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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의 과학 이야기- 유로파

갈릴레이에 의해 배율이 스무 배나 향상된 망원경으로 군대에서는 국경선을 지켰으며 부자들은 남의 집 침실을 엿볼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이 땅에 관심을 두는 사이 정작 갈릴레이의 망원경은 하늘을 향했다. 그는 울퉁불퉁한 달 표면의 분화구를 보았으며 우리의 형제 행성인 목성 주변을 맴도는 천체를 발견했다. 목성의 위성이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하늘에 떠있는 모든 것은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천체들은 목성 주위를 공전하고 있었다. 갈릴레이의 발견은 지구중심설을 신봉하던 그 당시 많은 궁금증을 던져주더니 급기야 지동설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1610년 갈릴레이가 목성 주변에서 본 것은 총 95개의 목성 위성 중 네 개였다. 두 번째로 목성에 가깝게 도는 유로파는 지구의 위성인 달보다 조금 작고 표면은 두꺼운 얼음층이며 그 아래에 바다가 있는데 지구 바닷물의 2배 정도 될 것으로 추측한다. 태양계의 여덟 행성 중 안쪽 4개는 표면이 암석이고 바깥쪽 4개는 기체로 이루어졌다. 목성과 토성도 기체 행성인 데다 생명체가 살기 힘든 환경이어서 그 주위를 공전하는 위성에 관심을 두었다. 목성의 위성 유로파와 토성의 위성 엔켈라두스가 그 후보다.   과학이 발달하기 전에 우리는 화성인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 이 우주에 우리와 교통할 수 있는 지적 생명체는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어딘가 우리보다 훨씬 과학기술이 발달한 그 무엇이 있겠지만, 우주의 규모로 미루어 그들과 영원히 교통할 수 없다는 것이 과학적인 추측이다.     얼마 전에 TV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가 큰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별은 핵융합하는 천체여서 생명체가 살 수 없다. 그 대신 그런 별 주위를 공전하는 행성이나 그 행성 주위를 도는 위성에는 생명체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동안 발견해 낸 수천 개의 외계 행성에는 여러 이유로 생명체가 존재하기 불가능했다. 그러다 그들의 위성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지구가 속한 태양이란 별에서 가장 가까운 별인 알파 센타우리를 공전하는 행성이 있다. 영화 아바타의 무대는 그 행성 주위를 도는 판도라라는 위성이다. 실제로는 빛이 4년 반이나 걸리는 먼 곳인데 영화에서는 우주선의 성능이 향상되어 6년 수면 상태로 거기까지 간다.    우리 태양계에는 지구 말고 생명체가 존재할 만한 행성이 없다. 그래서 이번에는 행성 주위를 공전하는 총 285개의 위성으로 눈을 돌렸다. 그 첫 번째 시도가 유로파 탐사선 클리퍼다. 클리퍼는 약 30억km를 날아 2030년 무렵에 목성의 궤도에 진입할 예정이며 착륙은 시도하지 않고 낮게 날면서 유로파 가까이서 관찰할 계획이다.     갈릴레이 위성 중 가니메데가 한 번 공전하는 동안 유로파는 정확하게 두 번, 그리고 이오는 네 번 공전하는 까닭에 가니메데가 목성 주위를 완전히 한 바퀴 돌 때마다 그 세 위성은 한 번씩 일직선 위에 놓이게 된다. 당연히 서로의 중력이 크게 작용할 것이고 이 힘이 위성 내부 액체 상태의 코어를 움직여 그 마찰로 열이 나고 화산 활동도 할 것이다. 그래서 태양에서 너무 멀어서 생명체 거주 가능 영역 밖 추운 곳에 있어도 표면 얼음 아래 액체 상태의 물이 있고 해저 열수구 근처에 생명체가 존재할지 모른다는 추측을 한다. 앞으로 10년쯤 후 우리는 유로파 바닷속에 사는 외계 플랑크톤과 극적인 만남의 순간을 맞게 될 지 모른다. (작가)     박종진박종진 이야기 위성 유로파 목성 위성 유로파 탐사선

2025-02-28

[사설] 이재명만 빠진 개헌 논의…이제는 동참할 때

━ 대통령 이어 한동훈 등도 ‘임기단축 개헌’ 제안 ━ 야권도 ‘신3김’ 등 비명계 정치인들 개헌론 봇물 ━ 이대표 결단만 남아…‘87년 체제’ 극복 역할하길 정치권에서 개헌 논의가 분출하고있다. 한동훈 국민의힘 전 대표는 지난달 27일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올해 대선이 치러진다면 새 리더는 4년 중임제로 개헌하고, 본인 임기를 3년으로 단축해 2028년에 총선과 대선을 치러야 한다”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지난달 25일 헌재 최후 변론에서 “직무 복귀시 잔여 임기에 연연 않겠다”며 임기 단축 개헌 추진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여당인 국민의힘도 권성동 원내대표가 “국회 입법권을 적절히 제한해 대통령과 의회의 균형을 맞추는 개헌이 필요하다”며 개헌 특위 출범을 선언했고, 오세훈 서울시장도 “조기 대선이 치러진다면 화두는 개헌이 돼야 하고, 대통령 임기 3년 단축을 감수할 후보가 나오는 게 바람직하다”며 임기 단축 개헌론에 가세했다. 야권에서도 개헌 목소리는 비명계를 중심으로 날로 커지고 있다. 특히 차기 대권 주자로 꼽히는 김부겸 전 국무총리와 김동연 경기지사, 김경수 전 경남지사 등 이른바 ‘신3김’이 개헌을 적극 주장하고 있다. 정대철 헌정회장과 이낙연·정세균 전 총리, 김진표 전 국회의장 등 민주당 원로들도 “지금이야말로 개헌의 다시 없을 적기”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1987년 공포된 현행 6공 헌법은 대통령에 과도하게 권한이 집중돼 어느 당의 누가 대통령이 돼도 여야 간에 극한투쟁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87년 체제에서 배출된 대통령 8명 중 3명이 탄핵소추를 당했고 그중 한명은 탄핵돼 임기를 마치지 못한 채 권좌에서 쫓겨났다. 또 3명은 퇴임 후 구속됐고, 1명은 검찰 수사를 받던 중 극단적 선택을 했다. 야당은 야당대로 집권세력이 실패해야 정권교체가 실현된다는 강박관념 아래 정부 정책의 발목을 잡는 데만 열을 올리는 현상이 반복돼왔다. 이로 인해 국민의 정치혐오증은 임계점에 달한 지 오래다. 여야가 합의만 한다면 늦어도 반년 안에 개헌이 가능하다는 게 정치권의 중론이다. 현행 6공 헌법도 1987년 노태우 민정당 대표의 6·29 선언으로 개헌 논의가 개시된 지 넉달만인 87년 10월 29일 발효된 바 있다. 개헌의 범위를 책임총리제와 대통령 결선 투표제 도입 등 권력 구조 개편에 국한하는 ‘원 포인트’ 개헌에 여야가 합의한다면 87년 개헌 때처럼 빠른 시일 내에 개헌이 가능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국민의 개헌 의지도 어느 때보다 높다. 지난해 12월 29~30일 중앙일보·엠브레인퍼블릭 여론조사에서 “차기 대선 전에 개헌을 논의해야 한다”는 응답이 60%에 달했다. 이런 마당에 유력 정치인 중 딱 한 사람,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만은 개헌론에 대해 침묵해왔다. 차기 대선 주자 여론조사에서 독보적 1위를 달리고 있는 이 대표인 만큼 개헌이 아니라면 ‘87년 체제’ 극복을 위해 어떤 다른 처방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런 논란을 의식했는지 이 대표는 27일 “(당장은 아니지만) 개헌을 안 할 수는 없다”고 언급했다. 빈말이 아니기를 바란다. 그가 빠진 개헌 논의는 탁상공론에 불과할 수 밖에 없다. 87년 1497억 달러였던 대한민국의 국내총생산(GDP)은 지난해 1조9471억 달러로 13배나 성장했다. 1인당 GDP도 일본을 능가하는 수준에 올랐다. 하지만 헌법은 38년 사이 자구 하나 바뀌지 않았다. 정치퇴행과 국정마비의 일상화로 국가존망의 위기감마저 감돈다. 이 대표는 더 이상 시대적 요구를 외면하지 말고 개헌 논의에 적극 참여해 유력 대권 주자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바란다.

2025-02-28

[우리말 바루기] ‘우리나라’와 ‘저희 나라’

우리나라 사람은 3·1운동 하면 가장 먼저 무엇을 떠올릴까. 유관순 열사와 대한 독립 만세라고 답한 이가 가장 많았다. 지난 2019년 문화체육관광부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실시한 국민 인식 조사 결과다.   여기에 쓰인 표현처럼 우리 한민족이 세운 나라를 스스로 이를 때 ‘우리나라’라고 말하는 게 일반적이다. 이 ‘우리나라’가 가끔 격식을 갖춰야 하는 자리에서나 윗사람에게 이야기할 때 ‘저희 나라’로 둔갑하는 경우가 있다. “저희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선조들의 마음이 모여 대한민국의 역사를 만들었습니다”와 같이 얘기하는 것은 어법에 어긋난다. 같은 국민끼린 ‘우리나라’라고 해야 한다.   왜일까. ‘저희’는 ‘우리’의 낮춤말이다. 자신을 낮춤으로써 상대를 높이는 방법이다. 청자를 포함하는 같은 구성원끼리의 대화에서 ‘저희’라고 하면 어색하다. 듣는 사람도 같은 구성원이므로 높여야 할 상대가 없기 때문이다. 한동네 사람이나 같은 회사를 다니는 사람끼리 ‘저희 동네’ ‘저희 회사’라고 하지 않는다. ‘우리 동네’ ‘우리 회사’라고 하는 게 자연스럽다. 이웃 동네 어른에게 “저희 동네는 인심이 좋아요”라고 할 순 있지만 같은 동네 어른에게 “저희 동네는 인심이 좋아요”라고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외국인들에게 “저희 나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고 얘기하는 것은 괜찮을까.   “우리나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고 쓰는 게 적절하다. 문법적으로 틀렸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국가나 민족은 대등한 관계이므로 굳이 자기 나라나 민족을 낮출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 우세하다. 이런 이유에서 방송 등에서 ‘저희 나라’라고 얘기했다가 비난받았던 정치인과 연예인도 꽤 있다. 국립국어원도 ‘저희 나라’ ‘저희 민족’이 아니라 ‘우리나라’ ‘우리 민족’으로 쓰는 게 자연스럽다는 입장이다. “새해가 되면 한국에선 어떤 음식을 먹습니까?”와 같은 외국인의 질문에 “우리나라에선 떡국을 먹습니다”로 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우리말 바루기 나라 저희 나라 자기 나라 우리나라 사람

