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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의 세사필담] 흐릿한 ‘민족’ 유대는 결국 폐기되는가

북한의 공격 본능이 드디어 절정에 달했다. 지난달 8일 법제화된 ‘선제 핵 공격’, ‘건드리지 않아도 쏘겠다’는 조항을 명문화했다. 북한 주민의 경제난에 쓰던 수법과는 강도와 심도가 다르다. 유사시 김정은은 물론 인민무력부도 핵공격 명령을 내릴 수 있게 됐다. 이는 1993년부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왔던 미국과 한국의 대응전략이 총체적으로 실패했고, 이제 전혀 다른 차원으로 진입했음을 뜻한다. 북한 핵은 누가봐도 통제불가임이 입증됐다. 미국과 한국은 북한을 말리느라 어정쩡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북한에 대응해 지난 18일 미국 국무부는 ‘발사의 왼편’(left of launch)이란 권한을 한국에 내줬는데 ‘적국의 비(非)핵공격에도 선제타격을 감행한다’는 북한의 결단에 비추면 무력하기 짝이 없다. 미사일을 소총으로 막는 격이다. 한국은 지그재그였다. 보수정권은 ‘비핵화’를 공염불처럼 외쳐왔고, 진보는 동정심에 격해 그냥 눈을 감았다. 설마 남쪽을 겨냥하랴 싶었던 거다. 남한이 이렇게 엇박자를 내는 동안 북한의 대남정책은 일관성이 있었다. 핵보유국! 남한의 보수에겐 욕설을 해대고, 진보에겐 생떼를 부리면서 핵을 만들었다. 1993년 이래 세 차례의 핵위기를 겪으면서도 민족 정서에 기댔던 게 역사적 오판이었다. 평양 당국 선제 핵공격 법제화 민족주의 환상을 걷어낼 계기 역사공동체에서 혈연관계 소멸 핵동맹과 전술핵 논의 대두될 것 대북 강경파 존 볼턴(전 미국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말대로, 싱가포르·하노이·DMZ 회담 모두가 김정은의 시간벌기 연극이었고, 미국과 한국은 약간의 ‘정상적 사고’와 ‘민족정서’에 기대를 걸었던 순진한 관객이었을 뿐이다. 통일지상과 친북을 고수하는 586세대 주사파 정치인에게는 친제반민(親帝反民) 헛소리로 들리겠지만, ‘우리 민족끼리!’는 결국 헛소리가 됐다. 민족의 사용설명서가 남북한이 달랐다는 것쯤은 삼척동자도 안다. 남한은 동포애 환상을 바탕에 깔았고, 북한은 체제유지를 치장하는 위장전술이었다. 민족통일 개념이 ‘자유대한’과 ‘적화’(赤化)로 오래전 갈라졌음을 남북한이 명시적으로 발설하지는 않았는데 이번의 핵법제화는 막연한 민족 정서가 공포의 불균형을 결코 치유할 수 없음을 일깨웠다. 한반도 민족개념의 흐름은 세계와 역방향이다. 세계화 시대에 주요국들은 ‘탈(脫)민족’으로 방향을 틀어 평화공존과 번영을 구가하고자 했다. 미국과 EU가 그런 조류를 주도했다. 그러나 EU 회원국의 이해충돌이 점차 거세지고 미중 헤게모니전이 격화되면서 탈민족에서 ‘자(自)민족주의’로 돌아섰다. 유럽의 주요국들은 일단 민족공동체 내로 퇴각하는 추세고, 중국은 아예 중화민족의 일대일로를 거침없이 닦았다. 북한은 거꾸로다. 핵무력 앞에 민족은 없다. 올해만 이십 차례 미사일 발사를 감행했다. 평양당국이 보유한 핵탄두 70여 개가 서울과 뉴욕을 겨냥하고 있고 유사시 군수뇌부도 단추를 누룰 수 있단다. 한국은 핵탄두 앞에 적대적 타인종, 타민족 집단이 됐다. 사정이 이럴진대 한반도에 흐릿한 구름처럼 남아 있는 민족 정서가 이제는 수명을 다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인류학적으로 민족은 혈연, 관습, 언어공동체다. 여기에 문화, 역사, 정치체제 같은 공통경험이 가해지면 민족개념은 풍화되지 않는 돌덩어리로 변한다. 북한이 평양 외곽 주몽의 동명왕릉에 백두혈통을 새겨넣은 것은 심각한 역사 훼철에 해당하지만 남한과는 고구려를 공유하는 기억공동체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런데 기억과 DNA가 같다고 민족이 성립되지는 않는다. 시량(柴糧) 걱정과 생활고를 오래 같이 겪어야 하고, 천연재해든 외국의 압력이든 동일한 공간에서 운명공동체를 이뤄야 한다. 한반도 7500만 민족은 두 개의 단단한 국가로 나뉘어 74년을 살았다. 전란의 비애를 씻는 한 맺힌 세월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민족구성의 최대요인인 국가가 외려 민족개념을 손상하는 특수한 사례다. 정치체제, 관습, 문화는 경악할만큼 달라졌다. 두려운 것은 혈연의 소멸이다. 70년대만 해도 실향민은 1000만명에 달했다. 민족 혈연이 유효할 때 태어난 해방둥이 1945년생이 20년 후에 모두 몰(沒)한다고 보면 남북한 실제 혈연관계는 일단 단절된다. 상상의 공동체인 민족에 심기일전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으면 안 될 것도 없지만, 올해 38세 김정은이 핵을 들고 협박할 시간이 적어도 20년 넘게 남았다고 보면 그런 상상의 공간이 만들어질지 의문이다. 반인륜적 핵무력 앞에서 민족의 사용설명서는 낡은 교범이 됐다. 뒤통수를 세게 맞았다. 이를 계기로 미몽을 깨야 한다. 한반도 민족주의에서 환상을 걷어내야 한다. 보수는 ‘비핵화’가 더 이상 성립되지 않는 명제임을 자인하고, 진보는 ‘우리 민족끼리’에 설복당하지 말아야 한다. 언젠가 필요한 날을 위해 민족주의의 불씨를 아껴둘 필요는 있을 것이다. 북한의 보모(保母) 중국이 향후 20년간 강화해갈 글로벌 영향력 내에서 북한 핵은 여전히 건재할 것이기에 한미 핵동맹과 전술핵 배치에 대한 논의가 실질적으로 필요해졌다. 우리도 진정 핵무장 쪽으로 가야 하는가? 위험천만하고 아찔한 시나리오가 시작됐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 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석좌교수

2022-10-03

[예영준의 시시각각] AI보다 못한 여야의 정치감각

북한이 연일 미사일을 쏘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번 도발은 종래의 패턴과는 확연히 다르다. 북한은 한·미 연합훈련을 앞두고 온갖 험악한 말과 함께 무력 시위를 하다가도 정작 훈련이 시작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잠잠해지곤 했다. 연합훈련을 위해 한반도에 배치된 미군의 전략자산이 갑자기 공격용으로 전환될지 모른다는 공포가 그 근저에 있다. 2018년 남북 정상회담 때 김정은은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 “이제 더는 국가안보회의(NSC) 소집하느라 새벽잠을 설치지 않게 하겠다”고 지키지 못할 말을 했지만, 그네들에게 한·미 훈련은 잠을 설칠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잠들지 못하게 하는 공포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미군 전략자산의 종합 세트인 항공모함 편대가 와서 훈련을 펼치고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사일을 뻥뻥 쏘아올렸다. “핵보유국을 감히 건드리겠냐”는 위세다. 모르긴 해도 한·미 국방 당국은 이 초유의 상황에 대한 평가와 대응에 혼란을 겪었을 것이다. 일단의 전문가 사이에서 “이제는 종래의 억지 전략으로는 통하지 않는다”는 분석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여기서 끝이 아니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시험과 전술핵탄두 역량을 보여줄 7차 핵실험이 기다리고 있다. ‘게임체인저’ 획득의 종착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대한민국이 마주한 상황은 이토록 엄중하다. 국군의날 행사에서 ‘괴물 미사일’을 공개한 건 이런 움직임을 겨냥한 사전 경고였을 것이다. 과연 이런 경고가 대담해질 대로 대담해진 북한에 통할지는 미지수다. 확장 억제의 가동은 필수 대비 사항 중 하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한 억지가 될지는 더 세밀히 따져봐야 한다. 핵공유나 핵균형론 등 모든 가능한 옵션을 올려놓고 대응전략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런 일만 하기에도 윤석열 대통령과 참모진엔 하루 24시간이 부족해 보인다. 북한 도발과 경제난의 복합 위기 대통령에겐 정쟁 빠질 시간 없어 진흙탕 싸움은 지는 게 이기는 길 한쪽 방향에서만 오는 위기는 준비만 잘하면 막아낼 수 있다. 진짜 위기는 전방위적 복합위기다. 우리는 이미 미증유의 퍼펙트 스톰 영향권에 접어들었는지 모른다. 과거에는 거대한 중국 시장을 옆에 둔 덕에 두어 차례의 경제위기를 단기간에 극복하는 모범생이 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중국 자체가 위기의 진원지 중 하나다. 경제위기 대응에만 전념해도 대통령과 참모들에겐 시간이 부족할 판이다. 서론이 길었지만 단언컨대 우리에겐 ‘날리면이냐, 바이든이냐’로 날을 지새울 여유가 없다. 평소 필자는 취재원과의 장시간 인터뷰 녹음을 인공지능(AI) 음성인식 프로그램으로 푼다. AI가 만들어주는 텍스트파일을 별로 수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인식 수준이 높아졌다. 혹시나 해서 논란이 된 윤 대통령의 뉴욕 발언을 입력해 보니 판독 불가 판정이 나왔다. 어지간해서는 결과물을 척척 내놓는 AI가 녹음된 내용이 불분명하다고 두 손 든 것이다. 음향 전문가들이 보다 정밀한 프로그램을 돌린 결과도 대부분이 그랬다고 한다. 요컨대 MBC가 의도적인 자막 조작으로 동맹을 훼손했다고 수사 당국에 고발하고 과학적인 분석을 의뢰한들 딱 부러진 결론을 내기 어렵다는 얘기다. 어쩌면 AI 알고리즘이 온갖 뉴스와 댓글 등을 통해 정치적 리스크를 학습한 끝에 판독을 거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생결단의 싸움을 펼치는 여야보다 차라리 답이 없다는 AI가 더 현명한 것 아닌가. 대통령은 이 지루한 소모전에서 하루속히 벗어나야 한다. 뭐 그렇게 담대한 결단까지 요하는 일이 아니다. 그저 사실대로 말하고 부주의한 부분이 있었으면 있었다고 인정한 뒤 이렇게 선언하면 된다. “이 순간부터 불필요한 정쟁을 멈추고 국가 대사에 전념하겠습니다.” 야당도 막무가내식 발목잡기는 그만둬야 한다. 협치란 단어가 사전에 없는 여야의 싸움은 계속되겠지만, 싸울 거리는 다른 데서 찾아야 한다. 싸울 가치가 있는 일이 있고 그렇지 않은 일이 있다. 이 진흙탕 싸움은 먼저 지는 사람이 이긴다. 예영준(yyjune@joongang.co.kr)

