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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아이] 매력과 권력

기자 생활의 상당 기간을 정치부에서 취재하고 보도했다. 그런 이력에도 최근의 미국 대선은 이해하기 힘든 지점이 많다.   이를테면 TV토론에서 압승하고도 해리스는 트럼프를 따돌리지 못했다. 게다가 트럼프는 공공연하게 거짓말을 하고, 포르노 배우와 얽힌 뒷거래를 비롯해 온갖 비도덕적 추문의 당사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선거를 일주일 앞둔 시점에서 그런 트럼프의 지지세는 꺾이기는커녕 일부 경합주에선 해리스를 앞지르는 결과도 나오고 있다.   최근 애리조나와 조지아, 위스콘신주의 바닥 민심을 직접 취재하면서 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의 배경을 넌지시 짚어볼 수 있게 됐다. 바로 트럼프가 끝없이 빚어내는 스토리텔링의 힘이다.   미국 영문학자 조너선 갓셜은 저서 ‘스토리텔링 애니멀’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이야기는 끊임없이 우리를 만지작거리고 주물럭거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우리의 마음을 빚어낸다.” 나는 여러 도덕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트럼프의 재집권이 아른거리는 현 상황을 ‘호모 픽투스(Homo fictus, 이야기하는 인간)’의 관점에서 이해해보려 했다.   그 어떤 가치적 판단을 제외하고 말하자면, 트럼프는 해리스에 비해 뛰어난 이야기꾼이다. 트럼프와 해리스, 두 후보의 무수한 연설과 인터뷰, 토론 등을 종합해 내린 결론이다. 장르로 따지자면 트럼프는 픽션, 해리스는 논픽션 쪽이다.   말하자면 트럼프는 지지자들이 듣기 원하는 이야기를 허구를 동원해서라도 지어낸다. 트럼프는 자신을 악인과 맞선 영웅으로 서사화하면서 대선 캠페인을 드라마처럼 끌고 가고 있다. 그의 이야기는 악인(불법 이민자)이 등장하고 갈등(일자리와 치안 위기)이 벌어지고, 이를 해결하는 영웅(트럼프)이 기본 구조를 이루는 식인데, 듣는 이를 현실과 무관한 판타지로 데려가는 효과를 낸다.   반면 해리스는 현실에 기반한 사실을 서술하는 논픽션 강연자 유형이다. 그는 판타지를 지어내는 대신 현실(트럼프의 민주주의 위협)을 자세히 설파하는데, 이는 도덕적으로 온당할지 몰라도 잘 짜인 이야기에 열광하는 ‘호모 픽투스’ 관점에선 그리 매력적인 설득 방식이 아닐 수도 있다.   결국 이야기는 사람을 잡아당기는 힘, 매력에 관여하는 요소다. 권력이 타인의 복종을 강제하는 힘이라면, 매력은 옳든 그르든 타인이 스스로 다가오게끔 하는 힘이다. 이번 미국 대선은 그 매력의 경중에 따라 초박빙 승부가 결정될지도 모른다. 권력이 매력을 강제할 순 없지만, 매력은 종종 권력 창출의 중요한 발판이다. 정강현 / 한국 중앙일보 워싱턴 특파원글로벌 아이 권력 픽션 해리스 반면 해리스 논픽션 강연자

