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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지나도 맴도는 할리우드의 깊은 상흔

60년대 말 ‘The Fearless Vampire Killers’, ‘Valley of the Dolls’ 등의 B무비로 잘 알려진 할리우드 스타 샤론 테이트는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두 번째 아내로 당시 유망했던 여배우들 중 한 명으로 꼽혔다.     1969년 8월 9일은 테이트가 할리우드뿐만 아니라 지상에서 가장 유명한 여배우로 세상에 알려지는 날이다. 26세의 떠오르는 별 테이트를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여배우로 만들어 준 인물은 불행하게도 희대의 살인마 찰스 맨슨이었다. 임신 만삭의 테이트는 행복의 절정에서 잔혹한 살인사건의 희생자가 됐다.     베벌리 힐스 인근의 고급 주택가 베네딕트 캐년 10050 Cielo Drive에서 3명의 남자와 2명의 여자가 테이트와 함께 살해된다. 맨슨패밀리 일당은 태아만이라도 살려달라는 그녀의 애원을 무시하고 끔찍한 범행을 저질러 공분을 샀다. 경찰은 이 사건을 ‘테이트 살인사건(Tate murders)'으로 명명한다.     맨슨패밀리의 일원으로, 2건의 1급 살인과 1건의 살인 공모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레슬리 밴 휴튼(73세)이 지난 11일 50년 만에 석방됐다. 휴튼은 1969년 8월 8일부터 10일까지 맨슨의 살해 명령을 수행했다. ‘홈커밍 퀸’으로 미모가 출중했던 휴튼은 당시 19세의 어린 나이였다. 그녀는 가석방 심의에서 맨슨을 교주로 믿고 그의 명령을 따랐지만 지금은 살인사건에 연루되었던 사실을 후회한다고 말했다.     ▶희생될 뻔했던 캔디스버겐, 도리스 데이   컬트 리더 찰스 맨슨의 추종자들은 폴란스키의 집에서의 집단 살인을 수행한 후, 유명 여배우이며 지인이었던 캔디스버겐을 추적했다. 버겐의 남자 친구이며 레코딩 프로듀서 테디 멜처는 불과 2달 전 폴란스키-테이트 부부에게 베네딕트 캐년 집을 임대해주고 말리부의 해안가 저택에서 살고 있었다.     뮤지션으로 세계적인 스타가 되기를 열망했던 맨슨은 버겐과 멜처가 베데딕트캐년 집에 살고 있을 때, 이곳을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버겐의 소개로 멜처를 알게 된 맨슨은 그에게 자신의 음악을 들려주곤 했다.     버겐은 맨슨이 프랭크 시나트라에 버금가는 뮤지션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그러나 멜처가 냉담한 반응을 보이자 그에 대한 보복을 마음에 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멜처는 가수 겸 배우로 인기 절정의 TV시트콤 ‘도리스 데이쇼’의 주연 배우 도리스 데이의 아들이었다. 아들 집을 자주 방문했던 데이는 사건 이후 충격에 휩싸였고 이후 맨슨 추종자들의 협박으로 우울증과 양극성 장애 증세에 시달렸다.     테이트의 죽음은 멜처에 대한 보복이 동기였기 때문에 더욱 더 억울한 죽음으로 받아들여졌다. 만약 멜처가 집을 옮기지 않았다면 멜처, 데이, 버겐에게도 불행한 일이 닥칠 수 있었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사건 당시 런던에 가 있던 폴란스키 감독은 서류 미비로 미국행을 연기해야 했다. 영국 당국이 폴란스키의 미국행을 허락했다면 그 역시 아내와 함께 목숨을 잃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테이트는 이소룡에게 무술을 배우고 있었는데, 폴란스키는 이소룡을 살인범으로 오해했다고 후일 밝혔다.     살인사건 이후 도시 전체가 충격과 경악을 금치 못했다. 프랭크 시나트라, 토니 베넷 등의 할리우드 스타들은 자신이 다음 차례가 될 것이라는 우려 속에 한동안 은신처로 피신해 살아야 했다.     샤론 테이트의 사망 주기 50주년인 2019년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를 발표한다. 마고 로비가 테이트 역을 맡았으며, 영화는 호평 속에 2020년 제92회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올랐다.     ▶스타가 되길 원했던 찰스 맨슨   맨슨은 히피 문화의 종말을 알리는 상징적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가장 유명한 살인마로 기억된다. 어린 시절 가톨릭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고 자란 그는 심한 구타와 체벌을 견디지 못하고 탈출, 절도를 저지르다 소년원으로 보내진다. 이후 맨슨은 강도, 강간 등의 범죄를 저질러 교도소를 빈번히 드나들었다. 교도소 내에서 다른 수감자들에게 성적으로 학대당했고 그 또한 다른 수감자들을 성적 학대했다.     맨슨은 좌절한 음악가였다. 그는 교도소에서 기타를 처음 배웠다. 열렬한 비틀즈의 팬이던 그는 비치보이스의 데니스 윌슨, 닐 영과 교제를 나누었다는 설이 있다. 맨슨의 기타 연주는 상당한 수준이었으며 그를 야심찬 싱어송라이터로 기억하고 있는 증언들이 여럿 나왔다.     1967년 34세의 나이로 출소한 맨슨은 당시 널리 퍼져 있던 히피 문화에 심취했고 강한 카리스마로 맨슨패밀리의 ‘교주’로 떠올랐다. 키가 5피트 2인치에 불과했던 맨슨에게는 사람을 세뇌시키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악명 높았던 맨슨이 종신형을 선고받고 수감된 후에도 일부 젊은이들이 그를 추종하는 기현상이 이어졌다. 그는 요한계시록과 비틀즈의 ‘화이트’ 앨범을 자주 인용했다. 히피들의 반문화적 반항 의식이 맨슨패밀리를 지배하고 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맨슨은 13번의 가석방을 신청했으나 모두 기각되었고 2014년 26세의 젊은 여성과 옥중 결혼식을 올렸다. 맨슨은 2017년 감옥에서 7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김정 영화평론가할리우드 상흔 테이트 살인사건 할리우드 스타 폴란스키 감독

