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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아저씨의 칠순 잔치

동갑내기 아저씨의 칠순 잔치에 다녀왔다. 칠순 나이를 어떻게 계산하는가를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있는데, 환갑은 만 나이 60세에 하는 것이고, 칠순이나 팔순은 한국식 나이 70과 80이라고 한다. 만 나이 통일법이 시행되며 칠순을 만 나이로 따지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내가 기억하는 큰 잔치는 외할아버지와 어머니의 환갑잔치다. 외할아버지 때는 이틀 전부터 전을 부치고 음식을 장만해 크게 상을 차려 잔을 올렸다. 자식들이 잔을 올릴 때 중년의 여인이 곁에서 소리를 했고, 하루 종일 손님들이 오갔다.   어머니의 환갑잔치는 타운의 중식당에서 했는데, 꽤 많은 손님이 왔었다. 그때도 상을 차려 잔을 올렸는데, 할아버지 때와는 달리 상에 오른 한과가 장식용이었다. 나와 형제들이 어머님 은혜와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 드렸고, 노래방 기계를 틀어 몇몇 하객이 노래를 불렀다.   아저씨는 칠순 잔치를 하겠다고 진작부터 공언했었다. 칠십 평생 살아오며 자신에게 이런저런 영향을 주었던 사람들과 함께 45년 이민의 삶을 돌아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준비한 잔치다.   파티 장소에 가니 곱게 차려입은 아저씨와 숙모, 아들과 딸 가족이 우리를 반긴다. 친인척, 동창, 교우, 자녀의 친구 등 100여 명의 하객이 모였는데, 멀리 버지니아와 한국에서 온 손님들도 있었다.   아저씨는 45년 전 미국에 와, 불법체류자로 힘든 시절을 보내며 자수성가한 아메리칸드림의 산 증인이다. 굳이 촌수를 따지자면 돌아가신 아버지의 6촌 동생, 내게는 7촌 당숙이다. 하지만 친척이 귀한 실향민들이라 우리에게는 가까운 친척이다.   나이는 동갑이지만 내게는 형과 같은 존재다. 아저씨의 등에 업혀 난생처음 동대문 야구장에 가서 고교야구를 보았다. 낙산 해수욕장에 가서 바다를 본 것도 그의 덕이다. 그의 등에 업혀 바다에 들어갔고, 모래사장에 앉아 별을 보며 그가 치는 기타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2년 전에 칠순이 지났다는 선배들이 나와 오중창을 부르고, 손자 손녀들이 준비한 영상인사가 돌아가고, 한국에서 온 손님의 노래와 클라리넷 연주, 그리고 이어진 노래방으로 분위기는 고조됐다. 참석한 하객들이 잘 먹고 즐겁게 놀아주기를 바라던 아저씨의 배려 덕에 모두들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돈과 명예는 살기 위한 수단일 뿐, 삶이란 결국 사람들과의 인연, 그리고 우리가 그들과 엮이며 만들어 가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한평생 희로애락을 함께했던 사람들과 한자리에 모여 지나온 삶을 추억하고 감사를 나누는 것은 나름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파티의 즐거운 여흥보다 더 좋았던 것은 오랜만에 만난 친인척들, 서로를 잘 모르던 2, 3세대들이 서로 친해지는 모습이었다. 잔치를 준비한 아저씨가 바란 것이 바로 이런 점이 아니었나 싶다. 우리의 후손들이 서로를 알고 친하게 지내는 모습….   그동안 칠순이나 팔순 잔치에 큰 관심이 없었다. ‘세월 지나 먹은 나이 뭐 대단하다고 잔치까지?’라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 잔치를 보며 다소 생각이 바뀌었다. 심적, 재정적으로 여유가 된다면, 이런 잔치도 할만하다.   아저씨, 멋진 잔치였습니다. 10년 후 팔순 잔치가 기대됩니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많은 식구들이 모이겠지요? 고동운 / 전 가주공무원이 아침에 아저씨 칠순 칠순 잔치 칠순 나이 동갑내기 아저씨