2025-02-27

[문화산책] 620만불짜리 바나나, 작품의 정체

무려 620만 달러짜리 바나나가 화제가 된 사건이 있었다. 지난해 11월 중순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벌어진 소동(?)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엄청난 가격에 낙찰받은 이가 그 값비싼 바나나를 먹어 치우고는 “다른 바나나보다 훨씬 맛있다”고 한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참 더럽게 우습고 슬픈 코미디다.   황금으로 만든 것도 아니고, 마켓에서 살 수 있는 그저 평범한 바나나 한 개가 이렇게 비싼 이유는? ‘예술작품’이기 때문이다.   생바나나 한 개를 은색 접착테이프로 벽에다 붙여놓은 이 작품의 제목은 〈코미디언〉, 매우 풍자적이고 상징적이다. 지금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이탈리아 작가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의 작품이다. ‘현대미술의 개구쟁이’라는 별명을 가진 작가다. 18금으로 만든 ‘황금 변기’도 그의 작품이다. 이 황금 변기의 제목은 〈아메리카〉, 이 또한 매우 통쾌한 풍자다.   작품 〈코미디언〉은 2019년 마이애미 아트바젤에서 처음 소개되어 대단한 화제를 모았다. 한 행위예술가가 관람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바나나를 벽에서 떼어내 먹어버리는 바람에 더욱 유명해졌다. 그런데 갤러리는 전혀 문제 삼지 않고, 새 바나나를 붙여놓았다. 똑같은 사건이 2023년 서울의 삼성미술관 리움에 전시됐을 때도 일어났다. 이때도 작가와 미술관은 아무렇지도 않게 새 바나나를 사서 붙여놓는 것으로 그만이었다. 그리고, 경매에서 620만 달러에 낙찰받은 바나나를 맛있게 먹어버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미술에 별 관심 없는 보통사람들이 던지는 질문은 두 가지다. 첫째는 ‘그런 것도 미술이냐?’ ‘현대미술의 정체는 도대체 뭐냐?’. 둘째는 ‘미술작품의 가격은 누가 어떻게 정하는 것이냐?’ ‘바나나 한 개 값이 아파트 수십 채와 맞먹는다니 말이 되느냐?’.   두 가지 다 딱 부러지게 대답하기 어려운 지극히 당연하고 원초적인 질문이다. 오늘날의 미술에 숨겨진 부조리의 핵심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미술은 그 범위가 엄청나게 넓어졌다. 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미술’이라는 개념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자칭 전문가인 나도 ‘이런 것도 미술이라고 해야 하나?’ 싶은 작품을 자주 만난다. 도무지 감당이 안 된다. 그래서, 미술 대신에 시각예술이니 조형예술이니 하는 새로운 용어가 등장했다.   〈코미디언〉 같은 작품을 전문가들은 ‘개념미술’이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바나나라는 물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잘 익은 바나나를 평범한 접착테이프로 벽에 붙여놓아, 보는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먹고 싶게 만든다는 아이디어에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생각이 곧 예술이라는 말씀이다. 거룩하시다.   카텔란의 〈코미디언〉을 낙찰받은 사람은 가상화폐로 벼락부자가 된 중국 출신의 젊은 기업가 저스틴 쑨이라는 분이다. 그가 거금 620만 달러를 내고 받은 것은 바나나와 접착테이프, 바나나가 썩었을 때 이를 교체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설치 안내서, 그리고 작가가 서명한 진품인증서가 전부다.   그런데 알고 보니, 쑨의 행동은 단순한 과시가 아니라, 그가 운용하는 암호화폐 홍보를 위한 것이고, 그의 행동에 전 세계적 관심이 몰리면서 충분한 홍보 효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경매에서 작품을 낙찰받을 때도 일반 화폐가 아닌 암호화폐로 대금을 지급했다고 한다. 쑨이 말했다.   “이 작품이 예술과 밈과 암호화폐의 세계를 연결하는 문화적 현상이며, 미래에 더 많은 생각과 토론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아, 참 대단한 선문답이다. 먹고 살기 힘들어 바둥대는 생활인들에게 이런 고차원의 예술세계를 이해하라고, 그래야 고상한 문화인이 된다고 말할 자신이 도무지 없다. 아무래도 구멍가게 문을 닫아야겠다. 장소현 / 미술평론가·시인문화산책 바나나 작품 바나나 작품 접착테이프 바나나 달러짜리 바나나

2025-02-27

[중앙시론] 고추장, 간장에 담긴 독립운동

1919년 3월 1일 평화 시위는 전 세계에 흩어진 한국인들에게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거리로 나온 시민들은 자주독립을 외치며 일제에 항거했으며 이러한 소식을 전해들은 미주 한인들은 크게 고무되어, 보다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미주 한인들은 어려운 환경 즉 저임금, 열악한 노동 조건, 그리고 인종 차별 등의 악조건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3.1 평화 시위 소식은 미주 한인 사회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다.     특히 3.1 운동은 미주 한인여성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3.1 운동 이후 미주 한인 여성들이 독립 운동의 보조에서 주체로 적극 참여하게 된 것이다. 대한인국민회 북미 총회장 이대위는 1918년 1월 21일 여성 동포들의 국민회 입회를 허락하는 훈시를 발표하였다.     “남녀 제한 없이 모두 동등한 의무와 권리를 갖는 회원으로 입회하는 것”을 공식 발표한 것이다. 여성 동포들의 입회가 허락되자, 각 지방회에서 여성 동포들이 회원으로 가입하기 시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3.1 운동 이후 미주 한인 여성들도 조직을 만들어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차만재 교수는 캘리포니아 주 다뉴바 지방의 한인들이 3.1 운동 소식을 접한 후 여성들의 독립 운동 참여가 활발해졌다고 밝히고 있다: 1) 5월 18일 한인 여성 대표들이 회의를 했다, 2) 전국 한인 애국여성 리그 설립, 3) 대한부인구제회 다뉴바 지방회 설립, 4) 일본 간장 불매 운동, 5) 상해 임시정부를 인정하도록 미 의회에 로비, 6) 한인 학생 회의가 8월 14~16일 개최됐다고 요약하고 있다.   3.1 운동 이후부터 애국 부인단은 외교 활동도 벌였는데 부인 애국단이 미 대통령에게 보낸 청원서의 서두에서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전쟁을 연합국의 승리로 이끈 것을 치하하면서 한인들은 비무장의 혁명을 일으켰을 뿐이라고 했다. 또한 일인들의 만행도 지적했는데, 한국 부녀를 겁탈했고 예수교를 위협한다고 전했다.     ‘무삼 방책으로든지 도와주시기를 꾀하시면 각하께서 능히 오늘 넓은 세계가 다 아는 일본의 큰 죄악을 교정하실 수 있나이다’라는 마지막 발언에 이 글에 핵심이 들어있다. 이 청원서는 은근히 미합중국 대통령을 세계의 리더로 인정하고 있음을 보이며 리더로서 그에 맞는 역할을 하도록, 즉 세계의 악인 일본에 조치를 취하도록 압박하고 있다.     한인 여성들은 일본 상품 불매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는데 왜적의 장을 먹지 않는다는 취지에서 김자혜, 리신환, 량제현은 고추장과 간장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새크라멘토 지역 부인들은 합자해서 간장회사를 조직하고 일본 간장 불매 운동을 전개했다. 리버사이드 지역의 한인 여성들도 집에서 간장을 직접 만들어 먹고 일본 간장 불매 운동에 동참했다고 신한민보는 보도했다. 이처럼 각 지역의 한인 여성들은 일본 상품 불매 운동에 앞장섰고 간장, 고추장, 토장 등을 직접 만들거나 한인 회사를 설립하여 판매한 것이다.     3.1 운동 직후 미주 한인 여성들은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서 적극적인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첫째, 대한인국민회 회원으로 정식 입회가 1918년부터 허락되었고, 둘째, 부인애국단과 대한부인구제회 등의 여성 단체를 조직하고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셋째, 일본 상품 불매 운동에 앞장섰고, 넷째, 적극적인 외교 활동을 통해 대한 독립의 당위성을 널리 알리는데 기여했다.   미주 한인 여성들이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차세대들에게 알리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다. 도산 안창호 기념사업회에서 2025년 주요 사업의 일환으로 차세대 교육에 중점을 둘 것이라고 발표했다. 우리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겠다.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중앙시론 독립운동 고추장 미주 한인여성 한인 여성들 대한인국민회 북미

2025-02-27

[커뮤니티 액션] “핵무기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

3월 한국에서 원폭 피해자 1세와 2세들이 뉴욕으로 온다. 그리고 반핵운동가들과 함께 유엔 제3차 핵무기사용금지조약(TPNW) 당사국 회의에 참여한다. TPNW는 더 잘 알려진 핵확산금지조약(NPT)의 한계를 넘어선 국제 협약이다. 핵무기 개발, 실험, 생산, 비축, 주둔, 이전, 사용 그리고 사용 위협과 이에 대한 지원을 전면 금지하는 조약이다. 2017년 129개국이 찬성했고 현재까지 94개국 서명, 73개국 비준까지 마쳤다.   이 조약을 이뤄낸 국제핵무기폐기운동(ICAN)은 2017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또 지난해에는 전 세계의 핵무기 폐기를 호소해온 ‘일본 원수폭 피해자 단체협의회’가 노벨평화상을 받으면서 TPNW가 관심을 끌었다.   뉴욕 방문에는 일본 단체 초청으로 지난해 노벨평화상 시상식에 함께 했던 이태재 한국원폭피해자후손회 회장, 일본에서 40여년간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을 위해 활동한 이치바 준코 ‘한국원폭피해자 지원모임’ 대표도 함께한다.   또 2026년 뉴욕에서 원폭 피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는 ‘원폭피해자국제민중법정’ 개최를 준비 중인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대표들도 온다.   안타깝게도 TPNW에는 핵무기를 보유 국가들은 물론 미국 핵우산 아래 있는 한국, 일본이 참여하지 않고 있다. 피폭자 70만 명(이 가운데 10%가 넘는 10만여 명이 한국인)이 미국의 핵폭탄 투하로 사망하거나 부상을 당했는데 정작 그 국가들은 TPNW에 가입하지 않고 있다.   그런 까닭에 원폭 피해자들이 중심이 돼 반핵운동을 펼쳐 나가고 있으며 특히나 일본과 달리 전범 국가도 아닌 한국의 원폭 피해자들이 ‘핵무기 없는 세상’을 위해 앞장서고 있다.   올해는 광복 80주년이고, 미국의 원폭 투하 80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하다. 8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핵전쟁 위협은 가실 기미가 없다.   이태재 회장은 “한국인 원폭 피해 생존자가 1622명, 원폭 피해 후손이 3100여 명”이라며 “노벨평화상 시상식에서 한국인 피해 현실을 최대한 알렸다”고 밝혔다. 이 회장은 1세 피폭자인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정원술 회장과 함께 한복을 입고 시상식에 참여했다. 비록 상은 일본 단체가 받았지만 한국인 피해자들이 함께 받은 것과 마찬가지다. 지난해 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와 함께 한국은 노벨상 두 개를 받은 셈이다. 이분들의 소망은 2045년 원폭 100년이 되기 전 핵무기 없는 지구를 만드는 것이다. 이런 바람과 달리 한국에서는 핵무장 지지 여론이 퍼지고 있다. 그리고 핵무기 관련 군비통제를 파기해온 트럼프를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하겠다는 정치권의 어이없는 주장이 들리는 등 세상은 거꾸로 가는 듯하다.   한인사회와 미국의 평화운동가들이 원폭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국제민중법정에 대해 알아보는 행사가 3월 7일 오후 7시 플러싱(Glow Cultural Center 133-29 41st Ave 1층, 문의 201-546-4657)에서 열린다.   미주한인평화재단은 지난해 미주한인단체로는 처음으로 ICAN에 가입했다. 그리고 원폭 피해자들의 활동을 힘닿는 대로 도울 계획이다. 미국의 시민단체가 인류 역사상 핵폭탄을 사용한 유일한 국가인 미국의 죄를 씻는데 나서야 하는 까닭이다. 김갑송 / 민권센터·미주한인평화재단 국장커뮤니티 액션 핵무기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정원술 한국원폭피해자 지원모임 이태재 한국원폭피해자후손회 회장

