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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광장] 고 김학송 선생 ‘헌정음악회’ 열었으면

대학시절 경춘선 완행열차에 기타 하나 둘러메고 친구들과 무작정 찾아갔던 강촌에 노래비 하나가 세워져 있어 소개해 드린다. 2005년 춘천시가 가로 4m, 세로 3.5m의 화강석으로 만든 노래비에는 다음과 같은 노랫말이 새겨져 있다.   ‘날이 새면 물새들이 시름없이 날∼으는/꽃피고 새가 우는 논밭에 묻혀서/씨 뿌려 가꾸면서 땀을 흘리고/냇가에 늘어진 버드나무 아래서/조용히 살고파라 강촌에 살고 싶네’     설강 김성휘 선생이 목가적인 북한강 수변 강촌천 주변의 풍경에 반해 만들었다는 가요 ‘강촌에 살고 싶네’ 1절 가사이다.   이 가요는 국민가수 나훈아가 1971년에 발표하여 한시대를 풍미한 ‘불후의 명곡’이 되었는데 이 노래를 작곡한 분이 LA의 원로 음악인 고 김학송 선생이다. 그는 1960~80년대 대한민국 가요계에서 작곡가, 작사가, 편곡가, 피아니스트, 악단장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며 수많은 명곡을 작곡했다. 그의 노래는 나훈아, 조용필, 조영남, 이상열, 최헌, 태진아, 송대관, 샌디김, 이미자, 김상희, 조미미, 방주연, 김부자 등 당대 인기 가수들에 의해 발표됐다. 그는 스타가수를 만드는 대 작곡가로 명성을 날린 음악인이었다.   선생님은 1981년 미국에 이민 와 90년대 초부터 LA 한인 사회에서 이인섭 선생과 함께 가요 아카데미를 운영하며 꾸준히 후배 음악인 양성에 주력했다. 그런 와중에 한인 사회를 위해 의미 있는 곡을 여러 편 발표했다. 2003년 미주 한인이민 100주년을 기념하는 곡 ‘백년의 함성’ (이인섭 작사/김학송 작곡)을 비롯해 4·29 LA 폭동을 겪으며 전 세계에 흩어져있는 750만 한인 디아스포라를 하나로 묶어준 노래 ‘한마음으로’ (이인섭 작사/김학송 작곡)를 만들었다. 또 역사적인 로즈퍼레이드 한인 꽃차 참가를 기념하는 꽃차 로고송 ‘하늘 높이 꽃차 타고’ (윤수경 작사/김학송 작곡)를 만들어 홍보에 크게 기여한 한인 사회의 소중한 문화예술인이었다.     1925년생인 선생님은 2016년 6월 별세했다. 내년은 선생님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 뜻깊은 해를 맞이하여 LA의 후배 음악인들이 중심이 되어 그의 음악인생 70년을 돌아보며 존경과 사랑의 마음으로 ‘헌정음악회’를 개최해 보자고 제안한다.     마침 이인섭 선생이 작사하고 선생님이 곡을 만드신 미발표 유작들이 여러 편 있어 내년 ‘헌정음악회’를 통해 발표된다면 더 뜻있는 무대가 되리라 생각한다. 이광진 / 문화기획사 에이콤 대표열린 광장 헌정음악회 김학송 김학송 작곡 이인섭 선생 김성휘 선생

2024-10-20

“고원 선생의 문학적 지평 확산”…13회 고원문학상 수상작 선정

고원기념사업회(회장 정찬열)가 주최하는 제13회 고원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됐다.     수상작으로 시 부문 이월란 시집 ‘바늘을 잃어버렸다’(시산맥), 수필 부문에서는 공순해 수필집 ‘울어다오’(에세이문학출판부)가 선정됐다.     심사를 맡은 임헌영 문학평론가는 “초기에는 시 부문에서만 수상자를 냈지만 5권의 고원문학전집 중 절반이 넘는 3권이 산문집일 정도로 고원 선생은 산문문학에서도 탁월한 선구성을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이어 “올해 시와 수필 두 부문에서 선정해 고원 선생의 문학적 지평 확산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이월란 시인과 공순해 수필가는 1980년대 후반에 미국으로 이주했다.     80년대 후반기에 삶의 터전을 미주대륙으로 옮겼지만, 그 이전 시대처럼 모국을 향한 애틋한 향수나 궁핍했던 성장시대의 추억담을 금과옥조로 삼지 않는다.     두 수상자의 작품은 60여 년 전에 미주에 첫발을 디뎠던 고원 선생의 창작방법론을 그대로 실현하고 있다. 또 작품 기법에서 감각적인 표현과 삶의 현장성에 대한 밀착도를 높여 독자들에게 한결 친밀하게 다가섰다.     수상 소감에서 이월란 시인은 “척박한 땅에서 이민 문학을 시작하신 고원 선생의 뜻을 기려 문학 사업을 이어가 글을 쓰고 발표할 수 있어 감사하다”며 “더 좋은 글을 써서 이민 문학과 미주 문학에 기여하겠다”고 밝혔다.     공순해 수필가는 “뉴욕문학동인회에서 고원 선생이 발간한 해외문학울림을 만났다”며 “고원문학상이 제정되고 13년이 흐른 지금 문학상을 받게 되어 감동의 울림이 더욱 깊다”고 밝혔다.     고원문학상은 고원 시인의 문학적 업적과 정신을 기리고 이를 후세에 계승하고 발전하기 위해 마련됐다.     ▶문의:(714)530-3111 이은영 기자고원문학상 수상작 고원문학상 수상작 고원문학상 수상자 고원 선생

2024-10-06

[아름다운 우리말] 우리 춤과 치유

우리 민족에 대한 중국 역사책의 설명을 보면 춤과 노래를 좋아하고, 술을 즐기며,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춤과 노래를 밤늦도록 즐긴다고 하는데 술이 빠질 수는 없을 겁니다. 이러한 음주 가무는 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장면에서 나옵니다. 제사는 엄숙하기만 한 행위가 아닙니다. 제사는 감사의 시간이기도 하고 위로의 시간이기도 하며, 치유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간절함이 마음의 병을 낫게 하고, 몸의 병을 고칩니다.     북소리와 함께 치유하는 부여의 영고(迎鼓), 하늘에 닿는 춤으로 치유하는 예의 무천(舞天)에서 우리는 이름만으로도 위로를 받습니다. 제사의 이름이 곧 음악이고, 춤입니다. 북소리를 듣는 사람도, 하늘도 감명을 받고, 하늘을 바라보면서 추는 춤에 희열을 맛봅니다. 제사는 그래서 다른 말로 하면 축제입니다. 모두가 모여 즐거우면 하늘에 우리의 뜻이 닿는 겁니다. 서로 감사하고, 서로 흥겹게 노래하고 뛰며 춤추면 그게 바로 축제이고 제사입니다.   우리 춤에 양반춤이라는 춤이 있습니다. 양반춤은 오광대놀이에서 양반을 풍자하기 위한 춤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양반탈을 쓰고,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양반춤에서 위로를 받았을까 하는 의심도 듭니다. 풍자가 시원하기는 하나 치유가 되지는 못하는 듯합니다. 오히려 양반춤은 양반이나 선비가 마음으로 추는 춤이어야 위로와 치유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양반춤을 선비춤이라고 바꾸어도 좋을 듯합니다. 양반에 대한 풍자보다는 선비의 마음속 여유와 깨달음을 보여주는 춤이라고나 할까요?   하긴 양반이라는 단어도 풍자의 뜻으로 쓰이지 않는다면 좋은 의미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그만하면 양반’이라든지 ‘양반 되기는 글렀다’는 말은 양반을 좋게 보는 표현입니다. 선비라는 말은 현세대에도 좋은 의미로 남아있습니다. 흰 도포 자락을 휘날리는 선비는 주로 글공부를 즐겨하고, 청렴한 사람으로 나옵니다. 물론 지나치게 경제관념이 없는 답답한 사람으로 묘사되기도 하죠. 하지만 선비정신이 우리를 지탱해 온 정신의 하나임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고, 돈에 휘둘리지 않는 마음이야말로 지금도 지켜야 할 가치입니다.   양반춤, 선비춤은 춤은 종류도 다양합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춤은 이종태 선생께서 추는 양반춤입니다. 이 춤은 바람 부는 대로,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덩실거립니다. 어깨춤에 활짝 펴는 부채 소리는 바람을 가릅니다. 한 마리 학처럼 한 발로 서기도 하고 뱅그르르 돌다가 훌쩍 뛰어오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걸음은 너울너울 인생길입니다. 춤이 멋들어집니다. 인생의 고갯길을 넘어온 춤입니다.   이종태 선생 춤의 백미는 표정에 있습니다. 제가 볼 때 이종태 선생의 춤은 얼굴로 추는 춤입니다. 세상살이를 잊고, 세상일에서 떠난 초월의 표정이며, 달관의 몸짓입니다. 자연스러운 웃음에 보는 이도 웃음 짓고, 함께 시름을 잊습니다. 보는 이도 어깨춤이 절로 납니다. 한을 담은 우리 춤이 많이 있습니다만, 달관의 경지를 보여주는 춤이라면 이종태 선생의 양반춤을 들고 싶습니다. 가볍지 않은 춤사위에, 인생을 담은 손짓, 희로애락을 지나는 걸음걸이는 우리 춤의 치유 효과를 보여줍니다. 도포 자락 휘날리며, 사뿐사뿐 걷는 걸음은 물욕 없는 선비의 청렴을 나타내는 듯합니다.   저는 이 춤을 보고 양반춤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우리 춤의 긍정적 효과네요. 1년 넘게 양반춤을 배우고 있지만 그 맛이 나오지 않습니다. 당연히 그 멋과도 거리가 멉니다. 무엇보다도 그 표정을 담기에는 가야 할 길이 아득합니다. 지난주 요양원에서 국악치유공연을 했습니다. 처음으로 저도 양반춤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네 명 중 한 명으로 참여한 것입니다. 다른 이의 모습에 가려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생각보다 많이 어색하지 않아서 안심하였습니다. 그런데 춤을 추는 동안 긴장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저도 모르게 표정도 자연스레 풀렸습니다. 뛰어오름도 가벼워졌습니다. 자연스러운 웃음도 나옵니다. 그 시간 세상일이 머릿속에 남지 않습니다. 춤을 마무리하면서 한 발로 서는데 흔들림이 없네요. 자연스러우니 몸이 가벼워집니다. 몸도 마음도 가벼워졌습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치유 양반춤 선비춤 치유 효과 이종태 선생

