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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하루하루를 또박또박 정성껏

설날 나이를 한 살 더 먹었다. 나이 먹을 때마다 궁금하다. ‘시간’이라는 엄청난 질서를 만들어낸 이는 누구일까? 보이지 않는 흐름을 잘게 쪼개고 토막내서 초, 분, 시… 날, 주, 달, 해… 어제, 오늘, 내일… 과거, 현재, 미래… 이렇게 질서정연하게 정리한 현자(賢者)에게 허리 접어 경배하고 싶다.   아마도 까마득한 옛날부터 벌써 그런 구분과 질서가 있었을 것인데 그 시절에 이미 우주의 진리, 생명의 신비를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망원경 같은 기계가 있었을 리 만무하니, 오로지 육안으로 하늘을 우러러보고, 자연을 만드신 신의 섭리를 깨닫고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마땅한지를 궁리했던 것이다.   우리 인간은 시간이라는 틀을 벗어나서 살 수 없는 존재다. 시계와 달력이라는 감옥에 갇혀서 살고 있다. 벗어나면 생존이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그런 완강한 철옹성을 깨부수고 자기 나름의 질서로 사는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어, ‘앎과 삶이 하나였던 참사람’으로 일컬어지는 다석 류영모 같은 분이 그렇다.   함석헌 선생과 그의 스승인 다석 류영모(柳永模, 1890-1981) 선생은 생애를 햇수로 셈하지 않고, 날수로 헤아린 것으로 유명하다. 날수를 세면 하루하루가 죽었다 살아나는 것으로 여겨져 좀 더 삶에 경각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류영모 선생께서 일기에 스스로 ‘오늘 하루살이(一日一生)’로 살아가고자 한다고 적으셨다는데, 이는 ‘날마다 편견을 버리고 하루하루를 영원의 시간으로 살고자’했다는 뜻으로 새길 수 있다. 다르게는, 잠자는 것과 죽음을 똑같이 보고 영원을 하루 속에서 살고, 하루를 평생으로 여기며 매일 죽는 연습을 했다고 풀이하기도 한다.   류영모 선생께서는 1918년부터 살아온 날수를 헤아리기 시작했고, 함석헌 선생도 배워서 따라하게 되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숨 쉬는 것까지 숫자로 기록할 정도였다고 한다. 류영모 선생은 3만3200일(91세)을 사셨고, 들고 난 숨을 쉰 횟수는 약 9억 번이라고 한다. 함석헌 선생은 3만2105일(88세)를 사셨다.   참고로, 다석 류영모 선생은 불경, 성경, 동양철학, 서양철학 등 동서고금의 종교와 철학에 두루 능통했던 대석학이자, 평생 진리를 추구한 한국의 큰 사상가였다. 불교, 노장사상, 공자와 맹자 등을 두루 탐구하고, 기독교를 줄기로 삼아 이 모든 종교와 사상을 하나로 꿰는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사상 체계를 세웠다. 모든 종교가 외형은 달라도 근원은 하나임을 밝히는 류영모의 종교다원주의는 서양보다 70년이나 앞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류영모 선생은 우리말과 글로써 철학을 한 최초의 사상가였다. 1956년 〈노자도덕경〉을 우리말로 번역한 〈늙은이〉를 세상에 내놓았는데, 이 책은 노자(老子)라는 고유명사까지 우리말로 번역한 작품으로 번역사에 길이 남을 명작으로 평가된다. 〈노자도덕경〉을 한자어를 완전히 배제하고 우리말로만 번역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데, 선생은 그 불가능한 일을 해낸 것이다.   류영모 선생은 생활에서도 성인의 삶을 실천했는데, 51세가 되던 때부터 하루 한 끼만 먹고, 하루를 일생으로 여기며 살았다. 선생의 호 다석(多夕)은 하루 삼시 세 끼를 합해서 저녁 한 끼만 먹겠다는 뜻이다.   다른 것은 감히 흉내 낼 엄두조차 못 내겠지만, 하루하루를 헤아리는 것과 우리말 사랑은 따라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하루하루를 또박또박 정성껏 살아야 할 텐데…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매일 매일을 허투루 날려 보내곤 한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게 덧없이 지나간다. 정말로 하루하루를 또박또박 정성껏 살고 싶다. 그렇게 살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류영모 선생 함석헌 선생 우리말 사랑

2025-01-30

“타향과 본향을 잇는 징검다리” 한솔문학 제10호 출판 기념회

 한솔문학(대표 김미희)의 문예지 ‘한솔문학’ 제10 호 출판을 축하하는 출판 기념회가 지난 7일(토) 오후 5시에 여러 한인협회 대표, 여러 지역에서 모인 작가들 및 관계자 4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달라스 수라식당 소연회장에서 진행됐다.   축하의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한솔문학 10호 출판이라는 것이 갖는 의미를 다함께 되새기며, 작고한 고 손용상 선생의 뜻을 기리고 추모하며 한솔문학의 발전되는 미래를 다짐하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이 날 순서에는 한솔문학을 태동케 한 한솔문학 창립자이자 전 대표인 고 손용상 선생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한솔문학을 이어갈 김미희 신임회장의 인사말 및 앞으로의 각오, 함께 축하하는 많은 분들의 축사와 축시, 북리뷰, 그리고 손용상 선생의 미망인인 조석진씨의 감사의 말 등이 포함되었다.   사회를 본 우성철 달라스한인회 수석부회장은 손용상 선생과 한솔문학에 대해 간단히 소개했다.   창립자이자 전 한솔문학 대표인 고 손용상 선생은 1973년 조선일보에 단편소설 ‘방생’이 당선되며 등단했고, 이후 달라스로 이주해 거주하며 미주문학상, 고권문학상, 재외동포문학상, 해외한국소설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또한, 작년 7월에는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학번역원이 LA한국문화원과 공동으로 제정한 상인 ‘2023 디아스포라 문학상’ 에서 ‘해외 우수 문예지 부문 특별상’을 수상한 바 있다.   한솔문학은 ‘타향과 본향을 잇는 징검다리’ 역할을 표방하여 해외에 산재한 디아스포라 작가들과 대한민국 본국의 작가들이 함께 어울리는 문학마당의 광장으로서, 지역구 또는 동호지가 아닌 전국구 및 글로벌 종합 문예지이다.   김미희 대표는 인사말을 통해, “한솔문학은 지난 5년 동안 글을 담는 공간을 넘어 삶의 이야기를 나누고 공감하는 장이 되어왔다. 많은 사람들의 후원 속에 한솔문학이 다시 세상에 빛을 보게 되어 감격스럽다”며 “이는 단순한 책 한권의 출간이 아닌 고 손용상 선생의 뜻을 이어가는 종합적 여정의 연속이자 많은 사람들의 의지와 사랑의 결실이다”고 밝혔다.   또한, “우리는 고 손용상 선생의 문학적 토양 위에 더 넓고 깊게 발전시켜나가며, 본향과 타향을 잇는 문학의 징검다리로서의 취지를 잃지 않고 앞으로 여러분들과 함께 걸어가겠다”고 말하며, “해외에 산재한 디아스포라 작가들을 초청해 함께 하는 문학 한마당을 갖겠다는 꿈을 20호가 창간되는 10주년에 꼭 이뤄보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김성한 달라스한인회 회장은 축사에서 “한솔문학이 앞으로도 김미희 대표를 통해서 우리의 삶에 영감과, 감동, 그리고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역할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말로 격려했다.   이어서 오원성 민주평통 달라스협의회 회장은 “2019년 6월 창간호 사회를 맡았었는데 벌써 10호 발간하게 되어 기쁘다”고 언급하며, “본국의 아름다움을 공유해주고 미주 문학인들의 발전에 기여해주는 한솔문학이 되길 바란다”고 축사의 말을 전했다. 특별히, 현재 미주문인협회 이사장이며 앞으로 편집주간을 맡아주실 이용우 소설가가 한솔문학 제10호를 축하하기 위해 엘에이에서 먼걸음을 함께해 자리를 빛냈다. 그는 답사를 통해 “손용상 선생과 엘에이에서 같이 활동했던 우연으로 달라스 한솔문학과도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밝히며, “이번 출판회는 한솔문학이 계속 이어져 나가는 것을 보여준 데에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디아스포라 작가들의 작품을 모두 다 아우르는 문예지 역할을 충실히 잘 감당하도록 함께 노력하자”고 말했다. 축시 낭송은 최신예 시인이 맡았다. 그는 한솔문학 제10호의 112 페이지에 있는 고 손용상 선생을 추리는 시인 ‘댈러스에서(이도훈 작)’를 낭송했다.   이 외에도 북리뷰로 킬린에서 온 최정임 수필가가 함께 했으며, 조석진 고 손용상 선생의 미망인이 감사의 말을 전했다.   모든 이들의 축사와 낭송이 끝난 후에는 출판 축하 케잌 커팅이 있었다. 케잌 커팅에는 김성한 달라스한인회 회장, 오원성 민주평통 회장, 이용우 편집주간, 조석진 미망인, 최정임 선생, 최신예 시인이 함께 했다. 모든 순서가 마무리된 후에는 김태중 목사의 식사기도와 함께 저녁 만찬을 즐기며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다. 김미희 회장은 인터뷰를 통해 “한솔문학은 한국 작가들과 해외에 산재한 디아스포라 작가들을 반 반씩 선별해서 원고 청탁을 의뢰한다. 이런 문예지가 세계 최초로 달라스에서 만들어진 것이다”고 말하며, “고 손용상 선생과 함께 한솔문학이 태동하는 자리에 함께 했던 것이 감사하다. 앞으로도 지속적인 사랑과 관심을 부탁한다”고 말했다.   김미희 작가는 민주평통 간사, 달라스한인회 부회장, 여성회 감사이면서, 2020년 ‘편운문학상’을 포함 여러 문학상을 많이 받은 중견 작가이다. 두 권의 시집 발간했으며, 첫 번째 시집 ‘눈물을 수선하다’는 2016년 ‘세종도서 문학나눔’ 우수도서로 선정됐고 윤동주 서시 해외작가상, 성호문학상 본상 등을 수상한 경력도 있다. 제2시집 ‘자오선을 지날 때는 몸살을 앓는다’로는 문학상의 최고봉 중 하나인 ‘편운문학상’을 수상했다. 한편, 한솔문학은 고 손용상 선생에 의해 2019년 6월에 달라스에서 처음 창간된 이래로 ‘타향과 본향을 잇는 징검다리’를 표방하는 한인 디아스포라 문예지 ‘한솔문학’을 발행하며, 한국 작가들과 해외에 흩어져있는 한인 유수 작가들을 한데로 모으는 최초 종합문예지로 자리잡아왔다. 한솔문학을 태동하게 한 고 손용상 선생이 2022년에 갑작스레 별세하면서 잠시 중단되었던 ‘한솔문학’은 이번에 다시 10호를 출간하게 되며 새로운 도약을 다짐하게 됐다.                               〈캐서린 조 기자〉징검다리 한솔문학 손용상 선생 타향과 본향 김성한 달라스한인회