2022-10-03

'김정일 유서' 입수한 탈북 박사…왜 文정부서 간첩몰이 당했나 [장세정 논설위원이 간다]

남북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남·남 갈등'도 심각한 한반도에서 북한 관련 정보를 캐거나 대북 공작 일선에 투입되는 일은 생명을 내놓아야 할 정도로 위험하다. 북한의 온갖 협박에도 꿋꿋하게 버텼으나 문재인 정부 시절 간첩으로 내몰려 엄청난 고초를 겪은 두 사람이 있다. 탈북 지식인 이윤걸(54)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 대표와 베테랑 대북공작관 출신 정규필(58) 예비역 육군 대령(호림안보협의회 회장)이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문 정권 시절 국가정보원과 검찰의 황당한 '간첩 몰이'의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최근 두 사람을 만나 그간의 사정을 들어봤다. 김일성 장수 연구하다 2005년 탈북 이 대표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데다 조부모 형제가 일찍이 월남해 북한에 남은 가족은 최하층민으로 살았다. 기적적으로 북한의 3대 명문 중 하나인 평양이과대학을 졸업하고 김일성 주석을 위한 '만수무강연구소' 소속인 청암산연구소(호위사령부 관할)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 2005년 "잘못된 북한 체제를 바꾸겠다"며 탈북했다. 충남대에서 생명공학 박사 학위를 받은 이 대표는 통일부·국가정보원·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 등 주요 대북 기관들과 협력하며 알토란같은 북한 내부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 보고서를 제공해왔다. 그가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은 계기는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2011년 12월) 불과 넉 달 후인 2012년 4월 '김정일 유서'를 입수해 공개한 때였다. 그해 11월 『김정일의 유서와 김정은의 미래』를 출간하면서 2013년 12월에 터진 장성택(김정은의 고모부) 실각을 예견해 대북 정보 입수 능력을 입증했다. 특히 이 대표가 북한 내부 정보를 근거로 "핵·미사일·생화학무기는 '김씨 가문의 보물'이어서 정권이 망하기 전에는 내놓을 리가 없다"고 역설하자 우파는 환호했지만, 좌파는 '탈북자=배신자' 프레임을 걸어 공격했다. 아니나 다를까. 2018년 6·13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압승한 바로 다음 날 오전 8시 국정원은 압수수색영장을 들고 집과 사무실에 들이닥쳤다. 6월 21일 이 대표는 유엔 대북 제재를 어기고 북한과 중국이 단둥 항구에서 원유를 밀거래하는 북한 청류1호 사진을 입수해 폭로했고, 공교롭게도 7월 16일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국군정보사령부 전·현직 간부의 군사기밀 빼돌리기를 수사하던 국정원과 검찰이 이 대표를 엮으면서 졸지에 대북 정보를 일본에 넘긴 파렴치범으로 몰렸다. 이 대표는 "대한민국을 위해 일했는데 분노가 치밀었다. 목숨을 던져 항거할 생각도 했다"며 당시 심경을 회고했다. 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아 2019년 1월 31일 1심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풀려난 이 대표는 치밀한 반박 자료를 찾아내 그해 7월 26일 서울고법 형사1부(정준영 부장판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2심 재판부는 "일본에 넘겼다는 자료는 이 대표가 평소에 취급했던 북한 정보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다. 검찰이 상고했지만, 그해 10월 31일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이 대표에게 왜 이런 황당한 일이 생겼을까. "북한 내부 기밀을 계속 빼 오니 북측이 손봐주라고 지목한 것 같다. 문 정권이 2018년 남북 대화와 북미 대화를 추진하던 무렵 내가 '김정일 유서'와 김정일이 직접 쓴 '회고록' 등 북한 정보를 근거로 김정은에겐 비핵화 의지가 없어서 핵 문제는 절대 해결 안 된다고 계속 주장했다. 주사파 운동권 출신들이 주도한 문 정권에 단단히 밉보였다." 그는 "누가 무리한 구속을 주도했는지 짐작하고 있다. 자유와 통일을 위해 올바른 일을 해온 나를 괴롭힌 사람들이 범법자이고 죄인이다. 대낮에 대한민국 헌법을 유린한 자들이 벌 받아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 대표는 "김정은이 최근 핵 선제 사용 조건을 법제화했다. 문 정권은 북한의 핵·미사일 강화에 시간을 벌어줬다"고 비판했다. 이어 "북한 정권이 무너지고 통일되면 주사파는 자신들의 결탁과 내통 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제일 두려워한다"면서 "문 정권의 잘못을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북·중 국경 흑색요원, 굶으며 1주일 버텨 '최고의 대북 첩보 장교'로 손꼽혔던 정규필 전 대령은 경북 포항이 고향이다. 육사 42기로 임관한 뒤 2019년 대령으로 전역할 때까지 37년간 현역으로 복무했다. 정보 병과 출신으로 1991년 대위 시절 인간정보(HUMINT)를 담당하는 북파공작부대(HID) 팀장을 맡은 인연으로 2017년까지 26년간 국방부와 합참 산하 정보본부, 국군정보사령부 소속 대북공작관으로 국내외 험지에서 맹활약했다. 처자식을 떠나 혈혈단신으로 북·중·러 국경지대에서 '흑색 공작'을 진행하면서 풍찬노숙을 마다치 않았고, 중국에서만 14년간 주중대사관 무관 등으로도 활동했다. 특히 2010년 북한의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도발 이후 대북 핫라인 구축을 위해 중국에 급파됐다. 탄핵으로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자 중국에서 귀국한 그는 정년을 1년 6개월 가량 앞둔 2019년 3월 말 전역했다. "고교 졸업 이후 처음으로 자연인이 됐으니 자유를 맘껏 누리겠다"는 기대에 부풀었다. 하지만 5월 14일 국정원 요원 21명이 28평 아파트에 몰려와 22시간 동안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 정도로 압수수색을 강행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군사기밀보호법 위반(유출) 혐의를 받는 간첩으로 몰렸다. 현역 시절 안중근 의사의 '위국헌신 군인본분'을 신념으로 받들며 국가를 위해 일한다는 사명감과 명예심으로 살아왔던 그의 인생이 180도 뒤집히는 순간이었다. 그는 국정원 요원들에게 "국가와 민족 앞에 스스로 켕기는 것이 있으면 광화문 네거리에서 할복하겠다"고 말할 정도로 당당했다. "혹시라도 오해가 있을 것 같아 컴퓨터 비밀번호까지 친절하게 알려줬는데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갔고 시간이 가면서 감정의 기복이 심했다. 아무도 몰라주는데 생사를 넘나들며 돈키호테처럼 살았다는 억울함, 믿었던 국가가 아무 잘못도 없는 나에게 이럴 수 있느냐는 분노, 북·중 국경지대에서 흑색요원으로 활동하면서 단돈 10위안(약 2000원)으로 굶주리며 1주일을 버텼던 시절이 생각나며 서글픔이 밀려오자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결국 119에 실려 갔다." 국정원과 서울중앙지검에서 수차례 소환 조사를 받았지만 2020년 2월 18일 기밀누설죄 무혐의 통보를 받았다. 국정원이 제기한 기밀이라는 것은 정 전 대령이 현역 시절 기무부대에 자진해 보고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무혐의를 통보하면서 검찰은 "군사기밀보호법상 비인가자가 기밀을 탐지·수집·점유하고 있다"며 압수수색영장에 없던 별건으로 기소했다. 청천벽력이었다. 그는 "전역하기 전에 컴퓨터에 소장된 자료를 모두 삭제했는데 국정원이 포렌식으로 복구해 검찰에 무리하게 '기소 청탁'을 했다"며 반발했다. 법정에서 "2013년에 생성한 문건은 1년 후에 이미 기밀 해제된 데다 내가 작성한 문건을 내가 수집·탐지했다는 별건 기소는 군사기밀보호법 성격상 논리에 맞지 않는다"고 반박했지만, 지난 7월 서울중앙지법은 징역 6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곧바로 항소한 그는 "37년간 군인으로 일하면서 앞에서 날아오는 적의 총알은 피할 수 있었지만, 뒤에서 내리찍는 아군의 도끼날은 피할 수 없었다"며 참담한 심정을 토로했다. '문 정부 간첩 조작 시나리오' 밝혀야 그는 얼마 전 대통령실에 "국정원의 간첩조작사건에 대해 조사해 달라"며 청원서를 제출했다. 청원서에서 "37년간 국가를 위해 헌신한 군인을 간첩으로 모는 바람에 내가 근무한 대북공작부대·정보사·국방정보본부는 물론 주중대사관 무관부 등 대북 정보를 다루는 휴민트 관련 조직까지 별건 조사를 구실로 초토화했다"며 "문 정권 시절 국정원이 무슨 짓을 했는지 밝히고 군 정보기관과 조직의 명예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호소했다. 군부 독재정권 시절에는 간첩 조작 사건이 많았지만 '사람이 먼저'라는 구호를 내걸었던 문 정부 시절에 벌어진 간첩사건은 매우 낯설다. 이 대표와 정 전 대령은 "문 정권 시절 국정원의 간첩 몰이는 북한에 불리한 활동을 해온 탈북자와 대북첩보 조직을 파괴하기 위해 주사파 세력이 꾸민 모종의 시나리오대로 움직였다"고 의혹을 제기한다. 정 전 대령은 "문 정권 들어 좌파들이 2017년 과거사위원회를 만들어 국정원을 장악하고, 2018년엔 기무사를 해체하고, 2019년엔 정보사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대북 정보 시스템이 무너지니 2019년 11월 탈북 청년 어민 2명의 비밀 강제 북송 사건이나 2020년 9월 해수부 공무원 이대준씨 서해 피살 사건의 진상이 당시에 덮일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정규필 대령 간첩 조작 의혹'은 지난 9월 20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도 거론됐다. 한덕수 총리는 "필요할 경우 감사를 진행할 수 있다"며 "결국은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고 답변했다. 문 정부가 해명하고 윤석열 정부가 밝혀야 할 의혹이 추가된 셈이다. 장세정(chang.sejeong@joongang.co.kr)

