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휴전협정 69주년을 앞두고
휴전 결사반대! 북진통일! 몇 주 동안, 해 질 무렵 월미도 쪽에서 시위대의 함성이 들려왔다. 그 메아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무더운 1953년 7월 초순이었다. 나는 한국전쟁이 터진 다음 해 월남해 인천에 살고 있었다. 휴전 반대의 아우성도 아랑곳없이 휴전 협정은 7월 27일 판문점에서 조인되고,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 간 한국전쟁은 막을 내렸다. 북한은 몇 년 동안 전쟁준비를 해왔다. 황해도 몽금포에서 가까운 인민군 병영 앞을 나는 자주 지나갔다. 웃통을 벗은 인민군 두 명이 소갈비 한 짝, 다시 말하여 소 반 마리를 장대에 매달고 영내로 들어가는 것을 몇 번 보았다. 와! 속으로 탄성이 나왔다. 일반 농민이 소갈비를 먹는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시대였다. 한 번은 먼지 나는 신작로를 걷고 있었다, 앞에서 행군하던 일 개 분대의 인민군이 호루라기 구령이 떨어지자, 앞의 작은 언덕을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보리를 베어낸 밭에서 모두 포복하다가 좌측과 우측에서 한 명씩 일어나서 각개 약진을 하다가 엎드리면, 또 두 명이 일어나서 각개 약진을 하는 훈련이었다. 이렇게 잘 먹고 잘 훈련된 인민군도 낙동강 전투에서 미군의 융단 폭격에 혼비백산했다. 그들은 “항공”을 외치며 죽었다. 비참한 사실은 대부분의 인민군 병사는 아직 피어나지 못한 꽃망울 같은 소년들이었다. 한국전쟁에서 빼 놀 수 없는 사건은 황해도의 킬링필드다. 유엔군과 중공군의 치열한 전투 속에 구월산 언저리 신천, 재령, 은율, 송화, 장연에서 도합 7만여 명의 민간인이 학살을 당했다. (위키 백과사전, 신천군 사건 참조) 북한은 학살을 미군의 소행이라며 기념관을 세우고 반미선전을 하고 있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 작가 황석영씨도 미군은 한 곳에 주둔한 적이 없어 학살에 가담할 시간과 여유가 없었다고 한다. 학살의 주범은 후방의 반공 치안대와 서북청년단이라고 한다. 이 두 단체의 주축은 기독교 청년들이었다. 황해도는 곳곳에 일가친척이 모여서 사는 김촌, 송촌, 안촌, 등이 있다. 같은 성씨 친척이지만 노동당원이나 그 가족을 살해했다. 왜? 후환 즉 보복이 두려워서. 보복은 보복을 낳았다. 빨갱이들이 학살을 시작했다. 유엔군이 북상하고 인민군과 내무서원이 퇴각하면서 많은 기독교 성직자와 우익인사를 처형했다. 한국전쟁은 카인과 아벨의 싸움처럼 형제간의 싸움이었다. 욕심과 질투, 다시 말하여 죄로 인한 형제간 싸움이었다. 다시는 한반도에서 골육상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윤재현 / 전 연방공무원열린마당 휴전협정 휴전협정 69주년 인민군 병영 인민군 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