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아메리카 편지] 나발니와 소크라테스

러시아 대통령 선거를 한 달 앞두고 푸틴 정권의 반정부 리더인 알렉세이 나발니가 2월 16일 갑작스럽게 옥사했다. 지난 20년 동안 반정부 활동을 했던 나발니는 시장 및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려 할 때마다 체포되거나 출마 자격을 박탈당했고, 결국 2020년 8월 모스크바행 비행기 안에서 독살될 뻔했다. 당시 베를린의 병원으로 이송됐던 나발니는 체포 및 암살 등의 위험을 뻔히 예상하면서도 치료를 마치자마자 제 발로 귀국했다. 자신은 서유럽에서 편히 살면서 러시아 국민에게 푸틴 정권에 대항해 싸우라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 역시 정치적인 이유로 고소돼 “청년을 부패시키고 하느님을 믿지 않는 자”라는 죄명으로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가 도주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악법도 법이다”는 신조로 사약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비롯해 기원전 5세기 말의 격동기를 거친 아테네는 친스파르타의 과두제인 30인 정권하에 있었다. 이들은 공포정치를 통해 대립 세력을 숙청했다. 1년 만에 민주정권이 복귀되면서 30인 정권에 관여한 이들 중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이 있었다는 사실도 문제시됐다.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자는 아무도 없다”는 델포이 신전의 신탁이 잘못됐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당시 지혜롭다고 명성을 얻은 모든 사람과 공개토론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지배층의 미움을 샀다. 소크라테스는 ‘무지의 자각’을 통해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의 현인들은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몰랐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근원적 물음이다. 나발니나, 소크라테스나 자기가 소속한 체제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던졌다. 우리의 정치도 이러한 물음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김승중 /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아메리카 편지 소크라테스 러시아 대통령 대통령 선거 아테네 지배층

2024-03-07

[아메리카 편지] 나발니와 소크라테스

러시아 대통령 선거를 한 달 앞두고 푸틴 정권의 반정부 리더인 알렉세이 나발니가 2월 16일 갑작스럽게 옥사했다. 지난 20년 동안 반정부 활동을 했던 나발니는 시장 및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려 할 때마다 체포되거나 출마 자격을 박탈당했고, 결국 2020년 8월 모스크바행 비행기 안에서 독살될 뻔했다. 당시 베를린의 병원으로 이송됐던 나발니는 체포 및 암살 등의 위험을 뻔히 예상하면서도 치료를 마치자마자 제 발로 귀국했다. 자신은 서유럽에서 편히 살면서 러시아 국민에게 푸틴 정권에 대항해 싸우라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 역시 정치적인 이유로 고소돼 “청년을 부패시키고 하느님을 믿지 않는 자”라는 죄명으로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가 도주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악법도 법이다”는 신조로 사약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비롯해 기원전 5세기 말의 격동기를 거친 아테네는 친스파르타의 과두제인 30인 정권하에 있었다. 이들은 공포정치를 통해 대립 세력을 숙청했다. 1년 만에 민주정권이 복귀되면서 30인 정권에 관여한 이들 중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이 있었다는 사실도 문제시됐다.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자는 아무도 없다”는 델포이 신전의 신탁이 잘못됐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당시 지혜롭다고 명성을 얻은 모든 사람과 공개토론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지배층의 미움을 샀다. 소크라테스는 ‘무지의 자각’을 통해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의 현인들은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몰랐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근원적 물음이다. 나발니나, 소크라테스나 자기가 소속한 체제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던졌다. 우리의 정치도 이러한 물음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김승중 /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아메리카 편지 소크라테스 러시아 대통령 대통령 선거 아테네 지배층

