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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읽기] 제2차 차이나 쇼크

‘G2(Group of Two)’. 미국과 중국을 일컫는 용어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때 이를 전 세계 미디어로 퍼트린 사람이 바로 당시 블룸버그 칼럼니스트였던 윌리엄 페섹이다. 글로벌 경제에 대한 그의 통찰을 보여준다.   페섹이 최근 투자 전문 매체인 배런스에 칼럼을 썼다. ‘중국 디플레가 빠르게 글로벌 경제로 확산될 것’이라는 제목. 그는 “이번에는 의류·장난감 등 임가공 공장이 아닌 테슬라·애플·소니·삼성 등 첨단 기업이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서방 첨단 기업이 ‘차이나 쇼크’에 직면할 거라는 얘기다.   이미 현실화하고 있는 흐름이다. 중국은 지난해 전기차 약진에 힘입어 세계 최대 자동차 수출국으로 등장했다. BYD는 기존 강자 테슬라를 2위로 밀어냈다. 태양광도 그렇다. 중국의 저가 공세로 지난해 글로벌 태양광 패널값은 25% 이상 급락했다. 유럽 태양광 업체는 줄 파산했다.   작년 중국 수출의 최고 히트 상품은 전기차·리튬배터리·태양광 등이다. 전체 수출액이 1조 위안(약 1400억 달러)을 돌파했다. 경기 위축으로 이들 제품의 중국 내수시장은 공급과잉 양상이다. ‘덤핑 수출’, ‘디플레 수출’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반도체 분야도 중국의 디플레 수출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 『반도체 전쟁(Chip War)』을 쓴 크리스 밀러는 파이낸셜 타임스(FT) 기고에서 “싸구려 중국 칩이 글로벌 시장에 쏟아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자동차·가전 등 일반 소비 용품에 쓰이는 범용 반도체 제품의 중국 생산량이 5년 후 지금의 두 배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매출의 약 25%를 범용 반도체 공정에 의존하고 있는 대만 TSMC도 충격을 피할 수 없다.   ‘쇼크’의 시작은 2001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이었다. 중국은 ‘세계 공장’으로 등장했고, 각국의 제조업 일자리를 빨아들였다. 그렇게 시작된 1차 쇼크가 주로 개발도상국의 제조업에 타격을 줬다면, 이번 2차 쇼크는 선진국 고부가 산업을 위협한다. 미국·유럽·일본 등 서방은 ‘첨단 분야만큼은 중국에 당하지 않겠다’고 방어벽 쌓기에 나선다. 첨단 공장 유치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2차 쇼크가 더욱 극렬하게 진행될 것임을 예고한다.   문제는 우리다. BYD의 전기 승용차가 호시탐탐 국내 시장을 노린다. BYD코리아는 상반기 안에 영업 조직을 짜기 위해 인력 확충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차가 긴장할 수밖에 없다. ‘제2차 차이나 쇼크’는 이미 우리에게 닥친 현실이다. 한우덕 / 한국 차이나랩 선임기자중국읽기 차이나 쇼크 차이나 쇼크 디플레 수출 유럽 태양광

2024-03-18

[삶과 예술] 자연의 소리 ‘팬플룻’

이 세상의 악기 중 가장 오래되었다는 팬플룻은 먼 옛날 풀피리를 엮어 불다가 점점 발전하여 갈대나 대나무 재질로 여러 관을 뗏목처럼 차례로 연결해 놓은 원시적인 특징을 갖는 악기이다. 요즘은 각 매체에서도 치매 예방에도 도움이 된다는 몇 가지 수칙 중에 주 3회 이상 운동이나 댄스 하기, 건강한 식사하기, 인지훈련 꾸준히 실시하기 등 중에서 한 가지 악기 배울 것도 권장하고 있다. 뇌를 활성화해엔도르핀의 효과와 건강에 매우 좋다는 것이다.   필자가 이 악기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오래전 ‘Kill Bill’이란 영화의 OST 곡인 ‘외로운 양치기’(The Lonely Shepherd) 곡을 연주한 악기가 바로 팬플룻이란 것을 알았고, 대나무에서 나오는 묘한 자연의 소리에 매료되어 한동안 멜로디를 다 외울 정도로 듣고 또 듣고 하던 시절이 있었다.   바쁜 생활과 댄스 지도에 매달리며 잊고 있다가 4년 전어느 날 무심코 펼친 신문광고에 남미 민속악기 팬플룻 수강생을 모집한다는 문구를 보는 순간 오래전에 잠재되어 있던 또 다른 나의 도전의 꿈이 ‘아~ 이거다’ 하며 머리에 큰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바로 다음 날 전화를 걸고 음악실로 달려가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당연히 댄스 지도를 하며 바쁜 시간 짬을 내 공부하기는 쉽지 않았다. 처음엔 소리도 잘 안 나고, 숨도 차고, 관 이동도 쉽지 않아 너무 어렵게만 느껴졌었다. 하지만 이것도 예술 분야인데 어디 한 번 해보자는 욕심(?)이 생겨나 꾸준히 하다 보니, 팬플룻이란 악기는 작고 가볍고 단순한 관 형태로 만들어져서 한 관(Tube)만 부는 요령을 터득하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악기란 걸 터득하게 되었다.   이일성 지도 강사님은 한국 팬플룻협회에서 지도자 과정을 수료, 수많은 연주와 서울 목신팬플룻 초대단장을 역임하시다가 이민 오시어 매년 한 번씩 팬플룻 강좌를 개설하여 교육에 열정을 다하고 계신다. 미국에서 강사님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 실정인데, 다행히도 2015년부터 팬플룻 아카데미를 개설해 주시어 너무나도 감사하고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올봄 시즌에는 한 달간 무료 강좌가 있을 예정이다. 강사님의 목표는 아예 처음부터 팬플룻 연주자로 변신하는   과정으로 커리큘럼이 짜여 있어 무대에서 실전 연습으로 진행하는 점이 나를 설레게 하였다. 최근에는 뉴저지 밀알학교에서 장애우들에게 댄스 지도와 더불어 팬플룻 연주도 들려주며 그들의 행복한 모습을 통해 부족한 나에게 감사를 깨닫게 해준다.   팬플룻 동호회에서는 한인회, 데이케어, 교회찬양축제 등 초대받아연주 활동을 하고 있다. 기억에 남는 행사로는 뉴욕 추석맞이 대잔치, 뉴저지 팰리세이즈파크 거리축제 등 다양한 문화예술 행사 등이 있다.   인생의 후반전에 나에게 팬플룻은 너무나 멋진 선택이었고, 음악과 함께 더더욱 풍요로워진 100세 시대에 발맞추어   왈츠, 탱고와 함께 팬플룻까지 꽃길을 걷고 싶은 이 마음~~! 한수미 / 영댄스 대표삶과 예술 팬플룻 자연 팬플룻 연주자 한국 팬플룻협회 팬플룻 아카데미

2024-03-18

[커뮤니티 포럼] 6월 4일, 한인 최초 연방상원의원 배출을 위해서

올해 11월 4일에 있을 대통령 선거와 병행하는 연방 상하원의원 선거에 도전하는 한인들 모두가 미주 한인들에게 높은 관심을 받고 있지만, 특히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은 한인 최초로 연방상원의원에 출마한 뉴저지의 앤디 김 연방하원의원(3선거구)이라 할 수 있다.     대통령과 연방 상하원의원을 선출하는 본선거가 11월 4일이라는 것은 유권자들이 잘 알고 있는 정보다. 하지만 뉴저지같이 전통적으로 특정 당이 우세한 주에서는 사실 각 정당에서 당 후보를 결정하는 예비선거일(Primary)이 본선거보다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선호하는 당에서 배출된 후보가 결국 본선거에서 승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주 한인들에게, 특히 뉴저지의 6월 4일 민주당 예비선거는 지지 정당을 떠나서 한인의 이해와 권익을 대변할 수 있는 첫 한인 연방상원의원이 탄생할 기회다.   앤디 김은 누구인가?     앤디김은 1982년 보스턴에서 한인 이민자 부모에서 태어난 이민 2세대이며 뉴저지에서 자랐다. 그는 리더십과 public service를 인정해 주는 최고의 장학금인 트루먼 장학금과 로즈 장학금을 받았고, 시카고대에서 정치학과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국제 관계를 공부했다.   그는 2018년부터 뉴저지 3선거구의 3선 연방하원의원으로서 가장 뛰어난 의원들만 참석한다는 국가안전보장회의, 군사위원회, 외교위원회 (National Security Council, Committee on Armed Services, Committee on Foreign Affairs)에서 실무를 수행한 훌륭한 경력을 갖고 있다. 또한 아프가니스탄 주둔 나토군사령관 참모로 실전에 참여했으며, United States National Security Council official로 일한 경험도 있어 주목을 받고 있다.   뉴저지 상원의원 예비선거 진행현황   앤디 김의 출마 선언 후 현 뉴저지주지사 부인인 태미 머피가 출마 의사를 밝혔다. 정치 경험은 없지만 주지사부인으로서 상당한 민주당 네트워크를 가진 그는 많은 뉴저지 지역 정치 및 경제 리더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뉴저지 한인밀집지역인 버겐카운티에서 한인들의 도움을 받은 지역 정치인들도 태미 머피 지지 선언을 많이 한 상황이다.     그런데도 Monmouth대학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김 의원의 호감도는 48%로 머피의 2배에 달한다. 하지만 주지사인 머피의 이름과 인지도, 예비선거 방식 및 미미한 한인들의 예비선거 투표율 때문에 그의 승리가 위험에 처해 있다.   6월 4일 예비선거로 11월 선거 결과를 움직일 수 있는 방법     -지금부터 4월 10일 소속 정당 변경 신청 마감일 전까지(Party Affiliation Change Deadline) 각 당에서 이뤄지는 예비선거에는 등록된 모든 유권자가 참여할 수 있지만 반대 정당 소속을 가진 사람, 즉 지난번 선거에 다른 당을 위해 선거한 사람은 불가능하다. 만일 앤디 김 의원에게 투표하고 싶은데 어느 당에 소속되어 있는지 불확실하다면 각 카운티 선거 부서에 연락, 어느 당 소속으로 등록되어 있는지 확인하고 공화당이면 소속을 미리 민주당으로 바꾸어 놓아야 한다. (각 카운티 선거부서 연락처는 kace.org/election에 접속하여 ‘선관위 바로가기’로 간 후 ‘County Election Officials’에서 확인 가능) 투표 후에는 바로 정당 탈퇴가 가능하니 앤디 김 의원에게 투표하기 위해 본인의 지지 정당을 영원히 바꿀 필요는 없다.     -5월 14일 신규 유권자 등록 마감일 전까지(Voter Registration Deadline) 유권자 등록지(Voter Application)는 https://nj.gov/state/elections/voter-registration.shtml을 방문하여 온라인으로 할 수 있다.     -5월 29일~6월 2일 조기투표(Early Voting)는 6월 4일에 직접 투표하기 힘든 이들의 우편 투표도 가능하나 우편 투표의 경우 무효가 될 확률이 매우 높으니 그보다 조기 투표를 하는 것이 확실하다. 투표소와 투표 시간 확인은 kace.org/election을 방문하여 ‘내 투표소 찾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6월 4일 예비선거일 투표시간은 오전 6시부터 오후 8시다.   예비선거 당락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인   첫 번째는 뉴저지주의 예비선거 방식이다. 미국에서 뉴저지의 선거방식은 특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뉴저지주에는 소위 파티 라인(Party Line) 혹은 카운티 라인(County Line)이라는 전통적인 선거 집행 방식이 있다.     뉴저지의 대다수 카운티는 정당의 대의원들이 모여서 특정 후보를 지지하고, 이들의 지지를 받는 후보 이름을 투표용지 1번에 배치하게 한다. 모든 유권자가 후보들에 대해서 구체적인 정보를 갖고 있지 않으므로, 관습적으로 1번을 선택하는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아서 전통적으로 1번에 배치된 후보들이 거의 당선됐다.   현재 유권자가 많은 카운티의 대의원들이 태미 머피 주지사 부인을 1번 후보로 선택하였기 때문에 앤디 김 의원은 불리하다. 이와 관련해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주류 미디어에서 흥미로운 분석 기사를 다수 낸 적이 있다. 이에 따르면 예산 배정 문제를 비롯한 뉴저지주지사의 권한이 워낙 막강하기 때문에 지역 정치 및 경제 리더들이 주지사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고, 각 카운티 정치인들도 이와 척을 지는 결정을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결국 그 부인을 지지하게 되고, 이는 주류 미디어에서 족벌주의(nepotism)로 강하게 비판받고 있다. 현재 앤디 김 의원 측에서는 모든 후보가 공평하게 투표용지에 표기될 수 있도록 소송을 제기한 상태이지만 6월 4일까지 판결이 나올 확률은 낮다고 한다.   두 번째는 한인 유권자의 미미한 투표율이다. 시민참여센터의 2022년 뉴저지 한인 유권자 데이터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2월 기준 뉴저지주의 한인 등록 유권자는 4만3648명이고 이중 민주당에 등록된 유권자는 1만6000여 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뉴저지 한인 유권자의 예비선거 참여율은 30%를 넘은 적이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한인들의 예비선거 투표수는 4800여 명밖에 되지 않는 것이고 지역 정치인들이 한인 표를 의식해야 하는 압박도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결론적으로 뉴저지 카운티들에는 6월 4일 예비선거에서 주지사 부인에게 유리한 결정을 하는 것이 앤디 김이라는 뛰어난 후보를 선출하는 것보다 더 큰 이득으로 비치고, 한인들의 민심을 져버리더라도 그리 큰 타격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한인들은 뉴저지 정당 내부에서 특정 후보에게 불공정한 혜택을 주는 파티 라인을 극복하는 노력에 참여하고 한인 유권자의 투표율을 높여야 한다.         유권자의 숙제와 중요한 날짜들   뉴저지의 예비선거는 정당에 등록된 유권자 및 무소속 유권자에게 열려 있다. 공화당에 등록되어 있다면 공화당 예비선거에만 참여할 수 있고, 민주당에 등록된 경우 민주당 예비선거에만 참여할 수 있다. 무소속인 경우 어느 쪽에 참여해도 괜찮다.       결론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한다. “최근 세대들은 1세대의 마음을 이해할지 모르겠지만 언제 한인이 연방상원의원이 될 기회가 또 오겠습니까?” 어떤 분은 “적어도 한인은 한인 후보를 뽑는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뉴저지의 현역인 밥 메넨데즈 의원의 뇌물 수수 의혹과 기소로 역설적으로 한인 이민 역사 120년 최초로 연방상원의원 선출의 기회가 온 것에 커다란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너무나 뛰어난 후보인 앤디 김 의원이 논란 많은 불공정 선거 방식을 이기고 예비선거에서 선출될 수 있도록 모든 이들은 6월 4일 예비선거 참여를 부탁드린다. 주디 장 / 변호사커뮤니티 포럼 연방상원의원 한인 한인 연방상원의원 민주당 예비선거 한인 이민자