2022-10-03

[안동현의 이코노믹스] 미 금리 인상에 속수무책, 환율 방파제 구축해야

비기축통화국의 원죄 외환시장이 문자 그대로 요동치고 있다. 미 연방준비제도(연준, Fed)가 9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기준금리를 75bp(0.75%포인트) 인상하는 자이언트 스텝을 단행하자마자 환율은 달러당 1400원을 돌파한 후 불과 하루 만에 1430원선을 시험했다. 원·달러 환율의 경우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가장 강력한 저항선은 1240원 선이었다. 그런데 올해 3월 미 연준이 제로금리에서 탈피한 3월, 이 저항선이 뚫리더니 이후 단행한 한 차례의 빅스텝과 연이은 세 차례의 자이언트 스텝에 힘입어 1400원까지 수직 상승을 해 이제 상단을 논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되었다. 굳이 추정한다면 1980년대 중반 이후 달러 인덱스가 120 정도로 가장 높았던 2000년대 초반 수준으로 달러 가치가 상승할 경우 향후 약 5.5% 정도의 추가 상승 여력이 있고 이에 따르면 원·달러 환율은 1480원 정도까지도 상승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미 Fed, 타국 배려 없이 금리 올려 전 세계로 인플레이션 수출하는 셈 국제금융시장 발작 넘어 패닉 조짐 통화 바스켓이나 통화스와프 필요 원·달러 환율 1480원 넘볼 듯 환율은 상대가격이다. 원·달러 환율이 치솟았다면 달러 가치가 급등했든지, 원화 가치가 급락했든지 아니면 두 가지 현상이 동시에 겹쳐 일어났기 때문이다. 올해 원·달러 환율이 급등한 요인은 대부분 ‘킹달러’로 불리듯 달러 가치의 급상승에 기인한 바가 크다. 앞서 언급한 달러 가치의 척도인 달러 인덱스의 경우 연초 95.0에서 최근 20년래 가장 높은 수준인 113.6까지 19.5% 정도 급등했다. 같은 기간 원·달러 환율의 증가는 22% 정도로 대부분이 달러 가치 상승에 기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외환 당국이 “우리 원화만 가치가 하락한 것이 아니다”라는 강변이 설득력을 가지는 이유다. 그런데 한가지 주목할 점은 8월 말부터 원화 자체의 약세 조짐도 미세하나마 포착된다는 점이다. 원화는 유로나 캐나다 달러, 중국 위안화 등 주요 통화대비 가치가 급락했다가 지난주부터 본격화된 외환 당국의 적극 개입에 힘입어 다시 안정세를 보인다. 그만큼 외환시장이 예민하다는 방증이다. 금융시장이 점차 예민해진다는 증거는 최근 국제금융시장을 흔들고 있는 파운드화 급락에서도 볼 수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직격탄을 맞은 영국은 이미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진 상태다. 와중에 영국 중앙은행이 금리 인상에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상태에서 정부가 대규모 감세안을 발표했다가 지난달 26일 이틀 새 파운드화가 달러 대비 7%나 폭락하면서 40년 만에 파운드와 달러의 환율이 1대 1에 가까워졌다. 이러한 폭락 원인으로 감세로 인한 인플레이션 악화를 들고 있으나 그런 식으로 따지면 미 바이든 행정부의 대규모 재정지출 정책 역시 동일 선상에서 비난받아 마땅하다. 이 정도 자극에도 시장이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것은 국제금융시장이 발작 (tantrum)을 넘어 이제 패닉 (panic) 단계에 근접하고 있다는 징조다. Fed 냉·온탕 정책이 불안 키워 글로벌 경제가 이렇게 파국으로 치닫는 가장 큰 원인은 중국의 코로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가장 큰 원인이다. 그러나 미 연준의 연속된 헛발질도 일부 책임이 있다. 금융위기 이후 양적완화가 인플레이션을 초래하지 않았다는 ‘성공의 추억’에 빠져 3조가 넘는 달러를 석 달 만에 시장에 들이붓는 사상 최대의 양적완화 작전을 단행했다. 사후적으로 예상과 달리 소비자들은 지갑을 닫는 대신 소비 포트폴리오를 변경하는 소비 대체로 반응하면서 경기침체는 일시적이었다. 경기 부양에 필요한 양보다 훨씬 많은 달러 유동성이 공급되면서 공급측 요인에 수요측 요인의 인플레이션까지 겹치면서 인플레이션은 완전히 고삐가 풀린 상황이 되었다. 돌이켜 보면 작년 5월 인플레이션이 5%를 초과하면서 시장에서 인플레이션에 대한 경계 목소리가 들렸지만, 연준은 일시적(transitory) 현상이라고 일축하면서 초동 대응에 실기한 것이 결정적인 패착이었다. 10개월이 지나 뒤늦게 인플레이션의 심각성을 인식한 연준은 올해 3월부터 급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온탕, 냉탕을 왔다 갔다 한 것이다. 다른 나라 경기침체까지 촉발 지금까지 미 연준의 급격한 금리 인상은 자국의 인플레이션을 역외로 수출하는 효과를 가져왔지만 이제 추가적인 금리 인상은 타국의 경기침체를 가속하는 효과까지 가져오게 되었다. 달러 가치가 높아질 때 달러의 구매력이 높아지는 속도보다 다른 나라 통화 대비 가치 상승 속도가 빠르게 되면 다른 나라 가치의 구매력은 더 낮아지게 돼 인플레이션이 수입되게 되는 효과가 발생하게 된다. 현재 미국은 2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에도 불구하고 고용상황은 경기상황보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다. 8월 기준 실업률은 3.7%로 건전한 수준이고, 실업급여 신청 건수 4주 평균은 22만 4000건으로 고용상황이 양호하다. 거기에 결정적으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이란 법안을 상원에서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이름과 달리 인플레이션과는 밀접한 관련성이 없다. 한마디로 ‘미국에 물건을 팔고 싶으면 미국에서 생산하라’는 게 핵심으로 고용시장에 안전망을 구축하는 중간선거용 포석이다. 미국은 이렇게 최소한의 안전망을 펼쳐놓고 금리 인상을 단행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국가는 이러한 안전망을 설치하지 못한 상태에서 미 금리를 좇아가야 한다. 미 금리와의 격차를 벌려놓으면 자국 통화가치가 하락해 인플레이션이 수입되고 그렇다고 무리하게 쫓아가면 경기침체에 직면하게 된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이제 미국은 과거의 미국이 아니다. 자국 우선주의에 빠져 따라올 수 있으면 따라오고 못 따라오면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뱁새들 입장에서는 황새의 발걸음을 쫓아가다 가랑이가 찢어질 노릇이다. 실제 이미 많은 개발도상국을 중심으로 가랑이가 찢어지고 있다. 8월 말 기준으로 IMF 구제금융은 이미 1400억 달러를 넘어서 사상 최대 수준이다. 그러나 이는 서막에 불과하다. 아직 집행하지 않은 자금 규모만 2680억 달러로 이미 대출한 금액의 거의 두배에 달하는 금액이 향후 집행될 예정이다. 글로벌 경기 침체는 이제 피할 길이 없어 보인다. ‘통화스와프 무용론’ 신중해야 최근 통화스와프에 대한 의견이 제시되자 한은을 중심으로 ‘통화스와프 무용론’이 적극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두 가지가 주요 근거인데 들여다보면 사실은 같은 내용이다. 첫째는 ‘우리나라 원화만 약세가 아니다’라는 주장이다. 다른 나라 통화도 달러 대비 비슷하게 약세라서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이미 얘기한 바와 같다. 둘째, 이미 미국과 통화스와프를 가지고 있는 5개국 중 캐나다를 제외한 나머지 영국 파운드화, 유로화, 일본 엔화 등이 모두 약세를 보이니 통화스와프가 환율 안정에 별 효력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사실이다. 문제는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확신할 수 있는가 하는 부분이다. 이제 미 금리 인상의 파급효과는 인플레이션 수입뿐 아니라 경기침체까지 수반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와는 게임의 양상이 달라지고 있다. 내년에는 경기침체와 이에 따른 금융시장의 변동성 확대가 명확해질 것이다.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안전자산 회귀 현상이 본격화될 경우 과연 원화가 유로와 같은 주요 통화와 계속 궤를 같이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배리 아이켄그린이 얘기했듯 비기축통화라는 원죄(original sin)가 있고, 그 원죄는 바로 꼬리 위험(tail risk)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 꼬리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통화스와프라는 외환 방파제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태풍 힌남노로 큰 피해를 보았다. 이에 빗대 생각해 보자. 정부가 태풍의 예상 경로는 일본 규슈 쪽으로 향하니 아무 대비를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한은은 미래를 예측하는 게 주임무가 아니라 대응이 가장 중요한 책무다. ‘이러 이러한 이유로 외환시장에 문제가 없을 것이다’라는 레토릭은 국민을 안심시키기 위한 대외용 발언이라는 점에서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물밑에서는 태풍 경로가 내륙으로 변경될 때에 대비하는 것, 그것이 정부 그리고 무엇보다 한은이 해야 할 책무다. 원죄(original sin) 기독교에서 차용한 단어로 아이켄그린·하우스만·파니자가 일련의 논문을 통해 대부분의 국가는 자국 통화로 해외에서 차입할 수 없으며 이를 원죄라고 명명했다. 이들은 미국·유로·일본·영국·스위스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국가가 이러한 원죄로 고통받고 있으며, 이러한 원죄 현상은 해당국의 거시건전성과 관련 없고 국제 금융시장의 불완전성에 원인이 있는 만큼 신흥국이 통화 바스켓으로 해외 차입이 가능하도록 국제기구 설립이나 이니셔티브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2022-10-03

