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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개혁가인가, 전임자 2.0 버전인가

지난달 핸콕 파크에 있는 호화로운 LA총영사 관저. 취임 축하행사는 거의 두 시간 가까이 진행됐지만, 아시아계 미국인 최초로 LA경찰국(LAPD)을 이끌게 된 주인공은 아직 무대에 오르지 않았다.   지난달 LAPD의 제58대 수장으로 취임한 도미니크 최 임시 국장은 최근 몇 년간 언론의 헤드라인을 오르내리며 경찰 조직을 성가시게 했던 여러 논란을 피해 비교적 낮은 자세를 유지해 왔다.     이날 행사에서 수십 명의 연사들은 연달아 마이크를 잡고 최 국장의 겸손함을 칭찬했다. 사회를 맡은 KCAL 뉴스 앵커인 수지 서는 “그는 이 모든 것, 이런 스포트라이트, 호화로운 파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로 주인공을 소개했다.   마침내 기립 박수를 받으며 마침내 무대에 오른 최 국장은 본인의 연설이 “약간 충격적일 것”이라고 농담을 던졌다. 28년 경력의 베테랑 경관인 그는 낮고 안정된 목소리로 전임자인 마이클 무어 전 국장로부터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경찰 조직을 맡게 되어 얼마나 영광인지 소감으로 말문을 열었다.   최 국장은 보좌관으로, 이후 수석 보좌관으로 무어 전 국장과 함께 일했다. 하지만 무어 전 국장이 물러나면서 LAPD가 여러 가지 문제에 직면한 상황에서 두 사람의 친밀함은 오히려 우려의 대상이 되고 있다.   경관의 사기가 저하되고 있고, 특정 지역에서 폭력 범죄가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으며, 지난해 이맘때보다 경관의 총격 사건 건수는 더 많아졌다. 또 다가올 올림픽과 월드컵을 대비해 치안을 강화해야 하지만 여전히 인력 충원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난달 LA타임스와 인터뷰에서 최 국장은 차기 국장이 채용될 때까지 본인의 역할을 ‘조직의 안정’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난 대화를 압도하고 누군가 위에 군림하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다”면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더 많은 것을 배우는 쪽이라고 생각한다”고 자신을 평가했다.   LAPD는 1만 명이 넘는 직원으로 구성된 조직이자 항상 언론의 집중적인 감시를 받는 경찰국이다.전임자와 마찬가지로 최 신임 국장도 거대한 조직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세부적인 사항에 정통한 정책 전문가로 정평이 나있어 국장직에 오를 수 있었다. 최 국장이 전임자와 다른 점은 조직내 직급이 높아지면서도 권한을 나누려는 의지에 있다고 최 국장의 지지자들은 말한다.   부임 후 첫 몇 주간 그의 공식 일정은 아침 방송 출연과 핸콕 파크와 같은 축하 행사로 채워졌다. 하지만 조직 내부에서 최 국장은 본인의 지휘 아래에선 상황이 달라질 것이라는 점을 직원들에게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LAPD 관계자에 따르면 무어 전 국장은 세세한 것까지 일일이 통제하는 마이크로 매니저인 반면, 최 국장은 좀 더 협력적인 리더십 방식을 취했다고 한다. 이 관계자는 최 국장은 고위 간부회의에서 직원들이 원하는 변화에 대해 말하도록 독려했으며, 전임 국장에 호의적이지 않은 베테랑 경관들에게 개인적으로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무어 전 국장의 지지자들은 그를 경험 많은 리더이자 시의 정치 및 노동 환경을 잘 이해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일부 고위 간부들 사이에서 무어 전 국장의 운영 방식에 대한 불만이 커졌고, 이는 지난해 가을 캐런 배스 시장과의 한 회의에서 드러났다.   미디어 전략가이자 전 LAPD 예비 경관 출신인 에릭 로즈는 최 국장에게 ‘무어의 버전 2.0’이라는 비교는 불공평하다고 평가했다. 로즈는 “최 국장은 다른 사람들과 공로를 기꺼이 나누는 독립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며 “그는 무어가 내리는 다양한 지시를 수행했을 수도 있지만, 이는 부국장이라면 누구나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최 국장의 임명은 조직의 새로운 출발이라는 점에서 환영을 받았다. 그가 국장으로 발표되자 다운타운 LAPD 본부 8층에서 박수가 터져 나온 것으로 알려졌을 정도다. 그러나 그 후 몇 주 동안 최 국장은 본인이 내린 결정 중 상당수가 무어의 영향을 받은 것 아닌지 부하 직원들로부터 지적을 받았다.   