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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혜명 화백 회고전 '축복의 여정'…초기부터 최신작까지 총망라

미주 한인 1세대 대표 여성 화가인 현혜명 화백의 60년 여정을 조명하는 회고전 '축복의 여정(Blessed Journey)'이 샤토갤러리(관장 수 박)에서 열리고 있다.     주류사회와 한인 화단에서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온 현혜명 화백은 신이 창조한 자연에 대한 찬양과 사색을 작품에 담아왔다.     그는 한국과 미국이라는 두 문화 사이에 다리를 놓으면서, 추상과 구상,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등 관습적인 이분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긴장감을 놓지 않는 작품으로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전시를 기획한 정유진 샤토갤러리 부관장은 "1세대 작가의 60년 예술 여정을 조명하고 행로를 추적해 보고자 기획했다"며 "한 작가의 개인사를 넘어 수많은 미주 한인 예술인들이 겪어온 유학과 정착, 예술가로서 성장의 여정을 담고 있어 굉장히 의미 있는 전시"라고 밝혔다.   이번 회고전에서는 1990년대 초기작부터 신작까지 시리즈별 대표작을 엄선해 선보인다. 거의 공개되지 않았던 현화백의 희귀 작품도 다수 포함된다.     현혜명 화백은 1943년 서울 출생으로 서울미대를 졸업한 후 국전에서 특선을 두 번 수상했다.     1966년 미국으로 유학, 펜실베이니아 아카데미 오브 파인 아츠를 졸업하고 하트포드 대학에서 미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1973년 LA에 정착해 한인 미술계에서 활동하며 다수의 개인전을 열었다.     1980년대에는 LACMA(LA카운티미술관)의 작품 대여 프로그램에 선정되어 주류 미술계로 활동영역을 확장했고 뉴욕타임스에 대표작이 실리기도 했다.     80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신작을 발표하고 있는 현 화백은 최근 2024년 데스칸소가든에서 열린 첫 한국미술 전시 '화조도:미주 한인 미술의 꽃과 새'에 참여하기도 했다.   오는 21일 오후 2시에는 '현혜명의 작품 세계'를 주제로 장소현 미술평론가 겸 작가의 강의가 열린다.   회고전 수익금의 일부는 여성들의 삶의 회복을 돕는 비영리 단체인 AW, ETCA, Hope Fam에 기부될 예정이다.     ▶주소: 3130 Wilshire Blvd, #104, LA   ▶문의: (213)277-1960  이은영 기자 lee.eunyoung6@koreadaily.com회고전 최신작 회고전 축복 예술 여정 이번 회고전

2024-09-15

“아름다운 삶과 마무리 여정 함께해요”

 ‘아름다운 삶, 아름다운 마무리’를 모토로 활동하는 소망소사이어티(이하 소망, 이사장 유분자)가 지난 3일 세리토스 퍼포밍아트센터 시에라룸에서 연례 갈라 후원의 밤 행사를 가졌다.   ‘함께하는 아름다운 동행’이란 주제로 마련된 이 행사엔 약 210명이 참석했다.   유분자 이사장은 인사말을 하면서 “16년 전 소망소사이어티를 설립하고 나서 주위에서 ‘왜 죽음을 이야기하는가’란 말을 많이 들었다. 그만둬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지만 우물 파기 사업을 위해 차드를 방문했다가 현지 어린이들이 죽어가는 걸 보고 생명 살리기를 포함한 소망소사이어티의 활동에 확신을 갖게 됐다”라고 밝혔다.   소망 측은 이날 소망을 이끌어온 유분자 이사장, 박순빈 샌디에이고 지부장, 정영길 목사, 유수옥 장로, 강친효, 현월서씨 등 총 6명의 봉사자에게 대통령 봉사상을 수여했다. 후원의 밤 행사는 시니어 생활건강 가이드2 출판기념회와 아르모니아 싱어즈 자선음악회를 겸해 열렸다.   소망 측은 지난 2021년 만 65세가 돼 메디케어를 받는 시점부터 장례에 이르는 노년 생활 전 과정에 걸쳐 반드시 알아야 할 다양한 정보를 담은 시니어 생활건강 가이드를 발간한 데 이어 이 책의 증보판을 최근 펴냈다.   신혜원 소망 사무국장은 “처음 가이드를 낸 이후 각종 법과 규정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새롭게 업데이트한 내용과 처음 가이드를 만들 때 누락된 내용을 합쳐 많은 부분을 다듬은 책”이라고 설명했다.   소망 측은 가이드를 받아보길 원하는 이가 신청하면 무료로 제공할 것이라고 밝혔다. 가이드는 소망 사이프리스 사무실(5836 Corporate Ave, #110)에서 가져가면 된다.  우편으로 책을 받길 원할 경우, 우송비는 스스로 부담해야 한다.   남성 중창단 아르모니아 싱어즈는 멋진 화음을 선사해 참석자들의 박수를 받았다.   소망은 소망유언서 작성, 시신 기증, 아프리카 빈국 차드를 위한 쌀 보내기, 우물 파기, 학교 설립 등 다양한 활동을 펴고 있다. 가이드 신청을 포함한 제반 문의는 전화(562-977-4580)로 하면 된다.  임상환 기자마무리 여정 마무리 여정 가이드 신청 시니어 생활건강

2023-12-04

[수필] 남은 삶의 여정

매주 토요일 아침 6시면 SBRT (South Bay Running Team) 마라톤 회원들은 토런스에 있는 엘레티로(El Retiro)공원에 모여 준비운동을 하고 레돈도비치 바닷가에서 뛰고 걷는다. 나도 10여년 넘게 이들과 함께 운동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나이가 들어 달리지는 못하고 굽이치는 파도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며 1시간 넘게 걷는 것으로 대신한다. 내게는 토요일에 느끼는 커다란 즐거움이다.     바닷가를 걸으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데 오늘따라 여생을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가?’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돈다. 우리는 모두 본인이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찾을 수 있다. 이는 나이 든 사람이면 누구나 생각해 보는 과제일 것이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그의 아들인 에두아르트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인생은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다. 균형을 유지하려면 계속 움직여야 한다.(Life is like riding a bicycle. To keep your balance, you must keep moving.)”      삶의 균형을 잃지 않고 계속 움직이기 위해서는 ‘균형 잡힌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한다. 심리학자들은 ‘균형 잡힌 삶’이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외적인 삶과 내적인 삶을 잘 조화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외적인 삶이란 자기의 목표와 가치관에 맞게 외부의 환경 및 사회적 요소, 즉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생활 속에서 경제적 성공, 사회적 인정, 물질적 안정 등 외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삶을 말한다.     반면, 내적인 삶이란 경험, 감정, 정서, 가치관 및 목표 등 개인의 내부적인 만족에 중점을 둔 삶을 말한다. 이러한 삶은 자아 발견, 정서적 안정, 마음의 평화, 정신적인 성장 등과 관련이 있으며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자기계발, 자신의 가치관 발견 등 내적인 성장과 개발에 집중하는 삶을 말한다.     젊은 사람들과 달리 나이 든 사람은 주어진 시간과 에너지를 가지고 어떠한 삶을 보내야 좋은지 생각해 볼 과제다. 우리는 각자 본인의 가치관에 맞게 삶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그에 따라 삶을 설계해야 한다. 긍정적인 생각으로 사회생활을 즐기며,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내적 발전과 원하는 일에 몰입하는 것이 여생을 잘 보낼 수 있는 행복의 열쇠라고 생각된다.     가족, 친구, 개인적 발전 및 취미, 건강 등의 다양한 영역 속에서 각기 균형과 조화가 이루어지는 삶을 영위함으로써 우리는 일상적인 스트레스를 극복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행복하게 영위한다고 볼 수 있다.  바쁘고, 때로는 힘든 이곳 생활 속에서 자신을 찾고, 또한 자신을 위한 시간을 만들기 위해 취미활동을 한다는 것은 우리 삶에 커다란 만족을 줄 것이다.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일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바닷가를 걸은 지도 한 시간이 지나고 있다.   문득 얼마 전에 읽은 문구가 생각난다.   ‘인생은 노트북과 같습니다. (Life is like a Notebook.)   하나님은 이미 두 페이지를 기록하셨습니다. (Two pages are already written by God.)   첫 번째 페이지는 출생,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는 죽음입니다. (The first page is Birth. The last page is Death.)   가운데 페이지가 비어 있습니다. (The center pages are empty.)   그러니 미소와 사랑으로 채우십시오.(So, fill them with Smile and Love.)’   삶을 다하는 날까지 노트북의 비어 있는 공간을 웃음과 사랑으로 채우는 아름다운 삶을 살고 싶다.   이명렬수필 여정 가치관 발견 사회적 경제적 사회적 요소

2023-11-02

"통일 여정에 힘 모읍시다"…21기 평통 출범

제21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오렌지샌디에이고협의회(이하 OCSD평통, 회장 설증혁)가 지난달 31일 출범식을 갖고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다.   가든그로브의 하이엇 리전시 호텔에서 열린 출범식엔 OCSD평통 자문위원들과 석동현 한국 평통 사무처장, 강일한 평통 미주 부의장, 김영완 LA총영사, 조봉남 OC한인회장 등 150여 명이 참석했다.   석 사무처장은 이날 정영동 한국 평통 해외 상임위원, 앨리스 정 샌디에이고 지회장, 김철호 피닉스/라스베이거스 지회장, 박희준 총무 간사에게 간부 임명장을 수여했다. 또 김남희, 김재석, 김진섭, 구성모, 류민호씨에게 자문위원 위촉장을 수여했다.   허원석, 윤진영 자문위원은 대표로 자문위원 선서를 했다.   설증혁 회장은 취임사를 겸한 환영사에서 “청소년과 젊은이에게 통일 의식을 고취, 미래의 통일 주역으로 양성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 다양한 안보와 문화 체험을 하도록 하는 사업을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또 세계 여성 통일 콘퍼런스 개최를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자문위원들에게 “통일을 향한 여정을 이어나가는 데 힘을 모아주길 바란다”라고 당부했다.   석 처장은 출범식이 끝난 뒤 ‘최근 한반도 정세와 민주평통의 역할’이란 주제로 안보 강연을 했다.   프레드 정 풀러턴 시장, 태미 김 어바인 부시장, 조이스 안 부에나파크 시의원은 축사를 했다. 참석하지 못한 미셸 박 스틸, 영 김 연방하원의원, 데이브 민 가주상원의원은 축하 메시지를 담은 동영상을 보내왔다.   21기 OCSD평통 임원진은 설 회장 외에 윤영걸 수석부회장, 김경자 상임부회장, 박희준 총무 간사, 이준성 특임 간사, 주수경 재무 간사, 김덕재 부재무 간사로 구성됐다.   애리조나 분회장은 유영구, 라스베이거스 분회장은 채기석, 뉴멕시코 분회장은 한광윤씨가 각각 맡는다.   상임고문은 김동수, 김진모, 권오식, 웬디 유, 임천빈, 최정택, 한광성씨다. 고문은 김건상, 김동준, 김종민, 송동진, 유재홍, 이소연, 이정태, 전태진, 조래복, 조선환, 주은섭씨가 맡았다.   OCSD평통은 산하에 경제통상, 공공외교, 교육, 남북협력, 기획홍보, 대외협력, 문화예술, 사회복지, 여성, 종교, 정보통신, 지역협력, 청년, 체육 등 총 17개 위원회를 뒀다. 글·사진=임상환 기자여정 출범 라스베이거스 지회장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오렌지샌디에이고협의회 샌디에이고 지회장

