술이 살아있는 걸 보면 아직 젊은가 보다.   고희는 당나라 두보의 시에 나오는 ‘人生七十古來稀(인생 칠십 고래희)’의 줄임말이다. ‘삶에 있어 칠십도 드문 일이다’라는 뜻인데, 평균수명이 늘어난 작금엔 칠순을 넘겨 사는 이가 대부분이다.   공자는 논어 위정 편에서, 나이 일흔에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도 그것이 법도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회고한 데서 ‘종심소욕 불유구(從心所欲 不踰矩)’라고 한 것이 70세를 가리키는 말로 굳어졌다. 줄여서 종심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종심은 고희 및 칠순과 동의어이다.   나는 만으로 70세가 되는 해의 생일을 칠순으로 할 것이다. 전통적으로 70세 생일은 망팔(望八)이라고도 했다던데 이건 고희보다 더 싫다. 일 년 더 있다가 종심 하겠다! 쓰다 보니 나이 자랑했다. 이를 어째. 이정아 / 수필가이 아침에 종심소욕 불유구 종심소욕 부유구 밥값 계산서

2024-12-23

[음악으로 읽는 세상] 우연이 만들어낸 신화

알레그리의 ‘미제레레 메이’는 로마 시스티나 예배당에서 치르는 고난 주간 의식을 위해 작곡한 것이다. 다윗의 참회시를 바탕으로 만든 이 곡은 시스티나 예배당 밖에서는 들을 수 없었다. 교황이 악보의 반출을 금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곡을 듣기 위해 로마를 찾았다.   멘델스존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1831년, 그는 시스티나 예배당을 찾아 ‘미제레레 메이’를 들었다. 하지만 당시 그가 들은 것은 알레그리의 원곡을 4도 높여 부르는 것이었다. 이 곡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보이 소프라노가 청아한 목소리로 하늘 높이 ‘하이 C’를 부르는 대목이다. 마치 하늘에서 천사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이 효과 역시 원곡을 4도 높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누군가가 노래의 화려함을 더하기 위해 4도 높게 연주했는데, ‘우연히’ 멘델스존이 그것을 들은 것이다. 멘델스존은 자기가 들은 것을 그대로 악보에 옮겨 적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1880년, 글로브 음악사전이 발간되었다. 이 사전의 ‘미제레레 메이’를 소개하는 항목에 곡 설명과 함께 악보가 실렸는데, 중간에 어떤 실수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여하튼 멘델스존의 악보, 즉 원곡보다 4도 높은 악보가 들어가게 되었다. 그 후 이 악보는 알레그리의 ‘미제레레 메이’라는 이름으로 수없이 재생산되었다.   누군가 ‘우연히’ 4도 높여 노래했고, 그걸 ‘우연히’ 멘델스존이 들었으며, 음악사전의 편집자가 ‘우연히’ 이것을 오리지널 악보에 집어넣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런 몇 개의 ‘우연’이 모여 오늘날의 ‘미제레레 메이’가 되었다. 오리지널 악보가 어떤 것이었든, 우리는 멘델스존의 ‘하이 C’를 들으며 영혼에 충만한 희열을 느낀다. 그리하여 알레그리의 ‘미제레레 메이’는 불후의 명곡이 되었다. 우연이 또 다른 신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우연 신화 미제레레 메이 오리지널 악보 시스티나 예배당

2024-12-23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눈꽃 향기

시간을 촘촘히 채우며 / 나비가 꽃에 앉듯 사뿐이 내렸다 / 마른 갈대 숲에도, 앞집 지붕 위에도 / 우리집 벚나무 붉은 열매 위에도 / 잠들은 당신의 창가에도 소리없이 내렸다 / 어디에나 누구에든 / 소음과 함성과 절제된 어느 상황에도 / 공평히 내렸고 같은 무게로 쌓였다 // 하늘 가득 흰 꽃이 내렸다 / 사랑이 떠나고 미움이 가득한 세상 / 아무것도 모르는듯 흐트러짐 없이 내렸다 / 우리 모두는 제 길로 떠나 갔지만 / 같은듯 다른 생각으로 멀어졌지만 / 너에게도 나에게도 눈이 내렸다 / 거리에도 나무에도 소복이 쌓였다 / 들에도 언덕에도, 저 편백 나무 숲에도 / 하얀 하늘이 내려 앉았다 / 솜털같은 포근한 세상이 내렸다 // 눈을 뜨고 나갈 채비를 한다 / 먼길 떠나는 새들의 울음도 멈친 새벽 / 어둠은 채 가시지 않았는데 / 검은 때를 벗고 하얀세상으로 걸어야겠다 / 너의 향기 가득한 눈꽃 세상으로      창가에 앉아 바깥 세상을 바라 본다. 온 땅을 덮은 하얀 눈은 바라보는 나의 마음까지 하얗게 물들이고 있다. 하얀색은 무색이 아니다. 어느 곳에 칠해져도 하얀색은 새로운 여백을 창출해낸다. 답답한 풍경을 시원한 한폭의 수묵화로 바꾸어 놓는다. 색이 아니면서도 가장 강렬한 색이기도 하다. 나무를 온통 눈꽃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하고, 지붕의 색을 순식간에 하얗게 바꾸어놓아 온 동네를 눈세상으로 만들어 놓는다.     잠 못 이루는 당신의 창가에도 소복히 쌓인다. 눈을 비비고 일어나는 당신의 시야에서 색을 빼앗아가기도 한다. 온통 백색의 세상이다. 이렇듯 단번에 세상을 바꿔 놓는 것은 아마도 눈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떤 유기적인 힘도, 어떤 힘센 사람의 노력도, 첨단 장비의 효과도 아닌 그저 부드럽고 소리 없이 천천히 세상을 바꾸어 놓는 하얀 눈. 참으로 놀랍다. 패인 웅덩이를 덮어주기도하고, 꺾인 가지를 감싸기도 한다.   하얀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속의 미움도, 상처도 하얗게 차유되는 듯하다. 높낮이도 없고 밝고 어두움도 없는듯, 눈은 우리에게서 공평과 절제와 겸손을 말없이 가르치고 있다. 저기 서 있는 편백나무도 새롭게 흰꽃을 피웠다. 가지마다 소담히 피워낸 눈꽃은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에도 꽃을 피운다. 잠깐 피었다. 사라질 꽃이지만.그 꽃이 우리에게 주는 편안함과 고요함은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행복이 아닐 수 없다. 세상에서 찌든 불신과 허망한 묵은 때를 하얀 눈으로. 씻어야겠다. 하얀 눈꽃향기로 가득 채워야겠다.      어떤 말은 굴러 가는 말이 있고   어떤 말은 마음에 와 박히는 말이 있더라   어떤 말은 생각 위로 떠 다니는 말이 있고   어떤 말은 생각 속으로 잠겨오는 말이 있더라   어떤 말은 숨겨 지는 말이 있고   어떤 말은 꿈에서라도 들려지는 말이 있더라   셀 수 없는 말을 내뱉고 돌아오는 길   가슴에 남겨진 말 하나 거둘 수 없더라   창가에서 마주한 눈꽃세상   힘든 마음을 어루만져 주더라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눈꽃 향기 눈꽃 향기 눈꽃 세상 우리집 벚나무

2024-12-23

[사설] 충격적인 ‘NLL 북 공격 유도’ 메모, 철저히 진상 밝혀야

━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 수첩에 ‘북풍 시도’ 정황 ━ 예비역이 현역 조종…해이한 군 기강 민낯 노출 경찰 국가수사본부가 노상원 전 국군정보사령관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북한의 군사 도발을 유도하는 ‘북풍 공작’ 시도 정황이 포착됐다. 경찰은 노 전 사령관이 불명예제대 후 무속인으로 활동하던 경기도 안산시 점집에서 ‘NLL(북방한계선)에서 북의 공격을 유도’라는 메모가 적힌 수첩을 확보했다. 다만 실제 행동이 있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고 경찰은 설명했다. 한때 국군의 핵심 요직을 맡았던 예비역 장성에게서 이런 발상이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충격이다. 노 전 사령관은 육사 3년 선배인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을 도와 12·3 비상계엄 사태를 주도한 것으로 지목된 인물이다. 만일 계엄의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해 군사적 충돌을 유도하려 했다는 의혹이 사실이라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중범죄다. 외부 세력을 끌어들여 국가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행위는 외환죄로 최고 사형까지 선고받을 수 있다. 헌법 77조는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만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이번 비상계엄 주동자들도 북한의 도발이 없는 상황에선 계엄의 정당성을 찾기 어렵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김 전 장관은 북한의 오물풍선에 원점 타격으로 대응해 북한을 도발하려 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비상계엄 관련 수사가 속도를 내면서 흐트러진 군의 기강도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 예비역 장성이라곤 하나 현재는 엄연히 민간인인 노 전 사령관이 현직 정보사령관과 정보사 대령들을 햄버거집으로 불러 계엄을 모의했다는 증언은 너무나 비상식적이어서 할 말을 잃게 한다. 당시 모임에 참석했던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은 구속 상태로 수사를 받고 있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당일 김 전 장관을 만난 뒤 경기도 성남시 판교의 정보사 사무실에 전차부대장까지 대기하게 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이런 의혹이 사실이라면 유사시 적진에 침투하도록 고강도 훈련을 받은 특수부대원뿐 아니라 군 핵심 전력인 전차부대까지 민간인이 쥐락펴락했던 셈이다. 노 전 사령관의 수첩에선 ‘국회 봉쇄’와 ‘사살’ ‘정치인·언론인·종교인·노조(노동조합)·판사·공무원 등 수거 대상’이란 메모도 확인됐다. ‘수거’란 표현은 체포를 의미할 것이다. 일부 대상자의 실명도 수첩에 적혀 있었다고 한다. 아무리 계엄 상황이라도 뚜렷한 범죄 혐의가 없는 민간인을 체포해 신체의 자유를 박탈하는 건 반헌법적인 행위다. 특히 삼권분립의 한 축인 사법부 판사의 체포는 과거 군사정권 때도 없었던 발상이다. 노 전 사령관이 배후에서 현역 군인들을 시켜 정식 편제에도 없는 정보사 수사2단이란 조직을 꾸리고 선관위 서버를 확보하려 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경찰을 비롯한 수사기관은 철저한 수사로 각종 의혹의 진상을 낱낱이 밝히고 책임자를 엄벌해야 한다.

