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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프로크루스테스 대한민국

인터뷰 기사를 써서 밥을 먹고 살지만, 인터뷰만큼 두려운 게 없다. 한 사람의 인생을 기사라는 영생의 형태로 새긴다는 무게 때문이다. 시행착오 끝 얻은 답은 겸손함. 내가 아는 틀에 남을 끼워 넣지 않고, 남의 삶으로 나의 틀을 키우려고 노력이라도 해보려 한다. 그리스 신화 중 방문객이 자기 침대보다 작으면 늘려서, 크면 잘라서 살해하는 프로크루스테스처럼은 되지 말자는 각오. “너는 네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만을 알 뿐”이라는 말에서 자유로운 이는,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도, 김어준 진행자도,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포함해, 아무도 없다.   김건희 여사가 누군가의 팔짱을 꼈다는 이유로 “그런 걸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다”라거나 “불편하다”고 단죄하듯 말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김정숙 전 퍼스트레이디가 프랑스 대통령의 팔짱을 꼈다는 것을 홍보했던 이전 청와대 글은 온라인에 박제까지 돼 있다. 다른 편이라고 떳떳한가. 국민을 대표하는 기관에 출석해 “웃기고 있네”라는 쪽지를 보내는 건 초등학교 교실에서도 지탄받을 일이다. 기회의 평등이 민주주의의 기본이라는 점은 중학교 교과서에 나오는데, 특정 언론사의 취재 기회를 제한하는 행태는 또 어떤가. 결국 대한민국 정치는 프로크루스테스 난장 파티다. 보수와 진보라는 타이틀도 아깝다. 그 가치의 간판이 가져올 표심만을 위해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진자운동을 되풀이하며 국가의 성장이나 국민의 고복격양엔 관심 따위 없는 게 2022년 11월 한국 아닌가.   이태원 참사로 150명이 넘는 생명이 사라졌는데,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얄팍한 수와 손가락질, 윽박만 넘쳐날 뿐이다. 제2의 이태원 참사를 막기 위한 대대적 점검 계획 등은 안 보인다. 팬데믹 마지막 출퇴근길 대중교통은 악다구니 콩나물시루. 대한민국에 사는 이들은 몸과 맘이 모두 고생이다.   그럼에도 비관주의 일변도일 수는 없다. 소설가 김연수는 신간 .이토록 평범한 미래.(문학동네)에 썼다. “인간에 대한 신뢰도 접어두고 싶고.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을 것 같은 때가. 그럴 때가 바로 어쩔 수 없이 낙관주의자가 되어야 할 순간이지. 아무리 세찬모래 폭풍이라고 할지라도 지나간다는 것을 믿는 (중략) 사람들처럼.”   최근 인터뷰한 김덕신 여사는 마비를 딛고 화가로 데뷔한 소감을 이렇게 피력했다. “아프지 않았다면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요. 세상의 모든 아픔엔 감사해야 해요.” 아픔에서도 배우는 겸손한 자세가 빛났다. 대한민국 정치가 얄팍한 진자운동을 멈추고 아픔을 성찰하며 성장할 수 있기를. 이태원 참사 피해자들의 명복을 빈다. 전수진 / 한국 투데이·피플 팀장노트북을 열며 프로크루스테스 대한민국 프로크루스테스 대한민국 프로크루스테스 난장 대한민국 정치

2022-11-16

[열린광장] 내 맘속의 ‘쇠 침대’

