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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칼럼] 멕시코기와 소리없는 아우성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청마 유치환 시인의 작품 ‘깃발’의 도입부다. 펄럭이는 깃발은 예나 지금이나 그 존재 자체로 많은 것을 의미한다. 타향에서 고국의 국기를 보며 느끼는 벅찬 감동, 전장에 나부끼는 깃발을 보며 느꼈을 병사들의 투지와 공포가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모두 깃발에서 비롯됐다.   최근 연방 정부의 고강도 불법 체류자 단속에 항의하는 시위가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다. 시위 현장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깃발이 있다. 바로 멕시코 국기다.   중남미에 여러 나라가 있지만, 멕시코 출신 이민자가 워낙 많기 때문인지 시위 현장에 나부끼는 깃발은 주로 멕시코기다.   이 멕시코기가 최근 레딧을 비롯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뜨거운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시위 현장에 등장하는 멕시코기에 반감을 드러내는 이들 중 다수는 “미국에서 살겠다면서 왜 멕시코기를 들고나와 시위를 벌이는지 모르겠다”며 못마땅한 반응을 보인다.   어떤 이는 멕시코기를 두고 ‘미국에 살긴 하지만, 미국에 동화하고 싶지 않은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또 다른 이는 “미국 시민이 된 후에도 멕시코를 사랑하고 미국에 반감을 품은 것이 아니냐”는 물음을 던지기도 한다.   반면, 고강도 불체 단속에 항의하는 시위에 공감을 드러내는 이들은 “문화적 유산과 미국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은 상호 배척하는 관계가 아니다”란 말로 멕시코기를 옹호한다. “만약 중국 정부가 현지의 미국 시민들을 대상으로 대규모 추방을 할 경우, 시위대가 성조기를 들지 오성홍기를 들겠는가”라며 반론을 제기하는 이도 있다.   시위 현장의 멕시코기를 바라보는 시선은 대개 불체 단속에 대한 찬반에 따라 갈리는 편이지만, 깃발의 의미와 그 존재가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은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최근 불체 단속 항의 시위에 참여했다는 한 네티즌은 “시위 참여 경험 중 대부분은 좋았지만, 멕시코기가 주로 눈에 띄는 것은 시위를 바라보는 외부인들의 시선에 부정적일 것 같다. 성조기를 함께 지니고 시위에 참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 글을 올린 이의 요지는 불체 단속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가진 이들도 성조기가 없는 가운데 멕시코기만 존재하는 시위 현장을 보면 부정적인 느낌이 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의견에 대해서도 많은 댓글이 달렸다. 어떤 이는 공감을 표시했고, 어떤 이는 ‘성 패트릭 데이에 아일랜드 깃발이 나부끼는 것을 보고 누가 뭐라고 하는가’라고 반문했다. 미국의 인종, 문화적 다양성과 표현의 자유를 들며 멕시코기의 의미를 확대해 해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었다.   멕시코기에 관한 논쟁은 불체 단속에 대한 찬반 입장이 명확한 이들 사이에선 승패가 갈릴 만한 이슈가 아닐 뿐더러 논쟁을 벌일 의미도 없어 보인다. 그저 불체 단속에 관한 기존 입장의 연장 또는 찬반 논리의 강화 과정에 불과해 보인다. 단, 불체 단속에 관해 중립적인 시각을 가진 이들에겐 멕시코기에 관해 느끼는 감정이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최근 부에나파크 고교의 교사 보조원은 소셜 미디어에 멕시코계의 화염에 휩싸인 멕시코기 사진을 배경으로 “만약 너희가 멕시코기를 든다면 내가 너희를 위해 그것들(멕시코기)을 불태울 것”이란 글을 올렸다. 또 “여기는 미국이다. 그들(연방 정부 불법체류자 단속 요원)은 범죄자들을 추방하고 있다”는 글을 썼다.   멕시코계가 다수인 부에나파크고 약 100명 학생은 학교 사무실 앞에서 시위를 벌였고, 학부모들도 충격을 받았다고 밝혔다. 부에나파크고 교장은 학부모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사과하고 교사 보조원에게 정직 처분을 내렸다고 밝혔다.   유치환 시인이 맞았다. 깃발은 소리없는 아우성을 발산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아우성이 사실은 깃발이 아니라 우리 내면에서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임상환 / OC취재담당·국장중앙칼럼 멕시코 아우성 멕시코 출신 가운데 멕시코 시위 참여