2024-12-12

[문화산책] 유홍준 잡문집 읽는 즐거움

‘만약 이민을 오지 않고 한국에 그냥 살았다면 나의 삶은 어떤 모습이었을까?’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나이 탓일까? 그렇다고 이민을 후회하는 건 아니다. 타향살이의 아쉬움이야 많지만, 그래도 내가 선택한 현실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으니 후회는 없다.   그래도 가끔 고국 생각에 잠기는 것은 향기로운 참사람, 스승의 짙은 그림자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혼란스러운 한국 사회에서 든든한 정신적 버팀목 노릇을 해온 큰 어른들의 이야기를 읽으면 그런 생각이 한층 간절해진다.   유홍준 잡문집 ‘나의 인생 만사 답사기’를 읽으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어 많이 부러웠다. 이 책에는 저자가 스승으로 모셨던 어른들, 짙은 우정을 나눈 벗들과 예술가 등 사람에 대한 진득한 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다. 스승으로는 리영희, 백기완, 신영복, 통문관 옛 주인 이겸로 선생들과의 인연과 존경심을 이야기했고, 몸이 자연과 합일(合一)하는 ‘자연춤’을 꿈꾼 춤꾼 이애주, 광주 민주화운동의 대들보 박형섭, 똘레랑스를 역설한 언론인 홍세화, 가수 김민기 등의 친구들과 나눈 진한 우정과 그리움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비디오아트의 선구자 백남준, 화가 신학철, 민중미술의 전설이 된 판화가 오윤, 김지하 시인, 서예가 김가진 같은 예술가들의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진면목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한다.   ‘한국 3대 구라’로 불리는 이름난 글쟁이답게 유홍준의 글은 맛깔스럽다. 얼핏 보기엔 사사로운 사연이나 일상사를 자분자분 이야기하면서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서 삶의 본질을 일깨워 준다.   이영희 선생의 주례사, 우리의 구전 민중설화를 순우리말 토속어로 이야기한 작품을 통해서 사라져가는 민족혼과 민중적 삶의 정서를 고양시키는 작업에 매진해온 백기완 선생, 개성적인 ‘어깨동무체’를 개발한 신영복 선생의 붓글씨, 빼어난 시인이자 훌륭한 현대 문인화가 김지하 시인의 49제와 그림 이야기, 김민기를 보낼 때 가족의 요청에 따라 영결식 없는 조용한 분위기의 가족장으로 치러진 것에 대한 아쉬움 등….   만약 한국에 그냥 살며 활동했다면, 나도 큰 어른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사람답게 사는 지혜를 배우는 영광을 누릴 기회가 있었을 것 같다. 그럴 수 있었다면 조금이라도 더 좋은 인간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속 깊은 친구나 동료들과의 관계도 그렇다. 멋진 친구로 지냈을 법한 인물들도 많다.   사실, 스승을 모시고 배우는 일은 글이나 책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직접 대하고 모실 때처럼 절실하게 마음을 움직이기는 어렵다. 우리 삶에서는 아주 사사롭고 작은 일에도 커다란 울림이 있는 법이다.   우리가 목말라 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고 삶의 지혜다. 지식이라면 컴퓨터나 인공지능으로 넘쳐날 정도로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지식이나 정보는 건조하다. 그래서 생생하고 따스한 깨우침을 주시는 스승을 간절하게 원하는 것이다.   물론 가장 바람직한 것은 유홍준처럼 스승님을 가까이 모시고 체온과 숨결을 느끼며, 가르침을 받는 것이겠지만, 그런 행운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러니 스스로 스승을 찾아 모시기라도 해야….   나는 그런 목마름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배울 점이 있는 분을 내 멋대로 스승으로 모시는 길을 택했다. 예를 들면, 찰리 채플린을 스승으로 모시고, 영화를 통해 예술가의 자세나 인생의 철학을 배우는 식이다. 궁금한 것을 그때그때 여쭙고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안타까움은 크지만, 그래도 큰 공부가 된다.   마음을 열고 살피면 스승은 우리 인생 도처에 계신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유홍준 그림 이야기 신영복 선생 백기완 선생

2024-11-28

‘도산 안창호 우체국’ 되찾았다

‘도산 안창호’ 우체국이 이름을 되찾았다. 백악관은 조 바이든 대통령이 LA 한인타운 시티센터 내 연방 우체국(3500 W 6th Street, Suite 103)을 ‘도산 안창호 우체국’으로 명명하는 내용의 법안(H.R. 599)에 서명했다고 지난 25일 발표했다.   이에 따라 한인 사회는 2022년 5월 LA 한인타운 6가에 있던 도산 안창호 우체국이 재개발 계획에 따라 철거되면서 없어졌던 명칭을 2년여 만에 되찾게 됐다.   대한인국민회 클라라 원 이사장은 “한인 이민 역사 보존의 관점에서 도산 안창호 우체국을 다시 볼 수 있게 된 건 환영해야 할 일”이라며 “이제는 한인 사회가 단독 건물에 ‘도산 안창호’ 현판이 달린 우체국이 생길 수 있도록 다시 한번 노력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당시 대한인국민회 측은 6가의 우체국이 철거될 당시 건물에 붙어 있던 도산 안창호 현판을 역사 자료로 보존한 바 있다.   이 법안은 지난해 1월 초당적으로 추진됐다. 민주당의 지미 고메즈 연방 하원의원(가주 34지구·민주)을 비롯한 미셸 스틸(공화), 영 김(공화), 케이티 포터(민주), 주디 추(민주) 등 34명의 연방 하원의원이 공동 발의자에 이름을 올렸다.   이번 법안은 지난 1월 의회에서 정족수 부족으로 표결 자체가 연기되자 한인 단체들이 잇따라 나서 온라인으로 지지 요청 운동까지 벌일 정도로 한인 사회 내에서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본지 1월 31일자 A-1면〉   법안을 발의했던 지미 고메즈 의원은 “미국 내에서 한인 인구가 가장 많은 LA 한인타운에서 특정 랜드마크를 도산 안창호의 이름으로 명명할 수 있게 돼 기쁘다”며 “도산 선생의 이야기는 미국 내 수백만 명의 한인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장열 기자 [email protected]우체국 안창호 도산 안창호 한인 이민자들 도산 선생

