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실학산책] “오늘 너를 무죄로 석방한다”

1797년 음력 윤 6월 2일 다산 정약용은 황해도 곡산(谷山) 도호부사로 임명되었다. 생애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목민관 생활, 조선이라는 나라로서는 참으로 역사적인 날이자 『목민심서』라는 위대한 고전이 탄생하게 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1799년 음 4월 24일 부사직을 마치고 내직으로 들어오기까지의 1년 11여개월 간의 목민관 생활은 다산에게 『목민심서』를 저술할 경험과 지혜를 제공하는 결정적인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산은 본디 왕조 국가에서의 목민관은 작은 나라의 임금에 비길 정도로 막중한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 여겼다. 목민관들이 제대로 역할을 한다면 세상은 반드시 좋은 정치가 이룩되고 국태민안의 나라가 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직접 체험한 곡산의 목민관 생활은 조선 역사상 획기적인 사건의 하나였다. 그런 이유에서 다산은 곡산에서 행한 목민관의 업무를 참으로 섬세하게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전해지도록 정성을 기울였다. 부임해서 퇴임하기까지의 보람 있는 업적들을 모두 기록하고, 목민관이라면 그렇게 행정을 해야 한다는 본보기를 보여줘 목민관의 전범으로 남게 되었다. 『목민심서』에도 대부분 옮겨 기록하여 이론서가 아니라 실제 행정의 지침서임을 알게 해주고 있다.   다산은 자서전 격인 ‘자찬묘지명’(집중본)에 모든 사실을 기록했고 『사암선생연보』라는 책에도 그대로 기록했다. 목민관이라면 이런 정도의 일을 해야 한다는 뜻에서 모든 일의 전말을 자세하게 적었다. 가장 획기적인 일이고, 선진적이면서, 혁명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큰 사건이 부임지인 곡산에 도착하면서 바로 일어났다.   “부임하자마자 이계심(李啓心)의 결박을 풀어주었다(旣赴任解李啓心之縛)”라는 기록이 곡산에서 행한 첫 번째의 일로 나와 있다. 이어서 이계심 사건의 전말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이계심이라는 자는 곡산의 백성이다. 앞의 원님이 다스릴 때 아전들이 농간을 부려 포보포(砲保布) 40자의 대금으로 (본래 200냥의 4.5배인) 900냥을 대신 거두었으므로 백성들의 원성이 시끄럽게 일어났다. 이때 계심이 우두머리가 되어 농민 1000여 명을 모아 관에 들어와 호소하였는데, 말이 매우 공손하지 못했다. 사또가 계심에게 형벌을 내리고자 했으나 1000여 명이 둘러싸고 대신 고문받기를 원하니 벌을 내릴 수가 없었고, 이계심은 탈출하고 말았다….”   점잖은 표현이지만 사실은 곡산에서 민란이 일어난 것이다. 주동자 이계심에 농민 1000여 명이 합세하여 관아에 쳐들어가 ‘원님 물러가라’고 천지가 흔들리도록 구호를 외치며 위협을 가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상부로 보고하여 이계심은 5영에 수배가 내렸으나 민간들이 숨겨주어 붙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 이유로 조정에서는 부사를 파면하고 다산을 후임으로 임명한 것이다. 다산이 부임차 곡산 땅에 도착하자 이계심이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 12조목을 적은 서류를 제출하며 신임 사또 앞에 자수하였다. 군청에 따라온 이계심을 심문하고 판결을 내린 정약용, 그야말로 200년 전의 일로는 혁명적인 재판을 하기에 이른다. 곡산으로 부임차 조정을 떠날 때 대신들은 모두 “민란의 우두머리 몇 사람은 반드시 죽이라”고 당부했건만, 다산의 판결은 분명히 달랐다.   주문: “오늘 너를 무죄로 석방한다(今日汝白放矣).”   참으로 파격적인 판결이었다. 주문에 이어지는 판결 이유는 더욱 놀랍다. 어찌 200년 전의 재판이라고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목민관이 밝은 정치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백성들이 자신의 몸보신에만 영리하여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을 관에 항의하지 않기 때문이다(官所以不明者 民工於謨身 不以?犯官也).” 자세한 설명까지 덧붙였다. “한 고을에 모름지기 너와 같은 사람이 있어 형벌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만백성을 위해 그들의 원통함을 폈으니, 천금은 얻을 수 있어도 너와 같은 사람은 얻기 어려운 일이다.”   민란을 일으킨 주모자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나라의 기강을 세우라던 중앙의 대신들 분부까지 묵살하고, 벌을 주기보다는 천금으로 사야 할 사람이라고 칭찬했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잘못하는 관(官)에 강력히 항의할 때에만 관이 밝은 정치를 할 수 있다는 국민 저항권. 200년 전 전제군주 국가에서 일어난 일이니 혁명적인 판결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독재시대, 관의 잘못에 항의하다가 얼마나 많은 국민이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던가. 비록 200년 뒤이지만 우리는 이계심의 전통을 이어 촛불로 항의하여 대통령을 파면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4.19, 5.18, 6.10항쟁 모두 국민 저항권의 발동으로 역사를 바꾸었다. 오늘의 현실에서 이계심의 외침이 새롭다. 형벌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외침, 시대고 해결의 열쇠는 거기에 있을 뿐이다. 박석무 / 다산학자"우석대 석좌교수실학산책 석방 무죄 부임차 곡산 목민관 생활 부임지인 곡산