2025-01-13

[이 아침에] 칠순에 졸업장을 받다

육 학년 칠 반에 입학했다. 가슴에 손수건을 단 아이처럼 설레며 컴퓨터를 열었다. 이국땅에서 50여 년이 지나서야 단발머리 문학소녀의 꿈을 찾았다. 뒤늦게 시작한 탓에 은퇴 후 늦깎이 학생이 되었다. 경희사이버대학 미디어 문예창작학과에서 문학에 대한 초석을 닦았다. 문학사와 시, 수필, 아동문학, 소설, 희곡, 논술과 독서지도까지 섭렵하며 새벽잠을 깨웠다. 많은 책을 읽고 감상 리포트를 쓰며 몰두할 수 있어 좋았다. 내가 쓴 시, 동화, 소설을 학과 게시판에 올리면 학우들이 읽고 자신의 소견이나 평을 써 올렸다. 그 후 실시간 줌으로 교수님과 함께 합평 시간을 가졌다. 합평을 들은 후 교정하고 퇴고한 글을 다시 제출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내 글쓰기 실력이 향상되지 않았을는지.   교양과목을 수강하며 지식의 깊이를 더했다.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묵은 뇌를 새롭게 하여(renew) 한결 젊어지는 것 같았다. 게다가 태평양을 건너 온라인 수업을 통해 한국어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장소와 시차를 극복하며 공부할 수 있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졸업이란 학생이 학교 규정에 따른 소정의 교과 과정을 마친다는 의미다. 나 또한 졸업이라는 과정을 통과했다. 시골 초등학교 졸업식에서 서울 중학교로 진학한다는 기대로 부풀었다. 중학교 졸업식 날, 쏟아지는 함박눈이 내 앞길을 축복해주었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고등학교 졸업식에선 대학의 좁은 문을 통과해 넓은 학문의 길에 들어서고자 하는 열망으로 차 있었다. 교육대학 문을 나설 땐 긴장했다. 교육 현장에 나가서 아이들을 지도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으리라.     미국 생활에 적응하면서 먼저 유아교육(Early Child Development) 과정을 공부하고 졸업장을 받았다. 커뮤니티 2세 교육의 뜻을 펼치고자 어린이학교를 설립해 30년간 운영했다. 해마다 졸업식을 성대하게 준비했다. 그들의 성장과 활동을 담은 앨범을 제작하고 트로피를 수여하며 마음껏 축하해 주었다.     그러나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축하객 없는 졸업식을 해야 했다. 아쉬운 마음을 떨칠 수 없어 식장을 정성껏 마련했다. 졸업생 한 사람씩 순서를 진행하며 학교 문을 내보내야 했다. 마스크 속에서 안아줄 수도 없는 서운함을 남긴 채. 그 졸업식을 마지막으로 평생 해오던 일을 내려놓으며 은퇴했다.   내 나이 칠십이다. 학교에서 요구하는 학점을 이수함으로 졸업이라는 문에 이르렀다. 돋보기 속 아픈 눈을 비비며 책장을 넘겼다. 새벽 3시에 열리는 실시간 합평 세미나를 위해 밤잠을 설치는 어려움을 겪었다. 형설의 공을 쌓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겠지. ‘해냈구나! 잘했다!’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길 원했다. 졸업장에 금테를 두르는 걸로 대신할까? 우스갯소리를 던지며 나를 위한 졸업 축하 카드를 만들어 보았다.   졸업을 한 단계에서 할 몫을 다 하고 새로운 길로 나아간다는 의미로 남기고 싶다. 남은 내 인생에 또 다른 출발로 다가온다. 이제 배운 이론과 실기를 좋은 글쓰기에 적용할 터.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오직 내가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  이희숙 / 수필가이 아침에 졸업장 칠순 고등학교 졸업식 중학교 졸업식 서울 중학교로

