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수저계급론'과 우크라이나
코로나19 팬데믹이 끝날 듯하면서 지속하고 있다. 가능한 외출을 삼가다 보니 평소 안 하던 체조도 하고, TV를 보거나, 유튜브로 요리를 배우기도 한다. TV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다 보니 한국 드라마에도 맛을 들이고 있다. 그런데, 가끔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는 외국어, 한국어와 영어를 합친 신조어들이 등장하곤 한다. 이해하기 힘들기도 하고 한국말이 없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자주 등장하는 것 중 하나가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프랑스 말인데 한국, 그리고 미국에서도 자연스레 쓰이고 있다. ‘노블레스’는 영어로는 ‘노블(noble)’이고, 귀하다는 뜻이다. ‘오블리주’는 ‘obligation’으로 책임이라는 뜻이다. 귀족 층은 일반인들이 누리지 못하는 여러 가지 특권을 누리면서 살기 때문에, 그 특권에는 의무가 따른다는 뜻이다. 이 멋진 뜻은 기원전 600 년 경, 호머의 ‘일리아드’에 처음으로 등장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또 ‘수저’에 관한 단어들이 사회 계층을 지칭하는 뜻으로 많이 쓰이고 있다.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나무수저, 흙수저 하는 식이다. 마치 한국에 새로운 ‘수저 계급제도’라도 등장한 듯하다. 계급과 신분이 우리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계급이란 재산, 직업, 교육 정도가 비슷한 사람들의 집단이라고 정의한 것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런데 한국에는 계급제도가 없지 않은가? 계급이나 신분은 사실상 불평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계급은 법으로 정해진 사회의 불평등이고, 신분이란 의식적 불평등이라고 한다. 미국이나 한국은 법적인 불평등은 없지만, 의식 속에서는 불평등의 관념이 아직도 자리 잡고 있는지 모른다. ‘수저계급’도 그런 현상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수저계급론의 시초는 미국이다. 아무개는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다는 표현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과연 어느 수저 계급에 속할까? 어디에 속하던지 상관없이, 나는 동수저가 좋다. 동(銅)은 광물질 브라스(brass) 또는 코퍼(copper)를 뜻하는데, 여기서 한국에서 쓰는 동수저라는 말 속의 동은 스테인리스 스틸을 뜻한다. 스테인리스 스틸은 인류가 발견하고, 발전시킨 물질 중 가장 획기적인 것이다. 약 110년 전에 영국인 헤리 브리얼리가 녹슬지 않고 단단한 총기를 만들려고 우연히 크로미움(동위원소 Cr)을 철에 섞으면서 발명된 것이다, 철에 약 11% 분량의 크롬을 섞으면 녹 쓰는 것도 방지하고, 단단하고, 오래갈 뿐 아니라, 섭씨 1200도의 고열을 견디며, 값도 무척 싸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물질이 무척 위생적이라는 것이다. 스테인리스 스틸은 의학기구, 주방용기, 오븐, 자동차 부속품, 건축자재로 다양하게 쓰인다. 그뿐 아니라 맥주 발효 통, 비행기, 잠수 TV, 세탁기 등 어떤 물질을 장시간 동안 저장해도 부식하지 않는 유용하고 좋은 물질이다. 귀족 계급이 없어진 지 오래되지만 의식적 불평등 속에서 사는 지금, 어떤 사람들과 계층이 노블레스에 속할까? 여기에 수저계급론을 접목해서 생각해 본다. 이들 중에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수저 계급은 누구일까? 금수저와 은수저까지일 것 같고 그래야만 한다. 그렇지만, 동수저, 나무수저 계급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얼마든지 실천하면서 살 수 있다. 누구든지 경제적으로 나보다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으면 의무의 완수가 될 것이다. 한국전쟁을 겪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미국에 사는 한인들은 우크라이나를 돕는 데 적극적이다. 우크라이나에 있는 한인 후손을 돕기도 하고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 동문회는 미국에 유학 중인 우크라이나 학생들에게 생활비를 지원하고 있다. 많지도 않고, 영구적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72년 전, 6·25전쟁으로 공부할 시기를 놓쳐 대학 진학이 불가능했던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유학의 길을 열어 주었던 미국 시민들이 실행했던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같다. 그들은 거부가 아니라 우리처럼 평범한 미국 시민들이었다. 류모니카 / 종양방사선 전문의·한국어진흥재단 이사장기고 수저계급론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 학생들 노블레스 오블리주 수저 계급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