최 국장이 임명된 후 첫 번째 조치는 친 무어파로 알려진 디비시 존 샤 캡틴의 승진 발령이다. 샤 캡틴은 무어 전 국장이 주재한 배스 시장의 USC 장학금 특혜 의혹 관련 회의에 참석한 인물 중 한 명이다. 이 자리에서 배스 시장을 수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고 감사부 소속 수사관 2명이 내부 고발해 논란이 일었다.   이후 몇달만에 갑작스러운 은퇴를 발표한 무어 전 국장은 수사관들의 배스 시장에 대한 수사 지시 의혹에 대해 ‘명백한 허위’라고 말한 바 있다. 무어 전 국장 뿐만 아니라 배스 시장 역시 이 의혹이 무어의 퇴임과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이 의혹에 대한 감찰관실의 조사는 아직 진행 중이다. 샤는 확인을 요청한 LA타임스 이메일에 응답하지 않았다.   여러 논란에도 배스 시장은 LA총영사관저에서 열린 행사에 들러 상당한 시간을 할애해 연설까지 할 정도로 최 국장을 지지하고 있다. 배스 시장은 연설에서 “최 국장의 팔을 비틀어 ‘임시로 말고 (정식) 국장을 하라’고 말하려 했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 국장은 정식 국장직에 오를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시 관계자는 정식 국장 인선 절차가 8월까지 계속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으며, 그 시점에서 최 국장은 물러나고 부국장직으로 다시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   사우스LA에서 자동차 딜러로 일했던 아버지와 한인타운에서 미용실을 운영했던 어머니를 둔 최씨는 오렌지카운티에서 자랐다. 10대 시절에는 2000년에 문을 닫은 크렌쇼 애비뉴의 심야 오락 시설인 홀리데이 보울에서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1992년 로드니 킹을 비디오로 구타한 경찰관 4명이 무죄 판결을 받았을 때 그는 USC 회계학과에 재학 중이었다. 그는 그 후 무정부 사태와 같았던 폭동에 대해 “커뮤니티의 좌절감과 긴장이 쌓여간 과정은 이해한다. 하지만 그 방식에 동의하지는 않는다”라고 말했다.   사우스LA를 잘 이해하고 소탈한 성격 덕분에 최 국장은 승진을 거듭하는 동안에도 지역 사회에서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아시아계 경관협회인 LEAAP의 회장을 맡고 있는  LAPD 제니 웡 루테넌트는 “많은 고위 경찰관들이 공개석상에서 일종의 우월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며 “하지만 최 국장은 정말 현실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마치 할아버지와 대화하는 것 같은 진솔함을 느낄 수 있다”고 평가했다.   최 서장이 직면한 가장 시급한 과제 중 하나는 LAPD의 규모가 축소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경찰 지원자가 늘고는 있지만, 시의 예측에 따르면 회계연도가 끝나는 6월까지 예상되는 경관수는 8908명에 불과하다. 이는 지난 20년 동안 가장 낮은 경찰 인력 수준이자 배스가 밝힌 목표인 9500명에 훨씬 못 미치는 수치다. 최 국장이 “인력이 너무 부족해서 내부적으로 긴장감이 팽배하다”고 털어놓은 이유다.   무어 전 국장 재임시절과 마찬가지로 현재 LAPD를 상대로 경관들의 총격 사건 발생 건수를 줄여야 한다는 압박감이 여전히 높다. 최 국장 취임 이후 현재까지 4건을 포함해 올해 9건에 달한다. 이는 작년 같은 시점의 6건에 비해 높은 수치다. 더구나 이 중 두 건은 총격으로 사망한 사건이다.   최 국장은 경관들이 공공 안전에 대한 실질적인 위협이 없는 상황에서는 더 현명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종종 우리는 상황을 악화시키고 구금할 필요가 없는 사람을 체포하는 경우가 있다”라며 “현장에서 한걸음 뒤로 물러나 거리를 두고 모니터링하며 지켜봐야할 때도 있다”고 말했다.   일부 고위 간부들은 최근 경찰이 권총을 들고 있던 정신질환자를 사살한 사건에 대한 최 국장의 대처에 대해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지난 3월7일 54가와 맨해튼 플레이스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의 비디오 영상에는 경찰과 대치중이던 한 남성이 가짜 총을 버린 뒤에도 한 경관이 계속 총을 쏘는 장면이 담겨 있다.    LAPD 내부 규정에 따르면 총격 사건에 연루된 경관은 14일이 지나면 다시 현장에 복귀할 수 있다. 그러나 최 국장은 해당 경관에게 복귀를 허용하지 않고 추가 심리 상담을 받도록 지시해 현장에서 좀 더 떠나있도록 했다.   최 국장은 “내가 할 일은 전체 조직 구조를 바꾸고 모든 사람을 옮기는 것이 아니다”면서 “내가 강조하거나 우선순위를 두는 분야는 무어 전 국장과는 조금 다를 수 있다. 무어의 방식이 아니라 도미닉 최의 방식으로 치안을 수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리보 재니 기자전임자 개혁가 임시 국장 신임 국장 경찰 조직