2024-03-18

[우리말 바루기] ‘달이다’와 ‘다리다’

옛날엔 배나 파뿌리를 고아 감기약으로 쓰곤 했다. “엄마가 다려 주던 배즙이 생각난다” “파뿌리를 다린 물을 먹으면 감기가 어느새 낫곤 했다” 등과 같은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위 예문처럼 배나 파뿌리를 ‘다려서’는 약으로 지을 수 없다. ‘다려(서)’와 ‘다린’은 ‘다리다’를 활용한 형태다. 그러나 ‘액체를 끓여 진하게 만들거나 약재에 물을 부어 우러나도록 끓이다’는 뜻을 지닌 단어는 ‘다리다’가 아닌 ‘달이다’이다. 따라서 ‘다려(서)’ ‘다린’은 ‘달이다’를 활용한 ‘달여(서)’ ‘달인’으로 고쳐야 바른 표현이 된다.   ‘다리다’는 옷이나 천의 주름을 펴거나 줄을 세우기 위해 다리미로 문지르는 행위를 의미한다. “와이셔츠를 다려 입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어제 다린 블라우스가 그새 구겨졌다” 등처럼 쓸 수 있다.   ‘달이다’를 [다리다]로 발음하다 보니 표기 역시 소리 나는 대로 ‘다리다’라고 쓰기 쉽다. 그러나 ‘달이다’와 ‘다리다’는 각각의 의미를 지닌 독립된 단어이므로 맥락에 따라 적절한 어휘를 사용해야 한다.   ‘달이다’와 ‘다리다’가 헷갈린다면 ‘다리미’를 떠올리면 된다.  정리하자면 약은 ‘달이고’, 옷은 ‘다려야’ 한다.우리말 바루기 다리 고아 감기약

2024-03-18

[기고] 알래스카의 비버 증가, 왜 문제일까

알래스카의 비버(beaver)는 원주민에게 없어서는 안 될 동물이다. 비버 고기와 가죽은 원주민 생활에 유용한 재료이기 때문이다. 특히 두툼하고 큰 꼬리에는 지방이 많아 겨울철 원주민의 영양 공급원 역할을 했다고 한다. 또 비버 가죽은 유용한 모자와 신발 재료로 사용된다. 비버 가죽과 털로 만든 모자는 보온성이 좋고 내구성도 뛰어나다.     그런데 지난 10년간 알래스카의 비버 개체 수가 급증하면서 지형 변화는 물론 다른 동물의 생태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한다. 이는 관련 연구를 진행 중인 ‘북극 비버 관찰 네트위크 (Arctic Beaver Observation Network)’가 최근 알래스카 대학에서 발표한 내용이다. 네트위크는 과학자는 물론 토지관리자 및 부족 대표, 비버 사냥꾼 등 다양한 전문가로 구성되어 있으며 국립과학재단의 지원으로 2026년까지 연구를 진행할 예정이다.     네트워크 측이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비버의 서식지가 북쪽으로 확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버는 주로 하천에 많은 나뭇가지로 댐을 만들어 서식하지만 스스로 환경을 바꾸는 능력이 있다고 한다. 주변에 하천이 없어도 작고 강한 앞발로 습지를 만든다는 것이다. 또한 연못이나 습지 면적을 확장하기 위해 수로까지 판다고 한다. 네트워크에 따르면 항공사진 조사 및 인공위성 관측 결과에서도 비버의 서식지가 점차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라시아 비버는 수 세기에 걸쳐 모피용으로 과잉 포획되면서 개체 수가 급감했다. 그러나 사냥 조건을 강화한 이후 개체 수가 놀랄 정도로 빠른 속도로 회복되면서 서식지도 확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버와 물새가 서식하는 북극 호수 주변의 많은 관목이 물에 잠겨 죽었다. 이는 홍수 때문이 아니라 온난화로 동토가 녹으면서 융해수가 늘었기 때문이다. 이를 환경 교란 (disturbance)이라고 한다. 비버의 서식지 근처에는 다른 동물의 개체 수도 함께 증가하는 모습을 보였다. 비버를 먹이로 하는 오소리 (wolverine)와 늑대 개체 수가 늘어난 것이다. 늑대는 순록보다 움직임이 느린 비버를 더 쉽게 사냥할 수 있다고 한다. 비버가 특정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순록 개체 수 감소 시 늑대의 새로운 먹이가 되는 것이다.     비버가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거나 이전 서식지가 호수화되면 온난화의 영향을 직간접으로 받기 쉽다. 동토 융해는 그 속의 많은 유기물의 분해도 초래해 메탄의 발생 원인이 되기도 한다.  비버 서식지의 증가로 하천이 고립된 호수처럼 변하면 수중 산소가 점차 고갈되어 무산소 상태로 변한다. 이런 무산소 환경에서는 메탄 생성 미생물이 증가하면서 메탄 발생도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호수 온도의 증가로 동토 융해 현상까지 더해지면 메탄 발생은 이중으로 증가하게 된다.       온난화로 수온이 올라가면  동토중에 함유됐던 수은의 발생량도 늘어난다. 이는 수중 어류뿐만 아니라 비버와 인간에게도 피해를 미칠 수 있다.   비버 서식지 확대 및 개체 수 증가는 환경을 교란하고, 최종적으로 메탄 발생을 증가시켜 북극 온난화를 가속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즉, 북극 비버의 서식지 확장은 산불만큼 큰 교란을 의미하며, 인간을 제외하면 북극을 이처럼 빠르게 변화시킨 동물은 없을 것이다.     캐나다 원주민 장로의 말에 의하면, 하천에서 10개의 비버 서식지와 댐을 발견하고 이를 신속하게 제거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3일 후 그 지역에 다시 갔더니 어느새 비버의 댐이 또 만들어져 있더라는 것이다. 비버는 나무를 자르는 능력이 뛰어난 설치류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그의 말은 비버의 급속한 서식지 확장 문제를 절대 과소평가하지 말라는 메시지로 들렸다. 김용원 / 알래스카주립대 페어뱅크스 교수기고 알래스카 비버 비버 개체 북극 비버 비버 가죽

2024-03-18

[음악으로 읽는 세상] 나비부인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은 음악적으로 대단히 훌륭한 작품이다. 하지만 그 내용은 편안하게 즐길 만한 것이 못 된다. ‘나비부인’은 일본의 나가사키 항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핑커톤이라는 미군 장교와 일본인 게이샤 초초상의 비극적 사랑을 그린 오페라다. 동양 여자가 자신을 희생하며 맹목적으로 서양 남자를 사랑하는 이야기는 서양 사람들에게는 판타지일 수 있지만, 우리 같은 동양인에게는 별로 유쾌한 이야기가 못 된다.   미군 장교 핑커톤은 백인 우월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전형적인 서양 남자다. 나가사키 항에 내린 그는 배가 새로운 도시에 닿을 때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데리고 놀’ 여자를 구한다. 일본인 포주는 그에게 어떤 여자든지 마음에 드는 여자를 단돈 100엔에 살 수 있다고 장담한다. 이 음흉한 남자들의 행각에 걸려든 것이 바로 초초상이라는 게이샤다. 핑커톤은 그녀와 장난삼아 결혼하지만 초초상의 사랑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녀는 핑커톤과의 사랑에 목숨을 걸었다.   핑커톤은 잠시 초초상을 데리고 놀다가 다시 배를 타고 나가사키 항을 떠났다. 그 후 핑커톤의 아들을 낳은 초초상은 하염없이 그를 기다린다. 하지만 그것은 헛된 기다림이었다. 핑커톤은 본국으로 돌아가 다른 여자와 정식으로 결혼을 한다. 핑커톤이 본부인을 대동하고 자기 앞에 나타났을 때, 초초상은 진실을 알게 된다. 삶의 희망을 잃은 그녀는 어린 아들을 남겨둔 채 단도로 자기 가슴을 찔러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초초상은 아리아 ‘어떤 갠 날’에서 핑커톤이 “나의 버터플라이!”라고 부르며 자기에게 돌아오는 날을 상상한다. 그렇게 한동안 달콤한 꿈을 꾼 다음 그가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고 외치며 노래를 끝낸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 외침이 처절한 절규처럼 들린다, 그 사랑이 곧 파국으로 끝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나비부인 게이샤 초초상 서양 남자 동양 여자

