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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쿠르스크로 간 북한군

지난 8월엔 우크라이나의 역습에 점령당한 러시아 영토로, 요즘엔 북한군의 파병지로 관심의 대상이 된 쿠르스크는 ‘세알못(세계사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인 기자에겐 지명조차 가물가물했던 지역이다. 역사책을 펼쳐보니 러시아는 물론 세계사에 상당한 의미를 지닌 곳이다. 80여년 전 나치 독일과 소련이 총력전을 펼친 격전지로, 제2차 세계대전의 향방을 결정하는 전쟁터였기 때문이다.   1943년 7월 쿠르스크 일대에 히틀러의 독일군 80만 명, 스탈린의 붉은 군대 190만 명이 집결했다. 양측이 동원한 전차가 8000여 대, 항공기가 5000여 대에 이르러 단일 전투로는 사상 최대 규모라고 전사(戰史)엔 기록됐다. 스탈린그라드의 참패 이후 전황을 뒤집을 ‘한방’이 절실했던 히틀러는 전선 돌출부인 이곳에 대공세를 계획했다. 공격을 예상한 스탈린은 민간인 30만 명을 동원해 미리 구축한 총 3000마일의 참호, 40만개의 지뢰에 의지해 방어전을 폈다. 독일군은 결국 방어선을 뚫지 못했고, 전투 이후 소련의 맹렬한 반격에 쩔쩔매며 후퇴를 거듭했다. 나치 패망을 예고하는 변곡점이었던 셈이다.   소련의 후계자 러시아는 매년 프로호로프카에서 기념식을 연다. 1943년 7월 12일 나치 친위대 기갑부대 전차 294대와 소련군 탱크 793대가 맞붙었던 곳이다. 약 3㎢에 불과한 공간에서 ‘전차의 백병전’이 벌어졌고, 8시간 만에 700여 대가 파괴됐다. 당대 최강 전차 ‘티거’를 보유한 독일군이 소련 전차부대를 거의 궤멸시켰지만, 소련의 물량 공세에 입은 피해도 커 더는 진격할 수 없었다. 그날 이후 프로호로프카는 러시아에겐 국난 극복, 애국심의 상징이 됐다. 지난해 무장 반란을 일으켰던 프리고진이 의문의 추락사를 당하던 날, 푸틴 대통령은 프로호로프카에서 기념식을 주재하며 ‘조국에 대한 헌신’을 강조했다.   80여 년이 흐른 지금 전쟁도, 국제관계도 변했다. 전차·항공기 대신 무인기(드론)이 전장의 주역이 됐다. 나치 독일이란 공동의 적에 맞서 소련에 무기와 전비, 정보를 제공했던 미국·영국은 러시아에 대항하는 우크라이나를 지원한다. 전쟁이 숱한 인명을 앗아간다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고기 분쇄기’로 불리는 러시아식 인해전술은 적군과 자국군 모두에 공포의 대상이다.   지난 4일 미국은 쿠르스크에 배치된 북한군이 1만 명으로 늘어났다고 확인했다. 북한군이 이미 전투에 투입됐고, 교전 중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북한과 러시아의 밀착은 유럽뿐 아니라 한반도에도 심각한 안보 위협이다. 북한의 참전, 한국의 대응에 후대 역사가들은 어떤 평가를 내릴까. 천인성 / 한국 중앙일보 국제부장노트북을 열며 북한 쿠르스크 쿠르스크 일대 소련 전차부대 러시아식 인해전술

2024-11-06

[발언대] 어머니의 한(恨)과 북한군 파병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수업이 끝나자마자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집으로 달려와 방문을 열며 “엄마”하고 불렀다. 그런데 방안에는 평소와 달리 섬뜩한 고요함이 느껴졌다. 방 위쪽 구석엔 처음 보는 흰 광목천으로 덮인 것이 있었고, 엄마는 그 앞에  쪼그려 앉아있었다. 엄마의 얼굴은 눈물로 얼룩져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나를 본 엄마는 눈물을 닦고 순간의 침묵을 깨며 말했다. “네 형이 전쟁터에서 돌아왔다.” 그리고 어머니는 광목천을 들어 올렸다. 거기에 숨진 형의 얼굴이 보였다. 전쟁터에 갔던 형이 시신으로 돌아온 것이다.     우리 가족은 6·25전쟁이 한창일 때 피난길에 나서 대구를 지나 경산까지 갔다. 당시 대학교 2학년이던 형은 학도병으로 징집됐다. 그 이후에는 소식이 없다가 낙동강 전투에서 심한 상처를 입고 대구 동산 육군병원으로 이송됐다가 끝내 숨졌다.     형이 숨지고 한동안 어머니는 식음을 전폐하셨고, 얼굴에서는 삶의 의욕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부터 10여년 동안 어머니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가족이 함께 식사할 때도 기계적으로 음식을 입에 넣는 것 같았다. 어머니에게는 망각이라는 만병통치약도 효력이 없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뒷산에 뭍은 형을 생각하며 “얼마나 옷이 젖을까?” 괴로워하셨고, 눈 오는 겨울날이면  “나는 방에서 편안히 지내는데 너의 형은 뒷산에서 얼마나 추운 눈보라를 맞으며 누워있을까?”하며 하염없이 밖을 바라보는 것이 어머니의 일과였다. 부모는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고 일생을 지낸다는 옛말이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북한군 1만여 명이 우크라이나 쿠르스크 지역에 러시아군의 총알받이로 파병됐다는 소식이다. 너무나 한심스럽고 참담한 심정이다. 6·25 전쟁 당시 김일성의 남침으로 국군 사상자가 50만 명이 넘었고, 북한 인민군도 60만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렇게 많은 젊은이가 제대로 인생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희생되었다는 것은 잊지 못할 역사의 참극이다.      지난 1989년 3월 평양을 방문해 북한이 자랑하는 ‘능라도 체육관’ 건설 현장을 방문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앳돼 보이는 인민군 병사들이 건설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본 인민군 병사들의 모습이었다. 허름한 군복에 체격은 왜소했다. 그들의 나이가 18~21세 정도인데 남한의 또래 젊은이보다 체격이 훨씬 작았다. 체격이나 얼굴 모습은 한국의 중학교 3학년에서 고 1학년 정도의 소년티를 벗어나지 못한 듯한 모습이었다.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자, 수줍고 약간은 두려워하는 듯한 순진하고 어린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북한군의 우크라이나 전쟁 파병 관련 뉴스가 나올 때마다, 북한 방문 당시 가까이서 보았던 순진하고 앳된 인민군 병사들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나이가 들어서일까, 아니면 동족이라는 연민 때문일까?  그들도 사랑하는 형제자매가 있을 것이고, 따뜻하게 보듬어주는 부모가 있을 것 아닌가.   러시아의 젊은이들을 대신해 아직 피어나지 못한 우리 동족 젊은이들이, 김정은 체제 유지를 위해 희생된다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우크라이나의 쿠르스크 지방으로 끌려간 북한의 어린 병사들의 어머니들도, 나의 어머니처럼 가슴에 피멍이 드는 한(恨)을 품고 사는 삶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이영송 / 한미문화교류재단 회장발언대 북한 어머니 한동안 어머니 인민군 병사들 우크라이나 쿠르스크

2024-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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