2023-10-31

[알뜰정보] “삶의 마지막 여정 함께” 외

“삶의 마지막 여정 함께” 치매나 암 등 더 이상 치료를 감당하기 어려운 경우, 의료진이 더 이상 손쓸 방도가 없다고 진단하는 경우 필요한 것이 바로 호스피스 서비스다. ‘엘림 웰케어 호스피스(Elim Wellcare Hospice)’는 지난 2006년부터 환자의 통증 및 증상을 관리함으로써 편안하고 의미 있게 남은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도와왔다. 환자와 가족이 가장 필요한 순간에 함께하기 위해 최고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맞춤형 의료 간호팀을 확보하고 있다. 메디케어나 메디칼이 있는 경우 별도의 비용 부담 없이 이용 가능하며, 서비스를 이용한다 하더라도 환자의 소셜 혜택 및 간병인 서비스 등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문의: (626)793-7511   방송인 김흥국과 유럽 5개국   크루즈 여행의 대명사 ‘크루즈여행닷컴’은 방송인 김흥국이 동행하는 유럽 5개국 여행을 출시했다. 총 10일 동안 프랑스의 몽생미셸과 르하브르, 네덜란드의 로테르담과 암스테르담, 벨기에의 브르쉴, 브뤼헤, 겐트, 영국의 사우스햄튼과 런던, 독일의 함부르크를 여행한다. 요금은 1인당 2999달러로 선착순 15쌍에게 발코니 뷰 케빈이 제공된다. 김흥국과 함께하는 1차 출발일은 10월 27일이고 그 뒤로 11월 17일, 12월 1일에도 여정을 이어간다.   ▶문의: (213)800-6367   “치과 빌링 한국어로 배우세요” 미주 지역 유일 한국어 치과 빌링 교육 전문 기관인 ‘YM Dental’에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최초의 3일 집중 빌링 세미나를 개최한다. 평생 정년 없는 전문직으로의 이직을 원하는 한인 혹은 전문적인 빌링이나 상담 교육에 목말라 있던 1년 이내의 치과 근무 경력자가 대상이다. 소수 정예로 선착순 마감되는 이번 세미나는 7월 5일부터 7일까지 삼 일간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12시 30분까지 진행된다.  참가자 전원에게 YM Dental의 특별 교재와 간단한 다과가 제공되며, 참가비는 일 인당 1200달러다. ▶문의: (213)770-0575, ymdentalmanagement@gmail.com   비비닥, 프라이드 치킨 $15.99 ‘비비닥치킨(BEE BEE DAK)’은 그랜드 오프닝을 기념한 빅 세일을 이어가고 있다. 비비닥은 행사 기간 동안 옛날 방식 그대로 바삭바삭하게 튀겨낸 스페셜 프라이드 홀 치킨을 기존 24.99달러에서 특별 세일가인 15.99달러에 제공한다. 또한 2마리 이상 주문 시 감자튀김을 무료로 제공한다. 그 외 양념 치킨, 강정 치킨, 반반 치킨 등도 세일하고 있다. 배달은 안되지만, 투고 주문은 전화로 가능하다. 비비닥치킨은 LA 웨스턴과 워싱턴 코너에 위치하며, 쉬는 날 없이 오전 10시 30분부터 오후 9시까지 오픈한다.   ▶문의: (323)840-3164 ▶주소: 2190 W. Washington Blvd, Los Angeles   3000달러 무료 리프팅 이벤트   리프팅 명가 ‘미라클 레이저 클리닉 센터’는 2023년형 최신 울세라 2대를 새롭게 도입하고 이를 기념해 특별한 이벤트를 실시해 화제다. 미라클은 리프팅 효과가 더욱 강력해진 2023년형 울세라 멤버 구입 시 3000달러 상당의 써마지 FLX를 무료로 1회 시술해 준다. 더 깊숙한 곳부터 당겨주기 때문에 훨씬 적은 통증으로도 리프팅, 처진 볼살, 이중턱, 목주름 등에 드라마틱한 효과를 가져온다. 또한 미라클은 피코슈어-프로 멤버 패키지를 구입하는 고객에게도 울세라 또는 써마지 시술 1회를 서비스하고 있다.   ▶문의: (213)264-1146   마이코, 청매실 축제 ‘LA e마이코백화점’은 청매실 축제를 펼치고 있다. 하이데저트 청정 지역 팔렌에서 매일 수확한 일등품 매실을 중간 상인을 거치지 않고 직접 판매한다. 중간 마진 없이 파운드당 7.99달러에 만나볼 수 있다. 그 외 대한민국 최고 먹거리도 입하했다. 입맛을 돋우는 낙지 젓갈, 오징어 젓갈, 창난젓은 3개 구입 시 1개가 공짜 선물로 따라온다. 제주 참굴비, 제주 은갈치(특대), 꼬막장, 완도 전복 등도 준비되어 있다. LA 웨스턴과 산 마리노 코너, 코리아타운 플라자 건너편에 위치하며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영업한다.   ▶문의: (323)734-1234 알뜰정보 여정 방송인 김흥국 치과 빌링 간병인 서비스

2023-06-22

[이 아침에] ‘어머니’는 하나님의 선물

마더스데이를 맞으며 모든 어머니께 큰절을 드리고 싶다. 어머니의 그 사랑을 알지 못해 기쁨을 드리지 못한 기억들이 올해는 더 생각난다. 아마도 실존적 에이징이 주는 천천히, 그리고 반드시 오는 깨우침이리라.         나는 늘 어머니가 장수하지 못하실 것 같아 걱정스러운 마음이었다. 그렇지만 90대 중반까지 여정을 걸어가셨다. 약하지만 강인한 모습과 함께 마음에 새겨주고 가신 건 바로 지혜와 사랑에 대한 신비함이다.     숱한 고생과 도전을 이겨내신 어머니는 아들이요 목사인 나에게 마지막 집례를 부탁하셨다. 그렇게 마음을 다해 보내드린 지 벌써 수년이 지났다. 어머니는 1·4 후퇴 때 고향을 떠나 목회자의 아내로 아버지의 일본 선교에 동행했다. 그 후 다시 캘리포니아에 정착하셨다. 70년대 후반 이민자의 삶을 체험한 분들은 그 어려움과 수고가 상상이 갈 것이다.     필자는 채플린 라운딩을 하면서 특별히 중환자, 장기치료 환자, 그리고 호스피스 예비환자에게 ‘남은 여정 기도 제목 10개’를 작성하라고 한 후 함께 완성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 중 빠지지 않는 한 가지가 ‘의학적 치료 후에 가능하면 집에서 편안하게 지내다 사랑하는 가족들에 둘러싸여 이 여정을 마치고 작별할 수 있기를’ 미리 기도하는 것이다.     이 기도 제목 10개는 의료 사전 지시서와 함께 환자가 마음의 안정을 갖도록 돕는다. 중요한 것은 불필요한 치료(Futile Treatment)에 남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어머니는 이미 오래전부터 가정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기를 기도하셨다고 한다. 그분은 떠나시기 바로 전날 밤에도 함께 기도하고 새벽녘 주무시다 떠나셨다. 자기 삶의 여정과 사랑하는 자녀를 동시에 바라보는 안목과 지혜가 아닐까.   내가 배운 것은 어머니 사랑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려는 마음이 소중하다는 것이다. 아마 가족 가운데 누가 입원한 적이 있다면 간호사가 ‘페인 스케일(Pain Scale)’ 즉, 현재의 신체적 통증이 0~10 가운데 어디쯤 있는지를 측정하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환자마다 각기 다른 측정치가 나오겠지만 어느 경우든 7~10 에 이른다면 통증 완화조치를 권하는데 이는 통증이 삶의 질에 막대한 영향을 준다는 것에서 나온 조치다.   어머니를 위해 가정에서도 사용 가능한 ‘정서적 페인 스케일 (Emotional Pain Scale)’ 측정하는 방법이 있다. 다양한 질문을 통해 어머니의 현재 정서적 상태를 측정할 수 있다.       질문 일부를 소개하면 ‘어머니, 집에 계실 때 특별히 어떤 감성을 느끼고 싶으세요?’, ‘그 원하시는 느낌을 갖기 위해 무엇을 변경해 볼까요?’ 혹은, ‘어머니, 만약 집에 계실 때 행복과 안정을 느끼고 계신다면 그 느낌을 주는 건 무엇인가요?’, ‘만약 집에 계실 때 외로움을 많이 느낀다면 무엇을 변경해 볼까요?’ 등이다.   성서에도 주께서 어머니들의 영혼을 향하여 응답하시는 언약이 있다.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하나님의 선물인 어머니들께 위로부터 임하시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지혜와 사랑, 그리고 위로가 다시 채워지시기를 간구한다.  김효남 / HCMA 디렉터·미주장신대 교수이 아침에 어머니 하나님 어머니 사랑 중환자 장기치료 여정 기도

2023-05-11

[열린광장] 광야 여정 가는 모습

삶의 여정을 가는 각자 모습이 소중하다. 누가 대신 갈 수 없는 고유한 여정이다.  해마다 자신의 여정을 잠시 돌아보게 되는 사순절(The Lent)이 얼마 전 시작됐다. 이 시작을 알리는 예식을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 이라 명명한 데는 그 의미가 함축적이다. 소유와 안락을 목표로 걸어가던 삶의 시간을 잠시 놓아두고, 마치 재를 머리부터 온몸에 뒤집어쓰는 마음으로 자원하여 가장 낮은 자세로 내려가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는 시간이다.       병원에서의 이 상징적 기도예식은 메디칼 케어팀의 특징을 고려해 참여하게 된다. 근무팀이 바뀌는 시간에 맞춰 이른 아침부터 채플린의 순회 스케줄이 짜인다. 스피리추얼 케어를 담당하는 채플린 오피스는 각 층에 도착하는 예정시간을 알리고, 오후 마지막 모임은 환자가족과 응급환자 케어로 참석하지 못한 직원들을 위해 채플모임으로 예식을 마친다.     직원들을 위한 ‘재의 수요일’ 예식은 먼저 헬스케어 전문인으로서 환자를 돌보는 특별한 소명을 돌아보고 감사한다. 그리고 본래 재와 흙에서 생명의 호흡을 얻어 시작된 이 삶의 의미를 기억하고 다시 재와 흙으로 돌아갈 삶의 여정 위에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긍휼의 언약을 간구한다. 이 기도회 마침은 준비한 재를 참석한 직원들의 이마에 묻혀주는 것으로 본인뿐만 아니라 보는 이들도 삶의 여정을 겸허히 마음에 새기게 하는 예식이다.     사실  40일 동안의 사순절 기간은 더 넓은 시각도 갖는 의미 있는 시간이라 보여진다. 우리 주변과 커뮤니티, 넓게는 후손들이 함께 살아갈 미래를 생각하는 이타적 시간이 될 수 있다.     지난 3년여 기간의 코로나19 팬데믹은  많은 교훈을 남겼다. 또한 여전한 인종차별주의, 자원봉사 가치의 약화, 사회정의 부재, 의료 불공정, 총기폭력, 식품 윤리, 전쟁과 재난, 기후변화, 환경오염과 같은 공동과제 해결을 위한 기도와 관심의 리셋도 가능하다. 우리 후손들의 안락한 삶의 영위 여부가 현세대의 커뮤니티 의식과 관심에 달려있다는 것에 동의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재와 흙으로 상징되는 사순절이지만 결국은 개인이나 인류가 목말라 하는 미래에 대한 시선을 새롭게 하고 그에 따른 행동의 시작을 알리는 예식의 의미가 매우 깊다.  철학자 솔엔 키르케고르가 던지는 질문과 연관된다. “당신의 삶의 기초는 무엇인가?”  삶의 의미를 자문하게 하는 피할 수 없는 실존적 질문 아닌가. 사순절은 각자 삶의 여정 가운데 주어지는 마음의 리셋 기회라 하겠다.     기원전 6세기경 쓰인 한 시편의 울부짖음과 찬미를 통한 그 여정의 소리를 들으니 맥박이 요동하듯 한다. “주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지 아니하시며… 그 얼굴을 저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간구할 때 들으셨도다.”   이민자로서 걸어가는 이 곤고한 광야 여정에서, 지금 어디쯤 있던지, 각자 형편대로 40일의 리셋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함께 ‘재의 수요일’ 시선을 통해 실존적 모습과 약속의 언약을 동시에 보며 여러분에게 새롭게 다가오는 삶의 언약으로 풍성해지기를 기원한다. 김효남 / HCMA 디렉터, 미주장신 교수열린광장 광야 여정 여정 가운데 상징적 기도예식 사순절 기간