2025-02-27

[삶과 믿음] 예견된 슬픔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 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 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을 때,/ 내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 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비스와바쉼보르스카 지음, 최성은 옮김, ‘두 번은 없다’, ‘끝과 시작’, 문학과지성사, 2016.   아이가 죽었다. 생전에 깃털처럼 가볍던 디만시아란다가 세 살이 되도록 부모도 모른 채, 장애를 갖고 살던 땅을 떠나 하늘 아버지의 집으로 가서 하늘의 별이 되었다. 이 땅에서 그토록 짧은 시간을 보내고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아란다는 시 정부 기관에 의해 생후 6개월쯤으로 추정되는 때에 장애 고아원에 위탁되었다.   아이티 현지 스태프 조나단이장애고아원의 아이 둘이 폐가 안 좋다는 연락을 한 것은 지난해 12월이었다. 병원을 가보지 그러느냐는 이야기는 한가한 소리였다. 아이들이 치료받을 만한 병원을 찾기가 힘들었다. 공립병원의 빈자리를 어렵게 찾았지만, 적절한 치료를 받기에는 의약품도 의료진도 턱없이 부족했다. 아란다는 너무 늦게 병원을 가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도 못하고 하늘나라로 돌아간 것이다.   지난해 11월에 수도 포토프린스에서 가장 현대적 시설을 갖춘 병원이 갱들의 약탈로 무너졌다. 12월에는 아이티에서 제일 큰 병원이 다시 개원하는 날 갱들이 총격을 가해 기자 두 명을 포함해 세 사람이 사망했다. 국경없는의사회는 지난해에 환자와 의료진이 갱들의 공격을 받은 이후 이들을 보호할 수 없다며 아이티에 있는 여러 병원의 문을 닫았다.   일반 국민은 물론이고, 경찰도 아프면 병원을 찾고, 갱들도 다치면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다. 그러나 아무 생각 없이 폭력적이기만 한 갱들의 만행은 병원을 파괴하고 가뜩이나 무정부 상태인 나라의 의료체계를 무너뜨리고 있다. 무료 진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도 거의 없거니와 문을 열고 있는 공립병원은 열악한 시설에 의약품이 부족하다. 갱들이 세력을 넓히면서 의료진도 손을 놓은 경우가 많아서 생명이 위험할 때 적절한 치료를 받기 어렵다.   아이티는 지금 겨울이다. 겨울이라고는 하지만 낮 최고 기온이 화씨 90도 안팎, 밤 최저 70도 안팎인데, 이런 날씨에도 아이들이 감기에 걸리곤 한다. 고아원 아이들은 아프면 말이 없어지고, 잘 움직이지 않는다. 아프다는 말도 못 하는, 평소보다 더 얌전해진 아이들을 버려두다가 병을 키우고 치료 시기를 놓치게 된다. 거기에다가 치료받을 병원이 없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감기가 유행인 요즈음 우리가 돕는 고아원 원장 중 세 사람이 독감을 앓고 있고, 아이들도 상당수가 감기를 심하게 앓고 있다, 샬롬고아원의 쟌 목사는 기침을 계속하면서 피를 토한다고 조나단이 걱정스러운 메시지를 보냈다. 아이들이나 고아원 스태프가 아프면 우리는 긴장하면서 한편으로는 자꾸 슬픔을 상상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 고아원을 짓누르고 있을 때 우리도 예견된 슬픔을 겪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시고 슬퍼하셨다. 우리는 아이티와 아이티 고아들의 앞날을 생각하며 막막한 마음으로 다가오는 슬픔을 미리 삼킨다. 아이티 고아원에 지원할 의료비를 송금하면서도 닥쳐올 슬픔은 더욱 커지고, 우리는 이미 예견하고 있던 아란다의 슬픔을 고이 싸매고 있다. 조 헨리 / 선교사·더 코너 인터내셔널 대표삶과 믿음 예견 슬픔 아이티 고아원 고아원 스태프 장애 고아원

2025-02-27

손헌수의 활력의 샘물- 일류의 조건

대기업에 다닐 때다. 회사 전체의 다음연도 손실과 이익 계획을 경영계획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회사 전체의 경영계획을 관리팀의 직원 한사람이 관리했다. Excel 프로그램 하나로 직원 한사람이 4천명이 넘는 회사 전체의 연간 수입과 지출 계획을 관리했던 것이다. 그 직원은 혹시나 다른 직원이 자신이 관리하는 엑셀 프로그램을 알거나 건드릴까 봐 늘 노심초사했다.   자신이 아는 기술이나 지식을 꼭 부여잡고 평생을 사는 사람이 있다. 자신이 아는 걸 남에게 알려주면 자기 밥그릇이 날아간다고 여기는 것 같다. 어쩌다 얻게 된 노하우나 지식 하나를 부여잡고 평생을 사는 것이다. 요즘에는 지식이나 기술을 습득하기가 쉬워졌다. 하지만 예전에는 ‘도제 교육’이라고 해서, 숙련된 전문가 아래서 초보인 제자가 가르침을 전수 받았다. 영화를 보면 제자는 일평생 스승 아래서 마당만 쓸다가 스승이 눈을 감기 직전에 지식을 전수받는 경우도 있다.     일본의 교육학자인 사이토 다카시는 ‘일류의 조건’이란 책에서 ‘훔치는 기술’을 말한다. 일류가 되기 위해서는 잘 훔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훔치는 기술은 남에게 ‘지식을 훔치는’ 기술이다. 그가 말하는 ‘일류’는 꾸준한 자기 성장을 하며 본질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한마디로 일생을 성장하는 사람이다. 항상 성장하는 사람은 자기 밥그릇을 쉽게 남에게 내어 줄 수 있다. 자기는 이미 다른 밥그릇을 쳐다보기 때문이다. 남에게 가르치는 것을 꺼려하는 사람은 자기 밥그릇만 본다. 남이 금방 자기 밥그릇을 차지 할까봐 늘 전전긍긍한다. 남에게 쉽게 가르쳐 주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자기는 두개 세개를 새로 깨우쳐야만 한다. 그것이 일류가 되는 첫번째 조건이라는 것이다.   동경대 법대를 나와서 일본에서 대학교수를 하는 저자는 ‘일류’가 되기 위한 또 다른 조건으로 ‘요약하는 힘’을 꼽는다. 업무에 대한 지시를 하다보면 5분만 지나도 졸고 있는 직원을 본다. 그는 졸면서 나에게 외치는 것 같다. ‘제발 요약해서 본론만 말하라’고 말이다. 요즘은 영화도 짧게 요약한 것들이 유투브에 많이 나와있다. 책의 내용도 요약되어 있다. 업무지시를 하든 강의를 하든, 고객에게 설명을 하든 ‘요약’해야 한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받은 교육 중에 내게 가장 도움이 되었던 것 하나만 꼽으라면 ‘짧은 글 짓기’다. 글을 짧게 짓기 위해서는 내용을 여러번 곱씹어 보고 완전히 내것이 되어야 가능하다. 그리고 남의 입장이 되어 내 글을 읽어보아야 한다. 과연 이 말을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있을까?   사이토 다카시 교수의 마지막 일류가 되기 위한 조건은 ‘추진하는 힘’이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추진력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추진력은 매일 샘솟지 않는다. 그래서 ‘습관’을 만들어야 한다. 몸은 처음에는 생각하는 대로 움직인다. 하지만 계속해서 습관으로 만들면 몸이 알아서 혼자 움직인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고등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은 늘 이런 말씀을 하셨다. ‘습관은 성격을 만들고 성격은 운명이 된다.” 작지만 계속할 수있는 좋은 습관을 만들어야한다. (변호사, 공인회계사)     손헌수손헌수 활력 마지막 일류 사이토 다카시 자기 밥그릇

2025-02-27

[사설] 마은혁 임명 결정 존중해도 탄핵심판 참여는 무리수

━ “국회의 헌재 구성권 침해” 결정으로 논란 일단락 ━ 윤 대통령 사건 참여는 정당성·명분서 혼란 소지 헌법재판소가 어제 마은혁 헌법재판관 후보자를 임명하지 않은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의 부작위가 국회의 헌법재판소 구성권을 침해한다고 결정했다. 재판관 8인의 일치된 의견이다. 헌재의 결정에 따라 최 대행이 반드시 마 후보자를 임명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 차례 선고를 연기했던 헌재는 이번 결정으로 여러 논란을 하나씩 정리할 수 있게 됐다. 헌재는 결정문에서 “대통령이 임명권이 있다는 이유로 정당한 사유 없이 국회가 선출한 사람을 임명하지 않는 것은 헌법이 국민의 대표기관에 부여한 헌법재판소 구성권을 형해화하는 것으로서 허용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대통령의 권한대행도 마찬가지”라고 판시했다. 최 대행의 임명을 촉구한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향후 상황은 예측하기 쉽지 않다. 최 대행은 “헌재의 결정을 존중한다”는 입장만 간접적으로 밝혀 즉각 임명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최 대행이 마 후보자를 임명하지 않으면 헌재의 8인 체제는 계속된다. 국회는 임명을 헌재가 직접 최 대행에게 명령해 달라는 청구도 했지만, 헌재는 “권한쟁의심판 대상이 될 수 없다”고 각하했다. 마 후보자 임명 여부에 국민적 관심이 높은 건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의 선고 시기와 결정 내용에 직간접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국민의힘은 헌재 결정에 대해 “의회 독재를 용인했다”고 비판했고, 더불어민주당은 “최 대행은 마 후보자를 즉시 임명하라”고 환영했다. 윤 대통령 측은 “탄핵 정족수를 확보하려는 꼼수”라고 주장했다. 재판관 9인 체제를 갖추는 게 먼저인지, 8인 체제이더라도 선고를 서두르는 게 바람직한지 등에 대한 정치권 안팎의 견해가 첨예하게 갈린다. 재판관의 성향과 정치적 유불리에 대한 판단이 다른 것이다. 9인 체제가 헌재의 정당성을 높인다는 주장이 있고, 최종변론까지 진행됐는데 9인 체제를 고집할 이유가 없다는 반론도 있다. 윤 대통령 사건의 선고 전에 임명될 경우, 헌재는 결정에 참여할 것인지부터 판단해야 한다. 이미 진행된 변론 절차에 참여하지 않은 재판관이 심판에 참여하고자 한다면 변론 갱신 절차 등이 필요해 선고가 당초 예정보다 늦어질 수 있다. 국가적 혼란 와중에 일정에 변화를 주면서까지 무리수를 두는 건 새로운 분란의 소지가 될 수 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최종 결정을 하는 헌재의 판단이다. 헌재의 결정에 승복하는 자세가 필요하고, 헌재 역시 그런 조건을 갖춰야 한다. 최 대행은 헌재의 결정에 따라 마 후보자 임명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헌재는 현재까지 진행된 절차를 신중히 마무리하는 수순을 밟아야 한다. 이젠 정당성과 명분을 확보해 모두가 승복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2025-02-27

[사설] ‘가족회사’ 말까지 나온 선관위의 황당한 친인척 특혜 채용

━ 간부들 가족 채용 청탁, 인사담당자는 점수 조작 ━ 헌재는 “선관위 감사는 위헌”…감시 방안 시급해져 감사원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시·도 선관위의 지난 10년간 경력직 채용 과정을 점검한 결과 충격적인 실태가 드러났다. 선관위 고위직부터 중간 간부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가족을 채용해 달라고 인사담당자 등에게 청탁하는 행위가 빈번했다. 중앙선관위 김세환 전 사무총장이 인천시 강화군선관위에 아들이 8급 공무원으로 채용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고, 차관급인 중앙선관위 송봉섭 전 사무차장은 딸을 충북 단양군선관위 경력직 공무원으로 추천해 달라고 부탁한 것 등이 대표적이다. 채용 규정이나 절차를 위반한 것만 878건에 달한다. 선관위 담당자들은 위법·편법을 동원해 청탁을 들어준 것으로 드러났다. 구체적인 채용 공고도 없이 선관위 직원의 자녀를 내정하거나, 잘 아는 직원으로 시험위원을 꾸리기도 했다. 면접 점수를 조작·변조하는 방법도 동원됐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은 일반 응시자들의 불합격 피해로 돌아왔다. 선관위 측은 특혜 채용을 알면서 방조한 정황까지 있었다. 중앙선관위의 한 인사담당자는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를 앞두고 대규모 경력채용을 준비하면서 사무총장 등의 자녀가 채용된 것을 알면서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지방 선관위 과장의 자녀가 특혜채용됐다는 투서가 접수됐어도 철저한 확인 없이 자체 감사를 종결하기도 했다. 얼마나 비리가 일상적이었으면 감사 과정에서 채용 관련자들이 “과거 선관위가 경력직 채용을 할 때 믿을 만한 사람을 뽑기 위해 친인척을 채용하는 전통이 있었다”거나 “(선관위는) 가족회사”라는 말까지 했겠나. 감사원 감사가 진행되자 채용 비리 관계자들은 증거 인멸은 물론이고 사실 은폐 시도까지 했다고 한다. 국회가 소속 직원들의 친인척 현황 자료를 요구하자 중앙선관위 측은 해당 정보를 관리하지 않고 있다고 했지만, 감사원 감사 결과 허위 답변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선관위는 1963년 설립 이후 감사원의 직무감찰을 한 번도 받지 않다가 2023년 ‘아빠 찬스’ 비리가 불거져 비난이 일자 채용 부문에 한해서만 감사를 받았었다. 사정이 이런데도 헌법재판소는 감사원의 중앙선관위에 대한 직무감찰이 권한 침해라는 결정을 내놨다. 행정부 내 통제장치인 감사원의 직무감찰 대상에 독립된 헌법기관인 국회·법원·헌재·선관위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이유다. 대통령 소속 감사원이 선관위에 대해 직무감찰을 하면 선거 관리의 공정성과 중립성 신뢰가 훼손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감사원의 대대적인 감사가 없었다면 고질적인 선관위 내부 채용 비리의 전모가 밝혀질 수 있었을까. 독립 헌법기관들에 대한 감시감독을 어떻게 할 것인지가 시급한 숙제로 떠올랐다.