2024-09-29

[문화산책] 졸작, 졸필이라는 겸손함

문인들이 습관적으로 쓰는 말이 있다. 예를 들어 “글쓰기는 뼈와 살을 깎는 고통이다”라는 말, 이 말이 정말이라면 문인 중에는 살찐 사람이 없어야 한다. 계속 깎아대는데 언제 살찔 새가 있나….   졸작, 졸필, 졸저(拙著)라는 낱말도 그런 말 중의 하나다. “졸작 읽으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턱없이 모자라는 졸필로 책을 내려니 부끄러움이….”   스스로를 낮추고 겸손, 겸양하는 아름다운 말이다. 멋지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아무리 읽어도 그저 습관적인 멋 부리기 관용어로만 읽힌다. 왜냐하면 정말로 졸작, 졸필이라고 생각한다면 발표하지 않는 것이 맞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작가라면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 졸작, 졸필, 졸저를 내놓아 세상을 어지럽히고 더럽히는 것은 죄악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는 냉엄하지만, 읽는이들에게는 자신감을 가지고 당당하라고 말하고 싶다. 글쓴이가 자신 없이 주저주저 머뭇거리면, 읽는 이도 흔들리게 마련이다. 자신 없이 우물거리는 말에 설득당할 독자는 없다. 그야말로, 영혼을 불태운 글인지 대충대충 설렁설렁 쓴 글인지 독자는 금방 알아챈다. 믿음 없이 미사여구만 나열하는 기도나 마음 없이 대충 부르는 노래는 맥없이 허공을 맴돌다 스러진다.   그래서 나는 졸저, 졸필, 졸저 같은 낱말은 되도록 쓰지 말자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터무니없는 물건을 가지고 허세를 부리자는 말은 물론 아니다.   나 같은 ‘생계형 글쟁이’는 쓰임새에 맞는 글을 마감 날짜 넘기지 않고 쓰면 그만이지만, 훌륭한 예술작품의 경우는 그럴 수 없다. 끝도 없고 완성도 없다. 천하의 피카소도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은 한 번이라도 완성된 그림을 본 적이 있는가? 그림이라도, 다른 무엇이라도 상관없다. 당신이 ‘이제 완성이다’ 하고 중얼거렸다면, 당신은 끝장이다. 작품을 완성한다, 그림을 마무리 짓는다,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인가.”   피카소 선생의 말씀대로 완성이란 없다. 그렇다면 이제 작가에게 남는 것은, 세상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치열하게 최선을 다했는가, 스스로에게 참으로 정직했는가와 같은 자기 내면의 문제들일 것이다.   졸작이냐 걸작이냐, 어느 정도 수준이냐 하는 것은 그다음의 문제이고, 작가가 결정할 문제도 아니다. 그런 평가는 독자나 평론가, 학자들의 몫이다. 그러니, 작가가 나서서 미리부터 졸작, 졸필이라서 부끄럽다고 고개 숙이며 접고 들어갈 이유는 없다는 말이다. 그런다고 졸작이 명작이 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작품을 대하는 작가의 자세는 저마다 다르다. 정답이 있을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발표하면서 더 잘 쓰지 못한 것을 진심으로 부끄러워하는 문인도 많다. ‘광장’의 최인훈처럼 책으로 출판된 후에도 줄기차게 다시 읽고 고치는 작가도 있고, 카프카처럼 세상을 떠나면서 친구에게 자기 작품을 모두 불태워 달라고 부탁한 작가도 있다.   한편, 좋은 작품을 계속 발표하면서 평생 책을 내지 않은 문인도 있다. 김병현 시인이 그런 분이었다. 안타깝게 여긴 후배들이 뜻을 모아 유고시집을 내드렸다. 우리 남가주 문단에도 벌써 책을 내야 했는데, 아직 안 내는 실력파 중견 문인들이 적지 않다. 저마다 사정이야 다르겠지만,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작품을 발표해야 한다는 엄격함이 가장 큰 이유인 것 같다. 그런 분들의 겸손을 대하면 겁 없이 책을 많이 낸 내가 면구스러워지곤 한다.   나의 스승 김희창 선생님께서 주신 말씀을 되새긴다. “예술 앞에는 가장 겸손해야 하고, 사람 앞에는 가장 오만해야 합니다. 오만해야 붓을 들 수 있는 것이고, 겸손해야 좋은 예술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졸필’ 끝!!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졸작 졸필 졸작 졸필 졸저 졸필 피카소 선생

2024-09-05

[오픈 업] 자살하는 선생님들

미국 뉴스에도 한국 선생님들의 자살 사건이 크게 보도됐다. 한국 언론을 통해 알고 있던 터라 놀라지는 않았지만 한국인의 자살 소식이 세계로 퍼져 나간다니 찹찹한 심정이다.   무엇보다 좋지 않은 일로 선생님을 잃은 아이들의 미래가 걱정된다. 어린아이들은 학교에서 선생님처럼 되려고 노력 하면서 교육이 이루어진다. 많은 초등학생이 선생이 되고 싶어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어린이들이 교육을 받으려면 ‘집행 기능 능력(executive function)’이라 불리는 사고 기능이 필요하다. 이 기능은 태어날 때부터 두뇌 안에 가능성이 존재한다. 마치 언어 습득 가능성이 두뇌 안에 존재하는 것과 같다.       갓난아기는 갑자기 엄마가 보이지 않으면 큰 소리로 울어댄다. 존재의 위협에 반응하는 본능적 행동이다. 그러다가 생후 6개월이 되면, 엄마를 찾아 울기 전에 엄마가 마지막으로 있던 곳을 쳐다본다고 한다. 즉, 자신의 감정을 조절해서 잠깐 참았다가, 그래도 엄마가 안 보이면 울기 시작한다. 아기는 이미 감정 조절을 할 수 있는 집행 기능 능력을 길렀고, 이것은 두뇌 전두엽의 발달이 진행되고 있음을 뜻한다.     갓난아기의 두뇌에는 어른 두뇌의 90%에 해당하는 뇌세포(neuron)가 이미 존재한다. 뇌세포는 여러 가지 경험을 하면서 크기에 변화가 오고, 뇌세포들을 연결하는 시냅스의 숫자가 증가한다.   6개월 된 아기는 ▶반응 억제(response inhibition) ▶주의 집중 (sustained attention) ▶기능에 필요한 기억(working memory) ▶감정 조절(emotional control) 등 4가지 집행 기능 능력을 갖추게 된다. 이 능력에 의해서 아기는 가까이 가거나 피하는 행동(Approach/Avoidance behavior)이 가능해진다. 어린이는 집행 기능인 ‘반응 시작/반응 억제(Responnse initiation/ Response inhibition)’를 통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을 배우고,이는 학교 교육에 중요한 기능이 된다. 부모가 이 기능을 잘 길러준 아이는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만 학대를 받았거나 다른 상처로 인해 이 기능을 훈련받지 못한 아이는 뇌 구조에 변화가 올 수 있다. 집행 기능 능력이 떨어진 어린이나 청소년은 학교에서 문제 행동을 일으키게 된다.   따라서 이런 학생에겐 특별한 도움이 필요하다. 보조 교사, 카운슬러, 또는 특수 교육반 교육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러한 도움이 없이 선생님 혼자서 문제아와 일반 아이들을 동시에 가르치기는 어렵다.     필자가 카이저에서 근무하던 시절, 의료 보험이 없는 한인들을 위해 교회 사무실에 ‘라이프 케어 센터’라는 정신과 클리닉을 운영했었다. 그런데 이곳을 찾는 한인 환자의 약 70%가 ADHD(주의력 결핍 및 과잉 행동 장애) 질환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이 자신에게 이런 질병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가정폭력, 아동학대, 알코올중독 또는 심한 우울 증상으로 찾아 왔다가, ‘들어본 적도 없는 이상한 병’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간혹 자녀 문제로 왔다가 자신에게도 똑같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한국의 초등학교 교실에 감정 조절, 주의 집중, 반응 억제 등 집행 기능 능력이 떨어지는 학생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는 선생님은 적당한 체벌과 칭찬을 통해 문제 학생을 통제하며 다른 학생도 교육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선생님을 비난하기보다 학교나 교육청 차원에서 아이들이 집행 기능을 기르도록 도와야 마땅하다. 만약 아이의 문제가 ADHD라는 두뇌의 질병이면 정신과에 데리고 가서 치료를 받게 해야 한다.   하지만 미국의 한인 부모들도 선생님들이 자녀의 정신과 진단과 치료를 권하면, 그중 반 정도만 이를 따른다. 그리고 아이의 행동에 대한 질문지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또는 “아주 조금 있다”로 표시한다. 한국의 부모들도 자녀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고, 선생님에게 화살을 돌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아이들의 두뇌는 25세까지 계속 성숙한다. 비록 어린 시절에 어떤 이유로 집행 능력을 키우지 못했었더라도 좋은 선생님이나 상담사를 만나면 좋아질 수 있다. 부모와 교육 관계자들이 힘을 합해 아이들의 집행 능력을 길러주자. 선생님은 아이들이 존경하고 닮고 싶어하는 역할 모델이다. 그들이 행복하고 희망에 찬 모습으로 아이들의 등불이 될 수 있게 하자. 수잔 정 / 소아정신과 전문의오픈 업 자살 선생 집행 기능인 한국 선생님들 문제 행동