2024-11-27

[열린 광장] 고 김학송 선생 ‘헌정음악회’ 열었으면

대학시절 경춘선 완행열차에 기타 하나 둘러메고 친구들과 무작정 찾아갔던 강촌에 노래비 하나가 세워져 있어 소개해 드린다. 2005년 춘천시가 가로 4m, 세로 3.5m의 화강석으로 만든 노래비에는 다음과 같은 노랫말이 새겨져 있다.   ‘날이 새면 물새들이 시름없이 날∼으는/꽃피고 새가 우는 논밭에 묻혀서/씨 뿌려 가꾸면서 땀을 흘리고/냇가에 늘어진 버드나무 아래서/조용히 살고파라 강촌에 살고 싶네’     설강 김성휘 선생이 목가적인 북한강 수변 강촌천 주변의 풍경에 반해 만들었다는 가요 ‘강촌에 살고 싶네’ 1절 가사이다.   이 가요는 국민가수 나훈아가 1971년에 발표하여 한시대를 풍미한 ‘불후의 명곡’이 되었는데 이 노래를 작곡한 분이 LA의 원로 음악인 고 김학송 선생이다. 그는 1960~80년대 대한민국 가요계에서 작곡가, 작사가, 편곡가, 피아니스트, 악단장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며 수많은 명곡을 작곡했다. 그의 노래는 나훈아, 조용필, 조영남, 이상열, 최헌, 태진아, 송대관, 샌디김, 이미자, 김상희, 조미미, 방주연, 김부자 등 당대 인기 가수들에 의해 발표됐다. 그는 스타가수를 만드는 대 작곡가로 명성을 날린 음악인이었다.   선생님은 1981년 미국에 이민 와 90년대 초부터 LA 한인 사회에서 이인섭 선생과 함께 가요 아카데미를 운영하며 꾸준히 후배 음악인 양성에 주력했다. 그런 와중에 한인 사회를 위해 의미 있는 곡을 여러 편 발표했다. 2003년 미주 한인이민 100주년을 기념하는 곡 ‘백년의 함성’ (이인섭 작사/김학송 작곡)을 비롯해 4·29 LA 폭동을 겪으며 전 세계에 흩어져있는 750만 한인 디아스포라를 하나로 묶어준 노래 ‘한마음으로’ (이인섭 작사/김학송 작곡)를 만들었다. 또 역사적인 로즈퍼레이드 한인 꽃차 참가를 기념하는 꽃차 로고송 ‘하늘 높이 꽃차 타고’ (윤수경 작사/김학송 작곡)를 만들어 홍보에 크게 기여한 한인 사회의 소중한 문화예술인이었다.     1925년생인 선생님은 2016년 6월 별세했다. 내년은 선생님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 뜻깊은 해를 맞이하여 LA의 후배 음악인들이 중심이 되어 그의 음악인생 70년을 돌아보며 존경과 사랑의 마음으로 ‘헌정음악회’를 개최해 보자고 제안한다.     마침 이인섭 선생이 작사하고 선생님이 곡을 만드신 미발표 유작들이 여러 편 있어 내년 ‘헌정음악회’를 통해 발표된다면 더 뜻있는 무대가 되리라 생각한다. 이광진 / 문화기획사 에이콤 대표열린 광장 헌정음악회 김학송 김학송 작곡 이인섭 선생 김성휘 선생

2024-10-20

“고원 선생의 문학적 지평 확산”…13회 고원문학상 수상작 선정

고원기념사업회(회장 정찬열)가 주최하는 제13회 고원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됐다.     수상작으로 시 부문 이월란 시집 ‘바늘을 잃어버렸다’(시산맥), 수필 부문에서는 공순해 수필집 ‘울어다오’(에세이문학출판부)가 선정됐다.     심사를 맡은 임헌영 문학평론가는 “초기에는 시 부문에서만 수상자를 냈지만 5권의 고원문학전집 중 절반이 넘는 3권이 산문집일 정도로 고원 선생은 산문문학에서도 탁월한 선구성을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이어 “올해 시와 수필 두 부문에서 선정해 고원 선생의 문학적 지평 확산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이월란 시인과 공순해 수필가는 1980년대 후반에 미국으로 이주했다.     80년대 후반기에 삶의 터전을 미주대륙으로 옮겼지만, 그 이전 시대처럼 모국을 향한 애틋한 향수나 궁핍했던 성장시대의 추억담을 금과옥조로 삼지 않는다.     두 수상자의 작품은 60여 년 전에 미주에 첫발을 디뎠던 고원 선생의 창작방법론을 그대로 실현하고 있다. 또 작품 기법에서 감각적인 표현과 삶의 현장성에 대한 밀착도를 높여 독자들에게 한결 친밀하게 다가섰다.     수상 소감에서 이월란 시인은 “척박한 땅에서 이민 문학을 시작하신 고원 선생의 뜻을 기려 문학 사업을 이어가 글을 쓰고 발표할 수 있어 감사하다”며 “더 좋은 글을 써서 이민 문학과 미주 문학에 기여하겠다”고 밝혔다.     공순해 수필가는 “뉴욕문학동인회에서 고원 선생이 발간한 해외문학울림을 만났다”며 “고원문학상이 제정되고 13년이 흐른 지금 문학상을 받게 되어 감동의 울림이 더욱 깊다”고 밝혔다.     고원문학상은 고원 시인의 문학적 업적과 정신을 기리고 이를 후세에 계승하고 발전하기 위해 마련됐다.     ▶문의:(714)530-3111 이은영 기자고원문학상 수상작 고원문학상 수상작 고원문학상 수상자 고원 선생

2024-10-06

[아름다운 우리말] 우리 춤과 치유

우리 민족에 대한 중국 역사책의 설명을 보면 춤과 노래를 좋아하고, 술을 즐기며,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춤과 노래를 밤늦도록 즐긴다고 하는데 술이 빠질 수는 없을 겁니다. 이러한 음주 가무는 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장면에서 나옵니다. 제사는 엄숙하기만 한 행위가 아닙니다. 제사는 감사의 시간이기도 하고 위로의 시간이기도 하며, 치유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간절함이 마음의 병을 낫게 하고, 몸의 병을 고칩니다.     북소리와 함께 치유하는 부여의 영고(迎鼓), 하늘에 닿는 춤으로 치유하는 예의 무천(舞天)에서 우리는 이름만으로도 위로를 받습니다. 제사의 이름이 곧 음악이고, 춤입니다. 북소리를 듣는 사람도, 하늘도 감명을 받고, 하늘을 바라보면서 추는 춤에 희열을 맛봅니다. 제사는 그래서 다른 말로 하면 축제입니다. 모두가 모여 즐거우면 하늘에 우리의 뜻이 닿는 겁니다. 서로 감사하고, 서로 흥겹게 노래하고 뛰며 춤추면 그게 바로 축제이고 제사입니다.   우리 춤에 양반춤이라는 춤이 있습니다. 양반춤은 오광대놀이에서 양반을 풍자하기 위한 춤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양반탈을 쓰고,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양반춤에서 위로를 받았을까 하는 의심도 듭니다. 풍자가 시원하기는 하나 치유가 되지는 못하는 듯합니다. 오히려 양반춤은 양반이나 선비가 마음으로 추는 춤이어야 위로와 치유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양반춤을 선비춤이라고 바꾸어도 좋을 듯합니다. 양반에 대한 풍자보다는 선비의 마음속 여유와 깨달음을 보여주는 춤이라고나 할까요?   하긴 양반이라는 단어도 풍자의 뜻으로 쓰이지 않는다면 좋은 의미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그만하면 양반’이라든지 ‘양반 되기는 글렀다’는 말은 양반을 좋게 보는 표현입니다. 선비라는 말은 현세대에도 좋은 의미로 남아있습니다. 흰 도포 자락을 휘날리는 선비는 주로 글공부를 즐겨하고, 청렴한 사람으로 나옵니다. 물론 지나치게 경제관념이 없는 답답한 사람으로 묘사되기도 하죠. 하지만 선비정신이 우리를 지탱해 온 정신의 하나임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고, 돈에 휘둘리지 않는 마음이야말로 지금도 지켜야 할 가치입니다.   양반춤, 선비춤은 춤은 종류도 다양합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춤은 이종태 선생께서 추는 양반춤입니다. 이 춤은 바람 부는 대로,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덩실거립니다. 어깨춤에 활짝 펴는 부채 소리는 바람을 가릅니다. 한 마리 학처럼 한 발로 서기도 하고 뱅그르르 돌다가 훌쩍 뛰어오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걸음은 너울너울 인생길입니다. 춤이 멋들어집니다. 인생의 고갯길을 넘어온 춤입니다.   이종태 선생 춤의 백미는 표정에 있습니다. 제가 볼 때 이종태 선생의 춤은 얼굴로 추는 춤입니다. 세상살이를 잊고, 세상일에서 떠난 초월의 표정이며, 달관의 몸짓입니다. 자연스러운 웃음에 보는 이도 웃음 짓고, 함께 시름을 잊습니다. 보는 이도 어깨춤이 절로 납니다. 한을 담은 우리 춤이 많이 있습니다만, 달관의 경지를 보여주는 춤이라면 이종태 선생의 양반춤을 들고 싶습니다. 가볍지 않은 춤사위에, 인생을 담은 손짓, 희로애락을 지나는 걸음걸이는 우리 춤의 치유 효과를 보여줍니다. 도포 자락 휘날리며, 사뿐사뿐 걷는 걸음은 물욕 없는 선비의 청렴을 나타내는 듯합니다.   저는 이 춤을 보고 양반춤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우리 춤의 긍정적 효과네요. 1년 넘게 양반춤을 배우고 있지만 그 맛이 나오지 않습니다. 당연히 그 멋과도 거리가 멉니다. 무엇보다도 그 표정을 담기에는 가야 할 길이 아득합니다. 지난주 요양원에서 국악치유공연을 했습니다. 처음으로 저도 양반춤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네 명 중 한 명으로 참여한 것입니다. 다른 이의 모습에 가려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생각보다 많이 어색하지 않아서 안심하였습니다. 그런데 춤을 추는 동안 긴장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저도 모르게 표정도 자연스레 풀렸습니다. 뛰어오름도 가벼워졌습니다. 자연스러운 웃음도 나옵니다. 그 시간 세상일이 머릿속에 남지 않습니다. 춤을 마무리하면서 한 발로 서는데 흔들림이 없네요. 자연스러우니 몸이 가벼워집니다. 몸도 마음도 가벼워졌습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치유 양반춤 선비춤 치유 효과 이종태 선생

