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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9월의 승리에 잊힌 그들

‘구월이 오면/구월의 강가에 나가/우리가 따뜻한 피로 흐르는/ 강물이 되어/세상을 적셔야 하는 것을’ 안도현의 시 ‘그대에게 가고 싶다’의 마지막 구절이다.     하늘은 맑고 말은 살찐다는 천고마비의 계절, 우리나라 9월의 사연은 얼룩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기쁘고 슬픈 얘기가 무성하다. 1년 중 가장 감격스러운 날이요, 역사적인 날인 9월15일과 28일은 피로 흐르는 강물이 되어 세상을 적셨다.   대한민국의 운명을 건 6·25전쟁은 세계 전쟁사에서도 드문 처절한 기록으로 1950년 6월 북한군이 남침해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함락했고, 3개월 후인 9월엔 치열한 전투 끝에 우리 국군이 수도를 탈환하고 38선을 돌파해 북진했다. 한국군은 압록강까지 이르렀고 국토통일의 문턱까지 갔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꿈은 사라지고 천추의 한으로 남았다.     돌이켜보면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은 한국전쟁의 흐름을 바꾼 날이다. 인천상륙작전은 세계 2차 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더불어 세계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상륙작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이 작전이 성공하기까지는 보이지 않는 엄청난 희생이 따랐다. 특히 인천상륙작전 직전 경북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해안에서 벌어진 장사상륙작전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 제대로 훈련을 받지 못한 학도병들이 나선 전투였다. 맥아더 장군도 이들에게 경의를 표할 만큼 의미 있는 작전이었지만 이 장사상륙작전은 전쟁 이후에도 조명을 받지 못했다. 군번도 계급도 없었던 학도병들의 눈물겨운 전공은 그렇게 가려졌다.     장사상륙작전은 인천상륙작전 실시에 맞추어 북한군을 교란하기 위한 양공 작전으로 계획됐다. 서해안의 인천과 정반대 방향인 동해안 포항 북쪽 약 25㎞ 지점에 있는 경상북도 영덕군 장사리 해안 일대 북한군 점령지역에서 772명으로 구성된 학도병 부대가 전개한 상륙작전이었다.     학도병들이 승선한 LST 문산호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  그 하루 전인 9월 14일 부산에서 출발해9월 15일새벽 6시, 장사리 해안에 도착했다. 이들의 목표는 북한군 후방을 교란하는 것이었다. 기상 악화에도 학도병들은 상륙 작전을 감행했다.     장사상륙작전은 교란작전이요 위장 작전으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뒷받침했다. 하지만 장사상륙작전은 최근까지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피의 무공담이다. 잊힌 그들, 그 어린 학도병들의 영혼은 지금도 하늘에서 떠돌고 있지 않을까 싶다. 너무 희생자가 많아서일까?     장사상륙작전은 인천에 쏠릴 수 있는 북한군의 주의를 돌리면서 당시 포항과 경주 등을 공격하던 북한군 2군단의 후방 병참선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은 주로 대구, 밀양 지역 등에서 모집한 중학생(중학교 6년제)으로 대부분 17~18세였으나 15세의 어린 학생도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교복 차림에 기초 군사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에서 작전에 투입돼 바닷물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해안에 있던 북한군의 화력을 뚫고 결사적으로 전투를 벌였다.     학도병들은 치열한 전투 끝에 해변을 점령하고 상륙 12시간 만에 반경 10㎞ 내 북한군을 소탕, 포항으로 통하는 7번 국도를 장악했다. 이에 대규모 부대가 상륙한 것으로 판단한 북한군은 낙동강 일대 병력 일부를 장사리에 투입, 전차를 앞세워 반격에 나섰다. 학도병들이 참여한 교란작전의 성공이 나라를 지킨 것이다.     인천에 상륙한 부대와 함께 한강을 건너 서울을 향한 학도병은 북한군의 최후 방어선인 연희고지(현 서대문구 연희동)에서 결사 항전하는 적을 섬멸하는 등 서울탈환 작전에도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잊힌 그들, 장사상륙작전에서 산화한 젊은 학도병들의 영령을 추모한다.  이재학 / 6·25참전유공자회 회장기고 승리 인천상륙작전 직전 인천상륙작전 실시 학도병 부대