2023-07-28

[이 아침에] 가정 폭력이 남긴 상흔

피터스캐년 산에서 하이킹 중에 전화가 울렸다. 셸터를 떠난 후에도 가끔 만나 점심을 하는 S자매다. 안부를 묻기도 전에 “대문 앞에 팥죽을 두고 갑니다”하고는 전화를 끊는다. 집에 돌아와 보자기를 열어보니 팥죽과 군고구마, 파김치, 곶감을 두고 갔다. 동짓날에 팥죽을 나누어 먹지 못해 조금 가져왔다는 쪽지도 남겼다.     S자매는 오래전 어느 여름날 셸터에 왔다. 가정폭력 중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생각지 못한 임신으로 우울증까지 찾아왔다. 배 속의 아기를 데리고 어떻게 사나 고민하다 마지막 희망으로 우리 기관에 전화했다.     그녀는 20대에 미국으로 유학와 친구의 소개로 결혼했는데 결혼 초부터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의처증으로 폭력을 당했다. 그 긴 세월 무서운 악몽과 불면으로 지새운 밤이 얼마나 무지했는지 교육을 통해 깨달았다며 울었다.     그녀는 상담을 받으면서 잃어버렸던 자아를 찾기 시작했고 자신도 사랑 받았던 사람이었고 아직도 사랑 받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으로 점점 회복되기 시작했다. 부족하고 능력 없는 자신이 아닌,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던 유능했던 자신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남편은 그녀를 의자에 묶고 골프채로 때렸다. 목을 조르기도 했다. 불안과 공포 속에서 이대로 죽어야 하는가… 공포에 떨던 그 날도 남편이 던진 칼이 머리를 비켜서 유리창을 깼고 놀라서 지른 비명에 이웃집에서 경찰에 신고해 법정으로 가게 됐다. 재판 중 취하하라는 시집의 협박을 받고 결국 고소를 취하했다.     가장 큰 걱정은 경제적으로 혼자 살아갈 능력이 없는 것과 도망가면 죽이겠다는 남편의 협박, 다른 사람들에게 받을 수치심을 감당하는 것이었다. 결국 계속되는 폭력을 더는 견딜 수가 없어 셸터로 전화한 것이다.   그녀는 셸터에 온 지 4개월 후 딸을 출산했고 혼자 키울 아이에 대한 책임감이 도전과 용기, 살아갈 이유와 목적이 됐다. 1년간 거주할 수 있는 제2차 거주지를  찾아 다른 셸터로 가게 되면서 푸른 초장의 집에서 11개월 후 떠났다. 그곳에서 직장을 다니며 삶의 어려운 순간을 헤쳐 나가고 있는 자매를 보니 불안감과 슬픔에 차 있던 모습이 어느덧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그때 낳은 딸이 올해로 벌써 스물두 살이 되어 대학을 다니면서 파트타임을 하고 생활을 돕는다. 이전보다는 상황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오래된 자동차를 바꿀 형편은 못 된다. 그래도 그녀는 폭력을 벗어난 것만도 다행으로 생각하고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다.   다음날 S자매를 만났다. 얘기를 나누는 동안 마음이 아려왔다. 아직도 몸에 밴 기억은 잊히지 않는다고 한다. 어쩌다 생각이 떠오르면 가슴앓이를 한다고도 했다. 몸의 일부가 되어 화인으로 새겨진 상처는 몸이 사라지지 않는 한 소멸하지 않을 것 같다고도 했다.     어제 가져온 팥죽은 맘을 다해 준비해온 귀한 선물이다. 가치를 따질 수가 없다. 없는 가운데서 나누는 자매의 사랑이 마음에 울림이 되어 가슴에 스며든다. 마음이 아련하다. 엄영아 / 수필가이 아침에 폭력 상흔 가정 폭력 다음날 s자매 군고구마 파김치