2025-02-27

[중앙시평] 초연결시대의 트럼프 리더십, 지속가능한가

트럼프 스톰이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국가 생존전략을 찾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지만, 트럼프 리더십이 얼마나 성공할지에 생각이 미친다. 남의 나라 리더십 걱정할 때가 아니지만, 그 충격을 직격으로 받는 세상인지라 남의 일도 아니다. 트럼프의 재입성과 함께 백악관 오벌 오피스의 장식도 화제였다. 백악관 컬렉션(초상화·예술품·도자기·조각·가구) 가운데 무엇을 어디에 놓는가에서 새 주인의 통치 철학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이든 대통령 때 벽난로 위에 걸었던 32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임기 1933~1945년)의 초상화는 트럼프 1기 때처럼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1789~1797)으로 교체됐다. 2월 6일, 신자유주의 기수였던 40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1981~1989)의 생일에는 레이건 초상화로 바뀌었다. 16대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1861~1865)의 초상화와 흉상은 ‘결단의 책상’(현재는 도색을 위해 ‘C&O’ 책상으로 임시 교체) 주변에 놓였다. 트럼프가 추종하는 19세기 영웅들 잭슨, 포퓰리즘과 인디언 학살 그늘 매킨리, 보호무역과 팽창주의 논란 공공성·도덕성의 리더십 절실해져 바이든이 내보냈던 7대 앤드루 잭슨 대통령(1829~1837)의 초상화는 4년 만에 돌아왔다. 1기 취임사부터 ‘나의 영웅’이라 했던 잭슨은 반기득권 정치의 포퓰리스트이자 재산권 기반 투표제를 폐지한 ‘보통 사람’의 대통령이었다. 대통령 중심제를 강화하고 보호무역 정책을 편 그는 1830년 인디언강제이주법으로 원주민 수만 명을 ‘눈물의 길’로 내몰았고 수천 명을 길에서 죽게 하였다. 은행권과 미디어와는 ‘부패한 기득권의 도구’라며 대치했다. 관료사회는 부패집단으로 몰아 ‘관직은 선거에서 이긴 정당의 전리품(spoils)’이라며 ‘스포일스 시스템’(獵官制)을 도입했다. 실제로는 충성도 위주의 측근 임명 등 정실인사로 당파주의·정치보복·부패를 불러왔다. 그는 암살 저격을 받은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었다. 트럼프는 2기 취임사에서 25대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1897~1901)를 예찬했다. 알래스카의 디날리(Denali, ‘높은 곳’)산을 ‘위대한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의 이름’으로 복원할 것이고, 파나마 운하 건설을 준비한 매킨리를 ‘관세와 재능으로 미국을 부유하게 만든 타고난 사업가’라고 했다. 공화당의 매킨리는 미국이 2차 산업혁명(1870~1930년)의 전기시대를 열던 때, 1896년 대선에서 산업계 거물 J. P. 모건(금융), 록펠러(석유), 카네기(철강) 등의 사상 최대 선거자금과 언론광고, 조직적 캠페인으로 민주당의 친노동계 후보를 이긴다. 이것이 기업과 정치가 결합한 미국의 현대적 대선운동의 시작이었다. 매킨리는 관세장벽의 보호무역과 기업친화적 정책을 폈고, 1898년 스페인-미국 전쟁 승리로 필리핀·괌·푸에르토리코 등을 병합했다. 1900년 재선에 성공하나 이듬해 암살당하고, 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대통령이 된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리더십 평가는 시사적이다. 2000년 월스트리트 저널(WSJ)이 교수 13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는 1위 워싱턴, 2위 링컨, 3위 프랭클린 루스벨트였다. 2021년 C-SPAN이 역사가 등 142명에게 물은 결과는 1위 링컨, 2위 워싱턴, 3위 프랭클린 루스벨트였다. ‘2024 위대한 대통령 프로젝트’로 미국정치학회(APSA) 회원 525명에게 물은 결과는 1위 링컨, 2위 프랭클린 루스벨트, 3위 워싱턴이고, 가장 분열적인 최하위 대통령이 트럼프와 잭슨이었다. 대통령의 공과(功過)에 대한 평가는 세월 따라 평가기관과 정치적 견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18세기부터의 3인이 부동의 최상위라는 사실은 시대 변화에도 불구하고 공공 리더십의 덕목이 불변임을 말해준다. 워싱턴은 ‘대통령다운 대통령’, 링컨은 ‘극단적 분열로부터 통합’,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의 위기관리’로 경제·외교·사회통합에서의 비전과 도덕적 권위로 불멸의 존재가 됐을 것이다. 트럼프의 관세폭탄과 신팽창주의가 국제질서를 위협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정부효율부(DOGE)의 과격조치 등으로 헌법의 위기라는 소리가 들린다. 2024 대선에서 사상 최대로 후원(최소 2억5900만 달러)한 머스크는 DOGE 수장이 되어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을 앞세워 연방정부 지출 30%(2조 달러) 절감에 나섰다. 공익과 사익의 상충이라는 비판이 일자 대통령 선임고문으로 직함이 바뀌었다. 거대 기술기업이 중세 유럽의 봉건영주처럼 군림하는 테크노봉건주의(Technofeudalism)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트럼프의 19세기식 영토 확장과 미국 우선주의를 경제·군사·외교 패권으로 확대하려는 시도는 시대착오적이다. 오늘날의 세계는 과학기술혁명과 디지털 경제로 초연결된 거대 공동체로 진화했다. 국가 간 상호의존성이 너무 크고 빈부격차와 갈등도 심하다. 강국의 패권주의는 글로벌 무역전쟁, 지정학적 갈등, 정치적 리스크를 심화해 모두가 글로벌 위기의 피해자가 될 것이다. 공공성과 도덕성이 결여된 리더십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무엇이든 협상 가능하다는 트럼프 대통령, 그의 협상의 미학을 기대한다. 김명자 KAIST 이사장·전 환경부 장관

2025-02-27

[강주안의 시시각각] 극한 직업 헌법재판관

많은 법관의 로망은 대법관 또는 헌법재판관이다. 수재들이 모인 법원에서도 선두 그룹에 들어야 꿈꾸는 자리다. 대법원장이 헌법재판관 3명을 지명하기 때문인지 대법원이 높아 보인다. 그러나 세상의 관심은 헌법재판소에 더 쏠린다. 대통령 탄핵부터 기후 위기 대응 소송까지 중대한 결정이 헌재에서 나왔다. 대법관은 사건에 파묻혀 산다. 2023년 대법원에 접수된 본안 사건만 3만7669건이다. “대법원은 수도원이나 절간에 비유된다”고 할 정도다(김영란 『판결을 다시 생각한다』). 이에 비해 지난해 2522건이 접수된 헌재는 9명의 재판관이 선택과 집중을 하기에 유리한 구조다. 상대적으로 행복해 보이던 헌법재판관이 요즘 가장 위태로운 직업이 됐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의 영향이다. 재판관들에게 경호 경찰이 배정됐다. 재판관 집까지 찾아가 “공격하자”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 잇따른 협박에 경찰관 경호 받아 표적 된 재판관 야당 기대 따랐나 전직 보수 재판관 “좌우 문제 아냐” 탄핵 반대 진영에선 재판관 성향을 문제삼는다. 8명 가운데 문재인 전 대통령이 지명한 2명과 김명수 전 대법원장이 지명한 2명, 그리고 더불어민주당이 지명한 1명이 주 타깃이다. 탄핵 반대 집회에서 한국사 일타 강사 전한길씨가 ‘을사5적’이라고 낙인찍은 재판관들은 지명자 코드에 맞춰 왔을까. 헌재 결정문에 기록된 그들의 의견을 들여다봤다. 문 전 대통령이 지명한 이미선 재판관은 2023년 7월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 탄핵 사건에서 기각 의견을 냈다. 이 재판관은 “사후 대응과 일부 발언이 국가공무원법을 위반한 것”으로 판단하고도 “국민이 신임을 박탈해야 할 정도로 보기는 어렵다”고 했다. 윤 대통령의 충암고 후배 손을 들어준 셈이다. 비난의 중심에 선 문형배 헌재소장 권한대행은 어떨까. 지난해 8월 선고된 이정섭 검사 탄핵 사건에서 문 대행은 기각을 택했다. 이 검사가 누구인가. 이재명 민주당 대표 수사 검사다. 국민의힘에서 이 대표의 절친이라고 몰아세우는 문 대행이 이 검사 파면을 반대했다. 그는 이 검사가 “국가공무원법을 위반했다”면서도 “파면할 정도엔 이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쯤 되면 화는 민주당이 내야 하지 않나. 재판관 의견을 예단하기 어려운 건 윤 대통령 지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정형식 재판관은 5대4로 나뉜 지난해 8월 기후 위기 대응 사건 선고에서 정부의 온실가스 감축 목표에 대해 문형배·이미선 재판관과 함께 위헌 의견을 냈다. 기업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사안에서 문 전 대통령 지명 재판관들과 같은 편에 섰다. 헌재와 재판관을 둘러싼 의문에 대해 안창호 국가인권위원장이 명쾌한 답을 내놓은 적이 있다. 최근 윤 대통령의 탄핵심판 방어권 보장안 의결로 주목 받은 안 위원장은 박 전 대통령 탄핵 당시 헌법재판관이었다. 국민의힘 전신인 새누리당 지명으로 재판관이 된 안 위원장은 2018년 9월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헌재의 대통령 탄핵심판 과속 논란에 관해 설명했다. 당시 문답은 이랬다. Q :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사건 비화는. A : “당시 박한철 헌재 소장이 집중심리제로 결정을 빨리 내리려고 했던 건 국민이 뽑은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되고 국무총리가 대행하는 헌법적 위기상황을 신속히 해소해야 한다는 데 재판관들의 의견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재판관들 전원이 무엇이 국민과 국가를 위한 것인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다.” 그래도 재판관을 못 믿는 사람에게 안 위원장 답변을 하나 더 소개한다. Q : 진보 성향으로 분류되는 김이수 (전)재판관과 같은 의견을 낸 적도 있던데. A : “헌법 재판은 좌우 또는 진보·보수의 문제가 아니다. 삶의 문제다. 국민과 국가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이냐가 최우선 고려 대상이고, 그에 입각해 사안별로 소신에 따라 결정을 내리는 게 헌법재판관의 일이다.” 진정으로 “2시간짜리 대국민 호소용 계엄”이라는 윤 대통령의 말을 신뢰한다면 재판관 협박은 그만두고 안 위원장의 말을 한번 믿어 보면 어떨까. 강주안([email protected])