2023-03-07

[J네트워크] 미디어 시대의 여왕

장엄하고도 화려한 서사극 한편이 끝났다. 마지막 무대는 1000년 역사의 웨스트민스터 사원. 영연방, 종교, 고귀함, 왕관, 후계자, 추종자 등 군주의 통치를 상징하는 게 한데 집결한 가운데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마지막 ‘미디어 여정’을 시작했다.   방송사에 따라 십수 시간 이어진 장례식 생중계는 영국 국왕으로서 처음이었다. 이를 지켜본 세계인이 41억 명을 헤아린다고 한다. 애틀랜타 올림픽 개막식(36억 명)을 뛰어넘는 역대 최다 시청 기록이다. 일부는 TV로 봤지만, 많은 이들이 컴퓨터 모니터로, 대형전광판으로, 손안의 휴대전화로 봤다. 모두가 여왕의 재위 기간(1952~2022) 거듭된 미디어 혁명을 통해 나온 것들이다.   여왕은 등장부터 미디어 친화적이었다. 1953년 그의 대관식은 영국 가정에 막 보급되던 TV 수상기로 전달됐다. 윈스턴 처칠 당시 총리가 “연극 공연처럼 보일 수 있다”고 염려했음에도 중계는 성공적이었다. 오랫동안 발코니 위에 있던 군주가 신민의 안방으로 들어왔다.   영연방은 붕괴하고 있었지만 세계를 누비는 여왕의 발길은 국민적 긍지를 되살렸다. 왕실의 비극조차 스펙터클을 갈망하는 타블로이드와 TV쇼에 안성맞춤 소재였다. 미국이 주도하는 미디어 산업의 연금술 속에 결혼식, 양육, 패션, 불화 등 모든 게 ‘로열 워칭’의 대상으로 탈바꿈했다.   “엘리자베스의 통치는 좋든 나쁘든 전례 없는 가시성으로 특징지어졌다”고 그의 사후 뉴욕타임스는 썼다. 여왕도 생전에 “믿기 위해서는 내가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대중의 관음 욕망과 왕실 구성원의 사생활은 종종 불협화음을 일으켰다.   미디어는 그 간극을 파고들며 왕실 내 ‘인간의 얼굴’을 드러냈다. 1995년 다이애나비의 BBC 인터뷰로 시작된 폭로의 정점은 지난해 해리 왕자와 메건 마클 왕자비의 오프라 윈프리 쇼였다. 이 인터뷰에서 그들은 로열패밀리를 가리켜 가족이 아니라 기업(a firm)이라고 털어놨다.   군주제의 존속을 떠나 현대의 왕실이 대중의 선망·환상·질시·연민 등에 기대어 굴러가는 셀럽 비즈니스 공동체란 걸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아이러니한 것은 70년 재위 내내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에서도 여왕이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런던올림픽 개막쇼에 제임스 본드와 등장하고 플래티넘 주빌리 당시 패딩턴 베어 인형과 차를 마시는 순간에도 여왕은 자연인이 아닌 임무(duty)에 충실한 공직자였다. 묻히는 순간까지 그는 본분에 충실했다. 기꺼이 참배 줄(이른바 the Queue)에 함께한 이들은 여왕의 헌신을 기리며 1인 미디어로 남겼다. 미디어에서조차 그는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았다. 강혜란 /국제팀장J네트워크 미디어 여왕 미디어 혁명 미디어 여정 미디어 산업

2022-09-21

[문장으로 읽는 책] 회사인간

지금을 억지로 살고 있다면 그대가 가려는 이 길은 그대의 길이 아니다. 그 길로 간다고 해서 무언가를 움켜잡을 수 없다. 그것은 매끈거리는 비닐 장판에 들러붙은 머리카락과 같다. 아무것도 아닌 한 올을 움켜쥐려 걸레로 떼려다 못해 손가락으로 떼어보려고 하지만 착 들러붙은 머리카락은 손톱으로도 쥐어질 리가 없다, ‘쥐어도 안 잡히고, 쥐어도 안 잡히고, 쥐어도 안 잡힌다.’ 비극이다.   장재용 『회사인간』   “월급쟁이 회사인간은 누구인가, 삶의 모든 결정에서 차선을 택한 자들이다. 들어갈 땐 못 들어가 안달하다 막상 들어가선 못 나와서 안달하는 자들이다. 일을 하며 자신에게도 이런 수동성이 있었나 하며 스스로 놀란다. 삶의 시계추가 늘 회사에 맞추어져 있다. 불안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옮아간다.”   저자도 ‘회사인간’이었다. “고등교육을 받고 석사 박사까지 배운 자들이 ‘얼마나 더 많이 팔까’를 고민하며 생을 바치는 밥벌이 현장”, 당연히 “아버지도 월급쟁이, 나도 월급쟁이였다.” “배고프기 전 오로지 밥만 생각나더니 먹고 나면 언제 뭘 먹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끼니 같은 월급”에 목매고 산 가장이었다. 어느 날 고심 끝에 회사를 때려치웠는데, 웬걸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생계는 어찌 해결했는지? 이런 질문에 답을 주지는 않는다. 한국을 떠나 해외로 간 저자는 또다시 회사인간이 됐다. 자신 안에 숨어 있는 삶의 노예성을 끝까지 파고들어 삶의 한 단계를 정리하려 이 책을 썼다. ‘탈회사(조직)인간’ ‘찐자유인’에 이르는 지적 여정도 담았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회사인간 월급쟁이 회사인간 지적 여정 석사 박사

2022-07-15

[열린 광장] 긴 여정의 간이역 ‘대학’

 한인들을 비슷한 또래를 만나면 학번을  묻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하곤 한다. 학번은 입학연도로 이를 알면 나이를 가늠할 수 있다. 미국에서는 ‘Class of’에 졸업연도를 붙여 ‘Class of 2022’처럼 사용한다. 그리고 이 ‘Class of’는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모든 졸업에 적용된다.   한국에서 대학 입학이 12년 학업의 성패를 가늠하는 척도이며 앞으로 펼쳐질 사회생활의 방향을 결정하는 이정표라면, 미국인들의 이정표는 고등학교 졸업일 것이다. 매그닛 같은 프로그램을 제외하면 고등학교까지는 집 근처의 학교를 다니지만, 대학은 전국 각지로 진학하기 때문에 어린 시절 친구들과는 이별을 하게 된다.   6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인들의 대학 진학률은 4%였고, 70년대 말에는 14%, 그리고 오늘날에도 50%에 미치지 못하다. 반면, 2020년 한국의 대학 진학률은 72.5%였다고 한다.   미국인들이 ‘좋았던 시절(good old days)’에는 학문을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나 대학에 진학했었다. 대부분은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해 직업을 얻고 가정을 꾸렸다. 이들에게 고등학교 졸업은 어른이 된다는 의미였다. 70년대 대학 진학률 상승에는 월남전 당시 징병을 피하기 위한 수단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초등학생 때 데려와 우리와 함께 사는 조카딸이 가을에 대학에 간다. 가고는 싶지만 성적이 안 되는 학교에는 아예 원서를 넣지 않았고, 주립대학 몇 군데는 만약을 생각해 ‘보험’으로 지원했다. 보험으로 지원한 학교에서는 벌써 합격통지가 왔다.   인생은 성적순이 아니고, 사회적 성공이 행복의 척도는 아니며, 생이 끝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으로 느끼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다들 자녀가 남들이 부러워하는 명문대학에 진학하기를 바란다.   대학은 입학보다는 전공이나 졸업, 더 나아가 졸업 후 대학에서 배운 것을 어떻게 활용하여 커리어로 이어가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우리 둘째 아들은 친구들이 많이 진학하던 집 근처 캘스테이트노스리지(CUSN)로 가기를 원했는데, 내 욕심에 UC샌타바버러에 보냈다. 결국 중간에 돌아와 대학을 마치지 못했다. 하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경찰이 되어 아들 딸 낳고 잘 산다.   딸아이는 대학에 갈 준비가 되지 않았다며 대입을 포기했다. 둘째 때 혼이 난 터라 강요하지 않았다. 그 후, 2년제 대학을 들락날락하더니 어느 날 CSUN에 편입을 한다고 했다. 2년 후, 대학을 졸업하고는 내친김에 UC샌디에이고 대학원 과정까지 마쳤다.   철들면 다 제 앞가림하고 살 길을 찾기 마련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산 60을 돌아보아도 누가 가르쳐 주어 배운 것은 별로 없다. 결국 내가 시행착오를 겪으며 살아봐야 깨달음이 온다.   과거보다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한인들은 대학 입학에 큰 관심과 기대를 갖고 있다. 대학 입학 통지가 오기 시작하는 2~3월이 되면 대학 진학이 자주 화두로 등장한다. 지나친 관심이나 자랑은 상대방에게는 부담이나 상처가 될 수 있다.   대학은 긴 여정의 간이역일 뿐 결코 종착역은 아니다. ‘Class of 2022’ 모두에게 행운이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 고동운 / 전 공무원열린 광장 간이역 여정 대학 진학률 uc샌디에이고 대학원 대학 입학

2022-02-27

[열린 광장] 긴 여정의 간이역 ‘대학’