2024-03-05

[신 영웅전] 알키비아데스

그리스 역사가이자 철학자인 플루타르코스가 쓴 고대 그리스·로마의 역사책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가장 극적인 삶을 산 사람은 알키비아데스(BC 450~404)였다.   명문가에 태어나 육신은 대리석 조각처럼 아름답고 건장했으며, 스승 소크라테스에게 배워 당대 최고의 지성이 되기에 충분했다.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집정관 페리클레스의 손에 큰 것도 운명이었다. 그의 생애를 보며 경탄한 플라톤이 『알키비아데스 평전』을 남겼다.   알키비아데스 같은 사람들이 겪는 공통된 비극은 교만과 ‘여난’(女難)이다. 교만은 천천히 자살하는 것이다. 발음이 부정확한 것 말고는 흉잡힐 것이 없는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 밑에서 배울 만큼 배웠다고 생각하고 스승에게 정치하고 싶다고 포부를 말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가 이렇게 충고했다. “먼저 너 자신을 알라. 그리고 정치인은 늘 좋은 해독제를 몸에 품고 다녀야 한다.”   전략적 두뇌가 비상했던 알키비아데스는 승승장구해 대장군까지 승진했다. 아테네 시민들은 그를 부러워하고 존경하면서도 두렵게 여기며 시기했다. 그럴 때일수록 더욱 겸손해야 하는데 알키비아데스는 그렇지 못했다. 조국에서 버림받고 스파르타로 망명해 다시 대장군이 된 다음 스파르타 왕 아기스의 왕비와 사통해 아들을 낳았다. 자기 아들로 스파르타의 왕으로 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스파르타에서 버림받고 있던 차에 아테네의 정세가 어지러워지자 알키비아데스는 사면을 받고 귀국해 조국에서 화려하게 재기했다. 그러나 다시 방종하고 문란한 생활을 하면서 옛날 하던 버릇으로 되돌아갔다.   드디어 아테네의 귀족들은 자객을 보내 알키비아데스의 집에 불을 지르고 살해했다. 그는 티만드라라고 하는 창녀의 치마폭에 쌓여 생애를 마쳤다. 덕망을 갖추지 못한 재주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보여주면서.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 영웅전 스승 소크라테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다음 스파르타