2024-08-13

[문화산책] 물처럼 낮은 곳으로…

하늘의 별이 된 ‘아름다운 사람’ 김민기는 새벽마다 ‘아침이슬’이 되어 우리를 찾아온다. 이슬, 아주 작고 영롱한 물이다.   ‘좋은 사람’ 김민기가 남긴 가장 소중한 가르침은 스스로를 ‘뒷것’으로 낮추는 마음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리고, 그 가르침은 지금 이 순간에도 매우 절실하다. 아무 데서나 앞에 나서서 설쳐대는 쓰레기 인간들이 넘쳐나는 이 세상에 김민기의 낮고 굵은 목소리는 엄청난 죽비다.   ‘뒷것’이라는 낱말을 대하면 ‘노자 도덕경’의 물이 떠오른다. 상선약수(上善若水), 모든 것이 잘 이루어지도록 섭리하면서도, 자기를 전혀 드러내지 않고, 낮은 데로만 흘러 고인 바다 같은….   상선약수 편을 찾아 읽노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나도 물처럼 살았으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양한 해설이 있는데, 김민기가 아버지처럼 모신 장일순 선생은 이렇게 풀이했다.   “가장 착한 것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잘 이롭게 하면서 다투지 않고, 뭇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   장일순 선생이 강조한 가르침 중에 “밑으로 기어라”라는 말씀이 있다. 사람들 밑으로 기면서 섬겨 모시는 마음 없이는 참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노자의 물이나 민기의 ‘뒷것’과 같은 뜻이다.   물처럼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두가 그렇게 물의 덕성을 닮으려 애쓰며 산다면 세상이 한결 푸근하고 촉촉해질 텐데….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겸손, 막히면 돌아가는 지혜, 더러움을 받아내는 포용력, 어떤 그릇에도 담기는 융통성, 바위도 뚫어내는 인내와 끈기, 폭포와 같은 용기, 유유히 흘러 바다에 이르는 대의 등을 물의 칠덕(七德)이라 부른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매우 지혜롭고 훌륭한 가르침이다.   물의 덕성은 도가사상의 중요한 핵심이다. 그래서 ‘노자 도덕경’ 여러 곳에서 물을 이야기한다. 가령, 세상에 물보다 더 부드럽고 여린 것은 없지만, 단단하고 힘센 것을 치는데 물을 이길만한 것이 없다는 가르침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렇게 부드럽고 여린 물이 화를 내면 대단히 무섭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세월호 참사, 해병대 채상병 비극을 둘러싼 추잡한 소용돌이…. 이런 비극을 극복하고 물의 화를 달래기 위해서는 모두가 서로 다투지 말고 스스로를 낮춰야 한다. 그것이 노자의 가르침이다.   혹시 가장 낮아지려고 서로 다투는 희비극이 벌어지지는 않을까? 천만에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가장 낮은 곳의 물은 평평하다. 다툴 필요가 없다.   세상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자기 공을 전혀 내세우지 않고, 낮은 데로만 흐르는 겸손, 스스로를 낮추는 자세를 배우고 싶다. 지극히 당연한 것이 통하지 않는 세상에서 그 지극히 당연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몸 바쳐 희생하는 사람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그런 사람, 그런 지도자가 그립다.   김민기의 ‘뒷것’이라는 낱말이 새삼스레 감동으로 스며드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그런 우직스러운 사람들 덕분에 그나마 세상이 돌아간다는 걸 우리는 잊고 산다. 물이나 공기의 고마움을 잊고 사는 거나 마찬가지다. 세상은 그런 사람다운 사람을 바보나 미련한 자로 낮잡아보며 함부로 대한다. 나도 그랬다. 부끄럽다.   아무튼,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마음을 비우고 조용히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는 시간이 그립고 아쉽다. 낮은 데로만 흘러 고인 바다…   끝으로 실없는 농담 한마디. 나는 스스로를 낮추는 데 유리하다. 키가 매우 짧기 때문에….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노자 도덕경 고인 바다 장일순 선생

2024-08-01

[문화산책] 내 영혼의 집은 어딘가?

책을 읽다가 ‘영적 홈리스’라는 낱말 앞에서 딱 멈추었다. 나도 ‘영적 홈리스’가 아닐까? 라는 고약한 생각에 심각해진 것이다. 내 영혼의 집은 어딘가?   노숙자 문제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다. LA같은 대도시는 그야말로 치명적인 골칫거리다.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나빠지는데 대책은 거의 없는 답답한 현실이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낱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우스 리스’가 아니고 ‘홈 리스’다. 생존과 사랑의 문제, 생명의 문제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걱정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물질적 공간의 문제가 고작이다. ‘홈리스’의 아픔을 돌보기까지는 멀고도 멀었다. 정신세계에선 더 말할 것도 없다.   내 영혼의 집은 어딘가? 현실적으로 가장 근본적이고 많은 대답은 신앙일 것이다. 교회에 가서 열심히 기도하고, 절에 가서 절하는 일…. 하지만 그것으로 끝일까? 그럴까? 성직자가 아닌 사람이 언제나 절대자에 기대어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 영혼의 집은 어디인가? 내 마음의 고향은? 혹시 예술이 영혼의 안식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야무진 꿈을 꾸어보지만 이 또한 충분치 않다.   내 영혼의 집, 내 마음의 고향은 어디인가?   “몸이 많이 아팠던 작년 겨울 어느 날, 그가 서재에 있는 어머니 사진 앞에 망연히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 죽음이 바짝바짝 쫓아오는 그 암담한 시기에도 어머니는 여전히 그의 기댈 언덕이었던 모양이다. 아내도 자식도 도움이 되지 못하는 그런 절박한 시간에 그는 어머니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어령 선생의 부인 강인숙 관장이 고인을 기리며 쓴 책 ‘만남’의 한 구절이다. 기독교 세례를 받기 전의 이어령 선생에게 어머니는 신성(神性)을 지닌 절대적 존재였다는 것이다. 선생의 어머니는 그가 11세 소년일 때 돌아가셨다. 그러니까, 몸은 70년 전에 떠나가셨지만, 어머니는 평생 아들의 영혼의 집, 마음의 고향으로 살아 있었던 것이다.   강인숙 관장이 돌아가신 친정어머니를 어느새 잊어가는 자신을 한탄하자, 이어령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감동적이다.   “걱정 마, 어머니는 다시 돌아와. 와서 영원히 안 떠나셔.”   어머니를 구원의 상징으로 그린 예술작품은 많다. 러시아 한인(韓人) 화가 변월룡(1916~1990) 화백의 어머니 초상화도 좋은 예다. 그는 죽기 얼마 전에 어머니를 그렸다. 이미 40년 전에 세상 떠나신 어머니를 그림으로 살려냈다. 울면서 그렸다, 미술전문가들이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 이 그림은 변월룡 화백의 거의 마지막 작품이다. 화가는 이 그림을 그린 지 얼마 안 돼서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5년 뒤 숨졌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어머니를 그린 것이다.   화가 변월룡은 러시아 최고의 레핀미술대학을 수석 졸업하고, 이 대학의 정교수가 된 당대 최고 수준의 화가이며, 리얼리즘 미술에서는 단연 한국 최고의 작가로 꼽히는 존재였다.   그가 그리움을 담아 그린 ‘어머니’는 참으로 많은 것을 말해준다. 화가는 왜 말년에 오래전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렸을까? 그림 맨 밑 오른쪽 귀퉁이에 한글로 ‘어머니’라고 적었다. 평생 타향살이를 한 화가에게 어머니는 고국과도 같은 말일 것이다. 디아스포라 예술가에게 어머니는 조국 같은 존재다.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든다. 비틀비틀 흐느적거리며 거리를 헤매는 ‘홈리스’들에게 잠시라도 어머니를 떠올리게 해주면 정신 차리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혹시 예술이 그런 일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야무진 헛꿈인가?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영혼 어머니 초상화 어머니 사진 이어령 선생