2024-12-23

[사설] 미 국방 정책차관에 핵우산 회의론자…한국 대책 있나

━ ‘북 비핵화 및 확장억제는 허구’라는 콜비 지명 ━ 리더십 부재 속 외교·안보‘퍼펙트 스톰’우려 내년 1월 취임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22일 부장관과 차관 등 국방부 후속 주요 인사를 지명했다. 이들 중 주목되는 인물은 대중국 강경파인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 지명자와 손발을 맞춰 동맹과의 국방 협력을 총괄할 엘브리지 콜비 정책차관이다. 트럼프 당선인은 콜비 지명자에 대해 “미국 우선주의 외교와 국방정책을 옹호하는 존경받는 인사”라며 “우리 군사력을 복원해 나의 ‘힘을 통한 평화’ 정책을 이행할 것”이라고 힘을 실었다. 미국 국방부에서 정책차관은 장관, 부장관에 이은 서열 3위의 정책 브레인으로, 행정부 임기 4년 동안 국방정책의 방향타를 제시하고 추동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어떤 면에서는 장관이나 부장관보다 세계 각국의 안보정책에 더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콜비 지명자의 머릿속에 담긴 트럼프 2기 국방정책은 한반도 안보 지형을 송두리째 바꿀 만한 충격적인 내용이다. 그는 지난 4월 중앙일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미국 안보 전략의 핵심은 중국 견제며, 주한미군은 이를 위해 존재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한국은 미국의 지원에 대한 기대를 줄이고 스스로 방어해야 한다고 했다. 또 북한 비핵화 회의론자인 그는 외교적으로 비핵화에만 전념하는 것은 허구이며, 한국은 독자적 핵무장 카드까지 테이블 위에 올려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특히 조 바이든 행정부가 공들여 온 정책도 ‘손절’할 태세다. 한국에 핵우산 제공을 다짐한 ‘워싱턴 선언’은 미국의 여러 도시와 300만 명 이상의 미국인을 북한의 보복 핵 공격 위협에 노출시키는 위험에 빠지게 했다며, 미국은 이 약속을 지킬 수 없다고 단언했다. 물론 후보 시절의 정책 방향이 대통령 취임 후 그대로 실천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전례를 볼 때 외교·안보 정책의 근간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점에서 미국발 안보 ‘퍼펙트 스톰’ 충격에 비상한 대비가 필요한 시점이란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한국은 현재 윤석열 대통령 탄핵 국면을 맞아 외교·안보 리더십이 실종된 상태다. 주요국 정상의 트럼프 줄 대기가 필사적인 상황에서 우리만 손발이 묶인 채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의 ‘트럼프 15분 면담’에 반색해야 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동맹을 낭만으로만 바라봐선 안 된다. 미국은 미국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한국은 한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게 현실이다.” 콜비 지명자의 이런 동맹관에 따르면 우리는 지금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한·미 동맹의 시대를 앞두고 있다. 과연 이런 시대를 헤쳐갈 우리의 대비책은 있나.

2024-12-23

[송호근의 세사필담] 죽음에 이르는 병

독재정권 시절에도 성탄절 이브는 설렜다. 감시 눈초리를 번뜩이던 정권도 이날만은 통행금지를 해제했다. 레스토랑과 다방에 시민들이 넘쳐났다. 전파사에서 울려 퍼지는 캐롤을 들으며 귀갓길을 재촉하는 사람들이 행여 눈발이라도 맞으면 정취가 살아났다. 궁핍했던 시절, 마음은 먼 미래를 향했다. 민주주의 37년째를 보내는 경제 대국, 성탄절 이브 발걸음은 무겁다. 마음에 통행금지 빗장이 걸렸다. 먼 미래는커녕 가까운 미래조차 가늠할 수 없다. 그 시대착오적 비상계엄령이 연말의 훈훈한 기운을 몰아냈고, 이때를 놓칠세라 득의만만한 거야(巨野)의 독오른 공세에 마음의 행로는 차단됐다. 깨어있는 시민들의 절규는 처절한데 한국의 민주주의는 사망을 고하는 중이다. 이미 토막 난 한국 정치, 봉합 불가다. 궁핍했던 시절 마음은 미래 향해 20년간 지속된 극단적 양극화로 한국의 민주주의는 마침내 사망 장례식 후에 새 생명이 태어날까 민주주의를 죽이는 최악의 질병이 ‘극단적 양극화’다. 이 질병은 2004년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탄생하면서 예고됐다. 정치권에 대거 진입한 586세대가 미래를 열어줄 것으로 믿었다. 이른바 ‘혁명세대’는 보수정치인들을 독재 하수인으로 낙인찍었고, 검찰·경찰·국정원 등 사찰기관을 민주주의의 적으로 간주했다. 시민단체가 정치권에 진입하면서 이념 전쟁에 불을 댕겼다. 정적(政敵)을 음해하고 고소·고발을 남발한 것은 여야 가릴 것이 없었다. 대통령은 최상의 표적이었다. 모두 감옥에 갔거나 수사 대상이 됐다. 정치 경쟁자를 겨냥한 이토록 잔인한 공격은 남미에서나 보는 풍경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 20년간 깊어져 한국 민주주의는 마침내 ‘죽었다’. 희망이 없다는 뜻이다. 대통령은 야당의 포화에 막혀 되는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계엄령이라는 극약 처방을 쓸 줄이야. 국회발 내란죄 혐의와 탄핵소추 앞에 국가기능은 마비됐다. 이 총체적 난국에 지휘권을 별안간 넘겨받은 야당 대표는 점령군처럼 의기양양한데, 참사의 근본 원인인 정치 양극화의 책임은 가려졌다. 스스로 정치적 생명을 끊은 대통령의 빈자리를 민주당 리더가 채운들 민주주의가 되살아날까. 윤석열 대통령이 민주당을 ‘광란의 춤’, ‘반국가세력’이라 지칭해 민주주의 룰을 망가뜨린 것처럼, 반민주·반민생·반민족 팻말로 내내 항거한 야당의 행보도 다를 바 없다. 양자 모두 민주주의 울타리를 부수고 뛰쳐나갔다. 탄핵 국회에서 민주주의 룰을 지키라는 국회의장의 호소는 그럴듯하게 들렸으나 그릇을 깬 것은 피차 마찬가지였다. 민주주의의 사망진단서를 쓴 레비츠키와 지블렛이 가장 우려하는 게 극단적 양극화다(『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대중선동가들의 출현을 방조하기 때문이다. 유력 정치인들이 상대 당의 맹공을 받아 끌어내려지면 바로 대중적 인기를 누리는 아웃사이더들이 등장한다. 정당정치의 초보자들이 들어선다. 국민의힘이 정권 유지를 위해 전직 검찰총장을 급히 영입했듯이, 성남시장과 경기지사를 지낸 야당 대표 역시 정당정치 경륜이 없는 포퓰리즘 아웃사이더다. 독재성향을 감춘 위험한 아웃사이더를 걸러내는 것이 국민이 부여한 정당의 책무라면, 여야 정당은 앞장서서 가장 중대한 책무를 버렸다. 민주당 586 세대원들이 팬덤 정치의 총아를 내세워 정권 재탈환에 나선 것은 예정된 코스였다. 민주 열망에 가득찬 시민들이 쌍심지를 켜고 있어도 이런 탈선 정당들이 활개를 치는 한 민주주의는 회생불가다. 민생과 민의(民意)? 윤석열과 국힘은 무력하기 짝이 없었는데 민주당도 민생과 민의를 진정 고뇌했다면, 탄핵 남발, 임명 거부, 예산 삭감, 외교 비방을 주야장천 감행했을까. 여당이 붕괴한 탄핵 시국에 야당은 국가 존망과 안위를 우려하기보다 여전히 유사포퓰리즘 입법안을 밀어붙이고 있다. 이게 국가안전보다 시급한 사안인지는 모르겠다. 양곡법, 농수산물 가격안정법, 농어업 재해대책법, 국회증언감정법 등등. 이런 입법안이 세금 낭비, 도덕적 해이, 기업인 군기 잡기 같은 부작용을 품고 있는지 검증조차 안 됐다. 문재인 정권 때 종합부동산세와 최저임금제가 초래한 심각한 부작용을 뼈저리게 경험했다. 거부권을 행사한 한덕수 권한대행은 즉각 탄핵 경고를 받았다. 탄핵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침몰시킬 가장 화력이 센 최종병기다. 정당이 독선에 능한 정치인을 걸러낸 것은 DJ정권까지다. 이후 정당들은 여과장치를 상실한 채 민생팔이 선동가들의 놀이터, 헌법 파괴 포크레인으로 변질했다. 헌법은 허점이 많은 최소한의 계약이다. 헌법 ‘내’에서 계엄령을 했다고 강변하고, 헌법 ‘내’에서 내란죄로 처벌한다고 압수수색을 강행하면, 갈팡질팡 피해자는 결국 국민이다. 헌법재판소에서 격투하는 정당들과 정치인들이 결국 우리의 미래를 짓밟았다고 할 수밖에. 상호비방으로 시작해 내란죄 공세로 끝나는 2024년 성탄절 이브의 종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시민들을 오랫동안 괴롭힌 사화(士禍)적 적개심이 결국 민주주의의 장송곡을 틀고 말았다. 장례식을 치르면 새 생명이 태어날까.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 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석좌교수