2025-02-27

[이익주의 고려, 또 다른 500년] 상대국 힘이 섬기는 기준, 힘 빠지면 사대 접었다

냉정하게 판세 읽은 실리 외교 아무도 살아있는 기린을 보지 못했다. 몸은 사슴처럼 생겼으되 온몸에 비늘이 있고, 머리에는 뿔이 났으며 소와 같은 꼬리가 달린 동물이다. 실재하지 않는 상상의 동물이니 산 기린을 본 사람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용과 다르게 기린은 그 존재가 완전히 사라졌다. 아프리카산의,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기린이 그 자리를 대신했기 때문이다. 존재를 지우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름을 부르지 않아 잊게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다른 의미로 덮어씌우는 것이다. 두 번째가 더 완벽한 소멸법이다. ‘사대’도 의미가 달라지면서 본래 뜻을 잃은 말이다. 송·거란·금 얽힐 때 현실주의 노선 사대는 했지만 사대주의는 아냐 송 밀려나자 외교 담판 거란 섬겨 고립 우려한 송 고려 관계 못 끊어 금 들어서자 거란과 관계 단절 광해군 “고려처럼 하면 나라 보전” 맹자의 사대론, 대국 의무도 강조 사대(事大)란 큰 나라(大國)를 섬긴다(事)는 뜻이다. 지금은 강대국에 대한 굴종이며 주체성을 잃은 태도라고 비난받지만 본래 뜻은 그렇지 않았다. 사대의 의미를 가장 잘 설명한 사람은 맹자였다. 그는 이웃 나라와 사귀는 도를 묻는 질문에 “인자(仁者)는 큰 나라로써 작은 나라를 섬길 줄 알고, 지자(智者)는 작은 나라로써 큰 나라를 섬길 줄 안다”고 대답했다. 전국시대 전쟁이 그치지 않는 상황에서 큰 나라와 작은 나라들이 공존할 수 있는 지혜를 가르쳐준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사대가 작은 나라의 일방적 의무가 아니란 사실이다. 작은 나라의 사대와 동시에 큰 나라의 사소(事小)를 언급한 데서 보듯 맹자는 대국과 소국의 쌍무적 관계임을 분명히 했다. 맹자의 사대론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길게 영향을 끼쳤다. 조선은 물론이고 고려도 중국 왕조에 대한 사대를 외교의 기본으로 삼았다. 맹자를 그저 붙좇아서가 아니라 중국에 강대국이 들어서 있는 상황에서 현실적인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려의 사대는 조선과 달랐다. 우선 사대할 나라를 선택하는 것부터가 달랐다. 고려 전기에는 중국에 두 개의 나라가 들어서 있었다. 10~11세기에는 남쪽의 송과 북쪽의 거란, 12세기에는 남쪽의 남송과 북쪽의 금이 대립했다. 송과 남송은 한족(漢族)이 세운 나라이고, 거란과 금은 오랑캐 나라였다. 송·남송에는 받아들일 만한 선진문화가 있지만, 북쪽에는 없었다. 하지만 군사력은 거란과 금이 더 강했다.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고려는 송이 건국된 뒤 줄곧 송에 사대했다. 아마 송으로부터 문화를 수용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태조 때부터 국가의 기틀을 새로 만들면서 당·송을 거치며 정비된 중국 제도를 받아들였다. 그 결과 3성 6부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제도가 자리 잡았고, 태묘·사직·문묘 등은 송에서 들여온 그림을 보고 건축했을 정도다. 고려 사람들이 즐기던 차와 비단·도자기도 송에서 수입했고, 송의 독보적인 도자기 기술을 들여와 고려청자로 발전시켰다. 송이 고려를 군사적으로 위협할 가능성이 없다는 점도 중요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려의 기울어진 친송 정책은 당연히 거란의 경계를 불러일으켰고, 결국 침략을 초래했다. 담판을 통해 거란군을 돌아가게 한 서희 외교의 핵심은 사대의 대상을 송에서 거란으로 바꾼 데 있었다. 그게 쉬운 일이었을까? 조선과 비교해보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병자호란 때 조선은 청의 사대 요구를 거부했고, 그 결과는 남한산성의 고난과 삼전도의 굴욕이었다. 오랑캐에게 사대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으니, 서희라도 조선에서는 환영받지 못했을 것이다. 고려는 사대의 대상을 혈통이나 정당성이 아니라 힘의 강약을 기준으로 선택했고, 그랬기 때문에 오랑캐라고 여기던 거란에 사대할 수 있었다. 고려사람들에게 사대는 대국을 섬긴다는 뜻을 표함으로써 침략을 막기 위한 외교정책이었다. 1019년 귀주대첩으로 거란에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고려는 곧바로 거란에 사대해서 더 이상의 전쟁을 피하는 길을 택했다. 거란에 사대하며 송에서는 실리 거란의 힘에 밀려 송에 대한 사대를 중단했지만, 고려 사람들은 여전히 송의 문화를 동경했다. 고려와 송의 상인들이 수도 없이 왕래했고, 고려로 오는 그들 손에는 각종 서적과 차·비단·도자기·약재가 들려 있었다. 의천은 송에 가서 불교 성지를 찾아다니며 고승들과 교학을 토론했고, 권적처럼 송에 유학해서 그 나라 과거에 급제하는 사람도 있었다. 1080년 송에 사신으로 간 김근은 그곳 문인들과 어울리고 돌아와 두 아들의 이름을 소식(蘇軾)·소철(蘇轍) 형제의 이름자를 따서 김부식(金富軾)·김부철(金富轍)이라고 지었다. 그러나 이것은 김근의 짝사랑일 뿐 정작 소식은 고려를 싫어했다. 그는 ‘고려에서 책을 사가는 일의 이해득실을 논한 상소문’을 올렸다. 고려 사신을 접대하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며, 고려 사람들이 거란과 내통하고 송의 허실을 살피고 있으니 왕래를 금지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고려가 거란에 사대하면서 송으로부터도 실리를 얻고 있었으므로 소식의 관찰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송은 소식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거란에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 고려와 관계마저 단절한다면 고립이 더욱 심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거란에 대한 사대를 축으로 하는 실리 외교가 고려의 전략 가치를 높인 결과였다. 송에서 고려의 가치는 시간이 갈수록 더 높아졌다. 신법당이 부국강병을 추진하면서 고려와 연합해서 거란을 공격하자는 이른바 ‘연려제료(聯麗制遼)’ 정책을 내놓는가 하면, 거란 사신에게만 적용되던 국신사(國信使)라는 명칭을 고려에 허용하고 고려 사신의 위치를 거란과 하국(夏國) 사이로 올려주겠다는 제의도 했다. 고려의 사대를 유도하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이었지만, 고려는 끝내 거절했다. 고려 사람들은 송을 좋아했다. 그러나 사대는 거란에 하는 냉정함을 지켰다. 거란에 대한 사대를 고집했던 고려가 12세기 들어 금이 건국되고 전쟁이 일어나자 돌연 거란연호 사용을 중단했다. 전쟁 상황을 지켜보며 사대의 대상을 바꿀 수도 있다는 신호였다. 거란이 쇠퇴하자 송이 고려를 찾았다. 1123년 사신을 보내와 송에 사대할 것을 권했지만, 고려의 답변은 한결같았다. 『고려도경』을 쓴 서긍이 바로 이 사신단의 일원이었다. 그의 임무는 고려의 군사력을 정탐하는 것이었지만 숙소 밖에 나가는 것조차 제약을 받았다. 고려는 송의 실력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1125년 거란이 금에 망하자 송이 또 사신을 보내와 이번에는 금을 협공하자고 제안했다. 고려의 답은 “귀국이 먼저 적을 제압하기를 기다렸다가 나중에 힘을 보태겠다”는 것이었다. 거란·금·송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히는 혼란 속에서 고려는 냉정하게 판세를 읽고 중립을 지켰다. 17세기 여진족이 다시 일어나 후금을 세우고 명과 싸우고 있을 때 광해군은 이런 말을 했다. “중원의 형세가 참으로 위태롭다. 이럴 때 안으로 자강(自强)하면서 밖으로 기미(羈縻, 견제)하는 계책을 써서 고려가 했던 것처럼만 하면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보면 일에 힘쓰지 않고 밖으로 큰소리치는 것만 일삼고 있다. 끝내는 큰소리 때문에 나랏일을 망칠 것이다.” 이것이 예언이 되었을까. 이 뒤로 15년 동안 명과 청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한 조선은 병자호란을 당해 나랏일을 망치고 말았다. 명·청 교체기 조선 경직된 사대 고집 사대할 나라를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고려의 행운이었다. 조선은 전기는 명, 후기는 청에 사대하는 것 말고 대안이 없었다. 하지만 외부 환경만 탓할 일은 아니다. 아주 짧은 기간이지만 선택의 기회가 있었다. 바로 명·청 교체기다. 그때 조선은 경직된 친명 사대를 고집했다. 조선 건국 후 200년 넘게 명에 사대하면서 현실적인 외교정책으로서 사대의 의미를 망각한 때문일 것이다. 정책으로서의 사대가 현실과 괴리되어 이념화된 상태를 사대주의라고 하는데, 조선의 명에 대한 태도가 그랬다. 그리고 그것이 조선의 외교를 망쳤다. 지금은 옛날과 다르다. 근대 이전에는 국가 간 대소·강약의 차이가 상하 관계로 이어지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국가 주권의 개념이 생긴 뒤로는 모든 주권국가가 평등하다는 것이 상식이 되었다. 이 체제에서는 대소·강약의 차이가 상하 관계로 연결되는 것을 결단코 거부해야 한다. 그와 동시에 고려가 한 것처럼 국력 차이를 현실로 인정하면서 국익을 추구하는 냉정함을 지켜야 한다. 외교는 감정으로 할 일이 아니다.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