2025-02-11

[문예 마당] 내가 보이면 세상도 보인다

당나귀와 같은 근성에 휘두르는 회초리가 있다. 예수가 예루살렘 입성 때 탔던 당나귀를 패러디한 것이지만 의미가 있는 교훈이다. 당나귀 가는 길에 몸에 두른 옷을 벗어 깔아 놓고 빨마 가지(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호하는 군중을 보면서 당나귀는 착각 현상에 빠져 붕 뜰만도 하지 않았겠는지?   칭찬과 자화자찬을 조심하라는 뜻에서 옛 성인들이 제자를 가르치는 데 사용한 것이 당나귀 회초리다. 일반적인 의미의 회초리가 아니고 나처럼 나르시시즘이 다분한 사람에게 필요한 약이다. 세속적 도발성과 충동을 제어하는 것에 약하다 보면 자신의 본질을 놓아버리게 된다. 눈길을 따라 들락날락하는 마음이라니! 그래서 휩쓸리는 짓거리가 보이면 즉시 두문불출로 대응한다.   내면으로 숨어드는 내공의 연습도 필요하다. 깊이 가라앉는 마음의 바닥이 보일쯤이면 어느새 1시간의 침묵이 흐른다. 그리고 명상 중에 흘러갔던 것들을 기록한다. 때로는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아우성, 오래전에 있었을 법한 무의식에서 걸어 나오는 어린아이라고 해야 할지? 본적도 느낌도 없는 관계지만 마음의 언저리에서 서성인다. 때로는 시공을 넘어와 포개 앉은 다리에 무릎을 부치려는 순간 나도 모르게 손으로 쳐내 버린다.   삶과 피안의 세계 경계를 확실히 해두고 싶은 손짓이었는데 마음은 무거워진다. 튀어나온 존재는 무엇이었을까? 왜 아우성처럼 느꼈는지? 곱씹으려 해도 실마리가 잡히지 않는다. 영적 지도자는 어린 시절 나의 자화상이라고 했다. 까불고 팔랑거리다 못해 촐싹거리는 어린아이가 나의 자화상이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누군가가 규정지어 주는 것이 싫다. 그대로 붙들려 그것처럼 내가 되어버릴 것 같아서이다.   별스러운 자화상 없이도 과거에 붙들림 없이 잘 지내왔다. 사람은 믿고 의지할 존재라기보다는 용서하고 덮어 주는 것이 회복의 길임을 알아챘기 때문일까? 그래서인지 사람을 대하는 마음이 훨씬 편안하다.   “ 눈이 예쁘네, 어디서 했수?” “아, 내 눈요? 아무것도 안 했는데….” 탐색의 코드부터 엇갈리기 시작하면 차라리 용모 지상주의 선전포고를 인정하여 맞장구를 치는 재미도 있다. 숨어있던 자화상이 기어 나와 나 역시 침을 튀길 기회다.     젊은 날의 초상까지 보여 주면 대화는 지속한다. “리모델링한 거 아니지?” “나, 40대에도 교인 할머니가 자기 아들 중매 서겠다고 찍힌 거 알아?” “알지, 저이가 누구누구 차 타고 교회에 왔다가 그이 누이한테 딱 걸려서 노총각 혼삿길 막을 셈이냐고, 그때 그런 일이 있었거든” “남편의 부탁으로 타고 온 것이 그렇게 된 거지 뭐….”   나의 인정하기 싫었던 자화상이 바로 나르시시즘이다. 포장으로 부풀리는 거짓 자아다. 이 때문에 당나귀 회초리는 모욕을 가하는 무기가 되어 준다. “헤이, 주책없는 당나귀야, 주인공은 네가 아니야. 히힝거리지 말아라.” 때로는 “이 늙어빠진 당나귀야 나대지 말고 잠잠해라” 하면 신기하게도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다소곳해진다.   다른 누군가에게 그런 모욕적인 언사를 들었다면 어땠을까? 독이 오른 뱀처럼 눈에 불을 켰을 것이다. 그러나 갚으려고 기회를 노릴 것도 괜한 감정 낭비로 밤잠을 설칠 필요도 없게 된다   마음과 의지만으로 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아는 길들여야 한다. 길들이지 않는 자아는 분노에 휘말릴 확률이 높아진다. 자아는 상처받는 것을 아주 싫어하기 때문에 인정하는 것에 인색하고 방어기제에는 능하다. 무의식의 지배를 받지 않도록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다.   조용한 시간에 촛불을 마주하고 내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자아를 길들인 사람은 앉아 있는 한 시간이 무척 평화롭고 빠르다. 그러나 초보자는 단 십 분도 견디기 힘들 것이겠지만 분노 오해 등 부정적 속성인 자아의 주도권을 잡으려면 감내해야 한다.   무조건 앉아야 하는 일은 처음부터 어렵다. 몸이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분심 잡념의 방해도 심하다. 자아를 길들이는 일이 수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의 통제를 받는 자아는 충고와 모욕에 순응하며 주인을 알아본다. 최경애 / 수필가문예 마당 수필 당나귀 회초리 아우성 오래전 부정적 속성인