2024-12-23

[서경호의 시시각각] 제발 눈치 좀 챙기자고요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올해의 단어로 ‘가장 나쁜 자들의 지배’라는 의미인 ‘카키스토크라시(kakistocracy)’를 선정했다. ‘나쁜, 못된’이란 뜻의 그리스어 형용사 카코스(kakos)의 최상급 ‘카키스토(kakisto)’에 지배·통치를 뜻하는 ‘크라시(cracy)’를 결합한 조어다. 17세기 영국 내전 당시 왕당파가 국왕의 과도한 징세에 항의하는 의회파를 중우정치로 몰아 공격하기 위해 잠시 써먹은 정치용어다. 이후 존재감 없던 이 단어를 부활시킨 건 트럼프였다. 트럼프 행정부 1기 때 유행어가 됐다. 권한대행의 권한대행이라니… 정치 불확실성 더 키우진 말아야 민주당, 책임정당 면모 보여주길 이 뉴스를 보고 한국을 떠올린 이도 많았겠다. 물론 올해의 단어 선정은 12·3 비상계엄 이전인 지난달 말이었고, 트럼프를 겨냥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공정과 상식을 표방했던 윤석열 대통령이 불공정과 몰상식의 아이콘이 됐다. 비상계엄 발동도 기가 막힌데 대통령의 통치행위라고 강변하며 거리의 태극기 보수에 기대기까지 하니 더 기가 막힌다. 한때 국민 절반이 지지했던 대통령이 이렇게 막 나가도 되는가. 2021년에 나온 책 『카키스토크라시』(김명훈 저)의 부제는 ‘잡놈들이 지배하는 세상’이었다. 미국 얘기지만 남의 일 같지 않다.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이후 첫 주말이었던 지난 21일 광화문 일대는 응원봉과 태극기로 쪼개졌다. 광화문역 북쪽은 탄핵 촉구 집회가, 남쪽은 탄핵 반대 집회가 열렸다. 전광훈 목사 등이 주도한 탄핵 반대 집회도 대한문에서 동화면세점까지 차도를 메우며 세를 과시했다. 계엄에 찬성하고 비상계엄 수사와 탄핵에 반대하는 거친 주장은 영어 동시통역과 함께 주변에 쩌렁쩌렁 퍼졌다. 비상계엄 사태 이후 국회의 대통령 탄핵소추와 대통령 직무정지, 권한대행 체제라는 적법한 헌법 절차에 따라 나라가 관리되고 있다는 정부의 힘겨운 설명은 광화문 아스팔트 위에서 설 자리가 없었다. 보수 집회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건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다. 대통령은 법적·정치적 책임을 지겠다는 약속을 저버리고 ‘침대 축구’를 하고 있다. 보수 집회의 손팻말은 ‘탄핵 반대, 이재명 구속’이었다. 재판 리스크가 산적해 있음에도 탄핵 이후 집권 가능성이 커진 이 대표에 대한 보수의 반감이 만만치 않은 거다. 민주당이 탄핵을 서두르기 위해 의회 권력을 무리하게 휘두르면 태극기 보수의 위세를 더 키울 수 있다. 정국의 불확실성이 더 이상 커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특히 다수당인 민주당은 현 시국을 슬기롭게 관리하는 책임정당의 면모를 보여줘야 한다. 민주당은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이 24일까지 내란 특검법과 김건희 여사 특검법을 공포하지 않으면 탄핵을 추진하겠다고 위협했다. 권한대행의 권한대행이라니, 그런 혼란이 벌어져도 책임질 수 있는가. 대통령 권한대행의 탄핵 요건이 재적 과반인지, 재적 2/3 이상인지 명확하지 않은 건 우리 헌법이 설마 이런 막장 상황까지 염두에 두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노종면 민주당 원내대변인은 어제 “국무위원 5명을 탄핵하면 국무회의가 (안건을) 의결하지 못한다”며 “국무회의가 안 돌아가면 지금 올라가 있는 법안들은 자동 발효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무회의마저 무력화되면 국정은 어떻게 관리하겠다는 말인가. 객관성·책임성 결여를 정치의 두 가지 치명적 죄악이라고 했던 막스 베버의 경고가 떠오른다. 경제가 걱정이다. 경제는 정치와 분리돼 유능한 관료들이 잘 관리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대내외에 주는 것 말고 다른 뾰족한 수가 없다. 지금은 한국 경제를 지켜보는 외부의 시선에 신경써야 한다. 국회가 반도체특별법이나 전력망법 같은 경제 관련법은 통과시켜 정치 혼란에도 나라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한다. 특사외교를 가더라도 뭐라도 설명할 거리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펭귄 마스코트 ‘펭수’가 예전에 했던 말처럼, 제발 눈치 좀 챙기자. 서경호([email protected])

2024-12-23

오세훈 "대선후보들 개헌 약속하고, 대통령 임기는 3년으로" [이정민의 직격인터뷰]

서울시장 오세훈 - 세 번째 대통령 탄핵 소추 사태의 교훈 12·3 비상계엄 사태는 한국을 아노미로 몰아넣고 있다. 국가 리더십의 공백 속 여권은 ‘배신자’ 공방으로, 다시 광장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의 찬반 대결로 요동친다. 고장난 정치의 단면이다. 헌정사상 세 번째, 보수당으론 불과 8년 만의 대통령 탄핵소추. 이 사태로부터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할까. 여당의 중진 정치인이자 유력한 차기 후보로 꼽히는 오세훈 서울시장을 찾은 이유다. 계엄이 발령된 12월 3일 심야, 국민의힘이 당시 한동훈 지도부의 ‘계엄 반대’ 표명에도 상당수 의원의 동선이 엇갈리며 갈팡질팡할 때 오 시장은 ‘계엄 반대와 철회’를 요구했다. 광역 시장·지사 중에선 최초의 입장 표명이었다. 조기 대선 치른다면 개헌이 화두 돼야 협치 위해 내각 불신임-의회 해산권을 시장 중도 사퇴한다면 안타까운 일 당은 사죄하고 국민들과 함께 가야 오 시장은 “지금 탄핵이냐 아니냐, 누가 찬성했냐 반대했냐, 누구는 된다 안 된다 이런 얘기를 할 때가 아니다”며 “대통령제의 결정적인 단점을 극복할 수 있는 사회적 논의와 담론이 무르익을 때도 됐다. 5년, 10년 살고 말 나라가 아니지 않나”고 말했다. 그러면서 “만약 조기 대선이 치러진다면 화두는 개헌이 돼야 한다”며 “협치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국가 운영 시스템을 만드는 해법을 제시하는 후보가 등장해야 하고, 개헌을 위해 대통령 임기를 3년으로 단축하는 걸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야 대선 후보가 개헌을 공약으로 걸고 경쟁하고, 23대 총선이 치러지는 2028년에 대선을 함께 치르자는 주장이다. 이렇게 되면 앞으로 선출될 21대 대통령 임기 단축(5→3년)이 불가피해진다. 인터뷰는 22일 오후 서울시장 공관인 서울파트너스 하우스에서 2시간가량 진행됐다. 광역단체장 중 첫 ‘계엄 반대’ 표명 Q : 계엄 철회 요구 당시의 심경은. A : “바로 간부회의를 소집했다. 국가 비상사태 발생 시 서울시장이 수도통합방위 의장이 되기 때문에, 민심의 동요를 막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게 뭔지 챙기고 바로 참모들과 협의를 시작했다. 계엄포고문을 보면 장관·감사원장 등에 대한 탄핵 남발이나 예산안 일방 처리 등을 언급하면서 야당의 의회 폭거에 대해 대통령으로서 일종의 정당방위라는 취지를 담았는데, 비례성과 긴급성에 있어서 국민 상식에 비춰볼 때 과도하다는 판단을 지울 수가 없었다. 비유하자면, 빈손으로 위해를 가하는 자에 대해서 총을 쏴버리면 과잉 방어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민주당 의원 수사 검사를 탄핵하고, 정치적인 견해가 다른 사안을 감사한 감사원장을 탄핵하는 일들이 폭거이고 도발임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계엄을 선포할 정도로 시급하지도, 비례의 원칙에도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또 비상계엄이 국제신인도에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 빠르게 계엄 철회가 돼야 한다는 데 방점을 둔 것이다.” Q : 여당이 수습은커녕 혼란이 가중되는 모습이다. 갤럽 조사(20일 발표, 국민의힘 24%·민주당 48%)에선 당 지지율이 더블 스코어 차이가 났다. A : “정당은 어떤 경우에도 국민적 신뢰와 사랑을 잃어선 안 된다. 그런데 (국민 대다수가 찬성하는) 탄핵 소추에 대해 우리 당의 다수 국회의원이 동의하지 못한다는 입장을 보이는 데 대해 굉장히 우려한다. 헌재의 판단을 받아보자는 탄핵 소추와 탄핵받아 마땅하다고 보는 탄핵 찬성은 구분해야 한다. 계엄에 반대하는 것과 탄핵에 찬성하는 것도 별개의 문제고 논리적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이 단계에서 우리 당의 가장 바람직한 입장은 사전에 알았든 몰랐든 과도했던 계엄 선포에 대해서는 국민께 사과하는 것이다. 국민께 심려를 끼치고 경제에 악영향을 끼친 데 잘못을 인정하고 국민의 용서를 구해야 하는데 아직까지 그게 없는 게 참 안타깝다.” Q : 여당이 지금 해야 할 일은. A : “최대한 빠른 속도로 헌재의 심판이 이뤄지도록 협조해 불안한 경제 상황과 대외 신인도의 하락을 최소화해야 한다. 저는 고육책으로, 탄핵 소추가 이뤄지더라도 일치된 당론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부 의원들이 표결로 탄핵 소추에 이르게 되면 서로 반목·갈등하게 되고 심리적 분당 상태까지 갈 수도 있다고 염려했다.” 대통령 후보 외부 영입의 한계 Q : 8년의 시차를 두고 보수당 대통령의 탄핵 소추가 반복됐다. ‘배신자’ 프레임으로 싸우는 것도 박근혜 대통령 때하고 똑같다. A : “우리 당의 대선 후보 선출 과정을 돌이켜 볼 때라고 생각한다. 이회창 총재부터 박근혜·이명박·윤석열 대통령까지 영입 인사다. 우리 당은 외부 명망가, 외부에서 큰 성취를 이룬 분들을 대통령 후보로 영입하는 데 익숙하다. 당 내에서 사람을 키우는 데는 익숙지 않다. 많이 착각하고 있는데 박근혜 대통령도 보수 본류인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라는 카리스마를 가지고 영입된 거지 정치권에서 잔뼈가 굵은 분은 아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평생 기업에서 샐러리맨의 신화를 이룬 성취의 상징 자본이다. 그래도 국회의원, 서울시장 하고 대통령을 했기 때문에 영입 인사 치고는 비교적 탄탄한 과정을 거칠 기회가 있었지만, 영입 인사인 건 분명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다. 젊었을 때부터 정당에서 정치를 훈련받거나, 중국의 지도자 양성 시스템처럼 중앙과 지방을 오가고 정당과 행정부를 오가는 나선형 경험을 할 수 있었던 분들이 없었다. 민주당은 지방의원부터 차근차근 밟아 올라오고 당과 행정 경험, 중앙 정부나 대통령실 행정을 두루두루 나선형으로 돌면서 점차 인정받은 능력을 바탕으로 해서 좀 더 책임 있는 위치로 갈 수 있도록 한다. 정치권에서 훈련받고 시행착오를 겪게 되면 참신성은 떨어지고, 이것이 정치 혐오와 맞물리면서 단점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래서 명망가를 영입해 단점이 드러나기 전에 속도전으로 가는, 쉬운 길을 택하는 거다.” Q : 보수의 실패인가. A : “그렇다고 보수 정당, 보수의 가치가 궤멸된 건 아니다. 보수 정당의 인재 양성 시스템에 하자가 있었던 거다.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고 정권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는 이런 국가적인 불행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반성다운 반성이 없었다. 그래놓고 또 검증되지 않은, 정치라고는 처음 하는 분을 영입해 간판으로 내세워 성공했는데 이분이 민주 정치에 대한 내재화된 가치를 장착하기 전에 대통령직에 올랐다. 이번에 헌재에서 탄핵심판이 되면 또 뭔가에 쫓겨서 대선 국면으로 들어갈 텐데, 선거 승리가 유일한 목표가 되면 또 반성을 못 하게 될까 걱정이다.” Q : 어떻게 무너진 시스템을 복원할 수 있을까. A : “(야당이) 요건에도 맞지 않는 (장관 등) 탄핵을 남발하고, 그 남발되는 탄핵에 대항하기 위해서 요건에도 맞지 않는 계엄을 동원하는 국가적인 불행은 시스템이 불완전해서 생긴 결과다. 만약 내각 불신임 제도와 의회 해산 제도라는 시스템이 있었다면 이런 일은 안 생겼다고 본다. 야당의 폭주도 안 생겼고 대통령의 탄핵 폭주도, 계엄 폭주도 안 생겼을 수 있다. 문제 있으면 야당이 내각을 불신임하면 된다. 불신임을 받은 내각은 의회 해산권을 행사하고, 선거를 다시 하면 또 새로운 질서가 생겨난다.” Q : 그러려면 개헌이 불가피한데. A : “87년 개헌 때 대통령의 제왕적 권한 중에 몇 개를 덜어내 밸런스를 맞추면서 의회 해산권을 주고 내각 불신임권을 줬더라면 과연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윤 대통령도 나름 억울한 점이 있을 거다. 일 좀 하려는데 장관들 탄핵하고 자기 수사했다고 검사 탄핵하고 판사도 탄핵한다고 공갈치고…. 대통령 입장에선 ‘이게 나라냐’는 생각이 들 수 있다. 합법적인 시스템이 우리 헌법 질서 내에 있었다면 과연 계엄을 선택했을까. 의회 해산과 내각 불신임 제도는 서로 균형을 맞춰 협치를 불가피하게 만드는 제도다. 다음 대통령 누구를 뽑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시스템을 개선하는 게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조기 대선이 치러진다면 화두는 개헌이 돼야 한다. 모든 후보가 개헌을 약속하고 등장해야 된다고 본다.” 지방선거, 정권 중간평가 기회로 Q : ‘선 대선, 후 개헌’의 로드맵은. A : “충분한 시간을 갖고 개헌안을 마련해서 개헌안과 동시에 대선을 치르면 제일 바람직하다. 현실적으로 그게 안된다면 차선책으로 모든 후보가 개헌을 약속하는 거다. 내각 불신임-의회 해산권을 주고 대통령 권한은 최대한 감소시키는 개헌안을 통과시키는 걸 전제로 미래를 준비하고자 하는 후보들이 나섰으면 좋겠다. 아울러 임기를 3년으로 단축하는 것을 감수할 수 있는 후보가 나오는 게 바람직하다.” Q : 87년 체제의 종식이 될 수 있겠다. A : “또 하나는 지금 지방선거, 국회의원 총선거, 대통령 선거 일정이 계속 엇박자 나고 있다. 대통령을 4년 중임제로 바꾸면서 다음 총선(2028년)까지 3년만 하겠다고 공약하고 나온다면 다음 총선과 대선을 함께 할 수 있다. 그사이에 지방선거 때 중간평가 받고.” 오 시장의 임기는 2026년 6월이다. 만약 내년 2월 28일 이전에 사퇴하면 4월에 보궐선거를 해야 하지만, 5~6월 사퇴하면 보궐선거 없이 직무대행 체제가 된다. 출마 결심이 섰는지 물었다. 그는 “많은 국민들의 니즈가 있다면 고민을 해봐야 되겠지만, 지난번에도 시장직을 중도 사퇴해 부담스럽다. 시장직을 중도에 사퇴해야 하는 상황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라고 했다. 똑 부러지게 말은 안 했지만 “안타깝다”는 데 방점이 찍힌 답변으로 들렸다. 이정민([email protected])