2024-09-25

[기고] 어느 학도병의 6·25

‘6·25’, 그 이튿날인 월요일, 서울 한 명문 중학교(6년제)에 재학 중이던 그는 학도호국단 간부 학생의 지시에 따라 학교를 사수한다며 교련 시간에 사용하던 목총을 들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난 수요일, 시내는 쥐죽은 듯 조용했고 교통 등 도시의 모든 기능은 마비됐다. 미처 피란하지 못한 시민들은 몸을 떨고 있었다.   미아리를 넘어 서울 시내로 쳐들어온 인민군 탱크 2대가 서울시청 앞에 그 육중한 모습을 나타냈고 자기 키보다 큰 장총을 든 어린 인민군을 처음 보고 놀랐다. 호기심에 숨어서 살짝 봤지만 바로 공포심에 질려 근처의 이모 집 지하실로 몸을 숨겼다. 하루아침에 세상이 달라진 틈에 어디서 나타났는지 붉은 완장을 찬 청년들이 보였다. 그들은 대낮 대로 상에서 어느 대학 학생회장이라는 사람을 인민재판이라는 이름으로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곧장 총살하는 무법천지의 광경도 보았다.   남으로 향하는 인민군 부대를 피해 끊어진 한강 다리를 멀리 바라보면서 주운 널판지를 이용해 밤새 강을 건너 서울을 탈출했다. 무작정 남쪽으로 걷다 경기도 용인 근방 옛날 숯 굽던 깊은 산속으로 들어섰다. 마침 거기엔 서울에서 내려온 상급 중학생 20여명 등이 몸을 피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중 가장 연장자인 대학생 한명이 스스로 지도자로 나서 즉각 ‘타공학도대’란 반공단체를 만들고 피란 학생들을 규합했다. 그리고 겁도 없이 퇴각하는 인민군 부상병과 패잔병을 유인 기습해 총과 수류탄을 빼앗는 용감성도 발휘했다.   9월 초, 전세는 역전되어 낙동강 전투에서 패한 인민군 패잔병 수백명이 중부전선 산악지역을 따라 북상하기 시작했다. 이때 그는 북진하는 국군부대 수색 중대에 배속돼 무기를 받고 정식 학도병으로 종군했다. 드디어 인천 상륙작전에 성공한 한미해병대를 뒤따라 서울로 향해 28일 감격스러운 수도 서울 탈환에도 일조했다.     육군 1사단이 평양에 입성, 학도병 선무공작대가 뒤따라 갈 무렵 국방부 장관과 문교부 장관 명의의 성명이 발표됐다.  전세가 호전됐으니 각 부대에 배속된 학도병들은 각자 본교로 돌아가라는 지시였다.     그래서 군번도 계급장도 없는 그도 군복을 벗고 전시학교로 돌아갔다. 그렇게 수개월이 지나고 단기 사관학교 과정인 육군갑종간부후보생 시험에 응시했다. 합격자 대부분은 그와 같은 학도병 출신이었다. 합격자 전원은 광주 보병학교에 입교해 초급장교 과정을 마치고 6개월 후 육군소위로 임관했다.   1953년, 휴전 수개월을 앞두고 중부전선에서 중공군의 대공세에 맞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피아간의 피해는 말이 아니었다. 하루에도 고지의 주인이 몇 번씩 바뀌는 뺏고 빼앗기는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심지어 백병전까지 벌이며 단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겠다는 결사적 투쟁이었다. 여기서 젊은 육군소위 전사자가 속출했다. 그래서 매년 6월이 되면 그와 생존한 그의 동기생들은 국립묘지에 모인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6·25 전쟁의 아픈 상처는 잊지 못한다. 바로 피로 지킨 대한민국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전쟁의 폐허 속에서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국군장병과 유엔 참전 용사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74년 전 한국 땅에서 일어난 비극적 전쟁이 과거의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진행 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6·25 한국전쟁은 ‘잊힌 전쟁'이 아니라 생생히 기억되고 후세에도 전해야 하는 살아있는 역사다. “상기하자 6·25!”, 이는 구호가 아니라 교훈이다.  이재학 / 6·25참전유공자회 회장기고 학도병 정식 학도병 입성 학도병 인민군 패잔병