2024-06-06

[문화산책] 100살 되신 푸른 하늘 은하수

“푸른 하늘 은하수… 첫 창작 동요가 100살이 됐어요.”   아동문학가 황영애 선생께서 카톡으로 알려주셨다. 아, 반달, 계수나무, 토끼가 어느새 100살이 되셨구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린 시절로 돌아가 ‘반달’을 흥얼거렸다. 어린 시절에 배우고 익힌 동요의 힘은 이렇게 강하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그루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윤극영(1903년-1988년) 선생이 노랫말을 쓰고 곡을 지은 ‘반달’은 1924년에 발표된 조선 최초의 동요다. 21세 청년 윤극영이 지은 이 노래는 일제강점기 나라를 잃고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방황하는 민족의 애달픈 운명을 달래주었다.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는 2절 끝부분 노랫말에서 알 수 있듯 일제강점기 어린이들에게 꿈과 용기와 희망을 주는 항일 동요다.   이 노래는 발표되자마자 전국 방방곡곡에서 어린이뿐만 아니라 남녀노소 모두에게 애창됐다. 당시 학교에서 우리말 노래를 부르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나 ‘반달’은 워낙 호응이 컸던데다, 일본인들까지 따라 부르는 바람에 당국은 금지를 해제할 수밖에 없었다고 전한다. 한반도는 물론 일본과 중국에 있는 조선인들에게도 빠르게 보급되었다. 윤극영 선생조차도 그렇듯 짧은 세월에 그렇게까지 널리 퍼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고 훗날 회상했을 정도였다.   이 노래가 오늘날까지도 애창되는 ‘겨레의 노래’로 남은 이유를 좀 더 깊이 알고 싶어서 자료들을 열심히 찾아보니,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가령 ‘반달’ 작곡에 얽힌 사연도 그렇다.   윤극영 선생에게는 10년 위의 누님 한 분이 있었는데, 경기도 가평으로 시집을 갔다. 그런데, 그 누님의 시집이 가세가 기울어 늘 가난 속에서 힘든 시집살이를 하느라 10년이 퍽 넘도록 한 번도 집에 오지 못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토록 보고 싶던 누님의 죽음 소식을 들은 윤극영은 집 근처 공원으로 가서 밤새도록 울고 또 울었다. 그 새벽에 그가 하늘에서 본 것이 반달이었다. 은하수 같은 엷은 구름 너머로 하얀 반달이 비스듬히 걸려있고, 그 멀리로 샛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외롭게 뜬 달을 보니 누이 잃은 슬픔에, 우리 민족의 서글픈 운명까지 겹쳐서 눈물이 핑 돌았다. 그 순간 노랫말과 곡조가 떠올랐다고 한다. 나라 잃고 방황하는 민족적 비운을 그린 동요 ‘반달’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동요’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쓰인 것도 이때부터라고 한다.   방정환 선생은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는 윤극영에게 “자신만을 위한 음악 공부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장차 나라를 이끌어갈 어린이들이 부를 노래를 만들어라”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윤극영은 평생토록 뜻을 함께했다.   윤극영 선생은 자신의 이상을 펼치느라 해외 유랑생활도 많이 했고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그러면서도 어린이들의 꿈을 위해 동요를 만들어냈다.   ‘반달 할아버지’ 윤극영 선생은 ‘반달’을 비롯하여 ‘설날’ ‘고기잡이’ ‘고드름’ ‘따오기’ 등 400여곡을 작곡하였고, 방정환, 정순철 등 동료들과 어린이 문화재단 ‘색동회’를 조직하여 어린이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앞에서 말한 대로, 어린 시절 배운 동요의 기억은 늙지 않고 평생을 간다. 미주 한인사회에도 우리 아이들이 신나게 부르고 평생 기억할 좋은 동요가 많았으면 좋겠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반달’을 흥얼거리다 보니, 문득 권길상 선생이 떠오른다. 디아스포라의 쓸쓸한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줄 우리 노래 짓는 일에 힘쓰던 모습이 그립다. 내년 2025년이 권길상 선생 10주기다. 뜻깊은 행사들이 많이 열리기를 바란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은하수 하늘 하늘 은하수 윤극영 선생 반달 계수나무

2024-05-02

[문화산책] 사람은 크게 살아야 한다

“사람은 크게 살아야 한다. 그걸 잊지 마라.”   우현 고유섭 선생이 제자이자 후배인 황수영 박사에게 한 말씀이다. ‘고유섭 평전’을 읽다가 이 구절에서 오래 멈춰서 많은 생각을 했다. “크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 앞에 참 아주 부끄럽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의 삶은 ‘크다’는 말과는 거리가 멀었다. 멀어도 한참 먼 조무래기로만 가까스로 살아왔다. 그러니 부끄럽지 않을 수가 없다.   우현 고유섭(1905-1944) 선생은 개성부립박물관 관장을 역임하며, 한국미술사의 초석을 다진 선구적 학자였다. 그것도 일제강점기라는 어려운 현실에서 “짓밟힌 민족자존을 되찾기 위해 민족미술사를 홀로 개척해나간 선구자”다.   “우현은 가장 비범했고 가장 열정적인 개척자였으며 가장 고독했던 문화독립운동가였다. 그는 민족혼을 지킨 불멸의 혼이다.” 그러니까, 고유섭 선생의 ‘큰 삶’이란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미술사 확립을 통해 민족적 자존심을 되찾으려는 개척자의 삶이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우리 조선의 예술이 일본보다 우월하다는 걸 증명하고 가야지…. 우리에겐 독창적이며 빛나는 문화예술이 있다.” 그 독창적이며 빛나는 우리의 미술사를 바르게 정리한 책을 쓰는 것이 선생의 꿈이었다. 그 꿈을 위해, 죽는 순간까지 치열하게 글을 쓰셨다.     안타깝게도 우현은 1944년 6월에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한국미술사 집필을 완성하지 못했다. 해방을 앞두고 타계했으니, 더욱 안타깝다. 올해가 타계 80주년 되는 해다.   비록 한국미술사를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남긴 학문적 업적은 실로 대단하다. 그 기초를 디딤돌로 삼아 후학들의 연구가 이어져 왔다. 그리고 ‘개성 3인방’이라고 일컬어지는 황수영, 최순우, 진홍섭 같은 훌륭한 미술사학자를 제자로 길러 한국미술사 연구의 기초를 마련한 것도 선생의 큰 업적이다.   황수영 박사는 한국 불교미술사의 최고 석학으로 동국대학교 박물관장과 총장을 역임하며 많은 학문적 업적을 남겼고, 최순우 관장은 국립박물관 관장으로 우리 문화재의 보존과 재조명에 앞장섰다. 진홍섭 박사는 국립박물관 초대 개성분관장과 이화여대 박물관장으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세 분 모두 우현 선생의 학문적 기초 위에서 자기 학문 세계를 펼쳐나갔다.   크게 살기 위해서는 세상을 넓게 보고, 깊게 생각하는 눈과 마음을 가져야 한다. 특히, 역사 공부에서는 긴 안목과 깊은 시각이 반드시 필요하다. 망원경과 현미경을 동시에 갖춰야 하고, 객관성과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우현 선생 말씀대로 역사학자는 큰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크게 사는 것이 중요하지만, 사람 자체에 크고 작음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 누구에게나 장점과 단점이 있게 마련이고, 그 장점과 단점을 평균하면 사람의 크기는 대개가 어슷비슷하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아주 특별하게 타고난 사람이 아닌 다음에는 큰 차이가 없다고 믿고 싶다.   불교계에서 영향력이 막강했던 법정 스님은 ‘큰 스님’이라는 말을 들으면 늘 손사래를 치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고 전한다. “큰 스님? 그럼 작은 스님도 있는가? 대추기경이 있고 소추기경이 있고 그런 건가?”   옳으신 말씀이다. 하지만, 우현 선생의 “크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도 절실하다. 큰 사람이 많아야 우리 세상이 아름답고 건강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라도 조금이나마 크게 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하지만, 참 어려운 일이다. 나는 더 어렵다, 워낙 키가 작아서….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한국미술사 집필 한국미술사 연구 우현 선생

