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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스트로스칸 추락을 보며

출발 직전 JFK발 파리행 항공기에서 경찰에 의해 강제로 끌려 내려온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전 국제통과기금(IMF) 총재의 모습을 보면서 바로 엊그제까지 정상에 서 있던 한 인간의 어지러운 추락에 현기증을 느낀다. 32세의 흑인 호텔 룸메이드를 성폭행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그는 IMF의 수장이자 프랑스의 유력한 차기 대권후보자 중 하나가 아니었던가. 한국이 외환위기를 겪고 있을 때 IMF 직원의 말 한마디는 한국경제를 쥐락펴락했으며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뜻도 모르면서 그저 무섭기만 하던 것이 ‘아이엠에프’ 이름 석자였다. 세계의 ‘경제대통령’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그가 하루아침에 ‘발정한 침팬지’로 전락하여 수갑을 찬 채 경찰에 연행되는 장면은 참으로 충격적이었다. 아무리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지만 세계적인 인재를 확실한 증거도 없이 이렇게 영원히 매장시켜버리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하는 의문도 들었다. 예부터 영웅호색이라 하여 잘나고 유능한 남자는 여자를 밝힌다고 했다. 중국의 진시황, 로마의 네로 황제 등 동서양의 폭군들은 말할 것도 없고 트라팔가 해전의 영웅인 영국의 넬슨 제독과 유부녀 해밀턴 부인간의 염문도 유명한 일화이다. 멀리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이 르윈스키와의 부적절한 관계로 전 세계 아이 둔 부모들을 민망하게 했던 클린턴 전 대통령을 비롯해서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 엘리옷 스피처 전 뉴욕주지사, 아널드 슈워츠네거 전 캘리포니아 주지사 등 정치인들과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 등 내노라 하는 인물들이 여자문제로 곤욕을 치러야 했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호색행위는 한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모 전 국무총리, 모 전 그룹 회장, 모모 전 대통령 등 인사들의 여성관련 스캔들은 끊이지 않았다. 비교적 여자문제에 관대한 한국사회의 분위기 덕에 큰 문제로 불거지지 않았을 뿐 이들의 엽색 행각은 외국 지도자들의 그것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 더욱이 무소불위의 독재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북한의 김정일은 여러 명의 여자들을 납치하여 첩으로 삼았다 하지 않는가. 영향력 있는 남자들은 왜 자신의 모든 것을 걸면서까지 다른 여자를 탐하는가. 또 왜 여자들은 그런 남자들 주변으로 몰려 드는가. 동물 세계에서 힘센 수놈은 자신의 씨를 많이 퍼뜨리기 위해서 되도록 많은 암컷과 관계를 맺으려 한다. 암컷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죽자 사자 싸우는 수컷들의 모습은 동물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암컷 역시 우수한 씨를 받기 위해 경쟁 상대를 물리친 힘센 수컷에게 기꺼이 몸을 맡긴다. 동물이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사람도 결국은 이러한 자연 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동물과 달리 인간은 절제할 수 있는 이성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감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본능을 억제하고 있을 뿐이다. 점잖은 신사와 발정한 수컷과의 거리는 어찌보면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2011-05-24