2024-03-18

[중앙칼럼] 한인 사회 모르는 한국 언론의 오보

최근 한 로컬 한인신문 1면 톱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한인 최초 미 공군 장성 출신 새라 러스 준장, 고향 부산에서 한미 정례 연합훈련 가교 역할’이라는 기사로 14일 종료된 한미연합훈련 ‘자유의 방패’에서 한미연합공군 협조단장으로 활약한 새라 러스 예비역 준장에 대한 이야기였다.     기사에 따르면 러스 준장은 15세인 1983년 가족이민으로 미국에 와 UC샌디에이고 졸업 후 1994년 장교로 공군에 입대했다. 그리고 지난 2022년 한국계 최초로 미 공군 장성이 됐다.   실향민 부모를 둔 한인 1.5세가 미군 장성이 돼 40년 만에 고국을 찾았다는 것은 한인이라면 누구라도 자랑스러워 할 대단한 성취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기사에는 명백한 오류가 있다. 바로 ‘한인 최초의 미 공군 장성’ 이라는 내용이다.     관련 기사들을 찾아보니 한국의 많은 언론이 러스 대령의 준장 진급 당시 ‘미 공군에서 한국계 미국인 최초로 장성 진급’이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는 오보였다. 러스 준장에 앞서 미 공군 장성에 오른 한국계 여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샤론 K.G. 던바 공군 소장이다. 어떤 근거로 오보가 나오게 됐는지 알 수 없으나 다른 언론들이 팩트 체크 없이 첫 보도를 그대로 인용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던바 소장은 어머니가 한인이다. 시카고 태생으로 1982년 미 공군사관학교 여생도 3기로 졸업 후 소위로 임관했다. 조달, 훈련, 정치-군사 및 지휘 직책을 두루 거친 던바 소장은 2008년 준장, 2011년 소장으로 진급했다. 특히 던바 소장은 미 공군에서 여군 최초로 메릴랜드주 앤드루스 합동기지에 본부를 둔 합동군사령부 수도권 공군부대인 워싱턴 공군지구(AFDW) 사령관과 320 항공원정비행단 사령관을 역임한 것으로 유명하다.   던바 소장이 한국계임을 확인한 것은 지난 2012년이었다. 그해 1월 남가주 출신 미 7군 제30 의무사령부 존 조 대령이 준장 진급자로 지명받았다는 기사를 쓴 것을 계기로 미군 내 한인 장성 현황 취재를 시작하면서다. 이어 하와이 이민 3세로 일리노이주 스콧 공군기지 항공기동대 사령부 작전본부장으로 있던 마이클 김 준장의 소장 진급 소식,  어머니가 한인인 론 맥라렌 해군 준장(2009년 진급)이 국방부 군수국합동 예비보급지원부 디렉터로 복무 기사 등을 단독으로 보도했다.     제한된 정보와 군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취재에 어려움을 겪던 중 일본계 재향군인단체가 미군 내 아태계 장성 5명을 소개한 간행물을 찾을 수 있었다. 그중 한명이 던바 소장이었는데 이름만으로는 한인 여부를 알 수 없어 해당 단체에 문의한 결과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답을 듣게 됐다.   이후 소셜미디어에서 던바 소장을 찾아 미군 내 한인 장성을 찾고 있다며 인터뷰 요청을 했었다. 며칠 후 “연락 고맙다”는 말과 함께 펜타곤 공식 이메일 계정으로 다시 연락해 달라는 답신을 받고 인터뷰 질문지를 보냈다. 이후 수차례 연락이 오갔지만 7월 AFDW 사령관이라는 중책을 맡게 되면서 결국 보안 이슈로 인터뷰 승인이 나질 않아 5개월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됐다. 던바 소장의 부탁으로 기사화는 무산됐지만 던바 소장이 한국계 최초의 미군 장성이자 최고 계급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2014년 32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전역한 던바 소장은 항공우주 방위산업 분야에서 일하면서 정부 자문 위원회와 비영리 단체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최초’라는 타이틀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지만 사실 확인이 되지 않는다면 가치와 격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러스 준장의 성공 스토리를 깎아내리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자랑스러운 한인사를 제대로 알고 평가하자는 얘기다. 한국 언론들이 의도치 않은 오보를 내게 된 것은 미주 한인 사회에 대한 정보와 지식 부족 때문에 발생한 해프닝이 아닐까 싶다.   미주 한인 디아스포라 역사가 120년이 넘었고 재외동포청도 출범했다. 이제 한국 언론들도 깜짝 뉴스나 단발성 화제 정도로 미주 한인 스토리를 전할 게 아니라 역사적 기록이 될 수 있도록 한인 사회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다.  박낙희 / 경제부 부장중앙칼럼 한인 사회 로컬 한인신문 한국계 여성 한국계 최초

2024-03-18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말의 뼈, 생각의 뼈

꽃잎이 피어나던 날 꽃잎이 떨어지던 아픈 날도   다만 눈을 들어 바라볼 때 볼 수 있다는 것을   다만 귀 기울일 때   들을 수 있다는 것을   다만 그 길 속에서만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숨 쉬는 순간 동안만의   설렘이었다는 것을       맞아, 그것은 굳이 기억해 내지 않아도 코끝이 찡하게 오는 것이지 세상은 아마 모를 거야 그렇게 깊은 것인 줄 마음 깊이 새겨진 화석인 줄 몸 속 세포들이 때 되면   자석같이 살아나 때도 없이 당겨지는 힘 막을 수 없지 멈출 길 없지 먼 산 나무숲을 바라만 보았지 그림자처럼 비스듬히 기대어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바위 같은 말의 뼈, 생각의 뼈 . . . 따듯한 그리움이지   창문을 통해 아침 햇살이 따갑게 쪼인다. 눈살을 찌푸리고 떠오르는 해를 쳐다보려는 마음을 접고 눈길을 아래로 옮긴다. Deck 앞 넓은 연못에 햇살이 비쳐 잔잔한 물결이 설렌다. 작은 오두막 창가에 앉아 Aldo Leopold의 에세이와 함께 엮은 사진첩을 보고 있자니 보라의 하늘이 연분홍의 하늘로 넘어가는 풍경을 마주하고 있는 듯하다. 하늘이 내려와 춤추고 있는 착각이 들 정도의 우아한 들녘, 여러 색의 조화로운 들꽃들이 춤추듯 펼쳐진 Leopold의 정원과 커피 내음이 풍기는 창가로 몰려오는 이 아침의 설레임. 이 겹쳐오는 감흥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동트기 전, 해지기 전 삼십 분 전의 기적 같은 풍경은 신의 손끝에서만 만들어질 작품일진대 마주하고 있는 터질듯한 가슴은 또 어찌해야 할지.   시간은 흐르고 한 계절을 보내고 있다. 또 다른 계절을 기다리는 마음이란 꼭 사람을 멀리 보내고 그 사람을 기다리는 심정과 같지 않을까? 아름다움이란 멀리 꿈속 같은 아련함에서 찾지 말지니 발끝에 닫고, 손끝에 만져지는 그 순간에서 찾을진 데 우린 얼마나 많은 날들을 꿈꾸며 살아왔는지. 돌아서려는 따뜻한 그리움을 오래 간직하려 손바닥만 하게 남은 온기를 가슴에 담고 넘어가는 노을에 눈길을 주다 보면 와락 밀려오는 낙엽 같은 외로움이 흔들리며 하루가 지는 어둠 속으로 내리기도 했다.   Wisconsin 대학의 교수이자 자연환경가, 에세이스트, 사진작가였던 Aldo Leopold 의 〈Sand county Almanac〉의 화보 속으로 걸어본다. 새벽 산책을 하며 계절에 따라 변하는 자연을 기록한 책이다. 책의 첫 장을 여는데 새벽의 신비로움이 다가온다. 3월 새벽바람이 상쾌하게 코끝에 전해온다. 말년에 닭장을 개조한 오두막에서 Wisconsin Sand County의 자연을 담은 12달의 화보와 야생의 자연을 사랑한 잔잔한 글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야생의 아름다움을, 땅과 인간의 생명 공동체로서 문화적 가치와 심미적 가치로 땅을 지키는 것이 인간의 고결함을 지키는 것임을 담아내고 있다. 불행하게도 이 책의 출간을 앞두고 자연 속으로 돌아간 Aldo Leopold의 명복을 빈다.   삼월의 들녘은 아직 기지개를 켜지 못한 생명들이 흙더미를 밀고 나오는 중이어서 푸석한 흙들을 밟으며 가면 발자국 뒤로 아작하는 아픈 소리가 따라온다. 깨어야 하고 눈 떠야 하기에 잠깐의 아픔은 참아야 하리. 견뎌야 하리라고 말해주지만 상대는 봄의 새싹이나 움트는 꽃눈에게보다도 견디지 못하고 참아내지 못하는 외로운 사람에게로 향하는 게 맞는 말이 된다. 오늘도 입 밖으로 내뱉은 수도    없이 많은 말들. 흩어지고 사라져 기억도 못 하는 단어들. 그 단어, 말들이 단단해져 뼈가 생기고 힘살이 붙어 명명되는 말의 뼈, 생각의 뼈, 단단하고 따뜻한 그리움이라 말해도 좋겠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생각 자연환경가 에세이스트 aldo leopold wisconsin sand

2024-03-18

[사설] 국민 정서와는 동떨어진 대통령실의 상황 인식

━ 이종섭·황상무 정리하자는 한동훈 요구 외면 ━ 여당조차 부글부글…겸손하게 민심 수용해야 이종섭 주호주 대사와 황상무 시민사회수석 논란에 대한 대통령실의 상황 인식은 매우 우려스럽다. 대통령실은 어제 아침 입장문을 통해 “이 대사에 대한 검증 과정에서 고발 내용을 검토한 결과 문제 될 것이 전혀 없다고 판단했다”며 “공수처가 조사 준비가 되지 않아 소환도 안 한 상태에서 재외공관장이 국내에 들어와 마냥 대기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또 대통령실은 황 수석 문제에 대해 “대통령실은 특정 현안과 관련해 언론사 관계자를 상대로 어떤 강압 내지 압력도 행사해 본 적이 없고, 하지도 않을 것”이라며 “언론의 자유와 언론기관의 책임을 철저하게 존중하는 것이 우리 정부의 국정 철학”이라고 밝혔다. 전날 저녁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이 대사 즉각 귀국과 황 수석의 거취 결단을 요구하자 대통령실이 곧바로 반박에 나선 모양새다. 하지만 이런 대통령실의 시각은 이 문제를 지켜봐 온 국민의 정서와는 동떨어져 있다. 아무리 대통령실 자체 검증에선 문제가 없었다지만 공식적으로 피의자 신분인 이 대사를 별다른 설명도 없이 공직에 발탁했던 게 온당한지, 이 대사에 대한 출국금지 조치가 드러나자 법무부가 신속히 출국금지를 풀어준 것은 특혜가 아닌지, 이 대사가 왜 ‘도주 대사’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쫓기듯 비행기를 타야 했는지 대다수 국민은 사정을 납득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니 국민의힘에서조차 이 대사 귀국론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나경원 공동선대위원장은 “대통령실의 잘못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당연히 국민들은 도피성 대사 임명으로 느껴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안철수 공동선대위원장도 “빨리 귀국해 수사받는 게 좋다. 해임 문제를 포함해 검토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차제에 공수처도 곧바로 이 대사에 대한 조사에 착수해 불필요한 정치적 오해를 불식해야 한다. 황 수석 문제도 버틴다고 해결될 성격이 아니다. 지금 여야는 중도층을 붙잡기 위해 경쟁적으로 ‘망언 후보’들의 공천을 취소하고 있다. 10여 년 전의 발언도 소환되는 판이다. 그러니 황 수석의 ‘횟칼 테러’ 발언에 대해 야당은 물론 여당에서도 조속한 거취 정리 요구가 쏟아질 수밖에 없다. 특히 최대 승부처인 수도권에 출마한 국민의힘 후보들은 “대통령실이 도움은 못 줄망정 뒷다리를 붙잡는다”며 아우성이라고 한다. 이번 총선 결과가 윤석열 정부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대통령실이 엄중한 인식이 있다면 이리 머뭇거릴 틈이 과연 있겠는가. 지금 대통령실은 상대의 잘못엔 추상같은 잣대를 들이대면서, 정작 자기편의 과오엔 관대하다는 비판을 자초하고 있다. 이제라도 이번 논란을 겸허히 성찰하고, 민심을 수용해 이 대사와 황 수석 문제에 결단을 내리길 바란다. 민심을 이기는 권력은 없다.

