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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세계] 비트코인을 사랑한 대통령

지난해 11월 아르헨티나에서 비트코인 지지자 하비에르 밀레이(사진) 대통령이 승리했다. “비트코인은 돈을 창조한 인간에게 다시 화폐를 돌려주려는 움직임이다.” 그가 비트코인을 사랑하며 한 말이다. 우리의 김치 프리미엄처럼 비트코인의 가격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아르헨티나 프리미엄’이 있다. 살인적 물가와 그로 인한 비트코인의 높은 수요 때문이다. 그의 취임 후 디폴트로 악명 높은 이 나라의 국가 신용위험을 나타내는 신용디폴트스와프(CDS)가 4년여 만에 최저치로 내려왔다. 그는 임기 중 기준금리를 133%에서 이달 35%까지 내려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다. 주식시장은 사상 최고 랠리로 답했다. 세계 최초로 비트코인을 법정통화화한 엘살바도르를 포함해 중남미의 비트코인 사랑이 유별나긴 하다.   이달 미국 47번째 대통령으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됐다. 그는 지난 7월 미국 테네시주에서 열린 비트코인 2024 콘퍼런스에 등장했다. 당시 그는 비트코인을 “전략적 국가 비축물(strategic national bitcoin stockpile)”로 규정했다. 각종 공약을 내세우며 선거판의 큰 손이 된 친(親)크립토 투심(投心)을 공략한 것은 유효했다. 전략적 비축물에 비트코인이 포함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비트코인은 금이나 기축통화 수준에서 논의될 수 있다는 말일까.   트럼프 당선 정치자금 모금단체(America PAC)에만 1억1800만 달러 이상을 지원한 테슬라 최고경영자 일론 머스크는 주가 상승으로 입이 째져있다. 테슬라 주가는 52주 신고가를, 비트코인은 사상 최고가를 기록했다. 그도 2021년 고객이 비트코인으로 테슬라를 구매토록 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머스크의 기쁨과 달리 성전환한 딸은 슬퍼한다. 성소수자를 박해하는 트럼프의 승리에 미국을 떠나겠단다. 부녀간 희비의 엇갈림 속에 세상은 트럼프 2.0에 비상이 걸렸다. 세상은 과연 어디로 가는 걸까. 조원경 / UNIST 교수·글로벌 산학협력센터장돈의 세계 비트코인 대통령 비트코인 사랑 비트코인 지지자 아르헨티나 프리미엄

2024-11-20

[우리말 바루기] ‘연도’와 ‘년도’ 구분

연말이 되면 신년 계획을 세운다.  ‘2025년도’ ‘신년도’ ‘연간’ ‘연도’ 등의 내용이 나올 때 ‘년도’와 ‘연도’ 가운데 어느 것을 써야 하는지 헷갈린다. 각각 다르므로 경우에 따라 구분해 적어야 한다.   ‘년도’는 ‘2025년도’에서와 같이 해(年)를 지칭하는 말 뒤에 쓰여 일정한 기간 단위로서의 그해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 ‘연도’는 ‘결산연도’ ‘1차 연도’ ‘졸업 연도’에서처럼 편의상 구분한 1년 동안의 기간이나 앞의 말에 해당하는 그해를 가리킬 때 쓰인다.   맞춤법에 따르면 ‘녀·뇨·뉴·니’로 시작하는 한자음이 단어 첫머리에 올 때는 두음법칙에 따라 ‘여·요·유·이’로 표기해야 한다. 단어의 첫머리가 아닌 경우에는 본음대로 적어야 한다.   따라서 ‘결산연도’는 단어의 첫머리가 아니므로 ‘결산년도’와 같이 본음대로 적기 십상이다. 하지만 독립성 있는 단어에 접두사처럼 쓰이는 한자가 붙어서 된 말이나 두 개의 낱말이 결합해 합성어가 된 경우 뒤의 단어에도 두음법칙이 적용된다는 예외 규정 때문에 ‘결산연도’로 쓰는 게 바르다.   숫자 뒤에는 ‘년도’가, 숫자가 아닌 낱말 뒤에는 ‘연도’가 붙는다고 생각하면 쉽다. 다만 ‘신년도’는 숫자가 아닌데도 ‘년도’라고 쓰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신(新)+년도(年度)’ 구성이 아니라 ‘신년(新年)+도(度)’로 이루어진 단어라 보기 때문이다.우리말 바루기 구분 단어 첫머리 신년 계획 예외 규정

2024-11-20

[오픈 업] 여자학교, 남자학교 그리고 남녀공학

나는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모두 여학교를 다녔다. 남녀공학은 초등학교 시절이 전부다. 의과대학 졸업 후 인턴 시기도 학교 교육의 연장이라고 한다면, 이때 다시 남녀공학에 다닌 셈이다.   한국뿐 아니라, 미국의 교육제도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남자학교, 혹은 여자학교들의 남녀공학 전환이다. 이에는 어떤 것이 먼지인지는 모르겠지만 교육제도와 함께 사회적 변화의 영향도 있는 듯하다. 이 두 가지는 병행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세대가 바뀌면서, 변화를 받아들여야 하는 부모와 그 가운데 성장한 자녀들은 세상을 달리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길 것 같다. 우리는 여러 요소로부터 영향을 받고, 또 변화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태어난 두 딸은 중학교, 고등학교 모두 여학교를 졸업하고 남녀공학 대학에 진학했다. 재학생들은 남, 여 구별을 느끼지 못하는 듯 보였다. 많은 클래스가 혼성이었고, 과외 활동도 자연스레 혼성이 많았다. ‘성과 법의 조지타운 저널(Georgetown Journal of Gender & Law)’에 따르면 현재 미국에는 남학생, 혹은 여학생만 뽑는 초·중·고교가 366개라고 한다. 이는 약 7만개인 공립 초등학교, 2만3519개의 공립 중·고교의 1%도 되지 않는 숫자다.   오래전 사립 여자중·고교의 이사로 10년간 봉사한 적이 있다. 당시, 이 여학교와 합병을 제안한 남학교가 있었고, 이사회 안건으로 올라왔다. 안건으로 올리기 전에 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외부 전문인의 의견도 들었다. 또 19세기 말에 설립된 유서 깊은 그 학교 졸업생들의 의견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결과적으로 이 학교는 아직 여학교로 남아있다.   한국의 한 여자대학에서 남녀공학 전환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사실 한국 여성 교육의 역사는 서양 국가들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한국은 남존여비 유교 사상이 굳게 자리 잡고 있던 나라였다. 그런 가운데 꽃 피운 여학교의 역사를 보면 멋있다.     최초의 서양식 중학교였던 배재학당이 세워진 지 한 해 뒤인 1886년에 이화학당이 한 명의 여학생을 위해 문을 열었다. 그 후 길에 버려진 여아, 부모가 맡기고 간 여아, 문 앞에 놓고 간 여아들을 거두며 여성 교육에 앞장섰다. 나는 이 학교보다 22년 뒤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세운 관립 여학교 출신이다. 그래서 그런지,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나에게는 관료주의적인 면이 많은 것 같다.   어떻든 정신적, 신체적, 정서적으로 예민한 십 대 시절에 여자 학교에 다녔다. 뒤돌아보면, 여학생들만 있었기에 ‘나빴다’, ‘좋았다’ 할 만한 사항은 없었던 것 같다. 그 보다, 빈부 차이가 컸던 것이 큰 단점이었다.     그 후, 쉽지 않았던 의학도의 길, 쉽지 않은 이민 의사의 길,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앞만 보고 달려온 디아스포라 교민으로 남은 기분이다.     지난달 모교에서  ‘자랑스러운’이라는 이름이 붙은 특별한 상을 받았다. 직접 오라는 통지를 받고, 잠시 한국에 갔다. 한글로 칼럼과 수필을 쓰며, 미국 정규학교에 한국어반을 만들기 위해 힘써 왔기에 한국과 모교를 빛냈다는 것이 선정 이유였다. 시상식 때 강당을 가득 메운 선배님, 후배들의 아낌없는 칭찬을 들었다. 지금도 여학교인 그곳 강당에서 강연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을 때, 디아스포라로서 사회에 기여해 온 한국 여인들의 쉽지 않은 삶에 대해서 강조했다.   단성 교육, 혹은 혼성 교육의 장단점은 국가나 교육자, 학부모들의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세상에 완벽한 시스템은 없다. 가정과 학교에서 장점은 키워주고, 단점은 보완하면서 차세대를 응원하는 것이 바람직한 교육 방법이라는 생각이다.  류 모니카 M.D. / 종양 방사선학 전문의·한국어 진흥재단 이사장오픈 업 여자학교 남자학교 남녀공학 전환 남녀공학 대학 관립 여학교

2024-11-20

[문장으로 읽는 책] 마지막 왈츠

인류 최초의 이야기로 알려진 『길가메시 서사시』를 읽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인류에 남아 있는 이야기 중 가장 오래된 이야기의 중심축이 사랑이 아니라 우정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사랑 이야기가 인류 최초의 서사일 것이라 짐작한 나의 사고방식도 어쩌면 로맨틱 러브 중심의 현대적 분위기에 물들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목숨까지 바칠 만한 격정적인 사랑이 문헌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도 서양에서는 아벨라와 엘로이즈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가 유행했던 12세기경이니, 인류 역사 전체에서 사랑이 이토록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인 셈이다.     황광수·정여울 『마지막 왈츠』   1944년생 황광수와 1976년생 정여울. 두 문학평론가가 나눈 문학적 교감과 우정에 대한 에세이집이다. 병석의 황광수를 대신해 정여울이 두 사람의 대화를 정리했다. 황광수는 책이 나오기 직전 세상을 떴다. “44년생 황광수와 76년생 정여울은 어떻게 이토록 절친한 벗이 되었을까요. 우리 사이엔 아무런 실용적 목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지요. 우리의 우정에는 아무런 목적이 없었으니까요.” 단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직감적으로 서로의 눈빛을 알아보았지요. 우리 두 사람 모두 ‘같은 대상’을 향해 미쳐 있음을. 그것은 ‘문학’이었습니다.”   ‘결혼 아니면 이별’처럼 종착역이 분명한 사랑과 달리 우정은 끝도 목표도 없는 ‘무쓸모의 관계’다. 정여울은 서문에서 “인류는 끊임없이 적이 될 수도 있는 타인을 친구로 만들며 세파를 견디고 변화에 적응해 왔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다”고 썼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왈츠 사랑 이야기 마지막 왈츠 인류 역사