[살며 생각하며] 이런 손님, 저런 손님

세탁소는 찾아오는 손님들의 연령층이 매우 다양하다. 유모차를 타고 온 갓난아이로부터 100세를 바라보는 할머니, 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연령층의 사람이 세탁소를 찾는다. 손님의 연령층뿐 아니라 직업도 다양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대학교수, 의사, 변호사, 교사, 부동산 개발업자, 수퍼마켓 캐셔, 요리사, 미용사, 군인, 경찰관, 소방관, 고위공무원 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직종의 사람을 만난다. 세탁소 손님의 남녀 비율은 여자가 남자보다 약간 많은 듯하나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부부가 함께 오는 경우도 많으며 때로는 이혼한 부부가 세탁소에서 만나 친구처럼 인사를 나누는 광경도 볼 수 있다. 대개 손님들은 세탁소를 한 번 정하면 일주일에 한 두 번씩 거의 고정적으로 들리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히 손님과 주인간에 친밀감이 쌓이게 된다. 물론 델리나 그로서리 같은 곳도 남녀노소 모든 연령층의 손님들이 이용하지만 세탁소처럼 손님과 주인이 서로 이름을 부르면서 아이들 교육이나 날씨 등 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나누지는 않을 것이다. 손님과 주인 사이뿐 아니라 손님과 손님끼리도 기다리는 동안 자연스레 대화가 오고 가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는 세탁소가 마치 동네 아낙들의 수다로 시끌벅적하던 옛날 한국의 우물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여자 손님들은 아이와 함께 오는 경우가 많다. 임신한 손님의 뱃속에 있던 아이가 어느새 세상에 나와 아장아장 걷더니 무럭무럭 자라 유치원에 들어가고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 어지럽게 빠른 세월의 흐름을 실감한다. 한국아이를 입양한 미국인 부모들도 많은데 한 번은 너댓살 된 남자 아이가 부모를 따라왔다가 카운터 안쪽에 서있는 아내를 보더니 갑자기 안으로 걸어 들어와 아내를 끌어 않고 얼굴을 비벼 눈시울이 뜨거워진 적도 있었다. 어린 것도 제 모습과 비슷한 사람을 보니 반가웠던 게다. 이제는 80세로 접어든 한국전 참전군인들이 찾아오면 VIP 대접을 한다. 달려나가 차 문을 열어드리는 것으로부터 특별 디스카운트까지 극진히 모신다. 몇 해전만 해도 여러 첨전용사 분들이 오셨는데 다 돌아가시고 이제 미스터 로젝 한 분 밖에 안 오신다. 남녀노소 여러 손님을 대하다보니 손님의 성격도 각양각색이다. 옷을 한 보따리 들고 와서 카운터 위에 휙 던져 놓고 전표도 안받고 그대로 가버리는 통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셔츠 한 두 장 맡기고 나가면서 전표를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는 사람도 있다. 셔츠에 풀이 좀 덜 먹여졌다고 카운터를 치며 호통을 치는 사람도 있지만 아이의 구멍 난 털장갑을 무료로 꿰매어 주었다고 커다란 꽃다발과 초콜릿을 사들고 오는 천사 같은 사람도 있다. 이런 손님, 저런 손님 숱한 사람들을 겪다 보니 이제 사람의 인상만 보아도 대략 그 사람의 성격이며 직업까지 알아 맞출 수 있게 되었다. 우스개 소리지만 이쯤 되면 세탁소 접고 미아리 고개에 자리 깔고 나앉아도 되지 않나 생각 된다.

2011-04-06

[살며 생각하며] 동해·독도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천재지변을 겪는 와중에 일본이 보인 ‘독도’ 관련 망발에 대해 한국정부나 한국인들의 감정은 매우 복잡해 보인다. 나 역시 매우 착잡한 심정이다. 그 착잡한 심정으로 미국에서 발견되는 지도들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된다. 얼마 전, 스미소니언 아시아 미술 박물관인 프리어 갤러리(Freer Gallery)와 자연사 박물관(Smithsonian Natural History Museum)을 둘러보았다. 이 두 스미소니언 계열 박물관에서 동일한 지도에 각기 지명을 다르게 표기한 것을 확인했다. 현재 한국의 동해바다는 ‘동해(East Sea)’라고 한국 측의 지도에 표기가 되거나, 혹은 ‘일본해(Sea of Japan)’로 일본 측의 지도에 표기가 되고 있다. ‘동해인가? 일본해인가?’가 한국과 일본 사이의 외교적 분쟁의 원인이 되고 있다. 결국 이번에 문제가 된 ‘독도’ 역시 이 동해바다 문제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스미소니언 박물관들은 이런 외교적 분쟁이 될 만한 지역의 표기를 어떤 식으로 하고 있을까? 나는 세 가지 각기 다른 표기 방법을 확인했다. 첫째, ‘일본해(Sea of Japan)’. 프리어 갤러리의 아시아 불교 관련 전시장에서는 불교의 전파 내용을 소개하는 안내판에서 Sea of Japan이라고 표기했다. 이런 표기는 역시 이곳의 일본 병풍 전시실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둘째, ‘동해(East Sea)’. 프리어 갤러리의 한국 도자기 전시장의 안내판에는 동일한 바다에 대하여 East Sea라고 표기했다. 한국 관련 전시장이라서 표기에 신경을 쓴 것일까? 셋째, 표기 생략. 스미소니언 자연사 박물관의 한국관에도 안내판이 있고, 지도가 그려져 있는데 이 지도에는 바다에 대한 표기를 아예 생략했다. 정리해보면, 프리어 갤러리에서는 아시아 관련 안내판이나 일본 관련 안내판에는 ‘일본해’로 표기하고, 오직 한국 전시장에서만 ‘동해’로 표기했는데, 결국 이 박물관에서는 일본해라고 두 번 표기하고, 동해라고는 한 번 표기했다. 자연사박물관의 한국관은, 그곳이 한국관 임에도 불구하고 어쩐 일인지 바다 이름 표기를 생략하고 지나갔다. 프리어 갤러리는 일견 공평한 듯 해 보이지만, 그들이 한국관이 아닌 곳에서는 일괄적으로 ‘일본해’로 표기를 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자연사 박물관의 한국관에서는 아예 ‘동해(East Sea)’라고도 표기도 안 한 것 역시 마음에 걸린다. 지도를 제작할 때 정보나 자료를 제공한 한국 측의 관련 단체는 어떤 역할을 한 것인가? 여러 가지 의문점과 생각들이 교차했다. 미국 내에서 동해를 Sea of Japan이라고 표기한 지도는 이곳 외에도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예일대 출판부 같은 유수의 대학 출판사가 제작한 책에도 Sea of Japan이라는 표기를 찾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현재 미국에 사는 나는 이런 문제들을 내가 개인 자격으로 어떻게 접근하고 해결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일단은 자료 수집을 위하여 이러한 지도가 보이는 대로 사진을 찍어 모아두고 있다. 그런데, 어떤 방법이 체계적인 문제 해결 방법인지 알 수가 없어서 고민하고 있다. 개인자격으로 사진파일들을 모두 모아서 박물관 책임자들에게 메일이나 서신을 띄우면 어떨까? 이런 고민도 해보고,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는 미국에서 살다가 혹시 어딘가에서 이런 지도가 발견되면 상세하게 사진을 찍고 알려달라는 부탁도 한다. 한일간의 동해를 둘러싼 영토 관련 분쟁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고, 정부가 뚜렷한 원칙을 제시하지 못할 경우 민간차원의 노력도 애매해지기 십상이다. 어쨌거나, 이제 나는 내가 우리의 바다 ‘동해’와 ‘독도’를 위해 개인 차원에서 무엇을 실천할 수 있는지 많은 전문가에게 질문을 하고 조언을 듣고 싶다. 각자의 자리에서 고민하는 우리 개개인이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체계적인 대응 방법을 의논할 때가 온 것일지도 모른다. 차분하게, 그리고 합리적으로. yourlem@gmail.com