2024-03-18

[사설] 의·정 갈등 한 달…대화 바라는 여론 변화에 주목해야

━ 2000명 증원 고수 47%, 규모·시기 조정 41%로 ━ 의대 증원 자체 찬성이나 ‘중재안 필요’ 적잖아 대형 종합병원 전공의들의 집단 사직으로 의료공백 사태가 발생한 지 한 달을 맞았다. 의료계와 정부는 여전히 강 대 강으로 맞서며 한 발도 물러서지 않는 모양새다. 의·정 갈등 속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의료 소비자인 국민이다. 특히 중증 환자와 그 가족의 불안감과 피로감은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의료계와 정부가 하루빨리 대결을 멈추고 사태 해결의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 이유다. 무엇보다 의대 증원을 둘러싼 여론의 동향에 주목해야 한다. 한국갤럽이 지난 12~14일 전국 성인 100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보자. 정부의 의대 정원 2000명 확대 발표에 대해 ‘원안대로 추진해야 한다’는 응답자는 47%, ‘규모나 시기를 조정해야 한다’는 41%였다. ‘의대 증원에 반대한다’(6%)까지 고려하면 정부 원안대로 추진하자는 의견과 그렇지 않은 의견이 비슷한 비율로 나타났다. 의대 증원 자체에 대해선 여전히 찬성(88%)이 압도적이지만 증원 규모로 2000명을 고수하지 말고 중재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응답자 역시 적지 않았다. 이번 여론조사에선 종합병원 의료 공백에 대한 정부 대응이 ‘잘못했다’(49%)는 평가가 ‘잘했다’(38%)를 웃돌았다. 물론 현재의 의료 공백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은 한꺼번에 사직서를 내고 환자 곁을 떠난 전공의들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의사가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볼모로 집단행동을 벌이는 건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렇지만 정부의 국정관리 능력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커지는 현실도 심각하게 봐야 한다. 정부가 의대 증원을 발표하면 의료계가 강력히 반발할 것이란 점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시나리오였다. 그렇다면 정부로선 의료 공백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사전에 철저히 대비했어야 했다. 이런 대비도 없이 정부가 무조건 강경 대응으로 일관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이제라도 의료계와 정부는 열린 태도로 대화의 테이블에 마주 앉아야 한다. 꼬여 있는 대화의 실마리를 풀려면 정부가 먼저 의대 증원 규모를 포함한 모든 의제가 열려 있다는 신호를 보낼 필요가 있다.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은 어제 CBS라디오에 출연해 “그 의제(의대 증원 규모)에 대해 오픈돼 있다”고 언급했지만 그 정도론 충분치 않다. 진정 대화의 의지가 있다면 정부가 좀 더 명확한 신호를 보내야 한다. 의료계도 원점 재검토 요구를 철회하고 의대 증원 논의에 전향적으로 나서야 한다. 의료계 내부에서도 정부가 제시한 2000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일정 규모의 증원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작지 않다. 의료계와 정부 양측 모두 국민 건강권 보장을 최우선에 두고 적절한 의대 증원 규모를 논의하길 바란다.

2024-03-18

[염재호 칼럼] 누가 유권자인가?

22대 국회의원선거의 사전투표까지 20여 일도 채 남지 않았다. 다음 주말부터 선거운동이 본격화되면 지하철역마다 허리를 굽혀 표를 구걸하는 후보들의 모습을 열흘 정도는 지켜봐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투표권을 가진 사람을 유권자라고 한다. 하지만 일반 국민은 정치에서 진정 무슨 권한을 가진 것일까? 유권자인 국민은 총선이 끝나면 국회의 이전투구를 바라보며 맥없이 정치혐오에 빠지게 된다. 역대 최악의 국회라고 평가받는 21대 국회보다 22대 국회가 더 나을 것 같지도 않다. 양대 정당은 시스템 공천이라고 하지만, 국가를 위해 봉사할 유능한 인물들을 유권자인 국민에게 공천한 것인지 의문이다. 게다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위성정당제로 어처구니없이 탈바꿈해 유권자를 농락하는 비상식적 제도로 전락했다. 입법권 남용과 과잉특권 빈축 국회 정당 후보 공천 시스템도 비합리적 국회의원 소명의식과 정치력 절실 AI 활용한 후보 검증 시스템 갖춰야 국회의원 후보들은 본 선거보다 정당 공천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후보 개인의 능력이나 비전보다 정당 중심 투표 경향 때문이다. 하지만 공천과정에서 국민 참여를 보장한다는 여론조사는 왜곡되기 쉽고 극렬 지지당원들의 영향력은 압도적이다. 형식은 시스템 공천이지만, 실질은 당 대표나 지도부의 뜻에 좌우되어 사천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민주화 이후 국정운영에서 국회의 영향력은 점점 비대해지고 있다. 17대 국회에서 정부의 입법발의는 1102건, 의원발의는 5728건이던 것이 점점 늘어나 21대 국회에서 정부발의는 831건으로 축소되고 의원발의는 2만3584건으로 증가했다. 국회의원들은 자신들이 국정을 책임지는 헌법기관이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자신들만이 선출된 권력이라고 행정부 공무원들을 폄하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예산심의 과정에서 쪽지예산으로 지역구 챙기기에 급급하고, 예산안이 통과되면 플래카드를 내걸고 자신이 따온 지역구 예산 자랑에 여념이 없다. 지역의원인지 국정을 담당한 국회의원인지 모를 정도다. 국회의원은 임기 동안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다.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이끌던 장기표 특권폐지국민운동본부 상임대표는 국회의원 특권을 없애야 바른 정치가 가능해진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의 특권은 180여 개나 되고 연봉은 세계에서 네 번째로 많은 1억5500만원인데, 우리나라 정치인 신뢰도는 167개국 중 114위라고 한다. 우리 국회의원 보좌관은 6명인 반면에 스웨덴은 보좌관 한 명을 국회의원 두 명이 공유하고, 출퇴근에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봉급은 국민 전체 근로자 평균임금만 받는다고 한다. 막스 베버가 강의를 책으로 엮은 『직업으로서 정치』는 정치가의 역할을 잘 알려주는 불후의 명작이다. 영어에서 직업(vocation)은 하늘로부터 부름 받은 소명이나 사명감을 뜻한다. 단순히 일의 대가로 보수를 받는 직업의 의미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로 정치학자 최장집 교수는 막스 베버 정치철학을 강의하고 책으로 펴낼 때 직업 대신 『소명으로서의 정치』라고 제목을 정했다. 베버는 정치가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세 가지 자질이 열정, 책임감, 그리고 균형적 판단이라고 했다. 단지 열정만으로는 정치가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고 냉철한 균형적 판단이 중요하다. 정치가가 냉철한 균형적 판단을 갖기 위해서는 ‘신념의 윤리’보다 ‘책임의 윤리’를 고민해야 한다. 도덕적 근본주의와 같은 신념의 윤리만 갖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척결해야 한다는 오류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치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미래의 문제를 설득과 합의를 통해 풀어나가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정치가는 국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봉사하는 소명감으로 일해야 한다. 정치를 월급 받고 특권 누리는 직업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 금품을 받거나 공천을 얻기 위해 아첨, 거짓말, 막말을 일삼지 않아야 한다. 자신에게 불리해도 바른말을 하고 국가의 미래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이번 공천 과정에서도 과거 발언 문제나 금품수수 증거로 공천이 취소되는 사례가 나왔다. 이제 인공지능(AI)의 도입으로 국회의원 후보 자질을 철저하게 평가하는 시스템 구축이 가능하다. 대체 불가능한 토큰(NFT) 방식을 활용하여 과거 모든 언행을 낱낱이 분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학회, 정당학회, 정책학회 등 전문가 단체들이 나서서 정당과 정치인에 대한 철저한 평가 시스템을 만들어 유권자들이 정치인들을 제대로 식별할 수 있는 권리를 되찾게 해주어야 한다. 유권자는 후보의 정치적 식견과 품격을 판단할 수 있는 정보를 가질 권리가 있다. AI 시대를 맞아 이제부터는 막말과 거짓 선동, 국회 질의 내용과 수준, 국가 미래를 위한 정책대안 제시, 지역구를 넘어선 국정 관련 활동, 정치적 설득과 통합 능력, 품격 있는 언행 등을 전문가 집단이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시스템을 마련해서 그 결과를 공개해야 한다. 그래야만 유권자가 선거에서 후보와 정당에 대해 준엄한 심판을 할 수 있는 진정한 권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2024-03-18

[서경호의 시시각각] 통계조작과 정치감사 사이 ②

현재 스코어로 정확히 반타작이다. 문재인 정부의 국가 통계 작성 실태에 대한 지난해 9월 감사원 감사 결과와 지난주 대전지검 수사 발표를 보면서 든 생각이다. 물론 아직 법원의 판단은 남아 있다. 지난해 감사원은 전임 정부 청와대 정책실장 4명(장하성·김수현·김상조·이호승)과 김현미 전 국토교통부 장관, 강신욱 전 통계청장 등 22명을 검찰에 수사 요청했다. 감사원은 통계법 위반, 직권남용, 업무방해 등 범죄행위가 ‘확인된’ 이들이라고 적시했다. 통계청장 외에 통계청 공무원 4명도 여기에 포함됐다. 검찰, 감사원 요청의 절반만 기소 소득 통계는 7명 중 1명만 재판에 검찰 제언이 정책 개선에 더 도움 검찰 수사 결과는 사뭇 달랐다. 대전지검은 김수현·김상조 전 정책실장과 김현미 전 장관 등 11명을 불구속 기소했지만 장하성·이호승 전 실장과 차영환 전 청와대 경제정책비서관, 통계청 공무원 4명 등 11명은 ‘혐의 없음’ 처분을 내렸다. 감사원이 검찰에 수사 요청한 22명의 절반이다. 감사원이 ‘확인한’ 범죄행위를 검찰은 왜 확인하지 못했을까. 국가 통계의 근본을 뒤흔든 전 정부의 잘못을 검찰이 봐줬을 리는 없다. 검찰 스스로 ‘최초의 통계법 위반 수사·기소’라고 의미를 부여할 만큼 주요 사건이었다. 검찰이 이번에 기소한 윤성원 국토부 전 차관 등 관료 2명에 대해 두 차례나 영장을 청구했다가 기각된 것을 보면 집값 통계 조작의 청와대 연결고리를 더 찾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감사원과 검찰 발표에서 달라지지 않은 점은 집값 통계 조작이다. 청와대가 한국부동산원에 부당한 압력을 행사해 최소 94회 이상 통계를 조작하게 했다는 감사원 발표는 검찰 수사에서 125차례 조작으로 늘어났다. 부동산원은 사전 보고가 부당하다며 12차례에 걸쳐 중단을 요청했지만 김상조 전 실장이 “사전 보고를 폐지하면 부동산원 예산이 없어질 텐데, 괜찮겠냐”고 압박했다는 내용도 새로 나왔다. 반면에 가계소득 통계는 차이가 났다. 자료 순서부터 달랐다. 감사원은 가계소득, 고용 순이었지만 검찰은 고용, 가계소득 순으로 발표했다. 중요도가 달라진 거다. 검찰은 소득 통계와 관련해 적법 절차를 거치지 않고 개인식별정보가 포함된 통계 기초자료를 제공받은 홍장표 전 경제수석 한 사람만 기소했다. 감사원이 통계청 공무원 넷을 포함해 모두 7명을 검찰에 넘겼음을 떠올리면 말 그대로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이다. 전임 정부 마지막 통계청장을 지낸 류근관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최근 대학신문에 ‘통계청에 의한 통계조작 있었던가’라는 글을 올렸다. 소득 통계의 원자료인 가계동향조사를 둘러싼 논란에 대해 “표본 개편과 가중치 부여 자체는 통계조작이 아니다”고 썼다. 검찰도 그렇게 본 것 같다. 정책 비판의 대상은 될지언정 법의 잣대로 판단할 일은 아니었다. 시시비비를 가리자고 득달같이 달려드는 감사원 발표보다 상대적으로 차분한 검찰 발표가 더 돋보인 대목이 있었다. 검찰은 집값 통계조작으로 국민은 시장 상황을 오판하게 됐고 국토부 예산 368억원이 허비됐다고 지적했다. 국가 통계가 무용지물이 됐으니 거기에 쓴 세금이 낭비된 것은 맞다. “정확한 국가 통계는 정부정책 수립의 근간이자 사회 구성원의 각종 의사결정을 합리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공공자원이므로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과학적인 방법에 따라 중립적으로 작성돼야 함”이라는 검찰 발표에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으로 돼 있는 현행 통계법의 벌칙 규정을 더 강화해야 한다는 제안도 고개를 끄떡이게 했다. 두 기관의 발표문만 보면 검찰이 정책감사에 신경 쓰는 감사원 같고, 감사원은 법전 펴놓고 단죄하는 검찰 같다. 검찰 지적이 향후 정책 개선에 더 도움이 되겠다. 지난해 감사원 발표 직후 ‘통계조작과 정치감사 사이’라는 칼럼에서 진실은 그 사이 어디엔가 있을 것이라고 썼다. 지금도 같은 생각이다. 서경호(praxis@joongang.co.kr)