2024-03-28

[열린광장] 오현경 선생님 영전에 부쳐

한국 연극계의 거목 오현경 선생님이 지난 3월 1일,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는 비보를 접했습니다. 2016년 한국 방문 때 선생님과의 마지막 만남이 생각납니다.   미국에서 반가운 사람이 왔다며 약수동 자택으로 저를 불러 손수 점심을 요리해 주시고 오후에는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뒷편에 있는 ‘송백당’을 안내해 주셨습니다. ‘송백당’은 연극인들의 발음과 화술 교육을 위해 선생님이 사비를 들여 개관한 곳입니다. 그때 “지난 3년간 송백당을 거쳐 간 배우가 100여 명이 넘는다”고 어린아이처럼 웃으시며 기뻐하시던 것이 생전에 뵌 마지막 모습이 되었습니다.   오현경 선생님!   생각해보면 선생님은 LA 연극인들도 무척이나 사랑하셨던 분이었습니다.  2000~2010년대에는 부인인 윤소정 선생님과 함께 2, 3년에 한 번씩은 LA를 방문하곤 하셨습니다. 그때마다 저에게 고국 연극계의 생생한 소식을 전해 주셨고, 때로는 고국 극단들과의 가교역할도 해주셨습니다. 그 덕에 저는 한국 최고의 수준 높은 연극을 초청해 한인 사회에 소개하는 기쁨을 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또한  LA 방문 중에 한인 연극인들의 공연이 있으면 꼭 찾아와 함께 축하하고 격려금을 주시기도 했습니다. 한인 배우들의 발음을 위해 어려운 시간을 내 워크숍도 열어 주셨던 선생님의 자상하신 모습을 이곳 연극인들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오현경 선생님!   선생님은 66년간 행복한 연극인이었습니다. 연극인으로 활동하며 대한민국연극대상 남자 연기상, 한국문화대상 연극부문 대상, 서울시연극상, 동아연극상, 서울연극제 남자 연기상 ,KBS 연기대상 등 많은 상을 받았고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도 활동했습니다. 삶과 예술이 모두 빛나는 행복한 분이었습니다.     LA에서 선생님과 나눴던 얘기 가운데 잊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건강이 좋아지고 주변 여건이 조성되면 한미합작으로 한국정통해학극 ‘맹진사댁 경사’를 오현경 연출, 에이콤 기획으로LA 무대에 올리자는 것이었습니다. 전무송, 이호재, 정동환 등 한국 연극계의 스타들과 LA 연극인들이 함께 무대를 만들면 뜻깊을 것이라며…. 그러나 그 바람은 영원히 미완으로 남은 채 2023년 선생님의 유작 ‘한여름 밤의 꿈’ 속 마지막 대사처럼 “자, 저는 이만 갑니다” 를 남기고 먼 길을 떠나셨네요.   연극을 종교처럼 가슴에 품고 살았던 오현경 선생님!   이제 대한민국 연극은 자랑스러운 후배들에게 맡기시고 7년 전 먼저 떠나신 윤소정 선생님과 함께 대학로 마로니에 거리를 환히 비추는 큰 별이 되어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광진 / 문화기획사 에이콤 대표열린광장 오현경 선생 오현경 선생님 윤소정 선생님 오현경 연출

2024-03-17

[문화산책] 할리우드 한류의 선구자 오순택 선생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숨기지 말고 그대로 표현하세요.”   에미상 시상식에서 넷플릭스 드라마 ‘성난 사람들(BEEF)’로 작품상과 감독상, 남우주연상과 여우주연상 등 8관왕을 수상한 이성진 감독의 말이다. 데뷔했을 때에는 ‘어떻게 하면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글을 쓸까’ 고민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설명이다.   한국계 영화인들이 할리우드의 영화제에서 트로피를 싹쓸이하는 통쾌한 장면을 보면서 어깨가 절로 으쓱해진다. 그것도 한두 번에 그치지 않고, ‘미나리’ ‘오징어게임’ ‘기생충’에 이어 ‘성난 사람들’ ‘전생’ 등으로 계속되니, 그야말로 할리우드가 우리의 앞마당이 된 듯한 느낌이다. 격세지감이 든다.   이처럼 자랑스러운 현실을 대하면서 나는 배우 고 오순택(1932-2018) 선생을 떠올린다. 한평생 그렇게 바라던 꿈이 이루어진 현실을 하늘나라에서 내려다보며 기뻐하고 있으시려나…. 오늘날의 영광이 있기까지 필립 안, 오순택 같은 선구자들의 외롭고 힘겨운 도전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고 있다.   배우 오순택은 명실공히 최초의 한류스타 연기자이다. 지난 2018년 4월 오순택 선생이 세상을 떠났을 때, 뉴욕타임스(NYT)는 장문의 부고 기사를 실어, 그의 삶을 조명하고 평가했다. 그의 존재가 그만큼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배우 오순택은 아시아계 배우들의 영역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했다. 40여년간 영화와 TV에서 꾸준히 활동했고… (줄임)… 고인의 도전이 할리우드를 문화적으로도 더 풍부하게 만들었다.”   이런 성취가 한층 빛나는 까닭은 투철한 예술가 정신과 투쟁의 결과라는 사실이다. 그저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할리우드는 유럽 영화계와는 달리 오랫동안 외국인들에게는 난공불락의 성벽이었다. 백인우월주의의 둑이 무너지기 전까지 아주 오랫동안 그래왔다. 아시아계나 한국계 연기자가 할리우드에서 배우로 성공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오순택 선생은 이렇게 표현했다. “할리우드에서 아시안 배우로 생활한다는 것은 산에서 고래를 찾고 바다에서 호랑이를 찾는 일과도 같다.”   나는 운이 좋아서 배우 오순택 선생과 가깝게 지내면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은 할리우드에서 차별과 싸우며 활동하면서도, 당장 눈앞의 인기나 성공보다는 한국인의 자긍심을 소중하게 여기는 자세다.   예를 들면, 대중들에게 빨리 쉽게 기억되려면 영어식 예명을 사용하는 것이 유리했을 텐데, 그러지 않고 한국 이름 ‘Soon-Tek Oh’를 그대로 사용했다.   그런가 하면, 아시안을 비하하는 배역은 아무리 조건이 좋아도 맡지 않는 등 한국인 배우로서 자존심을 지켰다. 그 당시 할리우드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아시안의 역할이 많지 않았고, 있다고 해도 멋진 배역은 별로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배역을 골라서 맡는다는 것은 상당한 용기와 신념이 필요한 일이었다. 오순택은 끝까지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   무엇보다도 감사한 것은 오순택 선생이 할리우드 진출을 꿈꾸는 후배들이 자신처럼 험한 가시밭길을 걷지 않도록 돕고 이끄는 일에 앞장섰다는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돕는 것은 물론이고, ‘한미극협’ ‘전통연기자협회’ 같은 극단을 만들어서 적극적으로 후배를 양성했다.   그에 그치지 않고, 말년에는 한국으로 돌아가 대학에서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를 전수해 후배들에게, 그가 경험했던 어려움과 아픔을 겪지 않도록,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교육에 힘썼다. 발판 다지기에 헌신한 것이다.   한류 열풍이 어느 날 하늘에서 툭 떨어진 것이 아니다. 한류의 모든 분야에 고마운 선구자들의 땀과 눈물이 스며있다. 그런 선배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오늘의 한류를 한층 건강하게 해줄 것이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할리우드 할리우드 한류 오순택 선생 선구자 오순택

2024-02-01

[수필] 그때 그 선생님

그때가 1964년이었으니까 60년 전 충청도에서 초등학교 3학년 때 일이다. 세 개의 마을을 합쳐 보았자 100가구도 안 되는 작은 시골 마을 학교였다. 대학을 갓 졸업한 공 선생님이 우리 반 담임으로 부임하셨는데 우리 학교가 초임지였다. 굉장한 미인이셨는데 선생님 가까이에 가면 향기가 났다. 나는 선생님의 그 향기가 참으로 좋았다. 나중에 커서 선생님처럼 예쁜 여자와 결혼하고 싶다는 마음을 먹기도 했다.     왜 그랬는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선생님은 나를 무척 귀여워해 주셨다. 햇볕이 따스한 봄날 너무 배가 고파 나무에 돋아난 새싹을 따 먹으려 나무에 올라갔다가 가지가 부러지는 바람에 떨어져 왼쪽 팔이 부러졌다. 읍내 병원에 가서 깁스붕대를 하고 학교를 이틀 결석했는데 선생님도 보고 싶고 공부도 하고 싶어 안달복달하였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학교에 가서 교문 콘크리트 기둥 뒤에 숨어서 살며시 교실 쪽을 살피다가 선생님께 들켰다. 선생님은 운동장으로 걸어 나와 내 쪽으로 오시더니 손목을 잡고 교실로 들어가 “여러분도 공부에 열의가 있는 진용이를 닮아야 한다”고 칭찬해 주셨다.   하루는 체육 시간을 끝내고 교실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으며 바지 속 주머니를 뒤져 보았더니 갖고 있던 10원짜리 지폐가 없어졌다. 소녀 가장인 누나가 공책 사라고 준 돈이었는데 그 돈이면 공책 서너 권을 살 수 있었다. 나는 훌쩍거리며 선생님께 알렸다. 선생님은 온갖 방법으로 범인 색출 작업에 나섰다. “전부 눈을 감아라. 아무런 문제도 삼지 않을 테니 돈을 가져간 사람은 살짝 눈을 떴다 감거라.” 애가 탈 정도로 달래 보기도 하고 윽박지르기도 하셨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선생님은 좋은 방법이 있다며 교실을 나가신 후 잠시 후 조그만 빈 항아리를 들고 오셨다. 아마 학교 옆에 있는 교장 선생님 사택에서 빌려 오신 듯 했다. “지금부터 한 사람씩 나와서 항아리 속에 손을 넣었다 빼거라. 돈을 안 가져간 사람은 아무 일이 없겠지만 돈을 가져간 사람은 이 속에 손을 넣었다 빼면 그 손이 서서히 썩어들어 가게 된다”고 겁을 주며 으름장을 놓으셨다.   모두 씩씩하게 나가서 항아리 속에 손을 넣었다. 내 짝꿍 차례가 되었는데 녀석이 주저하더니 항아리 속에 손을 넣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면서 ‘으앙’ 울음을 터뜨렸다. 선생님은 이렇게 슬기로운 지혜로 돈을 가져간 사람을 찾아낸 것이었다.   어느 날 셋째 산수 수업시간에 ‘드르륵’ 교실 문이 열리며 난데없이 어머니가 들어 오셨다. “이진용 어미인데 공부하는 것 좀 보러 왔다”고 하시자 선생님께서 반갑게 맞이하시며 뒤쪽에 의자를 갖다 놓고 어머니를 앉히셨다. 그리고 나를 나오라고 하시며 칠판에 산수 문제를 몇 문제 적어 놓으시고 나보고 풀어보라고 하시기에 나는 쉽게 답을 썼다. 선생님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만족해하셨고, 어머니는 아들이 대견스러워 흡족해하셨다.   수업이 끝나자 어머니가 선생님 앞으로 나가시더니 돌아서서 몸빼 속에 껴입은 고쟁이 주머니에서 50원짜리 지폐 한장을 꺼내 “선생님! 이 교실에 거울이 없는데 이 돈으로 거울을 사 놓으시라”고 선생님 손에 쥐여 주시려 하자, 선생님은 화들짝 하시며 손사래 치셨다. 모든 학생이 주시하고 있으니 민망하셨는지 계속된 어머니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할 수 없이 받으셨다. 수업이 끝나고 하교 시간에 “진용이는 교실에 남아 있거라”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누런 편지 봉투 속에 그 50원짜리 지폐를 담아 돌려주시면서 “너는 아버지도 안 계셔 가정 형편이 어려운데 이 돈을 받을 수 없다. 내가 월급을 타면 거울을 꼭 사서 걸어 놓을 테니 어머니께 도로 갖다 드리라고 한사코 주셔서 그 돈을 돌려받았다. 며칠 후 우리 교실에는 선생님을 닮은 예쁜 사각 거울이 교실 뒷벽에 걸리게 되었다.   선생님은 우리 학교에서 일 년을 근무하시고 같은 군 내에 있는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셨다. 전교생이 모인 운동장에서 이임사를 하시고 곧바로 교문을 걸어나가셨는데,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 역시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허우룩한 마음을 떨쳐 버릴 수 없어 오랫동안 가슴이 아팠다. 내 생애에 100여 명이 넘는 은사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지만 유독 공 선생님이 기억에 남고 가슴 속에 각인된 이유는 무엇일까?   2년 후면 한국을 방문하게 된다. 어쩌면 돌아가셨을지도 모르겠지만 수소문하여 ‘그때 그 선생님’을 꼭 한번 찾아뵐 계획이다. 그리고는 큰절을 올려야지…. 이진용 / 수필가수필 선생 교장 선생님 선생님 가까이 산수 수업시간