2024-09-29

[문화산책] 졸작, 졸필이라는 겸손함

문인들이 습관적으로 쓰는 말이 있다. 예를 들어 “글쓰기는 뼈와 살을 깎는 고통이다”라는 말, 이 말이 정말이라면 문인 중에는 살찐 사람이 없어야 한다. 계속 깎아대는데 언제 살찔 새가 있나….   졸작, 졸필, 졸저(拙著)라는 낱말도 그런 말 중의 하나다. “졸작 읽으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턱없이 모자라는 졸필로 책을 내려니 부끄러움이….”   스스로를 낮추고 겸손, 겸양하는 아름다운 말이다. 멋지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아무리 읽어도 그저 습관적인 멋 부리기 관용어로만 읽힌다. 왜냐하면 정말로 졸작, 졸필이라고 생각한다면 발표하지 않는 것이 맞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작가라면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 졸작, 졸필, 졸저를 내놓아 세상을 어지럽히고 더럽히는 것은 죄악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는 냉엄하지만, 읽는이들에게는 자신감을 가지고 당당하라고 말하고 싶다. 글쓴이가 자신 없이 주저주저 머뭇거리면, 읽는 이도 흔들리게 마련이다. 자신 없이 우물거리는 말에 설득당할 독자는 없다. 그야말로, 영혼을 불태운 글인지 대충대충 설렁설렁 쓴 글인지 독자는 금방 알아챈다. 믿음 없이 미사여구만 나열하는 기도나 마음 없이 대충 부르는 노래는 맥없이 허공을 맴돌다 스러진다.   그래서 나는 졸저, 졸필, 졸저 같은 낱말은 되도록 쓰지 말자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터무니없는 물건을 가지고 허세를 부리자는 말은 물론 아니다.   나 같은 ‘생계형 글쟁이’는 쓰임새에 맞는 글을 마감 날짜 넘기지 않고 쓰면 그만이지만, 훌륭한 예술작품의 경우는 그럴 수 없다. 끝도 없고 완성도 없다. 천하의 피카소도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은 한 번이라도 완성된 그림을 본 적이 있는가? 그림이라도, 다른 무엇이라도 상관없다. 당신이 ‘이제 완성이다’ 하고 중얼거렸다면, 당신은 끝장이다. 작품을 완성한다, 그림을 마무리 짓는다,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인가.”   피카소 선생의 말씀대로 완성이란 없다. 그렇다면 이제 작가에게 남는 것은, 세상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치열하게 최선을 다했는가, 스스로에게 참으로 정직했는가와 같은 자기 내면의 문제들일 것이다.   졸작이냐 걸작이냐, 어느 정도 수준이냐 하는 것은 그다음의 문제이고, 작가가 결정할 문제도 아니다. 그런 평가는 독자나 평론가, 학자들의 몫이다. 그러니, 작가가 나서서 미리부터 졸작, 졸필이라서 부끄럽다고 고개 숙이며 접고 들어갈 이유는 없다는 말이다. 그런다고 졸작이 명작이 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작품을 대하는 작가의 자세는 저마다 다르다. 정답이 있을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발표하면서 더 잘 쓰지 못한 것을 진심으로 부끄러워하는 문인도 많다. ‘광장’의 최인훈처럼 책으로 출판된 후에도 줄기차게 다시 읽고 고치는 작가도 있고, 카프카처럼 세상을 떠나면서 친구에게 자기 작품을 모두 불태워 달라고 부탁한 작가도 있다.   한편, 좋은 작품을 계속 발표하면서 평생 책을 내지 않은 문인도 있다. 김병현 시인이 그런 분이었다. 안타깝게 여긴 후배들이 뜻을 모아 유고시집을 내드렸다. 우리 남가주 문단에도 벌써 책을 내야 했는데, 아직 안 내는 실력파 중견 문인들이 적지 않다. 저마다 사정이야 다르겠지만,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작품을 발표해야 한다는 엄격함이 가장 큰 이유인 것 같다. 그런 분들의 겸손을 대하면 겁 없이 책을 많이 낸 내가 면구스러워지곤 한다.   나의 스승 김희창 선생님께서 주신 말씀을 되새긴다. “예술 앞에는 가장 겸손해야 하고, 사람 앞에는 가장 오만해야 합니다. 오만해야 붓을 들 수 있는 것이고, 겸손해야 좋은 예술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졸필’ 끝!!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졸작 졸필 졸작 졸필 졸저 졸필 피카소 선생

2024-09-05

[오픈 업] 자살하는 선생님들

미국 뉴스에도 한국 선생님들의 자살 사건이 크게 보도됐다. 한국 언론을 통해 알고 있던 터라 놀라지는 않았지만 한국인의 자살 소식이 세계로 퍼져 나간다니 찹찹한 심정이다.   무엇보다 좋지 않은 일로 선생님을 잃은 아이들의 미래가 걱정된다. 어린아이들은 학교에서 선생님처럼 되려고 노력 하면서 교육이 이루어진다. 많은 초등학생이 선생이 되고 싶어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어린이들이 교육을 받으려면 ‘집행 기능 능력(executive function)’이라 불리는 사고 기능이 필요하다. 이 기능은 태어날 때부터 두뇌 안에 가능성이 존재한다. 마치 언어 습득 가능성이 두뇌 안에 존재하는 것과 같다.       갓난아기는 갑자기 엄마가 보이지 않으면 큰 소리로 울어댄다. 존재의 위협에 반응하는 본능적 행동이다. 그러다가 생후 6개월이 되면, 엄마를 찾아 울기 전에 엄마가 마지막으로 있던 곳을 쳐다본다고 한다. 즉, 자신의 감정을 조절해서 잠깐 참았다가, 그래도 엄마가 안 보이면 울기 시작한다. 아기는 이미 감정 조절을 할 수 있는 집행 기능 능력을 길렀고, 이것은 두뇌 전두엽의 발달이 진행되고 있음을 뜻한다.     갓난아기의 두뇌에는 어른 두뇌의 90%에 해당하는 뇌세포(neuron)가 이미 존재한다. 뇌세포는 여러 가지 경험을 하면서 크기에 변화가 오고, 뇌세포들을 연결하는 시냅스의 숫자가 증가한다.   6개월 된 아기는 ▶반응 억제(response inhibition) ▶주의 집중 (sustained attention) ▶기능에 필요한 기억(working memory) ▶감정 조절(emotional control) 등 4가지 집행 기능 능력을 갖추게 된다. 이 능력에 의해서 아기는 가까이 가거나 피하는 행동(Approach/Avoidance behavior)이 가능해진다. 어린이는 집행 기능인 ‘반응 시작/반응 억제(Responnse initiation/ Response inhibition)’를 통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을 배우고,이는 학교 교육에 중요한 기능이 된다. 부모가 이 기능을 잘 길러준 아이는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만 학대를 받았거나 다른 상처로 인해 이 기능을 훈련받지 못한 아이는 뇌 구조에 변화가 올 수 있다. 집행 기능 능력이 떨어진 어린이나 청소년은 학교에서 문제 행동을 일으키게 된다.   따라서 이런 학생에겐 특별한 도움이 필요하다. 보조 교사, 카운슬러, 또는 특수 교육반 교육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러한 도움이 없이 선생님 혼자서 문제아와 일반 아이들을 동시에 가르치기는 어렵다.     필자가 카이저에서 근무하던 시절, 의료 보험이 없는 한인들을 위해 교회 사무실에 ‘라이프 케어 센터’라는 정신과 클리닉을 운영했었다. 그런데 이곳을 찾는 한인 환자의 약 70%가 ADHD(주의력 결핍 및 과잉 행동 장애) 질환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이 자신에게 이런 질병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가정폭력, 아동학대, 알코올중독 또는 심한 우울 증상으로 찾아 왔다가, ‘들어본 적도 없는 이상한 병’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간혹 자녀 문제로 왔다가 자신에게도 똑같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한국의 초등학교 교실에 감정 조절, 주의 집중, 반응 억제 등 집행 기능 능력이 떨어지는 학생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는 선생님은 적당한 체벌과 칭찬을 통해 문제 학생을 통제하며 다른 학생도 교육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선생님을 비난하기보다 학교나 교육청 차원에서 아이들이 집행 기능을 기르도록 도와야 마땅하다. 만약 아이의 문제가 ADHD라는 두뇌의 질병이면 정신과에 데리고 가서 치료를 받게 해야 한다.   하지만 미국의 한인 부모들도 선생님들이 자녀의 정신과 진단과 치료를 권하면, 그중 반 정도만 이를 따른다. 그리고 아이의 행동에 대한 질문지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또는 “아주 조금 있다”로 표시한다. 한국의 부모들도 자녀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고, 선생님에게 화살을 돌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아이들의 두뇌는 25세까지 계속 성숙한다. 비록 어린 시절에 어떤 이유로 집행 능력을 키우지 못했었더라도 좋은 선생님이나 상담사를 만나면 좋아질 수 있다. 부모와 교육 관계자들이 힘을 합해 아이들의 집행 능력을 길러주자. 선생님은 아이들이 존경하고 닮고 싶어하는 역할 모델이다. 그들이 행복하고 희망에 찬 모습으로 아이들의 등불이 될 수 있게 하자. 수잔 정 / 소아정신과 전문의오픈 업 자살 선생 집행 기능인 한국 선생님들 문제 행동