2024-11-20

[이 아침에] 터키 나눔

내가 터키와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것은 50여 년 전의 일이다. 그때 우리 집은 벽제에 있었는데, 근처 미군 부대의 부중대장 부부가 3명의 어린 자녀와 함께 아래채에 세를 살고 있었다. 난 아내인 바버라에게 영어를 배웠고, 가끔 그녀가 외출할 때면 베이비시터를 해 주었다.     양계장을 하시던 아버지는 넓은 마당에 칠면조를 몇 마리 키우고 있었다. 추수감사절이 다가오자 누가 먼저 꺼낸 이야기인지 터키를 구워 함께 밥을 먹게 되었다. 바버라가 오븐을 빌려와서 터키를 굽고, 어머니가 한식을 준비해서 함께 밥을 먹게 되었다. 터키 한 마리는 우리 식구 7명에 바버라네 식구 5명, 도합 12명이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터키는 맛만 보고 어머니가 준비한 음식으로 배를 채웠다. 살을 발라 먹고 남은 터키의 뼈는 바버라가 수프를 끓인다고 가져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녀로서는 매우 의미 있는 추수감사절 만찬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설고 낯선 이국땅에서 현지인과 터키를 구워 함께 먹었으니 추수감사절의 시작 때 그녀의 조상이 했던 것을 재현했던 셈이 아닌가.     1년 후, 바버라네는 미국으로 돌아갔고, 또 몇 년이 흐른 후, 나도 미국에 오게 되었다. 미국에 오던 해, 1981년, 겨울 크리스마스 연휴에 교우를 따라 유타로 여행을 가게 되었고, 거기서 바버라네 가족을 다시 만났다. 그날은 그녀가 만든 터키를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내가 한동안 터키를 멀리하게 되는 사건도 있었다. 다음날, 교우의 이모님 댁에서 터키 껍질을 다져 넣고 만든 만두를 먹게 되었는데, 만두를 잘라 입에 넣는 순간 입안에 퍼지는 조류 특유의 비릿한 맛. 그 후 몇 년 동안 터키는 쳐다보지도 않고 지냈다.     직장생활을 하며 조금씩 터키 샌드위치에 맛을 들이며 다시 터키를 먹게 되었고, 추수감사절이 되면 구운 터키를 먹게 되었다. 홀아비 시절, 추수감사절이 되면 본스마켓에서 파는 터키 디너 세트를 사다가 오븐에 데워 먹었다. 어느 해인가 추수감사절이 다가왔는데 오븐이 고장 났다. 할 수 없이 마켓에 가서 사정 이야기를 하고 터키를 데워달라고 부탁을 하니 인심 좋은 백인 직원 아줌마가 원래는 안 되는 일인데 특별히 해 준다며 데워 주었다. 오븐을 그다음 해까지 고치지 못해, 또 가서 부탁하니 이번에는 데워줄 수 없다고 했다. 결국 그해 추수감사절에는 콘비프를 끓여 먹었다.     아내를 만난 후 추수감사절이 되어도 더는 터키 걱정은 하지 않는다. 이제 내가 나서지 않아도 맛있는 터키 구이가 상에 오른다.     미국인에게 추수감사절 터키는 우리가 설에 먹는 떡국과 같으며, 음식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집이 있건 없건, 가족이 있건 없건, 모든 이들이 터키를 먹는다. 명절이면 시집에 갈 것인지, 친정에 갈 것인지를 두고 다툴 일도 없다. 형편이 되는 집에 모여 음식을 나누기 때문이다. 이때 주변에서 외롭게 지내는 한, 두 사람을 초대해 함께 먹기도 한다.     터키가 입에 맞지 않으면, 닭도 좋고, 아니면 한식도 좋다. 무얼 먹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렵고 외로운 누군가와 함께 나누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닌가 싶다. 외롭게 혼자 밥 먹는 사람이 없는 추수감사절이 되었으면 좋겠다.  고동운 / 전 가주 공무원이 아침에 터키 추수감사절 터키 터키 샌드위치 한동안 터키

2024-11-20

[사설] LA시의 성급한 ‘피난처 도시’ 선언

LA시가 도널드 트럼프 당선 이후 주요 대도시 가운데 가장 먼저 불법입국자 ‘피난처 도시’를 선언했다. LA시의회는 연방정부의 지역 내 불법체류자 단속을 지원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조례안을 19일 통과시켰다. LA시정부가 제출한 조례안은 체류 신분을 묻는 행위,이민법 집행을 위한 체포나 구금, 이민국의 불체자 단속 활동 협조 금지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불법체류자 추방’은 트럼프 당선인의 주요 공약 가운데 하나다. 불법입국자 급증으로 많은 예산이 지출되는 것은 물론 사회적 혼란도 커지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트럼프 당선인은 이미 취임 첫날 사상 최대 규모의 추방 조치를 공언한 바 있으며, 최근에는 효과적 단속을 위해 군대까지 동원할 수 있다고 밝혀 강경 입장을 재확인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나온 LA시의 조치는 성급한 감이 있다. 자칫 연방정부와 맞서려 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트럼프 정부가 공식 출범도 하기 전 다른 도시에 앞서 이런 조치를 발표하는 것은 선언적 의미는 있을지 모르지만 실익이 없다. 실제 불법체류자 단속 상황을 주시하며 탄력적으로 대책을 세워도 늦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다.      LA시도 연방정부의 지원을 받아야 하는 것들이 많다. 그런데 이번 일로 미운털이 박힌다면 그로 인한 피해는 시민의 몫이 된다. LA시의 성급한 조례안 마련은 시의원들과 시장이 정치적 판단만을 앞세운 결과로 보인다.      물론 불법체류자나 불법입국자의 인권도 존중되어야 한다. 또한 불체자 단속을 이유로 시민에게까지 불편을 주는 무리한 수사 활동이 이뤄져서는 곤란하다.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당연히 시정부가 앞장서 막아야 한다. 하지만 불법입국자를 무제한으로 허용할 수 없는 노릇이다. LA시도 각종 범죄를 저지르거나 사회 혼란을 초래하는 불법체류자 체포에는 협력해야 한다.사설 피난처 성급 피난처 도시 불법체류자 단속 불법체류자 추방

2024-11-20

[사설] 가주 '최저 임금 인상안' 부결 의미

가주의 ‘최저 임금 인상안’ 부결 의미 11월5일 가주 선거에 상정됐던 ‘주민발의안 32’가 부결됐다. 기존 시간당 16달러인 최저임금을 18달러로 올리자는 내용이다. 투표 결과는 박빙이었다. 반대가 50.8%, 찬성이 49.2%로 집계됐다.     가주에서 최저 임금 인상안이 좌절된 것은 이변이라고 볼 수 있다. 그동안 나왔던 인상안들은 대부분 큰 저항 없이 시행됐다. 이로 인해 가주의 최저 임금은 2010년 이후 두 배로 올랐다. 시간당 16달러인 현 최저 임금은 전국 최고 수준이다. 더구나 대형 패스트푸드 체인은 20달러, 의료계 종사자는 23달러로 최저 임금 기준이 훨씬 높다. 15년째 7.25달러인 연방 최저임금과는 이미 상당히 격차가 크다.     이번 부결 결과를 두고 해석이 분분하다. 먼저 가주 유권자의 보수화 경향이 시작됐다는 분석이다. 이번 선거에서는 33과 36도 관심을 모았다. 주민발의안 33은 렌트 컨트롤의 확대, 36은 경범죄자 처벌 강화 등이 골자였다. 결과는 33은 압도적 표 차의 부결, 36은 압도적 표 차의 통과됐다. 모두 보수 진영에서 원하던 결과다. 특히 33의 통과는 최저임금 인상안이 부결된 것만큼이나 예상 밖이라는 반응이 나온다. 가주의 진보 일변도 정책의 부작용이 커지자 유권자들이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학습 효과’다. 최저 임금이 15년간 배로 올랐지만 생활의 질은 별로 나이진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최저 임금이 인상되면 주거비와 물가도 함께 오르는 패턴이 반복됐다. 결국 명목 소득은 늘었지만 실질 소득은 제자리걸음인 결과로 이어졌다. 최저 임금 인상에는 양면성이 있다. 저임금 근로자의 소득 증가라는 긍정적 효과가 있지만, 일자리 감소로 인한 고용 불안도 상황도 초래한다는 사실이다. 고용주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인건비 증가 부담을 줄여야 하기 때문이다. 최저임금 인상안의 부결은 유권자들이 이런 악순환에 대한 피로감을 호소한 것이다.사설 임금 인상 최저임금 인상안 부결 의미 저임금 근로자

2024-11-20

[Nathan Park 기자의 시사분석] 일리노이 원자력 발전소의 미래

일리노이에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원자력 발전소가 가동되고 있다. 현재 일리노이에서 생산되고 소비되는 전기의 약 절반 이상이 이 원자력 발전소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최근 마이크로소프트가 낡은 원자력 발전소의 재가동을 통해 인공 지능 개발에 필요한 전력을 확보하고자 하는 뉴스가 나왔다. 데이터 센터 건설에 진심인 일리노이 역시 원자력 발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보니 향후 일리노이의 원자력 발전 운영 계획에 높은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최근까지 연방 정부는 원자력 발전소 건립에 소극적이었다. 20년도 전에 원자력 발전소를 통한 탄소 배출 없는 전기 생산에 적극 나서겠다고 했지만 이후 치솟는 건설비 증가 등으로 인해 원자력 발전소 건설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인공지능이 미래 먹거리 산업으로 크게 각광받자 빅 테크 기업들이 먼저 나섰다. 마이크로소프트나 아마존, 구글과 같은 글로벌 기업들이 청정, 클린 에너지라는 이름으로 원자력 발전을 하는 유틸리티 기업들과 협력하는 사례가 늘어난 것이다.   일부는 오래 전에 폐쇄된 후 방치됐던 노후 원자력 발전소를 다시 가동해 인공지능 기술 개발에 필요한 전기를 확보하고 있다. 미시간에 위치한 코버트시는 연방 정부로부터 15억달러를 확보해 원자력 발전소 재가동을 시도하고 있다. 아이오와 역시 오래된 원전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는 연방 정부가 수십억달러에 달하는 보조금 지급 등을 약속하며 원자력 발전을 지원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클린 에너지 확보를 위해 2050년까지 원자력 발전소를 지원하겠다는 내용을 인플레이션감축법에 포함시킨 바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으로 이러한 지원 계획이 계속 유지될지 여부가 불투명해졌지만 최근 여론조사 결과는 대다수의 공화당 지지자들이 원자력 발전소 계획에 찬성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소형 원자로의 경우 기존 원자로에 비해 ⅓ 정도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지만 보다 안전하고 건설 비용이 저렴하다는 장점이 있어 미래 대안으로 꼽히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리노이에는 모두 6개의 원자력 발전소가 있으며 여기에는 11개의 원자로가 가동되고 있다. 이중 5개의 발전소가 시카고가 위치한 북일리노이에 자리잡고 있다. 원자력 발전은 우라늄을 통해 에너지를 얻고 이를 바탕으로 전기를 생산하는 과정에 기후변화를 불러오는 온실가스를 전혀 배출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원자력 발전을 하면서 필수 불가결한 방사능 물질 배출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숙제다. 일리노이와 위스콘신 경계 지역에 위치한 자이온 원자력 발전소는 지난 1998년 가동을 중단한 바 있다.     인구 2만5000명이 거주하고 있는 자이온은 여전히 방사능 물질을 발전소 현장에 보관하고 있다. 방사능 물질을 제대로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이 반감기를 이용해 자연적으로 방사능 수치가 떨어지는 것을 기다리는 방법 외에는 현재로서는 마땅히 없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일리노이에서는 수십년간 원자력 발전소의 추가 건립을 막는 모라토리엄을 지난 1987년 선언한 바 있다. 최근에는 소형 원자로에 한해 개발과 설치를 지원하는 법이 통과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방사능을 가지고 있는 폐기물을 처리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연방 대법원이 핵 폐기물 보관과 처리와 관련한 판결을 내리기로 한 만큼 이에 대한 결정이 향후 원자력 발전의 미래를 결정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일리노이 정부는 원자력 발전소의 지속적인 운영을 위해 막대한 세금을 지원하고 있는 것도 불투명한 원자력 발전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원자력 발전소를 지지하는 업계에서는 풍력이나 태양광 패널과 달리 꾸준하게 일정량 이상의 전기를 생산하는 그린 에너지는 원전이 유일하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재생 가능 에너지 대부분이 바람이나 태양광의 변화로 인해 지속적인 에너지 생산이 힘들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2030년까지 탄소 배출 제로라는 목표를 내세운 일리노이 정부가 아직도 원자력 발전으로 절반 이상의 전기를 생산하고 있는 현실이 이를 보여주고 있다.     문제는 원자력 발전에 따른 위험성을 얼마나 줄일 수 있느냐는 점. 원전 인근에 거주했던 일리노이 주민 일부가 뇌종양 등의 이유로 발전소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는 사실은 이런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주정부는 원전 가동과 치명적인 암 발생의 상관관계를 따지는 역학조사에 나섰다가 예산 부족을 이유로 중단한 것도 일부 의심론자들의 의혹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결국 원자력 발전소의 앞날은 대체 에너지의 개발과 생산 단가 등에 달렸다고 파악하고 있다. 셰일가스 붐으로 인해 화력 발전소가 상대적으로 저렴해지면서 원전 개발이 주춤했던 과거도 이런 사례를 방증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풍력과 태양광 패널에서 생산한 전기를 저장할 수 있는 배터리 기술이 개발되는 것을 게임 체인저로 파악하고 있기도 하다. (편집국)   Nathan Park 기자Nathan Park 기자의 시사분석 일리노이 원자력 원자력 발전소 노후 원자력 현재 일리노이