2011-04-05

[살며 생각하며] '동해' 빠진 박물관 지도

천재지변을 겪는 와중에 일본이 보인 '독도' 관련 망발에 대해 한국정부나 한국인들의 감정은 매우 복잡해 보인다. 나 역시 매우 착잡한 심정이다. 그 착잡한 심정으로 미국에서 발견되는 지도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얼마 전 스미소니언 아시아 미술 박물관인 프리어 갤러리와 자연사 박물관을 둘러보았다. 이 두 스미소니언 계열 박물관에서 동일한 지도에 각기 지명을 다르게 표기한 것을 확인했다. 현재 한국의 동해바다는 '동해(East Sea)'라고 한국 측의 지도에 표기가 되거나 혹은 '일본해(Sea of Japan)'로 일본 측의 지도에 표기가 되고 있다. '동해인가 일본해인가?'가 한국과 일본 사이의 외교적 분쟁의 원인이 되고 있다. 이번에 문제가 된 독도 역시 이 동해바다 문제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스미소니언 박물관들은 이런 외교적 분쟁이 될 만한 지역의 표기를 어떤 식으로 하고 있을까? 나는 세 가지 각기 다른 표기 방법을 확인했다. 첫째 일본해라는 표기다. 프리어 갤러리의 아시아 불교 관련 전시장에서는 불교의 전파 내용을 소개하는 안내판에서 Sea of Japan이라고 표기했다. 이런 표기는 역시 이곳의 일본 병풍 전시실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둘째 동해라는 표기다. 프리어 갤러리의 한국 도자기 전시장의 안내판에는 동일한 바다에 대하여 East Sea라고 표기했다. 한국 관련 전시장이라서 표기에 신경을 쓴 것일까? 셋째 표기를 생략한 경우다. 스미소니언 자연사 박물관의 한국관에도 안내판이 있고 지도가 그려져 있는데 이 지도에는 바다에 대한 표기를 아예 생략했다. 정리해보면 프리어 갤러리에서는 아시아 관련 안내판이나 일본 관련 안내판에는 '일본해'로 표기하고 오직 한국 전시장에서만 '동해'로 표기했다. 자연사박물관의 한국관은 그곳이 한국관 임에도 불구하고 표기를 생략하고 지나갔다. 프리어 갤러리는 일견 공평한 듯도 보이지만 그들이 한국관이 아닌 곳에서는 일괄적으로 일본해로 표기를 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자연사 박물관의 한국관에서는 아예 표기도 안 한 것 역시 마음에 걸린다. 미국 내에서 동해를 Sea of Japan이라고 표기한 지도는 이곳 외에도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예일대 출판부 같은 유수의 대학 출판사가 제작한 책에도 Sea of Japan이라는 표기를 찾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미국에 사는 나는 이런 문제들을 내가 개인 자격으로 어떻게 접근하고 해결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일단은 자료 수집을 위하여 이러한 지도가 보이는 대로 사진을 찍어 모아두고 있다. 개인자격으로 사진파일들을 모두 모아 박물관 책임자들에게 메일이나 서신을 띄우면 어떨까? 이런 고민도 해보고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는 미국에서 살다가 혹시 어딘가에서 이런 지도가 발견되면 상세하게 사진을 찍고 알려달라는 부탁도 한다. 한.일간의 동해를 둘러싼 분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고 정부가 뚜렷한 원칙을 제시하지 못할 경우 민간차원의 노력도 애매해지기 십상이다. 어쨌거나 이제 나는 내가 우리의 바다 '동해'와 '독도'를 위해 개인 차원에서 무엇을 실천할 수 있는지 많은 전문가에게 질문을 하고 조언을 듣고 싶다. 각자의 자리에서 고민하는 개인들이 이제는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체계적인 대응방법을 의논할 때가 온 것일지도 모른다. 차분하게 그리고 합리적으로.