2022-07-04

[이 아침에] 가정 폭력이 남긴 상흔

피터스캐년 산에서 하이킹 중에 전화가 울렸다. 셸터를 떠난 후에도 가끔 만나 점심을 하는 S자매다. 안부를 묻기도 전에 “대문 앞에 팥죽을 두고 갑니다”하고는 전화를 끊는다. 집에 돌아와 보자기를 열어보니 팥죽과 군고구마, 파김치, 곶감을 두고 갔다. 동짓날에 팥죽을 나누어 먹지 못해 조금 가져왔다는 쪽지도 남겼다.     S자매는 오래전 어느 여름날 셸터에 왔다. 가정폭력 중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생각지 못한 임신으로 우울증까지 찾아왔다. 배 속의 아기를 데리고 어떻게 사나 고민하다 마지막 희망으로 우리 기관에 전화했다.     그녀는 20대에 미국으로 유학와 친구의 소개로 결혼했는데 결혼 초부터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의처증으로 폭력을 당했다. 그 긴 세월 무서운 악몽과 불면으로 지새운 밤이 얼마나 무지했는지 교육을 통해 깨달았다며 울었다. 그녀는 상담을 받으면서 잃어버렸던 자아를 찾기 시작했고 자신도 사랑 받았던 사람이었고 아직도 사랑 받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으로 점점 회복되기 시작했다. 부족하고 능력 없는 자신이 아닌,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던 유능했던 자신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남편은 그녀를 의자에 묶고 골프채로 때렸다. 목을 조르기도 했다. 불안과 공포 속에서 이대로 죽어야 하는가… 공포에 떨던 그 날도 남편이 던진 칼이 머리를 비켜서 유리창을 깼고 놀라서 지른 비명에 이웃집에서 경찰에 신고해 법정으로 가게 됐다. 재판 중 취하하라는 시집의 협박을 받고 결국 고소를 취하했다.     가장 큰 걱정은 경제적으로 혼자 살아갈 능력이 없는 것과 도망가면 죽이겠다는 남편의 협박, 다른 사람들에게 받을 수치심을 감당하는 것이었다. 결국 계속되는 폭력을 더는 견딜 수가 없어 셸터로 전화한 것이다.   그녀는 셸터에 온 지 4개월 후 딸을 출산했고 혼자 키울 아이에 대한 책임감이 도전과 용기, 살아갈 이유와 목적이 됐다. 1년간 거주할 수 있는 제2차 거주지를  찾아 다른 셸터로 가게 되면서 푸른 초장의 집에서 11개월 후 떠났다. 그곳에서 직장을 다니며 삶의 어려운 순간을 헤쳐 나가고 있는 자매를 보니 불안감과 슬픔에 차 있던 모습이 어느덧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그때 낳은 딸이 올해로 벌써 스물두 살이 되어 대학을 다니면서 파트타임을 하고 생활을 돕는다. 이전보다는 상황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오래된 자동차를 바꿀 형편은 못 된다. 그래도 그녀는 폭력을 벗어난 것만도 다행으로 생각하고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해할 수도 없고 용납할 수도 없는 일이 피해 여성의 가정에서 일어난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무서운 폭력이다. 피해 여성과 아이들을 폭력 가정에서 구출해 주어야 한다.     다음날 S자매를 만났다. 얘기를 나누는 동안 마음이 아려왔다. 아직도 몸에 밴 기억은 잊히지 않는다고 한다. 어쩌다 생각이 떠오르면 가슴앓이를 한다고도 했다. 몸의 일부가 되어 화인으로 새겨진 상처는 몸이 사라지지 않는 한 소멸하지 않을 것 같다고도 했다.     어제 가져온 팥죽은 맘을 다해 준비해온 귀한 선물이다. 가치를 따질 수가 없다. 없는 가운데서 나누는 자매의 사랑이 마음에 울림이 되어 가슴에 스며든다. 마음이 아련하다. 엄영아 / 수필가이 아침에 폭력 상흔 폭력 가정 가정 폭력 다음날 s자매