2024-11-20

[사설] 기자에게 무례한 질문 같은 건 없다

━ 정무수석 ‘기자 무례’ 발언 군사정권 시절 연상 ━ 대통령 심기 경호 열중하면 민심 전달은 잘 될까 대통령실의 시대착오적 언론관이 충격적이다. 지난 7일 윤석열 대통령의 기자회견에서 부산일보 기자는 “국민들이 과연 대통령께서 무엇에 대해서 우리에게 사과했는지 어리둥절할 것 같다. 여기에 대해 보충설명을 해 달라”고 질문했다. 그런데 그제 국회 운영위에 나온 홍철호 정무수석은 이 기자의 질문에 대해 “대통령에 대한 무례라고 생각한다. 대통령이 사과했는데 마치 어린아이에게 부모가 하듯이 ‘뭘 잘못했는데’ 이런 태도는 시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홍 수석은 닭 가공업체를 창업해 민간의 현장에서 자수성가를 이룬 정치인이다. 더구나 재선 의원 출신인데 언론과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지 황당하기만 하다. 도대체 이 기자 질문의 어떤 대목이 무례하다는 것인가. 기자는 대통령이 발언하면 그냥 받아적기만 해야지, 납득이 안 되는 내용에 대해 다시 물으면 안 된다는 뜻인가. 대통령이 기분 나쁘시기 때문이란 얘기인가. 7일 회견은 대통령실이 시간이나 분야·개수 제한 없이 ‘끝장토론’을 한다고 밝혔던 이벤트다. 하지 말라는 질문을 기자가 억지로 던진 것도 아니고, 추가 질문을 받겠다고 해서 한 것뿐이다. 그걸 보고 무례했다니, 지금이 군사정권 시절인지 헷갈릴 정도다. 오히려 언론계에선 이 질문이 회견의 가려운 곳을 가장 잘 긁어줬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대통령도 기자회견장에서만큼은 언론의 취재원일 뿐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기자가 대통령에게 질문하면 안 되는 어떤 성역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존재해서도 안 된다. 국민을 대신해 묻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례로 따지자면 미국 백악관 출입기자들이야말로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이들이다. 1998년 김대중(DJ) 대통령과 클린턴 대통령의 공동 기자회견 때 미국 기자가 클린턴에게 “르윈스키의 드레스에 묻은 액체는 대통령 것입니까”라고 물어 옆에 있던 DJ가 민망해 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홍 수석의 발언이 대통령실 전체의 인식을 반영한 것인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1일 국감에서 천하람 개혁신당 의원이 “이러니까 (대통령) 지지율이 이 모양”이라고 비판하자 정진석 대통령비서실장은 “개혁신당 지지율이나 생각하라”고 맞받아쳐 소동이 일었다. 그 자리에서 정 실장은 “유럽도 지지율 20% 넘기는 정상이 많지 않다”고도 했다. 명태균씨 사건에 관한 한 지금 대통령실은 큰소리를 칠 구석이 전혀 없다. 국민에게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머리를 숙이고 국정 쇄신을 다짐해도 시원찮을 형국이다. 그러나 요즘 용산 참모들의 발언을 보면 과연 무엇이 잘못인지는 알고나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대통령 심기 경호는 엄청나게 신경쓰는 것 같은데, 과연 대통령에게 진짜 민심을 제대로 전달하고 있는 것인지 다시 묻고 싶다.

2024-11-20

[사설] 심상찮은 IMF의 경고, 규제 개혁 적극 나서야 할 때

━ 내년 한국 성장률 2%로 낮춰…“하방 리스크 더 커” ━ 규제 없애는 게 감세, ‘자유’ 외쳤던 정부 속도 내야 국제통화기금(IMF)이 한국의 올해 성장률은 기존 전망보다 0.3%포인트 낮춘 2.2%로, 내년 성장률은 기존보다 0.2%포인트 하향 조정한 2%로 발표했다. 한국 정부와의 연례협의를 마친 IMF 한국미션단은 어제 “전망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높은 상황이고, 하방 리스크가 더 큰 편”이라고 했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등으로 인한 대외 불확실성 때문에 내년 한국 성장률이 잠재성장률을 밑도는 1%대로 떨어질 위험을 경고한 것이다. IMF는 통화정책의 점진적인 정상화와 장기적인 지출 압력에 대응 여력을 확보하기 위해 더 적극적인 건전재정 기조를 주문했다. 기준금리 인하는 천천히 하고, 야당이 주장하는 경기 보강을 위한 재정의 적극적 역할은 나라 곳간의 사정을 봐가며 하라는 얘기다. 당장 경기를 살리기 위한 재정·통화정책에 큰 기대를 걸지 말라는 조언이기도 하다. 금리 인하로 가계빚이 더 늘어나지 않도록 필요하면 추가적인 건전성 조치를 고려할 수 있다는 대목도 있었다. 3분기 말 가계부채는 1900조원을 넘어서며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IMF의 지적처럼 시장 상황을 면밀히 점검해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범위 확대 등 필요한 조치를 준비해야 한다. IMF는 국내외 환경 변화에 회복력 있게 대응하기 위해선 “강력한 경제 정책이 필요하다”며 정책 우선순위로 혁신 강화, 공급망 다변화, 서비스 수출 촉진 등을 거론했다. 하지만 어제 보도된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이공계 석박사 인력이 매년 4만 명 부족하다고 분석됐다. 전 세계가 인공지능(AI) 인재 확보에 총력이지만 AI 분야 전공자는 국내에서 배출되는 이공계 박사의 6%뿐이라고 한다. IMF는 혁신 강화가 최우선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혁신 연구개발(R&D)의 최전선이 무너지고 있다. 이러고도 우리 경제의 경쟁력이 유지될 수 있을까.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중장기 경제 개혁이 중요하다는 지적은 IMF의 단골 메뉴다. 답은 뻔히 알고 있지만 별 진전이 없는 해묵은 과제들이다. 지금처럼 당장 쓸 수 있는 거시정책 수단이 없을 때일수록 규제 개혁이 더 간절하다. 규제는 ‘보이지 않는 세금’이다. 규제를 없애는 것 자체가 감세 정책이자 경기 부양 정책이다. 트럼프가 정부효율부 수장으로 발탁한 일론 머스크는 예전에 “(소인국에 간) 걸리버처럼 수천 개의 작은 줄에 묶여 눕혀진 채 규제 하나에 한 번씩 우리는 자유를 잃고 있다”고 썼다.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하는 규제에 진저리를 쳤던 머스크의 미국은 규제와의 전쟁에 나섰다. 자유를 그토록 강조해 온 윤석열 정부에서 규제 개혁이 얼마나 진전될지 많은 이가 지켜보고 있다.