2011-04-05

[살며 생각하며] 오도된 미국의 예외주의

얼마 전 CNN 방송에서 인상적인 장면이 보도되었다. 미국의 전투기 한 대가 고장으로 리비아 떨어졌는데 조종사는 낙하산으로 무사히 리비아 땅에 내렸다. 떨어진 지점이 카다피군 장악 지역이라면 곧바로 죽을 운명이었다. 다행히 리비아 반군이 지키는 지역이었다. 한 주민이 다가와서 공포에 휩싸인 조종사에게 “당신은 우리를 구하러 왔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친구입니다. 안심하십시오” 라고 말했다는 내용이었다. 그 조종사는 그 후, 미군 항공모함으로 안전히 귀환했다. 여러 나라를 다녀보면 한 가지 공통된 점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미국을 좋아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좋아하지 않는다기보다는 싫어한다는 표현이 맞다. 미국은 2차 세계 대전을 승리로 이끈 연합국의 주역이었고 그 후 많은 빈곤 국가에 원조하고 지금도 하고 있다. 그런데도 싫어하니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미국민은 자성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한마디로 미국의 오도된 예외주의(Exceptionalism)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대부분의 저교육층 미국인과 일부 공화당의 반지성적 정치인은 미국의 예외주의를 미국의 우월주의로 착각하고 있다. 대표적 극우 성향의 정치인 사라 페일린과 뉴트 깅그리치, 미셀 바크만 의원 등은 오바마 대통령의 외교정책이 미국의 예외주의를 포기했고 미국의 자존심을 저버렸다고 질타하고 있다. 이러한 미국의 예외주의가 2012년 대선에서 주요 쟁점이 될 것이라고 한다. 미국의 예외주의는 프랑스 사상가 알렉시 드 토크빌이 1830년 펴낸 책에서 미국은 독특한 개성을 갖고 있다고 표현한 데서 비롯됐다. 사회학자 립셋은 보다 분명히 분석하기를 미국은 혁명적 사건으로 출발하여 독립에 성공한 최초의 식민지, 최초의 신생국가라는 점에서 ‘예외적’인 나라다. 결국 미국 예외주의는 새로운 사회로, 미국이 봉건적 구조, 군주제와 귀족주의 문화, 사회적 위계를 유산으로 물려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미국이 다른 나라보다 낫다거나 우월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며, 단지 다른 나라들과 질적으로 ‘다르게’ 발전해왔음을 의미할 뿐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을 미국의 우월주의로 착각한 일부 네오콘 보수주의자의 오만한 자세가 국제사회에서 미국을 더욱더 경원하도록 심화시킨 것이다. 특히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의 8년 집권 동안 대외 정책은 많은 국가의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그 예로 교토 협약에 일방적으로 가입하지 않았고, 편향적인 친이스라엘 정책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제거돼야 하나 미국이 주도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이라크 국민은 원하지 않았음에도 확인도 안된 대량살상무기가 있다고 이라크를 공격했던 것 등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역사상 처음으로 이집트 카이로대학에서 청중과 같은 피부색을 가진 흑인으로, 미국 대통령으로, 또한 중간 이름에 중동에 흔한 후세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연설하였다. 미국에 대한 반감이 지배적인 중동 지역에서 이보다 더한 청중과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는 없었다. 그 연설 장면은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전 지역으로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통하여 번져 나갔다.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예멘, 시리아, 아이보리코스트 등 최근 일어나는 북아프리카의 민주화 열풍이 오바마의 카이로대학 연설 이후에 비로소 일어나는 것을 단순히 우연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미국 국민은 미국이 현재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민주적 역사 발전에 얼마나 큰일을 했는지 실감을 못하고 있다. 그것은 미국민이 오바마라는 인물을 미국 대통령으로 만들었고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의 소프트웨어를 모두 미국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만으로도 미국은 건전한 자부심을 가질 만하고 리비아에서 군사 개입을 진정한 미국의 예외주의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2011-04-05