[삶의 향기] 울지마, 디미

‘디미’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지우즈킨 디미트로는 우크라이나인입니다. 우크라이나의 음악 명문가 출신인 그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입니다. 그는 서울시립합창단 상임 단원을 지낸 김문수 메조소프라노와 인사동에서 버스킹을 하고 있습니다. 오래전에 한국에 들어와 국립오케스트라와 서울 팝스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하던 디미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조국이 전쟁 상태에 빠지자 졸지에 난민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황급히 우크라이나로 들어가 어머니와 여동생을 스위스로 대피시키고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서방 세계의 지원과 우크라이나의 반격으로 전황이 다소 호전되자 어머니는 수도 키이우로 귀환했다고 합니다. 살던 집이 다행히 파괴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크라이나에 펼쳐진 지옥도 조국을 탈출하는 러시아인들 시인협회, 난민 돕기 바자 열어 그가 보여주는 사진들은 언론에서는 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어느 러시아 병사의 시신은 상반신이 아예 없었습니다. 탱크에서 탈출하려다 숨진듯한 시신은 탱크의 뚜껑에 걸쳐져 있었습니다. 이 정도로 참혹한 사진은 언론에서 아예 싣지 않거나, 잘 보이지 않게 해서 보도하지요. 사망자가 워낙 많아 시신들을 가매장 상태로 묻어둔 것을 개들이 파먹기도 한다고 합니다. 전쟁의 양상이 처참해지자 양측의 증오심은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러시아군은 포로가 된 우크라이나 병사를 거세시킨 뒤 죽이는 경우도 있다고 언론은 전하고 있습니다. 보복과 보복이 반복되는 지옥도가 우크라이나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꿈많던 젊은이들을 이렇게 상대를 증오하는 악마로 만든 것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디미는 친구의 20%가 전사했다고 밝히면서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비쳤습니다. 그러나 아내와 아들이 있는 한국이 그의 삶의 터전입니다. 최근 코로나19 상황이 다소 진정세를 보이자 폴란드를 여행하고 돌아온 한 지인으로부터 아름다운 우크라이나 여성들과 어린이들이 거리를 방황하고 있더라는 참상을 전해 듣기도 했습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국제 사회의 비난 여론이 거셉니다. 영국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장례식 때 러시아와 벨라루스 그리고 미얀마를 초청하지 않았습니다. 천연가스의 대부분을 러시아로부터 공급받던 유럽 국가들은 겨울을 앞두고 원자력발전 재가동 등 다른 공급 루트를 찾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비극은 우리에게 아픈 기억을 소환합니다. 대륙 국가인 우크라이나인들은 그래도 이웃 나라로 피난이라도 가능하지만 70년 전 한국인들은 육로로 피신할 수 있는 이웃도 없었습니다. 만약에 부산마저 무너졌다면 바다로 뛰어들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 절박했던 시기에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우리를 건져주었던 우방들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크라이나의 저항이 의외로 강경해 일부 피점령 지역을 수복하기에 이르자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마침내 예비군 동원령을 내렸습니다. 그만큼 전황이 급박하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이에 항의하다 끌려가는 모스크바 시민의 모습이 처절합니다. 징집을 피해 해외로 탈출하려는 행렬도 줄을 잇고 있습니다. 러시아인이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는 조지아 국경 검문소의 차량 대기 행렬이 5㎞에 달했으며, 모스크바에서 두바이로 가는 가장 싼 비행기표 가격이 30만 루블(718만원)까지 치솟았다고 합니다. 이런 해외 탈출 러시아인이 수십만 명에 이른다고 외신은 전하고 있습니다. 푸틴은 법을 고치며 징집 기피자는 엄벌에 처하겠다고 위협합니다. 점령지에 대한 주민 동의 투표를 사실상 공개 상태로 치르곤 징집하겠다 하니 우크라이나인들끼리 싸우는 상황으로 몰리게 생겼습니다. 헤어날 길 없는 죽음과 공포의 수렁으로 양국 국민들은 빠져들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은 경제에 나타났습니다. 세계 경제는 침체의 늪에서 허덕입니다. 푸틴은 과연 우크라이나에 핵무기 공격을 할까요? 만일 그런다면 서방 세계는 핵으로 러시아를 응징할 수 있을까요? 3차 세계대전의 불길한 전조마저 어른거립니다. 한 사람의 야망이 세계를 전쟁의 불길에 휩싸이게 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그러하였습니다. 우크라이나, 아프가니스탄, 미얀마 등지에서 난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난민들은 국제 사회의 큰 문제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사)한국시인협회는 국내외 난민들을 돕기 위한 바자를 10월 15일(토), 16일(일) 양일간 서울 남산 문학의 집에서 엽니다. 이 바자에는 시인들뿐 아니라 각계각층의 인사들도 참여합니다. 기증된 물품들을 판매한 수익금은 유엔난민기구에 전달할 예정입니다. 울지마, 디미. 넌 혼자가 아냐.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2022-10-03

[서소문 포럼] ‘반도체 전도사’ 양향자의 한숨

입지전적 인물인 양향자 의원(무소속)은 본래 낙관주의자다. 석·박사 인력이 즐비한 반도체 회사에 고졸 사원으로 입사했을 때도 미래를 낙관했고, 주경야독 끝에 ‘여상(女商) 출신 첫 임원’이 됐다. 입사 초 회사의 전사적 투자와 엔지니어들의 열정을 믿으며 반도체로 일본을 따라잡을 거라 자신했던 것도 현실이 됐다. 그런 양 의원이 자신은 이제 더는 낙관주의자가 아니라고 한다. 반도체 산업의 미래가 불안하게 느껴졌고 대한민국의 미래 역시 걱정이 되기 시작해서다. 세계가 반도체 영토 확보에 목숨을 걸고 벌이는 전쟁을 목도하며 느끼는 심각한 위기의식이다. 열강들, 반도체 패권 전쟁중인데 ‘K칩스법’은 정쟁에 밀려 뒷전 속히 법안 처리하고 국회 기구 둬야 규소라는 광물 위에 미세한 소자와 금속을 잔뜩 쌓은 물질. 반도체는 PC와 모바일, 가전제품, 디스플레이, 자동차 등 거의 모든 산업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 됐다. 반도체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래서 ‘산업의 쌀’이라고 불린다. 전쟁 후 잿더미에서 변변한 산업 인프라 없이 일어선 한국을 첨단 IT 국가로 바꿔놓은 것도 반도체 덕분이다. 손톱만 한 크기에 지나지 않은 이 반도체는 21세기 들어 ‘먹고 사는’ 문제를 떠나 ‘죽고 사는’ 문제가 됐다. 통찰력 있는 경영학자 스티브 블랭크 미 컬럼비아대 교수가 한 “21세기의 반도체는 지난 세기의 석유와 같다. 생산을 통제할 수 있는 나라가 다른 나라의 경제력·군사력을 좌우할 것”이란 경고는 과언이 아니다. 미국은 반도체 패권 확보에 이미 사활을 걸었다. 반도체 설계는 미국, 소재·부품은 일본, 장비는 유럽, 위탁 생산은 한국·대만이라는 글로벌 분업 공식을 흔들고 반도체 공급망 재구축 드라이브를 강하게 걸고 있다. 지난 5월 20일 방한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정상회담, 만찬 등 통상 일정을 뒤로 하고 비행 여독이 풀리기도 전에 맨 먼저 찾은 게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인 경기도 평택 캠퍼스란 점이 많은 걸 시사한다. 미국은 천문학적 규모의 실탄도 마련해놓고 있다. 8월 9일 공포된 ‘반도체산업 육성법’은 자국 반도체 기술 및 산업 발전을 위해 2800억 달러 규모의 투자를 추진하고 자국 내 반도체 공장을 짓는 기업에 25%의 세액공제 혜택을 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반도체를 무기화하려는 미국에 맞서 중국도 2025년까지 자국에서 소비되는 반도체의 70%를 스스로 만들겠다는 ‘반도체 굴기(崛起) 2025’ 프로젝트 아래 국가 차원에서 약 200조원에 달하는 자금을 지원한다.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분야 세계 1위 기업 TSMC에 쏟는 대만 정부의 애정은 감탄스러울 정도다. 지난해 대만에 가뭄이 들자 하루 약 16만t의 물을 쓰는 TSMC에 농업용수를 먼저 제공하지 않았던가. 일본도 첨단 반도체 생산공장 투자에 7740억엔의 직접보조금을 편성해뒀다. 한국은 어떤가. 낙관주의자였던 양향자 의원의 걱정이 커진 이유 중 하나는 2016년 1월 더불어민주당에 영입돼 정치인으로 변모한 이후 6년 동안 “반도체가 위험하다”고 한 외침이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민주당 소속 시절 국회의원 300명 중 ‘반도체 전도사’ 역할을 할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생각에 의원 단체채팅방에 반도체 위기론을 꾸준히 설파했지만 “대기업 특혜는 안 된다”와 같은 당파적 논리에 묻히기 일쑤였다고 한다. 국무위원을 상대로 한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도 “반도체 전쟁의 정부 컨트롤타워가 누구냐”는 물음에 뚜렷한 답변을 듣지 못했다. 상황은 무소속 양 의원이 여당의 반도체산업경쟁력강화특위 위원장으로 ‘영입’ 된 뒤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반도체 산업 보호와 육성을 위해 양 의원이 주도한 ‘K칩스법’(반도체특별법)이 지난 8월 4일 발의됐지만, 여야 정쟁과 정치권의 위기불감증 탓에 뒷전으로 밀려 있다. 수도권 대학 반도체 학과 정원을 늘려달라는 업계의 오랜 목소리도 국회의 벽을 못 넘고 있다. 여당의 반도체특위를 넘어 국회 차원의 기구 상설화가 필요하지만, 논의는 정치 싸움에 파묻혀 한 발짝도 못 나가고 있다. 양 의원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얼마 전 영화 ‘한산: 용의 출현’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고 했다.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이라는 신기술을 갖고 고군분투하는 동안 조정은 무능했고 당파 싸움에만 혈안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세계에서 선두를 다투는 기술 딱 하나, 반도체를 놓고 열강이 전쟁을 벌이는 중인데 우리 정치권은 너무 태평하고 서로 싸움질만 하는 거 같아 묘하게 겹쳐 보이더라고요.” 여야는 속히 K칩스법 처리와 반도체특위의 국회 상설화를 서둘러야 한다. 김형구(kim.hyounggu@joongang.co.kr)