2024-11-20

[중앙시평] 정보의 습격에 대응하기

대학은 학위 논문심사가 한창이다. 논문심사의 절차는 어느 나라 어느 대학이든 유사하다. 복수의 심사위원이 필요하고 학과 외부인도 포함되어야 하는 등 요건을 가진다. 최종 판정을 위한 토론을 비공개로 하는 것도 그중 하나다. 그런데 요즘은 최종 토론을 하기 전에 확인하는 것이 하나 있다. 심사를 받은 학생이 휴대전화나 노트북을 혹시 두고 나갔는지 보는 일이다. 만약 특정 발언이 문제시될 경우 절차적 신뢰가 깎이고 소모적인 논란에 휩싸일 수 있어서이다. ‘학생의 노력이 비밀 논의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것은 불공정하다!’라는 말이 세를 얻고, 여기에 학생은 약자이고 투명한 것이 무조건 민주적이라는 믿음이 더해지면, 특정 절차가 애초에 왜 있는지 망각한 채 일시에 모든 논문심사를 공개하도록 바뀌는 것도 영 개연성 없는 일은 아니다. 제도는 사회적 정보 거르는 장치 정보기술이 부른 제도 신뢰 붕괴 정보 포퓰리즘으로 공동체 위협 디지털 시민성 제고 노력이 필요 이 시나리오에서 생각해야 할 지점이 있다. 이런 논문심사 절차는 평가에 쓰이는 정보를 어떻게 처리하고 관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나름의 해결책이다. 심사 관련자들의 깔끔한 의견 일치나 객관화가 어려우므로 주어진 한계 내에서 학술적 성과를 높이면서 모두가 승복하는 평가를 할 수 있도록 세월을 거치며 학계가 암묵적으로 합의해 만든 것이다. 심사 과정을 공개하면 자유로운 비판이 억제되고, 피심사자도 평가를 객관적으로 수용하지 못하거나 사소한 정보에 휘둘릴 수 있다. 정보는 무조건 많다고 좋은 것도 아니고 관련성이 떨어지는 정보는 인간의 인식과 판단을 흐린다. 정보는 걸러지고 연결되고 꿰어져야 지식이 되는 법이다. 미디어 기술의 진화와 그에 따른 데이터의 폭증으로 인해 기존에 사회적으로 쓰이는 정보를 관리해왔던 제도나 절차에 대한 신뢰가 급속히 무너지고 있다. 우리가 가진 사회제도의 대부분은 사실 들여다보면 사회적 결정을 하기 위해서 주어진 정보를 누가 어떻게 거르고 다룰 것인가와 관련한 규칙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사법절차라고 할 수 있다. 사실에 대한 다툼이 있을 때 무엇을 증거로 인정할지 말지, 누구의 말을 채택할지 아닐지 등, 끝없는 정보의 바다에서 어떤 정보에 주목하고 어떤 것은 차단하여 결정에 이를 것인가에 관한 절차와 조건의 합이다. 가족을 이루어 자녀를 키우는 것도 정보의 흐름이라는 측면에서 볼 수 있다. 자녀 교육의 큰 부분 중 하나는 언제 어떻게 어른들의 세계에 대해 알려줄 것인지를 부모가 통제하는 일이다. 디지털 기기의 확산은 어린이와 어른 간 정보의 차이를 없앤다. 언제 어디서나 공개적으로 혹은 비공개적으로 이루어지는 녹음, 녹화 더 나아가 딥페이크의 생성은 어떤가. 프라이버시를 없애고 사람들끼리의 접촉과 대화를 위축시킨다. 프라이버시의 소멸은 개성의 약화를 불러오고, 대화의 위축은 사회성의 축소로 이어져 공동체 유지와 인간성의 토대를 위협할 수도 있다. 세계적으로도 앞선 우리의 디지털 문화는 다양한 기회를 열어주었지만, 동시에 이것이 가져오는 부정적인 사회적 영향도 피해갈 수만은 없다. 한 사회의 ‘미디어 리터러시’ 수준은 개인적 차원에서 기기 활용법을 익혀 자기 고양의 기회와 심리적 웰빙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숫자로만 결정되지 않는다. 내게 주어진 정보가 반드시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신중하고 유보적인 자세가 우선 갖추어져야 한다. 소셜미디어, 플랫폼, AI 까지 기술적인 가능한 것들을 모두 활용하고 인간의 문화가 기술에 맞춰 적응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공동체를 유지해온 다양한 공공기관과 제도의 기반을 대안없이 무너뜨리고 있지는 않은지, 오히려 기술을 교묘히 활용하는 ‘꾼’들의 조작에 더 취약해져 가는 것은 아닌지, 미디어 기술과 이들이 만들어내는 정보의 흐름을 더 가시적으로 드러내고 시민들의 민감도를 높여야 한다. 이것이 디지털 시민성 계발의 시작점이다. 디지털 강국답게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미디어 기술의 명과 암을 모두 마주하고 있다. 그런데 아직 우리의 미디어 리터러시 논의나 교육은 앱의 활용법이나 가짜뉴스의 판별 정도에 머물러 있는 수준이다. 한 정치 브로커의 끝도 없는 녹음 파일이 쏟아지면서 지금껏 의혹에 의혹이 꼬리를 물고 있다. 장기전이 되면서 시민들의 정보 피로도가 높아졌지만, 우리가 소화해낸 정보의 양만큼 사건의 실체에 대한 이해에 다가갔는지 알 길이 없다. 공적인 목적으로 정보를 처리하고 걸러주었던 기관과 제도에 대한 신뢰는 끝도 없이 하락하고 있는데, 여기에 정보기술의 진화와 고도화는 더 많은 정보를 쏟아내면서 우리에게 전에 볼 수 없었던 도전을 가할 것이다. 이 두 조건의 협공 속에서 미디어 리터러시와 디지털 시민성의 수준을 올리지 못한다면 폭로 위에 또 다른 폭로가 덮치는 쓰나미를 맞으며 정보 포퓰리즘에 우리 사회는 계속 표류할지도 모른다. 김은미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2024-11-20

[김현기의 시시각각] 공짜 골프는 없다

아베와 골프로 관계 튼 건 맞지만 교묘히 대미 투자, 고용창출 요구 골프는 덤, 핵심은 '딜 거리' 마련 #1 50만 엔(당시 환율로 약 520만원)짜리 일본 혼마제 금딱지 골프 드라이버를 선물받은 트럼프는 신났다. 상자에서 채를 꺼내더니 바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베 일본 총리 일행을 배웅하는 엘리베이터 안. "그런데 총리는 골프 핸디가 얼마?"(트럼프), "난 18(스코어 90). 도널드는 최고기록이 얼마?" "66. 우리 다음에 꼭 같이하자고. 팜비치도 좋고, 도럴(마이애미)도 좋고, 아니면 턴베리(스코틀랜드)도 좋고…." 2016년 11월 17일 트럼프타워를 방문한 아베와 트럼프의 회동에 배석했던 마이클 플린 전 국가안보보좌관이 털어놓은 이야기다. 골프 관련 이야기 하나 더. 아베가 생전에 털어놓은 비화다. "트럼프와의 첫 골프 라운드의 1번 홀 티샷 때 내 인생에서 가장 긴장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인생 최고의 샷이었다. 230야드. 스코어 91로 트럼프에게 졌지만, 생애 최고의 라운드였다. 트럼프와 인간관계를 구축하는 데는 20번 식사하는 것보다 골프 한 번이 훨씬 효과적이다" "트럼프는 드라이버도, 우드도 하여간 세게 친다. 거리도 많이 나간다. 그래서 난 화이트 티, 트럼프는 뒤의 골드 티에서 쳤다. 무엇보다 놀란 건 퍼팅 실력. 기가 막혔다. 일단 무조건 홀컵을 지나가게 쳤다. 그러면서 '내 인생과 같다'고 하더라. 일단 강하게 밀고 나가는 그의 성격과 골프 스타일이 똑같더라. 그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2 하지만 '골프 외교'에는 대부분 '꼬리표'가 있었다. 라운드 예정 2주 전인 2017년 1월 28일 트럼프가 아베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요즘 워싱턴은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다. 이런 날에 골프하는 X은 없다." 순간 아베는 "아, 골프하자는 이야기는 역시 인사치레였구나"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후나바시 요이치, 『숙명의 아이』 13장). 트럼프의 이어지는 말. "하지만 미 남부에 더 좋은 내 골프장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도록! 그건 그렇고, 토요타 자동차가 멕시코에 미국 수출용 승용차를 생산할 용도의 공장을 10억 달러 투자해 건설하겠다고 하던데…. 이거 미국에 건설하는 쪽으로 바꿔 주면 안 되나? 신조가 '미스터 토요타'에게 직접 좀 이야기해 봐." 아베는 엿새 후 토요타 사장과 극비리에 만났다. 그리고 토요타는 "미국에 향후 5년간 10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멕시코 투자액의 무려 10배였다. 2월 10일 정상회담 공동 발표문에도 "(일본 기업이) 미국에서 고용을 100만 명 창출한다"는 문구가 들어갔다. 공짜 골프는 없었다. 아베는 기꺼이 그 돈을 냈다. 골프를 안 했어도 내야 할 돈이라 생각했을 수도 있다. #3 현 상황을 보면 한·미·일 관계 기상도는 '흐림'이다. 우선 미국. 트럼프는 초반에 확 내 편으로 끌어들이지 않으면 동맹이고 뭐고 없다. 그런데 한국과 일본 모두 이번에 조기 회동에 실패했다. 트럼프는 바이든처럼 "한국과 관계를 개선하라"고 일본에 촉구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예측 불가다. 2019년 하노이 회담이 결렬됐음에도 김정은에게 "에어포스 원으로 평양에 데려다 줄까?"라고 했던 그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정치적 기반도, 지지율도 시원찮은 이시바 총리는 트럼프와 밀당할 재주도, 유연성도 별로 없다. 사실 아베가 트럼프와 가까웠기에 트럼프의 주한미군 철수 본능을 적극 막아준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제 일본엔 아베가 없다. 한국은 더하다. 트럼프의 한국에 대한 거리감과 한국의 트럼프에 대한 반감이 대충돌할 가능성이 크다. 마지막으로 다시 '골프 외교'. 물론 연습도, 준비도 좋지만 그건 결정된 뒤 해도 된다. 아베도 그랬다. 오히려 미스샷을 연발하고 모래로 나자빠지는 '벙커 굴욕' 뒤 트럼프와 더 친해졌다. 골프는 덤이다. 중요한 건 트럼프와 뭘, 어떻게 주고받을지다. 기업들마다 어렵다고 아우성이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정부 차원의 다른 묘책을 시급히 궁리해야 하지 않나. 어차피 앞으로도 공짜 골프는 없다. 김현기(luckyman@joongang.co.kr)