2025-02-27

[김상배의 퍼스펙티브] AI는 미래 국가책략의 요체, 컨트롤타워 시급하다

‘AI 전환의 시대’ 맞은 국제정치 2022년 미국발 ‘챗 GPT 쇼크’에 이어 올해 초 중국발 ‘딥시크 쇼크’에 이르기까지 최근 인공지능(AI) 기술이 몰고 온 충격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다. 사실 우리 역사에서 기술의 충격이라고 하면 ‘대포와 군함’으로 대변되는 구한말 서양 근대기술의 충격이 훨씬 더 컸을 것이다. 당시 우리 선조들은 동도서기(東道西器)의 시각에서 이러한 충격에 맞섰다. 일례로 흥선대원군은 쇄국 정책을 고수하면서도 이이제이(以夷制夷) 발상을 바탕으로 서양 무기기술을 받아들이려 했다. 1866년 침몰한 제너럴 셔먼호를 인양해 이를 모방한 철갑증기선을 건조했고, 프랑스 대포를 모방 제작하기도 했으며, 러시아의 남진을 견제하려고 무기가 우수한 프랑스와 동맹을 맺으려 시도한 적도 있었다. 이외에도 중국의 서양 기술서인 『해국도지(海國圖志)』를 참조해 서양식 무기를 제작하려는 다양한 시도를 펼쳤다. 기술 발달이 촉발한 국제정치 전환, ‘디지털 국가책략’ 급부상 AI 기반 국제정치는 협력보다 경쟁, 냉전 이후 국제질서 재편 강대국보다 AI 투자 여건 불리, 제한된 자원 효율적 활용 필수 미·중 AI 패권경쟁 사이에서 한국의 위상과 역할도 정립해야 국가책략의 결여는 참담한 결과 이러한 노력이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서양 근대 기술 문명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당장 필요해 보이는 무기기술만 도입하려는 한계가 있었다. 사실 ‘대포와 군함’은 서양 근대 과학기술의 종합적인 산물로 단숨에 베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이면에는 무기기술 개발과 군사적 활용을 지원한 근대 국민국가 시스템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서양 제국들은 부국강병 게임을 벌이며 세계로 팽창해 나갔고 그 위세는 한반도까지 미쳤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스스로 힘을 기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외세의 침략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결과는 참담했다. 그야말로 시대의 전환을 헤쳐 나갈 근대적인 ‘국가책략(statecraft)’의 결여가 낳은 결과였다. 국가책략은 국가(state)를 운영하는 술(術)과 책(策), 즉 술책(craft)이다. 대내적으로 나라 살림을 꾸려나가는 능력이 핵심이라는 점에서 통치술(統治術)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에서 국가적 과제를 풀어나가는, 미시적 ‘책(策)’과 거시적 ‘략(略)’이라는 의미로 ‘책략’으로 번역했다. 국가책략의 기본은 국가 지도자가 역사와 전통을 기반으로 당대의 시대적 과제를 인식하고 비전을 제시하는 능력에 있다. 자고로 국가책략은 전환의 시대적 코드를 읽어내는 ‘독시(讀時)’의 역량을 바탕으로 했다. 또한 국가책략은 미시적·거시적 정책을 구현함으로써 국가를 유지하거나 변화시키는 ‘자강(自强)’의 역량을 의미한다. 전환의 시대적 코드 읽어내야 이런 점에서 국가책략은 단순한 통치술을 넘어 국가의 흥망성쇠를 책임지는 능력으로 통한다. 아울러 국가책략은 외세의 도전에 대응해 자국의 생존과 번영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주변국들과의 관계를 조율하는 ‘균세(均勢)’의 역량이자 책략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국가책략 개념의 3대 축은 독시와 자강·균세다. 난세를 헤쳐가는 국가책략에 대한 논의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양하게 있었지만, 현대적 논의의 원조는 국가운영과 권력행사에 대한 실용적이고 전략적인 접근을 제시한 근대 정치사상가 마키아벨리다. 서양 근대 국민국가들이 추구한 국가책략의 요체는 부국강병을 위한 자강의 역량을 닦아 생존과 번영을 보장하는 균세를 달성하는 것으로 이해됐다. 동아시아에서도 19세기 후반 일본의 근대화 전략은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적 코드를 읽고 국정운영의 힘을 결집해 외세의 위협에 대응했던 국가책략의 사례다. 20세기 후반 한국의 산업화와 그 이후 민주화도 시대전환의 코드를 읽고 국정 능력을 발휘한 국가책략의 성공 사례로 볼 수 있다. AI 영향력 커지며 패러다임 변화 최근 지정학적 맥락에서 경제와 안보가 연계되면서 ‘경제적 국가책략(economic statecraft)’에 대한 관심이 늘어났다. 더 나아가 오늘날 국가책략에서 디지털 기술이 차지하는 위상이 높아지면서 ‘디지털 국가책략’이 새로운 논제로 부상했다. 최근 각광 받는 AI는 디지털 국가책략의 핵심 대상이자 수단이고 목표다. AI는 어느 한 분야에 국한된 기술이 아니라 거의 모든 분야에서 쓰이는 ‘범용기술’이며 인간의 육체적 능력뿐만 아니라 지적 능력을 높여주는 ‘증강기술’인 데다가 경제와 산업 및 기타 사회 시스템 전반의 성장을 이끌어 가는 ‘선도기술’이다. 이러한 AI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AI 전환(AX)’이라는 개념까지 등장했다. 그야말로 AI 기술의 발달은 우리 삶 전반의 패러다임 변화를 촉발하고 있다. 국제정치 분야에도 AI 전환은 큰 영향을 미쳐서 ‘AI 기반의 국제정치 전환’이 요즘 학계의 큰 화두다. 이러한 과정에서 AI는 미래 국가책략의 요체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중견국인 한국으로서도 독시와 자강·균세의 차원에서 AI 국가책략을 고민할 과제를 안고 있다. 첫째, AI 국가책략의 과제는 AI 기반 국제정치 전환의 양상을 읽어내는 ‘독시’에서 출발한다. 현재 AI 전환이 국제정치에 투사하는 코드는 협력보다는 경쟁이다. 지구화 시대의 상호의존과 호혜협력을 넘어 지정학 시대의 각자도생과 무한경쟁이 득세하고 있다. 또한 AI 전환은 강대국 질서의 재편도 예견케 한다. 오늘날 AI 기술의 군사적 활용은 핵무기를 기반으로 짜였던 냉전기 국제질서가 새롭게 재편될 가능성을 예견케 한다. 더 나아가 AI의 발달로 인해 인간 이성에 기반을 둔 근대 기술 문명이 인류의 통제를 넘어서는 경계 밖으로 나갈지도 모른다는 우려마저 제기되고 있다. 강대국들이 주도하는 AI 기반 국제정치 전환의 양상을 제대로 읽어내는 것은 중견국 AI 국가책략의 큰 과제가 아닐 수 없다. ‘AI 연대 외교’도 소홀히 말아야 둘째, AI 역량을 갖추는 ‘자강’도 AI 국가책략의 큰 과제다. AI 분야의 인재 양성이나 기술 개발, 인프라 조성을 위한 민간·정부 차원의 투자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자강 책략의 중요한 요소다. 그런데 AI 자강의 게임이 ‘양질전화(量質轉化)’의 메커니즘을 바탕으로 한 ‘규모(scale)의 게임’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규모의 게임에서 우리는 태생적으로 미국·중국과 같은 큰 나라들을 당해 낼 재간이 없다. 우리가 가진 제한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국가책략의 필요성이 자주 거론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단순히 기술과 인재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 투자의 규모만 늘리는 것이 아니라 AI 분야에서 중견국으로서 우리가 쌓아온 경험과 성과를 반영해 이른바 ‘구조적 공백(structural holes)’을 공략하는 새로운 개념의 AI 국가책략이 필요하다. 끝으로 ‘균세’가 AI 국가책략의 필수적인 과제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AI 균세’의 제일 큰 과제는 미·중 AI 패권경쟁 사이에서 우리의 위상과 역할을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미국의 지배적 플랫폼에 편승하더라도 그 위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 그 과정에서 중국이 내세우는 대안적 플랫폼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지가 고민거리다. 실제로 ‘폐쇄형’과 ‘개방형’을 내세워 진행되는 최근의 미·중 AI 혁신생태계 경쟁은 앞으로 우리에게 어려운 선택의 상황을 펼쳐놓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한편 강대국 중심의 ‘단순 균세’를 넘어 국제사회의 여타 구성원들을 염두에 둔 ‘복합 균세’의 마인드도 필요하다. 글로벌 차원에서 ‘동지국가(同志國家, like-minded countries)’들과의 ‘AI 연대외교’도 추진해야 하며 중견국 시각에서 본 AI 안보담론과 윤리규범을 제시하는 ‘AI 규범 외교’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국가적 차원에서 정책 조율 시급 요컨대 AI 전환의 시대를 헤쳐 나갈 AI 국가책략의 마련이 시급하다. 무엇보다도 현재 다소 분산적으로 추진되는 AI 정책들을 국가적 차원에서 조율하는 ‘메타 거버넌스’ 체계의 구축이 시급하다. 이를 위해 AI 국가책략을 총괄하는 국가 지도자의 부재 상황을 빨리 해소해야 한다. AI 전환의 시대적 코드를 정확히 읽어내고(즉 독시), 자강과 균세의 책략을 효과적으로 추진하려면 이를 총괄할 ‘컨트롤타워’가 바로 서야 한다. 세계 각국은 이미 앞만 보고 뛰기 시작했는데 우리만 이렇게 머뭇거리다가는 큰일 난다. 작금의 상황을 둘러보면 우리가 150여 년 전의 선조들보다 더 낫다고 장담할 수 있을지 묻게 된다. ‘제2의 개항기’를 맞았다는 자세로 AI 전환의 국제정치를 헤쳐 나갈 AI 국가책략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김상배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2025-02-27

‘모나리자’는 왜 유명해졌나 [문소영의 문화가 암시하는 사회]

지난달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앞에 섰다. 루브르 박물관의 대대적인 개보수 계획을 발표하기 위해서였다. 그 계획의 하나는 ‘모나리자’만을 위한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해서, 이 작품만 볼 관람객은 별도의 티켓으로 메인 박물관을 통하지 않고 바로 들어올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만큼 오직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루브르에 오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다. 프랑스 기업인 75조에 매각 주장 지난 2020년에는 한 프랑스 기업인이 프랑스 정부가 막대한 국가부채를 해결하기 위해 ‘모나리자’를 해외에 매각해야 한다는 도발적인 주장을 해서 화제를 모았다. 이때 그는 ‘모나리자’ 가격으로 무려 500억 유로(현재 환율 기준 75조원)를 제시했다. 대한민국 정부 예산의 11%를 넘는 액수다. 그는 ‘모나리자’의 엄청난 관광 수입 효과를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가격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매년 200만 명의 관광객이 오로지 이 그림을 보기 위해 파리를 방문하며, 각 관광객이 머무는 동안 평균 1500유로(225만원)를 쓰니 ‘모나리자’는 매년 30억 유로(4.5조원)를 벌어들인다는 것이다. 도난 사건 전까진 평범한 명작 범인 잡히며 달리 등 패러디 1963년 미 특별전 160만 관객 ‘유명함’의 편견은 경계해야 이 계산이 논리 비약적이라는 반박도 많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의 경제적 효과가 크다는 것에는 토를 다는 이가 없다. 20세기부터 미디어의 발달로 유명함과 경제적 수익의 관계는 점점 강력해지고 있다. 일찍이 1971년 경제학자 허버트 사이먼은 “미디어의 발달로 정보가 넘쳐날수록 어텐션(attention, 주목 혹은 관심)은 희귀한 자원이 된다”고 했다. 또 1997년 언론인 마이클 골드하버는 “새로운 경제의 통화는 돈이 아니라 어텐션이다”라고 했다. 희귀 자원인 주목을 많이 받을수록, 즉 유명할수록, 경제력을 갖게 된다는 얘기다. 21세기에는 이것이 유튜브 콘텐트 조회수에 비례한 수익으로 공식화되고 있지 않은가. 또한 건축가 겸 경제학자 게오르크 프랑크는 주목도나 유명함이 자본의 속성을 지녀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발생한다고 했다. 루브르에서 별도의 전시실을 갖게 될 ‘모나리자’야말로 이런 ‘유명함의 승자 독식 현상’을 잘 보여준다. 그러면 이제 근본적인 질문이 떠오른다. ‘모나리자’는 대체 왜 이렇게 유명한가? 사실 ‘모나리자’가 지금처럼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은 20세기부터다. 그 전에 시시한 그림으로 취급받았다는 얘기는 아니다. 레오나르도는 생전에 이미 잘 나가는 화가이자 공학자였고, 특히 그가 인물을 표현할 때 쓰는 스푸마토(sfumato) 기법은 사람들의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스푸마토는 ‘연기 같은’이라는 뜻으로, 색채와 명암의 경계를 흐릿하고 미묘하게 처리해서 입체감을 살리면서 부드럽고 신비한 느낌을 주는 기법이다. ‘모나리자’는 그런 스푸마토 기법을 특히 잘 활용해 인물의 신비로운 미소를 빚어내서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독보적으로 유명한 작품은 아니었다. 이탈리아 사람인 레오나르도는 1517년 초청을 받아 프랑스에 가게 되었다. 그때 그가 1506년까지 작업하다 미완성으로 두었던 ‘모나리자’를 들고 갔고 프랑스에서 완성한 후 1519년 세상을 떠났다. 프랑스 국왕은 ‘모나리자’를 물려받은 레오나르도의 제자에게서 그림을 구입했다. 이후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면서 ‘모나리자’를 비롯한 왕실 소장 예술품은 모두 국민 소유가 되었다. 이에 따라 왕궁에서 공공 박물관으로 변모한 루브르에서 1797년부터 전시되기 시작했다. 보다 많은 사람에게 공개되면서 ‘모나리자’의 명성은 더 높아졌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탁월한 초상화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모나리자’를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으로 만든 것은 20세기 초에 일어난 도난 사건이다. 1911년 8월의 어느 날, 루브르의 학예사들은 ‘모나리자’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시에는 작품을 벽에 고정하지 않았고 연구나 보존 처리를 위해서 학예사가 신고 없이 떼어 갔다가 돌려놓는 일도 많아서 없어지고도 하루가 지나서야 도난당한 줄 알았다고 한다. 당시 보안이 얼마나 형편없었는가 하면 루브르에서 자잘한 유물을 훔쳐가는 게 취미인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당시 청년이었던 현대미술 거장 파블로 피카소는 그런 사람이 루브르에서 훔친 원시 스페인 조각상 두 점을 샀다가 ‘모나리자’ 절도범으로 몰려 감옥에 갈 뻔하기도 했다. 2년 후인 1913년 12월에야 ‘모나리자’를 훔친 진범이 붙잡혔는데 그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루브르의 인부로 일하던 빈센초 페루자였다. 그는 ‘모나리자’를 2년 동안 자기 방에 숨기고 있다가 이탈리아의 대표 미술관인 우피치에 팔려고 했지만 미술관의 신고로 붙잡혔다. 우피치는 ‘모나리자’를 루브르로 돌려보냈다. 페루자는 재판 과정에서 “이탈리아인이 그린 그림이니 고국에 돌려놔야 한다고 생각해서 훔쳤다”고 주장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모나리자’는 합법적으로 프랑스의 소유가 된 것이었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민족 감정이 이성을 누르는 경우가 많다. 덕분에 페루자는 이탈리아에서는 애국 영웅 대접을 받으며 징역 7개월의 비교적 가벼운 형을 살았다. ‘모나리자’의 실종과 발견과 회수를 둘러싼 이 모든 일은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사건 자체도 극적이고 흥미진진한 데다가 20세기 초 문화예술의 중심지였던 프랑스에서 일어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당시 프랑스에 모여있던 전위예술가들이 ‘모나리자’를 작품의 소재로 삼기 시작했다. 변기를 작품으로 내놓아 악명을 떨친 마르셀 뒤샹이 1919년 ‘모나리자’ 프린트에 콧수염을 그리고 외설적인 어구를 넣은 작품을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 등 여러 작가가 ‘모나리자’ 패러디를 내놓았다. 유명함의 편견 벗고 감상해야 또한 프랑스의 뒤를 이어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등극한 미국에서 1963년 ‘모나리자’ 특별전이 열려 160만 명 구름 관중을 모으고 ‘팝아트의 제왕’ 앤디 워홀 등이 ‘모나리자’ 패러디를 제작하면서 ‘모나리자’는 더욱더 유명해졌다. 한마디로 ‘모나리자’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이 된 데에는 그림 자체의 뛰어난 작품성도 있지만 ‘운발’이 강력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흥미로운 도난 사건의 주인공이 된 것, 거기에 영감 받은 미술가들이 패러디를 생산해낸 것, 그런데 이 모든 일이 문화예술의 중심지에서 벌어진 것은 운의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프랑크가 말한 대로 ‘유명함’은 자본의 속성을 지닌다. 돈이 일단 축적되면 불리기가 쉬운 것처럼, 일단 유명해지면 더욱 유명해지기 쉽다. ‘모나리자’는 훌륭한 작품이지만, 사실 그만큼 훌륭한데 유명하지 않은 작품도 많다. 그러니 우리는 미술이든 문학이든 어떤 작품을 감상할 때 ‘유명함’의 편견에 너무 갇히지 않을 필요가 있다. 문소영([email protected])