2022-10-03

[시론] 원격진료 관련 법제화, 더 미뤄선 안 돼

원격진료는 얼굴을 마주하는 대면 진료여야 한다. 비접촉이지 비대면이 아니다. 전화 진료와는 다르다. 지금의 기술력으로 화상을 통해 얼굴을 마주 보면서 다양한 진단 장비를 동원하는 원격진료를 이미 구현할 수 있다. 환자를 직접 마주하지 않고 진료하는 것처럼 표현되는 비대면 진료와 원격진료는 구분해 논의해야 한다. 원격진료는 기존 진찰행위의 미흡한 버전이 아니다. 기술 발전에 따라 등장한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안전성·유효성·비용효과성 검증이 필요하다. 안전하거나 유효하지 않다면 국민을 대상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비용효과적이지 않다면 건강보험이 수가(의료 서비스 비용)를 지불할 이유가 없다. 무엇보다 의료계가 ‘원격진료 행위 가이드라인’을 정할 필요가 있다. 전문가들 스스로 위험하지 않다고 결정한 것만 환자에게 적용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이것이 면허제도의 취지다. 아직 연구가 부족하지만, 근거를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기술발전, 원격진료 앞당겨 구현 비접촉 진료지 비대면진료 아냐 민·관 합동 조직 만들어 논의하길 플랫폼 규제는 그다음 문제다. 보건복지부가 지난 7월 ‘원격진료 플랫폼 업체 가이드라인’을 발표했지만,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플랫폼 업체의 허가나 신고 기준이 없으니 정확한 현황 파악도 안 돼 있다. 규제가 모호할 수밖에 없다. 원격진료에 대한 법적 정의가 없기 때문에 원격진료 플랫폼을 정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국회에서는 원격진료 플랫폼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런 문제들을 규제하기 위해서라도 원격진료에 대한 법제화를 우선해야 한다.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도 이미 원격진료 활성화가 대세다. 소비자들은 이미 집 앞 상가에 구매할 물건이 있는데도 퇴근길에 들르지 않는다. 집에 가서 스마트폰으로 주문한다. 동네 의원이 있으니 원격진료가 필요 없다는 논리로는 소비자를 설득하기 어렵다. 소비자들은 1차 의료로 원격진료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원격진료 의사가 검사해야 한다고 할 때만 병·의원에 가면 되기 때문이다. 원격진료가 도입된다면 관련 부가가치는 상상 이상이 될 것이다. 이동이 불편한 환자들의 접근성을 높일 수 있고, 병원 직접 방문을 꺼리는 환자들에게는 적정한 시간에 진료를 제공할 수 있다. 중증으로 진단된 환자들은 대형병원 방문 없이도 2차 의견을 구할 수 있다. 지방 환자들이 서울에 오지 않고도 대형병원 진료를 받을 수 있다면 사회적 비용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미국의 MGH와 스탠퍼드 메디컬은 원격 2차 의견 서비스를 적극적으로 홍보하면서 시행 중이다. 의료 분야를 넘어선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장애인 복지 시설과 노인요양 시설에서 발생하는 환자를 신속하게 진료할 수도 있을 것이다. 원격진료가 더 안전하게 정착하도록 하려면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함께 시행해야 한다. 검사해야 할 환자를 병·의원에 보내지 않고 약을 처방하는 의사들에 대한 감시 시스템이 필요하다. 이는 환자들이 알 수 없으니 의사단체가 스스로 할 일이다. 정부가 권한을 더 적극적으로 의사단체에 넘겨줄 필요가 있다. 환자에게는 원격진료의 한계를 설명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원격진료가 모든 상황에서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의료 사고의 책임 문제 등도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부분이다. 서양의학이 화학의 발전과 약의 등장으로 지금까지 진화해 왔다면, 앞으로 의학 발전은 정보기술(IT)이 결정하게 될 것이다. 규제만 제대로 갖춰진다면 원격진료, 그것을 통해 생산되는 데이터, 그리고 인공지능(AI) 기술을 이용한 예측 시스템으로 세계 의학을 선도할 수 있다. 물론 의료계가 당장 수용할 수 있는 범위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근거가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미룰 일은 아니다. 할 수 있는 부분부터 적극적으로 시행하고 차분히 근거를 만들어 가면 된다. ‘원격진료 근거창출 사업단’과 같은 민·관 합동 조직이 필요하다. 국회와 정부의 결단이 필수적이다. 의료계의 협력도 필수적이다. 누가 주도하든 더 적극적인 협력의 마당이 만들어지길 기대한다. 코로나19로 인해 미래가 더 빨리 왔다. 주춤거릴 시간이 없다. 역사적으로 이런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권용진 서울대병원 교수

2022-10-03

[이후남의 영화몽상] ‘네 멋대로 해라’

‘네 멋대로 해라’라면 양동근·이나영 주연의 2002년 TV 드라마가 떠오르는 이들도 있겠지만, 시간 순서상 이 제목의 원조는 영화다. 1960년 프랑스에서 개봉한 영화인데, 널리 알려진 대로 프랑스 누벨 바그의 주역이자 지난 달 스위스에서 조력사로 별세한 감독 장 뤽 고다르(1930~2022)의 장편 데뷔작이다. 누벨 바그도 그렇지만 고다르는 흔히 영화 언어를 혁신하고 영화라는 매체를 재발명했다고까지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특히 ‘네 멋대로 해라’에 쓰인 점프 컷이나 등장 인물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빤히 바라보는 마지막 장면 등은 지금 봐도 신선하고 강렬하다. 여자 주인공을 연기한 진 셰버그의 첫 등장 장면도 빼놓을 수 없다. 영화 줄거리는 까먹더라도, 요즘 봐도 멋진 차림으로 파리의 거리에서 “뉴욕 헤럴드 트리뷴”을 외치며 신문을 파는 모습은 잊기 어렵다. 영화사에서 워낙 유명하고 중요한 작품이지만 지금 눈으로 보면 소박한 면도 있다. 일례로 러닝타임이 한 시간 반에 불과하다. ‘어벤져스:엔드게임’ 같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장장 세 시간 넘는 것에 비하면 단출하다. 줄거리 따라가기도 쉽다. 요즘 블록버스터 시리즈와 달리 복잡한 세계관이나 캐릭터의 이전 이야기를 몰라도 된다. 영화도 이를 굳이 보여주지 않는다. 장 폴 벨몽도가 연기한 남자 주인공이 밥 먹듯 자동차를 훔치는 것, 훔친 차로 과속을 하다 우발적으로 경찰을 죽이는 것,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지인들을 만나는 것 등 눈앞에 펼쳐지는 그대로다. 이 영화는 철저히 현재진행형이다. 여러 장면에서 점프 컷으로 시간의 흐름을 불연속적으로 편집해 보여주는데, 그렇다고 그 전후 상황이 헷갈리긴 힘들다. 물론 관객에 따라 이런 방식이 생경하게, 요즘 상업영화의 방식이 더 쉽고 편안하게 다가올 수 있다. 마블 시리즈가 엔드게임 전후의 과거를 요약할 때 점프 컷을 쓴다면 불친절하다는 반응을 얻을 수도 있다. ‘네 멋대로 해라’는 60년대 프랑스 관객에게도 새로운 영화였지만 외면 받진 않았다.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뒀고, 장 폴 벨몽도는 스타가 됐다. 리처드 기어 주연의 할리우드 리메이크도 나왔다. 프랑스어든 영어든 이 영화의 본래 제목을 우리말 번역기에 돌리면 모두 ‘숨 가쁜’으로 나온다. 과거 종종 그랬듯 ‘네 멋대로 해라’는 일본에서 의역한 제목을 그대로 옮겨 온 것으로 보인다. ‘숨 가쁜’보다 한결 입에 잘 붙는다. 덕분인지 요즘도 여러 분야에서 눈에 띄는 문구다. 어쩌면 고다르의 영화를 모르더라도, 그의 영화에 담긴 것 같은 새롭고 자유로운 시도에 대한 갈망과 호평은 우리에게 이미 친숙한 것인지 모른다. 언어도, 영화 언어도 변한다. 쉽고 편안한 방식이 진부하고 지루한 것이 되기도 한다. 상업영화의 언어도 그렇다. 이후남(hoonam@joongang.co.kr)

2022-10-03

[글로벌 아이] 루머의 악순환

소문은 그럴 듯해야 퍼진다. 말도 안 되는 얘기라면 동력을 잃고 제풀에 사그라든다. 소셜미디어의 확장은 뉴스와 함께 루머도 빠르게 전파되는 시대를 만들었다. 중국은 지금 루머와 전쟁 중이다. 최근 중국 포털사이트 바이두는 뉴스 사이트 한가운데 고정된 제목을 걸고 있다. ‘중국 유언비어 공동 반박 플랫폼’. 말 그대로 정부가 직접 잘못된 뉴스나 소셜미디어에 도는 헛소문을 바로 잡는 사이트다. 통상 정정 보도를 우측 하단에 작게 배치하는 우리와 달리 시선이 집중되는 화면 정중앙에 배치했다. 중국 사이버공간관리국은 지난 8월부터 양대 포털 바이두와 텐센트, 중국식 트위터인 웨이보, 동영상 사이트인 더우인, 콰이쇼우, 샤오홍슈 등 12개 사이트에 대한 허위 정보 단속에 들어갔다. 오는 16일 20차 당 대회를 앞두고 벌어진 일이다. 특히 코로나 관련 루머가 가장 많다. ‘역병보다 소문이 무섭다’는 부제 아래 ‘집안에서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아 체포됐다는 소문은 가짜’라거나 ‘코로나로 인한 투신 자살 영상은 컴퓨터로 조작한 것’ 등이 공표됐다. 불안을 가중시키는 사실은 대부분 가짜로 지목됐다. 한 여성은 웨이신(중국식 카카오톡)의 단체방에 특정인이 코로나 확진자라는 글을 올렸다가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체포됐다. 부연 설명이 인상적이다. “온라인은 법 밖의 공간이 아니다. 온라인에서의 행동은 법과 규정을 준수해야 한다. 법을 두려워하고 루머를 믿거나 퍼뜨리지 말아야 한다. 불법·범죄의 단서를 발견하면 공안기관에 적극 신고해주기 바란다”. 중국의 과도한 ‘제로 코로나’ 정책에 여론이 악화되고 있지만 이를 솔직하게 털어놓거나 확인 안 된 사실을 전언으로라도 퍼뜨렸다간 체포되기 십상이다. 플랫폼은 역사적 허무주의도 유언비어로 다룬다. 중국 공산당의 역사에 의문을 제기하는 비판을 하면 처벌될 수 있다. 당 간부에 대한 소문이나 근거없는 의혹을 제기하는 것도 전부 루머로 간주된다. ‘청두에서 원숭이 두창이 발병 소문은 가짜’ 등 정부가 바로 잡을 필요가 있는 잘못된 정보들도 있지만 이는 당국이 선별한다. 유언비어 퇴치는 또다른 통제 수단이다. 지난달 24일 해외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갑자기 ‘시진핑 주석이 군부 쿠테타로 인해 가택연금 중’이란 소문이 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하이협력기구 정상회의 참석 후 격리 중이었던 것으로 밝혀졌지만 뒷맛은 씁쓸했다. 불투명한 정치 구조가 빚어낸 촌극인 동시에 중국 소셜미디어에선 한 줄도 표출되지 않는 여론 통제의 단면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박성훈(park.seonghun@joongang.co.kr)