[살며 생각하며] 재롱이의 재롱을 보며

벌써 6년이 돼 간다. 둘째 딸 성화에 못 이겨 뉴욕시 동물셸터에서 3개월 된 어린 고양이 새끼 한 마리를 입양했다. 털은 가을색깔처럼 노란색과 옅은 밤색으로, 두서없이 섞인 꼭 내 주먹만한 크기의 연약한 고양이 새끼였다. 우리 가족은 처음 입양돼 온 새 식구를 신기해했지만 고양이에 대해서 전혀 아는 것이 없었다. 우리는 인터넷 또는 책에서 또는 지인들에게서 고양이에 대한 지식을 얻었다. 처음 몇 달은 고양이도 우리도 즐거운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서로를 배워 나갔다. 먼저 물그릇, 음식물 등을 준비하고 이름을 한국이름으로 '재롱이', 미국이름을 '준'이라 지었다. 거기다 아이들은 우리 가족의 성을 주어서 '유재롱'이나 '유준'이라고 곧잘 불러댔다. 재롱이는 우리에게 극히 친절한 눈매로, 부드러운 털로, 조그만 실수들로, 우리들을 즐겁게 만들었다. 내가 손바닥을 펴면 손바닥 위에서 몸을 웅크리고 아무 근심 없는 표정을 한 조그만 손님을 누군들 사랑하지 않았겠는가? 고양이 입양을 전적으로 반대하던 집사람까지도 그만 반해 버렸다. 재롱이는 식구들이 가는 곳마다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다. 식구들이 일터에서 돌아오면 제일 먼저 나와서 반갑게 맞는 것이 재롱이다. 피곤하고 지친 우리를 맞으면서 털을 비비며 무척이나 반기는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밖에서의 지친 시간들을 잊게 해주기도 한다. 재롱이는 계단을 몹시도 오르내리며 몸매 가꾸기도 게을리하지 않았고 식구들에게 번갈아 가며 시간 봉사하는 친절도 마다 하지 앉는다. 지금 재롱이는 큰 강아지 정도로 굉장히 많이 자랐지만 애교만큼은 여전하다. 재롱이의 눈을 보고 있노라면 맑고 맑은 호수를 바라 보고 있는 기분이다. 재롱이의 족보는 '아메리칸숏트헤어'나 '메인쿤'이라고 한다. 정이 들대로 들어서인지 우리는 서로를 좋아한다. 가끔은 자기 고집이 있다고 유세를 뜬다. 재롱이로 인해 우리 식구들이 좋은 순간을 나누었다고 고백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고마워 한다. 행복은 무엇보다 인간과 사물에 대한 따듯한 관심에서 비롯되지 않나 생각이 든다. 서로의 관심과 기쁨의 폭을 넓혀 보려는 노력을 시도해 보아야 않을까. 끊임없이 시도 하면서도 재롱이는 놀랍도록 용맹스런 면도 있다. 하루는 뒤뜰의 텃밭에서 아내가 잡초를 뽑고 있는 사이 재롱이가 나가서는 채소 사이사이를 헤매고 있더니 먹이를 찾고 있는 참새 한 마리를 발견하고는 죽이고 말았다. 그 순간의 동작은 마치 호랑이가 사슴을 낙아 채는 듯한 동작이어서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마구 나무랐지만 아랑곳하지 않아서 우리는 재롱이를 5분 동안 '교도소'에 감금했다. 재롱이가 제일 싫어하기 때문에 효과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재롱이의 입양은 참 잘한 일이라고 우리 식구들은 입을 모은다. 바삐 돌아가는 생활 속에 재롱이와 같은 친구를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2011-04-04