2024-08-13

[문화산책] 물처럼 낮은 곳으로…

하늘의 별이 된 ‘아름다운 사람’ 김민기는 새벽마다 ‘아침이슬’이 되어 우리를 찾아온다. 이슬, 아주 작고 영롱한 물이다.   ‘좋은 사람’ 김민기가 남긴 가장 소중한 가르침은 스스로를 ‘뒷것’으로 낮추는 마음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리고, 그 가르침은 지금 이 순간에도 매우 절실하다. 아무 데서나 앞에 나서서 설쳐대는 쓰레기 인간들이 넘쳐나는 이 세상에 김민기의 낮고 굵은 목소리는 엄청난 죽비다.   ‘뒷것’이라는 낱말을 대하면 ‘노자 도덕경’의 물이 떠오른다. 상선약수(上善若水), 모든 것이 잘 이루어지도록 섭리하면서도, 자기를 전혀 드러내지 않고, 낮은 데로만 흘러 고인 바다 같은….   상선약수 편을 찾아 읽노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나도 물처럼 살았으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양한 해설이 있는데, 김민기가 아버지처럼 모신 장일순 선생은 이렇게 풀이했다.   “가장 착한 것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잘 이롭게 하면서 다투지 않고, 뭇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   장일순 선생이 강조한 가르침 중에 “밑으로 기어라”라는 말씀이 있다. 사람들 밑으로 기면서 섬겨 모시는 마음 없이는 참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노자의 물이나 민기의 ‘뒷것’과 같은 뜻이다.   물처럼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두가 그렇게 물의 덕성을 닮으려 애쓰며 산다면 세상이 한결 푸근하고 촉촉해질 텐데….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겸손, 막히면 돌아가는 지혜, 더러움을 받아내는 포용력, 어떤 그릇에도 담기는 융통성, 바위도 뚫어내는 인내와 끈기, 폭포와 같은 용기, 유유히 흘러 바다에 이르는 대의 등을 물의 칠덕(七德)이라 부른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매우 지혜롭고 훌륭한 가르침이다.   물의 덕성은 도가사상의 중요한 핵심이다. 그래서 ‘노자 도덕경’ 여러 곳에서 물을 이야기한다. 가령, 세상에 물보다 더 부드럽고 여린 것은 없지만, 단단하고 힘센 것을 치는데 물을 이길만한 것이 없다는 가르침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렇게 부드럽고 여린 물이 화를 내면 대단히 무섭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세월호 참사, 해병대 채상병 비극을 둘러싼 추잡한 소용돌이…. 이런 비극을 극복하고 물의 화를 달래기 위해서는 모두가 서로 다투지 말고 스스로를 낮춰야 한다. 그것이 노자의 가르침이다.   혹시 가장 낮아지려고 서로 다투는 희비극이 벌어지지는 않을까? 천만에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가장 낮은 곳의 물은 평평하다. 다툴 필요가 없다.   세상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자기 공을 전혀 내세우지 않고, 낮은 데로만 흐르는 겸손, 스스로를 낮추는 자세를 배우고 싶다. 지극히 당연한 것이 통하지 않는 세상에서 그 지극히 당연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몸 바쳐 희생하는 사람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그런 사람, 그런 지도자가 그립다.   김민기의 ‘뒷것’이라는 낱말이 새삼스레 감동으로 스며드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그런 우직스러운 사람들 덕분에 그나마 세상이 돌아간다는 걸 우리는 잊고 산다. 물이나 공기의 고마움을 잊고 사는 거나 마찬가지다. 세상은 그런 사람다운 사람을 바보나 미련한 자로 낮잡아보며 함부로 대한다. 나도 그랬다. 부끄럽다.   아무튼,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마음을 비우고 조용히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는 시간이 그립고 아쉽다. 낮은 데로만 흘러 고인 바다…   끝으로 실없는 농담 한마디. 나는 스스로를 낮추는 데 유리하다. 키가 매우 짧기 때문에….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노자 도덕경 고인 바다 장일순 선생

2024-08-01

[문화산책] 내 영혼의 집은 어딘가?

책을 읽다가 ‘영적 홈리스’라는 낱말 앞에서 딱 멈추었다. 나도 ‘영적 홈리스’가 아닐까? 라는 고약한 생각에 심각해진 것이다. 내 영혼의 집은 어딘가?   노숙자 문제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다. LA같은 대도시는 그야말로 치명적인 골칫거리다.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나빠지는데 대책은 거의 없는 답답한 현실이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낱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우스 리스’가 아니고 ‘홈 리스’다. 생존과 사랑의 문제, 생명의 문제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걱정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물질적 공간의 문제가 고작이다. ‘홈리스’의 아픔을 돌보기까지는 멀고도 멀었다. 정신세계에선 더 말할 것도 없다.   내 영혼의 집은 어딘가? 현실적으로 가장 근본적이고 많은 대답은 신앙일 것이다. 교회에 가서 열심히 기도하고, 절에 가서 절하는 일…. 하지만 그것으로 끝일까? 그럴까? 성직자가 아닌 사람이 언제나 절대자에 기대어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 영혼의 집은 어디인가? 내 마음의 고향은? 혹시 예술이 영혼의 안식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야무진 꿈을 꾸어보지만 이 또한 충분치 않다.   내 영혼의 집, 내 마음의 고향은 어디인가?   “몸이 많이 아팠던 작년 겨울 어느 날, 그가 서재에 있는 어머니 사진 앞에 망연히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 죽음이 바짝바짝 쫓아오는 그 암담한 시기에도 어머니는 여전히 그의 기댈 언덕이었던 모양이다. 아내도 자식도 도움이 되지 못하는 그런 절박한 시간에 그는 어머니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어령 선생의 부인 강인숙 관장이 고인을 기리며 쓴 책 ‘만남’의 한 구절이다. 기독교 세례를 받기 전의 이어령 선생에게 어머니는 신성(神性)을 지닌 절대적 존재였다는 것이다. 선생의 어머니는 그가 11세 소년일 때 돌아가셨다. 그러니까, 몸은 70년 전에 떠나가셨지만, 어머니는 평생 아들의 영혼의 집, 마음의 고향으로 살아 있었던 것이다.   강인숙 관장이 돌아가신 친정어머니를 어느새 잊어가는 자신을 한탄하자, 이어령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감동적이다.   “걱정 마, 어머니는 다시 돌아와. 와서 영원히 안 떠나셔.”   어머니를 구원의 상징으로 그린 예술작품은 많다. 러시아 한인(韓人) 화가 변월룡(1916~1990) 화백의 어머니 초상화도 좋은 예다. 그는 죽기 얼마 전에 어머니를 그렸다. 이미 40년 전에 세상 떠나신 어머니를 그림으로 살려냈다. 울면서 그렸다, 미술전문가들이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 이 그림은 변월룡 화백의 거의 마지막 작품이다. 화가는 이 그림을 그린 지 얼마 안 돼서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5년 뒤 숨졌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어머니를 그린 것이다.   화가 변월룡은 러시아 최고의 레핀미술대학을 수석 졸업하고, 이 대학의 정교수가 된 당대 최고 수준의 화가이며, 리얼리즘 미술에서는 단연 한국 최고의 작가로 꼽히는 존재였다.   그가 그리움을 담아 그린 ‘어머니’는 참으로 많은 것을 말해준다. 화가는 왜 말년에 오래전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렸을까? 그림 맨 밑 오른쪽 귀퉁이에 한글로 ‘어머니’라고 적었다. 평생 타향살이를 한 화가에게 어머니는 고국과도 같은 말일 것이다. 디아스포라 예술가에게 어머니는 조국 같은 존재다.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든다. 비틀비틀 흐느적거리며 거리를 헤매는 ‘홈리스’들에게 잠시라도 어머니를 떠올리게 해주면 정신 차리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혹시 예술이 그런 일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야무진 헛꿈인가?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영혼 어머니 초상화 어머니 사진 이어령 선생