2023-08-20

[마음 읽기] 못생긴 외모에 관하여

지난주 어떤 커플의 결혼식에 갔다가 거슬리는 말을 들었다. 하객들이 “여자는 예쁜데 남자는 못생겼다”는 말을 서슴지 않는 것이었다. 요즘 젊은 층 사이에선 외모에 대한 언급 자체가 금기시되는 것 아닌가 싶었는데, 내 주변에선 체감상 오히려 늘고 있다. 한 어른은 함께 길을 걷다 뚱뚱한 사람이 지나가면 “어휴 답답해”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 “어머, 그러시면 안 돼요”라며 놀라서 말려봤지만 “보기만 해도 숨이 안 쉬어지는 걸 어떡해”라는 반응이 돌아왔다. 한 출판사 대표는 “외모도 실력”이라고 말한 적 있다. 지배 체제의 생각과 합일된 이런 말은 듣는 이에게 상처로 남는다. 우리는 자신이 어떤 권력을 갖는지도 모르는 채 말하고, 그 말들이 모여 누군가가 조형된다. 말하지 않으면 생각도 그쪽으로 내닫지 않을 텐데 ‘보이는 것’에 즉각 반응함으로써 인간은 시선의 권력을 누린다.   외모의 우월성에 대한 인간의 열망은 알다시피 고대까지 거슬러간다. 젊은 시절 소크라테스의 생애를 더 정확하고 세밀히 복원해내려 시도한 아먼드 댕거의 『사랑에 빠진 소크라테스』는 서두를 “이 비범하고 독창적인 사상가는 항상 가난하고 늙었으며 못생겼다”는 대중의 통념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저자는 젊은 시절 소크라테스가 실은 매력적인 외모로 동성과 이성에게 두루 로맨틱한 사랑의 대상이 될 만했다고 말한다. 노년에 외모가 좀 흉측해진 건 갑상선항진증을 앓았기 때문일 것이라는 게 저자의 추정이다. 소크라테스를 언급한 동시대 작가들의 글은 그의 외양 묘사를 빼놓지 않는데, 특히 당대의 관상학자 조피로스는 소크라테스의 쇄골이 움푹 파이지 않아 ‘바보 같고 머리가 둔하다’고 했다. 반면 소크라테스와 애틋한 관계였던 청년 알키비아데스는 잘생겨서 자신감이 넘친 까닭에 주사위 놀이를 할 때 마차가 다가와도 피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하나의 주제로 인간의 역사를 서술하는 관습은 전통이 깊지만, 외모만큼 끈질기게 인간사를 지배하는 것도 없는 듯하다(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도 외모 때문에 생기는 무례와 경멸을 퇴치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이 점은 소설가들이 캐릭터를 창안할 때도 작용한다. 디노 부차티는 『타타르인의 사막』에서 주인공 드로고에 대해 ‘그는 한 번도 잘생겨보지 못했던 사람’이라면서, 군인으로서 변변찮은 이력이 외모와 그로 인한 성격 형성에서 비롯됐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윌리엄 트레버의 『펠리시아의 여정』에서 펠리시아를 병적으로 괴롭히는 남자 주인공은 뚱뚱하고 눈이 단춧구멍만 한 사람이다. 범죄에 개연성을 부여하기 위해 작가는 캐릭터의 외모와 그로 인해 뒤틀린 심사를 활용한다.   신혼 시절 나는 시댁에서 이런 말을 몇 번 들었다. “발이 정말 크구나!” 29년간 정상이었던 내 발은 다른 공간 속에서 위상이 추락했다. 옛 시대에 큰 발은 하녀들이나 갖는 것이었다. 요즘도 여자 연예인들의 발이 크면 남자들이 놀려 당사자들은 이를 감추려 한다. 중국 여성들은 수백 년간 남성들의 발 페티시즘 때문에 전족을 했고, 그 시절 발은 ‘얼굴’이자 성품의 표지판이었다. 그들은 시집가기 위해 띠로 발을 동여맸지만, 근대에 들어 전족한 여성은 갑자기 경제력 없는 기생충 취급을 받았고, 이에 여성들은 띠를 풀고 고통스러워하면서 뒤뚱뒤뚱 걸었다.   공자도 언젠가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했던 자신을 반성하고 사람의 내면을 더 중시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물론 나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거나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성마른 비판을 하려는 건 아니다. 그런 도덕적 일갈은 쉽지만 공허하다. 다만 아도르노의 말처럼 “현실 속에 편입된 미는 현 존재의 계산 가능한 요소로 전락”했고, 차별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으며, 언제나 타인을 대상화할 위험성이 있다. 그러니 차라리 자기 얼굴을 논하자. 이건 거울 많이 보고 성형수술을 해 관리를 잘하자는 말이 아니다. 철학자 김영민은 “얼굴에 윤리가 개입한다”면서 얼굴을 하나의 ‘깨달음의 장소’로 인식했다. 늘 시선의 바깥에 놓여 자신은 짐작하지 못했던 스스로의 인상과 표정에서 삶을 되돌아보는 기회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내 가족 한 명은 인상이 좋다는 칭찬을 많이 듣는다. 나는 그 얼굴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안다. 밥 먹고 얻은 에너지가 주변으로 흘러넘쳐 타인을 세심히 살피는 게 그의 특기일 뿐 아니라 자신도 잘 돌본다. 매일 아침 운동하며 만나는 한 노년의 여성은 직업으로 아기들을 돌보느라 밤잠을 설치지만, 그 얼굴은 아기처럼 부드럽고 귀엽기까지 하다. 잠 덜 깬 내 몸은 운동할 힘을 자주 그녀의 얼굴에서 구한다. 이은혜 / 글항아리 편집장마음 읽기 외모 민주주의도 외모 시절 소크라테스 반면 소크라테스