2022-10-03

[분수대] 영국 파운드화의 추락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70년 치세가 막을 내림과 함께 많은 것이 달라진다. 영국 파운드화 도안도 그중 하나다. 영국의 모든 지폐와 동전의 앞면을 장식했던 엘리자베스 2세 얼굴은 그의 뒤를 이은 찰스 3세 얼굴로 바뀐다. 1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영국 조폐국 전통에 따라서다.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이 회사는 알프레드 대왕(849~899년) 시절부터 왕의 얼굴을 동전에 새겨왔고 지금까지 이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달 29일(현지시간) 영국 조폐국은 조각가 마틴 제닝스가 만든 새로운 도안의 50펜스짜리 동전을 공개했다. 왕관을 쓰지 않은 찰스 3세의 왼쪽 옆 모습이 새겨졌다. 왕관을 꼬박꼬박 챙겨 쓰고 동전과 지폐에 등장했던 엘리자베스 2세 도안과 달랐다. 공교롭게도 엘리자베스 2세가 떠난 직후 기축통화로서 파운드화 왕좌가 크게 흔들리는 중이다. 기축통화는 어느 나라에서나 통용되는, 금과 비슷한 지위를 갖는 통화를 뜻한다. 준비통화로도 불리는데 세계 각국이 외환보유액 같은 비상금 창고에 이들 통화를 쌓아놓고 있기 때문이다. 기축통화로 인정받는 통화는 몇 개 안 된다.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기축통화하면 파운드화 하나였다. 미국 달러화가 기축통화 대열에 올라선 건 2차 세계 대전 이후로 100년도 채 안 됐다. 이후 일본 엔화, 유로화가 그 반열에 올랐다. 기축통화 원조 격인 파운드화가 최근 위기에 몰렸다. 물가를 잡겠다며 미국 중앙은행이 무서운 속도로 금리를 올려대는 와중에 리즈 트러스 신임 영국 총리가 기름을 부었다. 취임하자마자 450억 파운드, 한화로는 약72조원에 이르는 감세안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치솟는 물가 때문에 영국 경제가 엉망인데 돈을 더 쏟아붓겠다는 처방이 나오자 금융시장은 패닉에 빠졌다. 물가를 더 끌어올리고 나랏빚만 늘릴 것이란 불안은 파운드화 투매로 이어졌다. 1파운드 가치는 역대 최저인 1.03달러까지 내려갔고 국가신용등급 전망 강등, 주택담보대출 중단 등 파장은 컸다. 트러스 내각이 감세안을 철회했지만 신뢰를 회복하기엔 늦었다는 평가다. 200년 넘게 공고했던 파운드 왕국이 흔들릴 만큼 전 세계 금융시장 폭풍이 거세다. 한국도 그 한가운데 있다. 조현숙(newear@joongang.co.kr)

2022-10-03

[디지털 세상 읽기] 구글의 신뢰 문제

구글은 지난 2019년 11월, 게임 서비스 스타디아(Stadia)를 출시하면서 게임 산업에 진출했다. 구글은 게임을 다운로드하지 않고도 어디에서나 즐길 수 있다고 홍보했지만, 클라우드 기반의 서비스였기 때문에 신속한 반응이 중요한 게임을 제대로 구현할 수 있을지에 대해 많은 소비자들이 의구심을 가졌다. 사람들의 우려는 곧 현실이 되었고, 출시 직후부터 서비스 품질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많았다. 결국 구글은 3년을 채우지 못하고 스타디아 서비스를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이번 발표가 나온 직후 한 테크 전문 언론에서는 “스타디아가 실패한 것은 아무도 구글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분석해서 눈길을 끌었다. 구글은 새로운 영역에 쉽게 진출하는 실험적인 정신을 갖고 있지만, 조금 해보다가 큰 성과가 단기간 내에 나타나지 않으면 서비스를 중단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구글이 중단한 서비스를 모아둔 ‘구글 공동묘지’라는 웹사이트까지 있을 정도. 하지만 게임은 그렇게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게이머들은 자신이 하는 게임에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하기 때문에 기업이 서비스에 진심이 아니면 선뜻 사용을 시작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구글은 쉽게 서비스를 중단하는 기업이라는 평판이 있었고, 그 결과 사람들은 서비스의 지속성을 의심하며 스타디아를 사용하기 꺼렸다는 것이다. 구글은 그런 불안을 증명이라도 하듯 3년을 채우지 않고 서비스를 중단했으니 구글의 새로운 서비스는 더더욱 믿기 힘들어지게 된 셈. 게다가 발표 두 달 전에 “스타디아가 문을 닫는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다”라는 공식입장을 내놓은 터라 이를 믿었던 소비자들은 이래저래 실망했다. 박상현 오터레터 발행인

2022-10-03

[김기찬의 인프라] 규제는 그대로, 구호만 난무하는 조선업 원·하청 대책

대우조선해양 하청업체 노조의 점거 파업이 끝난 뒤 이중구조 문제가 불거졌다. 원청에 비해 턱없이 낮은 임금과 열악한 근로조건의 실상이 드러났다. 윤석열 대통령은 8월 1일 “조선업 이중구조 개선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정부는 “조만간 대책을 내놓겠다”고 수차례 공언했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조선 3사 대표를 불러 “주도적 역할을 해달라”며 압박하기도 했다. 그러나 7월 22일 51일간의 대우조선해양 파업 뒤 금방 나올 것 같던 대책은 두 달여가 지난 지금까지 감감무소식이다. 정부 실무자는 “그렇게 (이중구조 대책이) 뚝딱 나올 사안이 아니다”며 난감해했다. “조선업의 역사, 글로벌 조선 산업에서의 경쟁력과 흐름, 원·하청 구조만으로 해석할 수 없는 산업의 구조적 특성 등 고려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는 말을 덧붙여서다. 정부 “개선책 곧 내겠다” 공언 두 달 넘도록 미궁에 빠져 헛바퀴 조선업 특성 고려 안 한 접근 한계 업종의 가려운 곳 푸는 게 첫 발 조선업 특유의 인력수급체계 ‘물량팀’ 조선업은 여느 산업과 다르다. 물건을 만들어 진열해놓고 소비자가 사 가기를 기다리는 구조가 아니다. 글로벌 시장에선 원청도 선박을 수주받아 납품하는 하청업체에 불과하다. 이러다 보니 조선업은 경기 부침이 심하다. 인력도 덩달아 출렁일 수밖에 없다. 2000년대 초반까지 조선업이 호황을 누릴 때는 STX·성동조선 등 중형급 조선소 설립 붐이 일었다. 인력이 달릴 정도였다. 임금 수준도 덩달아 오르는 등 근로자에 대한 대접도 괜찮았다. 2008년 금융위기가 닥치자 상황이 급반전했다. 수주 물량이 급감하며 중형 조선소가 구조조정에 내몰렸다. 실직한 조선 근로자가 넘쳐나 정부가 대책을 마련하느라 부산을 떨었다. 글로벌 시장에선 하청업체일 뿐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 대목이다. 조선업의 심한 인력 부침은 피할 수 없는 현상인지도 모른다. 일감이 있는 곳을 찾아 메뚜기처럼 옮겨 다니는 물량팀이라는 독특한 인력 수급 체계가 나타난 것도 이같은 업종의 특성과 무관하지 않다. 지금은 임금이 원청 근로자의 절반 정도이지만, 1980~90년대 물량조의 일당은 20만원에 육박할 정도로 셌다. 단가가 최고를 찍을 땐 하루 25만~30만원을 훌쩍 넘겼다. “1980~2000년대 초에는 원청(근로자)보다 물량팀이 돈을 더 받아갔다. 회사의 정규직을 제안해도 손사래를 쳤다”는 게 조선 원청사 퇴직 근로자의 회고다. 한국이 일본을 누르고 조선 1위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도 기술력 이외에 이런 인력 구조가 뒤를 받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정부도 독특한 조선업의 인력 수급 구조를 산업체계의 한 형태로 인정하며 정책을 짰다. 이제 와서 고용구조를 개선하려 섣불리 덤벼들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권기섭 고용부 차관은 지난달 6일 조선업 이중구조 개선을 위한 전문가 간담회를 가진 뒤 “조선업은 수주산업으로 납기일을 맞춰야 하는 점, 날씨, 자재 수급, 공정 순서 등 수많은 변수가 작용하는 점 등 산업 특성상 일정 부분 재하도급이나 물량팀이 불가피하다는 의견이 많았다”고 인정했다. 사실 일본 조선업도 글로벌 시장에서의 하청구조를 피할 수 없었다. 한국에 세계 1위 자리를 내준 뒤 10여년 동안 일본 조선사는 신규 엔지니어를 단 한 명도 충원하지 않았다. 조선 관련 박사 학위 배출자도 급감했다. 한국에서도 2008년 금융위기 이후 한동안은 신규 박사 학위자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러니 정부가 숙련공을 비롯한 인력 양성을 공언할 수도 없는 처지다. 그렇다고 조선업의 수익성이 예전만큼 좋은 것도 아니다. 단가를 후려치는 중국과 경쟁하느라 저가 입찰에 허덕인다. 권 차관이 “수익성이 개선되지 않는 한 (하청업체 근로자의) 처우 개선에 한계가 있다는 점에 현장 의견이 일치했다”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원·하청 구조에만 집착해 이중구조를 바라보면 마땅한 대책을 내놓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노사협의체는 노조 살찌우기일 뿐 일각에서는 노사협의체를 만들어 상생 방안을 마련하자는 얘기를 한다. 하지만 조선업에선 이마저도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다. 실제 일을 하는 물량팀 목소리가 중요한데, 이들은 어찌 보면 뜨내기식 근로를 한다. 인력 구조상 조선산업의 쌀 격인 물량팀이 노사협의체에 낄 수가 없다는 얘기다. 익명을 요구한 경제학 교수가 “결국 기득권 노조가 참여할 것이고, 기득권 노조 살찌우기로 흐르게 될 것”이라고 하는 까닭이다.한 조선사 임원도 “노사협의체 운운은 조선업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이상론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조준모 성균관대 경제학 교수는 “숙련 중심의 임금체계 개편으로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해치는 차별적 보상제를 개선하고, 사회안전망으로서 기금을 조성하는 방식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문성현 전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이 대우조선해양 파업 사태 당시 민주노총의 기득권 지키기 투쟁 방식을 비판하며 언급했던 방안과 유사하다.(중앙일보 7월 21일 자 4면) 다만 기금 조성은 결국 원청의 몫이 될 공산이 크다. 그렇다고 조선 3사에 무조건 돈을 내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에 합당한 대가를 주는, 주고받기식이 돼야 가능하다. 한 원청사의 임원은 “획기적으로 규제를 푼다면 돈을 안 낼 이유가 없다. 통 크게 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어쩌면 조선 3사가 가장 가려워하고 싫어하는 것을 풀어주는, 규제 혁파가 조선업의 이중구조 개선을 위한 첫걸음일 수 있다. 김기찬(wolsu@joongang.co.kr)