2024-10-30

'싸구려 소설'로 만든 대체 불가능한 걸작

‘혁신적’이라고 칭했던 과거의 현상, 최신 기술, 창의적 아이디어들을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하찮아 보이는 것들이 많다. 그리고 대부분 시간이 지나면 지난 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린다. 패션, 테크놀러지가 그렇지만 영화도 마찬가지다.     1960년대 미국에서는 TV드라마들을 통해, 다른 인물들이 각기 다른 곳에서 각자의 다른 이야기들을 복잡하게 펼쳐 나가면서 종국에는 하나로 연결되는 비선형(Nonlinear) 내러티브 방식이 유행했다. 이런 트렌드는 당연 영화에도 영향을 주었고, 그 흐름 속에서 탄생한 영화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펄프 픽션’(1994)이다.   30년전 ‘펄프 픽션’이 세상에 던진 신선한 충격, 그 기묘한 참신성은 오늘날에도 건재하다. 타란티노의 독창적 스타일 그 자체가 하나의 장르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형식을 의도적으로 무너뜨리고 특정 양식에 갇히지 않으려는 타란티노의 영화들은 가이 리치(셜록 홈즈, 젠틀맨), 크리스토퍼 놀란(오펜하이머, 테넷)과 같은 감독들과 TV 드라마 ‘브레이킹 배드’에 강한 영향을 주었다.     펄프 픽션이란 질 낮은 종이에 인쇄된 싸구려 소설을 일컫는다. 이런 류의 소설들에는 로맨스, 공상과학, 오컬트, 호러 등 각종 장르가 뒤범벅되어 있고 불륜, 음모, 치정, 살인 등의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소재들을 주로 다룬다.   영화 ‘펄프 픽션’은 싸구려 소설의 오락성과 영화의 예술성을 동시에 지닌 영화이다. 기존의 영화 방식을 파괴하고 자신의 영화를 아예 ‘저급’으로 정의한 타란티노의 등장을 가장 먼저 반긴 건 유럽 영화계였다. 타란티노는 1994년 자신의 2번째 작품 ‘펄프 픽션’으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거머쥔다.   고등학교 중퇴, 비디오 가게 점원 출신의 타란티노는 처음부터 이단아였다. 데뷔 시절부터 천재, 악동의 이미지로 주목받은 그는 이미 홍콩 느와르의 영향을 받아 만든 데뷔작 ‘저수지의 개들’(Reservoir Dogs. 1992)로 마니아층 팬들을 확보해가고 있었다.   칸영화제의 성공적 데뷔에 이어 ‘펄프 픽션’이 미국에서 개봉된 후 가장 먼저 대화의 화제에 오른 것은, 시제에 관한 혼돈이었다. 각 인물들의 스토리를 순서대로 짜맞춘 기승전결식 구성에 익숙해 있던 관객들이, 여러 개의 이야기가 앞뒤 구별 없이 혼재된 상태에서 펼쳐지는 ‘펄프 픽션’의 서술 방식에 고개를 갸우뚱거린 것은 당연했다.       타란티노에게 서사의 시퀀스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는, 예측 가능한 전통적 스토리의 전개 방식을 철저히 거부했다. 그래서 그가 마치 저급 소설처럼 스크린에 마구 늘어 놓은 이야기들은 느닷없이 암전 상태에서 끊어지기도 하고, 다시 앞으로 돌아가 다른 인물의 이야기로 전환되기도 한다.     감독 데뷔 전, 비디오 가게에서 일하면서 숱하게 접했던 B급 영화들은 훗날 그의 독창적 연출 스타일에 밑거름이 되었다. 극단적인 폭력과 저질스런 욕설이 담긴 대사에서 볼 수 있듯 그의 영화들은 일정 부분 B급 영화의 향취를 담고 있다.     LA 암흑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펄프 픽션’은 6편의 다른 영화를 보는 것처럼 각기의 에피소드들이 제멋대로 뒤엉켜 있다. 등장 인물들은 하나같이 3류 인생들이고 모두가 범죄에 연루되어 있다.   LA의 한적한 레스토랑에서 두 연인 펌킨(팀 로스)과 허니 버니(아만다 플러머)가 갑자기 강도로 돌변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청부살인 조직의 빈센트(존 트라볼타)와 쥴스(새뮤얼 L. 잭슨), 그들의 두목 마셀러스(빙 레임스)와 부인 미아(우마 서먼), 퇴물 복서 버치(브루스 윌리스)와 그의 연인 등이 등장해 제각기 사건들을 펼쳐간다. 마약 중독, 권투경기 승부 조작, 총기 오발 사고로 인한 살인 등 그들의 스토리들은 서로 아무런 상관없이 보이지만, 종국에는 하나로 연결된다.   ‘펄프 픽션’ 속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사건들은 웃음을 자아낼 수밖에 없는 뜻밖의 상황을 연출한다. 온갖 욕설이 가득한 말장난식의 대사들과 기발한 설정에서 읽혀지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타란티노의 엉뚱한 발상은 가히 천재적이다. 타란티노 영화가 비평이 불가한 ‘언터쳐블’로 인식되는 이유이다.   타란티노의 캐릭터들은 특별히 위트 넘치는 입담과 수다를 특징으로 한다.‘펄프 픽션’의 넘버 윈 입담가는 당연 새뮤얼 L. 잭슨이 연기하는 쥴스다. 그는 식당 화장실에서 그에게 총구를 들이대는 강도를 순전히 현란한 입담만으로 제압해 버린다. 그리고 성경구절 에스겔 25장 17절을 인용, 마치 세상을 떠도는 선교사인 양 폭력과 구원에 대한 ‘설교’를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1991년 ‘정글 피버’(스파이크 리 감독)로 칸영화제 최초의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바 있는 잭슨은 타란티노의 거의 모든 영화에 출연해 공포스러우면서도 수다스런 대체불가의 캐릭터들을 창출해 낸다.   ‘펄프 픽션’은 한물간 스타 존 트라볼타를 다시 할리우드로 불러내 한동안 잊혀졌던 그에게 제 2의 전성기를 안겨준 작품이다. 미아와 빈센트의 댄스 시퀀스는 가장 많이 재현된 아이코닉 장면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주인공으로 알았던 빈센트가 허무하게 죽어 버리는 장면 또한 충격적이었다. 관객의 기대감을 이처럼 한순간에 배반해버린 장면은 영화사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이 영화 이후 트라볼타와 새뮤얼 L. 잭슨은 스크린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최근 3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새뮤얼 L. 잭슨은 “펄프 픽션은 나의 인생을 영원히 바꿔놓았다. 이 영화에 출연한 이후 사람들은 갑자기 나를 멋진 놈으로 보기 시작했다”고 소회를 털어놓았다.     Q&A를 진행한 우마 서먼은 “나의 삶은 펄프 픽션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영화 이후 모든 게 달라졌다. 나는 ‘펄프 픽션’과 함께 진화해 왔다”라고 말했다.     타란티노는 역사상 가장 두터운 마니아층 팬들의 추앙을 받고 있는 감독이다. 반면 대사가 너무 많아 영화가 길게 늘어지는 느낌과 수위 높은 폭력 때문에 대중적인 인기와는 거리가 멀다. ‘펄프 픽션’은 BBC 선정 역대 최고 영화 100편 28위에 올랐고 7백만 달러의 예산으로 미국에서만 1억 달러, 전 세계적으로 2억 1000만 달러가 넘는 흥행을 기록했다. 김정 영화 평론가 ckkim22@gmailcom불가능 걸작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펄프 픽션 영화 방식