2024-03-18

단열에 태양광 발전까지…에너지 생산하는 건물 온다 [최현철 논설위원이 간다]

성큼 다가온 제로에너지 건축물 시대 자동차를 바꿀 때 전기차를 살지 한 번쯤 고민하게 된다. 정부는 석탄 발전소를 태양광이나 풍력으로 대체할지 검토한다. 기업들은 신재생에너지를 쓰지 않으면 수출할 때 관세를 물게 될까 걱정이다. 어느새 탄소 줄이기는 일상의 고민이 됐다. 이런 변화가 건물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건축은 발전과 산업, 수송에 이어 탄소배출량이 4번째로 많은 분야다. 2018년 5210만 t을 2030년까지 3500만 t으로 32.8%나 줄이겠다는 감축 목표치가 나와 있다. 이미 그런 목표를 실현해나가는 건물이 하나둘 늘고 있다. 제로에너지 건축물이다. 노원 이지하우스, 패시브 건축 기술로 에너지 자립률 126% 제로에너지 건축물 인증제 도입, 지금까지 1057곳 본인증 공공임대도 인증 의무화…공사비 급증에 민간 확대 주춤 서울시 용적률 인센티브 검토…2030년 100조원 대 예상 패시브 건축의 이정표 제로에너지 건축물은 자체 생산하는 에너지로 사용할 에너지를 다 충당할 수 있는 건물이라는 의미다. 지난 12일 둘러본 서울 노원구 하계동 ‘노원 이지하우스’는 이 분야에서 이정표 같은 역할을 한 건축물이다. 이름도 에너지 제로(Energy Zero)의 영문 첫 글자를 따 지었다. 노원구 중계동 학원가에서 하계역으로 이어지는 한글비석로에 위치한 이지하우스는 무심코 길을 따라가다 보면 모르고 지나칠 만큼 평범한 아파트 단지다. 아파트 3개 동, 빌라 1개 동과 복층형 단독주택 3채로 구성된 주택단지로 121세대의 주민이 실제 거주한다. 이 곳은 2013년 정부가 발주한 제로에너지 공동주택 실증단지 국가 연구개발(R&D) 사업으로 출발했다. 이 과제를 이명주 명지대 교수팀과 서울시, 노원구, KCC 컨소시엄이 따냈다. 독일 유학 후 2003년 명지대에 부임한 이 교수는 건물 에너지 분야 전문가다. 독일은 이미 1990년대부터 단열, 고성능 창호, 공기 밀폐, 열전달 차단 등을 통해 에너지 소요량을 줄이는 패시브 설계가 도입됐다. 이 교수는 실증단지에 일종의 실험 주택부터 만들었다. 이곳에서 패시브 기술에 필요한 온갖 자재의 성능을 실험하고, 지어진 뒤 주택의 상황을 재연해가며 설계와 시공을 수정해갔다. 이 교수는 “당시에 처음 도입하는 방식이어서 대부분의 부품과 자재를 주문생산하고 일부는 수입해 썼다”며 “개별 부품과 장비는 설계대로 효율을 내는데, 전체 시스템으로는 조화가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종종 생겨 고생했다”고 설명했다. 이때 축적한 노하우가 국내 패시브 건축 시장 확대에 초석이 됐다. 패시브 설계의 기본은 단열. 일반 건축물은 벽 안쪽에 단열재를 넣고 내부 마감을 한다. 외부로 노출된 콘크리트 벽은 여름엔 구들장이 되고, 겨울엔 안쪽 열을 밖으로 내뿜는 에어컨 실외기가 된다. 이를 막기 위해 이지하우스는 벽 바깥에 단열재를 붙이는 외단열을 채택했다. 블라인드를 창 안쪽이 아닌 바깥에 붙인 것도 같은 이유다. 삼중 유리 창문을 달고, 단열 부위에 열이 세는 것을 막는 테이핑을 했다. 단열재가 보강된 현관문은 냉장고 문 만큼 두껍다. 외부로 돌출된 발코니와 본체 벽 연결 부위에서 단열이 끊기고 열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위해 스테인리스 스틸을 용접한 철근이 들어간 차단재를 썼다. 그야말로 ‘열 셀 틈 없는’ 시공만으로 전체 에너지 소비량이 74%가량 감소했다. 여기에 에너지를 자체 생산하는 액티브 기술을 더했다. 건물 옥상과 벽에 1274개의 태양광 패널을 달아 전기를 생산한다. 지하에 160m 깊이로 48개의 구멍을 뚫고 파이프를 박아 물을 주입하면 사시사철 15℃를 유지하게 된다. 이 물을 히트 펌프로 데우거나 식혀 냉난방과 급탕용으로 쓴다. 물론 히트 펌프도 태양광 발전에서 얻은 전기로 돌린다. 이 교수는 “비용이 더 들지만 조금 신경 써 지으면 생각만큼 크게 늘지 않는다”며 “결국 발상과 관심의 차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팀은 완공 이후에도 7년 동안 현장에 상주하며 건물 유지와 데이터 수집·분석 작업을 하고 있다. 현재 상주하고 있는 이응신 교수는 “아무리 세심하게 설계를 했어도 실제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문제가 생기는데 이를 방치하면 애써 만든 실증단지가 순식간에 일반 주택으로 전락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축적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실제 설계 효율을 달성하고 있는지 분석하고 결과를 건축 전문잡지를 통해 발표했다. 2020년 분석치에 따르면 2017년 12월부터 28개월간 총 태양광 발전량은 97만㎾h, 히트 펌프와 일반 전력 사용량은 77만㎾h로 에너지 효율은 126%를 달성했다. 제로 에너지를 넘어 플러스 에너지 건물인 셈이다. 민간에도 확대되는 제로에너지 건축 노원 이지하우스가 한창 지어지고 있는 동안 국내 주택 분야 탄소절감 로드맵이 나왔다. 준공 무렵엔 제로에너지 건축물 인증제가 도입됐다. 에너지 자립률(사용량 대비 자체 생산량 비율)이 20% 이상이고 건물 에너지관리 시스템(BEMS)을 갖춰야 인증을 신청할 수 있다. 자립률 20~40%면 5등급, 100% 이상은 1등급을 받는 식이다. 2020년 1000㎡ 이상 공공 건축물부터 인증이 의무화됐다. 인증 없이는 인허가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 지난해에는 500㎡ 이상 공공건물과 30세대 이상 공공 아파트도 대상에 포함됐다. 이제 신축 공공임대 아파트는 최소 20% 이상 자체 생산 에너지를 써야 한다. 올해부터는 30세대 이상 민간 아파트로 확대될 예정이었는데 당분간 연기됐다. 2030년부터는 공공, 민간부문 모두 연면적 500㎡ 이상 건축물 신축 시 제로에너지 건축물 인증을 받게 한다는 게 정부 로드맵이다. 현재까지 5241개 건물이 예비인증을 통과했고, 이 중 1057곳이 준공 후 실사를 거쳐 본 인증을 받았다. 자립률 20%만 넘기면 인증이 나오지만 100%를 달성한 1등급 건물도 66곳이나 된다. 건설산업연구원에 따르면 로드맵이 제대로 이행될 경우 제로에너지 건축물 시장 규모는 2030년 93조~107조원, 2050년에는 180조4000억원까지 확대될 것으로 예상한다. 최초의 상업용 플러스에너지 빌딩 아직 인증 의무 대상이 아닌 민간에서도 시장을 선점하려는 움직임이 뚜렷하다. 삼성물산이 부산 에코델타시티에 지은 스마트 빌리지, SK의 과천 게스트하우스, LG전자의 판교 씽크홈 등 대기업들이 시험 제작에 뛰어들었다. 경기 고양시 덕양구 향동지구에 세워진 에너지엑스 DY 빌딩은 상업용 빌딩으로는 유일하게 인증을 받은 건물이다. 지하 2층 지상 5층에 연면적 3000㎡가 넘는 규모인데 1등급을 받았다. 에너지엑스는 정보기술(IT) 건축 플랫폼을 지향하는 스타트업이다. 건축주와 건축사·건설사(시공사)·관리회사를 연결해주는 플랫폼을 구축하고, 에너지엑스는 그 안에서 설계나 컨설팅을 했는데 점차 제로 에너지 건축 쪽으로 초점을 맞추게 됐다. 그동안 축적한 기술을 선보이고 새 기술을 실증·분석하는 테스트 베드로 쓰기 위해 직접 향동지구에 새 사옥을 지었다. 지난 14일 이 빌딩에서 만난 홍두화 공동대표는 “일종의 모델하우스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 비용이 좀 들더라도 현재 구현 가능한 최고의 기술을 적용해 지은 건물”이라고 소개했다. 노원 이지하우스가 패시브 기술에 심혈을 기울였다면 이 건물은 액티브 쪽에 강조점을 뒀다. 우선 건물 외벽에 태양광 패널을 붙인 것이 아니고 외벽 자체를 태양광 패널로 마무리한 일체형 방식(BIPV)을 도입했다. 창에도 전기를 만드는 반투명 패널을 달았다. 물론 패시브 기술은 기본. 홍 대표는 “지열 시스템은 없지만 태양광 만으로도 건물에서 쓰는 에너지의 121%를 생산한다”고 말했다. 이 건물 5층엔 대형 모니터를 모아놓은 관제센터가 있다. 층별 에너지 사용량과 발전량 등을 표시하는 건물 에너지 관리 시스템(BEMS)이다. 에너지엑스는 이 시스템에 인공지능을 입혀 원격 제어하는 서비스 제공을 장기 목표로 삼고 있다. 건축비 부담에 속도 조절 그간 빠르게 확대되던 제로에너지 건물 인증 의무화는 올해 제동이 걸렸다. 건축비 상승 여파다. 제로에너지를 구현하려면 일반 건물보다 비용이 더 들 수밖에 없다. 건설산업연구원은 제로에너지 5등급을 달성하려면 비주거 건축물은 30~40%, 공동주택은 표준건축비보다 4~8% 비용이 늘어난다고 분석했다. 인허가를 다 받은 재건축 단지도 건축비 부담을 이기지 못해 무산되는 마당에 이런 추가부담을 안으라는 요구가 무리라는 판단이다. 그래서 올해 도입하려던 30세대 이상 민간 공동주택의 인증 의무화는 일단 연기됐다. 그렇다고 한정 없이 밀릴 것 같지는 않다. 국제사회에 매년 탄소 감축량을 제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빠듯하게 짜인 계획인데, 한 분야를 봐주면 다른 분야의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인센티브를 늘리는 방안이 고려되고 있다. 서울시는 재건축 때 제로에너지인증을 받으면 용적률 인센티브를 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용적률 300%로 30층 높이를 계획 중인 단지가 인증을 받게 되면 34층까지 지을 수 있게 된다. 최현철(choi.hyeonchul@joongang.co.kr)