한인들을 비슷한 또래를 만나면 학번을  묻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하곤 한다. 학번은 입학연도로 이를 알면 나이를 가늠할 수 있다. 미국에서는 ‘Class of’에 졸업연도를 붙여 ‘Class of 2022’처럼 사용한다. 그리고 이 ‘Class of’는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모든 졸업에 적용된다.   한국에서 대학 입학이 12년 학업의 성패를 가늠하는 척도이며 앞으로 펼쳐질 사회생활의 방향을 결정하는 이정표라면, 미국인들의 이정표는 고등학교 졸업일 것이다. 매그닛 같은 프로그램을 제외하면 고등학교까지는 집 근처의 학교를 다니지만, 대학은 전국 각지로 진학하기 때문에 어린 시절 친구들과는 이별을 하게 된다.   6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인들의 대학 진학률은 4%였고, 70년대 말에는 14%, 그리고 오늘날에도 50%에 미치지 못하다. 반면, 2020년 한국의 대학 진학률은 72.5%였다고 한다.   미국인들이 ‘좋았던 시절(good old days)’에는 학문을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나 대학에 진학했었다. 대부분은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해 직업을 얻고 가정을 꾸렸다. 이들에게 고등학교 졸업은 어른이 된다는 의미였다. 70년대 대학 진학률 상승에는 월남전 당시 징병을 피하기 위한 수단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초등학생 때 데려와 우리와 함께 사는 조카딸이 가을에 대학에 간다. 가고는 싶지만 성적이 안 되는 학교에는 아예 원서를 넣지 않았고, 주립대학 몇 군데는 만약을 생각해 ‘보험’으로 지원했다. 보험으로 지원한 학교에서는 벌써 합격통지가 왔다.   인생은 성적순이 아니고, 사회적 성공이 행복의 척도는 아니며, 생이 끝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으로 느끼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다들 자녀가 남들이 부러워하는 명문대학에 진학하기를 바란다.   대학은 입학보다는 전공이나 졸업, 더 나아가 졸업 후 대학에서 배운 것을 어떻게 활용하여 커리어로 이어가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우리 둘째 아들은 친구들이 많이 진학하던 집 근처 캘스테이트노스리지(CUSN)로 가기를 원했는데, 내 욕심에 UC샌타바버러에 보냈다. 결국 중간에 돌아와 대학을 마치지 못했다. 하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경찰이 되어 아들 딸 낳고 잘 산다.   딸아이는 대학에 갈 준비가 되지 않았다며 대입을 포기했다. 둘째 때 혼이 난 터라 강요하지 않았다. 그 후, 2년제 대학을 들락날락하더니 어느 날 CSUN에 편입을 한다고 했다. 2년 후, 대학을 졸업하고는 내친김에 UC샌디에이고 대학원 과정까지 마쳤다.   철들면 다 제 앞가림하고 살 길을 찾기 마련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산 60을 돌아보아도 누가 가르쳐 주어 배운 것은 별로 없다. 결국 내가 시행착오를 겪으며 살아봐야 깨달음이 온다.   과거보다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한인들은 대학 입학에 큰 관심과 기대를 갖고 있다. 대학 입학 통지가 오기 시작하는 2~3월이 되면 대학 진학이 자주 화두로 등장한다. 지나친 관심이나 자랑은 상대방에게는 부담이나 상처가 될 수 있다.   대학은 긴 여정의 간이역일 뿐 결코 종착역은 아니다. ‘Class of 2022’ 모두에게 행운이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  고동운 / 전 가주공무원열린 광장 간이역 여정 대학 진학률 uc샌디에이고 대학원 대학 입학

2022-02-22

청춘은 인생의 한 시기가 아니고 마음가짐이다

  청춘은 인생의 한 시기다 아니고/ 그것은 마음가짐이다./ 그것은 장밋빛 볼, 붉은 입술/ 그리고 유연한 무릎의 전유물이 아니고/ 그것은 의지의 전유물, 상상의 품질/ 정성의 활력이다./ 아무도 연령의 수만으로 늙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이상을 버림으로써 늙는다./ 나이는 피부를 주름지게 하지만/ 열정을 포기할 때 영혼을 주름지게 한다./ 근심, 염려, 자기불신은/ 가슴의 기를 꺾으며/ 넋을 먼지로 돌아가게 한다./ 안테나가 낮아서 당신의 넋이 / 냉소주의의 눈과 비관주의의/ 얼음으로 덮여 있을 때/ 그때에 그대는 20세라도 늙었다./ 그러나 안테나가 높아서/ 낙관주의의 주파를 붙잡는 한,/ 그대는 80세라도 젊은 기상으로 / 죽을 수 있는 희망이 있다.     새뮤얼 울만의 ‘청춘’이라는 시다. 10여 년 전  아내와 함께 중국에 체류할 때  우리 부부에게 중국어를 가르쳐주던 대학생이  학습교재로 들고  온  것도 ‘청춘’이었다. 그는 기숙사 벽에 붙여놓고 매일 읊는다고 했다. 우리는 의기투합(意氣投合)의 친구가 되었다. 백발이 된 지금도 이 시를  읊으면  가슴이 뛰고 새로운 힘이 솟는다. 시가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읽을 때마다 내 삶의 영역에 물기와 탄력을 주는 이런 언어의 결정(結晶)을 나는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1997년 가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방송토론회가 열렸다. 당시의 빅3 후보는 새정치국민회의의 김대중 후보와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 그리고 한나라당에서 나와 국민신당을 창당해 출마한 이인제 후보였다. 김대중 후보의 토론회 때정치·경제·사회 등 토론은 돌고 돌아 어언 편성된 2시간이 흘러 마지막 질문 순서가 되었다. 시인인 어느 질문자가 김대중 후보에게 “좋아하는 시가 있으면 읊어보라”고 주문했다. 그러자 김 후보는 “혹시 제가 나이가 많다고 하면 소개하려고 준비해온 것”이라며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읽었다. 울만의 ‘청춘’이었다. 그때 김 후보는 일흔네 살로 세 후보 가운데 가장 연장이었다. 김 후보의 낭독이 끝나자 치열했던 그날 토론회는 분위기가 좋아졌고, ‘청춘’이 우리나라에서 널리 애송되는 계기가 됐다.     울만이 ‘이 시를 쓴 것은 78세 때였다. 하지만 이 작품이 빛을 보게 된 것은 훨씬 뒤, 그것도 생각지도 못한 인물을 통해서였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갈 무렵, 종군기자 프레더릭 팔머는 필리핀 마닐라에 주둔하고 있던 미극동군 총사령관 맥아더를 찾아갔다. 맥아더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팔머는 우연히 책상 위의 액자 속에 들어 있던‘청춘’이라는 시를 보았고,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수년 전 선물 받았다는 이 시를 맥아더는 매일 암송할 만큼 좋아했다.고 한다.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떠오르는 한 사나이가 있다. 98세에 글을 배우기 시작한 그의 이름은 조지 도슨.  미국 뉴올리언스의 가난한 흑인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동생들을 먹여 살리느라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그럼에도 자신이 까막눈이라는 사실을 쉬쉬해야 했다. 간신히 얻은 일자리에서 쫓겨나지 않으려면 글을 읽을 줄 아는 척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일자리를 얻을 때마다 표지판이나 근로지침 같은 것들을 가까운 사람에게 물어 몽땅 외워버리곤 했다. 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것은 그에게 더없이 ‘고통스러운 비밀’이었지만 생활에 쫓기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긴 세월 동안 힘이 되어준 믿음이 있었다. ‘인생이란 좋은 것이고, 점점 더 나아지는 것’이라고 했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가르침이었다.     남북전쟁에서 북군이 승리하면서 흑인 해방이 이루어졌지만, 실상 사회는 그다지 변한 것이 없었다. 흑인들은 여전히 차별받고 핍박받았다. 게다가 그는 죄 없이 백인들의 손에 죽임을 당한 형 때문에 10세 이후로는 백인들과 어떤 거래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터였다. 그래서 그는 21세 때부터 미국 전역과 캐나다, 멕시코를 오가며 부두 노동자와 도로 공사장 인부 등 수십 개의 직업을 전전하다가 늘그막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혼자 낚시로 소일하던 어느 날, 그는 성인들을 위한 교육 과정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바로 낚싯대를 내던지고 학교로 달려갔다. 이때 그의 나이 98세였다. 그는 알파벳 26자를 몽땅 외우고 ‘장례식 때문에 빠진 사흘’을 제외하고는 지각 한 번 하지 않았다. 그리고 101세가 되던 해 자신만의 책을 펴냈다.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제목으로, 그의 인생 여정이 오롯이 담긴 자서전이었다. 이후 그는 무려 3세기를 관통한 풍부한 경험과 열정으로, 여러 학교와 선도기관 등에 강연을 다니며 실의에 빠진 이들에게 희망을 전파했다.     ‘경영의 신’으로 불리는 일본의 마쓰시타 고노스케도 ‘영원한 청춘’을 삶으로 보여준 사람이었다. 그는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하고 약골로 태어났음에도 ‘지난 1000년간 가장 위대한 경영인’에 뽑혔다. 화로가게 점원이던 그가 22세에 무일푼으로 마쓰시타 전기를 설립할 때까지만 해도, 누구도 그의 손에서 당대 최고의 기업이 탄생할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지독한 가난, 허약한 몸, 짧은 ‘가방끈’에도 불구하고 신화를 이룩했는데, 그 비결은 바로 ‘늘 푸른 청년 정신’과 ‘역발상의 지혜’였다. 어린 나이에 점원이 되었으니 상인의 몸가짐을 빨리 익힐 수 있었고,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하다보니 남에게 일 부탁하는 법을 배웠으며, 학력이 모자라다 보니 항상  배우고 다른 사람에게 가르침을 구했다. 이후 그는 자서전을 내면서 그 제목도 〈영원한 청춘〉이라고 정했다. 그는 울만의 말처럼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을 뜻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또 그는 일에 몰입하는 사람이라면 승진뿐만 아니라 더 큰 결실도 얻을 수 있으니 ‘왕성한 탐구심’과 ‘머리를 높이 치켜들고 희망의 물결을 붙잡으라.’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 자신도, 기업들이 도산하는 대공황 때에도 한 사람도 해고하지 않고, 대담하면서 섬세한 조화경영의 진수를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청춘’을 증명했다.   선교사로 유명한 스탠리 존스 박사는 자기의 체험을 근거로 노년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에 유의하면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성장 할 수 있다고 권면했다. 첫째, 은퇴하지 말라. 둘째, 호기심과 관심을 갖고 날마다 무엇인가 새것을 배우려고 노력하라. 셋째,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라. 넷째, 활기차고 적극적인 삶을 살라. 다섯째, 날마다 주변에서 무언가 감사할 조건을 찾으라. 여섯째, 육체적 쇠약에 신경 쓰지 말고 정신적 활동을 더 많이 하라. 일곱째, ‘하늘에 쌓아두라’는 성경말씀처럼 하늘에 그대의 행동, 남은 물질, 그대가 생각하는 정신적 유산을 쌓도록 하라. 지난 크리스마스 때 아내에게서 받은 카드에는 이런 성경 구절이 적혀 있었다.“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편 103: 5) 지아비의 무강(無疆)을 비는 염원이리라..     또 한 살 먹었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고물과 골동품의 차이를 아는가? 나이 든다는 것은 고물이 되는 것이 아니고 골동품이 되는 것이다..’라고.... 고물은 버릴 때도 값을 치러야 하지만 골동품은 세월이 갈수록 진가를 발휘한다는 기특한 관념으로 다시 일어선다. 뒤를 돌아보니 꽤나 많은 길을 걸어왔다. 아름다운 골동품이 되기 위해 지금부터라도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다시 생각해 보니 갑자기 엄숙해지면서 또 다른 힘이 솟는다. 저녁노을은 질 때가 더 아름답듯이 생의 황혼길을 황금길 로 장식해야 할 텐데.... 불현 듯 백범 김구 선생의 글이 생각난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발걸음 하나라도 어지럽히지 말라. 오늘 내가 가는 이 길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기에....”이제부터라도 가야만 하는 데도 불구하고 가지 않은 것 때문에 후회하는 일이 없기를 다짐해본다. 남은 생이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니.... 김지민 기자마음가짐 청춘 이회창 후보 인생 여정 후보 가운데

