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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음식] 달콤한 K푸드

‘오징어 게임’의 성공 덕에 달고나(dalgona)가 세계적인 먹거리로 떠올랐다.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을 때 짜파구리와 같은 꽃길을 걷고 있다. 2000년대 후반 시작된 한식의 세계화도 활짝 꽃을 피울 태세다.   최근에는 한식(韓食)보다 K푸드라는 단어가 더 많이 쓰인다. 한식에서 K푸드로의 이동은 단순히 영어 단어 사용 차원이 아니다. 내용적으로도 패러다임의 전환을 보여준다. 한식이란 말은 대한제국(1897~1910) 시기에 처음 등장한다.  바로 『각사등록(各司謄錄)』 1900년 8월 기록에 나온 ‘음식은 한식(食韓食)’이다. 한식은 일식이나 청식(淸食)·양식의 상대개념으로 쓰였지만 당시 한식은 ‘복잡한 음식, 자양분이 없는 음식을 많이 먹는지라 우리의 신체도 역시 복잡하며 무기력하도다’라고 한 열등한 음식이었다.   해방 후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식은 외국에서 열린 올림픽에 참가한 운동선수나 교민들이 먹는 한국인만의 음식으로 소개됐다. ‘외국을 다녀본 사람들은 누구나 느끼겠지만 한식의 값은 왜식에 비해 너무나 싼’(1972년 8월 1일자 조선일보) 싸구려 음식 취급을 받았다.   한식이 외국인의 관심을 본격적으로 받은 것은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다. 1990년대 이후 국내에서도 우리 것에 대한 관심과 함께 재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2000년대 발아한 한류와 K팝이 아시아와 세계로 퍼지면서 K푸드라는 단어도 새롭게 떠올랐다. 한식이 외국 음식에 대한 상대적 개념을 기반으로 한 한국인 중심의 먹거리라면, K푸드는 미국·유럽 등의 다양한 음악을 한국식으로 소화한 후 독창적인 선율과 리듬으로 다시 창출해낸 K팝처럼 지구촌의 다양한 음식 문화를 받아들이고 새롭게 해석한 독창적인 음식문화다.   예로 라면을 보자. 중국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상품화한 인스턴트 라면을 우리는 한국식으로 끌어올려 세계인의 미뢰를 자극했다. 우리 라면 기술에 쇠고기를 얹은 짜파구리 같은 한국형 변종도 큰 성공을 거뒀다. 포르투갈에서 일본을 거쳐 한국화한 달고나는 이제 달고나 커피에서 드라마·게임으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조선시대에 허균의 집안은 일본과 중국을 다녀온 당대의 세계인이었다. 허균은 유배지에서 쓴 조선의 음식 품평서 『도문대작(屠門大嚼)』(1611)에서 “우리나라는 외진 곳에 있기는 하지만 바다로 둘러싸였고 높은 산이 솟아 물산이 풍부하다. 만일 (중국의) 하씨(何氏)나 위씨(韋氏) 두 사람의 예(例)를 따라 명칭을 바꾸어 구분한다면, 아마 역시 (음식 이름이) 만(萬)의 수는 될 것이다”고 말했다. 허균이 상상했던 만 가지 K푸드세계가 지금 기세 좋게 열리고 있다. 박정배 / 음식평론가시사음식 푸드 외국 음식 음식 자양분 싸구려 음식

2021-11-14

[시사음식] 개 식용 단상

 개 식용 문제가 다시 공론대에 올랐다. 지난달 27일 문재인 대통령이 “이제는 개 식용 금지를 신중하게 검토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라고 언급하면서다. 오랜 논란이 재차 불거지는 모양새다. 식용견 농장주로 구성된 대한육견협회와 ‘케어’ 같은 동물복지단체가 개 식용 문제를 둘러싸고 뜨거운 법제화 논쟁을 벌이고 있다.   개 식용 논란은 복합적이다. 우선 개를 먹을 것인가에 대한 윤리적·관습적 갈등이 있다. 관련법 사이의 충돌도 있다. 개를 가축으로 규정한 축산법과 개가 가축으로 규정되지 않아서 도축과 유통을 법으로 관리하지 못하는 축산물위생관리법이 상충한다. 동물단체들이 추진 중인 ‘법적 근거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동물의 살상을 금지하는 ‘동물보호법 개정안’과 ‘개를 가축에서 제외하는’ 축산법 개정안 등을 둘러싼 다툼도 얽혀 있다.     개 식용 논란은 연원이 깊다. 일제강점기는 물론 해방 이후에도 여러 차례 사회 문제가 됐다. 문화적 충돌 때문이다. 일례로 1954년 5월 서울경찰국장은 개장국 판매 금지 조치를 내린다. 미국에서 오래 생활한 이승만 대통령과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영향이 컸다.   이후 개장국은 보신탕으로 이름을 바꾼다. 닭으로 만든 닭개장이나 닭보신탕도 새롭게 등장했다.     개 식용에 관한 첫 기록은 13세기 중반, 고려 후기 태안 마도3호의 목간에서 나온 구포(拘脯·개고기 포)다. 개장국은 ‘자궁(慈宮)에게 가장증(家獐蒸·개고기 찜) 진찬(進饌)하였다’(1795년 6월 18일, 『일성록』)처럼 왕실 행사에도 등장했고, ‘대궐 밖의 개 잡는 집에 이르러 개장국을 사 먹고’(1777년 7월 28일, 『속명의록(續明義錄)』처럼 외식으로도 먹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조선시대에 개는 복날 시식이었다. 선풍기도 아이스크림도 없던 시절, 초복에 개를 먹으면 더위를 먹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담긴, 즉 절박함이 깃든 음식이었다. 19세기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개고기를 파와 함께 푹 삶은 것을 개장(狗醬)이라고 한다. 개장국을 만들어서 산초가루를 치고 흰밥을 말면 시절 음식이 된다. 이것을 먹고 땀을 흘리면 더위도 물리치고 보신도 된다’는 대목이 있다.   하지만 당시에도 개를 꺼린 사람들이 있었다. 소고기로 개장국을 따라 만든 육개장이 등장했다. 그러나 최근 환경은 크게 바뀌었다. 영양 부족이 해결됐고, 여름 나기도 수월해졌다. 반려견 인구가 급증했고, 동물복지에 대한 사회의식도 높아졌다. 그럼에도 수천 년 이어온 개 식용이 갑자기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예전과 다른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때다. 박정배 / 음식평론가

2021-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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