2023-11-16

"대학생때까지 선생님이 수년 간 성 학대" 소송

    한 여성이 라카냐다 플린트리지 소재 프렙 스쿨 재학 당시 수년 동안 한 교사로부터 성적 학대를 당했다고 밝혔다.   익명을 요구한 이 여성은 "어린 시절 그루밍 당하고 성적으로 학대 당했으며 이에 대해 학교 측은 나의 안전 보다는 학교 명성을 지키는 선택을 했다"고 말했다.   이 여성은 플린트리지 프렙 스쿨에 대해 소송을 제기하면서 재학 당시 한 교사와 수년 간에 걸쳐 관계를 맺었으며 여기에는 부적절한 성적 관계도 포함된다고 설명했다.   이 여성의 변호사는 자신의 고객이 그녀보다 두 배나 나이가 많은 남성의 관심을 견뎌내면서 그 속에서 그루밍과 희롱, 성추행, 학대 등이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해당 사건은 2013년부터 시작됐으며 피해 여성이 대학교에 진학한 뒤에도 이어지다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가 터지고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끝난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 여성은 지난 주 이 문제와 관련해 정식으로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면서 학교측이 두 사람의 부적절한 관계를 알고 있었음에도 학교 이미지를 고려해 그 같은 사실을 숨기는 것을 선택했다며 이에 대한 액수 미상의 피해보상액을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학교 측은 이 같은 주장에 대해 두 사람에 관한 소문을 인지한 직후 해당 교사를 임시 휴직 시켰고 LA 카운티 셰리프국에 알렸다고 밝혔다. 학교 측은 또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더 자세히 파악하기 위해 철저한 조사를 진행했고 그 결과에 근거해 해당 교사의 임용을 4월에 종료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피해 학생은 해당 조치가 10년 뒤에나 이뤄진 것은 너무 늦은 것이라며 그 기간 동안 전체 커뮤니티는 나를 지켜만 봤고 가해자를 멈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디지털본부 뉴스랩대학생때 선생 학대 소송 성적 학대 희롱 학대

2023-11-16

[기고] 한인 독립운동가 김종림 재평가 필요하다

2023년은 미주 한인 이민 120주년이자, 한국 공군의 상징적 기원이 되는 캘리포니아 소재 ‘윌로우스 비행학교’ 설립 103주년이 되는 해다. 미주 한인 독립운동가 가운데 도산 안창호,노백린,박희성,이용근 선생 등은 잘 알려져 있지만 윌로우스 비행학교 설립에 전폭적인 재정지원을 했던 김종림 선생의 생애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쌀농사로 부를 축적한 그의 재정 지원이 있었기에 비행학교 설립도 가능했다. 그런데 1920년 4월 문을 열었던 비행학교는 얼마 되지 않아 불운을 겪게 된다. 이맘때 쯤인 그해 11월 초 윌로우스 지역에 100년 만의 폭우가 쏟아지면서 후원자인 김종림의 쌀농사가 큰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비행학교 재정 지원에 어려움이 생긴 것이다.   김종림(1886~1973)은 대한인국민회,북미지방동지회 등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다. 하와이로 이민 와 1907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으며, 이후 유타주 솔트레이크시에서 철도 건설 노동자로도 일했다. 당시 공립협회에 가입했고 다시 캘리포니아주의 바실리아, 프레즈노,리들리 등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1908년 전명운, 장인환 의사의 스티븐슨 저격 의거가 일어나자 직접 공립신보 인쇄원이 되어 동포 사회에 이 소식을 알리기도 했다. 1909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 후엔 ‘대한인국민회’에서 활동했다. 대한인국민회는 1909년 2월1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박용만,이승만 등에 의해 창설된 미국 최대 독립운동 단체였다. 지난 2004년에는 기념재단이 출범해 지금도 선조들의 독립정신과 나라 사랑의 마음을 차세대에게 알리고 있다.     그는 1912년 무렵 프린스톤에서 벼농사를 시작했고 이후 윌로우스 지역으로 확대했다. 1914-1916년까지 계속된 풍년과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전쟁 특수로 인해 쌀값이 폭등하면서 김종림은 ‘쌀의 대왕’으로 불리우며 한인 최초의 백만장자 명성을 얻었다. 자연히 그는 지역사회 독립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1920년 초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전쟁의 해’를 선포하고 비행대 편성의 방침을 세웠다. 이 소식을 접한 김종림은 1920년 초 노백린 임시정부 군무총장을 만나면서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이자 한국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결정을 내린다. 공군 양성 계획에 흔쾌히 동참해 설립 자금 2만 달러와 월 3000달러의 운영비를 지원했다. 그해 6월에는 실제로 비행기 2대를 구입해 비행 실습훈련까지 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100년 만의 폭우로 쌀농사가 실패하면서 재정 지원에 차질이 생겼고 비행학교는 결국 문을 닫게 된다. 비록 짧은 기간 이었지만 윌로우스 비행학교는 조국 독립을 위한 가장 획기적인 발상과 실천을 한 것이었다   당시 공군을 양성해 일본군을 공격한다는 것은 다소 비현실적인 방법으로도 생각된다. 그러나 조국독립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용기 있게 행동으로 옮긴 선조들의 노력은 후손들에게 큰 자부심으로 기억된다.    사재를 털어 윌로우스 비행학교를 지원한  애국지사 김종림, 그리고 비행기 조종사가 되기 위해 죽음을 각오했던 대담하고 진취적인 조선 청년들의 기상에 우리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특기할 만한 점은 김종림은 주로 재정 지원을 담당하며  안창호계와 이승만계 양쪽 진영 모두에서 활약한 애국지사라는 점이다. 그의 목표는 오로지 조국의 독립이었으며, 어떤 경우에도 이를 포기하지 않고 행동함으로써 한인 사회에 희망을 주는 삶이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열정을 다한 그의 애국적 삶에 존경을 표하며, 그의 업적과 삶에 대해  좀더 적극적인 평가가 있어야 할 것이다. 심인태 / 공군전우회 LA지회장기고 독립운동가 김종림 김종림 선생 비행학교 재정 비행학교 설립