2022-01-20

한인사회 초석 세운 그들이 있었기에…

중앙일보가 초창기 이민사 인물들을 소개하기 위해 게재했던 기획 시리즈 '외로운 여정'이 오늘(6월29일)자로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지난해 8월4일자로 시작했던 시리즈는 이민선조들의 생생한 육성 기록과 각종 자료를 지면을 통해 확인해 본 좋은 기회였습니다. 게재됐던 사진 중 이민선조들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몇장을 다시 화보로 재구성했습니다. 외로운 여정 연재를 끝내며 장태한 (UC 리버사이드 교수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 외로운 여정 연재를 끝내면서 그동안 성원을 보내 주신 중앙일보 독자들과 전면 연재를 허락해 주신 중앙일보에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전면을 할애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는 것을 잘 알기에 중앙일보가 한인 사회에게 다가간다는 의미로 전면 연재를 할애한 것으로 믿습니다. 그리고 외로운 여정을 영어로 인터뷰한 이경원 기자, 고 김익창 박사, 그레이스 김님께도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분들의 노고로 초기 이민자들의 애환을 여러분들과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외로운 여정이 연재되는 동안 많은 분들로부터 응원과 격려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저에게는 큰 힘이 되었고 이민사 연구자로서의 보람을 느꼈습니다. 외로운 여정을 여러분들과 함께 공유하면서 행복을 느꼈습니다. 외로운 여정은 1900년대초 미국으로 이민 온 개척자들의 이야기를 구술로 모아서 쓴 책입니다. 그들은 노골적인 인종 차별, 악 조건에서의 막 노동을 견디어 냈습니다. 그리고 사진 신부와 같은 개척자 정신을 갖고 독립운동과 초기 한인 사회 정착에 모든 노력을 다한 분들입니다. 그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그리고 가족을 지키고 자녀들의 성공을 위해 자신들을 희생하면서 미주 한인사회의 초석을 이루어 냈습니다. 외로운 여정에서 특히 강조한 부분은 그동안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던 사진 신부와 한인 여성들의 역할과 희생입니다. 사진 신부와 여성들이 있었기 때문에 미주 한인 사회는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남편들과 함께 농장에서 일하고 가사 일과 자녀 교육도 담당했던 주역들입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그리고 미국을 위해 미군에 입대했던 초기 한인 2세들도 많았습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전하여 전사한 존 박, 전설적인 영웅 김영옥 대령과 공군에서 공을 세운 프레드 오 등 한인들이 미 육군, 해군, 그리고 공군에 입대하여 미국을 위해 공로를 세운 자랑스러운 이야기를 차세대들에게 들려 주면 좋을 듯 합니다. 초기 한인 이민자들의 경험을 배우면서 우리에게 큰 힘이 되었고 또한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제 미주 한인들도 미국 사회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 했고 그 공을 치하하고 주인 의식을 확립해야 한다고 생각 됩니다. 또한 초기 한인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차세대들이 읽고 감동을 받아서 코리안 아메리칸 정체성 확립에도 큰 힘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조만간 영문 책이 출판 되기를 기대하면서 작별 인사를 드립니다. 정리= 장병희 기자

2017-06-28

대한인국민회가 한인사회의 정부기관 역할해

앤젤 섬 입국 6명 한인들 대한인국민회 노력으로 일본 국적 거부해 첫 인정 제2시기(1903~1924) (2) (66화에서 계속) 초기 한인사회, 한인 역사에서 특히 캘리포니아 주의 리버사이드는 매우 중요한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자들에게 소외를 받아왔는데, 최근, 이선주를 비롯한 기타 논문에서 "리버사이드는 특히 도산 안창호 선생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도산 안창호는 1904년 리버사이드에 한인 집단 거주 지역을 형성하여 한인들에게 직업을 알선해주고 영어도 가르치며 예배도 함께 보는 '미 본토 최초의 한인 타운'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또한 리버사이드에 거주하면서 한인 공립협회를 발기했고 본국과 연계하는 민족운동 단체로 발족한 대한신민회도 리버사이드에서 발기되었다. 이에 2001년 8월 12일, 리버사이드시에 도산 안창호 동상 제막식이 성대히 거행되기도 했다. 미주 한인사회가 동상 건립을 위해 기금을 모금하고(위원장 홍명기) 리버사이드시가 시청 앞 광장을 제공했는데, 리버사이드시 시청 앞에는 마틴 루터 킹 목사, 안창호, 마하트마 간디 동상이 서 있다. 또 1913년 6월 25일에는 리버사이드의 헤밋밸리(Hemet Valley)라는 농촌에서 한인 노동자들이 백인 폭도들에 의해 강제 추방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농장에 일하러 왔던 한인들을 백인들이 일본인으로 오해하고 강제 추방시켰다. 이에 일본 영사관이 미주 한인들은 일본 식민 시민이므로 한인들을 위해 항의하겠다고 나서자, 미주 한인들은 자신들은 일본인이 아니라며 일본 영사관의 보호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당시 이대위 대한인국민회 회장은 미국 국무 장관 윌리엄 브라얀에게 전보를 보내 "헤밋밸리 사건에 일본 영사관이 개입하는 것은 불법이며 이 문제에 대해 한인사회와 직접 대화로 해결해줄 것을 요청"을 했다. 한마디로 미주 한인들은 일본 정부의 통제하에 있기를 거부한다는 편지였다. 이에 1913년 7월 2일, 브라얀 국무장관은 AP통신을 통해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일본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으며, 따라서 미국 정부는 미주 한인에 대한 문제에 대해 대한인국민회와 직접 대화로 풀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미국 정부는 미주 한인에 대한 일본 정부의 간섭과 통제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대한인국민회는 미국 정부가 공인한 미주 한인사회의 대표 기관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또 1913년 7월 9일에는 여섯 명의 젊은 한인 청년들이 일본 국적을 거부한 사건이 있었다. 그들은 상해에서 몽골리아 선박을 타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는데 여권도 소지하지 않았고 학생이라는 신분증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일본 국적이 아님을 주장하면서 미국 입국을 요구했다. 당시 미국은 동양인 이민을 억제할 목적으로 앤젤 섬에 이민 검사소를 설치하고 모든 동양인 입국자들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실시했었다.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엘리스 섬은 미국이 지향하는 자유와 평등의 상징이지만, 실상 앤젤 섬은 자유와 평등을 역행하는 검문과 억압, 이민 억제를 상징한다. 20세기 초, 약 1000여 명의 한인들이 앤젤 섬의 검문을 통과해서 미국에 입국할 수 있었는데, 여권과 학생증을 소지하지 않은 여섯 명의 젊은 한인들은 당시 동양인 이민 억제를 실시한 미국 이민법의 시범 케이스가 되었다. 대한인국민회의 노력으로 한인들의 미국 입국이 허락되었고 미주 한인들은 일본 정부의 직접적인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운동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또 미국 사회뿐 아니라 세계 평화에 기여한 한인 2세들도 많이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인물을 꼽자면 김영옥 대령이다.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의 전설적인 영웅, 그리고 약자들을 대변하는 데에 평생을 바친 인도주의자인 김영옥은 한국, 프랑스,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최고무공훈장을 받은 유일한 인물 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한국계인 김영옥은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계 미국인으로 구성된 미 육군 100대대/442연대에 배치되어 1943~45년까지 유럽 전선에서 맹활약을 펼쳤는데, 특히 로마 해방과 피사 탈환의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 후, 탁월한 리더십으로 일본계 미국인 병사들마저 그를 믿고 존경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에도 자원해 커다란 무공을 세웠고, 한편으로는 전쟁고아들을 돌보았다. 김영옥의 인도주의적 삶은 1972년 은퇴 후 더욱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그는 정치에 입문하라는 유혹도 뿌리친채 봉사 활동에만 전념했다. 그의 봉사 활동은 청소년 교육, 노약자 및 여성 보호, 가족 의료에 관한 사업, 문화, 민족, 예술 분야까지 다양하며 한인 동포 사회 는 물론 미국 사회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오프레드, 안수전, 박존 등 많은 한인 청년들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훈장을 포상받았는데 그들은 대부분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 미군에 입대했다. 또 다른 한인 2세들 가운데, 1948년과 1952년 올림픽 다이빙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여 2연패에 성공한 이새미 박사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또 LA의 일본 빌리지를 설계하고 운영했던 건축가 현 데이비드, 안창호 선생의 장남 안필립은 아시안계 영화배우로는 최초로 할리우드 불러바드에 별을 달았으며, 송알프레드는 아시안계 최초의 주요 정치가(캘리포니아 주 상원의원)로 활약했다. 제3시기(1950~1964) 한국전쟁(1950~1953)은 한국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인명피해만 해도 남한측 사망자 약 45만 명, 미군 사망자 3만3000명(행방불명자 약 7000명 포함)에 달할 정도였으며, 수많은 이산가족을 양산했다. 이들 중 대다수가 아직도 서로의 생사를 알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는데, 한국전쟁은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미주 한인 사회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미국의 이민법이 개정돼, 그동안 중단됐던 한인 이민이 다시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에 따라 한국전쟁 직후, 한인 이민 인구는 40%나 늘어나게 됐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미주 한인 인구는 약 1만 7000명으로 추산되는데, 한국전쟁 직후인 1950~1964년 사이에 약 6000명의 한인 여성들이 미군과의 결혼을 통해 미국으로 이주했던 것이다. 또 1965년 이민법 개정 이후에는 한인 이주민들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된 사람들이 늘어났는데, 한 연구에 의하면 초청 이민의 거의 과반수가 미군과 결혼하여 온 여성들의 친지 가족들로 추산하고 있다. 또한 1951년 제 정된 피란민법으로 약 5000명의 고아들과 난민들이 미국으로 이주해 올 수 있었다. 전쟁고아와 미군과 결혼한 한인 여성들이 당시 미국 이민의 2/3를 차지 했으며, 약 6000명의 한인 학생들이 미국 대학으로 유학을 왔다. 제4시기(1965~현재) 1965년 미국 이민법 개정 이후, 미주 한인 사회도 급성장을 했다. 먼저 미주 한인 인구의 급증을 들 수 있는데, 1970년 연방정부 통계에 의하면 미주 한인의 인구는 불과 7만 명이 채 안 됐다. 1970년 6만 9130명에서 2000년 17만 6872명(혼혈 포함하면 122만 8000명)으로 늘어났던 것이다. 그 가운데 특히 1965년 이후의 한인 이민자들은 '신도시 이민자'로 잘 알려져있다. '신도시 이민자'란 이들 대부분이 중산층이며, 도시 근로자로, 전문직 출신이기 때문에 생긴 용어로,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 경제가 급변하면서 전문직에 종사하는 한국인들이 한국에서 직업을 찾기 힘들게 되자 미주 지역으로의 이주가 급증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1970년대와 1980년대초 한인 이민자들은 고학력의 고급 인력이 중심이었다. 이처럼 현재 재미 한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한인들은 대한민국을 고국으로 공유하고 있음에도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동질사회가 아니며 언어, 태생지, 세대, 자아의식, 계층별로 나뉘어져 있다. 언어 사용 차원에서 보면 크게 세 부류로 구분된다. 한국어권의 이민자 1세대는 80.7%가 한국어 를 주로 사용하고, 1.5세는 이중언어를 구사한다. 그리고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배우는 2세들이 증가하고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2세들은 영어를 구사한 다(80.3%). 또, 직업 분포를 살펴보아도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직업이 있는 16세 이상 한인들 중 43.6%는 매니저 또는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으 며, 14.6%는 서비스 업종에 종사하고 세일즈와 오피스 종사자가 28.9%이다. 따라서 재미 한인 사회는 세대, 자아의식, 언어, 또 계층 간의 격차가 상당히 크다는 것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한편, 재미 한인 여성들 중 50.8%가 직장을 가지고 있으며 오랜 시간 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직업을 갖고 있는 재미 한인 여성들의 80%는 정규 직장에서 일하고 있으며, 평균 노동시간은 주 51시간이다. 1965년 이민법 개정 이전의 한인 사회, 마이너리티 중의 마이너리티, 보이지 않는 소수민족, 나라가 없는 민족으로서 외롭고, 소외되고, 차별을 당하면서도 독립운동에 전념하며 역경을 이겨낸 자랑스러운 미주 한인의 스토리였다. 그들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며 우리가 잊고 있던 우리의 역사를 우리 손으로 세우는 소중한 기회가 됐기를 바란다. 장태한(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소장) 정리= 장병희 기자

