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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사람은 크게 살아야 한다

“사람은 크게 살아야 한다. 그걸 잊지 마라.”   우현 고유섭 선생이 제자이자 후배인 황수영 박사에게 한 말씀이다. ‘고유섭 평전’을 읽다가 이 구절에서 오래 멈춰서 많은 생각을 했다. “크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 앞에 참 아주 부끄럽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의 삶은 ‘크다’는 말과는 거리가 멀었다. 멀어도 한참 먼 조무래기로만 가까스로 살아왔다. 그러니 부끄럽지 않을 수가 없다.   우현 고유섭(1905-1944) 선생은 개성부립박물관 관장을 역임하며, 한국미술사의 초석을 다진 선구적 학자였다. 그것도 일제강점기라는 어려운 현실에서 “짓밟힌 민족자존을 되찾기 위해 민족미술사를 홀로 개척해나간 선구자”다.   “우현은 가장 비범했고 가장 열정적인 개척자였으며 가장 고독했던 문화독립운동가였다. 그는 민족혼을 지킨 불멸의 혼이다.” 그러니까, 고유섭 선생의 ‘큰 삶’이란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미술사 확립을 통해 민족적 자존심을 되찾으려는 개척자의 삶이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우리 조선의 예술이 일본보다 우월하다는 걸 증명하고 가야지…. 우리에겐 독창적이며 빛나는 문화예술이 있다.” 그 독창적이며 빛나는 우리의 미술사를 바르게 정리한 책을 쓰는 것이 선생의 꿈이었다. 그 꿈을 위해, 죽는 순간까지 치열하게 글을 쓰셨다.     안타깝게도 우현은 1944년 6월에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한국미술사 집필을 완성하지 못했다. 해방을 앞두고 타계했으니, 더욱 안타깝다. 올해가 타계 80주년 되는 해다.   비록 한국미술사를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남긴 학문적 업적은 실로 대단하다. 그 기초를 디딤돌로 삼아 후학들의 연구가 이어져 왔다. 그리고 ‘개성 3인방’이라고 일컬어지는 황수영, 최순우, 진홍섭 같은 훌륭한 미술사학자를 제자로 길러 한국미술사 연구의 기초를 마련한 것도 선생의 큰 업적이다.   황수영 박사는 한국 불교미술사의 최고 석학으로 동국대학교 박물관장과 총장을 역임하며 많은 학문적 업적을 남겼고, 최순우 관장은 국립박물관 관장으로 우리 문화재의 보존과 재조명에 앞장섰다. 진홍섭 박사는 국립박물관 초대 개성분관장과 이화여대 박물관장으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세 분 모두 우현 선생의 학문적 기초 위에서 자기 학문 세계를 펼쳐나갔다.   크게 살기 위해서는 세상을 넓게 보고, 깊게 생각하는 눈과 마음을 가져야 한다. 특히, 역사 공부에서는 긴 안목과 깊은 시각이 반드시 필요하다. 망원경과 현미경을 동시에 갖춰야 하고, 객관성과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우현 선생 말씀대로 역사학자는 큰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크게 사는 것이 중요하지만, 사람 자체에 크고 작음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 누구에게나 장점과 단점이 있게 마련이고, 그 장점과 단점을 평균하면 사람의 크기는 대개가 어슷비슷하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아주 특별하게 타고난 사람이 아닌 다음에는 큰 차이가 없다고 믿고 싶다.   불교계에서 영향력이 막강했던 법정 스님은 ‘큰 스님’이라는 말을 들으면 늘 손사래를 치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고 전한다. “큰 스님? 그럼 작은 스님도 있는가? 대추기경이 있고 소추기경이 있고 그런 건가?”   옳으신 말씀이다. 하지만, 우현 선생의 “크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도 절실하다. 큰 사람이 많아야 우리 세상이 아름답고 건강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라도 조금이나마 크게 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하지만, 참 어려운 일이다. 나는 더 어렵다, 워낙 키가 작아서….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한국미술사 집필 한국미술사 연구 우현 선생

2024-03-28

[열린광장] 오현경 선생님 영전에 부쳐

한국 연극계의 거목 오현경 선생님이 지난 3월 1일,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는 비보를 접했습니다. 2016년 한국 방문 때 선생님과의 마지막 만남이 생각납니다.   미국에서 반가운 사람이 왔다며 약수동 자택으로 저를 불러 손수 점심을 요리해 주시고 오후에는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뒷편에 있는 ‘송백당’을 안내해 주셨습니다. ‘송백당’은 연극인들의 발음과 화술 교육을 위해 선생님이 사비를 들여 개관한 곳입니다. 그때 “지난 3년간 송백당을 거쳐 간 배우가 100여 명이 넘는다”고 어린아이처럼 웃으시며 기뻐하시던 것이 생전에 뵌 마지막 모습이 되었습니다.   오현경 선생님!   생각해보면 선생님은 LA 연극인들도 무척이나 사랑하셨던 분이었습니다.  2000~2010년대에는 부인인 윤소정 선생님과 함께 2, 3년에 한 번씩은 LA를 방문하곤 하셨습니다. 그때마다 저에게 고국 연극계의 생생한 소식을 전해 주셨고, 때로는 고국 극단들과의 가교역할도 해주셨습니다. 그 덕에 저는 한국 최고의 수준 높은 연극을 초청해 한인 사회에 소개하는 기쁨을 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또한  LA 방문 중에 한인 연극인들의 공연이 있으면 꼭 찾아와 함께 축하하고 격려금을 주시기도 했습니다. 한인 배우들의 발음을 위해 어려운 시간을 내 워크숍도 열어 주셨던 선생님의 자상하신 모습을 이곳 연극인들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오현경 선생님!   선생님은 66년간 행복한 연극인이었습니다. 연극인으로 활동하며 대한민국연극대상 남자 연기상, 한국문화대상 연극부문 대상, 서울시연극상, 동아연극상, 서울연극제 남자 연기상 ,KBS 연기대상 등 많은 상을 받았고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도 활동했습니다. 삶과 예술이 모두 빛나는 행복한 분이었습니다.     LA에서 선생님과 나눴던 얘기 가운데 잊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건강이 좋아지고 주변 여건이 조성되면 한미합작으로 한국정통해학극 ‘맹진사댁 경사’를 오현경 연출, 에이콤 기획으로LA 무대에 올리자는 것이었습니다. 전무송, 이호재, 정동환 등 한국 연극계의 스타들과 LA 연극인들이 함께 무대를 만들면 뜻깊을 것이라며…. 그러나 그 바람은 영원히 미완으로 남은 채 2023년 선생님의 유작 ‘한여름 밤의 꿈’ 속 마지막 대사처럼 “자, 저는 이만 갑니다” 를 남기고 먼 길을 떠나셨네요.   연극을 종교처럼 가슴에 품고 살았던 오현경 선생님!   이제 대한민국 연극은 자랑스러운 후배들에게 맡기시고 7년 전 먼저 떠나신 윤소정 선생님과 함께 대학로 마로니에 거리를 환히 비추는 큰 별이 되어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광진 / 문화기획사 에이콤 대표열린광장 오현경 선생 오현경 선생님 윤소정 선생님 오현경 연출