[살며 생각하며] 내 마음의 아이돌, 리즈

같은 시대를 살아온 유명인의 죽음은 누구에게나 마음 한구석이 텅 비는듯한 허전함을 안긴다. 세기의 스타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지난 3월 23일 LA에서 울혈성 심부전증으로 향년 79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열병을 앓듯 지나가 버린 젊은 시절, 그녀는 내 마음의 아이돌이었으며 아직도 그녀의 이미지는 1950∼60년대 청순한 모습으로 마음 깊이 각인 돼 있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삶을 추스르던 그 시절 한국에서는 이렇다 할 제조업이 없어 거의 모든 물건들을 외국제품에 의존해야 했다. 지금은 미국에서 제조업이 사라지다시피 했지만 당시 미국은 생필품부터 가전제품, 공산품에 이르기까지 생산하는 세계의 공장이었다. 미군부대를 통해 흘러나온 미제 물건들은 누구나 갖고 싶어했으며 ‘메이드인 유에스에이’는 곧 품질의 상징이었다. 대중문화 역시 미국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영화는 팍팍한 삶에 지친 서민들에게 거의 유일한 오락이었으며 특히 미국 영화는 젊은이들의 문화적 갈증을 해소시켜주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당시 멋쟁이 젊은이들은 남대문 시장에서 산 미제 청바지와 물들인 미제 군복을 입고 엘비스 프레슬리에 열광하고 제임스 딘과 엘리자베스 테일러(일명 리즈)에 혼을 빼앗겼다. 특히 리즈는 인기가 높아 한국 배우 이름은 잘 몰라도 그녀의 이름은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리즈는 1932년 영국에서 미술품 중개상을 하는 미국인 아버지와 은퇴한 여배우 새라 테일러 사이에서 태어났다. 리즈가 7살 되던 해 그들 가족은 미국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해서든 리즈를 영화계에 데뷔시키겠다는 어머니 새라 테일러의 집념은 마침내 결실을 거두어 리즈가 10살 때 처음으로 영화에 출연하는데 성공했다. 1950년대 들어 리즈의 미모는 꽃처럼 활짝 피어났다. 미모와 아울러 원숙한 연기력까지 겸비한 리즈는 제임스 딘과 열연한 ‘자이언트(1956)’‘지난 여름 갑자기’ 등 영화로 일약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여배우가 된다. 1960년대에는 ‘버터필드8(1960)’‘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1966)’에 출연하여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두 차례 수상함으로써 전성기를 누린다. 배우로서의 화려한 경력에 비해 그녀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그녀는 평생을 통하여 8번이나 결혼했다. 그 중 두 번은 같은 남자 리처드 버든과 했다. 원래 기독교 신자였던 리즈는 세번째 남편인 마이크 타드와 결혼하기 위하여 유대교로 개종하였다. 결혼생활은 굴곡이 많았으나 한 번 우정을 맺으면 죽을 때까지 의리를 지키는 것이 그녀였다. 영화 자이언트와 같이 출연했던 록 허드슨이 에이즈로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에이즈 퇴치 운동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아프리카 보츠와나에 병원을 건설하기 위하여 평생의 연인이던 리처드 버튼으로부터 선물 받은 69캐럿짜리 다이아몬드를 기꺼이 기부하였다. 또한 수많은 스캔들과 재판으로 만신창이가 된 말년의 마이클 잭슨을 끝까지 지켜준 것도 그녀였다. 작고 연약하게 태어난 리즈는 평생을 병치레 속에 살아야 했다. 폐렴, 피부암, 관절염, 뇌종양, 디스크, 심장병 등 평생을 수없이 많은 병마와 싸우면서 살아온 리즈는 이제 육신의 고통을 훌훌 벗고 마이클 잭슨과 월트 디즈니 등이 묻힌 LA ‘포레스트 론’ 묘지에서 안장되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2011-03-31