2017-06-26

결의형제 이승만·박용만 독립 방법론 달라 정적 돼

'외로운 여정'이라는 코리안 아메리칸 구술사와 함께, 미주 한인 역사를 간략 하게나마 정리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미주 지역으로의 한인들의 이민은 19세기 말부터 시작됐으나 한인 숫자는 매우 적었다. 당시엔 인종차별적 이민법이 존재해, 한인들의 미주 이민이 제한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65년 이민법이 개정된 이후부터 미주 지역의 한인 인구는 급증했다. 이에 따른 미주 한인 사회의 역사, 사회, 문화, 경제, 정치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미주 한인들의 역사는 크게 네 시기로 분류할 수 있다: 1) 제1시기(1885~1903), 2) 제2시기(1903~1924), 3) 제3시기(1950~1964), 4) 제4시기(1965~현재) 로 분류한다면 각 시기마다 미주 지역으로 이주해 온 한인들은 독특한 특성 을 지니고 있으며 이주 이유도 독특하다. 제1시기(1885~1902) 한국인의 미주 이민에 대하여 현재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통설은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간 농업 이민으로 시작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 말하자면, 시곗바늘을 조금 더 앞으로 돌려야 한다. 한국인의 미주 이민은 구한말 개혁가, 개혁가 지망생(유학생), 비즈니스맨(개성상인) 집단을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즉, 갑신정변(1884)으로 조선을 개혁하려다가 실패한 당시 엘리트 정치 세력의 망명으로 시작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서재필, 서광범이 대표적 인물이며, 이들에 이어 미국을 찾은 유학생들이 있었다. 서규병(1893), 안창호(1902), 김규식, 하난사 같은 인물들로, 그들은 서구 문물을 통해 조선 개화(조국 근대화)를 꿈꾸며 미국 유학을 결행했다. 또, 이들보다 다소 시기는 늦지만 이승만, 박용만, 노백린 같은 인물들도 같은 범주에 속한다. 그 외에도 인삼 거래를 주업으로 하던 개성상인을 중심으로 최소 165명이나 되는 인삼 상인들이 1899~1902년 사이에 미국에서 비즈니스를 일궜다. 이에 역사학자 방선주는 1902년까지 미국에 입국한 한인의 숫자가 최소 200명으로 추산되며 다른 지역을 통해 입국한 사람들까지 합치면 그 이상이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제2시기(1903~1924) (1) 미주 지역으로의 공식 이민은 1903년 1월 13일 하와이에 도착한 102명의 한인으로 시작되었다. 1903년부터 1905년에 걸쳐 약 7226명의 한인들이 하와이로 이주했는데, 여기에는 내외적인 요인들이 있다. 먼저 내적 요인을 살펴보면, 양반계급의 착취, 홍수와 가뭄 등의 자연재해, 그리고 정치적 불안정 등이다. 특히 초기 이민은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 정책에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일본의 식민지정책으로 한국 경제는 극심하게 나빠졌고, 1905년 을사조약으로 한국은 외교권을 강탈당했으며 1910년 국권 피탈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대대적인 정치적 탄압을 받았던 것이다. 외적 요인으로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협회의 값싼 노동력 확보를 들 수 있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협회에서 모집원을 한국으로 보내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한인 노동자들을 하와이로 이주시켰다. 1860년부터 1940년까지 총 33개국에서 40만 명의 노동자들을 모집했던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협회는 노동자들끼리 서로 경쟁하고 분열하는 '노동자 분열 정책'을 통해 노동자들의 임금을 동결하고 통제하는 수단으로 삼았는데, 일본계 노동자들의 노동력 장악을 막기 위해 한인을 비롯한 중국인, 포르투갈인, 필리핀인 등 타민족의 노동자들을 모집하여 하와이로 데려왔던 것이다. 초기 한인 이민자들은 대부분 20대의 도시 출신 남성들이었는데, 특히 약 40%는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이었다. 한편 하와이로 이주한 한인 인구 중 약 10%는 여성들이었는데, 펜팔을 통해 서로 사진을 교환하고 결혼함으로써 하와이로 온, 이른바 '사진신부'들이었다. 그런데 당시 사진신부와 신랑의 나이는 무려 평균 10~15세 차이가 났다. 그 이유는 하와이로 이주해 온 한인 남 성들은 평균 10년 이상 일해야 결혼 경비를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당시 미주지역에선 한인과 백인 간의 결혼을 금지하는 금혼법이 시행됐 기 때문에 한인 남성들은 미국에서 신부를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사진신부로 미주로 건너온 약 1000여 명의 한인 여성들은 요리사, 청소부, 세탁원 등으로 일하면서 타국에서의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나이 많은 남편을 둔 한인 사진신부들은 일찍 미망인이 되어 가정을 홀로 돌보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어머니로서 자녀들을 돌보고 한 가정을 책임지며 살아간 초기 한인 사회의 기둥이었다. 초기 미주 한인 사회의 또 다른 특징은 교회와 독립운동으로 지칭할 수 있다. 한인 교회는 단순히 신앙과 구원의 장소가 아니라, 모국의 독립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고 전략을 세우는 장소이기도 했다. 교회는 여러 농장에 흩어져 일하고 있던 한인들이 정기적으로 모일 수 있는 집회 장소를 제공했으며, 한인 사회의 중심지로서 한국의 미래에 대한 교육 세미나 등도 개최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독립 활동을 지원하는 중요한 기관이었다. 미주 한인 사회 독립운동의 중심엔 무력 항쟁을 주창한 박용만, 외교정책 을 중요시한 이승만, 그리고 교육과 애국 지도력을 강조한 안창호가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인 사회는 세 명의 지도자를 중심으로 각기 다른 노선을 걷는다. 무력 항쟁을 주장한 박용만은 네브래스카 주의 헤이스팅스시에 군단을 조직하고 군사훈련을 시켰으며 하와이로 이주해 젊은 청년들을 군사훈련에 참가시켰다. 이런 가운데 미주 한인들이 독립 전쟁을 위해 공군력을 키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자각하여 비행사 양성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실천에 옮겼다는 역사적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김종림을 비롯한 미주 한인들의 주도로, 상해임시정부의 군무총장(현재 국방장관)이었던 노백린 장군과 함께 캘리포니아 주 윌로스에 비행학교를 설립했던 것이다. 임시정부의 동의를 얻어 독립 전쟁에 나설 전투 조종사를 양성하기 위한 항일 투쟁의 일환이었다. 이에 쌀농사로 백만장자가 된 김종림의 재정 후원으로 최소 세 대의 비행기를 구입하고 샌프란시스코에서 230km 북쪽에 위치한 윌로스(Willows)에 비행학교를 세웠 는데, 당시 한인들은 'KAC'(대한민국비행대를 의미), 한인비행학교, 비행가양성소, 사관양성소, 노백린군단 등으로 불렀다. 오늘날 한국 공군도 '한국 공군의 기원'으로 자부하는 곳으로, 우리 모두가 충분히 자부심을 느낄만하다. 그 무렵 특정 국가가 공군력의 중요성을 깨닫고 군용 비행학교를 설치해 조종사들을 양성하고 비행대를 거느린 국가는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일본 등 열강에 국한됐다는 점에서 미주 한인들이 매우 선진된 군사정책을 주도했던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승만 박사는 이같은 무력 항쟁은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면서 강대국에 대한 로비와 외교 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결국 한인사회는 양분 되었고 심각한 대립으로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그뿐 아니라 안창호 선생이 조직한 '국민회'와 이승만 박사가 조직한 '동지회' 간의 갈등도 깊었다. 한인 지도자들은 대한민국의 독립에는 모두 헌신적으로 참여했으나 방법론에 대한 이견으로 한인 사회가 분열됐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김종림은 이념과 사상을 초월하여 분열된 한인 사회의 통합과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는 비행학교 설립뿐만 아니라 안창호 선생이 조직한 흥사단의 적극적인 회원이었으며 동시에 이승만 박사가 조직한 동지회의 회원이기도 했다. 이처럼 초기 미주 한인 이민자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했는데, 그 외 몇 가지 사건을 더 소개한다. 1919년 3월 1일 평화 시위는 전 세계에 흩어진 한국인들에게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거리로 나온 시민들은 자주독립을 외치며 일제에 항거했고,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미주 한인들은 크게 고무되어 보다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미주 한인들은 1919년 3월부터 1920년 12월까지 무려 20만 달러라는 거액을 모금해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미주 한인들은 실천적인 항일 투쟁도 불사했다. 초기 한인 사회의 독립운동의 본보기는 바로 1908년 발생한 스티븐슨 암살 사건이다. 스티븐슨의 공식 직함은 한국 정부 자문위원으로 일본 정부가 임명한 직함이었다. 그의 주요 임무는 일본의 한반도 식민정책을 미국 정부 관리들에게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것이었는데, 워싱턴 DC로 향하던 그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후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정당화시키는 성명서를 발표 했다. 만약 한국이 일본의 통치를 받지 않더라도 결국 러시아의 식민지가 됐을 것이며, 한국 정부 관리들은 부패했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일본 정부의 식민지 정책을 환영한다는 등의 허위 성명서를 발표한 것이었다. 이에 샌프란시스코의 한인들은 분개하며 스티븐슨에게 사과하고, 번복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한인들은 스티븐슨을 일본의 앞잡이이며 한민족의 배반자로 규정하고 암살 계획을 세웠다. 전명운 열사가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장인환 열사에 의해 스티븐슨은 결국 암살되고 말았다. 이처럼 초기 한인 사회는 미국 생활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과 함께 소수민족으로서 인종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처절한 노력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국의 독립운동에 전력을 다했던 것이다. <67화로 계속> 장태한(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소장) 정리= 장병희 기자

2017-06-21

"욕먹으며 농장서 일했지만 후회하지 않아"