2024-12-23

[리셋 코리아] 정의로 포장된 적대감의 악순환 사슬 끊어야

탄핵 이후의 길 ⑦ 대한민국 대통령의 ‘흑역사’는 언제나 끝날까. 많은 사람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윤석열 대통령을 비난하고 있고, 수사 기관은 윤 대통령과 이번 사태의 책임자들을 조사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번 사태의 근본 원인을 살펴 한국 정치를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필자는 이번 사태의 근본 원인을 인간의 마음, 즉 진영간의 적대감에서 찾아 보고자 한다. 권력 집중돼 대통령 흑역사 반복 진영끼리 적대시하면 정치 망쳐 신념 다른 국민·정당도 포용을 먼저 윤 대통령이 대선 후보가 되고 당선되는 과정을 복기해보자. 사실 이름 없는 검사 윤석열을 일약 스타로 만든 것은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민주당 정권이다. ‘보수 궤멸’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박근혜 정부의 적폐를 손봐준 검사 윤석열을 기특하게 여겨 검찰총장에 앉힌 것이다. 문 정부 인사들은 최순실 국정 농단을 단죄한 정의감을 강조하지만, 보수 세력에 대한 적개심도 동시에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물극필반(物極必反)이란 말처럼 세상 모든 것은 극단으로 가면 뒤집어지는 법이다. 진보 세력에 대한 원한을 갖고 권토중래하던 보수 세력은 문재인 정부를 친북 세력으로 몰아붙였다. 그러던 중에 문 대통령에게 반기를 든 윤석열 검찰총장을 ‘용병’으로 영입해 국민의힘 대선 후보로 세웠다. 지난 대선에서 윤 후보의 당선은 보수 세력의 적극적 지지도 있었지만, 좌파 정권에 대한 보수 세력의 적대감이 크게 작용했다고 본다. 당시 윤 후보는 이재명 후보를 0.73%포인트라는 미세한 차이로 신승했다. 많은 언론이 협치를 촉구했는데도 윤 대통령은 야당을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반국가·친북 세력으로 몰면서 적대시했다. 윤 대통령의 편향된 리더십은 결국 4·10 총선에서 민주당을 압도적 다수당으로 만들어 줬다. 그리고 민주당은 다수당 지위를 이용해 윤 정부 인사들에 대한 탄핵과 예산 삭감 등으로 윤 대통령을 압박했다. 그러자 윤 대통령은 이를 정치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비상계엄이란 상식 밖의 무리수를 뒀다. 즉, 야당에 대한 적개심이 윤 대통령의 온전한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고 결국 스스로를 무너뜨린 것이다. 물극필반의 원리가 이번에도 작용한 셈이다. 우리가 이번 사태에서 배울 점은 정치 진영 간의 지나친 적대감이 한국 정치를 망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해방 이후 좌우의 극한 정쟁, 그리고 6·25전쟁 등 역사적 뿌리가 깊다. 지금도 우리 사회 많은 갈등의 기저에 이념간의 적대감이 짙게 깔려있다. 많은 분이 한국 대통령 흑역사의 원인이 현행 대통령제에 있다고 비판하면서 차제에 대통령의 권력을 분산하는 개헌을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맞는 지적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제도를 만들어도 정적에 대한 적개심이란 심리적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국회 선진화법’이 통과되면 국회에서 물리적 폭력이 없어지고 정쟁이 완화될 거라 기대했다. 물론 과거와 같은 몸싸움은 없어졌지만, 여야의 심리적 대립은 오히려 더 깊어졌다. 적개심이란 모든 인간의 보편적 감정 중 하나다. 2차 세계대전의 참상에 대한 반성으로 만들어진 유네스코 헌장 서언에 ‘전쟁이 인간의 마음에서 시작되었듯이 평화를 세워야 할 첫째 방벽도 인간의 마음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말은 지금의 한국 정치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적개심은 종종 정의감으로 포장되는데 인간에 대한 사랑이 결여된 정의는 종종 폭력이 되고 사회를 더욱 피폐하게 만들 수 있다. 이번 탄핵 사태를 계기로 앞으로 한국 정치가 서로를 죽이는 적대적 정치에서 서로를 살리는 사랑의 정치로 전환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적대가 적대를 부르는 이 악순환을 이제는 끊어야 한다. 모든 인류가 한 형제임을 강조하는 ‘포콜라레(Focolare·벽난로) 운동’의 창시자 키아라 루빅(1920~2008)은 “정치는 사랑이다”라고 역설했다. 그는 “진정한 정치인은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국민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하며 자신과 신념이 다른 정당도 같은 형제로서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의 다음 대통령은 부디 정의를 구현하면서도 모든 국민과 정당을 품 안에 안을 수 있는 가슴 넓은 사람이기를 기대한다. 김성곤 일치를 위한 정치운동 한국본부 대표·전 국회 사무총장