2024-06-05

[기고] 기억 되어야 할 6·25 학도병의 헌신

숱한 피눈물의 역사를 안고 흐르는 한강 물이 보이는 강변 둑에 서 있는 학도의용군 충혼비는 그날을 증언하고 있다. 1950년 6월25일, 그날 이후 서울 시내의 남녀 중학교(6년제)는 거의 휴교 상태가 됐다. 모든 수업은 중단됐고 상급학년 학생들은 목총을 들고 ‘학교사수’라는 구호 아래 군사훈련을 받는 학도호국단 조직이 발동했다.     대한민국 건국 채 2년이 되기 전 북한의 김일성 일당이 남한을 공산화하려고 일으킨 전쟁에 맞서 학생들도 위기의 대한민국을 구하는 데 일조했다. 반공에서 멸공에 이르기까지 철두철미하게 공산주의를 배격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제창한 국가 지도자는 1949년 4월22일 남녀 중등학교와 대학에 학도호국단을 결성, 예비역 장교들을 배치 매주 1시간씩 교련이란 과목으로 기초 군사교육을 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예비역인 장교들은 곧바로 현역으로 복귀하여 전투부대에 배치됐다. 또한 학도병 지원자들은 실전훈련도 받지 못한 채 전투부대원으로 군에 배속되었다. 평소 학교에서 익힌 제식훈련과 집총훈련이 학도병들이 받은 군사 훈련의 전부였다. 살펴보면 학도병들은 전쟁 발발 후 1951년 4월까지 전·후방에서 전투에 참여하거나, 공비소탕·치안유지·간호활동·선무공작 등에 참가해 군과 경찰 업무를 도왔다.     전쟁 발발 직후인 6월26일과 27일 이틀 동안 서울을 탈출하지 못한 사람들은 인민군 앞에서 누구라도 최악의 위기일 수밖에 없었다. 6월28일 서울에는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이 밀어닥치기 시작했고, 각 학교에는 붉은 완장을 찬 공산주의자들이 나타났다.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한 사람들은 인민군의 총알받이로 잡혀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우선 서울을 벗어나는 것이 중요했지만 끊어진 한강 다리 때문에 인민군을 피해 남쪽으로 움직인다는 건 너무 위험하고 어려웠다.     필자도 서울 탈출 기회를 놓쳐 고생하다 7월5일에야 구사일생으로 한강을 건너는 데 성공해 도보로 남행을 서둘렀으나 당시 인민군의 선두는 이미 대전을 지나고 있었다. 필자는 할 수 없이 야간에 수원을 지나 오산 동쪽 용안이라는 곳 인근의 깊은 산으로 피신했다. 산중에는 이미 피란 온 20여명의 학생이 숨어 있었다. 우리는 산속에 숨어 미군의 폭격, 서해상의  함포사격 등 고막을 찢는 소리를 들으면서 국군의 진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학도의용대’란 명칭으로 활동을 하기도 했다. 당시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이 반격에 성공하면서 도망치는 인민군 패잔병을 생포하고 주민을 대피시키는 등의 역할을 했었다. 그러다 낙동강에서 북진하는 국군에 합류 군복과 소총 한 자루, 수류탄 몇 개를 받고 전투에 참여했다. 학도병으로 국군에 편입된 것이다.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도 못한 채 계급장이나 군번도 없이 전투에 참여한 학도병 전사자와 실종자, 부상자가 속출했으며 포로로 잡혔다 처형되는 일도 있었다.       마침내 9월15일 아군은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면서 수도 서울을 3개월 만에 수복하는 환희와 감격도 누렸다. 국군이 38선을 돌파해 북진을 하고 있을 즈음 문교부 장관은 전세가 호전되었으니 학도병은 학교로 복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본인이 원하면 현역병으로 현지 입대도 가능했다. 이렇게 생존한 학도병 대부분이 귀가하거나 학교로 돌아갔다.     학도병이란 학생 신분으로 전쟁에 참전한 병사다. 이들은 어린 나이에도 나라를 위해 피를 흘리며 헌신했다. 6·25 한국전쟁 73주년을 맞아 이들의 공헌과 숭고한 희생을 기억하고 존중해야 할 것이다. 학도병들은 6·25 전사의 영웅이다.  이재학 / 6·25참전유공자회 회장기고 학도병 기억 학도병 지원자들 인민군 패잔병 남녀 중등학교