2024-03-17

[문화산책] 할리우드 한류의 선구자 오순택 선생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숨기지 말고 그대로 표현하세요.”   에미상 시상식에서 넷플릭스 드라마 ‘성난 사람들(BEEF)’로 작품상과 감독상, 남우주연상과 여우주연상 등 8관왕을 수상한 이성진 감독의 말이다. 데뷔했을 때에는 ‘어떻게 하면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글을 쓸까’ 고민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설명이다.   한국계 영화인들이 할리우드의 영화제에서 트로피를 싹쓸이하는 통쾌한 장면을 보면서 어깨가 절로 으쓱해진다. 그것도 한두 번에 그치지 않고, ‘미나리’ ‘오징어게임’ ‘기생충’에 이어 ‘성난 사람들’ ‘전생’ 등으로 계속되니, 그야말로 할리우드가 우리의 앞마당이 된 듯한 느낌이다. 격세지감이 든다.   이처럼 자랑스러운 현실을 대하면서 나는 배우 고 오순택(1932-2018) 선생을 떠올린다. 한평생 그렇게 바라던 꿈이 이루어진 현실을 하늘나라에서 내려다보며 기뻐하고 있으시려나…. 오늘날의 영광이 있기까지 필립 안, 오순택 같은 선구자들의 외롭고 힘겨운 도전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고 있다.   배우 오순택은 명실공히 최초의 한류스타 연기자이다. 지난 2018년 4월 오순택 선생이 세상을 떠났을 때, 뉴욕타임스(NYT)는 장문의 부고 기사를 실어, 그의 삶을 조명하고 평가했다. 그의 존재가 그만큼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배우 오순택은 아시아계 배우들의 영역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했다. 40여년간 영화와 TV에서 꾸준히 활동했고… (줄임)… 고인의 도전이 할리우드를 문화적으로도 더 풍부하게 만들었다.”   이런 성취가 한층 빛나는 까닭은 투철한 예술가 정신과 투쟁의 결과라는 사실이다. 그저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할리우드는 유럽 영화계와는 달리 오랫동안 외국인들에게는 난공불락의 성벽이었다. 백인우월주의의 둑이 무너지기 전까지 아주 오랫동안 그래왔다. 아시아계나 한국계 연기자가 할리우드에서 배우로 성공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오순택 선생은 이렇게 표현했다. “할리우드에서 아시안 배우로 생활한다는 것은 산에서 고래를 찾고 바다에서 호랑이를 찾는 일과도 같다.”   나는 운이 좋아서 배우 오순택 선생과 가깝게 지내면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은 할리우드에서 차별과 싸우며 활동하면서도, 당장 눈앞의 인기나 성공보다는 한국인의 자긍심을 소중하게 여기는 자세다.   예를 들면, 대중들에게 빨리 쉽게 기억되려면 영어식 예명을 사용하는 것이 유리했을 텐데, 그러지 않고 한국 이름 ‘Soon-Tek Oh’를 그대로 사용했다.   그런가 하면, 아시안을 비하하는 배역은 아무리 조건이 좋아도 맡지 않는 등 한국인 배우로서 자존심을 지켰다. 그 당시 할리우드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아시안의 역할이 많지 않았고, 있다고 해도 멋진 배역은 별로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배역을 골라서 맡는다는 것은 상당한 용기와 신념이 필요한 일이었다. 오순택은 끝까지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   무엇보다도 감사한 것은 오순택 선생이 할리우드 진출을 꿈꾸는 후배들이 자신처럼 험한 가시밭길을 걷지 않도록 돕고 이끄는 일에 앞장섰다는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돕는 것은 물론이고, ‘한미극협’ ‘전통연기자협회’ 같은 극단을 만들어서 적극적으로 후배를 양성했다.   그에 그치지 않고, 말년에는 한국으로 돌아가 대학에서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를 전수해 후배들에게, 그가 경험했던 어려움과 아픔을 겪지 않도록,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교육에 힘썼다. 발판 다지기에 헌신한 것이다.   한류 열풍이 어느 날 하늘에서 툭 떨어진 것이 아니다. 한류의 모든 분야에 고마운 선구자들의 땀과 눈물이 스며있다. 그런 선배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오늘의 한류를 한층 건강하게 해줄 것이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할리우드 할리우드 한류 오순택 선생 선구자 오순택