[살며 생각하며] 생각과 문화의 경쟁력

애플 컴퓨터가 최근 아이패드2를 출시했다. 이 분야에는 전혀 문외한이지만 남편은 정반대로 호기심이 많아서 그런지 누구보다 먼저 새로운 전자제품이 나올 때마다 사곤 한다. 새벽 4시부터 아이패드2를 주문할 수 있다고 그 때까지 잠도 안자는 것을 보면서 그 열정에 감탄했다. 매일 우편물을 체크하다가 하필이면 집에 없는 사이 배달원이 온 모양이다. 하루를 기다리지 못하고 페덱스로 가서 아이패드2를 기어이 찾아오는 것을 보며 무엇이 내 남편을 저렇게 열광하게 만들까 생각했다. 전 세계에 그 많은 통신회사들과 휴대전화 제조회사들이 있지만 아이폰과 아이패드 때문에 전전긍긍 한다고 한다. 유일하게 삼성전자가 버티고 있고 앞으로의 시장에서 경쟁이 볼만하다. 이런 것을 보면서 한 사람 특히 리더의 생각이 세상을 바꿀 수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설립자이면서도 회사에서 쫓겨났다 망해가는 회사로 돌아온 스티브 잡스는 결국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시가총액의 회사로 만들었다. 개인적인 성공담보다는 이런 창의적인 생각을 하게 만든 건 미국의 교육과 문화와 시스템이었지 않았을까? 미국의 교육에 대해 많은 문제점을 지적하지만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경쟁력이 분명히 있다. 생각에 대한 무한한 자유, 새로운 생각에 대한 사회의 포용능력, 이러한 것들이 지금의 미국을 만들지 않았나 싶다. 애플컴퓨터에서 보듯 개인이나 국가의 경쟁력은 새로운 기술개발에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인 것은 생각과 문화에 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은 학교 디베이트팀에 속해 있다. 옆에서 지켜보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토론 방식이었다. 어떤 주제를 갖고 토론하는데 번갈아 가면서 다른 입장에서 주장하는 방식이다. 양쪽 주장을 충분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경쟁력이 없다. 어렸을 때부터 이런 훈련이 좋은 리더를 양성하지 않는가 싶다. 우리가 정말 우리 자식들을 경쟁력 있게 교육을 시키고 있을까? 며칠 전 차 안에서 들은 한국 방송에서 한국 대기업들의 이익공유에 관한 토론을 들은 기억이 난다. 시청자 참여를 통해 대기업의 이익공유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듣는 프로그램인데 너무 실망이었다. 사회자가 시작부터 대기업 입장에서 이익공유제의 부당함에 대해 한참 시간을 할애 했다. 내가 실망한 것은 이익공유제에 대한 정당성 유무를 떠나 무엇보다도 사회자가 다른 입장의 주장에 대해 들을 기회를 박탈했다는 사실이다. 잘 모르지만 대기업의 이익공유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사회자는 자본주의 국가에선 이익공유가 있을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일견 맞는 말 같지만 50점짜리 대답이다. 양쪽의 입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 대기업들은 자본주의를 제대로 하고 있을까? 지금의 일부 대기업들은 사실 개발독재시대 때 정부로부터 많은 특혜를 받고 성장한 것으로 안다. 지금은 어떤가. 일부 대기업은 불법에 연루돼 있다. 분식회계, 비자금, 불법상속 등등. 나의 상식으로 자본주의는 자유경쟁을 토대로 한다. 개인마다 능력의 차이를 인정하고 경쟁을 통해서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보다 잘사는 것이다. 아이패드를 보면서 새삼 문화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가깝게 지내는 중소기업 사장의 말이 생각난다. 아이패드 때문에 사업이 잘된다는 그분은 옛날 한국 대기업에 납품할 때는 납품가격이 가장 중요한 요구사항이었지만 애플사는 가격은 제대로 지불하는 대신 품질검사에 철저하다고 한다. 길게 보면 어느 쪽이 성공할까? 이런 것들도 함께 토론해야 되지 않을까?