2024-11-20

[김현철의 퍼스펙티브] 코로나 방역 성공했다고? 경제·과학 무시한 결정 아쉬워

한국의 코로나19 방역정책 최선이었나 2023년 5월, 정부는 “위대한 국민의 승리”라 자찬하며 코로나19팬데믹 종료를 선언했다. 많은 사람이 희생하고 헌신했지만, 우리나라의 코로나19 정책에 칭찬만 하기엔 찜찜하다. 자기 반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감염병 위기관리 정책의 목표는 무엇이어야 하나? 감염자·사망자 수를 최대한 낮추는 것이 아니다. 학생들의 등교를 제한하고, 민간시설 운영을 막는 사회적 거리두기엔 미래세대의 교육 기회 박탈과 경제 손실이 뒤따른다. 이 또한 코로나19 감염처럼 사람을 아프게 하고 죽게 한다. 감염병 관리 정책의 목표는 ‘감염 자체로 인한 손실과 방역 정책의 부작용으로 생기는 손실의 합을 최소화하는 것’이어야 한다. 등교제한 조치 방역 효과 전무해 고교 학습 불평등 증가로 이어져 단발성 현금 지원과 대출 지원은 자영업 피해 제대로 보상 못 해 시민 자율성 무시한 일방적 방역 보건·경제 종합적 고려했어야 독일·캐나다·일본이 성공적인 이유 우리는 코로나 사망을 잘 막았는가? 〈그림 1〉에서 보듯 인구 100만명당 코로나19 사망자 수는 중국은 불과 100명 이하인 반면, 대한민국은 약 700명, 미국은 3400명 수준이다. 하지만 이는 좋은 지표가 아니다. 코로나에 걸려서 기저 질환이 악화돼 사망한 경우, 어떻게 보고할 것인지 국가마다 기준이 다르다. 가령, 중국의 경우는 코로나 감염으로 인한 사망을 최소한으로 보고하고자 코로나 감염 진단 이후 폐렴·호흡부전이 발생한 경우만을 코로나 사망자로 집계했다. 보다 정확한 통계는 ‘초과 사망’이다. 초과 사망은 2020년 1월 1일 이전까지 각국의 인적구성 등을 고려해 코로나 팬데믹이 없었을 경우를 가정한 2020~2023년의 사망자 수를 추정하고, 이를 실제 사망자 수와의 차이로 계산한다. 사망 원인을 추정하는 방식은 나라마다 다르지만, 사망 자체는 통계적 오류가 적으므로 초과 사망이 코로나 팬데믹의 영향을 가장 잘 보여준다. 〈그림 2〉는 2023년 5월 기준 국가별 누적 초과사망률이다. 초과사망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나라보다 독일·캐나다·일본·덴마크 등이 더 성공적이었다. 우리나라의 초기 코로나 대응 전략은 빠른 검사, 추적, 치료로 구성된 소위 3T 정책이었다. 이 전략은 초기에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둬, 극단적인 봉쇄 조치 없이 사회적 거리두기로 감염자 수를 낮은 수준으로 유지했다. 그러나 개인정보의 지나친 침해라는 비판이 있다. 개인의 이동 경로가 공개돼 감염자들이 신상털이 및 사회의 비난에 시달렸다. 공공 보건을 이유로 인권을 제한하는 상황에서, 국제인권법은 그 조치가 법적이고, 필요하며, 적절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미래에 또 다른 전염병이 생겨도 우리가 같은 방식을 사용할 것인지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 과학적 증거 나왔는데 등교제한 지속 코로나 방역정책의 최대 피해자는 학생들과 소상공인·자영업자들이었다. 등교 제한은 코로나 감염을 줄일 것이라 추측했지만, 놀랍게도 감염 예방 효과가 전혀 없었다. 가령, 독일은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0년 가을, 주별로 개학일이 최대 한 달 정도 차이가 났다. 이 점을 이용해 등교가 코로나 유행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니, 등교가 코로나 감염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 이유는 아이들이 학교 대신 가는 장소에서 감염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학교 대신 친구 집, 학원, 놀이터에서 놀고, 편의점에서 간식을 먹는다. 학교나 다른 곳이나 감염 확률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방역의 실효가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교문은 오랫동안 닫혀 있었다. 필자는 2020년 겨울부터 이를 여러 차례 지속해서 언론에 알렸으나 정책에 반영되지 못했다. 코로나 사태 초기 바이러스에 대해 잘 알지 못할 때, 등교제한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등교제한이 효과적이지 않다는 과학적 증거가 나온 다음에도 이를 오랫동안 지속하는 것은 부적절했다. 실제로 〈그림 3〉에서 보듯 우리나라의 등교제한 조치는 다른 선진국에 비해 길었다. 필자는 등교 제한이 한국 학생들의 학업성취 및 불평등에 미친 영향을 연구했다. 한국 고등학교의 2020년 평균 등교 일수는 2019년 법정 등교 일수 190일에 크게 못 미친 104일이다. 실제 등교 일수는 학교에 따라서 50일에서 150일까지 학교별 차이가 컸다. 이렇게 등교 일수가 코로나 유행의 정도에 따라서 지역별로, 또 같은 지역 안에서도 학교별로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을 이용해 분석했다. 연구 결과, 등교 제한 조치가 고등학생의 학력 결손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나 학습 불평등을 증가시켰다. 등교제한의 부정적 영향이 공부를 못하던 학생들에게 집중됐기 때문이다. 행정편의주의적 자영업자 지원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의 경제 손실은 코로나 발생 자체 때문인지 사회적 거리두기의 부작용 때문인지 정확하게 측정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실업, 소득 감소 등 사회적 거리두기의 경제적 부작용이 존재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카드 데이터를 확인해본 결과 2020년의 카드 매출은 영유아 교육시설 50%, 숙박시설 38%, 요식업 및 미용업은 20%가 줄었다. 자영업자 중 가장 큰 비중인 요식업의 중위값 매출액은 2019년 7600만원, 이윤이 2400만원 정도다. 고정비용의 비율이 높아 매출이 25% 줄어들면, 이윤은 절반으로 떨어진다. 요식업자의 소득이 월 200만원에서 100만원으로 줄어든 셈이다. 우리나라의 지원 정책은 예측하기 어려운 단발성 현금 지원과 과도한 부채 우려가 큰 대출에 주로 의존했다. 반면 다른 선진국은 매출 감소 정도에 따라 차등 지원하는 방식을 주로 채택했다. 가령, 독일은 매출이 70% 이상 감소할 경우 임대료 같은 고정비용을 최대 90%까지 지원했다. 일본은 1년 중 한 달이라도 매출이 50% 이상 줄어들면 일정한도 내에서 12개월치 매출 감소분을 지원했다. 반면, 우리는 일회성 지원을 네 차례 시행했으며, 지원 방식과 기준, 액수(350만~650만원)는 매번 달라졌다. 외국들이 지원 대상자에 대한 실질적 보호에 중점을 둔 반면, 한국은 행정 편의주의에 기반했다고 볼 수 있다. 마스크 의무 착용 과도하게 길어져 코로나 팬데믹 기간 정부가 시민의 삶에 깊숙이 개입하는 것이 일상화됐다. 시민의 삶의 규칙을 정부가 정하고 따를 것을 강제했다. 이런 규제 일변도의 정책을 2년 이상 지속하며 시민 자율성에 큰 흠집을 냈다. 우리는 방역 수칙을 지켰는지 서로 감시하며, 코로나 걸린 사람을 죄인 취급했다. 방역 수칙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국가의 개입은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것만 최소한의 것으로 강제하고, 나머지는 피해가 있을 수 있을지라도 시민 자율성의 공간으로 열어둬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사람의 모든 행동을 법으로 규정할 수 없고, 빈자리를 윤리가 메워주는 것처럼. 악성 규제의 대표적 예로 2022년 9월까지 이어진 실외 마스크 의무 착용이다. 실외에서는 바이러스 전파 가능성이 극도로 낮다. 그런데 국가가 이를 강제한 이유는 실외에서 마스크를 하지 않으면 실내에서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황당한 우려 때문이었다. 장기간에 걸친 실내 마스크 착용 의무 조치도 유감스럽다.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실내 마스크 의무를 가장 늦게 폐지한 나라다. 이는 사실 보건복지부가 접종완료자의 치명률을 계절독감 이하 수준으로 판단한 2022년 초에 이뤄졌어야 했다. 계절독감이 유행하던 시절에 단 한 번도 마스크를 의무 착용하지 않았다. 실내마스크 착용 의무는 2023년 1월, 의료기관 및 장기요양시설에서는 2024년 5월이 돼서야 해제됐다. 반면 일본은 정부 차원에서 마스크 의무화를 시행한 적이 없었다. 국민의 자발적 참여에 맡겼다. 자발적인 착용과 법적인 강제 착용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미국, 영국, 덴마크 등 마스크 착용 의무 조치가 있었던 대부분의 국가도 오미크론이 우세종으로 등극한 2022년 상반기에 마스크 착용 의무를 모두 폐기했다. 마스크 착용에도 사회적 비용이 있다. 영유아 언어 발달 지연이 대표적인 문제다. 아이들은 말소리를 듣는 것 외에 입 모양을 보면서 언어를 배운다. 얼굴의 표정, 눈빛, 인상 등을 통해 비인지 기능을 키운다. 그러나 마스크 착용은 이를 크게 저해했다. 2022년 3월 1일부터 시작된 방역 패스도 대표적인 과도한 조치였다. 백신 미접종자가 사실상 다중이용시설을 사용하지 못하는 가혹한 조치였다. 당시 우리 성인 국민의 80~90%가 이미 백신을 맞았거나 맞고자 하는 사람들이었다. 백신 접종을 꺼리는 10~20%에는 단순 백신 거부자도 있지만 백신 부작용이 심했던 사람도 포함돼 있다. 이러한 소수에 대한 배려가 없었다. 헌법에 명시된 백신을 맞지 않을 자유, 마스크를 쓰지 않을 자유가 우리에겐 없었다. 그리고 소수이지만 백신에 의한 죽음이 있다. 국가 책임의 차원에서 이는 코로나에 의한 죽음과 등가가 아니다. 백신 부작용으로 인한 죽음은 국가의 적극적인 동원의 결과이고, 코로나 감염에 의한 것은 자연적인 것으로 국민은 인식한다. 즉 죽음에 대한 국가 책임 수준의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렇기에 방역패스 도입에 세심하고 배려 있는 정책설계가 아쉬웠다. 경제학 전공자가 이끈 싱가포르 방역 싱가포르는 2021년 6월 아시아에서 최초로 대규모 확진자 동선 파악, 검사, 격리, 집단검사 등의 기존 방역 방식을 포기하고 일상생활 회복으로 전환했다. 그 뒤로도 여러 차례 감염자 수가 크게 늘었으나, 낮은 치명률을 유지하며, 이러한 기조를 포기하지 않았다. 등교도 아시아 국가에서 가장 먼저 실시했다. 이러한 싱가포르의 비결은 의사결정을 보건과 경제를 다루는 공무원이 주도했기 때문이다. 관련 부처 합동 대책기구에는 재무장관, 보건장관, 통상산업장관이 지도부가 됐는데, 세 명 모두 경제학 전공자였다. 그렇기에 싱가포르는 보건적 측면과 사회경제적 피해까지 고려한 종합적인 판단을 할 수 있었다. 팬데믹 대응은 국가 운영 체계에 따라 달라졌다. 우리나라는 다른 선진국에 비해 시민 자율성보다는 국가 주도, 과학에 근거하기보다는 책임 회피적인 결정이 많았다. 마냥 자화자찬하기에는 부끄러운 점이 많다. 김현철 연세대 의대·홍콩과학기술대 경제학과 교수, 연세대 인구와인재연구원 원장 참고 논문 Isphording, Ingo E., Marc Lipfert, and Nico Pestel. "Does re-opening schools contribute to the spread of SARS-CoV-2? Evidence from staggered summer breaks in Germany." Journal of Public Economics 198 (2021): 104426 Hahn, Youjin, Hyuncheol Bryant Kim, and Hee-Seung Yang. "Impacts of In-Person School Days on Student Outcomes and Inequality: Evidence from Korean High Schools During the Pandemic." Deoni et al. (2022). The COVID-19 Pandemic and Early Child Cognitive Development: A Comparison of Development in Children Born During the Pandemic and Historical References. medRxiv : the preprint server for health sciences, 2021.08.10.21261846.