2022-09-23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반지성주의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반지성주의   김건흡 MDC시니어센터 회원   다비드의 그림은 드라마틱하다. 그림 속 인물들의 제스처를 보면 마치 연극의 한 장면 같다. 한손에는 독배를 들고 하늘을 향해 반대쪽 손가락을 치켜든 사람은 소크라테스다. 그가 슬픔에 잠긴 제자들에게 말한다. “검증되지 않은 삶을 사느니 차라리 나는 여기서 죽는다.”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가 법정에 섰다. 시인 멜레토스를 포함한 아테네 시민 3명이 소크라테스를 고발했다. 재판에 참여한 배심원은 501명. 법정 통로에는 물시계가 있었다. 재판을 저녁식사 전에 끝내야 했기에 발언 시간을 제한할 필요가 있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은 재판 결과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소크라테스가 처벌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느꼈다. 재판이 시작됐다. 원고를 대표해 멜레토스가 고발 이유를 밝혔다. 소크라테스의 혐의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아테네의 국가적 가치를 경멸하도록 젊은이들을 선동하고 타락시켰다는 것, 다른 하나는 아테네가 인정하는 신들을 부정했다는 것이다. 멜레토스의 고발이 끝나자 소크라테스가 물었다.“누가 젊은이들을 훌륭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멜레토스는 ‘법’이라고 대답했다. 어떤 사람을 말하느냐고 다시 묻자 멜레토스는 ‘재판관’이라고 고쳐 말했다. 소크라테스가 원로원까지 들먹이며 젊은이들을 가르칠 자격이 있는 사람이 누구냐고 되묻자 멜레토스는 소크라테스만 빼고 어떤 아테네 시민도 젊은이들을 훌륭하게 가르칠 수 있다고 대답했다. 배심원들은 소크라테스가 공개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발인들과 원만하게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재판 시작부터 승소할 생각이 별로 없는 듯 보였다. 생사를 초월한 듯한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쓸모 있는 사람이라면, 살고 죽는 문제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것이오. 오히려 자신이 옳은 일을 하는지, 잘못을 저지르는지에 대해 고민할 것이오. ‘이른바 현자(賢者)’들이 죽음에 대해 두려워할 뿐이지 ‘진짜 현자’는 죽음의 공포를 느끼지 않소…나는 결코 선한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피해가려 하지도 않을 것이오…다시는 젊은이들을 가르치지 않겠다는 조건을 달아 풀어주겠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소. ‘아테네의 시민들이여, 나는 결코 철학을 가르치는 일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오.”     소크라테스는 결연했다. 결과는 유죄였다. 배심원 501명 중 280명이 소크라테스의 유죄를 인정했다. 당시 아테네 법정은 형량을 정하는 논의에 피고도 참여할 수 있었다. 형량과 관련해 2차 변론이 시작됐다. 다급해진 제자들은 소크라테스를 설득했다. 소크라테스가 전쟁에 나가 용맹하게 싸운 점 등 그동안 아테네에 기여한 공로를 감안해 유배형이나 금고형을 받을 수 있도록 배심원들을 다독일 것을 스승에게 간곡히 요청했다. 눈 한번 찔끔  눈감아달라는 거였다. 유배형은 정치범이 주로 받는 형벌이었다. 잠시 유배 갔다 수년 뒤 조용해지면 돌아와 제자리를 찾는 게 보통이었기에 큰 부담은 없었다. 금고형 역시 소크라테스가 70세 고령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형식적 처벌에 그칠 공산이 컸다.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배심원단에게 선처를 부탁하기는커녕 배심원들이 보기에 터무니없는 요구를 서슴지 않았다. 자신이 아테네의 영웅 칭호를 받아야 하고 죽을 때까지 무상으로 식사를 제공받아야 한다는 얘기까지 꺼냈다. 배심원단은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소크라테스가 법정의 권위를 일부러 무시한다고 생각했다. 소크라테스의 요구 조건은 아테네 시민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였기 때문이었다. 전쟁 영웅이나 올림픽 우승자가 누리는 보상이었다.  곧이어 형량이 정해졌다. 