2022-10-03

[사설] ‘서해 피살’ 진상 규명 위해 성역 없이 협조해야

━ 문 전 대통령 “무례한 짓” 조사 거부는 부적절 ━ 국민 목숨 잃은 사건, 성실히 설명하는 게 마땅 문재인 전 대통령이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과 관련해 서면조사를 하겠다는 감사원의 통보를 거부했다. 감사원은 지난달 28일 최재해 감사원장의 결재를 받아 질문서를 전달할 방법을 문 전 대통령 측에 문의했다. 문 전 대통령 측은 감사 내용 확인을 요청하며 수령 거부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감사원이 e메일로 서면조사 요구서를 보냈으나 평산마을 비서실 측이 e메일을 반송했다. 문 전 대통령이 적법 절차에 따른 감사원의 서면 질의에 대한 답변을 거부한 것은 부적절하다. 감사원은 오는 14일 감사 종료를 앞두고 사실관계 확인이 필요해 질문서를 보내려 했다고 설명했다. 해양수산부 공무원인 이대준씨는 2019년 9월 소연평도 해상 근무 중 실종된 뒤 북한군에 의해 사살돼 불태워졌다. 당시 정부가 구조하려 한 흔적은 없고 ‘자진 월북’이라는 낙인만 가족에게 남겨졌다. 북한군에 발견됐다는 첩보 입수 후 이씨가 숨지기까지 6시간 동안 문 전 대통령과 정부의 행적 규명도 가족이 요구하는 만큼 실체 규명에 협조해야 마땅하다. 문 전 대통령은 감사원의 요구에 “대단히 무례한 짓”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전직 대통령에 대한 감사원의 서면조사는 처음이 아니다. 김영삼 정부 시절 감사원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각각 ‘평화의댐’과 ‘율곡사업’ 관련 서면조사를 통보했다. 전 전 대통령은 대국민 해명서와 감사원장에게 보내는 서한 등을 발표하는 것으로 대응했고, 노 전 대통령은 전투기 기종 변경은 소신에 따른 정책 판단이었다는 취지로 답변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외환위기 관련 감사원의 서면조사에 응했다. 과거에도 감사원의 질의를 전직 대통령 측이 흔쾌히 수용하진 않았지만, 법에 따른 국가기관의 요구를 거부하는 데 대한 부담을 느꼈다. 감사원에 따르면 2017년 이명박 전 대통령과 2018년 박근혜 전 대통령도 질문서 수령을 거부했다지만, 문 전 대통령처럼 ‘무례하다’며 고압적으로 대응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당장 피살된 이씨의 아내가 “소환조사도 아니고 질문지를 보낸 게 왜 무례한 짓이냐, 법은 누구에게나 평등한데 정치보복이라는 것은 유가족에 대한 명예훼손이자 2차 가해”라고 반발하고 있지 않나. 감사원이 조사 통보를 한 지난달 28일은 윤석열 대통령의 ‘비속어 논란’이 한창이던 시기여서 민주당은 물타기용이라고 의심한다. 정권이 노린 것이 결국 문 전 대통령이었다며 감사원을 직권남용으로 고발하고 ‘범국민 저항운동’도 제안했다. 반대로 국민의힘은 성역은 있을 수 없다며 조사에 응하라고 촉구 중이다. 국정감사가 열리는데 여야가 정쟁으로 지새울까 걱정이다. 혼란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감사원은 감사의 공정성을 재점검하고, 문 전 대통령은 국민이 생명을 잃은 사건인 만큼 당시 정부의 대응을 성실히 설명하기 바란다.

2022-10-03

[사설] 대학은 재정위기, 교육교부금은 20조원 남아도는 현실

━ 내국세의 20%인 교부금, 초·중·고만 지원 ━ 인재 육성하려면 법 개정해 대학 지원해야 어제 발표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서 국내 대학과 초·중·고교의 공교육비 격차가 더욱 커졌다. 대학생 1인당 공교육비는 1만1287달러로 평균(1만7559달러)에 한참 못 미쳤고, 전년보다 오히려 줄었다. 반면에 초등학생은 1만3341달러로 전년보다 6%, 중·고등학생은 1만7078달러로 14% 증가했다. 이들은 각각 OECD 평균(9923달러, 1만1400달러)을 크게 웃돌았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유일하게 대학생 공교육비가 초등학생보다 적은 나라다. 1998년 대학생 1인당 공교육비(6365달러)는 초등학생(2838달러)의 2.2배였지만 2014년부터 역전됐다. 대학 투자는 제자리였던 반면, 초·중·고교 예산은 내국세의 20.79%로 고정돼 있는 교육교부금이 매년 큰 폭으로 증가해 왔기 때문이다. 교부금제가 생긴 건 1972년이다. 학생들이 넘쳐나 교육 환경이 이를 따라가지 못했다. 교육투자가 국가 발전의 초석이란 믿음 아래 내국세의 일정 비율을 교부금으로 배정했고, 이 비율은 꾸준히 늘었다. 경제 규모가 커질수록 교부금이 급증했지만 학생 수는 줄었다. 초·중·고 학생 수가 2013년 657만 명에서 올해 532만 명으로 감소한 반면, 교부금은 41조원에서 81조원으로 늘었다. 이에 따라 학생 1인당 교부금은 625만원에서 1528만원으로 2배가 넘었다. 이렇다 보니 교육청에선 돈이 넘쳐 제대로 관리가 안 된다. 노트북과 태블릿PC를 나눠주고 코로나19 지원금 등 수십만원씩 현금을 지급했다. 이렇게 쓰고도 남은 돈이 올해 17개 시·도 교육청에 20조원이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2017년 3000억원가량이었던 적립금이 67배로 폭증한 셈이다. 반면에 교부금을 지원받지 못하는 대학의 교육 여건은 열악하다. 시설이 노후해 정밀점검 대상인 건물 수가 국립대 1곳당 평균 2018년 4.7개 동에서 2020년 6.4개 동으로 늘었다. 지방대 교수들은 전자저널 구독 예산이 부족해 명문대에 재직 중인 선후배들의 아이디를 빌려 논문을 다운받기도 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교부금의 일부를 대학도 쓸 수 있게 추진 중이지만 법률 개정 사항이라 국회 문턱을 넘기가 쉽지 않다. 다수 의석을 점한 야당이 난색을 표하고 있고, 교육감들과 전교조 등 교육단체의 반발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산 낭비가 뻔히 보이는 교부금제를 방치하는 건 미래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 다른 분야처럼 필요한 비용을 계산한 뒤 예산을 배정하는 방식으로 재정 운영을 효율화해야 한다. 초·중·고교와 대학 교육의 목표가 다르지 않다. 인재 양성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정치권과 교육계가 머리를 맞대고 시효가 지난 교부금제를 개선해야 한다.

2022-10-03

허겁지겁 박진 해임안 통과…김진표 '민주 고무도장' 전락했다 [신동찬이 고발한다]