2024-11-20

[정용수의 평양, 평양사람들] 심화하는 북·러 밀착, 김정은-트럼프의 브로맨스는 끝났나

최선희 북한 외무상이 지난달 28일부터 9박10일 일정으로 러시아를 찾았다. 러시아 방문의 표면적 목적은 북·러 외교 장관의 첫 전략 대화였다. 양측이 지난 1일 진행한 전략 대화에서 어떤 논의를 했는지 구체적인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다만, 회의 직후 북한은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을 이행하고, 주요 국제 문제들에 대한 의견 교환에서 현 국제 정세에 대한 쌍방의 평가가 일치했다”고 전했다. 또 대외 정책 기관들 사이의 대화를 이어가기로 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 국경일(4일)임에도 최 외무상을 대통령궁으로 초대해 1분여 동안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누는 등 친밀감을 보였다. 북·러 첫 전략 대화, 친선 과시 푸틴은 휴일에도 최선희 면담 김정은, 하노이 회담 충격 여전 “제재 풀려면 대화밖에” 시각도 75년 만에 소환된 김일성 그런데 최 외무상의 러시아 방문 길에서 눈길을 끈 건 따로 있었다. 최선희와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부 장관이 전략대화에 앞서 모스크바의 야로슬라브역을 찾은 장면이다. 1949년 3월 3일 김일성 당시 내각 수상의 첫 러시아(옛 소련) 방문을 기념해 동판을 설치하고 제막한 행사였다. 김일성은 당시 스탈린 초상화를 자개로 조각한 꽃병을 비롯해 26종 39점의 선물을 열차에 싣고 스탈린을 찾았다. 김일성은 스탈린 공산당 서기장과 회담하고, 무기와 미화 4000만 달러(금가치 기준 현재 12억8000만 달러, 약 1조7815억원)의 차관, 북한 군 간부들의 소련 사관학교 위탁 교육 등의 군사협력을 약속했다. 당시 김일성의 모스크바 방문은 6·25전쟁을 위한 준비 차원이었는데, 이후 75년 동안 아무런 기념을 하지 않다가 이제서야 김일성 조명에 나선 것이다. 북한과 러시아의 최근 군사 협력이 새삼스러운 게 아니라 대(代)를 잇는다는 점을 과시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보름 넘도록 미 대선 결과 침묵하는 북 북한은 최고지도자를 만난 사람을 ‘접견인’으로 부르며 특별 대우를 한다. 지난 5일 실시한 선거에서 승리한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은 1기 행정부 시절 김정은을 세 차례 만난 ‘접견인’이다.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차 정상회담이 불발된 뒤에도 두 사람은 수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친분을 과시했다. 이를 두고 ‘브로맨스’라는 표현도 나왔다. 트럼프 당선인은 이번 선거를 치르며 김정은과 개인적 친분을 내세웠고, 자신이 집권했을 때 미국을 향한 북한의 위협은 없었다고 자랑했다. 북한이 지난달 31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발사했는데, 이를 두고 김정은이 트럼프 후보를 돕기 위한 목적이라거나, 트럼프 후보가 당선될 경우 북·미 간 직거래가 성사될 것이란 분석이 나왔다. 하지만 트럼프 당선인을 향한 북한의 반응이 아직은 차갑다. 2016년 트럼프 전 대통령의 첫 당선 때는 열흘 만에 한국을 비난하는 노동신문 기사에 그의 당선 소식을 슬쩍 끼워 넣었지만, 이번에는 선거가 끝난 지 보름째인 20일 현재 북한은 침묵하고 있다. 트럼프 당선인에 대한 김정은의 속내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는 지난 15일 진행한 대대장 및 대대정치지도원 대회에 참석해 미국을 ‘미제’(미국 제국주의)로 칭하거나 “미국의 가장 적대적인 적수이며 가장 오랜 교전국인 우리 국가”라고 표현했다. 지난해 말 한국을 적으로 규정한 김정은이 트럼프 전 대통령의 당선 이후 미국을 적이라는 개념으로 언급한 것이다. 더구나 김정은은 이 자리에서 “핵무력을 중추로 하는 국가의 자위력을 한계 없이, 만족 없이, 부단히 강화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북·미 대화를 통한 비핵화라는 서방의 기대에 끼얹은 찬물이다. 북한이 하노이 회담 결렬 뒤 “분명한 것은 미국이 이번에 황금 같은 기회(a golden opportunity)를 날려 버렸다는 것”이라던 당시 최선희 외무성 부상의 주장이 ‘뻥카’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별장 앞마당을 미사일 발사장으로 북한은 올해 들어 극초음속 미사일과 순항미사일, 초대형 방사포 동시다발 발사 등 21차례의 미사일 공개발사에 나섰다. 이 가운데 1월 14일과 4월 2일 쏜 극초음속 미사일과 지난달 31일 발사한 화성-19형 미사일은 평양시 삼석구역에 있는 김정은 특각(별장)의 담 너머 공터에서 발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삼석구역의 특각은 북한의 최고사령부 벙커 인근에 골프장 3홀을 갖춘 북한 최고지도부의 휴양소로 알려져 있다. 극초음속 미사일은 음속의 5배 이상의 속도로 기동하며 요격을 피하고, 처음 선을 보인 화성-19형은 7687㎞ 고도까지 81분 56초를 비행해 역대 최장 비행기록을 세웠다. 김정은이 미국을 향한 무력시위를 자신의 특각 앞마당에서 실시한 셈이다. 대놓고 미국을 위협하는 특각에서 미사일을 쏠 땐 김주애로 알려진 딸도 동행했다. 결과적으로 최근 북한의 움직임은 러시아와의 밀착에 선대 김일성을 소환하고, 미국을 향한 대립각에 다음 세대의 상징인 딸을 동원한 셈이다. 김 위원장은 자신이 야심 차게 나섰던 하노이 회담의 충격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미국과 관계 개선을 통해 대북 제재 완화를 시도하다 좌절을 맛본 뒤 큰 물줄기를 러시아로 돌린 게 이를 보여준다. 김 위원장이 트럼프와 브로맨스 회복에 나서기보다는 당분간 러시아를 향한 손짓을 이어갈 가능성이 크다. 북한은 러시아와 밀착함으로써 미국·중국이 시샘하기를 바랄 수 있다. 어쩌면 김정은은 트럼프 당선인과 개인적인 친분과는 별개로, 자신이 하노이에서 당한 ‘수모’를 철저히 ‘계산’(되갚음)하려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와 중동의 전쟁으로 국제 질서가 재편하는 분위기지만, 전쟁이 끝나면 다음 순서는 북한이다. 최근 이란이 제재를 피하기 위해 고농축우라늄 생산을 중단하겠다는 뜻을 국제원자력기구에 밝혔다고 한다. 트럼프 폭풍을 우려했다는 관측이 나온다. 북한으로서도 정답은 트럼프 당선인과 철저한 ‘계산’이 아닌 브로맨스 회복을 통한 대북 제재 해제다. 내년 1월 취임하는 트럼프 당선인에게도, 김 위원장에게도 시간은 4년뿐이다. 정용수(nkys@joongang.co.kr)

2024-11-20

[이지영의 문화난장] ‘정년이’로 뜬 여성국극, 국가무형유산 되려나

시청률 16.5%의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한 드라마 ‘정년이’ 덕에 여성국극 재조명 바람이 뜨겁다. 국가유산진흥원이 다음달 3일 서울 강남구 국가무형유산 전수교육관에서 공연하는 여성국극 ‘선화공주’는 일찌감치 티켓이 동나 2회 추가 공연까지 하게 됐다. 팔순, 구순을 넘긴 1, 2세대 국극배우들을 중심으로 여성국극의 국가무형유산 지정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 시대를 대표한 문화유산인 만큼 소멸을 막기 위해 국가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2022년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인기에 힘입어 그해 10월 대한민국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경남 창원 동부마을 ‘팽나무’ 사례를 떠올리게 한다. “국악 대중화 기여” 지정 요구 “한때 유행 장르” 반대의견도 실험정신·유연성이 핵심 가치 전통 재현·복제 머물러선 안돼 '꽃미남' 남장 배우에 아이돌급 팬덤 드라마 ‘정년이’가 재현해낸 여성국극 무대는 근사했다. 심금을 울리는 창(唱)과 춤·연기, 화려한 무대 장치와 분장·의상이 어우러져 이런 예술 장르가 있었는지도 몰랐던 젊은 세대까지 매료시켰다. 하지만 여성국극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해야 하는지에 대해 전문가들의 의견은 엇갈린다. “국악 대중화에 기여했다. 문화재(국가유산) 지정이 되는 건 시간 문제”라는 긍정론에서부터 “여성국극만 따로 떼어놓을 순 없다. 창극과 함께 지정돼야 한다”는 절충론, “한때 유행한 대중문화의 한 장르였을 뿐, 이미 명맥이 끊겼다”란 비판론까지 찬반 스펙트럼이 넓다. 여성국극은 판소리를 근간으로 하는 무대예술이다. 여성만 출연해 남장 연기를 펼친다는 것이 창극과의 차별점이다. 1948년 판소리 명창 박록주(1905∼1979)가 만든 여성국악동호회에서 출발했다. 여성국극은 195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 전까지 국악 공연은 나이 많은 판소리 명창 중심의 무대였다. 여성국극의 여성 배우들이 연기하는 ‘꽃미남’ 캐릭터는 21세기 아이돌 같은 팬덤을 만들어냈다. 판소리 다섯 바탕에 매여있던 창극과 달리 여성국극은 설화와 역사에 뿌리를 둔 창작극부터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를 번안한 ‘햇님과 달님’, ‘로미오와 줄리엣’ 번안극 ‘청실홍실’ 등 다양한 레퍼토리를 선보였다. 여성 배우가 남성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이 세계 공연사에 유례없는 일은 아니다. 서양 오페라의 ‘바지 역할(트라베스티)’가 그렇고, 일본의 다카라즈카, 중국의 월극이 그렇다. 하지만 우리의 여성국극처럼 짧은 전성기를 누리고 나서 쇠락해버린 경우는 흔치 않다.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의 케루비노는 여전히 바지 역할의 몫이고, 다카라즈카는 일본 공연계의 주류로 자리잡았다. 월극은 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까지 했다. 여성국극 쇠퇴의 가장 큰 요인으로는 1960년대 이후 대중화된 TV와 영화 등 문화 환경의 변화가 꼽히지만, 내부의 한계도 분명 있었다. 무엇보다 남역배우로 이름을 날린 임춘앵(1923∼1975)에 대한 지나친 의존도가 컸다. 그가 개인사와 건강 등의 이유로 스타성을 잃으면서 여성국극도 내리막길을 걸었다. 스타를 계속 만들어내는 교육 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족 단위의 수공업적 생산체제로 극단을 운영하며 장기적인 안목과 계획을 갖지 못했던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상업적 성공 이후 돈벌이를 좇아 단체가 난립하면서 공연의 질도 점차 떨어졌다. 판소리 본질 흐린 저질 통속 취급받아 여성국극의 전성기가 한국전쟁 여파로 문화계에서 남성들의 활동이 약화됐던 시기였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1950년대 중반 이후 국악계는 다시 남성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됐다. 1962년 국립창극단의 전신인 국립국극단이 혼성으로 창단된 것은 여성국극의 몰락을 재촉하는 결정타였다. 창극의 전통 회복이 시대적 당위로 떠오르며 여성국극은 판소리의 본질을 흐린 저질 통속 예술 취급을 받기에 이른다. 여성국극은 결국 ‘유리천장’을 넘지 못한 채 꺾이고 만 것이다. 드라마 ‘정년이’의 원작은 2019∼2022년 연재됐던 동명의 웹툰이다. K컬처의 신동력으로 꼽히는 웹툰이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한 여성국극을 다시 대중 앞에 끄집어냈다는 건 우연이 아닐지 모른다. 여성국극의 가치는 전통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다양하게 변주해낸 실험정신과 유연성에 있다. 화려했던 과거의 재현이나 복제에 머무르면 그 의미가 희석된다. 여성국극의 영속성을 찾는 방법이 국가문화유산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선 좀더 숙고가 필요하다. 드라마 인기에 떠밀려 할 일은 더욱 아니다. 이지영(jylee@joongang.co.kr)