2024-02-01

[수필] 그때 그 선생님

그때가 1964년이었으니까 60년 전 충청도에서 초등학교 3학년 때 일이다. 세 개의 마을을 합쳐 보았자 100가구도 안 되는 작은 시골 마을 학교였다. 대학을 갓 졸업한 공 선생님이 우리 반 담임으로 부임하셨는데 우리 학교가 초임지였다. 굉장한 미인이셨는데 선생님 가까이에 가면 향기가 났다. 나는 선생님의 그 향기가 참으로 좋았다. 나중에 커서 선생님처럼 예쁜 여자와 결혼하고 싶다는 마음을 먹기도 했다.     왜 그랬는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선생님은 나를 무척 귀여워해 주셨다. 햇볕이 따스한 봄날 너무 배가 고파 나무에 돋아난 새싹을 따 먹으려 나무에 올라갔다가 가지가 부러지는 바람에 떨어져 왼쪽 팔이 부러졌다. 읍내 병원에 가서 깁스붕대를 하고 학교를 이틀 결석했는데 선생님도 보고 싶고 공부도 하고 싶어 안달복달하였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학교에 가서 교문 콘크리트 기둥 뒤에 숨어서 살며시 교실 쪽을 살피다가 선생님께 들켰다. 선생님은 운동장으로 걸어 나와 내 쪽으로 오시더니 손목을 잡고 교실로 들어가 “여러분도 공부에 열의가 있는 진용이를 닮아야 한다”고 칭찬해 주셨다.   하루는 체육 시간을 끝내고 교실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으며 바지 속 주머니를 뒤져 보았더니 갖고 있던 10원짜리 지폐가 없어졌다. 소녀 가장인 누나가 공책 사라고 준 돈이었는데 그 돈이면 공책 서너 권을 살 수 있었다. 나는 훌쩍거리며 선생님께 알렸다. 선생님은 온갖 방법으로 범인 색출 작업에 나섰다. “전부 눈을 감아라. 아무런 문제도 삼지 않을 테니 돈을 가져간 사람은 살짝 눈을 떴다 감거라.” 애가 탈 정도로 달래 보기도 하고 윽박지르기도 하셨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선생님은 좋은 방법이 있다며 교실을 나가신 후 잠시 후 조그만 빈 항아리를 들고 오셨다. 아마 학교 옆에 있는 교장 선생님 사택에서 빌려 오신 듯 했다. “지금부터 한 사람씩 나와서 항아리 속에 손을 넣었다 빼거라. 돈을 안 가져간 사람은 아무 일이 없겠지만 돈을 가져간 사람은 이 속에 손을 넣었다 빼면 그 손이 서서히 썩어들어 가게 된다”고 겁을 주며 으름장을 놓으셨다.   모두 씩씩하게 나가서 항아리 속에 손을 넣었다. 내 짝꿍 차례가 되었는데 녀석이 주저하더니 항아리 속에 손을 넣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면서 ‘으앙’ 울음을 터뜨렸다. 선생님은 이렇게 슬기로운 지혜로 돈을 가져간 사람을 찾아낸 것이었다.   어느 날 셋째 산수 수업시간에 ‘드르륵’ 교실 문이 열리며 난데없이 어머니가 들어 오셨다. “이진용 어미인데 공부하는 것 좀 보러 왔다”고 하시자 선생님께서 반갑게 맞이하시며 뒤쪽에 의자를 갖다 놓고 어머니를 앉히셨다. 그리고 나를 나오라고 하시며 칠판에 산수 문제를 몇 문제 적어 놓으시고 나보고 풀어보라고 하시기에 나는 쉽게 답을 썼다. 선생님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만족해하셨고, 어머니는 아들이 대견스러워 흡족해하셨다.   수업이 끝나자 어머니가 선생님 앞으로 나가시더니 돌아서서 몸빼 속에 껴입은 고쟁이 주머니에서 50원짜리 지폐 한장을 꺼내 “선생님! 이 교실에 거울이 없는데 이 돈으로 거울을 사 놓으시라”고 선생님 손에 쥐여 주시려 하자, 선생님은 화들짝 하시며 손사래 치셨다. 모든 학생이 주시하고 있으니 민망하셨는지 계속된 어머니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할 수 없이 받으셨다. 수업이 끝나고 하교 시간에 “진용이는 교실에 남아 있거라”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누런 편지 봉투 속에 그 50원짜리 지폐를 담아 돌려주시면서 “너는 아버지도 안 계셔 가정 형편이 어려운데 이 돈을 받을 수 없다. 내가 월급을 타면 거울을 꼭 사서 걸어 놓을 테니 어머니께 도로 갖다 드리라고 한사코 주셔서 그 돈을 돌려받았다. 며칠 후 우리 교실에는 선생님을 닮은 예쁜 사각 거울이 교실 뒷벽에 걸리게 되었다.   선생님은 우리 학교에서 일 년을 근무하시고 같은 군 내에 있는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셨다. 전교생이 모인 운동장에서 이임사를 하시고 곧바로 교문을 걸어나가셨는데,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 역시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허우룩한 마음을 떨쳐 버릴 수 없어 오랫동안 가슴이 아팠다. 내 생애에 100여 명이 넘는 은사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지만 유독 공 선생님이 기억에 남고 가슴 속에 각인된 이유는 무엇일까?   2년 후면 한국을 방문하게 된다. 어쩌면 돌아가셨을지도 모르겠지만 수소문하여 ‘그때 그 선생님’을 꼭 한번 찾아뵐 계획이다. 그리고는 큰절을 올려야지…. 이진용 / 수필가수필 선생 교장 선생님 선생님 가까이 산수 수업시간

2023-11-16

"대학생때까지 선생님이 수년 간 성 학대" 소송

    한 여성이 라카냐다 플린트리지 소재 프렙 스쿨 재학 당시 수년 동안 한 교사로부터 성적 학대를 당했다고 밝혔다.   익명을 요구한 이 여성은 "어린 시절 그루밍 당하고 성적으로 학대 당했으며 이에 대해 학교 측은 나의 안전 보다는 학교 명성을 지키는 선택을 했다"고 말했다.   이 여성은 플린트리지 프렙 스쿨에 대해 소송을 제기하면서 재학 당시 한 교사와 수년 간에 걸쳐 관계를 맺었으며 여기에는 부적절한 성적 관계도 포함된다고 설명했다.   이 여성의 변호사는 자신의 고객이 그녀보다 두 배나 나이가 많은 남성의 관심을 견뎌내면서 그 속에서 그루밍과 희롱, 성추행, 학대 등이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해당 사건은 2013년부터 시작됐으며 피해 여성이 대학교에 진학한 뒤에도 이어지다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가 터지고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끝난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 여성은 지난 주 이 문제와 관련해 정식으로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면서 학교측이 두 사람의 부적절한 관계를 알고 있었음에도 학교 이미지를 고려해 그 같은 사실을 숨기는 것을 선택했다며 이에 대한 액수 미상의 피해보상액을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학교 측은 이 같은 주장에 대해 두 사람에 관한 소문을 인지한 직후 해당 교사를 임시 휴직 시켰고 LA 카운티 셰리프국에 알렸다고 밝혔다. 학교 측은 또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더 자세히 파악하기 위해 철저한 조사를 진행했고 그 결과에 근거해 해당 교사의 임용을 4월에 종료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피해 학생은 해당 조치가 10년 뒤에나 이뤄진 것은 너무 늦은 것이라며 그 기간 동안 전체 커뮤니티는 나를 지켜만 봤고 가해자를 멈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디지털본부 뉴스랩대학생때 선생 학대 소송 성적 학대 희롱 학대