2024-12-23

[박수련의 시선] 이재명 대표의 과속이 걱정스러운 이유

윤석열 대통령이 식어가는 한국 경제를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그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진 않았을 것이다. 말로는 ‘1호 영업사원’을 자처했지만, 그는 영업의 어려움을 알 리 없고 협치·협상의 힘도 끝내 깨닫지 못했다. 본인이 해소하겠다던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증시 저평가)를 더 부채질한 장본인이 됐다. 정치 입문 9개월 만에 대통령이 된 벼락스타가 판단력마저 잃자 드러낸 한계다. 윤석열의 붕괴로 가장 바빠진 이는 요즘 ‘여의도 대통령’으로 불린다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다. 그는 이미 대선 모드다. 사법리스크 외줄을 타며 대선 일정을 조금이라도 앞당겨보려는 그에 대해 요즘 “조급해 보인다”고 말하는 이가 많다. 계엄 사태 이후 감사원장·서울중앙지검장에 이어,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겁박하는 탄핵 드라이브 등등을 또 얘기하자는 건 아니다. 이 대표 두서 없는 정책 퍼레이드 제조업·일자리 위기 빅픽처 있나 준비 없다면 경제계 의견 경청을 조급함은 갑자기 전시에 나선 경제 정책의 빈곤에서 오히려 더 역력히 드러난다. 얼마 전 민주당은 월급쟁이에 불합리한 조세 제도를 손보겠다는 ‘월급방위대’를 출범했고, 개미투자자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며 ‘상법 개정안’을 추진하고 있다. 역시 ‘개인투자자를 위해’ 금융투자소득세를 폐지했고 가상자산 소득에 대한 과세도 유예하는 소득세법을 통과시켰다. 전대미문의 야당 단독 감액 예산안을 국회에서 통과(12월 10일)시킨지 5일만에 꺼낸 추경론 한 가운데 ‘이재명 시그니처’ 지역화폐(지역사랑상품권) 예산이 들어있다는 게 압권이다. 하나하나 논쟁적이지만 그 모두가 당장 표로 환산되길 기대하며 내놓은 전략 상품이라는 점은 명백해 보인다. 3년 전의 ‘기본’ 시리즈와 탈모 치료 건강보험 적용 같은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공약’도 다시 시작한단 얘기가 들린다. 하지만 2024년 12월 대한민국에서, 지지율 37%(한국갤럽) 정치인의 이같은 전시 행보는 지나치게 한가해 보인다. 우리를 둘러싼 안팎의 환경을 보자. 국내외에서 내년 한국의 1%대 성장을 예고하고 있다. 한국은 수출이 주춤하면 성장도 꺾이는 경제 구조인데, 내년 수출 증가율이 올해의 6분의 1(5개 기관 평균 1.5%)로 급감할 전망이다. 눈앞이 캄캄한 기업들은 내년 경영 계획도 못 세우고 있다. 무엇보다 중국이 거의 모든 제조업에서 한국을 위협하고, 미국마저 한국 기업의 첨단기술 공장을 유치하며 일자리를 두고 경쟁한다. 좋으나 싫으나 제조업은 일자리의 핵심이고, 대기업은 좋은 일자리의 핵심 공급처라는 사실을 미국은 오래전 다시 깨달았다. 한국 기업들이 인건비 비싸고 규제도 많은 한국에서 새로운 사업을 벌이기가 점점 어려운 것이다. 이렇듯 한국에서 기업이 떠나고, 한국 증시에서 투자자들이 떠나는 핵심 이유는 한국의 성장 잠재력에 대한 회의다. 스타트업이 자라기 척박한 한국에 대한 글로벌 모험자본의 관심도 지지부진하다. 국내 벤처캐피탈 시장에서 해외 자본의 비중은 2%도 안 된다(약 2000억원). 이 모든 진단이 향하는 질문은 하나다. 한국은 경제의 역동성을 되살릴 수 있는지, 즉 좋은 일자리를 창출하는 기업을 배출할 수 있느냐는 거다. 저성장의 위기에 가장 불안해하는 건 중도층이다. 3년 전 윤석열도 이재명도 싫었던 이들이다. 누구든 다시 이들의 마음을 잡고 싶다면 조급하게 나설 게 아니라, 일단 귀를 열고 산업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 후 달라진 경제 구조에 대한 해법을 빅픽처에 담아야 한다. 지난 19일 열린 상법개정안 토론회에서 이 대표는 중재자를 자처했지만 일각에선 ‘본회의 통과’를 당론으로 정한 마당에 하는 요식 행위 아니냐는 의구심이 여전하다. 민주당은 국회가 요구하면 기업 영업비밀이라도 무조건 국회에 제출해야 한다는 내용의 개정안(국회증언감정법)도 단독으로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이 대표는 먹사니즘 실용주의자라고 어필하기 전에 먹고사는 문제의 최전선에 있는 기업들이 처한 상황과 절박함에 귀를 기울어야 한다. 그래야 지정학적 위기를 동시에 감당해야 할 한국의 생존 전략도 보인다. 이런 요구는 이재명 대표의 지지율에 가려진 잠룡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대통령 탄핵으로 준비 없이 등장한 정권의 말로를 이미 경험했다. ‘소득주도성장(소주성)’을 주장하던 문재인 정부는 부동산 영끌족에게 빚더미와 회한만 남기고 퇴장했다. 좋은 일자리 없는 ‘소주성’이란 얼마나 허무한 것이며, 대책 없는 ‘탈원전’은 얼마나 소모적이었나. 8년 만에 또 대통령 탄핵소추를 경험 중인 한국은 이제 정말, 준비된 혹은 준비하려는 자세를 갖춘 리더가 필요하다. 박수련([email protected])

2024-12-23

[손인주의 퍼스펙티브] 폭력과 증오는 민주주의 위협, 사랑과 연대 강화하자

성탄절에 되돌아보는 한국 정치 크리스마스는 사랑과 평화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상징하는 날이다. 그러나 인류 역사에서는 이 상징적인 날에도 전쟁, 내란, 사회적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우리 역시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갑작스러운 비상계엄과 대통령 탄핵소추라는 암울한 사건을 겪었다. 현재 겪고 있는 비극적 상황을 치유하기 위해서 다시 과거 역사를 반추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의 아픈 경험은 역설적이게도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지혜의 보고이기 때문이다. 계엄과 대통령 탄핵에도 유혈 충돌 없어, 극단 세력 선동 경계해야 쓰레기도 정리하는 한국 시위 문화, 약탈·방화 빈번한 외국과 달라 정치 세대교체 위한 발상의 전환 필요, 젊은 신인에게도 기회 줘야 한국 사회 변화 절실…민주적 가치와 공동체 유대 강화 방안 찾기를 #1. 1935년 크리스마스 무렵 스페인은 극심한 사회적 갈등 속에 내전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의 파시스트 세력과 공산주의자들이 충돌하면서 폭력 사태를 빚었다. 대공황의 여파로 노동자와 농민의 불만이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에서는 파업과 시위가 이어졌고, 농촌 지역에서는 토지 개혁을 요구하는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이 사건들은 스페인 내전(1936~1939년)의 전조였다. #2. 1979년 12월 25일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 군을 투입해 하피줄라 아민 정권을 전복시켰다. 아민 정권은 1978년 4월 쿠데타로 집권한 친소(親蘇) 타라키 대통령을 살해하고 권력을 차지했다. 아프가니스탄은 이미 공산주의 정권과 전통 종교 세력 간의 갈등으로 내전에 휩싸여 있었다. 소련의 개입은 친소 정권을 유지하려는 의도였지만, 이는 이슬람 무장단체 무자헤딘 세력이 결집하는 계기가 됐다. 미국을 위시한 서방은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을 지원하면서 냉전 시기 미·소의 대리전이 본격화했다. 난민 수백만 명이 발생했고 민간인에 대한 참혹한 학살이 이어졌다. #3. 2018년 말 프랑스는 민주주의 선진국에서 보기 드문 대규모의 지속적인 시민 저항 운동인 ‘노란 조끼’ 시위로 요동쳤다. 이 시위는 에마뉘엘 마크롱 정부가 발표한 연료세 인상으로 인해 촉발됐지만, 세금 반대를 넘어 프랑스 중산층과 서민층의 깊은 불만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됐다. 크리스마스까지 시위가 지속하며 프랑스 전역, 특히 파리를 혼란에 빠뜨렸다. 관광객들이 몰리는 크리스마스 시즌에도 불구하고 파리의 상징적 거리인 샹젤리제와 개선문 주변은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로 전쟁터가 됐다. 주요 상점과 관광 명소는 폐쇄되거나 약탈을 당했다. 프랑스 경제에도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프랑스 정치와 사회의 불안정을 전 세계에 드러내는 상징적 장면이 되었다. 분노는 더 큰 폭력 가져올 뿐 성탄절 전후에 벌어진 일련의 역사적 비극에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본다. ‘분노와 폭력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분노는 더 큰 폭력을 가져올 뿐이었다. 세계는 불의에 대한 증오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었다. 성탄절 인류에게 던져진 구원에 대한 화두는 사랑이었다. 적에 대한 증오가 아닌 용서와 화해가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에 대해 생각해본다. 현재 한국 정치에서는 비상계엄령 선포, 그리고 국회에서의 대통령 탄핵소추안 통과라는 비극적 사건이 재연됐다. 노무현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에 이은 세 번째 탄핵소추다. 다른 선진 민주주의 국가에서 찾아보기 드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다행인 점은 정치적 혼란 상황에서도 유혈 충돌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정치적 혼란이 향후 좌우 극단 세력 사이에 폭력 사태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다른 민주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시민들의 일반적인 상식과 동떨어진 극단적인 정치 세력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들 양극단의 세력들이 정치적 혼란을 이용해 폭력을 자신들의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지나 않을지 우려된다. 폭력을 동원해 대중을 선동하고 정치적 적대 세력을 위협하면서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정치적으로 도구화된 폭력이 어렵게 일구어온 한국의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또 다른 위협일 수 있다는 점이다. 정치제도 개혁 진지하게 논의해야 현재 한국 정치는 과거 조선의 당쟁과 유사하다. 유교 이념을 둘러싼 대립과 갈등으로 사화·환국·옥사가 거듭해 나타났고 선비들이 죽임을 당했다. 현재 한국에서도 좌우 양극단의 이념적 정치 세력들이 각각 시위를 벌이고 있다. 정치적 혼란의 시기마다 이들 시위 기획자들의 모습을 봐왔다. 그런데도 아직 폭력 사태로 이어지지 않은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한국의 정치적 양극화 상황에서도 스페인이나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진 내전이나 집단적 광기, 유혈 폭력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은 작다. 집회 이후 쓰레기를 치우면서 질서를 지키는 한국의 시위 문화는 약탈과 방화가 벌어지는 프랑스식 시위와 다른 모습이다. 결국 한국은 극단적 대립이 폭력으로 이어지지 않는 ‘민주적 회복 탄력성’을 갖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세계가 한국 정치의 이런 특성에 주목한다. 한국은 헌법과 법률에 따라 다시 권력 이행기에 접어들었다. 민주적 회복 탄력성의 핵심은 정치적 분열과 혼란 속에서 오히려 피어나는 사랑과 연대다. 이제는 정치 제도 개혁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더욱 필요하다. 권력 분산과 민주주의 강화를 목표로 내각제, 이원집정제, 선거제 개편 등이 거론된다. ‘1987년 체제’로 불리는 현행 헌법은 한국 사회의 급속한 발전과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제도뿐만 아니라 사람에 대한 논의도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 제도는 사람의 선택과 행동에 영향을 주지만, 제도를 만들고 활용하는 것도 사람이고 악용·남용하는 것도 사람이다. 세상은 저절로 변하는 법이 없다. 반드시 뜻을 모은 사람들이 힘을 합쳐 노력할 때만 변하게 된다. 정치인의 권력 제로섬 게임 막아야 권력만 바라보는 정치인들은 극단적인 폭주와 대결의 정치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상대적 권력 우위 또는 권력 독점을 추구하다 보면 제로섬 게임이 되기 때문이다. 무실역행(務實力行, 참되고 실속있게 힘써 행동)하는 정치인들은 ‘너 죽고 나 살자’ 식의 극단적 분열의 정치에 매몰되지 않을 것이다. 일이 성사되기 위해선 상대방과의 설득과 타협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권력투쟁의 능력보다는 권력을 통해 실현할 비전과 정책이 중요하다. 중장기적으로는 숙의와 배려의 정치를 할 수 있는 사람을 키울 시민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이러한 인재양성과 더불어 정치인 세대교체의 방식과 조건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태어날 때부터 선진국이었던 세상을 체득하고 글로벌 경험이 풍부한 20~30대 정치 신인들이 성장할 기회를 적극적으로 제공해야 한다. 한국이 중진국이던 시절에 태어난 중년 중에서도 ‘글로벌 대한민국’ 운영에 기여할 소양과 전문성을 겸비한 인재들에게는 기존 정치권이 문호를 적극적으로 개방해야 한다. 이들이 기성 스타 정치인들과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는 룰과 무대를 만들어주자. ‘흑백요리사’처럼 멋진 도전과 감동적인 경연의 기회를 열어 주자. “나는 정치인이다”라는 프로정신과 자부심을 표출할 수 있는 대중 플랫폼을 구상해 보자. ‘작은 옳음’ 넘어 ‘큰 옳음’ 찾아가길 크리스마스는 반성과 사랑, 화해와 용서를 통해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는 시기다. 현재 한국은 정치적 갈등과 경제적 위기 속에서 변화가 절실하다. 기도와 명상을 통해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알아차림의 시간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내 생각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지하는 것이 성찰의 근본이자 변화의 시작이다. 마사 누스바움은 『정치적 감정: 왜 사랑이 정의에 중요한가(Political Emotions: Why Love Matters for Justice)』에서 사랑·공감·연민과 같은 감정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의를 증진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감정의 민주주의는 정치 제도와 지도자들이 이러한 감정을 어떻게 육성하여 민주적 가치와 공동체 유대를 강화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둔다. 각자의 ‘작은 옳음을 넘어 더 큰 옳음’을 함께 찾아가려 노력한다면 공동체 구성원들 간에 신뢰가 쌓일 수 있다. 그 신뢰를 바탕으로 더 나은 대한민국을 위한 재도약을 이룰 수 있기를 기원한다. 올해 성탄절이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는 한국에 사랑과 평화라는 메시지로 다가오길 기대한다. 한국 국민이 가진 연민·연대라는 감정으로 다시 하나가 되길 희망한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충만한 성탄절이 되길 소망한다. 손인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2024-12-23