2025-02-27

[시론] 트럼프 2기에 특히 유용한 ‘태권도 민간외교’

트럼프 2기 정부 출범과 함께 추진하는 ‘미국 우선주의’ 정책이 지구촌을 매섭게 몰아치는 중이다. 관세 폭탄,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 불법 이민자 추방 등의 조치를 놓고 이해 당사국들의 반발과 논쟁도 뜨겁다. 대한민국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국내 정치적 혼란 와중에 외교·안보 환경이 급변하면서 말 그대로 ‘내우외환’이 겹치는 양상이다. 트럼프 2기가 시작되면서 영원한 우방인 미국과의 한·미 동맹이 어느 때보다 강조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정부 차원의 공식 외교도 중요하지만, 이를 보완해줄 민간 외교의 필요성도 커진다. 5월 백악관 앞서 ‘태권도 한마당’ 상·하 의원 상대 태권도 수련 시작 동맹 신뢰 강화할 자산으로 활용 이런 관점에서 지난 70여 년 많은 우여곡절에도 변함없이 한·미 동맹의 신뢰를 굳건히 구축해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온 태권도의 가치를 새삼 주목하게 된다. 태권도는 한·미 동맹의 신뢰와 양국 국민의 우의를 확인하는 중요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태권도는 한·미 동맹의 결속을 강화하는 매개체로서 새로운 역할을 활발하게 모색하고 있다. 미국에는 약 2만5000개 태권도 도장에서 3000여만 명이 수련 중이다. 세계태권도본부인 국기원은 지난해 미국 지부 8곳을 선정하고, 현지 네트워크 확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1964년 대한민국은 태권도 사범을 해외에 처음 공식 파견했다. 광복 80주년이자 태권도 해외 진출 61주년이 되는 올해는 태권도가 미국 땅에서 “얍! 얍! 얍!” 힘찬 기합 소리를 내며 ‘제2의 황금기’를 알리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오는 5월 18일 백악관 앞에서 ‘태권도 한마음 대축제’가 펼쳐진다. 국기원 버지니아 지부 주관으로 약 2000명이 참가해 영원한 한·미 동맹을 다짐하는 태권도 퍼포먼스를 펼칠 예정이다. 7월 17일에는 캘리포니아주 애너하임 컨벤션센터에서 30주년을 맞은 최대 규모의 축제인 ‘세계 태권도 한마당’이 열린다. 50여 개국에서 5000여명이 참가하는 이 행사에서는 세계적 성악가 조수미 등 한류 스타들이 축하 공연도 한다. 이를 계기로 태권도는 공공 외교 역할을 톡톡히 수행할 것이다. 국기원은 그동안 로널드 레이건, 빌 클린턴, 버락 오바마 등 미국 대통령들에게 명예 9단증(블랙 벨트)을 수여, 한·미 우호를 증진해온 전통이 있다. 필자는 2021년 11월 플로리다주 팜비치 리조트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국기원 명예 9단증을 수여했다. 당시 그는 “태권도는 최고의 무도(Martial Arts)”라 극찬하면서 “재선에 성공하면 태권도 도복을 입고 의회에서 연설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막내아들 배런도 태권도 유단자다. 이런 인연으로 필자는 지난 1월 20일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했다. 미국 방문을 계기로 만난 상·하원 의원들에게 한국의 입장을 설명하고 우호적 협력을 당부했다. 외교위원장을 역임한 그레고리 믹스 하원의원(뉴욕)은 “태권도는 단순한 무도가 아닌 양국 신뢰 구축의 상징으로 작용해 왔다”고 평가했다. 11선의 팀 월버그 하원의원(미시간)은 “한국이 조속히 안정됐으면 좋겠다. 한·미 동맹은 굳건하고 적극적으로 지지한다”며 응원해줬다. 국기원은 몇몇 상·하원 의원들에게 명예 단증을 수여했고, 지난 5일부터 상·하원 의원 7명을 대상으로 미국 의회에 태권도 교실을 개설했다. 유력 정치인들이 태권도를 배움으로써 한국 문화를 폭넓게 이해하고, 한·미 동맹과 우호 관계를 다지는 계기가 될 것이다. 태권도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것을 전환점으로 지구촌 2억여 명이 수련하는 세계적인 스포츠이자 문화콘텐트로 자리매김했다. 유엔 회원국과 국제축구연맹(FIFA) 회원국은 각각 193개와 211개국이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산하 세계태권도연맹(WT)은 회원국이 무려 214개국이고, 국기원 품증·단증을 발급받는 나라는 204개국이다. 태권도는 2018년 필자가 국회의원 재직 시절 의원 225명이 공동 발의한 ‘태권도 진흥 관련법’ 개정으로 대한민국 국기(國技)로서 처음 법적 지위를 갖게 됐다. 태권도는 나라 안팎에서 민간 외교 채널이자 플랫폼으로 순기능을 할 잠재력이 매우 크다. 앞으로도 태권도가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는 동력으로 작동하도록 우리 모두 마음과 지혜를 모으길 바란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동섭 국기원장

2025-02-27

[김원배의 시선]주 4일제 정말 세계적 추세인가

월화수목일일일은 실현될 수 있을까.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 10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주 4.5일제를 거쳐 주 4일 근무 국가로 나아가야 한다”고 밝혔다. 지난주 양대 노총을 방문해서도 주 4일제 추진을 약속했다. 반도체 분야에 주 52시간 예외를 두는 것을 논의하자고 했다가, 우클릭 논란이 일자 다시 꺼낸 진보적 정책이다. 이 대표는 지난해 6월 정부가 근로시간 유연화를 추진할 때 “주 4일제는 피할 수 없는 세계적 추세다. 정부는 근로 유연성을 얘기할 게 아니라 사회적 논의를 통해 노동생산성을 어떻게 높일지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고 촉구한 적이 있다. 그런데 주 4일 근무가 ‘피할 수 없는 세계적 추세’인가. 자주 언급되는 해외 사례를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주 4일제와는 거리가 있다. 2022년 주 4일 선택권을 법제화한 벨기에의 경우 주 38시간 근무를 유지하면서 근로자가 사용자에게 주 4일 근무를 요청할 수 있고 기업이 이를 받아들이면 그렇게 한다. 대신 주 4일은 9.5시간씩 근무해야 한다. 영국은 주 4일 시행에 대한 실험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2022년 61개 기업이 참여한 실험에선 생산성이 올라가고 근로자와 기업의 만족도가 높아 대성공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현 집권 노동당이 추진하는 정책은 ‘압축 근무제(compressed hours)’다. 5일에 하던 일을 4일에 길게 몰아서 할 수 있도록 요구할 권리를 주는 것이다. 이 역시 기업이 수용해야 가능하다. 주 32시간제와는 거리가 있다. 그런데 의문이 든다. 실험은 대성공인데 영국은 왜 전면 도입을 하지 못할까. 지난해 9월 영국 BBC가 ‘주 4일제 근무로 더 행복해졌을까’라는 제목으로 낸 기사를 보면 주 4일 근무를 통해 아이와 있는 시간이 길어져 좋고, 하루 근무 시간이 늘어나면서 더 일에 집중할 수 있다는 긍정적 사례들이 소개됐다. 하지만 늘어난 근무 시간이 힘들고, 직원끼리 근무일을 조율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평가도 있었다. 예상대로 평일에 영업을 계속해야 하는 소규모 사업체에선 부정적 반응이 나왔다. 벨기에의 경우를 보면 주 4일 근무에 대한 선호는 높지만, 실제 이렇게 하는 근로자의 비율은 0.8%에 그친다는 뉴스위크 보도도 있다. 이재명 대표 “주 4.5일 거쳐 가자” 영국·벨기에, 주 4일 근무 요청권 근로 양극화 우려, 유연화가 해답 아이를 키우는 부부 등에게 주 4일이 매력적인 대안이 될 수 있지만, 모든 근로자와 기업에 적합한 것은 아니다. 지금 금요일을 토요일처럼 쉬는 나라가 대체 어디 있는가. 현실적인 흐름은 주 4일을 원하는 근로자가 할 수 있도록 하자는 쪽이다. 일부 국가의 몇몇 실험만 놓고서 주 4일, 주 32시간이 대세라고 말하는 것엔 동의할 수 없다. 주 32시간까지 갈 것도 없다. 주 36시간을 시행한다고 하면 당장 임금은 어떻게 할 것인가. 당연히 노조와 근로자는 임금 삭감 없는 근로 시간 단축을 얘기하겠지만, 기업이 비용 부담을 감당할 수 있느냐는 완전히 다른 문제다. 이를 할 수 있는 곳은 대기업과 금융회사, 공공기관뿐일 것이다.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는 더 큰 부담을 지게 될 것이 자명하다. 근무 환경의 부익부 빈익빈은 심화하고 말 것이다. 이미 한국에서도 여력이 되는 기업이나 단체는 알아서 주 4.5일제 등 다양한 실험을 한다. 우수 인력을 원하는 기업들은 근무 시간 측면에서 당근책을 제시할 수밖에 없다. 기업에 맡겨 두면 가장 적합한 방식을 찾는다. 정부가 이런 시도를 하는 기업을 지원하고 장려하는 정도면 모르되, 법으로 강제하려 한다면 정말 무모한 정책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문재인 정부 시절의 소득주도성장 그 이상의 엄청난 파장을 불러올 것이다. 이 대표는 지난 11일 페이스북에 반도체 분야 주 52시간 예외 적용 문제와 관련해 “노동시간 단축, 주 4일제 추진과 얼마든지 양립 가능하다”는 글을 올렸다. 이 자체는 맞는 말이다. 그 이후 주 52시간 예외는 슬그머니 후퇴했지만 말이다. 두 가지가 양립하려면 일률적인 근로시간 단축이 아니라 근로시간 유연화가 필요하다. 주 4일을 원하는 사람, 오전 근무를 원하는 사람, 더 일해서 더 많은 임금을 받겠다는 사람 등 다양한 이들의 요구를 효율적으로 조합해 기업의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경쟁력이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25일 기자회견에서 “내년 1.8% 저성장이 한국의 실력”이라고 말했다. 신산업을 키울 창조적 파괴와 구조개혁의 미진함을 지적한 말이다. 경직된 노동시장과 환경을 바꾸는 것도 구조개혁 과제다. 이런 것은 두고 설익은 이상에만 집착해선 한국의 실력이 나아지기는커녕 퇴보할까 걱정이다. 김원배([email protected])

