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광장] 50년만의 모교 홈커밍이 준 감회
먼 길을 가서 꼭 참석해야 하나 망설였다. 시간이며 비용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런 마음속 씨름 중에 50년 홈커밍 행사 일자는 다가왔고, 우리 부부는 어느새 서울의 처남 집에 도착했다. 나의 모교인 Y대학의 50년 재상봉이 5월 둘째 주에 있었고, 아내의 모교인 대구 K대학의 50년 재상봉은 그 다음 주였다. 아내는 나의 학과별 모임, 그리고 전체 상봉 모임에도 동행해 초면인 친구와도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신기하기까지 했다. 그다음 주말, 아내의 재상봉 모임에 나도 동행했다. 그런데 이전에 만나 본 적 없는 아내의 동기들이었지만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듯이 친밀감을 느꼈다. 50년만의 홈커밍 감회가 이런저런 논리를 훌쩍 뛰어넘었다. 그리고 재상봉 모임은 뜻 밖에 내게 광야 여정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해 주었다. 생각해 보니 이 모임이 내가 가고 싶다고 갈 수 있었던 행사는 아니다. 동기 몇 명은 몸이 아파 못 오고, 또 다른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했다는 친구 소식도 들었다. 이미 고인이 된 친구들 소식엔 그 모습과 추억이 그립다. 우리 세대는 격변과 궁핍의 시대를 살았다. 꿈과 도전의식만 가슴에 안고 걸어온 힘든 광야 길에서 50년 재상봉이란 마치 생환한 병사들의 장한 모습과도 비교된다. 이제 젊은 봄날의 청년 시간은 지났지만 한사람, 한사람 지금의 모습이 매우 근사했다. 그간 내 삶의 반 이상은 이민자의 삶이었다. 오래전 친구들과의 만남을 뒤로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앉았다. 좌석 모니터에는 현재 39000피트 상공에서 시속 585마일의 속도로 비행하고 있다는 알림이 나온다. 마치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듯했다. 우리 세대는 수많은 보따리와 함께했다. 6·25 전쟁 당시 피난보따리를 시작으로 기숙사보따리, 이민보따리, 유학보따리, 고생보따리, 자영업보따리 등과 함께 살았다. 그런데 그 보따리를 어디에 내려놓고 살았든지 우리가 영원한 영혼의 고향에 이르기 전엔 아직 광야 여정이 아닌가. 50년의 세월을 되돌아가 현재를 생각해 보니 감회가 남다르다. 다시 한번 그 용기와 희망, 그리고 삶에 대한 진지한 믿음의 다이얼로그를 통해 마음의 자세를 새롭게 하고 싶다. 성서를 읽는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화목제물로 그리스도를 보내셨음이라.” 나의 세대가 격동의 시대에도 행복했던 이유는, 내가 소액의 학비만 들고 하와이를 거쳐 미국에 첫발을 디딜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주께서 자신과의 화목을 위해 먼저 주신 그 사랑을 마음에 알고 있었음이리라. 젊은 시절의 삶에 대한 첫사랑, 그리고 믿음에 대한 첫사랑이 그립다. 이민자의 삶에 동행하는 모두의 여정에 건강과 평안, 그리고 먼저 우리를 향하여 주신 신비한 사랑의 감동이 풍성하기를 기원한다. 김효남 / HCMA 디렉터·미주장신 교수열린광장 홈커밍 모교 모교 홈커밍 홈커밍 감회 홈커밍 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