[최준호의 사이언스&] “기술사업화는 시대정신…좋은 정책은 정권과 이념을 넘어선다”

김영식 NST 이사장 인터뷰 지난 8월 네이처가 한국의 아픈 곳을 제대로 건드렸다. 인덱스 특집호를 통해 “한국은 과학기술 선두국가보다 1인당 연구자 수가 많고 연구·개발(R&D)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지만, 비용 대비 효과는 놀라울 정도로 낮다”고 평가했다. 그간 국내총생산(GDP) 대비 R&D 투자 세계 1, 2위를 다툰다며, 기술이전 성과도 독일 프라운호퍼 연구소를 넘어선다고 자랑해온 한국 과학기술계를 세계 최고의 학술지가 정면으로 타격한 셈이었다. 애써 부정해온 팩트가 세상에 까발려졌기 때문일까. 정부에서도 R&D 성과를 위한 대수술을 선언했다. 지난 8월 취임한 유상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의 취임 일성이 ‘R&D의 기술사업화’였다. 유 장관은 특히 지난달 17일 기자회견에서 “R&D 연구성과가 사업화로 이어지는 ‘범정부 기술사업화 지원 정책’을 추진할 것”이라며 “(기술 산업화) 생태계를 만드는 일에 장관직을 한번 걸어볼까 생각한다”라고까지 표현했다. 지난달 4일 취임한 김영식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 이사장도 “R&D 완결성을 추구하는 출연연구기관으로 연구 패러다임 전환을 추진하겠다”며 한목소리를 냈다. NST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등 R&D의 당사자인 23개 정부 출연 과학기술 관련 연구소들을 통할하는 기관이다. 지난 18일 세종시 연구단지에 있는 NST를 찾아 김 이사장을 만났다. 김 이사장은 금오공대 교수와 총장 등을 역임했고, 지난 21대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에서 국회의원으로 활동한 과학기술인이다. “연구개발 완결성 추구하겠다” 장관·수석도 기술사업화 강조 “과학기술은 미래의 성장엔진” “기술사업화 중심 전략 부재했다” Q : 과기계에선 ‘한국이 왜 R&D 패러독스냐’는 주장도 있던데. A : “현재 우리나라가 단군 이래 이렇게 잘 살 수 있게 된 것은 과학기술계의 노력 덕분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네이처 인덱스가 지적한 대로 ‘한국의 R&D 성과가 예산 대비 놀라울 정도로 낮다’는 비판도 인식하고, 효율성 향상을 위한 해결책 마련에 힘써야 한다. R&D에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고도 기술사업화 성과로 이어지는 비율이 낮은 이유는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기술사업화 중심 전략의 부재, 둘째, 기술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 셋째, 사업화 시기의 적정성 부족이다.” Q : 왜 기술사업화인가. A : “기술사업화는 국가 경쟁력의 척도를 넘어 글로벌 기술 주도권 확보를 위한 필수적 선택이다. 지금까지는 연구를 위한 연구가 없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연구과제가 끝나고 나면 해당 과제의 연구성과가 사라지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그래서 ‘완결형 R&D’가 중요하다. 산업의 수요를 바탕으로 연구기획이 이뤄지고 수행되는 완결형 R&D는 기술이전이나 창업이라는 ‘엔딩 포인트’(Ending Point·마무리 지점)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연구과제가 연구실로, 연구실에서 스타트업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다. 연구개발 성과를 기술사업화로 연결해 대한민국의 혁신 성장과 글로벌 첨단기술 선도국가로 도약하는 데 앞장서겠다.” 기술사업화는 유상임 과기정통부 장관이 “직을 걸겠다”고 표현할 정도로 핵심사업이 됐다. 당장 지난달 19일 장관 직속 조직으로 부처 간 기술사업화 업무 조율 등을 위한 연구성과확산촉진과가 새로 출범했다. 대통령실도 거들었다. 박상욱 과학기술 수석은 지난달 24일 브리핑을 통해 “내년 중으로 기술사업화를 위한 전문 회사를 출범시킬 것”이라며 “산업부와 교육부·과기부·중기부 등 여러 부처로 분절화돼 있는 기술사업화 관련 지원정책을 관계부처 협의체 운영을 통해 조율하고 대통령실에서 직접 챙길 것”이라고 말했다. 민간이 수행 어려운 R&D에 집중해야 Q : 출연연 기술사업화의 롤모델을 꼽자면. A : “여러 가지가 있지만, KIST의 최근 기술사업화 성공사례로 소개된 큐어버스를 얘기하고 싶다. 정부와 출연연의 기술 사업화 지원 전략의 결과라는 점에서 정부·출연연 협력의 모범사례라 할 만하다.” 큐어버스는 KIST의 기술을 이전받은 일종의 연구소기업이다. 큐어버스의 치매 신약후보 물질 CV-01은 KIST 연구진이 2014년부터 개발한 차세대 치매치료제다. 지난달 16일 글로벌 제약사와 CV-01에 대한 총 3억7000만 달러(약 5364억원)의 기술이전 계약을 했다. 지금까지 출연연 기술수출 기록 중 최고 규모다. 바이오 기업 출신 연구자와 KIST 연구자 및 기술성과를 매칭해 기술창업을 지원하는 ‘바이오스타 사업’의 결과였다. Q : 과기 출연연의 존재 이유가 뭔가. A : “1960~80년대는 출연연이 국가 주도 산업화 시대의 핵심 동력이었다. 민간 연구역량이 미흡한 시대에 산업계에 필요한 응용기술의 개발부터 기술이전까지 전담했다. 이제는 우리 대기업이 세계적 수준의 R&D 역량을 보유하고 있고, 대학의 연구 역량도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지금의 출연연은 기후변화·양자기술 등 민간이 수행하기 어려운 기초원천 연구와 미래 혁신기술 개발에 집중해야 한다. 출연연을 출연연답게 하는 정체성을 확립하고 그에 따라 R&D의 완결성을 높여가야 한다.” 탄핵정국에서도 지켜야 할 과학기술 Q : 그 변화가 왜 잘 안 됐을까. A : “시대적 변화에 따라 미래를 예측하고 의사결정을 하는 과정에 과학기술인이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러지 못했다. 여기에 과제 수주 경쟁을 벌여야 하는 인센티브 제도, 대학교수보다 짧은 정년 등 낡은 시스템과 낮은 처우가 보다 뛰어난 출연연 연구자들을 불러들이는 데 부족함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Q : 기술사업화를 위한 구체적 정책이 나왔는데, 계엄과 탄핵 정국으로 동력 상실이 걱정된다. A : “굉장한 위기 상황이다. 그래도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부분이 과학기술이라 생각한다. 과학기술은 미래의 성장엔진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꺼지지 않아야 한다. 시대가 필요로 하는 좋은 정책은 정권과 이념을 초월할 것이라 믿는다. 지금은 뭉쳐야 할 때다.” ◆김영식=1959년 대구서 태어났다. 영남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아이오와대와 펜실베이니아주립대에서 각각 기계공학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원자력연구원 선임연구원과 금오공대 교수를 지냈다. 금오공대 총장(2013~2017)과 창업진흥원 이사장, 21대 국회의원 등을 역임했다. 최준호([email protected])