2024-04-17

[살며 생각하며] 수황정의 비극

명나라는 말기에 이르면서 환관들의 발호와 부정부패로 사방에서 도적떼들이 들고 일어났다. 당시 원숭환(袁崇煥)은 명나라 최고의 명장이었다. 원숭환은 사르후 전투 이후 명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던 누르하치를 영원성 전투에서 패퇴시키고, 그의 아들인 홍타이지의 공격마저 막아내는 등 무너져 가던 명나라를 지탱하고 있었다.    원숭환은 후금의 홍타이지가 가장 두려워했던 인물이었다. 홍타이지는 1629년 10월, 영원성과 산해관을 우회하여 베이징으로 침입했다. 원숭환의 허를 찌르고 곧바로 황성을 노린 기습작전이었다. 황성 포위 소식에 경악한 원숭환은 수천의 병력을 이끌고 베이징으로 달려와 베이징 부근에서 악전고투 끝에 후금군을 격퇴했다.   그러나 원숭환에게 반감을 품은 환관들이 황제에게 무고했다. 대학사 온체인은 “원숭환이 홍타이지와 내통하여 후금군을 끌어들였다”며 목을 치라고 상주했다. 평소 의심이 많고 대국을 볼 줄 올랐던 숭정제는 결국 홍타이지가 꾸민 반간계(反間計)를 덥석 물고 만다. 홍타이지는 황성에서 물러나면서 환관 두 명을 사로잡았는데 “원숭환이 베이징을 탈취하기로 후금과 밀약했다”는 소문을 흘린 뒤 이들을 풀어준다.    돌아온 환관들로부터 보고를 받은 숭정제는 대노했다. 원숭환은 베이징의 저잣거리에서 책형(磔刑)을 당했다. 기둥에 묶어 놓고 온몸의 살점을 발라내는 잔혹한 처형이었다. 〈명사(明史)〉의 사관은 이 대목에서 “숭정제는 스스로 장성을 허물어 나라의 멸망을 재촉했다”고 적었다.     숭정 17년(1644)은 중국 역사상 중요한 해였다. 3월 15일 숭정제의 집무실에 이자성으로부터 통첩이 날아들었다. “18일에 유주(幽州)에 이를 것임.” 유주란 베이징을 뜻하는 말이다. 이자성이 3일 후에 베이징을 유린하겠다는 협박장이었다. 남은 시간은 이제 3일밖에 없었다. 이자성의 반란군은 예정보다 빠른 3월 17일 베이징성 밑에 도착했다. 베이징성은 무방비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겨우 15만 명의 군사가 있었으나 그나마 노약자‧ 환자들이 대부분이어서 성벽 곳곳에 배치할 병력도 모자라는 실정이었다. 반란군의 공세는 더욱 거세졌다.     숭정제에게 가장 신임받던 조화순이 창의문을 열어젖히고 반란군을 맞아들였다. 밖에는 이자성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자성에게 항복한 환관 두훈이 조화순을 설득하여 성문을 열게 한 것이다. 반란군은 노도처럼 성 안으로 몰려들었다. 성 안으로 들어간 이자성의 반란군은 다른 성문을 열어젖히고 반란군을 맞아들였다. 반란군은 외성에서 내성을 무찌르고 다시 자금성에 육박했다. 반란군은 노도처럼 성 안으로 몰려들었다.    명 왕조의 운명은 이제 풍전등화와 같았다. 반란군이 성내에 진입했다는 보고를 받은 숭정제는 안절부절못했다. 그는 환관 왕승은을 데리고 자금성을 나와 만수산에 올라가 멀리서 베이징 시내를 살펴보았다. 베이징 내성의 9개 문밖 여러 곳에서 반란군들의 횃불이 붉게 타올랐고 우렁찬 환호 소리가 베이징 하늘 아래 메아리쳤다. 숭정제는 혼잣말로 뇌까렸다. “베이징이 벌써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숭정제는 중대결심을 했다. 자금성으로 돌아간 숭정제는 술을 가져오라 하여 한 잔, 두 잔… 연거푸 마셔댔다. 그는 이미 죽을 각오를 했으나 명나라의 황통이 끊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황태자와 영왕 정왕은 살려야겠다고 생각해 평민 차림으로 변장시켜 각각 그들의 외가인 주 씨와 전 씨 집에 피난시켰다.    세 황자들은 모두 나이가 어렸다. 이들 네 부자는 헤어질 때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세 아들을 궁 밖으로 피난시킨 숭정제는 황후와 후비들에게 자결하도록 명했다. 황후 주 씨는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고, 후비 가운데서도 자결하는 자가 많았다. 그러나 숭정제는 할 일이 남아있었다. 황자들은 피난시켰으나 황녀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을 그대로 살려두면 반란군에게 욕을 당할 염려가 있었다. 장평공주는 15세의 아리따운 소녀였다. 그녀는 수령궁에 있었다.     