2022-06-29

[오픈 업] 아직도 남아 있는 4·29의 상흔

 2001년 9월 11일, 뉴욕 시민들은 끔찍한 장면을 목격했다.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건물이 비행기 테러 공격으로 무너져 내리는 장면이었다. 건물 붕괴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가 2996명이었고 부상자도 약 2만5000명에 달했다.     이 같은 참극이 발생하면서 많은 정신과 의사들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를 우려했었다.     외상성 사건(trauma) 이후에 반복적으로 침습하는 고통스러운 기억, 그와 관련된 악몽, 똑같은 사건이 재연되는 것처럼 느껴지고 행동하게 되는 해리성 반응( Flash back), 더 이상 행복·만족·사랑을 경험할 수 없는 부정적인 기분 등이 PTSD의 주요 증상이다.     테러 이후 정신과 의사들은 뉴욕 초등학교들을 찾아갔다. 종이와 크레용을 주고서 아이들에게 그 당시의 장면을 기억나는 대로 그려 보라고 했다. 이는 아이들이 당시의 기억을 ‘회피’하는 대신에 그 힘들었던 사건 속으로 들어가 재경험을 통해 자신감을 회복하도록 돕기 위한 것이다.     건물이 무너질 당시의 무섭고 공포스러웠던 감정들을 꾹 눌러 감추는 대신에 아이들이 마음을 터 놓을 수 있는 교사와 사랑하는 친구들, 전문의 등의 격려 속에서 그 끔찍했던 장면들을 그리며 자신감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30년 전 4월 29일을 우리 한인들은 잊지 못한다. 사랑하는 가족, 친지, 친구들이 땀흘려 마련한 생활의 터전인 업소와 건물들이 아무 이유 없이 폭도들에 의해 불에 타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폭도들로부터 주민들을 지켜주어야 할 경찰은 방관했다. 파괴와 방화가 일어나고 도난이 자행되는 현장에 경찰은 없었다. 경찰은 폭도들의 파괴 행위가 없는 백인 지역을 예방 차원에서 지키고 있었다.     당시 총성이 요란했던 LA다운타운에서 신발 소매업을 했던 필자의 시동생은 30대의 가장이었다. 준비한 총을 들고 어렵게 마련한 가게의 지붕으로 올라가 방화범으로부터 업소를 지켜야만 했다. 경찰이 보호해주지 않는 무법천지의 상황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자신의 재산을 지키려는 자구책이었다.     많은 한인들이 자신의 업소를 지키기 위해 나섰다. 이러한 행동을 주류언론은 한흑간의 갈등으로 왜곡해 보도했다. 4·29폭동 이후 많은 한인들이 LA에 환멸을 느껴 타주로 이주하기도 했다. 한인들은 혈압과 맥박이 심하게 오르고, 얼굴에 진땀이 흐르며, 소화불량이 심하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증상을 경험했다. 작은 소리에도 기겁을 하며 놀라 공포감을 호소하기도 했다. 또한 자신이 자기 몸에서 떠나 천장에서 내려다 보는 것 같은 해리 현상을 경험한 한인도 있었다. 자신이 항상 있던 곳이 마치 다른 사람의 집 같이 느껴지는 비현실감을 경험하기도 했다.     가게가 불타고 있을 때의 뜨거운 열기가 마치 현재에 다시 일어나는 것처럼 몸에 뜨거움을 느끼기도 했다. 즉 과거에 자신도 모르게 느꼈던 생리적, 감정적 반응이 그대로 다시 느껴지는 것이다.     더 이상 자신이나 타인, 세상에 대한 믿음을 갖기 힘들기 때문에 ‘세상 아무도 믿을 수 없어’ ‘내가 바보야’ 등의 부정적인 감정이 커져 공포, 경악, 화, 죄책감, 수치감을 느끼기도 한다. 간혹 공격적이 되어 가정폭력을 일으키거나 싸움을 한다.     4·29폭동 30주년이 다가온다. 아직도 당시의 기억 때문에 PTSD를 겪는 환자들이 있다. 함께 모여서 자신들의 상처를 이야기 하거나, 연극으로 표현하거나, 그림이나 글로 나누는 것은 어떨까. 정신상담 전문가와의 개인 또는 집단 치료를 통해 당시의 기억을 극복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SSRI) 같은 항우울제도 크게 도움이 되니 전문의를 찾아보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30년 전의 상처는 아직도 남아 있다. 수잔 정 / 소아정신과 전문의오픈 업 남아 상흔 해리성 반응 친구들 전문의 정신과 의사들

2022-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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