2024-12-23

[삶의 향기]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날을 기억하는가? 1979년 10월 26일 오후 7시 50분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들은 다음 날, 친한 친구 몇이 모여 학교 뒷골목의 선술집에 앉아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잔을 앞에 두고 김민기 작사·작곡의 노래를 들었던 것 같다. 대학교 4학년의 마지막 학기의 가을, 우리 중 누군가 오랜 부자유와 억압의 어둠을 깨고 드디어 빛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는데 적어도 슬픔의 의식을 치러야 한다고도 말했다. 그날 이후로도 매일 최루탄 냄새로 눈이 아프던 시절, 나는 ‘성난 군중’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렸다. 거리로 나간 젊은이들의 시위는 자유를 향한 일념과 사회 부조리에 대한 저항과 자기 안의 고독과 분노가 합쳐진 복합적인 감정의 표출이었다. 어쩌면 축제가 없던 시절, 그것은 고통의 축제라 불려 마땅했다. K드라마 인기 상상 못했던 일 전장의 북한군 이유 모른 채 죽어 부조리한 정치 체제 개혁 공감 대학원에 가서는 ‘브레히트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써서 퇴짜를 맞았다. “자네가 왜 이런 걸 쓰나?” 지도 교수님의 그 말이 참 오래 남았다. 내가 누군지 나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책 좀 읽는 학생들은 대부분 좌파 지식인의 책들에 경도되어 있었고, 노동이라는 단어는 아름다웠다. 누군가에게는 절실하기도, 혹은 겉멋이거나 유행이기도 했다. 언제부턴가 나는 인간의 불행보다는 행복을 그리는 쪽으로 걸어나갔다. 그 어느 쪽도 다른 쪽을 함께 품고 있으므로. 시간은 거짓말처럼 흘러, 10년 전 터키 여행 중 어느 적막한 시골의 기념품 가게에 들어가 한국에서 왔다 하니 여점원이 활짝 웃으며 한국말을 공부하는 중이라 했다. 노트를 보여주는데 ‘서랑해요’라고 씌어있어서 ‘사랑해요’라고 고쳐 주었다. 일행과 함께 자동차를 세워놓고 쉬면서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틀었다. 얼마 안 가 동네 젊은이들이 잔뜩 모여 음악에 맞춰 싸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후 쿠바에 가서도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한국 드라마가 인기인 걸 보고 깜짝 놀랐다. 김치를 ‘차이니즈’ 김치라고 라벨을 붙여 팔기도 하던 80년대 말, 맨해튼의 한인타운에서 설렁탕을 먹으며 서울의 포장마차를 그리워하던 유학생들은 한국 드라마를 잔뜩 빌려다 보며 그 시절의 고독을 달랬다. 전 세계가 한국 드라마에 매료된 세상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 하던 시절이었다. 미래의 시간 2024년까지도 세상에 전쟁이라는 단어가 계속 존재하리라는 것도 몰랐다. 타인의 불운을 구경하길 즐기는 사람들을 위한 전쟁 관광 상품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우크라이나 전쟁터를 구경하는 상품인데, 주요 고객은 미국인과 유럽인이라 한다. 러시아가 민간인을 학살한 폐허의 현장을 보여주는 그 값은 한국 돈으로 22만원에서 37만원 사이이며 전선에 가까울수록 비싸져 최고 483만원에 이른다. 그 허무한 전쟁에 투입된 북한의 젊은이들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억울하게 죽어간다. 이쯤 되면 세상은 어디나 ‘오징어 게임’ 중이다. 미국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을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대통령 임기 4년 동안 배를 타고 40개국을 여행하는 장기 크루즈 패키지 상품이 출시되었다. 1년짜리 상품의 이름은 ‘현실 도피’, 2년짜리는 ‘중간 선거’, 3년짜리엔 ‘집만 빼고 어디든’, 가장 긴 4년짜리의 이름은 ‘도약’이다. 다음 대선이 이루어지는 2028년 11월 이후 미국으로 돌아오는 코스이다. 전체주의 국가가 아니라면 어디나 분열과 반목으로 점철된 세상에 증오를 여행으로 치유하는 이렇게 세련된 관광 상품이라니 놀랍지 않은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영화 제목을 여기에 소환한다. 지금 여기, 대한민국의 계엄은 45년 전의 그때와는 분명히 다른 얘기다. 그걸 같은 선상에 두는 사람이 있다면, 시대는 저만치 앞서가는데 의식은 그때 그대로 머물러있는 거다. 오래 살다 보니 막다른 골목에 몰린 돈키호테가 힘센 거대집단을 향해 계엄을 선포하는 건 처음 보았다. 계엄이란 대체로 힘센 권력이 힘없는 대중을 향한 것이 아니던가? 돈키호테는 풍차와 싸우는 중인데, 사람들은 서로 편을 갈라 서로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탄핵을 찬성하거나 반대한다. 이 낯익은 풍경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 자살·탄핵·실패를 전제로 한 계엄 등으로, 우리 대통령들의 불행한 운명이 되풀이되지 않으려면 정치 보복으로 점철된 이 나라의 부조리한 정치 체제를 전면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견에 100% 공감한다. 대통령이 탄핵 된 날 페이스북을 열다가 들뜬 축제 분위기 속에서 “탄핵은 기쁜 일이 아니라 슬픈 일이다”라는 누군가의 문장을 발견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문득 슬픈 생각이 들었다. 황주리 화가

2024-12-23

[글로벌 아이] 고요한 밤 거룩한 밤, 계엄에 묻힌 밤

몇해 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지낼 때 일이다. 때는 음산했던 코로나 시절. 민주당 소속 로이 쿠퍼 주지사는 12월이 되자 새벽 외출을 전면 금지하는 조처를 내렸다. 코로나 사태의 심각성을 아는 어른들은 군말 없이 따랐지만, 놀란 건 순진한 아이들이었다. “통행금지가 되면 크리스마스에 산타 할아버지는 어떡하나요?” 쿠퍼 주지사는 며칠 뒤 활짝 웃으며 공식 브리핑을 했다. “어린이 여러분, 걱정하지 마세요. 산타클로스는 통행금지 예외입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어수선한 한국의 정치 풍경을 바라보면서 노스캐롤라이나에서의 추억 한 장면이 떠올랐다. 아이들의 순수한 염려마저 세심히 돌아봤던 주지사. 정치에도 마음이 있다면 바로 상대를 향한 배려와 공감이 그 근간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정치의 마음을 상대를 겨냥한 증오와 환멸 정도로 여긴 어떤 통치자는 폭력으로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계엄으로 직행하는 무모함을 자행했다. 멀리 워싱턴에서 계엄 사태를 지켜보면서 윤 대통령의 마음 한구석에 트럼프가 ‘롤 모델’마냥 자리 잡은 건 아닌지 의심해보기도 했다. 부정선거 음모론에 빠져 의사당 폭동을 부추긴 4년 전의 그 트럼프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몇몇 대목에서 두 사람은 겹쳐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윤 대통령이 계엄군 투입을 ‘경고용’이라며 감싼 것처럼 트럼프도 의사당 폭동을 ‘사랑의 날’이라며 두둔했다. 끝내 좌절되긴 했지만 트럼프 역시 재임 중 시위대를 향해 군을 동원하려 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으니 바로 음주 문제다. 윤 대통령이 오랜 폭음으로 판단력이 흐려진 것 아니냔 우려는 취임 이후 꾸준히 제기됐다. 그러나 술을 일절 입에 대지 않는 트럼프는 적어도 알코올이 문제가 돼 국정을 그르치는 일은 없었다. 때때로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하지만, 계엄을 선포하는 무모함까지는 이르지 않은 것도 금주와 같은 최소한의 절제를 아는 삶의 태도 때문인지도 모른다. 예수의 탄생을 기리는 크리스마스 이브. 대한민국의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계엄에 묻힌 밤’으로 뒤엎어버린 애주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시 한 토막이 있다. ‘…/코가 석 자나 빠진 루돌프들이 이끌고 가는/세상 참, 떼꾼한 크리스마스 또 돌아왔네(정끝별, ‘크리스마스 또 돌아왔네’ 중에서)’ ‘코가 석 자나 빠진’ 최고 권력자가 끝내 탄핵 심판대에 오르게 된 2024년의 12월. ‘세상 참, 떼꾼한 크리스마스’가 가엾게도 다가오고 있다. 정강현([email protected])

