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주눅 들지 않는 필살기
잘하던 일도 긴장하면 망친다. 주눅 들면 하던 일도 안 된다. 한번의 기술이나 요령으로 전세가 뒤집어지지 않는다. 평소 실력을 쌓아두어야 승부수를 띄울 수 있다. 필살기(必殺技)는 사람을 확실히 죽이는 기술이다. 필살기는 원래 한방에 죽이는 기술로 외상없이 일격에 적을 쓰러트리는 방법이다. 필살기의 창시자는 60-70년대 홍콩무협영화의 최고 아이돌스타, 살아있는 전설 ‘왕우’로 꼽힌다. 한쪽 팔 없이 수많은 적을 무찌르는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는 감동 그 자체였다. 필살기는 보통 ‘자신의 가장 강력한 기술’이나 ‘특별히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기술’, ‘비장의 기술’이란 의미로 사용된다. 단순히 가장 강한 것이 아닌 타인과 구별되는 다른 기술들과 격이 다른 특별한 강함을 지녔다는 뜻이 담겨있다. 스무 채도 안 되는 삼거리 마을, 초가집이 송이버섯처럼 올망졸망 붙어있는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해가 지면 채널이 잘 안 잡혀 찌지직 소리 나는 라디오 들으려고 동네사람들이 마당에 한 복판에 있는 우리집 대나무 평상에 모여 들었다. 시골 살 때는 아버지가 남긴 토지도 있어 부자 노릇을 하며 기죽지 않고 잘 지냈다. 여덟살 되던 해 도시로 이사 왔다. 내 어린 인생이 이토록 낭떠러지로 낙화할 줄이야. 서울에서 진학 온 멋진 아이는 ‘체르니’를 시작했다고 자랑했고 그 애보다 덜 예쁜 아이는 ‘바이엘’을 친다고 했다. 한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단어들은 공포 그 자체였다. 그 뿐이랴! 여덟가지색 크레용으로 불조심 포스터를 그려 파출소에 내 그림이 붙기도 했는데 도시 애들은 오십가지 색깔의 영롱한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렸다. 화가가 되면 굶어 죽는다며 어머니는 크레파스 살 돈을 주지 않았다. 다윗과 골리앗 싸움의 시작이었다. 따스하게 머리 쓰다듬어 주던 동네 어른들, 날 업고 키워주던 옥이 언니, 버드나무 가지 꺾어 피리 만들어 주던 삼만이 아재도 없는 도시생활은 슬프고 막막했다. 궁하면 통한다. 우물안 개구리도 탈출하면 높고 푸른 창공을 바라본다. 맨땅에 헤딩 하듯 유년의 필살기가 시작된다. 우선 어수룩한 시골 촌뜨기 말투를 고치고 동무들이 한번 할 때 열 번 하고, 그래도 안되면 백번하기로 작심, 긍정적인 투쟁에 돌입하기로 다짐한다. 인생은 한 방으로 끝장나지 않는다. 단칼에 승부 나는 기술은 없다. 움츠리지 않고 주눅들지 않고 묵묵히 열심으로 자기 길을 가는 사람을 이겨내는 기술은 없다. 내 필살기는 타인을 죽이는 기술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필생기일 뿐이다. 타인과 비교할 때는 수평이 아니라 수직 상승이 해답이다. 비슷한 사람과 경쟁하면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바로 세우고, 조건에 절망하지 않고, 없는 것 안 가진 것, 할 수 없는 것, 못난 것들에 굴복하지 않는 용기가 승부수를 띄운다. 자부심과 자긍심은 출발점이 다르다. 자부심은 자신의 가치나 능력을 믿고 당당히 여기는 마음이 타인의 칭찬이나 외부의 찬사에서 출발하지만 자긍심은 본인의 선택과 마음가짐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행복을 느끼는 마음에 기인한다. 용기 있는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삶을 지킬 수 있다. 타인의 판단에 연연하지 않고 ‘내 모습 그대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산다. 흉내내지 않고 모방하지 않으며, 가장 독창적인, 우주에서 단 하나뿐인 모습으로 사는 것이 자신을 지키는 비장의 기술이다. 어머니 오른 손은 고된 농삿일로 지문이 사라졌다. 무언가 이룩하려는 사람, 꿈과 희망을 향해 끝없이 노력하는 사람,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하는 사람의 손은 늙지 않는다. 지문이 닳아 없어져도 열리지 않는 문이 열릴 때까지 두드린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필살기 주눅 시골 촌뜨기 여덟가지색 크레용 우물안 개구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