배심원 가운데 360명이 사형 판결에 동의했다. 1차 판결 때보다 분위기가 더 나빠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이 그의 목숨을 재촉한 꼴이 됐다. 소크라테스는 재판이 끝나고 곧바로 감옥에 수감됐다. 사형 집행 전날 밤 소크라테스의 제자 크리톤이 소크라테스를 찾아와 탈옥을 권유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 제안마저 거절했다.     크리톤은 소크라테스를 살리려고 갖은 애를 썼으나 소용이 없었다. 대신 소크라테스는 아스클레오피스에게 닭 한 마리 빚진 것이 있는데 꼭 갚아주게”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독배를 마셨다. 소크라테스가 죽음 앞으로 걸어간 이유는 무엇일까. 소크라테스는 너무 똑똑했고 사람들은 너무 어리석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인정하지 않을 정도로 어리석었다.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와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받은 청년들 때문에 자신의 무지가 드러났을 때 자신의 지성을 더 갈고 닦을 생각을 하는 대신 소크라테스를 죽였다. 아테네의 반지성주의가 이성을 살해한 것이다. 특히 법정에서 소크라테스가 보여준 당당한 모습과 아테네 시민들에 대한 직설적인 비판은 재판관들의 반감을 불러일으켰다.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죽음 앞에서도 인간이 보일 수 있는 최고의 품위를 보였다. 죽음을 대하는 소크라테스의  당당한 자세는 인간 존엄의 표상이며, 인간의 지성이 다다를 수 있는 이성의 끝판왕을 보여준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비이성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만약 소크라테스가 21세기에 살고 있었다면 다른 운명을 맞았을까.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타인의 무지를 지적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이다. 그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사람이며 인정에 호소하지 않는다. 그는 아무리 불리한 입장에 처해도 죽을지언정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보여주지 않았고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사람을 뭐라고 부르는가. 우리 사회는 여전히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을 미워한다. 현대 사회는 소크라테스를 성인이라 칭하고 현자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실제로 소크라테스와 같은 논법을 쓰면 잘난 척 한다고 싫어한다. 불의와 사회의 부당한 압력에 자신의 소신을 지키는 사람을 부적응자라고 손가락질 한다. 반면 불의에 순종하는 모습을 ‘현실’이라는 핑계로 정당화한다.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모이지 않는다. 따위의 케케묵은 말만 한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의 변명’이 보여준 고대 아테네의 반지성주의와 어리석음에서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이 나아졌는가.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사에서‘자유’를 최상의 가치로 내세웠다. 그물코처럼 자유가 공정, 민주, 번영, 연대, 박애 등의 가치를 한 줄로 꿰고 있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를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통령에 따르면, 반지성주의란 과학과 진실을 거부하는 불합리와 소수 의견을 억누르는 다수 폭력이다. 그는 “각자가 보고 싶은 사실만을 선택하거나 다수의 힘으로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는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해치고 있다”고 했다. 낡은 시대의 감옥에서 필사적으로 탈출하려는 새 대통령의 각오가 엿보인다.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지성주의’란  맛깔스런 단어에 희망이 묻어난다. 다수라는 것만으로 민주주의일 수는 없다. 반지성주의는 곧 민주주의의 실패다. 자유를 지키려면 반지성주의의 광기를 타파해야 한다.  김지민 기자소크라테스 반지성주 대신 소크라테스 아테네 시민들 고대 아테네