지난달 29일 더불어민주당 단독으로 박진 외교부 부장관 해임 건의안을 기어이 통과시켰다. 해외순방 중 우연히 알려진 실언에 유감 표명을 안 해 문제를 계속 확산시키는 윤석열 대통령도 딱하지만, 굳이 죄를 묻자면 대통령이 카메라가 꺼진 줄 알고 내뱉은 말을 들은 것뿐인 장관을 한사코 해임하라고 쪽수로 몰아붙이는 야당 행태도 어처구니없다. 그런데 난 김진표 국회의장이 가장 실망스럽다. 미국 부통령 방한 중에 벌어진 외교부 장관 해임 건의안 통과라는, 지극히 민망스럽고 좀스러운 사태를 충분히 막을 수 있었으나 막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 의장은 누가 시키는 대로 의사봉만 두드리는 허수아비가 아니다. 5선 의원으로 노무현 정부 땐 부총리를 지냈고,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치러진 지난 19대 대선 직후 바로 문재인 정권의 국정기획자문위원회 위원장(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해당)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런 그가 여야를 중재하는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거나 국익을 위한 판단을 하는 대신 민주당 당론을 따랐다. 속된 말로 짜고 치는 고스톱을 친 셈이다. 문제는 국회의장은 그래선 안 된다는 점이다. 국회법은 '국회의장은 의장으로 당선된 다음 날부터 의장 재직 동안 당적을 가질 수 없다'(제20조의 2 제1항 본문)고 규정하고 있다. 김 의장이 아무리 민주당에서 잔뼈 굵은 정치인이라도 지난 7월 제21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이 된 이후로는 초당적으로 국회를 운영했어야 한다. 이를 모를 리 없다. 김 의장은 취임 기자간담회에서 “여야는 물론이고 정부와 국회, 대통령과 야당 사이에 튼튼한 다리를 놓기 위해 힘쓰겠다”며 “국회 운영에 있어 다수결은 중요한 기준이지만 49% 소수 의견도 수렴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는 게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했다. 특히 “정부가 충분히 감당하지 못하는 외교 공백이 있다면 국회가 앞장서 공백을 메우기 위해 노력하겠다”라고도 했다. 그러나 외교부 장관 해임건의안을 처리할 때 보여준 그의 처신은 국회법 정신에 반할뿐더러 취임 기자 간담회에서의 스스로 내놓은 다짐을 무색하게 하는 고무도장(rubber stamp) 노릇이었다.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방한 때 주무장관을 해임하겠다는 비상식적 건의안이었는데도 김 의장은 그 스스로 말한 것처럼 “정부가 충분히 감당하지 못하는 외교 공백을 앞장서 메우기”는커녕 오히려 허겁지겁 국회 본회의를 열어 외교부 장관 해임건의안을 통과시켜줬다. 그나마 여당인 국민의힘 반발로 본회의 시작만 해리스 부통령이 공식 일정을 마친 오후 6시 이후로 미뤘을 뿐이다. 김 의장에게 다른 선택은 없었을까. 장관 해임건의안을 포함해 국회에 올라온 모든 안건의 표결은 국회의장이 '표결할 안건의 제목을 의장석에서 선포하여야'(국회법 제110조 제1항) 한다. 의장이 '표결을 선포한 후에는 누구든지 그 안건에 관하여 발언할 수 없다'(같은 조 제2항)는 규정에서 볼 수 있듯 국회에서 안건 표결 여부는 의장의 절대적 권한이다. 이런 막강한 권한을 특정 정당을 위해 남용하지 못하도록 국회법은 당적을 포기하도록 못 박은 것인데, 그는 이런 정신에 비추어 중립적이고 공정해야 처신하는 대신 민주당의 고무도장 역할만 충실히 했다. 어쩌면 이런 비판이 한국 정치에선 현실과 동떨어진 너무나 이상적인 바람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의장 경선 때 이미 이런 행태가 예견되기도 했다. 그는 당시 “국회를 무시하고 사법 권력을 무자비하게 휘두르며 국정 독주를 해 나가는 윤석열 정부를 강하게 견제하는 일이 국회 다수당인 우리 민주당의 사명이고 운명”이라 했다. 그리고 의장이 되기에 앞서 경선 기간인 지난 6월 민주당의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법안 강행 처리 때 법사위에 투입, 안건조정위원장을 맡아 국민의힘의 정상적인 심의권마저 봉쇄했다. 아무리 한국적 정치 상황이 비정상적이라고는 하지만 국회법상 국회의장의 공정하고 중립적인 결정 의무나 그 스스로 국민에게 했던 약속을 당리당략에 따라 헌신짝처럼 버려도 그만일 걸까. 제대로 돌아가는 국회라면 국회법 규정을 정면으로 무시하고, 본인이 내뱉은 발언조차 공염불로 만드는 의장을 향해 강력한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고 본다. 김 의장에게 그 유명한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 얘기를 꼭 들려주고 싶다. 20세기 초 독일 간첩으로 몰려 절해고도에 유배된 유대인인 프랑스군 대위 드레퓌스를 구명하려 쓴 글 말이다. 막강한 군부를 두려워하는 당시 사회 분위기 탓에 대문호로 추앙받던 졸라 조차 기고할 매체를 찾기 힘들었는데, 급진 공화파 정치인 조르주 클레망소(1841~1929)가 흔쾌히 자신의 신문 '로로르(L'Aurore)' 1면을 통째로 내주어 보수적 군부와 가톨릭 세력을 저격한 졸라의 글이 빛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드레퓌스는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끌레망소는 우리로 치면 진보적 야당 정치인 격으로 반골 기질은 지금 우리의 야당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런 그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해 파리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총리를 맡아 맹렬하게 독일과 싸워 승전을 이끌었다. 외교·안보만큼은 여야나 진보·보수가 따로 없다는 프랑스의 연면한 전통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법에 따라 초당적, 중립적으로 국회를 운영해야 하는 국회의장마저 진영 논리에 휘둘려 사실상 추태에 가까운 국회 운영을 하는 우리 정치 현실에선 끌레망소 사례는 초현실적 판타지처럼 느껴진다. 더군다나 지난 세계대전 못지않은 위험천만한 국제 정세로 거센 격랑이 몰아치고 있는 와중에 국회의장이 앞장서서 이전투구를 벌이는 걸 보자니 그 결과가 참으로 으스스할 따름이다. 신동찬(c_project@joongang.co.kr)

2022-10-03

[중앙칼럼] 달라지는 아시아계 이미지

리얼리티 TV 프로그램 중 가장 클래식하다고 분류되는 CBS 방송의 ‘어메이징 레이스(Amazing Race)’가 최근 아시안 커뮤니티에서 화제다. 이 프로그램은 팀당 2명씩인 12개 팀이 전 세계를 이동하면서 경주를 해 결승 지점에 먼저 도착하는 팀이 승리하는 내용이다.  전체 경주는 12개로 나뉘어 있는데, 구간마다 육체적·정신적 과제들을 준다. 각 팀은 낯선 외국에서 현지인과 소통하며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실마리를 찾아다닌다. 구간을 마칠 때마다 탈락 팀들이 나오고 맨 마지막으로 남은 3개 팀 가운데 결승 지점을 먼저 통과하는 한 팀이 상금 100만 달러를 획득하는 내용이다. 2001년 처음 방송됐는데 벌써 시즌 34까지 나왔다. 이번 시즌이 유독 아시안 커뮤니티의 눈길을 받는 건 유력한 우승 후보팀들이 모두 아시안이기 때문이다.     백인 여자친구와 출연하는 중국계 데릭 샤오(25)와 출생 후 입양으로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쌍둥이 한인 자매가 바로 그 후보들이다.   데릭 샤오는 ‘빅 브러더’라는 다른 리얼리티 쇼에 출연했다가 연인이 된 백인 여성과 출연하고 있다. 그는 이번 레이스에서 자유롭고 통통 튀는 밀레니얼 세대 커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에게 공부만 하고 소심한 성격의 전형적인 아시안 모습은 없다. 가끔 여자친구에게 드라마 ‘사내맞선’ 속 남자 주인공 못지않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 역시 요즘 세대다운 모습이다.   이들보다 더 관심을 받는 팀은 한인 자매다. 바로 에밀리 부시넬과 몰리 시에너트. 펜실베이니아와 플로리다에서 살다가 35년 만에 처음 만난 자매는 함께 있는 시간을 갖기 위해 대형 로펌과 헬스케어 기관의 행정관이라는 각자의 커리어를 미뤄두고 어메이징 레이스에 도전했다.     이들이 만나게 된 과정은 드라마틱했다. 출생 직후 입양된 데다 친가족을 찾거나 재회한 적이 없던 부시넬은 딸이 시도한 유전자 검사를 통해 자신의 친모 DNA와 49.96% 일치하는 사람을 찾았다는 연락을 받았단다. 앞서 DNA를 등록했던 시에너트도 같은 메시지를 받고 의문을 풀기 위해 부스넬에 연락을 시도했다. 이메일과 전화 통화가 오가면서 이들은 80년대에 한국에서 입양됐을 뿐만 아니라 둘 다 35살이며 3월 29일에 태어났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자신들이 쌍둥이 자매임을 확인했다.   자신과 같은 모습의 자매가 미국에서 살고 있다는 걸 안 순간 “내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는 시에너트는 “마치 운명이 우리를 하나로 만든 것 같다. 우린 중요한 순간에 서로를 만났다”고 환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들은 ‘인생의 기회’라는 이번 레이스를 통해 대화하고 사진을 촬영하고 같이 밥을 먹으면서 잃어버린 36년의 세월을 채우고 있다. 입양인이라는 배경을 당당히 공개하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들 자매의 도전과 레이스에 시청자들은 격려를 보내는 중이다.     10여년 전만 해도 아시안이 출연하는 리얼리티쇼는 거의 없었다. 주로 백인과 라틴계 또는 흑인 출연자가 주를 이뤄 아시안은 들러리에 불과했다. 특히 한인은 2006년 2세인 권율씨가 CBS에서 방송한 ‘서바이버’ 쇼에 참여해 우승한 게 유일한 것 같다. 당시에도 권 씨는 ‘모범적인 아시안’ 남성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들의 입양 이야기를 들려주고 평범한 20대 커플 모습을 보여주는 아시안 출연자에게 시청자들이 열광하는 걸 보니 미국 속 아시아계 커뮤니티가 성장했음을 새삼 실감한다.     샤오팀과 부시넬·시에너트 자매팀은 1차 구간을 무사히 통과하고 2차 구간으로 이동했다. 이들이 전 세계에 새로운 아시안 이미지를 만들어내길, 또 기왕이면 우승해 상금도 차지하도록 함께 응원하면 좋을 것 같다.  장연화 / 사회부 부국장중앙칼럼 아시아계 이미지 아시안 커뮤니티 모두 아시안이기 어메이징 레이스

2022-10-02

[디지털 세상 읽기] 아마존의 절약정신

최근 아마존에서 일하다 구글로 옮긴 직원들끼리 “구글에 온 후에야 이전 직장이 얼마나 짠돌이였는지 알게 됐다”며 자신의 경험담을 나눈 내용이 화제가 됐다.     회사 컴퓨터로 애플 컴퓨터를 신청해도 특별한 이유가 아니면 저렴하고 사양이 낮은 윈도 컴퓨터를 지급하고, 모니터가 두 개 필요한 직원들은 회사의 허락을 받기 위해 인턴을 뽑아 모니터를 받은 후 인턴이 나가면 가져다 사용하는 방법을 썼다고 한다.     심지어 회의 때 나오는 베이글 하나를 두 사람이 반쪽씩 나눠 먹기도 했다는 게 전직 아마존 직원들의 얘기였다.   이들의 푸념이 사실인지 확인할 수는 없고, 사실이라고 해도 아마존이라는 대기업 전체가 그렇다고 일반화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풍족한 직원 복지와 근무 환경으로 유명한 테크 업계에서 아마존의 절약정신은 소문난 기업 문화다. 왜 이런 차이가 존재할까.   아마존에서 일했던 이에 따르면 위의 내용은 특정 부서에 한정된 극단적인 사례로 보인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 아마존은 유통업체로 출발한 테크기업이기 때문에 원가절감에 예민한 문화를 갖게 됐다고 한다.     절대다수의 직원이 물류 부문에서 일하는 아마존은 직원 간 형평성을 위해서라도 수익성이 높은 광고사업을 기반으로 하는 구글이나 메타와 같은 문화를 갖기 힘들다는 것이다.     단순히 돈을 아끼라고 강조하는 게 아니라 비용이나 사내 자원을 사용할 때 “꼭 필요한 건지, 다른 대안은 없는지”를 먼저 생각해 보도록 하는 것이 아마존의 기업 철학이라고. 소비자의 이익을 직원 복지나 투자자 이익보다 앞세우는 습관이 오늘날의 성공을 가져온 DNA가 됐을 것이라고 한다. 박상현 / 오터레터 발행인디지털 세상 읽기 아마존 절약정신 회사 컴퓨터 직원 복지 윈도 컴퓨터

2022-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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