숭정제는 칼을 빼 든 채 수령궁으로 들어갔다. “너는 무슨 죄로 짐의 딸로 태어나 꽃다운 나이에 이 같은 비운을 맞게 되었단 말이냐!” 탄식하면서 장평공주의 왼팔을 칼로 내리쳤다. 그리고 겨우 여섯 살 난 소인공주가 있는 소인전으로 들어가 딸을 칼로 찔렀다.    어린 소인공주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으나 장평공주는 상처를 입고 유혈이 낭자한 채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시녀들이 그녀를 부추겨 도망할 것을 권했으나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부황께서 내게 죽음을 내리셨으니 내 어찌 감히 살기를 바라겠느냐. 또 도적들이 들어오면  반드시 나를 찾을 것이니 나는 숨을 곳이 없느니라.” 시녀들이 억지로 그녀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악몽 같은 18일이 지나고 19일 아침이 되자 숭정제는 친히 경종을 울려 중신들을 불렀으나 중신들의 모습은 비치지 않았다. 이제는 측근들로부터도 완전히 버림받은 것이다. 숭정제는 왕승은을 데리고 다시 만수산으로 올라갔다. 만수산에는 황제의 장수를 기원하는 뜻으로 수황정(壽皇亭)이 있었다. 숭정제는 이곳을 죽음의 장소로 택했다.    숭정제는 소복 차림에 왼발은 맨발, 오른발에는 붉은 신을 신었다. 관은 벗겨졌고 긴 머리로 얼굴을 가린 채 죽어 있었다. 그의 흰 옷깃에는 다음과 같은 유조가 씌어 있었다. “짐은 죽어 지하에 돌아간들 선제를 뵐 면목이 없다. 그래서 머리털로 얼굴을 가리고 죽는다. 도적들은 짐의 시신을 갈기갈기 찢어도 좋고 문관들을 모두 죽여도 좋지만, 다만 능침만은 허물지 말라. 백성들 한 사람이라도 상하지 말라.”   황제의 장수를 기원하는 뜻으로 세운 수황정에서 34세의 젊은 나이인 숭정제가 자결했다는 것은 얄궂은 운명이 아닐 수 없다. 이 비극의 수황정. 황제 곁에서 순사한 것은 오직 왕승은 한 사람뿐이었다. 명나라는 16대 277년 만에 역사의 막을 내렸다. 숭정제의 최후는 처절했다. 하지만 그가 망국과 죽음을 앞두고 보였던 비장한 태도를 평소 정치를 할 때 발휘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특히 신료들을 제대로 보는 안목이 있었다면 그의 운명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숭정제의 최후를 기록한 〈명사〉 사관의 평가는 흥미롭다. “황제는 재위 17년 동안 음악과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고 고심하면서 국사에 힘쓰고 정치에 마음을 다했다. 조정에 나아가 크게 탄식하며 비상한 인재를 얻고 싶다고 했지만, 제대로 된 인재를 쓰지 못해 정사는 더욱 망가졌다. 이에 다시 간사한 환관들을 신임하여 요직에 배치함으로써 행동과 조치가 마땅함을 잃고 어그러졌다. 복이 다하고 운이 옮겨가 몸이 화변(禍變)에 휘말렸으니 어찌 시운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   예나 지금이나 국가의 흥망은 제대로 된 지도자의 존재 여부에 달려 있다. 지도자를 잘못 만나면 죽어나는 것은 백성이다. 숭정제의 비극적인 최후를 보면서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두 전직(前職)이 한 달 간격으로 세상을 뜨면서 문 대통령 전임자는 감옥 속 두 전임자만 남았다. 정부 수립 이후 지금까지 12명이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내각책임제 속 대통령과 ‘징검다리 대통령’과 문 대통령을 제외한 나머지 9명은 모두 불행했다. 살해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망명길에 올랐다. 본인과 자식들·형·동생·처남·동서까지 감옥에 갔다. 남미나 아프리카 국가에도 없는 대통령 역사다.    이번에는 대통령다운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 ‘감옥에 가지 않을 후보’가 누군가를 제1의 판단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나는 대통령을 뽑는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정직성을 꼽는다. 정직성은 단순히 거짓이 없다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타인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번에는 그런 대통령을 보고 싶다.          비극 베이징성은 무방비 대통령 전임자 베이징 내성

2021-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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