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이 흘러도 애틋한, 그 이름 ‘카사블랑카’
━ 개봉 80주년 ‘카사블랑카’ 모로코 카사블랑카의 ‘릭스 카페’(Rick's Cafe)는 1942년 제작된 불멸의 명작 '카사블랑카'의 주무대였다. 그러나 정작 영화는 모로코에서 단 한 장면도 촬영하지 않았다. 영화를 제작할 당시, 북아프리카에서는 전쟁이 한창이었기 때문이다. 올해로 개봉 80주년을 맞은 '카사블랑카'는 반나치와 프랑스 레지스탕스를 소재로 한 희곡 '모두가 릭의 카페로 온다(Everybody Comes to Rick’s)'를 바탕으로 했다. 제작사 워너브러더스는 당시 기록적인 액수인 2만 달러를 지불하고 희곡의 판권을 사들여 프랑스 레지스탕스를 옹호하는 내용의 ‘프로파간다’ 영화를 기획했다. 그러나 반나치 프로파간다라는 당초의 기획 의도와는 달리, 전쟁의 극한 상황에서 선택의 기로에 선 남녀 주인공의 사랑과 오해, 그에 따른 번민과 고뇌를 그린 ‘카사블랑카’는 역사상 가장 로맨틱 영화로 자리매김한다. 이 영화는 작품성 외에 국제정치 상황에 힘입어 크게 흥행을 거둔다. 연합군이 북아프리카를 공격한 지 18일 만인 1942년 11월 26일, 추수감사절에 시사회를 열어 미국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공교롭게도 때를 맞춰 루즈벨트 대통령과 처칠 영국 총리가 카사블랑카에서 회담을 열어 최고의 홍보 효과를 거뒀다. 이어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도 상영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마이클 커티스 감독의 탁월한 연출과 험프리 보가트, 잉글리드 버그만 등의 명연기가 더해져 영화는 그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8개 부문 후보에 올라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을 받았다. 1998년 미국영화협회(MPAA)는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로 ‘시민 케인’에 ‘카사블랑카’를 2위에 랭크했고 영화작가협회(WGA)는 ‘카사블랑카’의 시나리오를 역대 최고 각본으로 선정했다.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프랑스령 모로코 카사블랑카의 시내에 위치한 ‘릭스 카페’를 주무대로 전개된다.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가려던 유럽인들이 카사블랑카로 몰려온다. 당시 미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던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가기 위해서다. 릭스 카페는 비자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술과 음악을 즐기며 전쟁의 아픔과 기다림의 무료함을 달랠 수 있는 오아시스와도 같은 곳이었다. 파리에서 연인과 헤어진 후 사랑의 상처를 뒤로하고 카사블랑카에서 술집을 운영하는 릭 블레인(험프리 보가트). 그는 전쟁의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중립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파시즘에 맞서 싸우는 반대세력을 지원하고 있다. 경찰서장 르노는 릭에게 반나치 레지스탕스의 리더인 빅터라즐로가 카사블랑카로 들어온다는 정보를 미리 알려준다. 독일 병사가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나치의 검문검색으로 긴장감이 드리워진 가운데 릭에게 실연의 아픔을 안겨주었던 일사 런드(잉그리트 버그만)가 남편 빅터라즐로(폴 헨레이드)와 함께 찾아온다. 이들 역시도 통행증을 얻기 위해 닉의 도움이 필요하다. 일사와의 예상치 못한 만남에 릭은 혼란스럽다. 릭과 일사에겐 파리에 남기고 온 사연이 있었다. 나치가 파리를 점령하자 두 사람은 함께 떠날 것을 약속하고 기차역에서 만나기로 한다. 그러나 일사는 갑자기 짤막한 메모 한장으로 일방적인 작별을 고했고 결국 릭만 홀로 기차에 오르면서 두 사람은 헤어졌었다. 다시 재회한 일사에 대한 사랑과 욕망이 깊어만 가지만 릭은 결국 대의를 위해 사랑을 포기한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랑하지만 헤어져야 하는 릭과 일사, 카사블랑카 공항에서의 그들의 이별 장면은 아직도 영화 팬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카사블랑카’는 많은 우연이 겹쳐서 명작이 된 영화다. 제작사는 처음에 ‘위대한 서부’, ‘벤허’의 감독 윌리엄 와일러에게 연출을 의뢰했지만, 결국 마이클 커티스가 연출을 맡게 된다. 여주인공 일사 역은 원래 버그만이 아니라 미셸 모르강이 맡게 될 것으로 예견됐었다. 심지어 릭 역조차도 보가트에 앞서 로널드 레이건이 물망에 올랐다. 레이건이 이때 카사블랑카(하얀 집이라는 뜻의 스페인어)에 캐스팅되었더라면 추후 화이트 하우스에 입성하는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8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카사블랑카’는 단 한 번도 리메이크 제작이 시도되지 않았다. 리메이크가 원작의 무게감을 이겨낼 수 없을 것이란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흥행이 보장되는 ‘카사블랑카’의 리메이크가 시도조차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여전히 의외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만인의 연인’, 그래서 전설이 되어버린 버그만과 몰입할 수밖에 없는 흡입력을 발산하는 보가트의 연기는 이미 시대를 넘어선 대체불가의 황홀한 케미 연기로 인식되어 버렸기 때문은 아니었을지. ‘카사블랑카’는 서로를 흠모하는 두 남녀, 남편이 있음에도 그에 대한 사랑을 숨길 수 없는 여인의 욕망, 그 여인을 너무도 사랑함에도 대의를 위해 사랑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남자, 그리고 두 남녀의 사랑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남편의 아량과 불안이 어느 한순간도 품격을 잃지 않는 가운데 비교적 빠른 템포로 진행된다. ‘카사블랑카’는 “Here's looking at you, kid”(이렇게 당신을 보고 있잖아)라는 명대사를 낳았다. 이별로 인한 상처에서 아직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던 자신을 찾아온 그녀에게, 다시는 나를 가지고 놀지 말라는 경고와 사랑이 함께 담겨있는, 냉소적이지만 감성주의자인 릭의 캐릭터를 상징하는 대사이다. 릭과 일사는 두 번 헤어진다. 첫 번째 이별은 남편으로 인한 상황 때문에 일사가 일방적으로 고한 이별이었다. 두 번째 이별은, 후회할 것을 알지만 일사를 떠나 보내기로 결심한 릭의 숭고한 사랑 때문이다. 이들의 운명적 만남과 필연적 헤어짐 사이에는 “We’ll always have Paris.” (우리에겐 파리의 추억이 있잖아)라는 또 다른 명대사가 있다. 마지막 순간, 주저하는 일사에게 작별을 고하는 릭은 이후 영원한 로맨티스트로 영화 팬들의마음속에 자리한다. ‘따듯한 남자’와 험프리 보가트가 ‘동의어’인 이유이다. 일사는 평생 릭을 생각하며 살았을 것이다. 김정 영화평론가카사블랑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