2024-02-22

[이 아침에] 2월의 바닷가

“엄마, 생일 선물로 무얼 받고 싶으세요?”     딸의 물음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딱히 필요한 물건도 없는 듯했다. 가지고 있던 물건도 정리해야 할 때가 아닌가. 친구가 칠순 기념 여행을 다녀왔다고 했다. 몸이 불편한 우리 내외는 여행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동안 힘에 부치도록 일했으니 이제 쉬라며 운전대까지 내려놓은 채 ‘집콕’의 주인공이 되었다.      “응. 그냥 가까운 바닷가를 걷다 오고 싶다”라고 소박한 바람을 전했다. 둘째 딸이 김밥을 싼다고 분주했다. 어렸을 적 가족 여행에서 먹던 김밥의 추억이 생각났던 게다. 오이, 시금치, 달걀, 우엉, 참치, 햄은 저마다 고유한 색과 맛을 뽐내며 어우러졌다. 발대 속에서 꾸우욱 눌려 서로 조화를 이루었다. 생일 소풍은 김밥만으로 충분했다. 우리의 생이 성취한 것이 아니고 주어진 것이라는 걸 깨달으면서.     나의 귀가 엄마의 배 안에서 세상으로 나온 귀빠진 날. 나에게 연결된 탯줄이 잘리고 공기를 가르는 울음소리가 터져 나와 한 생명이 독립했던 날이다. 벅찬 기쁨으로 축하받았을 것이다. ‘참 잘했다’라며 나를 다독이고 싶은 날이다.     해마다 새 달력을 받으면 가족의 생일을 빨간색으로 기록한다. 가족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다. 어릴 적엔 “내가 나이가 더 많아”라며 손가락을 펴 자랑했다. 그땐 나이가 많으면 세상을 이긴 듯 어깨에 힘을 주었는데, 이젠 나이의 숫자 하나가 늘어나며 나이 듦의 무게가 더해진다. 그 무게가 버겁게 느껴지며 마음가짐을 바꾸어 본다. 겉보다는 내면을, 결과물보다는 관계 중심으로 전환해 보련다. 연륜 속 깊어져 가는 시간이 선물이라 생각한다.     올해가 내 칠순이란다. 한국 나이로 한 살을 보태어 70이라고 한다. ‘7’ 자가 내 앞에 다가오는 것이 두려워 내년으로 미루기로 한다. 자녀들이 기억하기 좋도록 음력 2월을 양력 2월에 지키니 더 빨라져 이른 봄이 된다.     2월에                     꽃 시샘 추위를 맞으며/ 30일을 채우지 못한 탓에                             열두 달 중 가장 짧은 다리로/ 빈 들 지나 봄 마중 간다   무녀리로 태어나/ 얼어있던 들판에/ 계절의 선두로 나서     봉긋봉긋 꽃망울을 여는/ 그 산도(産道)를 밟는다     어두운 세월의 흙 속에서/ 견디며 쇠약해진 몸으로                 겨울을 마감하는 문턱에서/ 썩어져 씨앗을 가르고     생명을 대지로 뿜어내며/ 봄빛으로 바꾸어 낸다       Montage Laguna Beach를 찾는다. 야생화가 해변을 노랑, 주황, 보랏빛으로 장식한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꽃망울을 피워내고 있다. 흔들리는 애잔한 모습이 대견스럽다. 보물섬이 윤곽을 드러낸 바위 등선 위를 정복하는 아이들의 등이 햇빛에 반짝인다. 넘실거리는 파도는 바위에 부딪혀 하얀 포말을 뿜어내고 깊은 바다 표면은 윤슬 되어 빛났다. 찰랑이는 파도 결 따라 모래사장을 걷는다. 울퉁불퉁 푹 파여 발걸음을 떼기 힘들다. 새 발자국을 따라가 본다.   한참 후 내 발자국을 남겼다고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니 밀려오는 파도에 쓸려 사라져 흔적이 없다. 우리 생의 지나간 자취도 고요뿐일 것. 그런데 파도가 휩쓸고 간 모래 위는 단단하고 매끄러워 걷기가 쉽다는 걸 알았다. 곱게 내려앉고 있는 석양을 바라본다. 맛있는 인생을 차려 놓는 생일 식탁이다.     주치의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미스에스 유, CT 결과에 이상이 없습니다.”  이희숙 / 시인·수필가이 아침에 바닷가 한국 나이 가족 여행 칠순 기념

2023-02-22

[이 아침에] “하던대로 하세요”