2024-10-09

픽션보다 참혹한 난민들의 지옥도, 푸른 장벽

2차 대전의 포연 속, 독일 태생의 유대인 청년이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생의 아이러니를 심도있게 그렸던 1990년 미국의 4개 주요 비평가그룹으로부터 최우수 외국어영화로 선정되었던 ‘유로파 유로파(Europa Europa)’의 아그네츠카 홀랜드 감독의 최근작.   “모든 영화는 정치적이다”라는 그녀의 말대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또한 정치적이다. 폴란드 출신의 거장 홀랜드의 영화들은 대부분 정치적, 역사적 사건에서 위기를 끌어내고 휴머니즘적인 메시지로 결론을 맺는다.   ‘푸른 장벽(Green Border)’은 국경을 넘어 안전한 곳으로 향하는 난민의 이야기다. 유럽의 난민 문제를 다루고 있는 이 영화 역시도 대단히 정치적이다. 홀랜드 감독은 국경의 참혹한 현장을 실제로 폴란드의 정치 현장으로 끌어온다. 영화는 개봉 후 치러진 폴란드 총선에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고 우익의 적대감을 증폭시켰다.     2021년 벨라루스는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흘러들어온 난민들을 폴란드로 보낸다. 숲이 우거진 국경 지대에서 양국의 군인들과 난민들이 충돌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난민들은 음식과 물이 떨어지고 신발도 필요하다. 그들을 몰아내려는 국경수비대의 억압을 견디지 못하고 추위와 굶주림에 비극적 죽음을 맞이하는 난민들이 늘어 간다.     은밀하게 촬영된 영화는 거의 다큐멘터리 톤으로 진행된다. 홀랜드 감독의 노련한 연출 아래 흑백으로 카메라에 담아낸 장면들은 많은 부분 사실에 기반한다. 시리아 가족이 겪는 곤경과 시련을 근접거리에서 관찰하면서 시작하는 영화는 두 나라 국경수비대의 인권침해를 생생하게 폭로한다. ‘푸른 장벽’은 비정한 현실이 픽션보다 더 참혹할 수 있음을 일깨워 주는 영화다.     억압을 행사해야 하는 위치에 있지만 늘 고심하는 국경수비대원 얀을 비롯, 위기에 휘말린 난민들을 도우려는 인권 운동가, 그들을 경계시하면서도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주민들 모두 ‘최소한의 양심’을 마음속에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희미한 선악의 경계 위에 서서 각자의 입장에 따라 정치적 판단을 할 수밖에 없다.     난민 문제는 유럽의 심각한 정치적 이슈임이 틀림없다. 모든 정치적 행위는 인간적 삶의 조건을 만들어내는 행위일 때 비로소 그 의미가 있다. 정치성이 강한 영화이지만 영화의 핵심 메시지는 이데올로기가 아닌, 인본주의에 있다. 억압과 착취의 건너편에서 다가오는 자비와 인도주의의 손길에 홀랜드 감독의 메시지가 있다. 영화 속 홀랜드의 메시지가 자못 육중하다. 김정 골든글로브 심사위원지옥도 픽션 난민 문제 최우수 외국어영화 홀랜드 감독

2024-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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