2023-11-16

[기고] 한인 독립운동가 김종림 재평가 필요하다

2023년은 미주 한인 이민 120주년이자, 한국 공군의 상징적 기원이 되는 캘리포니아 소재 ‘윌로우스 비행학교’ 설립 103주년이 되는 해다. 미주 한인 독립운동가 가운데 도산 안창호,노백린,박희성,이용근 선생 등은 잘 알려져 있지만 윌로우스 비행학교 설립에 전폭적인 재정지원을 했던 김종림 선생의 생애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쌀농사로 부를 축적한 그의 재정 지원이 있었기에 비행학교 설립도 가능했다. 그런데 1920년 4월 문을 열었던 비행학교는 얼마 되지 않아 불운을 겪게 된다. 이맘때 쯤인 그해 11월 초 윌로우스 지역에 100년 만의 폭우가 쏟아지면서 후원자인 김종림의 쌀농사가 큰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비행학교 재정 지원에 어려움이 생긴 것이다.   김종림(1886~1973)은 대한인국민회,북미지방동지회 등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다. 하와이로 이민 와 1907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으며, 이후 유타주 솔트레이크시에서 철도 건설 노동자로도 일했다. 당시 공립협회에 가입했고 다시 캘리포니아주의 바실리아, 프레즈노,리들리 등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1908년 전명운, 장인환 의사의 스티븐슨 저격 의거가 일어나자 직접 공립신보 인쇄원이 되어 동포 사회에 이 소식을 알리기도 했다. 1909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 후엔 ‘대한인국민회’에서 활동했다. 대한인국민회는 1909년 2월1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박용만,이승만 등에 의해 창설된 미국 최대 독립운동 단체였다. 지난 2004년에는 기념재단이 출범해 지금도 선조들의 독립정신과 나라 사랑의 마음을 차세대에게 알리고 있다.     그는 1912년 무렵 프린스톤에서 벼농사를 시작했고 이후 윌로우스 지역으로 확대했다. 1914-1916년까지 계속된 풍년과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전쟁 특수로 인해 쌀값이 폭등하면서 김종림은 ‘쌀의 대왕’으로 불리우며 한인 최초의 백만장자 명성을 얻었다. 자연히 그는 지역사회 독립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1920년 초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전쟁의 해’를 선포하고 비행대 편성의 방침을 세웠다. 이 소식을 접한 김종림은 1920년 초 노백린 임시정부 군무총장을 만나면서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이자 한국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결정을 내린다. 공군 양성 계획에 흔쾌히 동참해 설립 자금 2만 달러와 월 3000달러의 운영비를 지원했다. 그해 6월에는 실제로 비행기 2대를 구입해 비행 실습훈련까지 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100년 만의 폭우로 쌀농사가 실패하면서 재정 지원에 차질이 생겼고 비행학교는 결국 문을 닫게 된다. 비록 짧은 기간 이었지만 윌로우스 비행학교는 조국 독립을 위한 가장 획기적인 발상과 실천을 한 것이었다   당시 공군을 양성해 일본군을 공격한다는 것은 다소 비현실적인 방법으로도 생각된다. 그러나 조국독립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용기 있게 행동으로 옮긴 선조들의 노력은 후손들에게 큰 자부심으로 기억된다.    사재를 털어 윌로우스 비행학교를 지원한  애국지사 김종림, 그리고 비행기 조종사가 되기 위해 죽음을 각오했던 대담하고 진취적인 조선 청년들의 기상에 우리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특기할 만한 점은 김종림은 주로 재정 지원을 담당하며  안창호계와 이승만계 양쪽 진영 모두에서 활약한 애국지사라는 점이다. 그의 목표는 오로지 조국의 독립이었으며, 어떤 경우에도 이를 포기하지 않고 행동함으로써 한인 사회에 희망을 주는 삶이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열정을 다한 그의 애국적 삶에 존경을 표하며, 그의 업적과 삶에 대해  좀더 적극적인 평가가 있어야 할 것이다. 심인태 / 공군전우회 LA지회장기고 독립운동가 김종림 김종림 선생 비행학교 재정 비행학교 설립