“모델처럼 걷기로 했어”라고 말했을 때 후배는 빙긋 웃으며 “그냥 하던 대로 하세요”라고 했다. 모델처럼 엉덩이를 꼬며 걷는 것은 아니고 할머니처럼 엉거주춤 안 꾸부려 걷고 당당하게 어깨 펴고 걷는 거라고 설명했다. 유튜브에서 모델들 걷는 모양 흉내 내며 연습한 대로 어깨 뒤로 제치고 두발을 교차해가며 직선으로 걸으면 된다고 시범을 보인다. 앞만 보고 직선으로 걸으려고 몸을 틀다가 다리가 꼬여 넘어지면 큰일 난다고 주의를 준다. 몇달 전 한인 어른 한 분이 두 차례나 넘어져 골절상을 당해 수술을 받는 일이 발생했다.     고래심줄 같은 고집을 아는 터라 “그럼 하고 싶은대로 하세요”로 결론을 맺는다.   애들이나 손주들에게 모델 워킹 연습한다는 사실이 들통나면 정신감정 받을 확률도 약간 있어 일단 비밀로 하고 실행에 착수한다.   시작이 전부다. 일단 해뜨기 시작할 이른 아침 동네 보도를 산책하며 모델 워킹을 하기로 한다. 보는 사람도 없고 봐도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나름 연구한 대로 일단 허리에 힘주고 똑바로 서서 산만해 보이지 않도록 시선을 고정한다. 자신 있게 가슴을 살짝 내밀고(그동안 쫄아서 작은 가슴을 팔로 가렸다)두 팔을 뒤로 제치고 스윙모션으로 가볍게 움직인다.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다리와 발동작! 발을 일직선 상에 번갈아 놓으며 걸어야 하는데 이때 무릎을 살짝 굽히며 다리가 스쳐 지나가게 한다. 이때 모델들은 엉덩이를 섹시하게 비트는데 이 부분은 수정! 나이 고려해서 가볍고 유연하게 움직인다.     내가 어떤 꼴로 걷는지 나는 잘 모른다. 여성스럽게 안 걷고 발을 앞으로 내던지듯 터벅터벅 걷는 건 안다. 자서전 출간 겸 어머니 칠순 잔치로 한국 갔을 때 고등학교 단짝이 “왜 몸을 굽히고 걷니? 어깨 펴고 걸어”라고 말했다. 동창들 틈에서 너무 튀고 건방져 안 보이려고 겸손 떨다가 꾸부정 아줌마로 전락했다. 한국에서 산 시간보다 미국에서 보낸 날이 더 오래됐지만 당당하면 잘난 체 해 보이고 수그리면 빈티 난다고 측은해 할 것이다. “너무 애쓰지마. 미국에서 살던 대로 해. 어디서나 너답게 살아!”라고 친구는 내 손을 꼭 잡는다.     “우리 엄마 좀 말려주라. 80이 넘었는데 다운타운에 자기 화랑을 오픈 한대” 변호사 친구의 토로다. 그 어머니는 평생 유명 화랑에서 수석 큐레이터로 일했는데 나이(?) 때문인지 해고됐다. “너 보고 사업자본 대라 안 하시면 뭐가 문제? 하고 싶으신 일 하시게 해드려”라고 답변했다.   나이 들수록 하고 싶은 일하고 살면 생이 즐거워진다. 나이 들었다고 포기하고 살면 식은 죽 먹기로 밍밍하게 산다. 똑같은 반복, 매일 같은 음식, 헐렁한 옷 입고 늘어져 살면 할망구가 되는 건 시간문제다.  .     나는 꼭두새벽에 일어나 해 뜨는 찬란한 시간을 혼자 즐긴다. 어제보다 다른 오늘, 빛나는 내일을 위해 예쁜 옷 골라 입고 단장을 한다. 나이 들어 꾸미는 화장은 예뻐 보이려는 것 아니고 못난 걸 감추는 작업이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유쾌한 모습으로 사랑의 말들 나눌 수 있게 언어를 가다듬는다.     내 나이에 모델로 발탁될 일은 빅뱅이 일어나는 것처럼 가능성이 희박하다 해도 꼿꼿이 서서 살랑살랑 봄바람처럼 걸을 생각을 하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마지막까지 열심히 배우다 죽으면, 죽는 것도 한갓 생을 마감하는 공부가 아닐런지. 이기희 / Q7 Fine Art 대표·작가이 아침에 모델 워킹 이때 모델들 어머니 칠순

2022-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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