‘프로크루스테스 침대’라는 이야기가 있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잡아 늘이고 줄이는 자’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이다. 그는 힘이 엄청나게 센 거인 악당으로 아테네 교외의 케피소스 강가에 살면서 강도질을 일삼았다고 전해진다.   그의 집에는 철로 만든 침대가 있는데, 그는 행인을 붙잡아 자신의 침대에 누이고는 행인의 키가 침대보다 크면 그만큼 잘라내고 행인의 키가 침대보다 작으면 억지로 침대 길이에 맞추어 늘여서 죽였다고 한다. 침대에는 길이를 조절하는 보이지 않는 장치가 있어 그 어느 누구도 침대에 키가 딱 들어맞는 사람은 없었다고 전한다.   말하자면, 이 황당한 신화는 자기 생각에 맞추어 남의 생각을 뜯어고치려는 행위, 남에게 해를 끼치면서까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횡포로 비유되면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Procrustean bed)’라는 심리학 용어까지 만들어 내었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사실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쇠 침대’ 하나쯤은 마음속에 하나씩 감춰 두고 있다고 한다. 이는 각자가 가진 나름의 원칙이라는 얘기다. 따라서 누구나 자기 생각과 가치관이 있으니 일단은 ‘내 기준’의 편견이 우선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를 가장 잘 아는 것은 ‘나’이고 나의 말과 행동을 가장 잘 이해하는 것 또한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허나, 백 번을 양보하여 개인과 작은 집단이 가진 이 ‘쇠 침대’가 이기(利己)와 다양의 산물이라고 치더라도. 나아가 그것이 절제 없이 확대되어 사회 통제의 기준으로 발전한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왜냐면 그런 ‘나’들이 모이고 쌓이면 ‘패거리’가 된다. 그렇게 길들여진 사람들은 평생 ‘우리 편’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기준’을 고집하면서 세상을 재단하려 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사회 구조를 획일적으로 이런 잣대의 침대들을 깔아 놓고 그에 맞추려고 한다면 과연 그것이 옳은 일일까? 그것은 요즘의 서구적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대놓고 그렇게는 못한다.   지금 지구촌 각 곳에서 집권 세력 주변에는 이 ‘프로크루스테스 침대’를 설치해놓고 나라를 자기들 입맛에 맞게 요리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특히 남미 어떤 나라의 통치권자가 그렇고, 내 고향 나라와 그 북쪽에 포진하고 있는 권력자들이 그렇다.   그들은 소리 없이 아무나 잡아다가 침대 길이에 자기들 구미대로 맞추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들의 침대에는 길이를 조정하는 비밀장치가 있어서일까? 그들은 그것을 ‘개혁’ 이니 ‘’척결‘이란 미명으로 프레임을 씌워 상대를 잡아 늘이고 줄이려는 불법을 아무 거리낌 없이 저지르고 있다.   그래서인지 전 시대 왕조 사회 사람들은 처음에는 거의 날마다 그들의 거짓말에 속아 멋모르게 덫에 걸려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레닌과 볼셰비키 혁명 이후 스탈린 시대의 구 소련에서도 이와 대동소이한 일들이 저질러진 것은 우리는 역사에서 배웠다. 그런 가하면 지금의 대명천지 21세기에도 우리 고국 북쪽에서는 이런 식의 ’동물농장‘을 개업한 이후 70년이 흘렀다. 이렇듯 그들은 케케묵은 원조 공산주의자 레닌의 바이블인 선동 선전술을 환생시켜 국민을 편 가르고 우민화(愚民化)시켰다.   하지만 그처럼 흉악한 악행도 동시대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에 의해서 끝장이 났던 사실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테세우스는 프로크루스테스를 잡아 같은 침대에 눕히고 똑같은 방법으로 머리와 다리를 잘라 처치해 버림으로써 이 신화를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아주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마치 못된 놈에게 늘 당하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눈은 눈으로 갚아 준다‘는 아이러니한 심리적 징벌을 보여주기 때문이었다. 보복은 끔찍하지만 때로는 사람들을 열광케 하기도 하니까.   지난 몇 해 동안 우리 조국에서 일어났던 드라마 같은 실제 상황을 여러 기록을 통해 다시 한번 훑어보다가 문득 떠오른 그리스 신화 한 토막이었다. 손용상 / 소설가열린광장 맘속 침대 프로크루스테스 침대 침대 길이 그리스 신화

2022-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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