2023-11-05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나의 소중한 선생님

보물보다 소중한 게 마음이다. 사람의 마음이다. 부피나 무게로 따질 수 없다. 만질 수도, 화폭에 담을 수 없어도 기억의 창고 속에 마른 꽃잎의 그리움으로 남는다.   언제부터인가 리사가 달력이나 공책, 내 책상 캘린더에 ‘McFarland’라고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낙서인 줄 알고 내 달력에 장난치지 말라고 했다. 리사는 말을 참 잘 듣는다. 한 번 약속한 건 꼭 지킨다. 그런데도 그 이름을 집안 곳곳에 있는 빈 종이에 적었다. 바쁜 내 일상 때문에 리사의 낙서(?)는 한참 계속되었다.     코로나 팬데믹은 수 없는 목숨을 앗아갔지만 가정과 가족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깨닫게 한다. 큰 도시로 화랑 옮겨 크게 한판 벌려 보겠다던 허황된(?) 꿈을 접고 온라인 판매를 시작했다. 타인에게로 향하던 인생의 나침반을 오롯이 나 자신과 가족을 위해 고정시키니 사는 게 간단해졌다. 재물과 욕망, 권력과 명예의 헛된 망상의 뿌리를 자르니 사는 것이 편안해지고 리사와 눈 맞추고 즐기는 시간이 많아졌다.   리사는 다운증후군으로 태어났다. 만 하루만에 막힌 십이지장 수술을 받아 생명를 건지고 일곱살 때 심장판막 재생수술을 받았다. 팬타곤 좋은 직장을 마다하고 오하이오주로 온 것은 리사 교육 때문이다. Mongomery County는 특수교육이 선두를 달리는 곳이고 큰 도시보다 중소도시에서 리사를 키우는 것이 안전하다는 생각을 했다.     리사는 18개월부터 특수교육을 받고 장애아를 일반 학교에 합류시키는 Main Stream으로 일반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노란색 졸업모자 쓴 리사에게 다정한 눈길로 허리 굽혀 졸업장 주는 교장선생님과 리사는 당당하게 악수했다. 옹기종기 놓인 가족 사진 중 리사 졸업사진은 우리집 가보 1호다. 늘 즐겁고 착한 리사의 행복지수는 만점이다     리사는 내 수호천사다. 항상 내 곁을 지켜준다. 어릴 적엔 내가 리사를 지켰는데 지금은 리사가 날 보호해준다. 댕그랑 소리만 나도 “마미, 괜찮아?”라고 날 찿는다. ‘자라지 않는 아이’라는 내 글을 읽고 예전에 “지금은 힘들겠지만 리사가 곁에서 평생동안 지켜줄 거예요”라고 후배가 말했다. 애들이 각자 가정 꾸려 떠나간 빈 공터 같은 집에서 꽁무니 졸졸 따라 다니며 하루에 “사랑해”라고 백번은 더 종알거린다.   아! 이제는 리사가 ‘McFarland’이라고 집안 곳곳에 비밀처럼 적어둔 수수깨끼를 풀 시간이다. ‘맥 팔런’은 리사의 기억 속에 지울 수 없는 고등학교 선생님 이름이다. 리사는 “참 좋은 선생님이야. 정말 보고 싶어”라고 매일 그녀 이름을 부른다. 그동안 마음 속에 담아두고 얼마나 그리워했을까. 몇 년 전부터 여러모로 수소문해도 은퇴한 뒤라서 연락이 닿지 않았는데 특수교육담당자 친구의 어머니가 비슷한 이름이라는 제보를 받고 첩보원처럼 수색작전 펴서 연락이 닿았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을 만나는 리사의 행복은 현재진행형이다. 식당 예약하고 고등학교 때 입었던 Centerville ELKS가 찍힌 티셔츠도 구입했다. 리사는 잠을 설치며 다음 주를 손꼽아 기다린다.     연이은 교사들의 자살은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수치와 고마움, 옳고 그름을 가르치지 못하면 자식의 미래는 없다. 독불장군은 인생에서 패배한다. 사람이 사람을 키운다. 졸업식 때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라는 노래를 부를 때는 감격의 눈물이 핑 돌았다. 언제부터 배움의 터전이 이토록 사악해졌을까. 리사는 장애아로 태어났지만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돌봄으로 행복하게 자랐다. 스무해를 애타게 그리워하며 찿던, 리사 인생에 보석보다 더 빛나는 소중한 선생님! 당신이 있었기에 내 딸은 차별 없는 곳에서 사랑의 꽃을 피웠습니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선생 고등학교 선생님 특수교육담당자 친구 리사 졸업사진

2023-09-12

[김형석의 100년 산책] 6·25 때 잊지 못할 제자, 포로수용소에서 보내온 성경책

 6·25 전쟁이 중반을 넘어설 때였다. 몇 달 전에 나를 찾아왔던 두 군인 제자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감돼 있던 이군의 색다른 편지를 건네주었다. 제자들과 학생 때 겪었던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들이 남기고 간 큼직한 사무용 봉투를 뜯었다. 담배 냄새가 강하게 풍겼는데, 그 속에 이군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또 그가 여러 번 읽은 흔적이 있는 성경책도 있었다. 이군의 편지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선생님 감시·체포하라” 명령에 불복   “6월 25일 전쟁이 보도되면서 선생님과 마지막 헤어질 때 기억을 잊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 다시 만나기 어렵게 떠나는 우리 학생들을 끝까지 지켜 주시기를 바랍니다’는 눈물 머금은 기도입니다. 저는 상부의 지시를 받고 성경 공부보다는 선생님을 감시·보고하는 책임으로 참석하곤 했습니다. 2주쯤 지났을 때입니다. K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선생님을 감시하다가 10일 이내로 체포해 오라는 통고를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신촌에 있는 집까지 갔다가 돌아오고, 두 번째는 이화여대 김종필 목사 사모님의 얘기를 통해 선생님은 피란을 떠났고 가족들만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같은 명령이 계속될 것 같아 인민군에 자진 입대했습니다. 전선을 따라 이동하다가 국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거제도 수용소에 있을 때 수용소 외곽을 감시하는 국군 중에 이 편지를 전하는 중앙학교 친구를 발견했습니다. 후에는 또 한 친구를 만나 선생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동안 여러 가지 생각으로 고민하다가 귀순하고 국군으로 편입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두 차례 심사를 통과했습니다. 허락되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대한민국을 위한 충성스러운 군인과 국민이 되기를 결심했습니다. 선생님 옛날과 같이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수용소에서 읽던 성경책을 동봉했습니다.”   나는 나중에 이군이 진해 부근 국군 부대에 근무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휴전과 더불어 나는 부산 중앙학교 분교를 정리하고 서울 본교로 복귀했다. 경찰 정보 관계 사람이 찾아왔다. 그를 통해 몇 가지 사실을 알았다. 함경도 출신인 엄진기 선생과 나, 교련 장교로 있던 정 대위와 송 중위는 A급 반공 분자여서 체포·처형 대상이 되어 있었다.   B급 1번은 미국 주재 한국대사의 사위인 김상을 선생이었다. 중앙학교 좌파 책임자 남로당원은 지리 선생인데, 정치적 발언은 별로 하지 않는 조용한 성격이었다. 엄 선생은 좌파 학생들에 의해 체포되어 세상을 떠났다. 엄 선생의 두 아드님은 그 후 미국에서 한국 방송국 지사장을 하면서 반공 운동에 앞장섰다. 송 중위는 피신해 있다가 좌파 학생들에게 잡혀가 삼청동 숲속에서 피살되었다고 했다.       “공산주의자는 믿어서는 안 된다”   정 대위는 나와 같이 피란을 갔다. 정보기관 경찰은 나머지 반역을 한 선생들의 신분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나에게 “세상이 바뀌면 선생님만 불행해질 텐데 학생들에게 반공 얘기는 삼가는 것이 좋겠다”라고 걱정해 주었던 박 선생은 후에 경희대 교수가 되었다. “3개월 동안 서울에 머물면서 내 생각을 많이 했다”라는 불문과 선생은 “때가 오면 자결하려고 청산가리 독약을 지니고 있었다”라고 했다. 후에 고려대 교수가 되었다. 나와 함께 지내면서 들은 북한의 실정을 체험했다는 고백이었다. 좌파는 아니지만 성격이 과격했던 선생들이 앞장서 활동하다가 북으로 간 선생도 있었다.   다른 얘기다. 내가 오래 친분을 갖고 지낸 김여순 중고등학교 교장이 있다. 아끼는 제자가 좌파 선생의 지령을 받고 지내다가 경찰에서 조사받게 되었다. 김 교장이 직접 신분 보증을 서고 계속 사랑으로 키웠다. 아버지 같은 마음으로….   6·25가 터지자 제자가 찾아와 제가 끝까지 보호해 드릴 테니까 집에만 계시라고 부탁했다. 어떤 날 잠시 볼일이 있어 밖에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 제자가 집으로 들어가고 두 사람이 집 앞에 서성거리는 것을 보고 이상한 예감이 들어 피신했다. 후에 알아보니까 그 제자가 사복을 한 보안서원을 동반하고 집으로 왔던 것이다. 그다음부터 김 교장은 모든 사람과 제자는 믿을 수 있어도 공산주의자는 믿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서슴지 않았다.   북한 탈출한 황장엽씨의 고백   내가 1962년 유럽에 갔을 때는 공산당원을 자처하면서 선전하는 사람들이 어느 나라에나 있었다. 1972년에 갔을 때,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공산당에서 탈당했다는 지성인들을 자주 만났다. 20세기 말에는 유럽에서 공산주의자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상황이 달라졌다. 인간다운 삶을 원하는 사람은 진실과 인간애를 포기하면서 공산주의를 신봉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도 마찬가지 정치적 변화를 겪었다.   6·25 전쟁을 체험한 나와 같은 세대도 자유민주주의를 자연스럽게 따르고 있다. 북한에서 공산 치하를 살아 본 사람들은 같은 정치적 과정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자유와 인격의 가치를 염원하게 되면, 반공적 사명을 포기하지 못한다. 북한에서 정신적 지도자로 존경받던 황장엽씨도 인생 말년에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탈북했다.   그가 나에게 남겨 준 말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나는 한 번도 내 인생을 살아 보지 못했습니다. 북한 동포와 굶주리고 있는 어린애들을 위해서는 내 모든 것을 희생시켜도 아깝지 않습니다. 북한에서는 인간다운 삶이 사라진 지 오래됩니다”라는 고백이었다. 김형석 / 연세대 명예교수김형석의 100년 산책 포로수용소 성경책 선생님 감시 선생님 소식 엄진기 선생