2024-11-20

[시론] 트럼프노믹스가 촉발한 ‘3고·3저 쓰나미’

트럼프 2기를 앞두고 한국경제에 고금리·고환율·고물가 등 ‘3고(高)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다. 트럼프 당선인이 보편 관세 10~20%, 대중국 관세 60%를 부과하면 미국의 수입물가가 상승하고 잡혀가던 인플레이션이 다시 튀어 오를 수 있다. 게다가 법인세 인하까지 단행하면 늘어나는 재정적자를 메꾸기 위해 국채 발행이 늘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국채수익률도 상승할 것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는 금리 인하에 신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미국 달러화는 주요국 통화 대비 강세를 보이고, 원·달러 환율은 한때 1406원까지 치솟았다. 이는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와 2008년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 때에나 보던 현상이고, 미국 Fed의 금리 인상이 한창이던 2022년 9월 이후 처음이다. 금리·환율·물가 높아 경제 시름 주가·수출·성장 하락도 큰 부담 집값 거품 빼고 가계부채 축소를 환율 상승은 수입 물가 상승을 동반하기 때문에 잡혀가던 한국의 물가도 다시 뛸 가능성이 있다. 외환시장과 물가가 불안한 상태에서 한국은행은 쉽게 금리를 낮출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3고 쓰나미’가 전부는 아니라는 점이다. 3고 쓰나미보다 더 무서운 ‘3저(低)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다. 저주가·저수출·저성장이 그것이다. 우선 당장 주가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코스피(KOSPI)는 트럼프 당선 이후 하락세를 보였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한국 주가가 관세 폭탄의 직격탄을 맞을 거라는 중국뿐 아니라 일본·대만 주가보다 더 많이 빠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트럼프의 관세 폭탄은 전체 수출의 18%를 미국에 수출하는 한국에 큰 타격을 줄 것이다. 중국으로 가는 한국의 중간재 수출 감소뿐 아니라 중국 내수경제 위축에 따른 한국의 소비재 수출도 위축될 것이다. 수출이 타격을 받으면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경제 성장률이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얼마 전 한국개발원(KDI)은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2.2%로 석 달 전의 전망치보다 0.3%포인트 내렸다. 아울러 내년 성장률 전망치를 2.0%로 내려 잡았다. 이런 전망은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관세율 인상이 2026년에나 시행될 거라는 전제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 2기는 1기와 달리 취임과 동시에 무더기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 시작될 것이다. 관세 폭탄도 내년에 당장 터질 것이다. 한국경제는 KDI 전망보다 훨씬 심각한 경기 불황 국면에 접어들 가능성이 커 보인다. 3고 쓰나미와 3저 쓰나미는 트럼프노믹스(Trumpnomics)가 촉발했지만 이것이 근본 원인은 아니다. 근본 원인은 한국경제가 ‘빚으로 지은 집’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 시절에 서울과 수도권의 아파트 가격은 2~3배 폭등했다. 2022년 후반 들어 집값이 좀 내려가는 듯하자 윤석열 정부는 각종 정책 대출을 내놓으며 집값을 끌어올렸다. 이 바람에 서울과 수도권 집값이 올해 들어 다시 크게 뛰었고 가계부채도 덩달아 급증했다. 가계 자산의 79%가 부동산에 묶여있고, 가계 부채는 가처분소득의 149%나 된다. 올해 신규 가계 부채의 80% 이상이 주택담보대출이다. 빚이 너무 많아 소비 여력이 약하고, 가계 자산이 대부분 부동산에 몰려 있어서 주식에 투자할 여력이 작다. 이 때문에 자금 조달이 어려운 기업들이 미래 먹거리 투자를 할 수 없으니 한국경제의 성장잠재력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집값이 많이 올라 주거 사다리가 사실상 끊어진 상태에서 젊은이들이 결혼과 출산을 힘들어한다. 동시에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진행 중인 인구 고령화도 성장잠재력을 낮추는 중요한 요인이다. 한국경제를 사람에 비유하면 조로증에 고혈압·콜레스테롤까지 있는 당뇨 합병증에 걸린 심각한 위기 상태다. 정부는 위기를 인정하고 정책을 대전환해야 한다. 부동산 거품을 빼고, 가계 부채를 줄이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소비가 늘고, 주가 밸류업이 가능하다. 그래야 투자도 늘고, 좋은 일자리도 늘어날 것이다. 미국처럼 한국도 첨단기업을 한국으로 불러들이는 리쇼어링(Reshoring) 정책을 대대적으로 추진해 좋은 일자리를 늘려야 한다. 그래야 출산율이 올라가고 인구 고령화 속도도 늦춰 지속가능한 성장이 가능하다. 어려울 때일수록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현훈 강원대 국제무역학과 교수·제4의길연구소 대표

2024-11-20

[손해용의 시선] 더 많은 ‘고삼동풍’이 필요하다

취업준비생 사이에서는 ‘고삼동풍’이라는 말이 익숙하다. 고려아연·삼천리·동서식품·풍산의 앞글자를 딴 조어(造語)다. 굴지의 대기업은 아니지만, 이들 못지않은 근무여건과 고용 안정성으로 취준생들의 지지를 받는 ‘알짜’ 기업들을 뜻한다. 사업보고서로 직원의 평균 근속연수와 연봉을 확인할 수 있는 3곳을 살펴보면, 2022년 말을 기준으로 ▶고려아연 12년8개월, 1억249만원 ▶삼천리 16년4개월, 9500만원 ▶풍산 17년6개월, 8300만원 등으로 높은 수준이다. 한때는 ‘신의 직장’이라는 공기업에 빗대, ‘신도 모르고 지나치는 직장’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근무여건 좋은 중견기업 늘리고 항아리형 산업구조로 바꿔야 청년 ‘일자리 미스매치’ 해결 고삼동풍 얘기를 꺼낸 것은 ‘일자리 미스매치’에 따른 한국 사회의 청년 실업 문제가 걱정돼서다. 많은 전문가는 근본 원인으로 청년이 원하는 임금 수준과 근로 조건을 갖춘 일자리가 부족한 산업구조를 지적한다. 중소기업은 일할 사람을 못 찾아 애를 먹고 있지만, 처우 차이가 워낙 크다 보니 청년층은 어떻게든 대기업 취업에 사활을 건다. 여기에 실패한 젊은이 중 일부는 장기 백수로 전락한다. 고삼동풍처럼 임금, 근로 조건, 성장성 등에서 대기업에 견줄만한 중견기업들이 많아진다면 문제 해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한국의 청년 일자리 문제는 심각하다. 지난달 청년층(15~29세) 실업률은 5.5%로 전 연령대 평균(2.3%)의 배를 훌쩍 넘는다. 저출산·고령화로 청년층 인구는 줄고 있는데 일자리를 갖지 못한 청년은 되레 늘었다. 특히 2018년까지만 해도 20만 명대였던 ‘그냥 쉬는’ 청년이 지난달에는 41만8000명으로 급증했다. 한창 활기차게 일할 청년들 가운데, 아예 일자리를 찾으려고도 하지 않는 이가 5%에 달한다는 건 한국 경제의 미래에 치명적이다. 힘든 일을 꺼리고 대기업만 고집하는 청년층의 직업관을 탓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하지만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연봉 격차는 20대 1.6배에서 ▶30대 1.9배 ▶40대 2.2배 ▶50대 2.4배로 나이가 들수록 벌어진다. (통계청 ‘2022년 임금근로 일자리 소득 결과’) 어떤 일자리에서 시작하느냐에 따라 결혼·출산, 내집 마련, 자녀 교육, 노후 등이 달라지는 마당에 청년층만 다그칠 순 없는 노릇이다. ‘9988’로 대변되는 한국 산업의 구조적인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 중소기업이 대한민국 기업의 99%, 일자리의 88%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을 상징하는 숫자다. 실제 한국은 소수 대기업이 산업 생태계의 최상단을 차지하고, 수많은 중소기업이 하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호리병 구조다. 호리병 입구가 좁다 보니 청년이 선망하는 일자리 찾기는 바늘구멍이다. 반면 두툼한 하단을 이루고 있는 중소기업은 청년의 눈높이를 맞추지 못한다. ‘일자리 미스매치’가 발생하는 근본 원인이다. 이를 항아리형으로 바꿔야 한다. 경쟁력을 갖춘 중견기업·중소기업·유니콘벤처 등을 키워 굵은 가슴과 허리를 가진 산업 생태계로 만들자는 것이다. 고삼동풍처럼 우수한 급여·복지·근무환경을 갖춘 중견·중소기업이 늘면, 제2·제3의 고삼동풍으로 흘러들어갈 청년 인재도 많아질 것이다. 이는 성장 동력을 잃어가는 한국 경제에도 지원군이다. 중소기업 생산성, 낙후된 서비스 산업을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 수준으로만 높여도 잠재성장률을 연간 0.7~1%포인트 올릴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이를 위해선 기업을 옭아매는 각종 규제를 혁파하고,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갖추는 게 우선이다. 적어도 중소기업이 더 성장할 경우 발생하는 추가 규제 부담 때문에 성장을 미루는 ‘피터팬 증후군’은 없애야 한다. 청년 고용 창출, 해외 진출 지원, 연구개발(R&D) 확대 등을 촉진할 정부의 정책·예산 지원도 필요하다. 대-중소기업 간 ‘갑을 문화’도 개선해야 한다. 그래야 혁신적 중소기업들의 활동 공간이 넓어지고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 청년 일자리 위기는 간단히 볼 일이 아니다. 청년 실업과 경기 침체의 악순환 고리가 심각하게 맞물려 있어서다. 지금과 같은 미스매치가 심화하면 산업의 이중구조는 더욱 굳어지고, 고용불안·인력난으로 저성장이 고착화한다. 장기적으로는 미래 인적 자원인 청년층을 활용하지 못해 한국 경제의 생산성이 떨어지는 부작용도 우려된다. 결국 해법은 탄탄한 중견·중소기업을 키워 청년 일자리 창출과 내수시장 활성화라는 양대 축을 동시에 강화하는 것이다. 새로운 산업에 천문학적 금액을 투자하는 것보다는, 이미 있는 기업들의 질을 높이는 것이 적은 비용으로 효과를 낼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이다. 손해용(sohn.yong@joongang.co.kr)

2024-11-20

[송길영의 빅 데이터, 세상을 읽다] 인생은 원래 억울한 것?