2024-06-06

[문화산책] 100살 되신 푸른 하늘 은하수

“푸른 하늘 은하수… 첫 창작 동요가 100살이 됐어요.”   아동문학가 황영애 선생께서 카톡으로 알려주셨다. 아, 반달, 계수나무, 토끼가 어느새 100살이 되셨구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린 시절로 돌아가 ‘반달’을 흥얼거렸다. 어린 시절에 배우고 익힌 동요의 힘은 이렇게 강하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그루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윤극영(1903년-1988년) 선생이 노랫말을 쓰고 곡을 지은 ‘반달’은 1924년에 발표된 조선 최초의 동요다. 21세 청년 윤극영이 지은 이 노래는 일제강점기 나라를 잃고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방황하는 민족의 애달픈 운명을 달래주었다.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는 2절 끝부분 노랫말에서 알 수 있듯 일제강점기 어린이들에게 꿈과 용기와 희망을 주는 항일 동요다.   이 노래는 발표되자마자 전국 방방곡곡에서 어린이뿐만 아니라 남녀노소 모두에게 애창됐다. 당시 학교에서 우리말 노래를 부르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나 ‘반달’은 워낙 호응이 컸던데다, 일본인들까지 따라 부르는 바람에 당국은 금지를 해제할 수밖에 없었다고 전한다. 한반도는 물론 일본과 중국에 있는 조선인들에게도 빠르게 보급되었다. 윤극영 선생조차도 그렇듯 짧은 세월에 그렇게까지 널리 퍼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고 훗날 회상했을 정도였다.   이 노래가 오늘날까지도 애창되는 ‘겨레의 노래’로 남은 이유를 좀 더 깊이 알고 싶어서 자료들을 열심히 찾아보니,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가령 ‘반달’ 작곡에 얽힌 사연도 그렇다.   윤극영 선생에게는 10년 위의 누님 한 분이 있었는데, 경기도 가평으로 시집을 갔다. 그런데, 그 누님의 시집이 가세가 기울어 늘 가난 속에서 힘든 시집살이를 하느라 10년이 퍽 넘도록 한 번도 집에 오지 못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토록 보고 싶던 누님의 죽음 소식을 들은 윤극영은 집 근처 공원으로 가서 밤새도록 울고 또 울었다. 그 새벽에 그가 하늘에서 본 것이 반달이었다. 은하수 같은 엷은 구름 너머로 하얀 반달이 비스듬히 걸려있고, 그 멀리로 샛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외롭게 뜬 달을 보니 누이 잃은 슬픔에, 우리 민족의 서글픈 운명까지 겹쳐서 눈물이 핑 돌았다. 그 순간 노랫말과 곡조가 떠올랐다고 한다. 나라 잃고 방황하는 민족적 비운을 그린 동요 ‘반달’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동요’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쓰인 것도 이때부터라고 한다.   방정환 선생은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는 윤극영에게 “자신만을 위한 음악 공부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장차 나라를 이끌어갈 어린이들이 부를 노래를 만들어라”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윤극영은 평생토록 뜻을 함께했다.   윤극영 선생은 자신의 이상을 펼치느라 해외 유랑생활도 많이 했고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그러면서도 어린이들의 꿈을 위해 동요를 만들어냈다.   ‘반달 할아버지’ 윤극영 선생은 ‘반달’을 비롯하여 ‘설날’ ‘고기잡이’ ‘고드름’ ‘따오기’ 등 400여곡을 작곡하였고, 방정환, 정순철 등 동료들과 어린이 문화재단 ‘색동회’를 조직하여 어린이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앞에서 말한 대로, 어린 시절 배운 동요의 기억은 늙지 않고 평생을 간다. 미주 한인사회에도 우리 아이들이 신나게 부르고 평생 기억할 좋은 동요가 많았으면 좋겠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반달’을 흥얼거리다 보니, 문득 권길상 선생이 떠오른다. 디아스포라의 쓸쓸한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줄 우리 노래 짓는 일에 힘쓰던 모습이 그립다. 내년 2025년이 권길상 선생 10주기다. 뜻깊은 행사들이 많이 열리기를 바란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은하수 하늘 하늘 은하수 윤극영 선생 반달 계수나무

2024-05-02

[문화산책] 사람은 크게 살아야 한다

“사람은 크게 살아야 한다. 그걸 잊지 마라.”   우현 고유섭 선생이 제자이자 후배인 황수영 박사에게 한 말씀이다. ‘고유섭 평전’을 읽다가 이 구절에서 오래 멈춰서 많은 생각을 했다. “크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 앞에 참 아주 부끄럽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의 삶은 ‘크다’는 말과는 거리가 멀었다. 멀어도 한참 먼 조무래기로만 가까스로 살아왔다. 그러니 부끄럽지 않을 수가 없다.   우현 고유섭(1905-1944) 선생은 개성부립박물관 관장을 역임하며, 한국미술사의 초석을 다진 선구적 학자였다. 그것도 일제강점기라는 어려운 현실에서 “짓밟힌 민족자존을 되찾기 위해 민족미술사를 홀로 개척해나간 선구자”다.   “우현은 가장 비범했고 가장 열정적인 개척자였으며 가장 고독했던 문화독립운동가였다. 그는 민족혼을 지킨 불멸의 혼이다.” 그러니까, 고유섭 선생의 ‘큰 삶’이란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미술사 확립을 통해 민족적 자존심을 되찾으려는 개척자의 삶이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우리 조선의 예술이 일본보다 우월하다는 걸 증명하고 가야지…. 우리에겐 독창적이며 빛나는 문화예술이 있다.” 그 독창적이며 빛나는 우리의 미술사를 바르게 정리한 책을 쓰는 것이 선생의 꿈이었다. 그 꿈을 위해, 죽는 순간까지 치열하게 글을 쓰셨다.     안타깝게도 우현은 1944년 6월에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한국미술사 집필을 완성하지 못했다. 해방을 앞두고 타계했으니, 더욱 안타깝다. 올해가 타계 80주년 되는 해다.   비록 한국미술사를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남긴 학문적 업적은 실로 대단하다. 그 기초를 디딤돌로 삼아 후학들의 연구가 이어져 왔다. 그리고 ‘개성 3인방’이라고 일컬어지는 황수영, 최순우, 진홍섭 같은 훌륭한 미술사학자를 제자로 길러 한국미술사 연구의 기초를 마련한 것도 선생의 큰 업적이다.   황수영 박사는 한국 불교미술사의 최고 석학으로 동국대학교 박물관장과 총장을 역임하며 많은 학문적 업적을 남겼고, 최순우 관장은 국립박물관 관장으로 우리 문화재의 보존과 재조명에 앞장섰다. 진홍섭 박사는 국립박물관 초대 개성분관장과 이화여대 박물관장으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세 분 모두 우현 선생의 학문적 기초 위에서 자기 학문 세계를 펼쳐나갔다.   크게 살기 위해서는 세상을 넓게 보고, 깊게 생각하는 눈과 마음을 가져야 한다. 특히, 역사 공부에서는 긴 안목과 깊은 시각이 반드시 필요하다. 망원경과 현미경을 동시에 갖춰야 하고, 객관성과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우현 선생 말씀대로 역사학자는 큰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크게 사는 것이 중요하지만, 사람 자체에 크고 작음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 누구에게나 장점과 단점이 있게 마련이고, 그 장점과 단점을 평균하면 사람의 크기는 대개가 어슷비슷하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아주 특별하게 타고난 사람이 아닌 다음에는 큰 차이가 없다고 믿고 싶다.   불교계에서 영향력이 막강했던 법정 스님은 ‘큰 스님’이라는 말을 들으면 늘 손사래를 치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고 전한다. “큰 스님? 그럼 작은 스님도 있는가? 대추기경이 있고 소추기경이 있고 그런 건가?”   옳으신 말씀이다. 하지만, 우현 선생의 “크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도 절실하다. 큰 사람이 많아야 우리 세상이 아름답고 건강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라도 조금이나마 크게 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하지만, 참 어려운 일이다. 나는 더 어렵다, 워낙 키가 작아서….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한국미술사 집필 한국미술사 연구 우현 선생