2024-12-23

[류태형의 음악회 가는 길] 탄생 150주년, ‘시계장인’ 라벨

2025년에는 세계 곳곳에서 작곡가 모리스 라벨의 음악이 많이 연주될 듯하다. 1875년 3월 7일 프랑스 바스피레네의 시부르에서 태어난 라벨의 탄생 150주년이기 때문이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라벨 피아노곡 전곡을 녹음해 작곡가를 기념할 준비를 마쳤다. 라벨은 13세 연상인 클로드 드뷔시와 함께 ‘인상주의 음악’ 작곡가로 분류된다. 음색과 화성으로 찰나의 매혹적인 울림을 만들거나 암시하는 분위기를 중시했다. 같이 묶이지만 드뷔시와 라벨은 대조적이다. 드뷔시 음악이 점묘화같이 몽환적이고 모호하다면, 라벨의 음악은 또렷하고 정확하다. 스트라빈스키가 “스위스 시계장인 같다”고 표현한 대로다. 라벨의 관현악곡 ‘볼레로’를 들어보면 그 표현이 실감 난다. 스페인 춤곡 볼레로 리듬 위에 단 두 개의 주제만을 반복한다. 악기들이 차례차례 가세하고 타악기 주자는 스네어드럼을 시계 초침처럼 쉬지 않고 연주한다. 라벨은 ‘관현악의 마술사’라고 불렸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등 자신의 피아노곡을 관현악으로 편곡했다. 무소륵스키 ‘전람회의 그림’의 오케스트라 버전 중에서도 라벨의 편곡이 가장 많이 연주된다. 고전음악의 전통을 중시한 라벨은 온고지신의 작곡가이기도 했다. ‘물의 유희’와 ‘밤의 가스파르’는 프란츠 리스트를 계승했고, ‘우아하고 감상적인 왈츠’는 슈베르트의 영향을 받았다. ‘라 발스’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에게 바쳤다. 피아노 협주곡 G장조의 경쾌한 화려함은 모차르트와 일맥상통한다. 민족 정서를 중시한 라벨은 ‘스페인 광시곡’, ‘어릿광대의 아침노래’, 오페라 ‘스페인의 한때’ 등 바스크인이었던 어머니의 나라 스페인을 명시한 작품들을 썼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벨라스케스가 그린 스페인 왕녀 마르가리타를 염두에 뒀다. 1928년 라벨이 북미를 순회연주할 때 미국 작곡가들에게 “유럽을 모방할 게 아니라 고유의 재즈와 블루스를 의식한 작품을 써야 한다”고 충고했다. 조지 거슈윈이 파리에서 라벨을 만나 가르침을 청했을 때도 “당신은 이미 일류 거슈윈이지 않은가? 왜 2류 라벨이 되려 하는가?”라며 거절했다. 거슈윈은 미국적인 음악을 계속 썼고, 라벨도 피아노 협주곡과 바이올린 소나타 등에 재즈와 블루스의 요소를 도입했다. 라벨의 음악에 대해 당대부터 ‘인공적’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꾸준히 청중을 모으는 그의 음악은 한 땀 한 땀 공들인 장인의 손길에 가깝다. 라벨은 “예술가는 좋은 노동자여야 한다. 기술적인 완성도를 목표로 무한히 시도할 수 있다”고 말했다. 라벨의 장인정신에는 이렇게 정직하게 어제보다 나은 하루를 만들어가는 건강함이 있다. 매끄러운 마감 안에 생의 긍정이 따스하게 깃들인 라벨의 음악을 들을 시간이다. 류태형 대원문화재단·전문위원

2024-12-23

[디지털 세상 읽기] AI 콘텐트의 경제학

최근 한 시청자가 넷플릭스에서 드라마를 보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 드라마(‘라팔마’)는 노르웨이에서 제작했기 때문에 배우들도 노르웨이어를 사용한다. 다양한 문화권에서 콘텐트를 수급하는 넷플릭스는 영화·드라마에 자막은 물론, 더빙도 다양한 언어로 제공한다. 그런데 시청자가 노르웨이어 영상을 영어 더빙으로 바꾸자, 말하는 배우의 입 모양이 바뀌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외화를 더빙할 경우 말소리와 입이 따로 노는 문제가 있는데, 넷플릭스가 AI를 사용해 입의 움직임을 각 언어에 맞게 수정한 것이다. 어색함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차라리 자막을 보겠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AI를 사용해 입 모양을 바꾼 드라마, 영화는 빠르게 늘어나는 추세다. 여기에 최근 개발된 음성 변조 AI를 사용하면 성우를 사용하지 않고도 원작 배우의 목소리를 가져다가 다른 언어를 사용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페이스북을 비롯한 소셜미디어에는 이미지 생성 AI가 만든 콘텐트가 엄청나게 많은 ‘좋아요’를 받고 있다. 인기 여행지나 예쁜 인테리어, 건축 등을 소개하는 페이스북 페이지들은 구독자들이 과거에 좋아했던 사진들을 골라서 비슷한 이미지를 생성해서 게재하는데, 이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물론 그 이미지들이 AI가 만든 것인 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AI를 통한 콘텐트 제작이 인기 있는 이유는 두 가지다. 큰 비용을 사용하지 않고 대량의 콘텐트를 만들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사용자마다 조금씩 다른 취향을 정확하게 공략하는 맞춤형 콘텐트를 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넷플릭스가 다양한 언어에 맞춰 입 모양을 바꾸는 것도, 여행 페이스북 페이지가 가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도 결국 같은 이유에서다. 모든 것이 그렇듯, 내 취향에 딱 맞는데 값도 싸다면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박상현 오터레터 발행인

2024-12-23

[김겨울의 행복한 북카페]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이브. 세상을 구원한다고 전해진 존재가 세상에 내려오는 밤. 종교를 믿지는 않지만, 우리의 구원은 어디에 있는지 매년 묻게 된다. 신이 우리를 구원하는가? 우리가 우리를 구원하는가? 신이 우리에게 우리를 구원하도록 등을 밀어주는가?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은 자신과 이웃을 구하도록 변화한 한 인간에 대한 불멸의 고전이다. 그리고 크리스마스에는, 거기에 모든 것이 있다고 믿게 된다.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2023)은 아주 평범한 사람의 안에서 ‘가장 좋은 부분이 빛을 내며 밖으로 나오는’ 이야기다. 1985년 아일랜드, 딸 다섯을 둔 가장 빌 펄롱은 석탄 배달을 하며 생계를 꾸리고 있다. 많은 사람이 해고되거나 외국으로 떠나는 혹독한 겨울이지만 펄롱은 이 시기를 잘 버텨서 딸들을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좋은 학교에 보내리라 다짐한다. 그리고 세탁소가 있다. 수녀원에서 관리하는 세탁소에 대한 소문은 무성하다. 어떤 여성들이 거기 갇혀 있고, 아이를 빼앗기고 있다. 하지만 마을에서 절대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수녀원에 반기를 들 마을 사람은 없다. 그리고 펄롱은 석탄 배달을 하다 세탁소의 한 소녀와 마주친다. 키건은 극적인 천지개벽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다. 대신 펄롱의 내면, 지극히 평범하고 또한 선한 한 인간의 내면이 작은 일상의 불의 앞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침착하게 바라본다. 짧은 소설의 한 줄 한 줄은 작고 단단한 구원으로 나아간다. 자신 안의 양심에 귀를 기울이는 일, 그리고 이어질 고난을 알면서도 마침내 손을 내미는 일은 스크루지 영감 이래로 우리에게 영원히 전해 내려오는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다. 신을 믿는 이도, 믿지 않는 이도 행할 수 있는 기적.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작은, 그래서 가장 큰 구원을 행할 수 있는 날이 다가왔다. 빛은 춤을 추며 내려온다. 손을 내밀 차례다. 김겨울 작가·북 유튜버

2024-12-23

[민주영의 마켓 나우] 풍요로운 노후 맞으려면 플라이휠을 돌려라

플라이휠의 첫 회전에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한번 회전을 시작하면 관성이 회전력을 유지한다. ‘플라이휠 효과’는 아마존 창립자 제프 베이조스가 제시한 순환 성장모델이다. 낮은 가격에 제품을 제공하면 수요가 증가하고, 이는 곧 새로운 판매자의 진입을 부른다. 생산 투입 규모가 증가함에 따라 규모의 경제가 작용해 생산 비용이 절감되면, 이는 다시 새로운 수요를 창출한다. 플라이휠은 세계적인 경영컨설턴트인 짐 콜린스의 『플라이휠을 돌려라』에도 비유를 위해 등장한다. 조직이 거대한 추진력을 확보할 때에는 플라이휠 돌리기와 마찬가지로 단번에 빠른 성과를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대신 지속적이고 일관된 노력이 점진적으로 누적되어야 한다. 풍요로운 노후의 설계에도 플라이휠 효과가 필수다. 워런 버핏의 ‘스노볼 효과’나 ‘복리 효과’도 같은 맥락이다. 연금자산에 플라이휠 효과가 나타나려면 에너지 축적의 시간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원금 100만원을 매년 5%로 운용한다고 가정하면, 10년 후 원금 100만원은 162.9만원으로 증가한다. 20년 후에는 265.3만원, 30년 후 432.2만원, 40년 후 704만원, 50년 후 1146.7만원으로 늘어난다. 처음 10년까지는 불과 63만원 정도 늘어나지만 20년 102만원, 30년 167만원, 40년 272만원, 50년 443만원으로 같은 10년인데 갈수록 가파르게 증가한다. 적어도 20년 정도는 지나야 플라이휠 효과가 가시화된다. 방해물이 적지 않다. 특히 주택 구매를 위한 퇴직연금 등의 중도인출이 문제다. 통계청이 16일 발표한 ‘2023년 퇴직연금 통계’에 따르면 퇴직연금 중도인출자가 6만 4000명, 인출금액은 2조 4000억원에 이른다. 중도인출 사유는, 인원 기준으로 주택구매가 52.7%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고 이어 주거임차(27.5%), 회생절차(13.6%)가 뒤를 이었다. 20대 이하는 주거 임차, 나머지 연령대는 주택구매를 위한 중도인출이 가장 많았다. 부동산 쏠림 현상이 노후 연금 자산 부족의 주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각 목적에 맞는 재무설계 과정이 없다 보니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중도인출에 따른 유불리는 연금과 부동산의 투자 수익률 차이에 그치지 않는다. 중도인출에 따른 세금 손실이나 노후 부동산의 연금화 비용 등, 플라이휠 효과의 기회비용도 고려해야 한다. 플라이휠 효과를 누리려면 결혼 준비, 내 집 마련에서 노후 준비까지 각각의 생애 재무 목표에 맞도록 사회초년생 시절부터 따로 계획을 설계해야 한다. 그런 다음 20년 이상 장기적으로 꾸준히 적립하고 유지하는 규율을 만들고 실천하면 된다. 민주영 신영증권 연금사업부 이사, 경영학 박사

202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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