2023-06-20

광기·인간애 보여준 ‘수작’…‘포화속으로’관객토론회 호평 이어져

"한국전쟁 당시 조국을 지키기 위해 죽어간 학도병들의 이야기가 어떤 로맨틱 영화보다 슬프고 아름답게 다가왔습니다.” 스탠퍼드 대학 커버리 오디토리엄에서 열린 영화 ‘포화속으로’의 공식 상영회가 끝나고 관객들과의 토론회에 참석한 주연 배우 권상우씨는 “올해는 한국전쟁 60주년을 맞는 특별한 해로 인간적 역할을 통해 아픈 역사를 표현하고 싶었다”며 이같이 말했다. 아태 연구소 다니엘 스나이더 부 디렉터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토론회에는 이재한 감독과 미국의 저명한 영화평론가 스콧 폰다스, UC얼바인 김경현 교수, SF국제아시안 아메리칸 영화제 치허이 양 디렉터, 한국전 참전용사 존 스티븐스 등이 패널로 나섰다. 한국전을 배경으로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에 대해 이재한 감독은 “한국전쟁은 20세기 가장 비극적 사건 중 하나”라며 “어린 학도병들이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전쟁터에 죽어간 역사를 현대를 사는 젊은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실화를 바탕으로한 이 영화를 통해 60년 전 어떤 역사가 있었는지를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었다”며 “영화를 본 관객들이 전쟁은 ‘광기’라는 것을 깨닫길 바란다”고 메시지를 전했다. 작품을 하면서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관점이 변했냐는 질문에 권씨는 “한국전쟁의 참담한 현실을 겪어보지 못해서 이해할 순 없지만 한반도가 불완전한 상황이고 언제든지 다시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공포감을 일깨워줬다”고 답했다. 한편 이날 패널로 참석한 영화 평론가 폰다스씨는 토론 중간에 “영화속 권상우의 반항적인 눈빛과 담배 무는 장면 등이 인상적 이었다”며 “제임스 딘, 장 폴 벨몽도, 알랭드롱과 같은 이미지를 주는 배우”라고 극찬하는 등 영화에 대한 호평이 이어졌다. 관객들도 전쟁의 잔인함과 인간애를 일깨워주는 보기 드문 수작이라고 평가했다. 김판겸 기자

2010-05-31

“한국 전쟁은 여전히 진행중”…6·25 발발 60주년 재조명

한국전의 참상을 다룬 영화 ‘포화속으로’가 스탠퍼드대에서 첫 공식 상영돼, 발발 60주년을 맞은 6·25 전쟁을 재조명했다. 특히 이번 상영회는 한국 국내외를 통틀어 일반에게 처음 공개된 자리로 한국전 참전 미군 용사들이 초청돼 그 의미가 컸다. ‘포화속으로’는 한국에서 오는 6월16일 개봉한다. 스탠퍼드대 아태연구소(소장 신기욱 교수) 초청으로 지난달 27일 커버리 오디토리엄에서 열린 상영회에는 주연 배우 권상우와 이재한 감독도 참석했다. 상영회에는 한류스타 권상우의 높은 인기를 반영하듯 한국 언론을 비롯해 중국, 일본 등 20여 언론사가 몰렸다. 이번 상영회가 알려지면서 커버리 오디토리엄의 전체 400석의 예약이 5일만에 마감되고 100명이 대기 명단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한인과 아시안계의 관심은 뜨거웠다. 영화 상영전 신기욱 교수는 “한국전은 소위 ‘잊혀진 전쟁’으로 지칭되지만 천안함 침몰과 같은 사태에서 알 수 있듯이 여전히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며 “한국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6·25의 의미를 되새기고 알리기 위해 상영회를 열게 됐다”고 말했다. 영화 ‘포화속으로’는 1950년 8월, 한국 전쟁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뛰어든 학도병 71명의 조국애와 우정, 한민족이면서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눠야 했던 가슴 아픈 역사를 담은 실화다. 한국전 미군 참전 용사로 1952년 2월부터 13개월을 전선에서 보낸 레이 셀라자씨는 “영화를 보는 내내 전쟁터에서 죽어간 옛 전우들 생각에 가슴이 뭉클했다”며 “한국전 당시 우리는 한국의 자유를 수호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넘나들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또 “한국전이 터진지 60년이 흘렀지만 우리 노병들의 가슴에는 아직도 그때의 전우들이 살아있다”고 말했다. 한편 상영관 밖에서는 한국전 초기 치열했던 낙동강 전선, 포항 등지 벌어진 참상을 담은 사진전도 열렸다. 28일에는 한국문제 전문가인 시카고대 브루스 커밍스 교수가 스탠퍼드대 필리핀스 컨퍼런스룸에서 ‘한국전쟁 그 후 60년: 한국과 미국에서의 역사와 기억’에 대해 강연했다. 김판겸 기자

2010-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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