2024-03-18

[최준호의 사이언스&] 땅속 천연수소 5조t, 화석연료 시대 막 내릴 주인공 될까

에너지의 역사가 본격적인 대변환기를 맞고 있는 걸까. 우주에서 가장 풍부한 원소이지만, 인류가 사는 지구 속 자연 상태에선 다른 원소와 결합 없이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수소의 상식이 바뀔 조짐이다. ‘천연수소(natural hydrogen)’가 그 주인공이다. 천연수소란 석유나 천연가스처럼 땅속에서 채굴해 얻을 수 있는 순수한 수소분자(H2)를 말한다. 이런 특성 때문에 천연수소는 ‘골드(gold) 수소’ 또는 ‘화이트(white) 수소’라 불리기도 한다. 천연수소의 존재는 1920년대부터 조금씩 알려져 왔다. 바닷속 대륙 지각이 부딪히는 해령(海嶺) 부근에서나, 석유 시추과정에서 수소가 발견됐다는 보고가 꾸준히 있었다. 하지만 그간 천연수소는 농도도 낮고, 드물게만 존재할 것으로 여겨져 왔다. 전 세계 과학자들이 수소를 인공적으로 얻을 수 있는 방법을 경쟁적으로 연구해왔지만, 순수한 수소를 값싸게 얻기까진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이 일반적 인식이었다. 대규모 매장 후보지 속속 발견 인류 수백 년 사용할 수 있는 양 국가·기업 차원 관련 연구 활발 아직은 초기, 해결할 과제 산적 수소 발굴 ‘골드러시’의 서막? 하지만 최근 들어 세계 각지에서 석유와 천연가스 발굴 과정 등을 통해 고농도의 수소가 누출되거나 매장돼 있다는 보고가 이어지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달 18일 ‘지질학자들이 새로운 에너지 ‘골드러시(gold rush)’의 시작을 알리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그간 무탄소 에너지 자원으로 평가받지 못했던 천연수소에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FT는 미국 지질조사국의 미발표 보고서를 인용해 천연수소 매장량이 전 세계적으로 5조t에 달한다고 전했다. 이렇게 매장된 수소의 대부분은 접근 불가능하지만, 그 일부만 사용하더라도 인류가 수백 년간 사용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 보고서의 내용이다. 말 그대로라면, 기후 위기를 부른 화석연료의 시대를 끝낼 수도 있게 된다. 지질학자들이 찾아낸 가장 최근의 대규모 천연수소 매장지는 발칸반도 내 국가 알바니아에 있다. 국제학술지 사이언스는 지난달 알바니아의 불키저 지역의 한 광산에서 역대 최대 규모의 천연수소 샘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이곳은 오래전 바닷속 암반층이었던 곳이 지표로 올라온 ‘오피올라이트’라는 지질층으로, 이곳 땅속 1㎞ 지점 물웅덩이에서는 연간 11t 규모의 천연수소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이 지점을 포함해 일대 광산에서는 연간 200t 이상의 천연수소가 흘러나오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외에도 프랑스 로렌 지역에서는 매장량이 수천만 t으로 추정되는 후보지가 발견됐고, 호주 남부 지역 여러 곳에서도 천연가스와 함께 천연수소가 발견되고 있다. 고온·고압 환경에서 생성 다른 원소와 결합한 형태가 아닌 천연수소가 어떻게 땅 밑에 존재할 수 있을까. 사실 천연수소가 생성되는 원리는 과학자들이 물과 고열로 수소를 만들어내는 원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천연수소가 생성되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대부분은 ‘사문석화(蛇紋石化·serpentinization)’라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 지각 아래 맨틀의 철성분을 가진 감람석이 고온 고압의 조건에서 물을 만나면 산화 반응이 일어나 사문석으로 바뀌면서 부산물로 수소가 나온다. 이 외에도 암석 내 방사성 원소가 붕괴하면서 물이 분해돼 수소가 생기기도 한다. 수소는 원소 중 가장 작고 가볍기 때문에 생성되더라도 지상으로 빠져나와 공기 중으로 흩어지기 쉽지만, 암석이나 밀도 높은 퇴적층을 만나면 천연가스처럼 특정 지층 아래 쌓이게 된다. 이처럼 대규모 천연수소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개발에 뛰어드는 국가와 기업들이 본격적으로 생겨나고 있다. 미국 에너지부의 첨단연구프로젝트사무국(ARPA-E)은 지난해 천연수소 생산·추출 기술 연구에 2000만 달러(약 270억원)를 지원했다. 미국 스타트업 콜로마는 지난해 빌 게이츠 재단 등으로부터 9100만 달러의 투자를 받기도 했다. 프랑스 석유에너지연구소(IFPEN)는 2010년대부터 천연수소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해 오고 있고, 호주 지질과학원도 2021년 천연수소 연구 프로젝트를 착수했다. 천연수소의 연구과 개발은 국내에서도 시도되고 있다. 한국석유공사가 2022년부터 천연수소 발굴을 위한 연구를 시작했다. 박재한 한국석유공사 기술전략팀장은 “2020년 국제학술지에 게재된 천연수소 발견 사례를 집대성한 논문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천연수소 발굴을 위한 과제를 기획하게 됐다”며 “지난해에는 전국 200곳을 골라 천연수소 탐사를 했고, 올해는 6곳으로 대상 지역을 좁혀 천연가스 매장 가능성을 알아보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 출연 연구소인 한국지질자원연구원도 지난해부터 천연수소 국가 연구개발(R&D) 추진전략안 도출을 목표로 천연수소 시스템 이론 및 해외 사례를 전반적으로 검토하는 한편 국내 부존 가능성에 대해서도 연구하고 있다. 인공 청정수소 생산 연구도 계속 이 같은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천연수소의 활용은 아직 미래의 얘기다. 현재로선 메탄(CH4)이 주성분인 천연가스를 촉매로 이용해 고온·고압 환경에서 수소를 뽑아내거나, 제철 과정에서 나오는 수소(부생 수소)에 의지하고 있다. 하지만, 개질(改質·화석연료에서 수소를 뽑아내는 방법) 과정에서 이산화탄소(CO2)가 발생하는 등 환경 문제가 대두할 수밖에 없다. 또 천연가스 국제가격이 급등하면 수소 생산 비용에도 직접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만들어진 수소는 탄소 발생이 불가피하다고 해 ‘그레이(grey) 수소’라고도 부른다. 과학계에서는 최근 천연가스 개질 과정에서 나오는 이산화탄소를 포집하는 방법을 연구 중이다. 이른바 ‘탄소포집·저장(CCS·Carbon Capture and Storage)’ 기술이다. 이렇게 생산된 수소는 좀 더 청정하다고 해서 ‘블루(blue) 수소’라고 칭한다. 가장 깨끗한 수소 생산은 물(H2O)을 전기분해하는 방법이다. 전기와 촉매를 이용해 물 분자를 산소와 수소로 분리해내는 방법으로, 이런 수소는 깨끗한 생산 과정을 거친다고 해 ‘그린(green) 수소’라고 한다. 민병권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청정에너지연구본부장은 “천연수소의 존재와 발굴에 관한 연구는 아직 초기 단계”라며 “이미 다가온 수소경제 시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깨끗한 수소의 생산과 운반·저장 등을 위한 연구는 병행될 수밖에 없는 과제”라고 말했다. 최준호(joonho@joongang.co.kr)