2024-03-28

[열린광장] 오현경 선생님 영전에 부쳐

한국 연극계의 거목 오현경 선생님이 지난 3월 1일,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는 비보를 접했습니다. 2016년 한국 방문 때 선생님과의 마지막 만남이 생각납니다.   미국에서 반가운 사람이 왔다며 약수동 자택으로 저를 불러 손수 점심을 요리해 주시고 오후에는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뒷편에 있는 ‘송백당’을 안내해 주셨습니다. ‘송백당’은 연극인들의 발음과 화술 교육을 위해 선생님이 사비를 들여 개관한 곳입니다. 그때 “지난 3년간 송백당을 거쳐 간 배우가 100여 명이 넘는다”고 어린아이처럼 웃으시며 기뻐하시던 것이 생전에 뵌 마지막 모습이 되었습니다.   오현경 선생님!   생각해보면 선생님은 LA 연극인들도 무척이나 사랑하셨던 분이었습니다.  2000~2010년대에는 부인인 윤소정 선생님과 함께 2, 3년에 한 번씩은 LA를 방문하곤 하셨습니다. 그때마다 저에게 고국 연극계의 생생한 소식을 전해 주셨고, 때로는 고국 극단들과의 가교역할도 해주셨습니다. 그 덕에 저는 한국 최고의 수준 높은 연극을 초청해 한인 사회에 소개하는 기쁨을 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또한  LA 방문 중에 한인 연극인들의 공연이 있으면 꼭 찾아와 함께 축하하고 격려금을 주시기도 했습니다. 한인 배우들의 발음을 위해 어려운 시간을 내 워크숍도 열어 주셨던 선생님의 자상하신 모습을 이곳 연극인들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오현경 선생님!   선생님은 66년간 행복한 연극인이었습니다. 연극인으로 활동하며 대한민국연극대상 남자 연기상, 한국문화대상 연극부문 대상, 서울시연극상, 동아연극상, 서울연극제 남자 연기상 ,KBS 연기대상 등 많은 상을 받았고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도 활동했습니다. 삶과 예술이 모두 빛나는 행복한 분이었습니다.     LA에서 선생님과 나눴던 얘기 가운데 잊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건강이 좋아지고 주변 여건이 조성되면 한미합작으로 한국정통해학극 ‘맹진사댁 경사’를 오현경 연출, 에이콤 기획으로LA 무대에 올리자는 것이었습니다. 전무송, 이호재, 정동환 등 한국 연극계의 스타들과 LA 연극인들이 함께 무대를 만들면 뜻깊을 것이라며…. 그러나 그 바람은 영원히 미완으로 남은 채 2023년 선생님의 유작 ‘한여름 밤의 꿈’ 속 마지막 대사처럼 “자, 저는 이만 갑니다” 를 남기고 먼 길을 떠나셨네요.   연극을 종교처럼 가슴에 품고 살았던 오현경 선생님!   이제 대한민국 연극은 자랑스러운 후배들에게 맡기시고 7년 전 먼저 떠나신 윤소정 선생님과 함께 대학로 마로니에 거리를 환히 비추는 큰 별이 되어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광진 / 문화기획사 에이콤 대표열린광장 오현경 선생 오현경 선생님 윤소정 선생님 오현경 연출

2024-03-17

[문화산책] 할리우드 한류의 선구자 오순택 선생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숨기지 말고 그대로 표현하세요.”   에미상 시상식에서 넷플릭스 드라마 ‘성난 사람들(BEEF)’로 작품상과 감독상, 남우주연상과 여우주연상 등 8관왕을 수상한 이성진 감독의 말이다. 데뷔했을 때에는 ‘어떻게 하면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글을 쓸까’ 고민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설명이다.   한국계 영화인들이 할리우드의 영화제에서 트로피를 싹쓸이하는 통쾌한 장면을 보면서 어깨가 절로 으쓱해진다. 그것도 한두 번에 그치지 않고, ‘미나리’ ‘오징어게임’ ‘기생충’에 이어 ‘성난 사람들’ ‘전생’ 등으로 계속되니, 그야말로 할리우드가 우리의 앞마당이 된 듯한 느낌이다. 격세지감이 든다.   이처럼 자랑스러운 현실을 대하면서 나는 배우 고 오순택(1932-2018) 선생을 떠올린다. 한평생 그렇게 바라던 꿈이 이루어진 현실을 하늘나라에서 내려다보며 기뻐하고 있으시려나…. 오늘날의 영광이 있기까지 필립 안, 오순택 같은 선구자들의 외롭고 힘겨운 도전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고 있다.   배우 오순택은 명실공히 최초의 한류스타 연기자이다. 지난 2018년 4월 오순택 선생이 세상을 떠났을 때, 뉴욕타임스(NYT)는 장문의 부고 기사를 실어, 그의 삶을 조명하고 평가했다. 그의 존재가 그만큼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배우 오순택은 아시아계 배우들의 영역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했다. 40여년간 영화와 TV에서 꾸준히 활동했고… (줄임)… 고인의 도전이 할리우드를 문화적으로도 더 풍부하게 만들었다.”   이런 성취가 한층 빛나는 까닭은 투철한 예술가 정신과 투쟁의 결과라는 사실이다. 그저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할리우드는 유럽 영화계와는 달리 오랫동안 외국인들에게는 난공불락의 성벽이었다. 백인우월주의의 둑이 무너지기 전까지 아주 오랫동안 그래왔다. 아시아계나 한국계 연기자가 할리우드에서 배우로 성공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오순택 선생은 이렇게 표현했다. “할리우드에서 아시안 배우로 생활한다는 것은 산에서 고래를 찾고 바다에서 호랑이를 찾는 일과도 같다.”   나는 운이 좋아서 배우 오순택 선생과 가깝게 지내면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은 할리우드에서 차별과 싸우며 활동하면서도, 당장 눈앞의 인기나 성공보다는 한국인의 자긍심을 소중하게 여기는 자세다.   예를 들면, 대중들에게 빨리 쉽게 기억되려면 영어식 예명을 사용하는 것이 유리했을 텐데, 그러지 않고 한국 이름 ‘Soon-Tek Oh’를 그대로 사용했다.   그런가 하면, 아시안을 비하하는 배역은 아무리 조건이 좋아도 맡지 않는 등 한국인 배우로서 자존심을 지켰다. 그 당시 할리우드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아시안의 역할이 많지 않았고, 있다고 해도 멋진 배역은 별로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배역을 골라서 맡는다는 것은 상당한 용기와 신념이 필요한 일이었다. 오순택은 끝까지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   무엇보다도 감사한 것은 오순택 선생이 할리우드 진출을 꿈꾸는 후배들이 자신처럼 험한 가시밭길을 걷지 않도록 돕고 이끄는 일에 앞장섰다는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돕는 것은 물론이고, ‘한미극협’ ‘전통연기자협회’ 같은 극단을 만들어서 적극적으로 후배를 양성했다.   그에 그치지 않고, 말년에는 한국으로 돌아가 대학에서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를 전수해 후배들에게, 그가 경험했던 어려움과 아픔을 겪지 않도록,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교육에 힘썼다. 발판 다지기에 헌신한 것이다.   한류 열풍이 어느 날 하늘에서 툭 떨어진 것이 아니다. 한류의 모든 분야에 고마운 선구자들의 땀과 눈물이 스며있다. 그런 선배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오늘의 한류를 한층 건강하게 해줄 것이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할리우드 할리우드 한류 오순택 선생 선구자 오순택