하와이농장 일당 54센트지만 먹을게 없는 한국보다 나아 18년 일했지만 저축 못해 캘리포니아로 이주 선택해 한국인들은 가난과 빈곤, 봉건사회와 일제 식민지의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아 하와이, 멕시코 유카탄, 미국 본토로 꿈을 찾아 떠났다.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궁핍한 삶을 살던 초기의 사진신부들, 그들은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 하와이와 멕시코 유카탄에서 그들은 어떻게 고난과 고통을 이겨냈을까?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는 한국인의 정신은 사진신부들이 아이들을 키우고 수많은 역경을 이겨내며 생존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김성진 1976년과 1977년 소니아 선우는 어릴 때 이웃에서 살았던 김성진(96세)을 오클랜드에 있는 그녀의 노인 아파트에서 만났다. 소니아 선우는 "김성진이 여전히 건강하고 아직도 유머를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라고 말했다. 1905년 당시 22세였던 김성진은 가난과 빈곤을 떠나 엄마와 남동생 영대, 엄마의 '남편'과 함께 하와이로 이주했다. 한국에서는 생계가 어렵고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었다. 도착한 후 여러 가족들이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김성진과 가족은 호놀룰루 이화농장으로 보내져 하루 10시간 동안 사탕수수를 자르는 노동에 겨우 54센트를 받았다. 18년 동안 일하면서 간신히 돈을 저축해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성진은 캘리포니아 델라노 포도 농장에서 포도 따는 일을 했는데 어느날 갑자기 막노동의 일을 견디지 못한 남편이 한국으로 떠나버렸다. 그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김성진의 삶은 고생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신은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 것이다." 김성진에게 한 가지 후회되는 일은 아들 존을 제대로 먹이지 못하고 돌보지 못한 채 키웠는데 그가 전쟁터에서 전사한 것이다. ▶가족 모두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나 다른 가족들은 사탕수수를 심는 일, 어떤 사람은 잡초를 제거하는 일을 했는데 루나라고 불리는 감독관이 우리를 각각 다른 작업장으로 보냈다. 감독관은 주로 유럽계였는데 프랑스인이 우리의 감독관이었다. 아주 무식하고 욕쟁이였던 그 프랑스 감독관을 절대 잊을 수가 없다. 영어는 못해도 욕은 다 알아 들었다. 그 프랑스인 감독관은 항상 우리에게 더 빨리 일하도록 강요했고 우리를 게으르다며 재촉했다. ▶그때 미국에 온 것을 후회하지 않았나 후회하지 않았다. 그래도 한국에서의 생활보다는 나았다. 한 달 동안 열심히 일하면 밥, 간장, 다른 식료품을 구입해서 먹을 수가 있었다. 그때 우리가 10시간 동안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해서 받은 하루 임금이 겨우 54센트였다. 저임금의 노동 착취였지만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었던 한국에서의 생활보다 나았다. 한국에서는 수수를 심고, 잡초를 제거하고 수확해도 소작농인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거의 없었다. 소량의 수수밖에는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18년 동안 일하면서 저축은 할 수 있었나 10시간 일하고 54센트 받아서 저축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일자리를 찾아 캘리포니아의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일했다. 포도 농장에서 일했는데 정말 죽도록 일했다. 봄에는 잡초를 제거하고 겨울에는 가지치기를 했는데 과일이 열리지 않을 것 같은 가지를 제거하는 것이다. 올해 열릴 가지는 놔두고 내년에 포도가 열리도록 짧게 자르는 것이다. ▶그 당시 집에서의 생활이 궁금하다 그때는 집에서의 생활이 없었다. 일을 마치고 임금을 받으면 시내에 가서 장을 보고 집에 돌아와 저녁을 준비해 먹고 그 다음 날 아침을 먹었다. 그것이 하루 일과의 전부였다. ▶아이들 옷은 어떻게 준비했나 아이들은 신발 밑창이 다 헐 때까지 신었다. 우리 아이들은 다 헐은 신발을 신고 학교와 교회를 다녔는데 고생을 정말 많이 했다. 나는 헬렌, 케이시, 앨리스, 존을 낳았다. 나는 존에게 제대로 된 옷이나 음식을 주지 못했고 잘 돌보지 못했다. 존은 전쟁에 참여했다가 25세 때 전사했다. 아이들은 낳으면 죽곤 했다. ▶심하게 일해서 아이들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던 건 아닐까 아마도 그런 것 같다. 나는 몸이 아파도 항상 일했다. 아이들이 죽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는 그랬다.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나 돈이 있어야 한국을 갈 수 있다. 나는 미국 시민권자도 아니다. 나의 고향 북한은 이제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고 그곳에 나의 친인척이 아무도 없다. 고향에 가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지금 내 나이 아흔 여섯으로 여행하기도 힘들다. 김(이박)메리 새크라멘토에 거주하고 있는 김메리. 1904년 그녀는 엄마인 세라의 품에 안겨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이주했다. 그녀는 아버지 없이 여덟 살 때부터 엄마와 함께 일하며 삶을 꾸렸다. 성장한 메리는 한국에서 치과 의사였던 남편과 결혼했으나 그녀의 남편은 동양인 차별법 때문에 치과 의사로 일할 수 없었다. 캘리포니아 센트럴 밸리에 살 때 메리는 하루 200 상자의 포도를 수확하고 말렸는데 교육을 받은 남편은 항상 병에 시달렸다. 그래서 메리가 심한 출혈로 요양소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다섯 명의 자녀들은 3년 동안 고아원에서 자랄 수밖에 없었다. 메리의 허약한 남편은 결국 한국으로 돌아가서 재혼해 새 가정을 꾸렸고 미국에 있는 다섯 명의 자녀들은 버려졌다. 메리 또한 다른 남자를 만나서 재혼했고 한국 총각들이 지낼 수 있는 하숙집을 은퇴할 때까지 운영했다. "오키나와에서 아들 조지가 전쟁이 끝나기 3개월 전 지뢰를 밟아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딸들 덕분에 가장 힘들고 후회스러운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메리는 90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은 "미국을 축복하라"였다. 이경원 저·장태한 역 '외로운 여정'에서 전재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제공 정리= 장병희 기자 ◆책구입: hotdeal.koreadaily.com

2017-06-19

쿠바의 한인들은 항상 '아리랑을 불렀다

*한국인 커뮤니티는 강한 결속력이 있었나? 마사=우리는 많은 한국 어른들과 동질감을 느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아버지가 왜, 그리고 어떻게 한국임을 느끼는지 설명하는 걸 잘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 가족과 다른 한국인 가족들의 삶은 엘볼로라는 농업 마을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곳의 한국인 마을은 마탄사스에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카네나즈나 아바나로 이주했으나, 크리스마스 때나 삼일절이 되면 엘볼로로 돌아와 우리와 함께 축하하고 기념했다. (비비안 루이즈는 마사의 딸이고 토목 기사이다. 비비안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비비안=나는 100% 쿠바 사람이다. 한국은 내가 자라온 환경과는 동떨어져 있다. 그러나 부모님이 쿠바에 사는 한국인들에 관한 책을 쓰신 이래로 우리는 한국인들과 친밀하게 교류하고 있다. 지금은 한국을 방문하고 한국에 대해 배우는 것이 매우 즐겁다. *당신의 학력과 직업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달라. 마사=아버지는 웅대한 뜻을 품은 분이었다. 교육을 우선시했고, 특히 여자들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육을 받지 못한 여성들은 남의 집 하녀가 되거나 바나 카페에서 일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자라면서 학교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교원자격증을 따기 위해 나는 열심히 공부했고 무사히 시험에 통과했다. 단 90명만 뽑는 시험에서 1000여 명의 지원자들이 팽팽히 겨루었다. 지원자 중 많은 사람들은 그 전해에도 지원했던 경험자들이었다. 나는 운 좋게 지원한 해에 바로 통과했고, 1956년에 졸업했다. 나는 시골 지역인 마탄사스에 있는 학교에서 일했다. 첫 학교에서 나는 서로 다른 학년의 학생들을 가르쳤다. 쿠바 혁명 이후 중등교육과정을 공부했기 때문에 중학교에서 스패니시를 가르칠 수 있었다. 그리고 교육학과 심리학도 공부했다. 마탄사스에 교육학 대학이 설립됐을 때, 나는 그곳에서는 마르크스 철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나의 관심사는 철학으로 귀결됐고 마르크스 철학을 연구하는 교수가 되었다. *쿠바 혁명 때 어떠했나 마사=우리 사회가 바뀌지 않았다면 나의 삶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나는 혁명 때문에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많은 문제와 어려움들이 있었지만 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에 오늘날의 내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대학에도 진학할 수 없었을 것이고 대학교수는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학교에 다니신 적이 없었으나, 어깨너머로 책 읽는 법을 배우셨다. 쿠바가 알파벳 캠페인을 시작할 때, 이미 아홉 명의 자녀를 둔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쓰기까지 배우기 시작하셨다. 토마스=혁명 전에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우리 주변에는 의사도 학교도 제대로 없었다. 자원봉사자들이 이곳에 멋진 학교를 세웠고, 우리는 의사에게 진료도 받을 수 있다. 여전히 쿠바는 식량 부족으로 어려운데 우리는 교육이나 의료의 혜택을 누리고 산다. 비비안=아마 완벽하진 않겠지만 기분은 좋다. 내가 원했던 것들을 거의 끝냈다. 나는 원하는 것을 공부했고, 공부하고 싶은 곳에서 공부를 했다. 혁명 이후 쿠바 교육 시스템은 모든 사람들이 학교에 다니도록 했다. (아델리나 임 하이는 의사이고 프리미티보의 딸이다. 아델리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아델리나=의료 제도에 있어서 우리는 여전히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하지만 보편적인 의료 서비스이고, 문제들을 지속적으로 의논해 발전시켜나갈 수 있을 것이다. 프리미티보=나는 혁명 이전과 이후 모두 좌절감을 느꼈던 사람 중 하나이다. 나는 그때 군대에 있었고,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혁명으로 커다란 변화가 올 것이라고 믿었고, 그 변화가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고 오랫동안 믿었다. 혁명이 시작되었을 때 나는 29세였다. 혁명은 많은 좋은 변화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에 대하여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매일 성공을 위해 25년 동안 열심히 일했지만, 현재의 모든 것들이 반드시 옳다고 믿지는 않는다. 혁명을 지지하기 위해서라도 적어도 95%의 사람들은 매우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혁명을 통해 크게 얻은 것은 없다. 우리는 격렬히 투쟁했지만, 많은 것을 얻으려 할수록 더 깊은 상처를 받았다. 마치 속아 넘어간 기분이 든다. *많은 사람들이 쿠바를 떠나는 이유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마사= 봉쇄정책으로 기인한 경제적인 이유로 사람들은 쿠바를 떠나고 싶어한다. 우리는 음식이나 옷 등 거의 모든 생필품에 있어 선택이 제한되어 있다. 어린 세대들은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친구와 친척들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듣는다. 쿠바 밖의 사람들은 원하는 것을 좀 더 누릴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젊은 세대들은 쿠바를 떠나기를 더 원한다. *현 쿠바 정권에 있는 사람들은 발전에의 의욕이 없다고 들었다. 정말 그러한가 프리미티보=사람들은 대개 삶의 목표를 지니고 산다. 그러한 목표 없이는 생존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들은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갖기 위해 노력한다. 자본주의적 사고에서 보자면 일을 할 때 좀 더 높은 직위에 올라 가려는 욕구가 일반적이다. 그 욕구를 채우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의욕조차 없다면 무엇을 위해 투쟁하겠는가? 마사=이것은 관점의 문제이다. 한국인 부모의 전통과 유산을 물려받은 쿠바 전문직의 사람들을 봐라. 우리 가족에도 두 명의 의사, 건축가, 그리고 세 명의 엔니지어가 있다. 모두 직업적으로 전문가들이 되었다. 스위스에 있을 때 빵집을 간 적이 있었는데, 다양한 상표의 빵과 차들이 있었다. 쿠바에서 그러한 선택의 여지를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다양함이 꼭 필요할까? 물론 완벽하지 않더라도 쿠바는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중이다. 비비안=나는 이곳에서 모든 것이 완벽하다거나 쿠바가 세상에서 가장 좋은 곳이라고 믿지 않는다. 내가 아는 한 이곳보다 좋은 곳들이 있고,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장점을 아우른 것들을 공유하며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토마스=나는 세 명의 딸과 다섯 명의 손자들을 뒀기 때문에 굉장한 부자이다. 지난 달 29일은 내 생일이었다. 그날 모든 가족이 함께 모인 것이 정말 행복했 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애석하게 느꼈던 것들이 있다면 마사=개인적으로 나에게 시간이 조금 더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사회문제로 인해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했다. 우리들 스스로를 돌아볼 충분한 시간이 없었던 것 같다. *바람이 있다면 마사=내가 바라는 것은, 남편에겐 내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가 죽을 때까지 내가 살아있었으면 좋겠다. 라울은 희귀한 뇌질환을 앓고 있다. 그래서 내가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해주어야 한다. 내 인생의 목표는 죽는 날까지 남편을 잘 돌볼 수 있는 힘이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라울의 병 때문에 힘든 적이 있었나 마사=아니 절대 없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불쌍히 여기지만 나의 도움과 사랑 이 필요한 사람과 함께할 때 나는 오히려 많은 것을 배우고 강해진다.(라울은 2005년 11월에 세상을 떠났다.) *한국에 방문했을 때 아버지 대신 수상했던 일을 이야기해달라. 마사=1996년에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에 간 경험은 하느님이 주신 선물과도 같다. 내가 살아생전에 한국을 방문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랬기에 한국에 도착했을 때 무척 기뻤다. 아버지가 얼마나 오고 싶어하시던 곳인가! 아버지 때문만 아니라, 귀향을 꿈꿨지만 다시 한국으로 되돌아갈 수 없었던 모든 쿠바 한인들이 떠올라 엄청 울었다. 그분들은 '아리랑'을 매일같이 불렀다. 우리 어머니 또한 요리할 때건 청소할 때건 항상 부르던 곡이 바로 아리랑이었다. 부모님이 많이 생각났다. *한국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토마스=우리는 남북한에 대해 아무런 배경지식이 없다. 부모님이 이곳으로 건너올 당시에는 한국이 분단국가가 아니었다. 우리는 한국인 커뮤니티가 있다는 것 자체에 기뻐했고, 아무도 북한, 남한 출신으로 편 가르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그냥 한국인이자 한국이었다. 통일된 한국을 볼 수 있다면 최고로 기쁠 것이다. 이경원 저·장태한 역 '외로운 여정'에서 전재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제공 정리= 장병희 기자 ◆책구입: hotdeal.koreadaily.com