2023-08-18

[김형석의 100년 산책] 나는 100세 넘었어도 외롭지 않다

부부가 함께, 그리고 오래 살아가는 백년해로(百年偕老)는 복 중의 복이다. 누구나 경험하는 사실이다. 해로하지 못한다면 누가 먼저 가는 것이 좋을까. 일률적인 해답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흔히 남자가 먼저 가는 편이 좋다고 말한다. 늙은 남자가 혼자 추하게 남는 것보다, 여자가 자녀들도 함께 있기를 원하고 가족애도 강하기 때문이다.     내 친구 부인이 남편에게 한 얘기를 전해 들었다. “여보,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당신을 먼저 보내드릴게. 김 교수님이 혼자 쓸쓸히 고생하는 것을 보니까, 사모님이 선생님을 혼자 남겨두고 가는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라는 것이다.   20년 전 먼저 간 아내 항상 생각   반대인 경우도 있다. 내 친구 김태길, 안병욱 교수는 아내보다 먼저 갔다. 두 부인은 연하이고 건강했는데, 남편들이 작고한 뒤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안 교수 부인이 예상보다 빨리 세상을 떠났기에 만일 안 선생 부인이 먼저 갔다면 안 선생은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내 경우도 생각해 본다. 아내를 먼저 보낸 지 20년이 되었다. 아내 생각은 언제나 떠오른다. 아들·딸이나 손주들이 모이면 자연히 어머니와 할머니 얘기를 한다.   대답은 간단한 것 같다. 사랑할 상대가 사라졌을 때 누구나 고독해진다. 다시는 그런 사랑이 불가능하다고 느껴졌을 때 고독은 절망이 된다. 절망은 정신적 종말, 죽음과 연결된다. 그런 고독은 남녀의 구별도 없고, 나이의 차이도 없다. 고독사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99의 악조건이 있다고 해도 사랑의 연결이 하나라도 있으면 고독과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90이 되면서 더 외로움을 느꼈다. 100세가 넘으니까 혼자 있어서는 안 되고 누군가의 도움이 간절해진다. 그것이 고령 노인들에게 주어지는 인생의 짐이다. 그래도 나는 그 고독을 극복해냈다고 생각한다.   그 원동력이 무엇이었을까. 일을 위하고 사랑하는 열정이었다. 누구보다 많은 일을 했다. 그 일에서 오는 위로와 보람이 고독한 심정과 시간의 공간을 채워주었다. 그 일은 보수나 소유를 위한 일이 아니었다. 학자로서 진실을 찾는 의무였고 제자들을 위하고 사랑하는 즐거움이었다. 대학을 떠난 후에는 친구들과 사회에 무엇인가 남겨주고 싶은 사명감 비슷한 것이었다. 일 많은 나라에 태어난 것에 감사했고, 많은 일이 주어지는 현실에서 보람을 느꼈다. 가족들을 위하는 책임도 있었으나, 중고등학교와 대학에 있을 때는 교육계를 위하는 책임이 항상 뒤따랐다. 무거운 짐이었으나 나름대로 사랑과 보람이 있었기에 행복했다.   90을 넘기고도 지금까지 주어진 일에 매달려 산다. 일에 대한 열정과 노력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돌이켜본다. 80까지는 내가 일을 찾았으나 그 후에는 사회가 나에게 일을 맡겨 주었다. 일한다는 것이 인간의 본분이며, 늙으면 인생의 가치를 풍요롭게 하는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좀 더 많은 사람이 노년기 인생을 위해 스스로 일하는 열성을 가지며, 정부와 사회가 노년기까지 일할 수 있는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다.   나이 들수록 필요한 또 한 가지 과제는 인간관계를 선하고 아름다운 방향으로 넓혀가는 일이다. 인생은 어떤 인간관계와 공동체 의식을 갖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노년기가 힘들다는 것은 인간관계가 좁아지며 공동체 의식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가정과 직장에서 즐거운 인간관계를 누리다가 늙으면서 더 넓혀가는 사람이 있고, 점차 좁아지고, 상실해 가기도 한다. 가족관계까지도 유지하지 못해 고독해지는 노인들이 생긴다. 그 책임의 반은 내게 있고, 반은 자립심을 상실한 노약자를 위한 정부와 사회의 도움 부족일 수도 있다.   옛날에는 노인정 같은 휴게시설이 있었다. 최근에는 경로 시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기 인생을 위해 준비하고 노력하는 각자의 책임이다. 종교단체를 비롯한 교양과 정신적 안정을 위한 기관과 시설도 있다. 노년기에 찾아 누릴 수 있는 행복은 선하고 아름다운 인간애를 주고받음에서 출발하고 열매를 맺는다.   요즘 시대의 장년기는 30~80세   지금 30대와 나의 30대를 비교하면 사회 모든 면에서 많은 변화가 생겼다. 청년기와 노년 기간이 짧아지고 장년 기간이 일생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 일하고 성장하며 인격을 키워가는 장년기는 30에서 80까지 차지한다. 평균수명도 길어졌고 건강수명도 높아졌다. 모두가 풍부한 정신적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선각자나 선구자는 되지 못해도 그런 사회에 적응하는 노력은 필수이다.   생활영역과 공간도 예상했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이런 변화와 발전에 적응하기 위해서라도 스스로 노령화를 앞당겨서는 안 된다. 나의 세대에서는 60을 노년기의 출발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도 80까지는 정신적으로 늙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장년기가 길어졌다는 것은 젊게 성장하고 일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는 뜻이다. 우리가 더 좋은 세상을 자율적으로 창조해 가는 것이 주어진 과제이고 희망이다. 김형석 / 연세대 명예교수김형석의 100년 산책 남녀노소 인간관계 노년기 인생 아내 생각 선생 부인