2023-11-05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나의 소중한 선생님

보물보다 소중한 게 마음이다. 사람의 마음이다. 부피나 무게로 따질 수 없다. 만질 수도, 화폭에 담을 수 없어도 기억의 창고 속에 마른 꽃잎의 그리움으로 남는다.   언제부터인가 리사가 달력이나 공책, 내 책상 캘린더에 ‘McFarland’라고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낙서인 줄 알고 내 달력에 장난치지 말라고 했다. 리사는 말을 참 잘 듣는다. 한 번 약속한 건 꼭 지킨다. 그런데도 그 이름을 집안 곳곳에 있는 빈 종이에 적었다. 바쁜 내 일상 때문에 리사의 낙서(?)는 한참 계속되었다.     코로나 팬데믹은 수 없는 목숨을 앗아갔지만 가정과 가족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깨닫게 한다. 큰 도시로 화랑 옮겨 크게 한판 벌려 보겠다던 허황된(?) 꿈을 접고 온라인 판매를 시작했다. 타인에게로 향하던 인생의 나침반을 오롯이 나 자신과 가족을 위해 고정시키니 사는 게 간단해졌다. 재물과 욕망, 권력과 명예의 헛된 망상의 뿌리를 자르니 사는 것이 편안해지고 리사와 눈 맞추고 즐기는 시간이 많아졌다.   리사는 다운증후군으로 태어났다. 만 하루만에 막힌 십이지장 수술을 받아 생명를 건지고 일곱살 때 심장판막 재생수술을 받았다. 팬타곤 좋은 직장을 마다하고 오하이오주로 온 것은 리사 교육 때문이다. Mongomery County는 특수교육이 선두를 달리는 곳이고 큰 도시보다 중소도시에서 리사를 키우는 것이 안전하다는 생각을 했다.     리사는 18개월부터 특수교육을 받고 장애아를 일반 학교에 합류시키는 Main Stream으로 일반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노란색 졸업모자 쓴 리사에게 다정한 눈길로 허리 굽혀 졸업장 주는 교장선생님과 리사는 당당하게 악수했다. 옹기종기 놓인 가족 사진 중 리사 졸업사진은 우리집 가보 1호다. 늘 즐겁고 착한 리사의 행복지수는 만점이다     리사는 내 수호천사다. 항상 내 곁을 지켜준다. 어릴 적엔 내가 리사를 지켰는데 지금은 리사가 날 보호해준다. 댕그랑 소리만 나도 “마미, 괜찮아?”라고 날 찿는다. ‘자라지 않는 아이’라는 내 글을 읽고 예전에 “지금은 힘들겠지만 리사가 곁에서 평생동안 지켜줄 거예요”라고 후배가 말했다. 애들이 각자 가정 꾸려 떠나간 빈 공터 같은 집에서 꽁무니 졸졸 따라 다니며 하루에 “사랑해”라고 백번은 더 종알거린다.   아! 이제는 리사가 ‘McFarland’이라고 집안 곳곳에 비밀처럼 적어둔 수수깨끼를 풀 시간이다. ‘맥 팔런’은 리사의 기억 속에 지울 수 없는 고등학교 선생님 이름이다. 리사는 “참 좋은 선생님이야. 정말 보고 싶어”라고 매일 그녀 이름을 부른다. 그동안 마음 속에 담아두고 얼마나 그리워했을까. 몇 년 전부터 여러모로 수소문해도 은퇴한 뒤라서 연락이 닿지 않았는데 특수교육담당자 친구의 어머니가 비슷한 이름이라는 제보를 받고 첩보원처럼 수색작전 펴서 연락이 닿았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을 만나는 리사의 행복은 현재진행형이다. 식당 예약하고 고등학교 때 입었던 Centerville ELKS가 찍힌 티셔츠도 구입했다. 리사는 잠을 설치며 다음 주를 손꼽아 기다린다.     연이은 교사들의 자살은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수치와 고마움, 옳고 그름을 가르치지 못하면 자식의 미래는 없다. 독불장군은 인생에서 패배한다. 사람이 사람을 키운다. 졸업식 때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라는 노래를 부를 때는 감격의 눈물이 핑 돌았다. 언제부터 배움의 터전이 이토록 사악해졌을까. 리사는 장애아로 태어났지만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돌봄으로 행복하게 자랐다. 스무해를 애타게 그리워하며 찿던, 리사 인생에 보석보다 더 빛나는 소중한 선생님! 당신이 있었기에 내 딸은 차별 없는 곳에서 사랑의 꽃을 피웠습니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선생 고등학교 선생님 특수교육담당자 친구 리사 졸업사진

2023-09-12

[김형석의 100년 산책] 6·25 때 잊지 못할 제자, 포로수용소에서 보내온 성경책

 6·25 전쟁이 중반을 넘어설 때였다. 몇 달 전에 나를 찾아왔던 두 군인 제자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감돼 있던 이군의 색다른 편지를 건네주었다. 제자들과 학생 때 겪었던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들이 남기고 간 큼직한 사무용 봉투를 뜯었다. 담배 냄새가 강하게 풍겼는데, 그 속에 이군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또 그가 여러 번 읽은 흔적이 있는 성경책도 있었다. 이군의 편지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선생님 감시·체포하라” 명령에 불복   “6월 25일 전쟁이 보도되면서 선생님과 마지막 헤어질 때 기억을 잊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 다시 만나기 어렵게 떠나는 우리 학생들을 끝까지 지켜 주시기를 바랍니다’는 눈물 머금은 기도입니다. 저는 상부의 지시를 받고 성경 공부보다는 선생님을 감시·보고하는 책임으로 참석하곤 했습니다. 2주쯤 지났을 때입니다. K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선생님을 감시하다가 10일 이내로 체포해 오라는 통고를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신촌에 있는 집까지 갔다가 돌아오고, 두 번째는 이화여대 김종필 목사 사모님의 얘기를 통해 선생님은 피란을 떠났고 가족들만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같은 명령이 계속될 것 같아 인민군에 자진 입대했습니다. 전선을 따라 이동하다가 국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거제도 수용소에 있을 때 수용소 외곽을 감시하는 국군 중에 이 편지를 전하는 중앙학교 친구를 발견했습니다. 후에는 또 한 친구를 만나 선생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동안 여러 가지 생각으로 고민하다가 귀순하고 국군으로 편입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두 차례 심사를 통과했습니다. 허락되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대한민국을 위한 충성스러운 군인과 국민이 되기를 결심했습니다. 선생님 옛날과 같이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수용소에서 읽던 성경책을 동봉했습니다.”   나는 나중에 이군이 진해 부근 국군 부대에 근무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휴전과 더불어 나는 부산 중앙학교 분교를 정리하고 서울 본교로 복귀했다. 경찰 정보 관계 사람이 찾아왔다. 그를 통해 몇 가지 사실을 알았다. 함경도 출신인 엄진기 선생과 나, 교련 장교로 있던 정 대위와 송 중위는 A급 반공 분자여서 체포·처형 대상이 되어 있었다.   B급 1번은 미국 주재 한국대사의 사위인 김상을 선생이었다. 중앙학교 좌파 책임자 남로당원은 지리 선생인데, 정치적 발언은 별로 하지 않는 조용한 성격이었다. 엄 선생은 좌파 학생들에 의해 체포되어 세상을 떠났다. 엄 선생의 두 아드님은 그 후 미국에서 한국 방송국 지사장을 하면서 반공 운동에 앞장섰다. 송 중위는 피신해 있다가 좌파 학생들에게 잡혀가 삼청동 숲속에서 피살되었다고 했다.       “공산주의자는 믿어서는 안 된다”   정 대위는 나와 같이 피란을 갔다. 정보기관 경찰은 나머지 반역을 한 선생들의 신분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나에게 “세상이 바뀌면 선생님만 불행해질 텐데 학생들에게 반공 얘기는 삼가는 것이 좋겠다”라고 걱정해 주었던 박 선생은 후에 경희대 교수가 되었다. “3개월 동안 서울에 머물면서 내 생각을 많이 했다”라는 불문과 선생은 “때가 오면 자결하려고 청산가리 독약을 지니고 있었다”라고 했다. 후에 고려대 교수가 되었다. 나와 함께 지내면서 들은 북한의 실정을 체험했다는 고백이었다. 좌파는 아니지만 성격이 과격했던 선생들이 앞장서 활동하다가 북으로 간 선생도 있었다.   다른 얘기다. 내가 오래 친분을 갖고 지낸 김여순 중고등학교 교장이 있다. 아끼는 제자가 좌파 선생의 지령을 받고 지내다가 경찰에서 조사받게 되었다. 김 교장이 직접 신분 보증을 서고 계속 사랑으로 키웠다. 아버지 같은 마음으로….   6·25가 터지자 제자가 찾아와 제가 끝까지 보호해 드릴 테니까 집에만 계시라고 부탁했다. 어떤 날 잠시 볼일이 있어 밖에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 제자가 집으로 들어가고 두 사람이 집 앞에 서성거리는 것을 보고 이상한 예감이 들어 피신했다. 후에 알아보니까 그 제자가 사복을 한 보안서원을 동반하고 집으로 왔던 것이다. 그다음부터 김 교장은 모든 사람과 제자는 믿을 수 있어도 공산주의자는 믿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서슴지 않았다.   북한 탈출한 황장엽씨의 고백   내가 1962년 유럽에 갔을 때는 공산당원을 자처하면서 선전하는 사람들이 어느 나라에나 있었다. 1972년에 갔을 때,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공산당에서 탈당했다는 지성인들을 자주 만났다. 20세기 말에는 유럽에서 공산주의자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상황이 달라졌다. 인간다운 삶을 원하는 사람은 진실과 인간애를 포기하면서 공산주의를 신봉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도 마찬가지 정치적 변화를 겪었다.   6·25 전쟁을 체험한 나와 같은 세대도 자유민주주의를 자연스럽게 따르고 있다. 북한에서 공산 치하를 살아 본 사람들은 같은 정치적 과정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자유와 인격의 가치를 염원하게 되면, 반공적 사명을 포기하지 못한다. 북한에서 정신적 지도자로 존경받던 황장엽씨도 인생 말년에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탈북했다.   그가 나에게 남겨 준 말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나는 한 번도 내 인생을 살아 보지 못했습니다. 북한 동포와 굶주리고 있는 어린애들을 위해서는 내 모든 것을 희생시켜도 아깝지 않습니다. 북한에서는 인간다운 삶이 사라진 지 오래됩니다”라는 고백이었다. 김형석 / 연세대 명예교수김형석의 100년 산책 포로수용소 성경책 선생님 감시 선생님 소식 엄진기 선생