2024-02-01

[수필] 그때 그 선생님

그때가 1964년이었으니까 60년 전 충청도에서 초등학교 3학년 때 일이다. 세 개의 마을을 합쳐 보았자 100가구도 안 되는 작은 시골 마을 학교였다. 대학을 갓 졸업한 공 선생님이 우리 반 담임으로 부임하셨는데 우리 학교가 초임지였다. 굉장한 미인이셨는데 선생님 가까이에 가면 향기가 났다. 나는 선생님의 그 향기가 참으로 좋았다. 나중에 커서 선생님처럼 예쁜 여자와 결혼하고 싶다는 마음을 먹기도 했다.     왜 그랬는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선생님은 나를 무척 귀여워해 주셨다. 햇볕이 따스한 봄날 너무 배가 고파 나무에 돋아난 새싹을 따 먹으려 나무에 올라갔다가 가지가 부러지는 바람에 떨어져 왼쪽 팔이 부러졌다. 읍내 병원에 가서 깁스붕대를 하고 학교를 이틀 결석했는데 선생님도 보고 싶고 공부도 하고 싶어 안달복달하였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학교에 가서 교문 콘크리트 기둥 뒤에 숨어서 살며시 교실 쪽을 살피다가 선생님께 들켰다. 선생님은 운동장으로 걸어 나와 내 쪽으로 오시더니 손목을 잡고 교실로 들어가 “여러분도 공부에 열의가 있는 진용이를 닮아야 한다”고 칭찬해 주셨다.   하루는 체육 시간을 끝내고 교실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으며 바지 속 주머니를 뒤져 보았더니 갖고 있던 10원짜리 지폐가 없어졌다. 소녀 가장인 누나가 공책 사라고 준 돈이었는데 그 돈이면 공책 서너 권을 살 수 있었다. 나는 훌쩍거리며 선생님께 알렸다. 선생님은 온갖 방법으로 범인 색출 작업에 나섰다. “전부 눈을 감아라. 아무런 문제도 삼지 않을 테니 돈을 가져간 사람은 살짝 눈을 떴다 감거라.” 애가 탈 정도로 달래 보기도 하고 윽박지르기도 하셨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선생님은 좋은 방법이 있다며 교실을 나가신 후 잠시 후 조그만 빈 항아리를 들고 오셨다. 아마 학교 옆에 있는 교장 선생님 사택에서 빌려 오신 듯 했다. “지금부터 한 사람씩 나와서 항아리 속에 손을 넣었다 빼거라. 돈을 안 가져간 사람은 아무 일이 없겠지만 돈을 가져간 사람은 이 속에 손을 넣었다 빼면 그 손이 서서히 썩어들어 가게 된다”고 겁을 주며 으름장을 놓으셨다.   모두 씩씩하게 나가서 항아리 속에 손을 넣었다. 내 짝꿍 차례가 되었는데 녀석이 주저하더니 항아리 속에 손을 넣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면서 ‘으앙’ 울음을 터뜨렸다. 선생님은 이렇게 슬기로운 지혜로 돈을 가져간 사람을 찾아낸 것이었다.   어느 날 셋째 산수 수업시간에 ‘드르륵’ 교실 문이 열리며 난데없이 어머니가 들어 오셨다. “이진용 어미인데 공부하는 것 좀 보러 왔다”고 하시자 선생님께서 반갑게 맞이하시며 뒤쪽에 의자를 갖다 놓고 어머니를 앉히셨다. 그리고 나를 나오라고 하시며 칠판에 산수 문제를 몇 문제 적어 놓으시고 나보고 풀어보라고 하시기에 나는 쉽게 답을 썼다. 선생님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만족해하셨고, 어머니는 아들이 대견스러워 흡족해하셨다.   수업이 끝나자 어머니가 선생님 앞으로 나가시더니 돌아서서 몸빼 속에 껴입은 고쟁이 주머니에서 50원짜리 지폐 한장을 꺼내 “선생님! 이 교실에 거울이 없는데 이 돈으로 거울을 사 놓으시라”고 선생님 손에 쥐여 주시려 하자, 선생님은 화들짝 하시며 손사래 치셨다. 모든 학생이 주시하고 있으니 민망하셨는지 계속된 어머니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할 수 없이 받으셨다. 수업이 끝나고 하교 시간에 “진용이는 교실에 남아 있거라”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누런 편지 봉투 속에 그 50원짜리 지폐를 담아 돌려주시면서 “너는 아버지도 안 계셔 가정 형편이 어려운데 이 돈을 받을 수 없다. 내가 월급을 타면 거울을 꼭 사서 걸어 놓을 테니 어머니께 도로 갖다 드리라고 한사코 주셔서 그 돈을 돌려받았다. 며칠 후 우리 교실에는 선생님을 닮은 예쁜 사각 거울이 교실 뒷벽에 걸리게 되었다.   선생님은 우리 학교에서 일 년을 근무하시고 같은 군 내에 있는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셨다. 전교생이 모인 운동장에서 이임사를 하시고 곧바로 교문을 걸어나가셨는데,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 역시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허우룩한 마음을 떨쳐 버릴 수 없어 오랫동안 가슴이 아팠다. 내 생애에 100여 명이 넘는 은사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지만 유독 공 선생님이 기억에 남고 가슴 속에 각인된 이유는 무엇일까?   2년 후면 한국을 방문하게 된다. 어쩌면 돌아가셨을지도 모르겠지만 수소문하여 ‘그때 그 선생님’을 꼭 한번 찾아뵐 계획이다. 그리고는 큰절을 올려야지…. 이진용 / 수필가수필 선생 교장 선생님 선생님 가까이 산수 수업시간

2023-11-16

"대학생때까지 선생님이 수년 간 성 학대" 소송

    한 여성이 라카냐다 플린트리지 소재 프렙 스쿨 재학 당시 수년 동안 한 교사로부터 성적 학대를 당했다고 밝혔다.   익명을 요구한 이 여성은 "어린 시절 그루밍 당하고 성적으로 학대 당했으며 이에 대해 학교 측은 나의 안전 보다는 학교 명성을 지키는 선택을 했다"고 말했다.   이 여성은 플린트리지 프렙 스쿨에 대해 소송을 제기하면서 재학 당시 한 교사와 수년 간에 걸쳐 관계를 맺었으며 여기에는 부적절한 성적 관계도 포함된다고 설명했다.   이 여성의 변호사는 자신의 고객이 그녀보다 두 배나 나이가 많은 남성의 관심을 견뎌내면서 그 속에서 그루밍과 희롱, 성추행, 학대 등이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해당 사건은 2013년부터 시작됐으며 피해 여성이 대학교에 진학한 뒤에도 이어지다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가 터지고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끝난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 여성은 지난 주 이 문제와 관련해 정식으로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면서 학교측이 두 사람의 부적절한 관계를 알고 있었음에도 학교 이미지를 고려해 그 같은 사실을 숨기는 것을 선택했다며 이에 대한 액수 미상의 피해보상액을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학교 측은 이 같은 주장에 대해 두 사람에 관한 소문을 인지한 직후 해당 교사를 임시 휴직 시켰고 LA 카운티 셰리프국에 알렸다고 밝혔다. 학교 측은 또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더 자세히 파악하기 위해 철저한 조사를 진행했고 그 결과에 근거해 해당 교사의 임용을 4월에 종료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피해 학생은 해당 조치가 10년 뒤에나 이뤄진 것은 너무 늦은 것이라며 그 기간 동안 전체 커뮤니티는 나를 지켜만 봤고 가해자를 멈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디지털본부 뉴스랩대학생때 선생 학대 소송 성적 학대 희롱 학대

2023-11-16

[기고] 한인 독립운동가 김종림 재평가 필요하다

2023년은 미주 한인 이민 120주년이자, 한국 공군의 상징적 기원이 되는 캘리포니아 소재 ‘윌로우스 비행학교’ 설립 103주년이 되는 해다. 미주 한인 독립운동가 가운데 도산 안창호,노백린,박희성,이용근 선생 등은 잘 알려져 있지만 윌로우스 비행학교 설립에 전폭적인 재정지원을 했던 김종림 선생의 생애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쌀농사로 부를 축적한 그의 재정 지원이 있었기에 비행학교 설립도 가능했다. 그런데 1920년 4월 문을 열었던 비행학교는 얼마 되지 않아 불운을 겪게 된다. 이맘때 쯤인 그해 11월 초 윌로우스 지역에 100년 만의 폭우가 쏟아지면서 후원자인 김종림의 쌀농사가 큰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비행학교 재정 지원에 어려움이 생긴 것이다.   김종림(1886~1973)은 대한인국민회,북미지방동지회 등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다. 하와이로 이민 와 1907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으며, 이후 유타주 솔트레이크시에서 철도 건설 노동자로도 일했다. 당시 공립협회에 가입했고 다시 캘리포니아주의 바실리아, 프레즈노,리들리 등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1908년 전명운, 장인환 의사의 스티븐슨 저격 의거가 일어나자 직접 공립신보 인쇄원이 되어 동포 사회에 이 소식을 알리기도 했다. 1909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 후엔 ‘대한인국민회’에서 활동했다. 대한인국민회는 1909년 2월1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박용만,이승만 등에 의해 창설된 미국 최대 독립운동 단체였다. 지난 2004년에는 기념재단이 출범해 지금도 선조들의 독립정신과 나라 사랑의 마음을 차세대에게 알리고 있다.     그는 1912년 무렵 프린스톤에서 벼농사를 시작했고 이후 윌로우스 지역으로 확대했다. 1914-1916년까지 계속된 풍년과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전쟁 특수로 인해 쌀값이 폭등하면서 김종림은 ‘쌀의 대왕’으로 불리우며 한인 최초의 백만장자 명성을 얻었다. 자연히 그는 지역사회 독립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1920년 초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전쟁의 해’를 선포하고 비행대 편성의 방침을 세웠다. 이 소식을 접한 김종림은 1920년 초 노백린 임시정부 군무총장을 만나면서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이자 한국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결정을 내린다. 공군 양성 계획에 흔쾌히 동참해 설립 자금 2만 달러와 월 3000달러의 운영비를 지원했다. 그해 6월에는 실제로 비행기 2대를 구입해 비행 실습훈련까지 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100년 만의 폭우로 쌀농사가 실패하면서 재정 지원에 차질이 생겼고 비행학교는 결국 문을 닫게 된다. 비록 짧은 기간 이었지만 윌로우스 비행학교는 조국 독립을 위한 가장 획기적인 발상과 실천을 한 것이었다   당시 공군을 양성해 일본군을 공격한다는 것은 다소 비현실적인 방법으로도 생각된다. 그러나 조국독립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용기 있게 행동으로 옮긴 선조들의 노력은 후손들에게 큰 자부심으로 기억된다.    사재를 털어 윌로우스 비행학교를 지원한  애국지사 김종림, 그리고 비행기 조종사가 되기 위해 죽음을 각오했던 대담하고 진취적인 조선 청년들의 기상에 우리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특기할 만한 점은 김종림은 주로 재정 지원을 담당하며  안창호계와 이승만계 양쪽 진영 모두에서 활약한 애국지사라는 점이다. 그의 목표는 오로지 조국의 독립이었으며, 어떤 경우에도 이를 포기하지 않고 행동함으로써 한인 사회에 희망을 주는 삶이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열정을 다한 그의 애국적 삶에 존경을 표하며, 그의 업적과 삶에 대해  좀더 적극적인 평가가 있어야 할 것이다. 심인태 / 공군전우회 LA지회장기고 독립운동가 김종림 김종림 선생 비행학교 재정 비행학교 설립

2023-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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