2023-07-07

[문화산책] 배우 이순재, 완성을 향한 열정

존경할 이가 자꾸 늘어난다. 스승이 많아지는 셈이니 반갑고 즐겁고 고맙다.   이번에는 원로배우 이순재 선생이다. 88세의 나이로 지난 6월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열연하여 큰 울림을 주었다. 이 공연을 계기로 최고령에 리어왕을 연기한 배우로 기네스북에 등재를 신청했다고 한다.   연극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바로 실감하겠지만,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그저 구순을 바라보는 노배우가 무대에 서서 주인공을 연기했다는 정도의 일이 아니다. ‘리어왕’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다양한 인간군상이 등장하는 대작이다. 특히, 이번 공연은 셰익스피어의 시적 언어가 품은 향취와 문학적 진수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원작을 각색하거나 압축하지 않고 무대에 올렸다고 한다. 그래서 공연시간이 무려 3시간 20분에 달한다.   배우들의 대사량이 엄청날 수밖에 없다. 특히 리어왕 역의 대사량은 살인적인데, 구순을 앞둔 노배우가 그 많은 대사를 몽땅 다 외워서 연기했다는 이야기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존경스럽다. 더구나 리어왕 역은 절대 군주에서 정신을 놓은 미친 노인으로 전락하는 폭넓은 연기로 극의 중심을 잡고 끝까지 이끌어가야 한다. 엄청난 체력과 집중력이 필요하다. 젊은 배우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이순재 주연의 ‘리어왕’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21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도 공연되었는데 전회차 전석 매진이라는 이례적인 기록을 세우며 호평받았다. 또한 지난해 12월에는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를 연출하는 등 누구보다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쉼 없이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1934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난 배우 이순재는 대한민국 연기 역사의 산증인이다. 서울대 철학과 재학 중에 서울대 연극반을 재건해 활동하며, 1956년 유진 오닐의 연극 ‘지평선 너머’로 데뷔했다. 이후 67년째 쉴 틈 없이 연기해왔다. 그동안 출연한 영화도 100편 이상, 연극도 100편 이상이고,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했다. 제14대 국회의원도 지냈다.   평균 시청률이 59.6%에 달했던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의 ‘대발이 아버지’,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으로 ‘야동 순재’라는 별명을 얻으며 열연해 큰 인기를 얻으며 대중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국민배우’다.   이순재 선생은 젊은 세대들로부터도 진정한 어른으로 평가받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후배들이 그를 존경하는 까닭은 완벽한 자기 관리와 완성을 향한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모범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나이 먹었다고 주저앉아 대우나 받으려는 것은 늙어 보이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이순재의 후배 사랑도 각별하다.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연예계 후배들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는 그는 “젊은 세대가 희망을 가지고 전진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드는 것이 우리 기성세대의 책임”이라고 역설한다.   한국 연극계에 이런 스승들이 계시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지난 2018년 요란했던 ‘미투 운동’으로 지도적 어른 여러 명이 날아간 뒤라 더욱 귀하게 빛난다. 이순재 선생보다 한 살 어린 연기자 신구 선생도 꾸준히 무대에 서며 모범을 보여 정말 고맙다. 이런 어른들 덕에 한국 연극이 튼튼하다.   명배우 이순재 선생이 열연하는 ‘리어왕’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이렇게 간접적으로라도 가르침을 얻을 수 있으니 정말 다행이다. 내가 제일 배우고 싶은 것은 완성을 향한 열정과 노력이다. 연기에 대한, 작품에 대한 그의 열정은 그 누구보다 젊고 강하다. 존경스럽다.   “완성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완성이 되지 못했다고 생각하기에 꾸준히 계속 노력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장소현 / 극작가·시인문화산책 이순재 배우 원로배우 이순재 이순재 선생 이순재 주연