2022-05-18

[기고] 올해 어떤 책을 읽었습니까?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주요 서점에서는 독자들이 ‘올해의 책’을 선정 중이다. 얼마 전 나 역시 연례 행사처럼 이 일을 치렀다. 막상 골라 보면 아주 쉬운 일만은 아니다.   ‘무엇을 읽느냐’ 보다 자신을 선명히 드러내는 행위는 드물다. ‘올해의 책’으로 고른 책들을 살피면, 한 해 동안 자신이 어떤 삶을 살기를 바라는지, 세상이 어떻게 변했으면 하고 꿈꾸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니까 한 해 독서의 핵심을 공개하는 건 ‘진짜 나’를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성인 두 명 중 한 명은 책을 읽지 않고 하루 종일 스마트폰에 코 박고 살아가는 나라에서 책 고르기 이야기는 생뚱맞을지 모른다. 그러나 책은 여전히 지식의 총화이고 정보의 정수이며 지혜의 저장소다.     전체를 생각하는 힘이 없을 때 우리 중 누구도 좋은 삶을 살 수 없다. 세상에는 내 겨자씨만 한 생각을 넘어서는 큰 지혜의 바다가 있다. 산만한 주의는 우리를 헤매게 하고, 좁은 시야는 우리를 넘어뜨린다. 겨자씨보다 작은 내 생각을 넘어서는 사유의 우주가 있음을 깨닫고, ‘내가 옳다’는 아집에서 벗어나 겸손히 자신을 관조하지 않는 한 아무도 더 나은 지혜에 이를 수 없다.     희랍인들은 이 때문에 신의 눈으로 보기를 갈망했다. 겉으로 보이는 세계의 혼돈을 넘어서 신적인 질서를 생각하는 힘을 기르고 싶어 했다. 그들은 신이 보는 세계를 테오리아(theoria)라고 불렀다. 오늘날 이론(theory)의 어원인 이 말은 테오레인(theorein)에서 왔다. ‘보다, 숙고하다, 관조하다, 깨닫다’ 등의 뜻이다. 보기는 보되 깊게 생각하면서 보는 일이고, 한 걸음 떨어져 보는 일이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일이다.     올해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독특하게 눈에 띄는 것이 ‘테오리아’에 대한 갈망이다. 에릭 와이너의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조니 톰슨의 ‘필로소피 랩’ 등 철학을 일상을 사유하는 도구로 쓰려는 마음의 움직임이 크게 일어났다. ‘라틴어 수업’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등 일상에 사유의 깊은 우물을 더하라는 메시지가 담긴 책들이 최근 몇 년 동안 해마다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것을 보면, 알랭 드 보통 이후 주로 영미권에서 인기를 끌던 ‘라이프스타일 필로소피’가 국내에도 확고하게 자리 잡는 느낌이다. 이들은 철학을 진리 탐구의 도구보다 비루한 세상에서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에서 와이너는 스마트폰 속의 지식과 정보는 아무리 먹어 치워도 충족되지 않는 배고픔을 가져온다면서 현대인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지혜라고 말한다.     아우렐리우스처럼 소명을 품고 깨어나면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지 않을 것이다. 루소처럼 숙고하면서 걷는다면 진짜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에피쿠로스처럼 주어진 것에 만족한다면 인생을 온전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니체처럼 지금 이 순간의 삶에 충실하다면 생을 한 번 더 똑같이 반복해도 전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몽테뉴처럼 자신에게 주의와 관심을 기울이면서 산다면 후회 없이 죽음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자신과 순간순간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가치가 정해진다.   행복을 결정하는 것은 물질의 풍요보다 정신의 만족이다. 두 번 살 수 없기에, 인생엔 ‘더 많이’보다 ‘더 깊이’가 필요하다. 쌓아두어도 소용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왕자 되는 법을 배우지 않은 사람은 절대 왕자로서 살지 못한다. 읽지 않는 사람은 지혜로운 삶을 알지 못한다. 좋은 삶에 대한 가르침을 받아들여서 스스로 욕망을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는 사람만이 충만하게 살고 행복한 죽음에 이른다.     재난의 시대에 사람들은 고통과 불안을 견디는 지혜를 갈망한다. 올해에는 철학책도 꾸준히 읽혔지만, 김초엽의 ‘지구 끝의 온실’, 매트 헤이그의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등 재난을 넘어 다른 삶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문학도 많이 팔렸다. 이대로 살 수 없기에 우리에게는 또 다른 삶이 필요하다. 누군가는 쏟아지는 정보에 취해서 길을 잃고, 누군가는 책을 길잡이 삼아서 지혜의 길을 살아간다. 묻고 싶다. 당신은 올해 어떤 책을 읽었는가. 장은수 / 편집문화실험실 대표기고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라이프스타일 필로소피 에릭 와이너

2021-12-10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