2025-02-27

[김호정의 음악의 세계] 문화 낙하산의 지긋지긋한 단순함

지금 워싱턴 DC의 예술계에서 뜨거운 이슈는 ‘단순함 대 복잡함’의 구도로 읽을 수 있다. 이달 중순 트럼프 대통령이 케네디 센터를 장악했다는 소식이다. 포토맥 강변의 공연장인 케네디 센터는 1971년에 문을 연 이래 최대 논란을 겪고 있다. 우선 문화 낙하산은 단순하다. 친한 사람을 왠지 대단한 전문성은 없어도 괜찮을 것 같은 문화 분야에 꽂아 넣으면 된다. 이건 한국에서도 익숙하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낙하산은 놀라울 정도로 신선했다. 자기 자신을 이사장으로 임명했기 때문이다. 낙하산 중에서도 단순함의 극치를 보여준 낙하산이었다. 트럼프 이사장 취임 케네디 센터 “보트 시설 만들자” 파격 예고 공연 다양성 줄고 모금 힘들 듯 가디언 ‘소련 예술 통제’ 비교도 트럼프 대통령과 동시에 입성한 측근들의 사고도 단순하다. 릭 그레넬은 케네디 센터의 대표로 임명된 후 비전을 이렇게 밝혔다. “크리스마스에는 크리스마스 행사를 열자.” 그는 또 컨트리 가수 돌리 파튼의 공연도 케네디 센터에 적합할 거라며 이유를 밝혔다. “내가 보고 싶기 때문에.” 역시 지극한 단순함이다. 다른 한쪽에는 복잡함이 있다. 케네디 센터에서 열리는 공연은 클래식·현대음악·오페라·연극·무용 및 다양한 예술이다. 이 공연장의 사명 목록에는 이룩하기도 험난한 ‘문화적 다양성’이 들어있다. 또 공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시민들의 일상에 영감을 주겠다는, 쉽지 않고 복잡한 다짐을 공표하고 있다. 복잡한 철학을 가진 예술 센터는 재무제표도 명쾌하지만은 않다. 케네디 센터는 지난해 2억6800만 달러(약 3841억원) 예산으로 100만 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다. 이런 상황에도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사업만 할 수는 없다. 다양한 인종, 성소수자, 소외된 예술 장르의 공연도 무대에 올려왔다. 복잡하고 어려운 운영이다. 이런 복잡한 사명과 운영에는 명쾌하지 않은 것들도 이해해보며 성장하는 인간의 습성이 보인다. 여기에 대비되는 것은 “케네디 센터가 적자이니, 보트 정박 시설을 만들자”는 단순함이다. 이 말은 트럼프 대통령의 친구이자, 모델 매니지먼트사의 대표이며, 2020년부터 케네디 센터의 이사였던 파올로 잠폴리가 했다. 케네디 센터의 외벽에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말이 새겨져 있다. “페리클레스의 시대는 페이디아스(조각가)의 시대였다. 엘리자베스의 시대는 셰익스피어의 시대였다. 내가 주장하는 사회의 뉴 프론티어가 미국 예술의 뉴 프론티어가 될 수도 있다.” 사회의 발전과 예술의 발전을 연관 지은 발상인데, 조금이라도 문화 경험이 있어야 이해할 수 있다. 반면 트럼프 대통령은 SNS에 이런 문장을 썼다. “이사장이 돼 매우 영광스럽다. 케네디 센터를 매우 특별하고 흥미진진한 곳으로 만들겠다!” 단순함의 효력은 즉각적이다.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 더욱 그렇다. 케네디 센터의 데보라 러터 대표, 데이비드 루벤스타인 이사장이 단숨에 해고됐다. 루벤스타인은 20년 동안 케네디 센터에 1억2000만 달러(약 1700억원)를 개인 기부했지만 소용없었다. 뉴욕타임스는 19일 기사에서 단순함이 곧 역풍을 맞을 거라 예측했다. 이사장 트럼프의 케네디 센터 기금 모금이 쉽지 않다는 뜻이다. 쫓겨난 대표와 이사장이 2023년 모금한 기부금은 1억4100만 달러(약 2000억원)였다. 예술 센터에 전념했을 때 이 정도였다. 러터 대표는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예술 센터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아티스트와 관계, 직원 감독, 기금 모금, 의회 및 백악관과 협력이 필요하다”라고 했다. 영국의 가디언은 24일 이 소식을 전하며 소련의 예술 통제를 언급했다. 가히 1930년대를 떠올릴만한 사건이다. 스탈린은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의 난해하고 복잡한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1934년)을 보고 격노했다. 쉽게 이해 가능하고, 진취적인 내용의 작품을 써내라 요구했다.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5번을 내놨다. 단순한 눈으로 보면 혁명을 찬양하는 음악이다. 하지만 예술의 복잡성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작곡가가 숨겨놓은 수수께끼로 들린다. 순응인 것 같았던 음표는 저항이고, 승리로 들렸던 부분은 공포의 비명이다. 이 음악이 사람들을 지금도 매혹시키는 이유가 바로 혼란스러움이다. 세계의 중심지에서 일어난 ‘예술과의 전쟁’ 소식을 들으며, 언젠가 단순함을 이길 복잡함에 응원을 보낸다. 김호정([email protected])

2025-02-27

[글로벌 아이] ‘지난주 한 일 다섯 가지를 적어내시오’

“지난주 한 업무를 5가지로 요약 정리해 e메일로 회신하시오.” 미국 정부효율부를 이끄는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 지시로 인사관리처가 지난 주말 연방정부 공무원 200만여 명에게 뿌렸다는 e메일 내용이다. 일정 기한까지 답하지 않으면 사직으로 간주한다는 대목도 들어 있었다. 내가 이 e메일을 받았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기억을 더듬기 위해 스마트폰을 뒤적이느라 바빴을 것 같다. ‘이걸 알려도 될까’ 보안 고민도 했을 것 같다. ‘트럼프의 입’ 캐롤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은 “저는 5가지를 떠올리는 데 1분 30초 걸렸다”고 했지만 나로선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나니 공무원 200만여 명이 일순간에 겪었을 대혼란이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업무 성과 5가지 e메일 보고’는 지금 워싱턴 관가를 덮친 최대 이슈다. 모든 연방정부 기관에 대규모 인력 감축 등 구조조정 계획을 수립하라는 불호령이 떨어지면서 공무원들끼리는 매일 아침 ‘생사 확인’을 하는 게 일상이 됐다고 한다. 느리고 비효율적인 미국 행정에는 나도 한숨이 나올 때가 적지 않았다. 사회보장번호(SSN)를 신청했다가 “2~4주 안에 우편물로 받게 될 것”이라는 창구 직원의 설명과는 달리 몇 달이 지나도 오지 않아 포기 단계에 이른 적이 있다. 신청 사실조차 잊고 지내던 1년쯤 뒤 SSN 우편물을 받아들고는 헛웃음이 나왔다. 느려터진 운전면허국(DMV) 행정을 겪으며 미국에서 살려면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하곤 했다. 이런 행정의 개선 필요성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문제는 일방적 폭력성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줄여야 할 인원과 재정적자 등 ‘숫자’에 매몰돼 동의를 구하고 설득을 하는 절차는 소홀히 하고 있다.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드러나고 갈등이 깊어지는 건 그래서다. 이를테면 국세청(IRS)이 직원 6000명 해고에 들어가면서 생긴 업무 공백 탓에 세금 신고 등의 불편을 호소하는 민원인들이 늘고 있다.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쫓겨난 전직 공무원 등 반트럼프 시위대 사이에선 “대통령을 탄핵하라”는 구호가 등장했다. 익명을 원한 한 현지 대학교수는 트럼프 행정부를 “헌법 질서에 순응하지 않는 권위주의 정권”이라고 규정하며 “민주주의가 큰 위험에 빠졌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덧붙였다. “지난주 무슨 업무를 했는지 5가지를 대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 징후 5가지를 말하라면 당장 댈 수 있다.” 김형구([email protected])

2025-02-27

[박한슬의 숫자 읽기] 북극항로라는 잿빛 환상

몇 달 전 덴마크 왕실이 문장 교체 소식을 알렸다.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노골적으로 그린란드에 대한 영토 야욕을 드러내자 왕실 문장에서 그린란드를 상징하는 북극곰의 크기를 부쩍 키워버리는 식으로 대응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그린란드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나 국내에서는 그중 북극항로(NSR)의 가능성에 더 이목이 쏠렸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빙하 감소 혹은 쇄빙선을 이용한 적극적 항로 개척을 통해 북극해를 이용하는 단축 항로가 열리면 물류 혁명이 일어날 거란 주장이다. 사실일까. 해상 운송은 크게 광물이나 곡물 같은 벌크 화물(bulk cargo)을 실어 나르는 벌크 해운과 주로 완제품을 컨테이너에 담아 운반하는 컨테이너 해운으로 나눌 수 있다. 비중으로 따지면 벌크 화물이 80~85%로 압도적으로 많다. 그런데 이들 벌크 화물이 이동하는 경로는 주로 남북 항로를 따른다. 적도 부근이나 남반구에 있는 자원이 북반구의 선진국과 제조업 기지로 이동하고, 거기서 완제품으로 가공된 다음 컨테이너에 담겨 세계 각지로 이동하기 때문이다. 즉 해운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벌크 화물은 애초 북극을 지나지 않는다. 컨테이너 해운을 뜯어봐도 마찬가지다. 2023년 기준 약 1억6000만 개의 컨테이너가 세계 바다를 이동했는데 그중 64%는 역내 운송 혹은 비주류 항로를 통해 비교적 짧은 거리를 이동했다. 전체 컨테이너 화물 중 14%가 아시아에서 출발해 수에즈 운하로 유럽으로 도달하는 남방 항로 물량이다. 북극해가 열린다고 한들 전체 해운의 2.8%가 북극항로의 최대치인데 역내 이송을 위한 환적 등의 인프라를 고려하면 그마저도 줄어들 개연성이 크다. 그런데도 트럼프 대통령이 북극항로를 이유로 그린란드를 탐낸다면 다른 이유가 있을 테다. 현재 미국은 태평양과 대서양을 통해서도 안정적으로 해운 물류를 유지할 수 있다. 바꿔 말해 아시아에서 수에즈 운하까지 이르는 해로는 미국으로의 물류와 별다른 관련이 없다. 그러니 세계에 대한 미국의 기여를 축소하겠다는 트럼프 행정부는 남방 항로 보호를 불필요한 ‘비용’으로 인식할 개연성이 크다. 게다가 해당 권역에서 미 해군력이 증발하면 애가 타는 건 동아시아 국가들과 유럽이다. 그들이 북극항로라는 대안적 경로를 강제로 고를 수밖에 없어지면 그 이익은 북극항로 관문이 될 그린란드를 틀어쥔 미국이 누리게 된다. 나가는 비용은 줄이고 미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트럼프식 통치와 결이 잘 맞는다. 아직은 추측뿐인 음모론이지만 우크라이나에 종전을 대가로 희토류 광물자원의 절반을 내놓으라는 ‘새로운 미국’에 이것이 정말 불가능한 시나리오일까. 나는 북극항로에 대한 트럼프의 열망이 꽤 두렵게 느껴진다. 박한슬 약사·작가

2025-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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