2024-03-18

[하현옥의 세계경제전망] 마이너스 금리 해제해도, 완화 기조는 유지할 듯

통화정책 전환 나선 일본은행 저물가의 족쇄에 갇혀 전례 없는 금융완화 정책을 펼쳤던 일본은행(BOJ)이 통화정책 정상화를 목전에 두고 있다. 이번 달 금융정책결정회의(18~19일)에서 마이너스 금리를 해제할 것이란 전망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금리 인상에 나서면 2007년 이후 17년 만에 금리를 올리는 것이다. 마이너스 금리 해제는 2016년 1월 도입 이후 8년여 만이다. 우에다 가즈오(植田和男) BOJ 총재는 지난 7일 참의원(상원) 예산위원회에서 “물가 목표 실현을 전망할 수 있는 상황이 되면 마이너스 금리 등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의 수정을 검토해갈 것”이라고 밝혔다. 수입 물가 상승 등으로 저물가 탈출을 위한 길은 열렸다. 지난해 일본의 소비자물가지수(CPI·신선식품 제외)는 3.1%(전년 대비) 상승했다. 상승 폭으로는 1982년 이후 41년 만에 가장 컸다. 인플레이션 기조는 이어지고 있다. 지난 1월 CPI 지수(전년동기대비)도 2.0% 뛰었다. BOJ의 물가 목표치(2.0%)에 부합하는 흐름이다. 비전통적 통화정책 펼쳤던 BOJ 유동성 공급 정책 되감기 시작 금융시장 왜곡 부메랑 우려에 과감한 긴축으로 가진 않을 듯 대폭 오른 임금, 금융 완화 힘 실어 마지막 퍼즐도 맞춰지고 있다. 일본 대기업이 큰 폭의 임금 인상에 나서며 통화정책 정상화에 탄력이 붙었다. 일본 최대 노조 조직인 렌고(連合·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가 지난 15일 발표한 1차 노사교섭의 평균 임금인상률은 5.28%다. 5%대 임금 인상률은 1991년(5.66%) 이후 33년 만이다. 기업은 노조의 요구를 속속 수용하고 있다. 토요타자동차는 1999년 이후 25년 새 가장 큰 폭(직종·계급별 최대 월 2만8440엔)으로 임금을 올리기로 했다. 임금 인상은 금리 인상의 전제 조건인 지속적인 인플레이션의 중요한 요소다. 엔저와 수입 물가 상승이 띄운 인플레 흐름이 일시적인 현상으로 그치지 않으려면 임금발 물가 상승으로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임금과 물가 상승의 선순환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블룸버그는 “토요타가 일본 대기업 임금 추세의 기준점 역할을 하는 상황에서 이번 인상은 BOJ가 전례 없는 금융 완화 정책을 단계적으로 폐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것으로 기대된다”고 보도했다. 지난해 4월 취임한 우에다 총재는 마이너스 금리 탈출을 위한 사전정지 작업을 해왔다. 지난해 7월과 10월 장기금리의 상단을 높이는 수익률곡선제어(YCC) 완화 정책이 그 신호탄이었다. 마이너스 금리 해제로 BOJ가 그동안 풀어온 각종 통화정책 되감기가 본격화할 전망이다. 정책 도입과 시행의 역순으로 ‘YCC 완화→마이너스 금리 종료 및 YCC 폐기→자산 매입 축소’의 정상화가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디플레 탈출 위한 ‘구로다 바주카포’ 일본은 각종 통화정책의 시험장이었다. 거품 경제가 무너지고 저성장과 저물가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이에 대응하기 위한 금리 인하와 제로금리 등 전통적 통화 정책이 바닥나자, BOJ는 양적 완화(QE)와 마이너스 금리, YCC 등을 통한 장단기 금리 관리 등 비전통적 통화 수단을 도입했다. 2001년 3월 일본 정부가 디플레이션을 선언한 뒤 BOJ는 저물가와의 길고도 지루하며 험난한 전쟁에 돌입했다. BOJ의 통화정책 실험은 아베노믹스와 함께 본격화했다. 만성적인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나기 위해 당시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 총재는 유동성을 쏟아부었다. ‘구로다 바주카포’의 등장이다. 구로다가 가장 먼저 도입한 것은 2013년 4월 개시한 양적·질적 통화 완화(QQE) 정책이다. 통화 정책 수단을 콜금리에서 본원통화로 변경하고, 본원통화를 2년 안에 2배 늘려 인플레이션 2%를 달성하겠다는 목표였다. 이를 위해 국채 매입을 통해 본원통화를 연간 60조~80조 엔씩 늘리고, 장기 국채보유 잔액을 연간 50조~80조 엔씩 늘려 시장금리 하락을 유도했다. 상장지수펀드(ETF)와 리츠(REITs)의 대규모 매입을 통해 부동산과 주식에 간접 투자했다. ETF와 리츠 등 매입 자산의 질적 측면에서 완화한다는 의미로 이를 질적 완화라 칭했다. 유동성의 수도꼭지를 제대로 열었지만, 불황과 저물가는 난제였다. 새로운 충격 요법을 고민하던 구로다가 꺼내 든 카드가 마이너스 금리다. 2016년 1월 BOJ는 시중은행이 BOJ에 예치하는 지급준비금에 부과하는 단기정책 금리를 -0.1%로 끌어내렸다. 마이너스 금리에서는 예금을 맡길수록 손해다 보니 민간은행은 손실을 피하기 위해 지급준비금을 헐어서 대출이나 유가증권 등에 투자를 늘리는 유인이 생기게 된다. BOJ의 통화정책 실험의 마지막은 2016년 9월 도입한 YCC다. 단기금리(-0.1%)를 마이너스로 두면서 장기금리(10년물 국채 금리)를 0%로 유지하도록, 장기금리인 10년 국채 금리가 상승해 상한선을 넘어서면 국채를 사들여 국채 가격을 높여 금리를 낮추는 것이다. BOJ가 국채 매입의 큰 손이 돼 국내 유동성을 조절하며 물가 목표치 달성까지 본원통화를 늘려왔다. 오랫동안 꿈쩍 않던 BOJ가 통화정책 정상화를 향한 의지를 드러낸 건 2022년 12월부터다. 장기금리인 10년물 국채 금리 변동 폭을 0.5%로 확대했다. 지난해 7월에는 10년 국채 금리 상단을 1.0%로 높였고, 지난해 10월에는 10년물 금리 상단 1.0%를 목표치로 바꾸며 지정 가격 국채 매입을 통한 장기금리의 엄격한 통제를 포기했다. BOJ가 사실상 장기금리 인상을 허용한 것으로, 시장은 통화정책 정상화를 위한 단계로 평가했다. BOJ가 마이너스 금리 해제와 YCC 폐기에 나서겠지만, 곧바로 통화긴축으로 이어지진 않을 전망이다. 우에다 총재는 중의원 회의에서 “마이너스 금리 해제 후에도 완화적인 금융 환경이 당분간 지속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경제성장률이 확연하게 개선되지 않는 데다 소비 회복도 쉽지 않을 수 있어서다. 지지통신 등에 따르면 마이너스 금리를 해제하더라도 국채 매입은 유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게다가 통화정책 정상화 자체도 만만치 않다. BOJ의 물량 공세로 채권과 주식 시장에 누적된 왜곡이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어서다. 그중 하나가 ETF다.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은 2월 말 현재 BOJ가 보유한 ETF의 시가총액은 71조 엔으로 장부가보다 34조 엔 높다고 보도했다. 닛케이 지수 상승으로 대박을 맞았지만, 섣불리 수익 실현에 나설 수는 없다. BOJ가 ETF를 내다 팔면 주가 폭락을 피할 수 없다. BOJ의 유동성에 취해있던 채권 시장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수 있다.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BOJ는 현재 매달 7조5000억 엔 규모의 일본 국채를 사들이고 있다. 연간 순매수 규모는 17조 엔이다. 시장의 큰손이었던 BOJ의 국채 매입 규모가 줄면 중장기 금리 인상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BOJ, 국채 발행 잔액의 54% 보유 시장 금리가 오르면 BOJ도 충격을 피할 수 없다. BOJ의 당좌예금 잔고는 518조 엔에 이른다. 금리가 뛰면 이자 지급액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 게다가 BOJ의 국채 보유 잔액은 전체 발행 잔액의 54%에 달한다. 마이너스 금리 해제와 국채 매입 중단 등으로 국채 금리가 오르면(국채 가격 하락) 막대한 평가 손실을 입게 된다. 지난해 4월 일본경제연구센터의 추산에 따르면 단기금리가 2%, 장기금리가 3%까지 오르면 BOJ는 12조 엔의 적자를 기록하고 자본잠식 상태에 빠질 것으로 예상됐다. 일본 정부 지출의 국채 의존도가 30%를 넘는 것을 감안하면 보유 잔액을 빨리 줄일 수도 없다. 이승훈 메리츠증권 이코노미스트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일반정부 채무가 260%에 달하는 환경에서 장기금리 1%라는 기준을 단기간에 조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인플레이션이 2%를 넘고 명목 GDP가 매년 3~4% 늘어날 수 있다는 환경이 조성되고 믿음이 생겨야 1% 이상으로 시중 금리 상승을 본격적으로 용인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일본의 통화정책 정상화 여파는 국제 금융시장에도 미칠 전망이다. 일본의 시장 금리가 상승하면 일본 국채 투자가 늘어날 수 있다. 해외로 나갔던 자금이 돌아오면서 엔화 가치는 뛰고, 미국 국채 수요는 줄어들 수 있다. 다만 BOJ가 통화정책 전환과 관련해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관측에 시장은 조심스러운 분위기다. 블룸버그는 “투자자들이 BOJ의 결정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다”고 보도했다. 하현옥(hyunock@joongang.co.kr)

2024-03-18

[삶의 향기] 결국 나의 친구는 나였던 거다

조병화 시인의 ‘결국 나의 천적은 나였던 거다’라는 시 구절을 기억하면서 늘 맞는 말씀이라고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그 시 구절이 너무 당연한 말씀이 된 지 오래다. 요즘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또 하나의 당연한 말은 ‘결국 나의 친구는 나였던 거다’ 아닐까 싶다. 어디서나 ‘진정한 우정 같은 거 없다’ 같은 제목들이 넘쳐난다. 부담스러운 진심을 남에게 기대하지 말자는 영리해진 현대인의 마음 자세일지 모른다. 점점 소중해지는 혼자의 시간 선물인지도 모르고 보낸 날들 오늘도 나의 귀한 하루를 썼다 언젠가 맛집으로 소문난 식당에서 지인 몇이 점심을 먹고 있는데, 유명 시인 J 선생님이 혼자 들어와 맞은편 자리에 앉으셨다. 혼자 오셨나 물으니 그렇다 하셨다. 맛집이라 소문나서 일부러 와봤다 하신다. 속으로 의아했지만, 나이 들면서 그 기분을 이해한다. 나도 요즘 부쩍 혼자 다니는 걸 즐긴다. 할 일을 마치고 식당 창가에 앉아 가장 친한 친구 ‘나’ 자신과 함께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며 식사한다. 맥주 한 잔이 정취를 더한다. 이럴 때 산다는 건 선물이다. 타인에 대한 애착이 점점 없어지는 건 어쩌면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 버리기의 연습일지 모른다. 애착뿐 아니라 낡은 생각들도 버려야 한다. 서른 살 조카가 사랑하는데 동성이든 이성이든 상관없는 양성애자라고 떳떳이 말하는 걸 보면서 한 방 두들겨 맞은 기분이던 날도 오래전 일이다. 현실이 소설이나 영화보다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연애 감정을 느끼지 않는 또 하나의 성, ‘에이섹슈얼(asexual)’이란 낯선 단어가 떠오른다. 우리말로 무성애자다. 그에 비하면 양성애자는 따뜻하게 들린다. 문득 ‘너는 뭔데?’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점점 한 친구와 만나기보다는 여럿이 모이는 게 즐겁다. 그것도 아주 가끔이라야 한다. 한 사람을 만난다는 건 그가 지닌 인품과 성숙함과 유머를 함께한다는 것이다. 원래 그랬던 건지, 세월이 지날수록 후퇴하는 건지, 점점 낯설어지는 오래된 친구와의 시간이 아까워질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내 가장 친한 친구 ‘나’랑 노는 게 낫다. 시간 깍쟁이가 되어가는가 보다. 오늘도 내 귀한 목숨의 하루분을 다 써버렸다. 젊을 때는 못 느끼던 죄책감이 살짝 스치고 지나간다. 밑도 끝도 없이 긴 넷플릭스 중국 드라마를 이제 보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끝이 나 버리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그럴 것이다. 엉뚱하게도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의 구호, ‘하루를 이틀만큼 일하자’는 문구가 생각난다. 나는 그 문구를 ‘하루를 이틀처럼 놀자’로 바꾸고 싶다. 젊을 땐 늘 누군가 그리웠다. 지금은 나 자신이 그립다. 귀한 줄도 몰랐으므로 지나간 시간은 아쉽지도 않다. 늙음은 때로 참 좋다. 마일리지를 모으고 모아 내 나이 환갑에 내가 내게 주는 생일 선물로 뉴욕 가는 일등석을 타본 적이 있다. 일등석은 비즈니스석하고도 달라 더 독립적이고 좀 외롭다. 자고 있으면 방해될까, 식사 시간이 와도 깨우지 않는다. 오래전 마카오 여행길에 비싼 새 호텔과 비싸지 않은 오래된 호텔의 장단점을 물으니 비싼 호텔은 명품을 파는 면세점과 연결되어 있고, 덜 비싼 호텔은 옛 골목들을 둘러보기 좋다는 답이 돌아왔다. 인생도 그렇다. 부잣집에 시집가서 시집살이에 주눅이 들어 많지 않은 나이에 치매에 걸린 분을 본 적이 있다. 사별한 그분은 사실 돈밖에 가진 게 없을 정도인데, 본인은 그걸 모른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생각한다. 인생이라는 게 그렇게 터무니없다. 우리의 그 터무니없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 비록 타인의 경험이라도 늘 무언가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것일까? ‘그대여 그대에게서 나를 본다.’ 그게 인생이니까. 개인이 아닌 사회도 국가도 세계도 우주도 다 그럴 것이다. 우리는 오늘보다 나은 내일, 지금보다 나은 내가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삶을 이어간다. 비록 지구의 수명이 다해 결국은 끝날지라도. 나는 가끔 아무 생각 없이 멍 때리던 초등학교 시절의 교실 풍경으로 되돌아간다. 오래된 내 인생의 호흡법이다. 지구의 신비로운 자연을 담은 다큐멘터리에서 세상 곳곳에 사는 희귀한 동식물들을 볼 때마다 내 크고 작은 걱정거리들은 아무것도 아닌 듯하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윤동주의 그 시 구절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는 구십 살 정신과 의사의 절절한 말씀이 오늘도 내 멍때림을 깨운다. 인생은 긴 지루함과 기다림, 초조함과 외로움, 순간의 기쁨과 슬픔, 내게만 주어진 것처럼 느껴진 고통, 선물인지도 모르고 흘려보낸 많은 무사한 날들, 그리고 그 끝은, 아니 완성은 언젠가 결코 미룰 수 없이 다가올 원고 마감이다. 황주리 화가