“고시는 마약과 같습니다.” 온라인 게시판에 오랜 기간 고시 준비를 하다 이제 포기한다는 수험생의 글이 올라왔습니다. 20대 중반부터 8년 가까이 시험을 보아 온 그는 30대를 맞이했습니다. 회계사와 세무사의 1차와 2차를 번갈아 붙고 떨어진 기록들을 남기며 “꽃 같은 내 젊은 날의 성적표”라고 한탄했습니다. 치열했던 노력이 그의 맘 속 실패의 상처로 남을까 걱정하는 위로의 댓글이 게시판을 가득 채웠습니다. 남의 일 같지 않다는 청춘의 공감과 ‘그만둘 수 있는 용기가 대단하다’는 응원은 우리 사회에 가득 찬 당락의 관행에 모두가 상처받고 있음을 짐작하게 해 줍니다. 조직에 의지하려 희망해도 결국 혼자서 살아가는 세상 나 자신이 출발점이자 목적지 의사와 공무원 뿐 아니라 고등학생 래퍼와 트로트 가수까지 시험으로 뽑는 사회에서 살아남는 것은 ‘오징어게임’의 생존확률 456대 1 보다 훨씬 어렵기만 해 보입니다. 경쟁 과다의 세상에서 시험 잘 보는 법을 평생 배운 이들은 실제 삶에 다다르기도 전에 이미 지쳐버립니다. 열심히 노력하여 통과했다 해도 시험으로 익힌 지식이 막상 그리 유용하지 않음을 알게 되어 힘이 빠지는 일도 생깁니다. 주눅 들어 조직 밖으로 나갈 용기를 내지 못하는 사이, 독립된 삶을 원했던 초심은 어느덧 흐려지고 조직 그 자체가 목표가 되는 듯 무리와 동화됩니다. 그 반대편에 선배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토록 원하던 조직에 먼저 들어와 성취의 시기를 밟아 온 그들은 은퇴의 시기가 다가오면 당황한 모습을 숨기지 않습니다. 성공적인 삶을 살아왔다 부러움을 받지만, 아직은 너무나 젊은 내가 이제 누구에게 설명할 수 없는 자연인으로 돌아가는 것이 낯설기만 합니다. 이제는 선배들의 연대기가 그대로 우리들의 삶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선배들의 모습은 멋져 보이기에, 혹은 달리 다른 대안이 없기에 후배들은 더욱 환상처럼 믿고 따랐지만, 마침내 각성은 찾아옵니다. 각성한 이들은 자신만의 길을 찾고 또 만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오랜 기간 공부했던 청춘의 실패는 되려 그의 삶에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지속한 끈기와 그만둘 줄 아는 용기의 성품은 어쩌면 다른 큰 성취의 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한참 동안 그 일을 하다 불현듯 내가 원했던 삶이 아니었다 깨닫는 것보다, 시작하기 전 냉철히 고민하고 새로운 길을 찾는 것이 다행일 수 있습니다. 나보다 큰 무엇인가에 기대고 싶은 마음은 연약하게 태어나 함께 모여 살아남은 우리 종의 특성입니다. 하지만 손 닿을 수 있는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는 행위는 고민을 유예한 것일 뿐입니다. 고민 없는 나의 진로는 입시상담 선생님도, 취업진로 상담실도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나의 목표가 있어야 방향을 알려줄 수 있습니다. 유행하거나 지금 유망한 직업을 경계합니다. 사라진 신분제와 세습되지 않는 직업은 누구나 무엇이든 할 수 있게 허락합니다. 하지만 무엇이든 할 수 있기에 모두가 같은 것을 추구하다 보면, 선택의 축복은 경쟁의 저주로 순식간에 흑화합니다. 선생님도, 선배도 믿으면 안 됩니다. 그의 정답이 나의 정답이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존재하는 정답이 있다면 누군가 이미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학교육을 마친 이들이 수백만 명이나 실직 상태이며, 심지어 직업을 구할 의지도 없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들이 현명한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시류에 떠밀려 가는 것보다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방황하고 있다면 무엇이든 행하기보다 멈추고 생각할 때입니다. 목표를 정하고 움직이지 않으면 오히려 목적지에서 멀어지기만 합니다. 스스로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고 생존을 위한 ‘현행화’를 하지 못하면, 취약한 생명체와 같이 작은 바람에도 상처를 입습니다. 억센 비와 뙤약볕에도 기죽지 않고 자라는 들풀처럼, 삶의 어려움은 비료의 안락한 자양분이 아니라 풍무 속 담금질과 같이 나의 근육을 강화합니다. 안전해 보이는 조직이 되려 나의 생존력을 낮추는 아이러니를 걱정하는 것은, 현생 인류가 이전의 그 어떤 조상보다 오래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동적인 이합집산의 새로운 협력 시스템은 동료와의 만남과 헤어짐을 일상화합니다. 홀로 선 핵개인은 긴 여행을 떠납니다. 길 위에서 수많은 핵개인들을 만나 서로 돕고, 위안받으며 다시 헤어짐을 반복합니다. 많은 도반과, 많은 스승을 만나고 헤어지며 삶을 배우고 서로를 가르칩니다. 조직보다 작은 개인으로 분화되었지만, 더 큰 지혜로운 무리로 강화되는 인류는 새로운 진화의 단계로 접어듭니다. 핵개인들은 ‘인생은 원래 억울한 것’이라는 이전에 살아온 선배들의 회한을 반복하지 않으려 합니다. 모든 이들이 자신의 이름을 되찾는 새로운 사회, 그 어느 누구도 숨지 않는 호명사회에서 각성한 핵개인의 여정의 출발점과 목적지는 같은 곳, 바로 ‘자신’입니다. 송길영 Mind Miner

2024-11-20

[노트북을 열며] 석 달 전과 달랐던 것

어떤 다행은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킨다. 지난 17일 발생한 경기 안산시 모텔 상가 화재가 그렇다. 새벽에 갑자기 난 불이었지만, 5~6층에 있던 투숙객 수십 명을 포함해 건물 안에 있던 52명이 모두 구조됐다. 사망자가 없는 건 다행인데, 석 달 전 부천에서 일어난 비슷한 일을 떠올리면 마음이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지난 8월 부천의 한 9층짜리 호텔에선 화재로 7명이 사망했다. 두 사고는 숙박업소 건물에서 일어나 자칫 큰 인명피해로 이어질 뻔했다는 점에서 닮았지만, 사상자 수는 완전히 달랐다. 소방 당국은 안산 모텔 건물 안 연기와 열기를 창문을 통해 밖으로 빼내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현장 소방관들이 도끼로 층별 계단 쪽 창문을 깨며 올라가 구조했기 때문이다. 부천 사고 당시엔 불이 크게 번지진 않았지만, 소방 인력이 도착하기 전부터 연기가 빠르게 퍼지면서 5명이 질식사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눈에 띄는 차이는 에어매트의 역할이었다. 부천 화재 사망자 중 2명은 에어매트 위로 낙하했는데 매트가 뒤집히면서 숨졌다. 이후 국정감사 등에서 당시 사용됐던 에어매트가 들여온 지 약 18년 됐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강원 정선·강릉, 충북 진천 등에서도 도입한 지 20년 안팎의 매트를 사용하고 있었다. 보통 에어매트 사용 연한은 7년으로 보지만, 연장에 관한 법령상 명확한 기준이 없었다. 이때문에 1년마다 심의회를 열어 계속 연장하며 사용해왔다. 지적이 잇따르자 소방 당국은 에어매트 전개 훈련을 강화하고 전국 소방기관의 매트들을 점검했다. 이번 화재에 투입된 안산소방서도 한 달에 두 번씩 실전 훈련을 했다고 한다. 소방청은 전국에 연한을 넘긴 에어매트가 약 490개에 달한다며 전량 교체하겠다는 방침을 뒤늦게 내놨다. 어떤 일의 우연성과 우발성을 강조할 때 “교통사고 같은 일이었다”는 말을 흔히 쓴다. 모든 사고는 불의(不意)일까.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사고는 없다(There Are No Accidents)』의 저자 제시 싱어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20세기 초부터 일어난 대형 사고들을 분석하면서 내재해있던 사회 시스템의 허점을 지적한다. 사고라고 불리는 일 대부분이 예측·예방할 수 있던 일이라는 취지다. 취재를 하다 보면 국내에서도 기본 훈련과 점검, 매뉴얼 마련으로 막을 수 있는 안타까운 재난이 종종 일어난다. 더 이상 사고란 말 뒤에 숨어 위험을 방치하지 않도록 경각심이 필요한 때다. 김선미(calling@joongang.co.kr)

2024-11-20

[신복룡의 신 영웅전] 대한화사전 발간한 모로하시 데쓰지

일본 개명기에 모로하시 데쓰지(諸橋轍次·1883~1982·사진)는 독학으로 한학에 몰두하다가 일생의 과업으로 한자 사전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1922년부터 집필에 착수했다. 1927년에야 제1권을 탈고하고 출판을 서두른다. 그러나 1923년 관동(關東)대지진과 1941년 태평양전쟁을 거치면서 원고가 모두 불타버렸다. 사전 작업을 도와주던 도제(徒弟) 4명이 전화(戰禍)로 목숨을 잃었다. 그래도 낙심하지 않고 교정지를 찾아 다시 제작을 재개했다. 사전 작업 착수 뒤 24년이 지나자 모로하시는 과로로 오른쪽 눈을 실명하고 왼쪽 눈으로 겨우 사물의 형체를 알아봤다. 절망하고 있을 때 의과대학에 진학한 장남 도시오(敏夫)가 학업을 포기하고 작업에 참여했으며, 차남 게이스케(啓介)와 삼남 모리오(莊夫)도 도왔다. 그들에게 중요한 덕목은 가업(家業) 의식이었다. 피나는 노력의 결실로 집필 시작 37년 만인 1959년 『대한화사전(大漢和辭典)』을 완간했다. 총 13책, 1만4332쪽에 한자 4만8902자로 구성된 단어를 수록했다. 인류 역사상 필자 한 명의 이름으로 출간한 가장 방대한 원고량이다. 다이슈칸쇼텐(大修館書店)이 사운을 걸고 4년을 투입해 인쇄했다. 사전이 출판되자 가장 당황한 것은 중국인들이었다. 중국에서도 이만한 사전이 없는데 일본에서 방대한 사전이 출판되자 대륙과 대만에서도 새로운 자전 편찬에 착수했다. 그러나 모로하시의 노작을 능가하는 사전은 출판되지 않았다. 시력까지 잃으며 37년을 헌신한 2대에 걸친 모로하시 네 부자의 의지와 출판사의 의지는 물질의 힘이 아니라 일본 지성사의 승리다. 한국에는 민족주의적 지성사가 일본에 견주어 뒤떨어져 있다. 도쿄대 문리대 교수를 역임한 모로하시는 『공자 노자 석가』를 출간하고 백수(白壽)를 누리고 타계했다. 공부 열심히 하면 일찍 죽는다는 말도 괜한 소리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2024-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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