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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세월의 끝자락에서

’나는 떠난다. / 청동의(靑銅)의 표면에서/ 일제히 날아가는 진폭(振幅)의 새가 되어 / 광막한 하나의 울음이 되어 / 하나의 소리가 되어. / 인종(忍從)은 끝이 났는가. / 청동의 벽에 / ‘역사’를 가두어 놓은 / 칠흑의 감방에서 / 나는 바람을 타고 / 들에서는 푸름이 된다. / 꽃에서는 웃음이 되고 / 천상에서는 악기가 된다 / 먹구름이 깔리면 / 하늘의 꼭지에서 터지는 / 뇌성(雷聲)이 되어 / 가루 가루 가루의 음향이 된다 -박남수의 ‘종소리’     시인의 종소리는 청동의 벽에 갇혀 있다. 종소리는 벽을 뚫고 세상에 울음으로 퍼져 나간다. ‘새’가 되어 ‘광막한 하나의 울음’으로, ‘하나의 소리’가 되어 세상을 진동시킨다. 역사 속에 갇혀 있었던 시간을 해방시키는, 꼭지 터지는 천둥 소리가 되어 자유를 찾아 푸르름이 되고 웃음이 되고 새가 된다.     유년의 종소리는 즐거웠다. 시작을 재촉하는 종소리도 끝을 알리는 종소리도 모두 좋았다. 선생님이 교무실 앞에 달린 반짝반짝 빛나는 황금색 종을 치며 “얘들아” 하고 부르면 하던 재미있는 놀이를 멈추고 동무들과 어깨를 부딪히며 교실로 달려 갔다.     ‘학교 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는 1984년 이화여대 음대 김메리교수가 유일하게 작사 작곡한 동요다. 유년의 종소리는 청명한 울림으로 시작과 멈춤을 알리며 생의 곳곳을 스며 든다. 시작과 끝은 아련한 반복으로 세월의 종을 울린다.   이젠 아무도 종을 쳐 주지 않는다. 언제 시작을 해야 하는지, 어디서 멈추어야 하는지, 어느 쯤에서 길고 긴 방황을 끝을 접어야 하는지를 말해 주지 않는다. 아득한 길 위에서 길을 찾으며 길을 잃고 길을 헤맨다. 또 다시 지난 해의 그 자리에 서있다. 달라지려고, 좀더 나아지려고 애를 썼지만 달라진 것 하나 없이 빈 손으로 바람 앞에 내가 서 있다.   작은 것들이 모여 무리를 이룬다. 태산도 원래는 평지였다. 하나 둘 모여 육지가 되고 바다가 되었다. 우주 기원의 가설인 빅뱅(Big Bang)에 의하면 태초에는 모든 에너지가 한 점에 모여 있었다. 물리학자 조르주 르메트르(George Lemaitre)는 ‘최초에 모든 것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불꽃놀이가 있었다. 그 후 폭발이 있었고 하늘이 연기로 가득 찼다’라고 주장한다. 찬란한 불꽃놀이와 엄청난 폭발, 앞이 안 보이는 혼돈 속에 탄생한 우주 속에 한 개의 점으로 인간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을까.     내가 사라지면 우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사는 우주의 주인공이다. 내가 없으면 그대 사랑도 허공을 맴돈다. 후회와 미련으로 지난 날을 닦달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세월의 끈을 푼다. 묶여 있던 것들을 떠나 보낸다. 그리움의 언덕에는 갈대가 서걱인다. 무겁고 힘든 것들의 매듭을 풀지 않으면 다음 장으로 넘어가지 못한다.   세월의 끝자락은 흔들린다. 달력의 마지막 장은 펄럭인다. 유년의 일기장, 빛 바랜 추억 속 얼굴, 작별 담은 그대 편지, 소복 입은 어머니의 무명치마는 바람 앞에 서면 펄럭였다. 마음의 끈 다잡아도 그리움의 빈 칸을 눈물로 채웠던 날들이 바람개비로 허공을 맴돈다. 사는 게 너무 힘들고 지치면 쉬어가면 된다. 슬픔은 삼키면 약이 된다. 고통은 용기가 되고 절망은 희망의 뿌리가 된다. 아픔은 진주처럼 영롱하고 그리움은 별이 된다.     끝날 때까지는 끝이 아니다. 잠시 멈추고 있을 뿐이다. 시행착오는 반복되고 세월이 연륜을 만든다. 인생 역전 드라마는 아직 방영되지 않았다. 누가 더 잘 사는지, 잘났는지 키 재기 하지 말고, 소중한 내 모습 그대로 세월의 끝자락에 내일의 꿈을 새긴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끝자락 세월 바람개비로 허공 우주 기원 천둥 소리