2023-06-29

[이 아침에] 봄을 맞으며

홀로 산창에 기대서니 밤이 차가운데    (獨倚山窓夜色寒)   매화나무 가지 끝엔 둥근 달이 오르네   (梅梢月上正團團)   구태여 부르지 않아도 산들바람도 이니  (不須更喚微風至)   맑은 향기 저절로 뜨락에 가득 차네   (自有淸香滿院間)   퇴계 시 〈도산월야영매(陶山月夜詠梅)〉6수 중〈首一,〉   봄이다. 다시 또 봄이 왔다. 분명 봄은 어느 사이엔가 왔지만 여느 때처럼 간 것 같지 않게 가버릴 것이다. “아무리 환경을 오염시켜도 도시에 돌아오는 봄을 막을 수는 없다”는 ‘부활’의 첫 문장처럼 언제나 변함없이 꼭 오고야 마는 봄은 꽃을 피워냄으로 봄을 알린다. 그중에서도 매화는 동백과 함께 가장 먼저 오는 봄의 전령사다.     만물이 아직 겨울잠에서 깨기도 전에 눈 속에서 홀연히 피는 꽃이 설중매다. 청초하고 그윽한 향기를 품은 매화는 아무 나비나 와서 멋대로 앉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고상하고 우아한 꽃이다. 그런 매화의 곧은 절개에 반한 중국 송나라 시인 임포는 매화를 아내처럼 사랑했다고 한다. 이를테면 임포는 추운 눈 속에서도 꽃망울을 올려내는 매화의 고결한 정신을 사랑한 것이다.     매화 하면 떠오르는 한 사람이 또 있다. 바로 퇴계 이황 선생이다.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에 전력했던 이황 선생의 매화 사랑은 남달라서 임종 직전 제자에게 “매화에 물을 줘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유언을 지켜 물을 준 수제자는 바로 옆에서 간병을 돕던 간재 이덕홍이다.     퇴계는 죽을 때까지 92제 107수의 매화시를 썼는데 그중에서 62제 71수를 모아 ‘매회시첩’이라는 책을 냈다. 이 책을 보면 그의 매화 사랑은 참으로 유별나다. 매화 핀 가지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오래 바라보기를 즐겼다는 그는 과연 어떤 매력이 있었기에 그토록 매화를 아끼고 사랑했던 걸까? 분명 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물론 청아한 매화를 통해 올바른 삶을 살고자 함도 있었겠으나 그 배경엔 기생 두향이가 있었다는 것도 소문만은 아니다. 정비석의 ‘명기열전’에는 퇴계와 두향의 애틋한 사랑이 분명히 적혀있기 때문이다.   퇴계 선생이 48세의 나이에 단양군수로 갔을 때 두향은 19세의 관기였다. 그때의 관기는 사또를 보살피는 현지처나 다름없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연산군 폭정시절에 태어난 퇴계는 홀어머니 밑에서 경제적으로 어렵게 자란 데다 훗날 수많은 당파싸움을 겪으며 두 번째 부인까지 사별하는 아픔을 겪었던 사람이다. 이처럼 불운한 생활 속에서 대학자가 된 퇴계는 마땅히 정을 줄 곳이 없었던 터라 충분히 두향에게 정을 주고도 남을 만한 처지에 있었을 거라는 추측이다.     절세가인이었던 두향은 퇴계를 사모하여 가까이 모시길 자청했다고 한다. 그래서 퇴계가 매화를 좋아하는 걸 알고 잔칫날 선생에게 손수 기른 매분을 바치고 나서야 뻣뻣한 어른의 마음을 얻었다고 한다. 퇴계는 새 임지인 도산에 까지 매화를 옮겨서 지금껏 그 명맥을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어른을 떠나보내고 단양에 홀로 머물던 두향은 퇴계의 부음을 듣고 호수에 몸을 던져 자진했으며 현재 단양의 구담봉 맞은편 산자락에 무덤이 있어 아직도 사람들이 찾는다고 한다.   한편 ‘퇴계 언행록’이나 ‘퇴계문집’에 의하면 퇴계는 기생과의 접촉을 끝까지 거부한 선비였다고도 전해진다. 그가 왕명으로 평안도에 갔을 때 평안감사가 기생을 안겨주었으나 끝내 거절했다는 기록도 있다.     과연 어떤 것이 옮은지는 알 수 없으나 퇴계가 “매화는 춥더라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말을 평생 좌우명으로 삼고 살았다는 것과 매화를 여인 대하듯 다루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까치와 참새가 봄을 맞아 즐겁게 둥지를 만들기 시작하고 풀도, 나무도, 새도, 벌레도, 아이들도 모두 즐거워 보인다”는 ‘부활’의 문장처럼 온갖 초목에 물이 흐르고 싹이 트고 있다. 퇴계 선생이 매화의 향기를 아끼듯 봄을 아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정국희 / 시인이 아침에 매화 사랑 매화나무 가지 퇴계 선생

2023-03-10

[시조가 있는 아침] 갈매기

  ━   갈매기     -이태극 (1913-2003)   햇빛은 다사론데 물결 어이 미쳐 뛰나   뜨락 잠기락하여 바람마저 휘젓다가   푸른 선 아스라 넘어 날라 날라 가고나   온 국민이 코로나 사태로 인한 불안감   - 시조연구(1953)     ━   오늘의 시조단을 이룬 넉넉한 품     고시조를 집대성하고 현대시조를 이론과 작품으로 체계화한 월하 이태극의 데뷔작이다. 선생이 박병순, 한춘섭과 함께 엮은 『한국시조큰사전』(1985. 을지출판공사)에는 이 작품을 1952년 5월, 영도에서 지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 이전까지 선생은 서울대와 이화여대, 동덕여대에 출강하며 시조의 이론 연구에 몰두해오다가 6·25 동란을 맞아 40대 부산 피난 시절에 직접 시조를 창작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강원도 화천이 고향인 선생은 이 작품에서 교착상태에 빠진 전쟁의 광풍을 슬퍼하며 아스라한 평화를 그리고 있다. 따뜻한 봄, 거친 물결 위로 날아가는 갈매기의 모습을 중의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봄은 또 어찌 이리 넘기기가 힘든 것인가?   선생의 작품들은 자연을 소재로 하고 있으면서 서정적인 것이 특징이다. 시조의 전통적인 특성 가운데 하나인 자수율에 따른 율격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선생은 1960년 하한주, 조종현, 김광수와 더불어 ‘시조문학’을 창간, 현대시조의 재목들을 배출해 오늘의 시조단을 이루게 했다. 선생은 넉넉한 품으로 시조를 가르치셨다.   오늘날 평단에서 필봉을 드날리고 있는 이숭원 교수가 그의 외아들이다. 3회 추천완료제이던 1960년대와 70년대, 선생은 나를 4회 만에 천료(薦了) 시키셨다. 그만큼 오랜 훈도(薰陶)를 받았으니 나의 복이었다.   유자효 / 시인시조가 있는 아침 갈매기 창간 현대시조 고향인 선생 월하 이태극

2023-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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