2024-07-04

학교는 온통 '호흡기 질환'으로 "아우성"

    #페어팩스에 사는 한인 김 씨는 올 가을 “정신을 바짝 차려 생존 모드에 돌입했다”고 말했다. 수주 전 데이케어에 다니는 18개월짜리 딸이 호흡기융합바이러스(이하RSV)에 걸려 조퇴하고 집에 와야만 했다. 그리고 딸이 걸린 호흡기 바이러스에 온 가족이 옮았다. 프리랜서인 그녀는 “딸도 아프고, 나도 아프다. 일이 있는 날에는 꾸역꾸역 식사를 하려고 하지만, 일이 없는 날에는 밥맛도 없어서 식사도 제대로 안하고 있고 호흡기질환으로 밤에 잠도 잘 못자고 있다. 이 시기를 잘 버텨냈으면 좋겠다”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코로나로 인해 학교에서는 교사부족, 어린이집에서도 인력난을 겪고 있는 가운데 독감, RSV, 코로나, 보통 감기가 유행해 학부모와 교사들이 다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노동국 통계에 의하면 지난달 10만명 이상의 미국인들이 아이들 문제로 휴가나 연차를 냈고, 이는 코로나가 한창이던 때와 비교해 증가한 수인 것으로 드러났다. 코로나로 인해 최악의 상황은 지났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부모들의 잦은 휴가와 연차는 인플레이션으로 침체에 빠진 경제에 또다른 악재요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이 발생한지 3년이 지난 현재 부모들은 “새로운 고지를 맞이한 기분”이라고 표현했다. 특히 RSV 로 인해 전국적으로 모든 병원의 아동병동은 자리가 없는 상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데이케어나 어린이집에서 인력난을 겪고 있어 아이들 정원이 줄어 부모들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KPMG의 다이앤 스원크 수석경제학자는 “아이들 돌봄 체계에 경고등이 들어온 현재 아이들이 아프기까지하니 숨쉴 구멍이 없는거나 마찬가지”라며 “이는 생산성 저하와 물가인상으로도 이어지는 문제”라고 강조했다. 연방노동국 통계에 의하면 미국 노동자 생산성은 올해 2사분기까지 역사상 가장 큰 감소폭을 기록했다. 웰스파고 새라 하우스 수석경제학자도 “갑자기 쉬는 노동자들이 많으면 생산성이 감소할 수밖에 없다”며 “아이 돌봄 문제는 노동자들에게 항상 넘어야 할 문제였지만 최근에 경험하는 수준은 이례적이다. 아이들이 아픈데 돌봐 줄 기관이 적어 노동자들이 시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전국적으로 교육계는 코로나 기간에 더 높은 임금을 찾아 떠난 교직원과 교사들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노동시장 평균으로 보면 2020년보다 일자리가 많아졌지만, 돌봄 섹터만은 예외다. 공립학교에서는 30만명의 인력부족사태를 맞이했고, 데이케어센터도 코로나 이전에 비해 8만8000명의 직원이 줄었다. 테니시주에서 초등학교 미술 선생으로 재직중인 캐서린 반 씨는 “이로 인해 남아있는 직원과 교사들의 업무에도 과부하가 걸리고 있지만 쉬지도 못하고 일을 해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고 말했다. 켄터키, 오하이오, 테네시주에서는 학생과 교사가 모두 아파 수업을 취소하는 경우까지 다수 발생했다. 캐서린 반 씨는 “RSV와 폐렴까지 걸렸는데도 교사부족으로 쉬지 못하고 마스크를 한 채로 일하고 있다. 교사의 15%가 매일 RSV, 코로나 또는 독감으로 학교에 나오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 안타깝다”고 전했다.  김정원 기자 [email protected]호흡기 아우성 호흡기 질환 초등학교 미술 호흡기 바이러스

2022-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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