2023-12-26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허공에서 길을 찿다

땅에만 길이 있는 게 아니다. 하늘에도 있고 바다에도 길이 있다. 마음 속 깊은 곳에도 여러 갈래 길이 있다. 돌아보면 수없이 많은 길을 거쳐 여기까지 왔다. 엎어져 무릎이 깨지기도 하고, 함박눈이 발목을 덮는 밤, 길 위에서 첫사랑의 황홀한 키스도 했다. 길 위에서 사랑을 하고 길 위에서 작별했다. 그대 떠나간 길 되돌아 오며 다시는 사랑하지 않겠다 다짐했다. 길은 또 다른 길로 이어졌다.   고향집 떠나는 날, 탱자나무 앞에서 소처럼 크고 선한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담은 머슴아이, 새끼손가락 걸며 꼭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지만 돌아가지 않았다. 그 애는 누군가의 남편, 아버지가 되어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고 있겠지. 유년의 책갈피에 맺은 언약은 돌아갈 수 없는 길 위에 작은 화석으로 남는다.   에드워드 호퍼의 ‘길 위에서’ 전시회가 서을시립미술관에서 4월 20일부터 8월 20일까지 성황리에 열린다. 뉴욕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잠든 호퍼는 미국에서 가장 사랑 받는 화가 중 한 사람이다. 도시의 일상적 공간을 그린 조용하고 비개성적인 인물들이 엄격한 기하학적 형태들을 통해 벗어날 수 없는 현대인의 고독, 고립, 단절, 소외감 등을 섬뜩하게 보여준다.   뉴욕에서 일러스트레이터 일을 하다 예술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파리로 간 호퍼는 생동감 넘치는 파리지앵들을 관찰하며 심리적 풍경묘사라는 독특한 특징을 작품 속에 담는다. 여행은 호퍼의 그림 속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다. 전시 제목 ‘길 위에서’는 호퍼의 고향 뉴욕에서 자주 찿았던 파리, 뉴잉글랜드, 케이프코드로 가는 길 위에서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성숙시킨 호퍼의 내면 여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예술가들이 사랑한 ‘미국 국민화가’ 호퍼의 그림은 슬프지만 관객을 슬프게 하지 않는다. 호퍼 예술의 중심 주제는 외로움이지만 절제된 선, 빛과 어둠을 가르는 선명한 색체로 내면의 아픔을 정화시킨다.   광대는 하늘에서 길을 찿는다. 광대는 허공에서 줄을 탄다. 광대줄타기는 줄광대라고 불리는 연희자가 높이 3미터의 허공에 매어져 있는 35미터의 외줄 위에서 삼현육각과 어릿광대를 대동하고 줄 위에서 갖가지 방식으로 연희하는 놀이다. 줄광대는 관객과 직접적으로 또는 어릿광대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대화하며 줄타기연행을 풀어나간다. 삼현육각 협연자와 호흡을 맞춰 기예를 선보일 뿐만 아니라, 새타령이나 중타령 등을 통하여 노래를 부르며 흥을 돋군다.   2011년 줄타기는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 유산으로 등재된다. 정부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8호로 지정해 체계적으로 보존, 전수하고 김대균 명사가 제2대 인간문화재로 인정되었다. 9살 때 줄타기를 시작한 김대균명사는 15세에 첫 신고식을 올린 뒤 줄이 끊어지는 사고로 당하지만 외줄 인생의 무서운 집념으로 다시 줄 위에 선다. “줄 위에 있는 순간 모든 근심 사라지고, 자신을 내려 놓는다”고 그는 말한다.   인생은 아슬아슬한 줄타기 하는 곡예사의 나팔 소리다. 나침반 없이 보이지 않는 길을 찿아 나선다. 광대가 허공에서 줄타기 하듯 꽹과리 소리가 멈출 때까지 춤추기를 포기할 수 없다. 번쩍이는 재주와 용맹만으로 길을 찿기 어렵다. 중심을 잘 잡고, 주변의 잡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고, 오직 목표를 향해 한 발 한 발 걸어가면 길이 열린다. 천 갈래 만 갈래 흩어지고 만나는 세월의 틈바구니에서 벼랑 위에 걸쳐진 밧줄 움켜쥐고 길을 걷는다. 광대가 줄을 타듯 허공에서 길을 찿는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허공 에드워드 호퍼 호퍼 예술 갈래 길이

2023-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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