2024-03-18

[김승현의 시선] 대통령의 ‘박력’이 놓치면 안 되는 것

전공의들이 사라졌다. 한국 주요 병원 의사의 40%를 차지하던 이들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의대 정원 2000명 확대를 밀어붙이면서 벌어진 일이다. 정부는 의사들의 집단 사직과 복귀 명령 불복에 의료법 위반의 소지가 있다고 본다. “일찍 돌아오면 선처할 수 있다”는 당근도 제시하지만, 진료 공백의 책임에 대한 채찍은 엄중하다.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볼모로 한 집단행동”(윤 대통령 국무회의 발언)이라는 것이다. 특수수사 닮은 의대 증원 추진 윤석열·한동훈식 박력 보여줘 ‘정교한 박력’은 객관성 갖춰야 숫자로 인한 갈등은 ‘존재론적 담론’으로 확장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일은 국가가 존립하는 이유이자 정부에게 주어진 가장 기본적인 헌법적 책무”라는 게 윤 대통령의 논리다. 필수 의료와 지역 의료 붕괴라는 현실에 대응해 ‘헌법적 책무’를 다하려는 정부의 박력(迫力)에 여론은 환호한다. 귀에 꽂히는 간결한 메시지, 준엄한 명분, 물 샐 틈 없는 법리, 선과 악의 대결 구도…. 의대 증원 정책은 전형적인 ‘윤석열 스타일’로 진행되고 있다. 서울대 법대-대검 중수부 후배인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에게서도 포착되는 스타일이다. 지난해 12월 26일 위원장직을 수락하면서 한 연설이 근거다. “정교하고 박력 있는 리더십이 국민의 이해와 지지를 만날 때, 나라가 발전하고 국민의 삶이 좋아진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정교한 박력.’ 그것은 윤석열과 한동훈을 연결하는 백전불태의 방법론이다. 과거의 몇몇 대형 특수수사가 그런 패턴이었다. 귀에 쏙 들어오는 메시지만으로도 수사의 당위성에 박수를 보내게 되는 사건들이다. 가까이는 ‘국정 농단’, ‘사법 농단’이 예다. 거슬러 올라가면 2006년의 론스타 사건도 그중 하나다. 부실한 은행을 해외 사모펀드(론스타)에 더 싸게 매각하려는 로비와 배임이 있었다는 의혹에 대한 수사였다. 윤석열·한동훈 검사가 참여한 수사팀은 사건을 ‘해외 투기자본의 먹튀’라고 규정했다. 우리의 알짜 금융사를 ‘해외’에서, 그것도 투자가 아닌 ‘투기’로, 싸게 사서 비싸게 되팔아 이익만 먹고 튄다고? 이 수사에 반대할 국민이 있겠는가. 혈기왕성한 정의감, 쾌도난마로 비리를 척결하는 박력은 늘 국민적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항상 성공으로 귀결되는 건 아니었다. 환호와 응원의 소리가 클수록 반론과 변수는 많았다. 론스타는 2003년 외환은행을 1조3000억 원대에 사서 2012년 하나금융지주에 3조9000억 원대에 팔았다. 10년의 세월에 검찰 수사와 금융 당국의 제재 등이 있었고, 헐값 매각의 앞잡이로 매도된 엘리트 경제 관료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심지어 론스타는 “한국 정부의 부당한 개입으로 더 비싼 값에 매각할 기회를 잃고 가격까지 내려야 했다”며 2012년 약 46억 달러(약 6조원) 규모의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투자자·국가분쟁해결(ISDS) 절차를 개시했다. 2022년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 중재 재판부가 청구액의 4.6%(약 2억 달러)의 배상액을 결정했고 아직도 진행형이다. 한동훈 당시 법무부 장관은 “10여년간 여러 정부를 거치면서 대한민국 정부가 싸워온 사안이다. 국민의 피 같은 세금이 낭비되지 않도록 끝까지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했다. 전공의 공백 사태에서 론스타 사건을 떠올리는 건, ‘지금 이 순간, 옳은 선택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혼란스러워서다. 국가와 국민의 이익을 최우선에 둔 과감한 박력이 선택지일 수 있지만, 박력만큼 넘치지 않는 정교함 탓에 국익을 제대로 형량했는지에 대한 의심을 멈출 수 없다. 전직 전공의 류옥하다(26·전 가톨릭중앙의료원 인턴 대표)씨는 최근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잔잔한 호수에 정부가 이따만한 돌을 던졌다. 얼마나 큰 돌을 던졌기에 호수에 물결이 일듯이 집단으로 사직서를 냈겠는가”라고 했다. 그는 “쥐들도 뒤 없이 몰아세우면 자살할 수 있다”며 “지금 전공의들은 뒤르켕이 말한 ‘아노미성 자살’의 상태”라고 덧붙였다. 이는 ‘믿고 따르던 규범이 사라진 아노미 상태에서 혼란을 받아들이지 못한 개인이 자살과 같은 일탈 행동을 하게 된다’는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켕(1858~1917)의 이론이다. 얼마 전까지 초엘리트였던 MZ세대 전공의들이 범죄자처럼 전락한 자신의 처지에 절망하고 있다는 얘기다. 박력은 주관이고 정교함은 객관이다. 둘 다 취하려면, ‘숫자만으로는 의료 붕괴를 막지 못한다’는 항의를 끝까지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박봉에 주당 100시간씩 일하는 ‘의료 노예’ 생활이 계속될 것이라는 불안감도 살펴봐야 한다. 정교한 박력의 지향점은 상대를 굴복시키는 승리가 아니라, ‘나라의 발전과 국민의 삶이 나아지는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김승현(kim.seunghyun@jtbc.co.kr)

2024-03-18

[시론] AI 디지털 교육에 신중한 유럽 경험 참고해야

유네스코가 지난해 7월 ‘인공지능(AI)과 교육의 미래 비전’이란 보고서를 발표했다. 많은 국가가 AI 기술을 적절한 검토·논의·규제나 로드맵도 없이 교육 같은 공적 부문에 바로 수용하는 것을 경고했다. 즉, 기술적으로만 빠르게 발전하는 AI로 인해 발생 가능한 위험을 너무 간과하지 말라는 권고였다. 유네스코, 규제 없는 AI 교육 경고 디지털 중독과 낮은 문해력 걱정 초등생 디지털 사교육 열풍 우려 유네스코의 핵심 권고 내용을 보면 ‘AI 시대의 교육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깊이 고민한 흔적이 엿보인다. AI 기술이 언제 누구에게 어떤 이유로 사용돼야 하고, 또한 사용되면 안 되는지에 대한 규범이 먼저 확립돼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이에 따르면 AI 규범은 상업적 목적으로 AI를 개발한 기업이 아니라 교육 전문성을 가진 주체에 의해 만들어져야 한다. 디지털 교과서나 자료는 반드시 독립기관을 두고 내용의 정확성, 연령 적합성, 교육학적 타당성, 문화적·사회적 적합성 등 최소한의 기준에 적합한지 사전에 점검해서 학교에 도입해야 한다. 올해 3월 미국 수학교사협회(NCTM)는 교육기관 중 최초로 AI에 대해 공식 입장을 내놨다. AI는 학생이 수학을 배우는 데 도움을 주지만, 필요한 경우 학생이 AI가 내놓은 결과를 절대적인 것으로 인식하지 않도록 교사가 설명할 것을 제안했다. 유네스코 권고대로 미국은 교사가 AI 사용지침을 NCTM 같은 교육전문기관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 있다. 10여년 전부터 선도적으로 디지털 교육을 추진해 온 핀란드·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 등 유럽의 교육 강국들은 최근 학교에서 탈디지털화와 종이책 읽기, 손글씨 쓰기 등 전통적 교육 방식으로 회귀하는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5년마다 초등 4학년을 대상으로 ‘국제 문해력 평가(PIRLS)’를 시행하는데 2021년 평가에서 문해력 점수가 하락했기 때문이다. 이들 유럽 국가는 학교에서 디지털 기기를 과도하게 사용해 종이책 읽는 시간이 감소한데서 문해력 하락의 원인을 찾고 있다. 핀란드의 경우 초·중학교에서는 종이책·연필·노트를 다시 사용하고, 디지털 교과서는 고교부터 사용하도록 정책을 바꾸는 중이다. 스웨덴은 10세 미만의 글쓰기 수업에서는 태블릿 사용을 금지하고, 6세 미만은 디지털 학습 자체를 중단할 계획이다. 네덜란드도 교실에서 태블릿·인터넷·스마트폰 등 디지털 기기 사용을 금지하기로 했다. 이들 유럽 국가는 문해력 형성에 가장 중요한 초·중학교 시기에 문해력 교육에 집중할 수 있도록 디지털 교육을 고교 이상으로 늦추고 있다. 이와 달리 한국은 2025년부터 초등 3~4학년과 중학 1학년생에게 AI 디지털 교과서를 도입할 예정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3년마다 만15세 대상으로 ‘국제 학업성취도 비교연구(PISA)’를 시행한다. 한국은 2006년 이후 PISA 읽기 부문에서 하위권 학생 비율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 한국도 문해력 하락 문제에서 유럽처럼 자유롭지 않다는 얘기다. 따라서 교육부는 초등학교의 AI 디지털 교과서 도입이 아이들의 문해력 교육에서 득과 실이 무엇인지 잘 따져볼 필요가 있다. 특히 한국처럼 사교육이 극심한 가운데 초등학교에서 디지털 교과서를 전면 사용할 경우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디지털 사교육 열풍을 얼마나 막을 수 있을지도 걱정스럽다. 출생부터 디지털기기에 과다 노출된 디지털 세대는 문해력 저하 외에도 종이책 난독증, 디지털 중독증 등 새로운 문제를 겪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학교에서 디지털 교과서를 전면적으로 도입하면 지금껏 드러나지 않은 많은 문제가 발생할 우려가 높다. 유럽 국가의 데이터도 참고하고, 예측 가능한 문제에 대한 규제도 마련하면서 부분적이고 점진적으로 도입해 가는 것이 현명해 보인다. 교육부는 ‘모두를 위한 맞춤 교육’을 위해 AI 디지털 교과서를 도입한다지만, 진정한 맞춤 교육은 AI 디지털 교과서로만 구현되지 않는다. 학생의 연령, 능력 수준, 학습 동기, 학습 성향, 디지털기기 선호도 등에 따른 교수 및 학습 전략의 세분화가 우선돼야 한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모든 학생이 종이책 대신 디지털 교과서를 사용할 경우 자칫 또 다른 교육 불평등이 야기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채선희 중앙대 교육학과 객원교수

2024-03-18

[글로벌 아이] 트럼프의 ‘통합’이 걱정되는 이유

“트럼프가 대선 후보 확정된 뒤 내놓을 첫 메시지는 ‘통합(Unity)’일 것이다.” 지난달 만난 워싱턴 인사가 귀띔해 준 이야기였다. 미 의회 관련 업무를 해 온 그는 바로 직전 플로리다에서 열린 공화당 ‘큰 손’ 기부자들의 비공개 모임인 ‘미국기회연대’ 행사에서 나온 발언들을 파악해 전해줬다. ‘통합’이란 메시지 전략을 설명한 것은 도널드 트럼프 선거캠프 선임고문인 수지 와일스였다. 연장선상에서 부통령 후보로 트럼프 열성 지지층인 ‘마가(MAGA)’ 인사는 넣지 않겠다고도 했다. 이와 관련한 본지 보도 후, 지난 5일 ‘수퍼 화요일’에서 압승을 거둔 트럼프는 실제 연설에서 “우리는 통합을 원한다”고 말했다. 마뜩잖더라도 다른 공화당 지지층과 기부자를 흡수하기 위해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연설 중 트럼프는 뜬금없이 ‘차이나 바이러스’ 이야기에 상당한 비중을 할애했다. 중국의 무능 탓에 우한 연구소에서 유출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 세계적으로 물질 피해와 사망자를 냈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코로나19가 아니라) 차이나 바이러스라고 부르는 게 더 정확하다”라고도 했다. 물론 중국이 은폐하고 있는 부분은 언제라도 밝혀져야 한다. 하지만 미국의 통합을 말하다 꺼내 든 ‘차이나 바이러스’ 이야기는 트럼프의 의도를 의심하게 했다. 그러면서 4년 전 불쾌했던 기억도 다시 소환했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차이나 바이러스’ ‘쿵후 바이러스’를 입에 달고 다니며, 코로나19로 인한 미국의 막대한 피해가 자기 탓이 아님을 강조했다. 이에 자극된 일부 미국인들의 분노는 중국과 한국을 구분하지 못했다.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 등 대도시에선 한국인을 향한 폭력이 잇따랐다. 그나마 양호했다던 워싱턴에서도 길을 걷다 이유 없이 욕을 듣기 일쑤였고, 식당이나 상점에서 위축되기도 했다. 지하철역 플랫폼에선 혹시 누가 밀칠까 봐 기둥 뒤로 붙어서게 됐다. 실제 UC샌프란시스코가 2020년 3월 트럼프의 ‘차이나 바이러스’ 발언 이후 130만 건의 트윗을 분석한 결과, ‘반아시아’ 정서를 키운 것으로 나타났다. 역사적으로 내부 통합을 위해 외부의 적을 만드는 것은 흔한 수법이지만, 대개 희생양이 뒤따랐다. 국내서도 여러 각자의 이유로 트럼프의 귀환을 기대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트럼프가 말한 통합이 그 특유의 ‘편 가르기’에 의한 것이라면, 4년 전의 불쾌함도 함께 귀환할 가능성이 크다. 김필규(phil9@joongang.co.kr)

2024-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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