2023-08-18

[김형석의 100년 산책] 나는 100세 넘었어도 외롭지 않다

부부가 함께, 그리고 오래 살아가는 백년해로(百年偕老)는 복 중의 복이다. 누구나 경험하는 사실이다. 해로하지 못한다면 누가 먼저 가는 것이 좋을까. 일률적인 해답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흔히 남자가 먼저 가는 편이 좋다고 말한다. 늙은 남자가 혼자 추하게 남는 것보다, 여자가 자녀들도 함께 있기를 원하고 가족애도 강하기 때문이다.     내 친구 부인이 남편에게 한 얘기를 전해 들었다. “여보,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당신을 먼저 보내드릴게. 김 교수님이 혼자 쓸쓸히 고생하는 것을 보니까, 사모님이 선생님을 혼자 남겨두고 가는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라는 것이다.   20년 전 먼저 간 아내 항상 생각   반대인 경우도 있다. 내 친구 김태길, 안병욱 교수는 아내보다 먼저 갔다. 두 부인은 연하이고 건강했는데, 남편들이 작고한 뒤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안 교수 부인이 예상보다 빨리 세상을 떠났기에 만일 안 선생 부인이 먼저 갔다면 안 선생은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내 경우도 생각해 본다. 아내를 먼저 보낸 지 20년이 되었다. 아내 생각은 언제나 떠오른다. 아들·딸이나 손주들이 모이면 자연히 어머니와 할머니 얘기를 한다.   대답은 간단한 것 같다. 사랑할 상대가 사라졌을 때 누구나 고독해진다. 다시는 그런 사랑이 불가능하다고 느껴졌을 때 고독은 절망이 된다. 절망은 정신적 종말, 죽음과 연결된다. 그런 고독은 남녀의 구별도 없고, 나이의 차이도 없다. 고독사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99의 악조건이 있다고 해도 사랑의 연결이 하나라도 있으면 고독과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90이 되면서 더 외로움을 느꼈다. 100세가 넘으니까 혼자 있어서는 안 되고 누군가의 도움이 간절해진다. 그것이 고령 노인들에게 주어지는 인생의 짐이다. 그래도 나는 그 고독을 극복해냈다고 생각한다.   그 원동력이 무엇이었을까. 일을 위하고 사랑하는 열정이었다. 누구보다 많은 일을 했다. 그 일에서 오는 위로와 보람이 고독한 심정과 시간의 공간을 채워주었다. 그 일은 보수나 소유를 위한 일이 아니었다. 학자로서 진실을 찾는 의무였고 제자들을 위하고 사랑하는 즐거움이었다. 대학을 떠난 후에는 친구들과 사회에 무엇인가 남겨주고 싶은 사명감 비슷한 것이었다. 일 많은 나라에 태어난 것에 감사했고, 많은 일이 주어지는 현실에서 보람을 느꼈다. 가족들을 위하는 책임도 있었으나, 중고등학교와 대학에 있을 때는 교육계를 위하는 책임이 항상 뒤따랐다. 무거운 짐이었으나 나름대로 사랑과 보람이 있었기에 행복했다.   90을 넘기고도 지금까지 주어진 일에 매달려 산다. 일에 대한 열정과 노력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돌이켜본다. 80까지는 내가 일을 찾았으나 그 후에는 사회가 나에게 일을 맡겨 주었다. 일한다는 것이 인간의 본분이며, 늙으면 인생의 가치를 풍요롭게 하는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좀 더 많은 사람이 노년기 인생을 위해 스스로 일하는 열성을 가지며, 정부와 사회가 노년기까지 일할 수 있는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다.   나이 들수록 필요한 또 한 가지 과제는 인간관계를 선하고 아름다운 방향으로 넓혀가는 일이다. 인생은 어떤 인간관계와 공동체 의식을 갖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노년기가 힘들다는 것은 인간관계가 좁아지며 공동체 의식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가정과 직장에서 즐거운 인간관계를 누리다가 늙으면서 더 넓혀가는 사람이 있고, 점차 좁아지고, 상실해 가기도 한다. 가족관계까지도 유지하지 못해 고독해지는 노인들이 생긴다. 그 책임의 반은 내게 있고, 반은 자립심을 상실한 노약자를 위한 정부와 사회의 도움 부족일 수도 있다.   옛날에는 노인정 같은 휴게시설이 있었다. 최근에는 경로 시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기 인생을 위해 준비하고 노력하는 각자의 책임이다. 종교단체를 비롯한 교양과 정신적 안정을 위한 기관과 시설도 있다. 노년기에 찾아 누릴 수 있는 행복은 선하고 아름다운 인간애를 주고받음에서 출발하고 열매를 맺는다.   요즘 시대의 장년기는 30~80세   지금 30대와 나의 30대를 비교하면 사회 모든 면에서 많은 변화가 생겼다. 청년기와 노년 기간이 짧아지고 장년 기간이 일생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 일하고 성장하며 인격을 키워가는 장년기는 30에서 80까지 차지한다. 평균수명도 길어졌고 건강수명도 높아졌다. 모두가 풍부한 정신적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선각자나 선구자는 되지 못해도 그런 사회에 적응하는 노력은 필수이다.   생활영역과 공간도 예상했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이런 변화와 발전에 적응하기 위해서라도 스스로 노령화를 앞당겨서는 안 된다. 나의 세대에서는 60을 노년기의 출발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도 80까지는 정신적으로 늙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장년기가 길어졌다는 것은 젊게 성장하고 일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는 뜻이다. 우리가 더 좋은 세상을 자율적으로 창조해 가는 것이 주어진 과제이고 희망이다. 김형석 / 연세대 명예교수김형석의 100년 산책 남녀노소 인간관계 노년기 인생 아내 생각 선생 부인

2023-07-07

[문화산책] 배우 이순재, 완성을 향한 열정

존경할 이가 자꾸 늘어난다. 스승이 많아지는 셈이니 반갑고 즐겁고 고맙다.   이번에는 원로배우 이순재 선생이다. 88세의 나이로 지난 6월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열연하여 큰 울림을 주었다. 이 공연을 계기로 최고령에 리어왕을 연기한 배우로 기네스북에 등재를 신청했다고 한다.   연극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바로 실감하겠지만,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그저 구순을 바라보는 노배우가 무대에 서서 주인공을 연기했다는 정도의 일이 아니다. ‘리어왕’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다양한 인간군상이 등장하는 대작이다. 특히, 이번 공연은 셰익스피어의 시적 언어가 품은 향취와 문학적 진수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원작을 각색하거나 압축하지 않고 무대에 올렸다고 한다. 그래서 공연시간이 무려 3시간 20분에 달한다.   배우들의 대사량이 엄청날 수밖에 없다. 특히 리어왕 역의 대사량은 살인적인데, 구순을 앞둔 노배우가 그 많은 대사를 몽땅 다 외워서 연기했다는 이야기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존경스럽다. 더구나 리어왕 역은 절대 군주에서 정신을 놓은 미친 노인으로 전락하는 폭넓은 연기로 극의 중심을 잡고 끝까지 이끌어가야 한다. 엄청난 체력과 집중력이 필요하다. 젊은 배우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이순재 주연의 ‘리어왕’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21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도 공연되었는데 전회차 전석 매진이라는 이례적인 기록을 세우며 호평받았다. 또한 지난해 12월에는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를 연출하는 등 누구보다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쉼 없이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1934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난 배우 이순재는 대한민국 연기 역사의 산증인이다. 서울대 철학과 재학 중에 서울대 연극반을 재건해 활동하며, 1956년 유진 오닐의 연극 ‘지평선 너머’로 데뷔했다. 이후 67년째 쉴 틈 없이 연기해왔다. 그동안 출연한 영화도 100편 이상, 연극도 100편 이상이고,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했다. 제14대 국회의원도 지냈다.   평균 시청률이 59.6%에 달했던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의 ‘대발이 아버지’,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으로 ‘야동 순재’라는 별명을 얻으며 열연해 큰 인기를 얻으며 대중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국민배우’다.   이순재 선생은 젊은 세대들로부터도 진정한 어른으로 평가받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후배들이 그를 존경하는 까닭은 완벽한 자기 관리와 완성을 향한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모범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나이 먹었다고 주저앉아 대우나 받으려는 것은 늙어 보이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이순재의 후배 사랑도 각별하다.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연예계 후배들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는 그는 “젊은 세대가 희망을 가지고 전진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드는 것이 우리 기성세대의 책임”이라고 역설한다.   한국 연극계에 이런 스승들이 계시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지난 2018년 요란했던 ‘미투 운동’으로 지도적 어른 여러 명이 날아간 뒤라 더욱 귀하게 빛난다. 이순재 선생보다 한 살 어린 연기자 신구 선생도 꾸준히 무대에 서며 모범을 보여 정말 고맙다. 이런 어른들 덕에 한국 연극이 튼튼하다.   명배우 이순재 선생이 열연하는 ‘리어왕’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이렇게 간접적으로라도 가르침을 얻을 수 있으니 정말 다행이다. 내가 제일 배우고 싶은 것은 완성을 향한 열정과 노력이다. 연기에 대한, 작품에 대한 그의 열정은 그 누구보다 젊고 강하다. 존경스럽다.   “완성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완성이 되지 못했다고 생각하기에 꾸준히 계속 노력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장소현 / 극작가·시인문화산책 이순재 배우 원로배우 이순재 이순재 선생 이순재 주연

2023-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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