2017-06-14

큰 돈 번다고 철썩같이 믿고 쿠바로 이주

어려서 두 벌의 드레스 가져 하나는 한복, 다른 하나는 교복 오전에 한국학교에 갔기에 2세들 누구나 한국어 유창 유대인들은 2000 년이 넘도록 종교적 박해를 당하고 세계대전 중엔 대량 학살을 겪었다. 또한 그들은 세계 도처에서 추방을 당해 빈민가로 몰리면서 사회의 천덕꾸러기로 세상을 헤매고 있다. 그러나 미국에 있는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그들이 열망했던 정상인의 삶을 성취해냈다. 지금 쿠바 땅에서 '아리랑'은 잊혀지지 않은 노래로 전해진다. '아리랑'은 20세기 시작과 함께 고국을 떠나 시베리아, 만주, 중국, 미국, 멕시코, 쿠바, 일본, 중앙아시아, 유럽, 남미, 아프리카, 호주 등지로 이주한 한인들에게서 들을 수 있다. 지난 10년 동안 대략 50만 명의 북한 주민들이 중국, 러시아 등 주변 국가들로 탈출했다. 그들은 마치 후기 스탈린 수용소를 방불케 하는 김정일 치하의 혹독한 북한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위험한 탈출을 감행한 것이다. 대부분의 여성 망명자들은 생존을 위해 성노예로 전락했다. 게다가 세상은 이들의 안위에 어떠한 관심도 쏟지 않았다. 이렇게 비참한 사람들의 한은 우리를 눈물짓게 만든다. 뉴욕에 거주하는 한국계 영화감독 김대실은 쿠바를 방문해 통역관 최애영과 함께 그곳에서 노예로 살았던 한인들의 후손인 김마사를 비롯해 한국계 3세들을 만나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쿠바 한인들의 한을 밝혀냈다. *당신과 가족들, 그리고 가족의 배경을 말해달라. 마사= 나는 쿠바에서 태어나고 교육받은 쿠바인이다. 그리고 쿠바에서 저명한 작가인 라울 루이즈와 결혼했다. 그러나 내 근본은 한국에 있다고 믿는다. 나의 한국 이름은 임은희이다. 우리 아버지는 한국 커뮤니티 리더 중 한 분이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임천택이고, 스패니시 이름은 엘네스토 림이었다. 아버지는 한국의 정체성과 문화를 보호하기 위해 활동했다. 아버지의 활동은 내게 큰 영향을 미쳤고, 덕분에 나는 스스로 한국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내 자신을 한국인 뿌리를 가지고 있는 쿠바인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어머니의 이름은 김가히, 스패니시어 이름은 구델리아 김이었다. 어머니가 여덟 살 때 외조부모님과 어머니의 가족들은 멕시코로 이주했다. 어머니는 열네살에 아버지와 결혼을 했고, 바로 첫 아이를 가졌다. 어머니는 총 아홉명의 아이를 낳았고, 바느질과 세탁일을 하면서 항상 아버지를 도왔다. 나는 외할머니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외할머니가 멕시코에서 임종했다면서 외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외할머니는 교육을 받지 못했고 몹시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식 교육에 있어 굉장히 엄격했고, 높은 도덕적인 규범을 지키며 살았다. 외조부모님과 어머니의 가족들은 시골 지역에서 매우 가난하게 살았다. 어느 날 아이들이 멜론 밭에 가서 하나를 서리해 집으로 가져오니, 외할머니는 매섭게 혼을 냈다. 그래서 아이들은 서리한 멜론을 도로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그날 어머니의 집에선 어떤 사람도 밥을 먹지 못했다. 멜론 서리에 대한 벌이었다. (이호영 토머스는 쿠바에서 태어났다. 현재 73세이고 그의 아버지는 1921년에 멕시코를 떠나 쿠바로 왔다. 토머스가 들려주는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들어보자.) 토머스= 우리 아버지는 돈을 많이 벌어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을 철석 같이 믿고 쿠바로 이주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애니깽을 베는 일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아들 넷과 딸 셋 총 일곱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나는 그중 세 번째 자녀다. 보통 이곳에서 만날 수 있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일을 찾아 여러 마을로 퍼져 살고 있다. 우리 가족은 작은 나무 집에 살았다. 우리 어머니는 멕시코에서 태어났고, 아버지와 그곳에서 만났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주 고된 시간을 보냈다. 애니깽 베는 작업이 끝났지만 부모님의 수중엔 한 푼도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임금을 좀 더 받을 수 있는 다른 일을 구해야만 했다. 또 가난 때문에 세상을 떠난 가족의 장례식을 위해 돈을 빌려야만 했다. (김루시아는 쿠바에서 태어났고, 그의 부모는 멕시코 출생인 한국인들이다. 훗날 루시아는 쿠바 군대에 입대했다. 루시아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김루시아=우리가 어렸을 때 조부모님은 어떻게 우리가 멕시코에 오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해주었다. 어머니는 종종 할머니와 외할머니가 부잣집 출신이었다는 것을 말하곤 했다. 할아버지는 기갑부대의 군인이어서 말도 몰았다고 한 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멕시코에서 더 부자로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이곳에 왔다. 그러나 그들은 멕시코에 도착하마자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자랄 때 기억에 대해 좀 더 들려달라. 마사= 나는 우리 집에서 여섯 째 아이였다. 나에겐 두 벌의 드레스가 있었는 데, 하나는 한국 설날에 입었고, 다른 하나는 교복이었다. 학교 갈 때 신는 신발도 따로 있었다. 가난했지만 우리는 행복했다.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풍족하게 사는지 몰랐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고 형제자매끼리 우애도 좋았다. (김프리미티보는 1930년에 태어난 마사의 큰오빠이다. 프리미티보는 네 명의 딸을 홀로 키웠다. 그의 딸들은 잘 성장해 정부에서 일하거나 의사, 건축가로 일한다. 프리미티보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프리미티보=나는 한국 학교를 다녔었는데 그곳에서는 환갑과 같은 특별한 날을 기념하기도 했다. 우리는 한국의 전통 음식과 언어 등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나는 6학년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러나 훗날 다시 입학해 고등학교 과정까지 마쳤다. 나는 지금 퇴직을 했다. 대학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나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었다. 또 어느 누구에게나 좋은 인상을 줬다. 열심히 일했기에 백 개가 넘는 소수집단 기업들을 관리하는 직책 중 주정부에서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다. 토머스= 우리 모두 한국어를 할 줄 안다. 아침에는 한국 학교에 가고 오후엔 쿠바 학교를 다녔기 때문이다. 1955~56년까지 두 군데 학교를 오가며 공부했다. 만약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면, 우리 집들은 불에 타 없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아바나, 산티아고, 그리고 다른 지역들로 흩어졌다. 우리가 마을을 떠난 후에, 몇몇은 다른 곳에서 일을 찾았다. 나는 아바나에 있는 식당에서 설거지를 했다. 어머니와 여동생들은 세탁을 해서 돈을 벌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어머니는 돈을 모아서 큰형이 작은 가게를 살 때 주었다. 형은 가게를 2년 동안 잘 운영하고 나서 내게 물려주었다. 작은 집에 살았지만 우리의 삶이 점점 나아짐을 느꼈다. 1956년에 나는 로지와 결혼했고, 1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세 명의 아이들은 모두 대학을 졸업했고, 엔지니어가 됐다. 아이들은 모두 쿠바인과 결혼해 다섯 명의 손자, 손녀가 생겼다. *자라오는 동안 특별히 한국적이라고 느꼈던 것이 있었나? 마사= 어머니는 우리에게 바느질과 요리하는 법을 가르쳐주셨다. 집에서 우리는 항상 한국 음식을 먹었다. 쿠바에 있는 한국인들은 멕시코의 영향을 받았다. 한국인들은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데, 멕시코인들은 그보다 훨씬 더 매운 음식을 먹었다. 그래서 한국계 쿠바 음식은 몹시 맵다. 집에서 우리는 기본적으로 고추장, 김치를 곁들여 먹었다. 장과 김치는 독에 보관했다. 우리는 생일날이나 삼일절 등 특별한 날이면 한국 전통 음식을 해 먹었다. 한국인 커뮤니티에서 삼일절은 매우 중요한 날이라 반드시 기념했다. 이경원 저·장태한 역 '외로운 여정'에서 전재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제공 정리= 장병희 기자 ◆책구입: hotdeal.koreadaily.com

2017-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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