2024-03-08

[실학산책] 성호 이익의 간쟁론

고전을 읽으면 현재도 보이고 미래도 예측할 수가 있다. 현재나 미래와 무관한 옛날의 책을 모두 고전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세상일이 제대로 보이지 않고, 풀리지 않는 일로 나라와 백성에 대한 근심을 떨칠 수 없을 때에는, 고전을 읽어서 옛날·현재·미래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찾아내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요즘 나는 고전을 자주 들여다보고 있다. 까맣게 잊어버린 내용들을 다시 기억해내면서 다시 읽는 고전의 재미는 쏠쏠하다. 특히 조선 후기 실학자들인 반계·성호·연암·다산 등의 대학자들의 저술은 대부분 고전인데, 그런 책을 읽으면서 오늘의 난제들을 풀어보는 지혜를 얻고 싶은 심정에서 출발한다. 『반계수록』이나 『반계유고』에는 유형원의 정치·경제·사회에 대한 견해를 알아볼 수 있고, 『성호사설』이나 『열하일기』를 통해 뛰어난 사상가이자 경세가들인 이익·박지원의 생각도 접할 수 있다. 다산의 고전을 읽는 일은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   성호 이익의 저서 『성호사설』은 조선 실학을 대표하는 고전으로서의 지위를 얻은 지 오래다. 다산 정약용 같은 학자도 성호의 유저를 16세에 읽고 큰 학자가 되었으니, 성호를 계승한 다산에게 『성호사설』이 미친 영향은 대단했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다산은 자신의 큰 꿈이 성호선생을 사숙하여 배우던 가운데서 깨닫게 되었노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런 정도의 큰 영향을 미친 책이 바로 『성호사설』이었다.   성호는 책에서 ‘간직(諫職)’이나 ‘간관참정(諫官參政)’, ‘간관불상견(諫官不相見)’, ‘직언극간(直言極諫)’, ‘직언이국(直言利國)’ 등의 여러 항목을 두고서 임금에게 바른말로 간(諫)하는 일의 중요성을 말했다. 반드시 간언하기를 꺼리지 않는 신하가 많이 있어야 하고, 간언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임금이 있을 때에만 나라가 제대로 다스려질 수 있다는 것을 거듭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임금은 직언하는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는 임금이라고 하면서 천하의 폭군 대표자로 중국 고대의 걸(桀)과 주(紂) 두 임금을 들었다. 그 시절에 관용봉이나 비간(比干) 같은 충신들이 있었지만 죽음을 무릅쓴 그들의 간언을 듣지 않아 끝내 패망했다고 하였다. 성호의 해설은 참 쉽다. 듣지 못하는 사람은 귀머거리이고 보지 못하는 사람은 소경인데, 귀머거리나 소경이야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한 선천적인 것이지만, 보여주어도 보지 못하고 들려주어도 듣지 못하는 임금은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되어지는 귀머거리이자 소경이라고 평했다.   정상적인 신체로 본인의 의지에 의해 보여주고 들려주어도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걸(桀)이나 주(紂)는 어느 때나 있기 마련이다. 본인도 멸망하고 나라까지 망하게 하여 온 국민을 도탄에 빠뜨리고 마는 것은 고금에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성호는 간쟁(諫諍)의 문제를 상세히 거론하여 간(諫)하는 신하의 충언을 들어주느냐 여부에 따라 나라의 치란이 결정된다고 여겨, 간하는 신하가 반드시 있어야 하고, 간하는 신하의 간언을 제대로 받아들여 자신의 비행을 시정하는 임금이 선정을 베풀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간언하는 일은 어렵다. 사람의 마음은 아첨하는 말을 좋아하고 곧은 말을 싫어하며, 곧은 말을 하면 반드시 불리해지고 아첨하는 말은 이익이 따른다. 곧은 말이 용납되는 경우도 있지만 아첨하는 말로 죄를 받았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니, 사람들이 누가 자기의 이익을 저버리고 위험한 데로 나아가기를 바라겠는가. 이래서 간언하는 일이 어렵다고 성호는 설명했다.   다산 정약용도 말했다. “아첨을 잘하는 사람은 충성스럽지 못하고 간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배반하지 않는다.「用人」)” 그래서 이 점을 안다면 실수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해, 아첨하는 무리들에게 둘러싸여 지내다가는 나라도 망하고 자신도 파멸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고대 중국의 요순시대나 우리 조선의 세종시대나 정조시대가 그래도 제대로 정치가 이룩되었다고 하는 것은 아첨하는 사람을 물리치고 간쟁 좋아하는 사람들을 가까이하고 중용하였기 때문임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지금 정권을 잡은 새 정부는 어떤가를 눈여겨보고 있다. 과연 간쟁 좋아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으며, 대통령은 간언을 재대로 들어주고 있는가도 지켜보고 있다. 성호나 다산의 지혜를 제대로 활용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잘하는 정치는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박석무 / 다산학자, 우석대 석좌교수실학산책 간쟁론 성호 성호 이익 학자도 성호 다산 정약용

2022-11-06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