2011-03-29

[살며 생각하며]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여러 형제 중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여덟 살에 부모를 모두 잃고, 큰형의 집에서 더부살이로 자랐다. 가난한 형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그는 열 살부터 일을 하여 스스로 밥벌이를 해결하고 공부를 했다. 그는 대학에 가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천부적인 재능과 열정으로 자신의 분야에서 실력자가 되었다. 그러나 가난하고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그에게 좋은 직장은 쉽게 오지 않았다. 그의 실력을 인정하고 그를 고용한 사람들은 이런 저런 구실로 그에게 약속한 보수도 제대로 챙겨주지 않았다. 그는 정해진 일 외에도 여러 가지 잡무를 해야만 했다. 보수는 형편없었고, 해야 할 일은 많았다. 언젠가 공개 채용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간 곳에서 그가 보여준 실력은 심사위원 만장일치의 탁월성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 취직을 하지 못했는데, 왜냐하면 재단 측에서 ‘실력보다는 기부금을 많이 내는 후보를 뽑겠다’고 알려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빈자리는 실력은 형편없었으나 많은 기부금을 낸 사람에게 돌아갔다. 그가 실력이 있다는 것은 모두들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대학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공개리에 멸시를 당한 적도 있다. 그는 빠듯한 수입으로 아이들을 낳아 키우며 성실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사색하고, 연구했다. 운이 좋았던 세월도 있었지만, 생활고는 평생 그를 따라 다녔다. 나이가 들자 그는 뇌졸중으로 쓰러졌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에게는 백내장이 찾아왔다. 그는 ‘돌팔이’ 의사에게 두 번의 수술을 받고 완전히 실명하게 되어 마침내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평생 성실하게 살아온 그가 죽어갈 때 아무도 그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았고, 그의 고용주는 그가 죽기 전 이미 후임자까지 뽑아놓고 그를 멸시했다. 그가 죽었을 때 그의 미망인에게 지급되기로 했던 연금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독일의 문호로 알려진 괴테는, 그가 지은 음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했다. “천지창조 이전에 하느님이 자신과 나눈 대화.” 음악계에서 3월은 ‘바로크 음악’의 달이라고 할 만하다. 바로크 음악의 대표적인 작곡가 요한 세바스찬 바하(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의 생일이 3월에 있기 때문에 방송이나 라디오에서도 바하를 위시한 바로크 음악계 거장들의 음악을 다투어 소개한다. 바하의 생일은 3월 21일 혹은 31일로 소개가 되는데, 바하 생존시의 구달력의 날짜를 신달력으로 계산할 경우 31일이 된다. 우리들에게 음력, 양력 생일의 혼선이 빚어지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그래서 내일이 바하의 생일이다. 천지 창조 이전에 하느님이 자신과 나눈 대화 같은 ‘신의 선율’을 우리들에게 남기고 간 바하. 그런데 막상 그의 일대기를 소개하는 책자 속에 담긴 바하의 삶은 서양 음악의 역사에서 ‘바하 이전과 바하 이후’를 가를 정도로 위대했던 한 음악가가 마땅히 누렸어야 하는 삶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위에 소개한 대로 그는 생활고에 시달렸고, 그다지 실력을 인정받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항상 연주를 하고 곡을 썼다. 그는 ‘생활인’으로 평생을 살았다. 바로크 시대의 또 한사람의 명장으로 헨델(Goerge Fredric Handel, 1685~1759)이 있다. 바하와 동일한 해에 태어나서 비슷한 시기에 음악 활동을 한 작곡가이다. 바하와는 달리 헨델은 일찍이 ‘해외 유학’도 하고 영예를 누리며 작곡 활동에 몰두했다. 우리가 화려하고 웅장한 헨델의 음악보다 바하의 음악에 더욱 친근감을 느끼는 이유는 어쩌면 ‘생활인’으로서 성실하게 살다간 바하의 삶이 우리들, 보통 사람들의 삶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고, 그래서 그의 음악 속에 우리의 모습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3월 내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바로크 음악에 취하여 보내면서 종종, 생활고에 시달렸다는 바하의 삶에서 우리 일상의 은혜를 읽는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바하의 ‘G선상의 아리아’를 들으며 푸시킨의 오래된 산문시를 떠올리고 마는 것이다.

2011-03-29

[살며 생각하며] 바람처럼 찾아온 마이크

아주 오랜만에 마이크가 찾아왔다. 봄바람을 들이려 열어 놓은 가게 뒷문으로 바람처럼 소리 없이 들어온 것이다. 한참 일을 하고 있는데 인기척이 있어 뒤돌아 보니 커다란 뿔테 안경을 낀 마이크가 예의 웃음을 환하게 지으며 서 있었다. 그림자 같이 늘 따라다니던 아들 사이먼이 안보이기에 물었더니 리하이대학에서 마련한 정신박약아 프로그램에 다니고 있단다. 장애를 안고 태어난 아들 사이먼은 이제 성인이 되었지만 얼굴표정이나 하는 짓은 아직도 천진스런 어린아이 같다. 마이크는 세일즈를 나갈 때마다 아들 사이먼을 늘 차에 태워 데리고 다니면서 친구처럼 장난도 치고 툭툭 치기도 하면서 참 다정한 아빠가 돼 주었다. 1년에 4만5000마일이나 뛰는 세일즈 트립을 늘 아들과 함께 다니다가 갑자기 혼자 다니게 되었으니 좀 외롭기는 하겠지만 아들이 대학생 자원봉사 선생님들을 잘 따르고 프로그램에도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니 참으로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말할 때 시종 미소를 잃지 않는 희한한 재주를 갖고 있는 마이크는 물가, 리비아 공습, 일본의 원전사태 등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로 수다를 떨면서 정작 화공약품을 사라는 말은 한마디도 꺼내질 않는다. 세탁소용 화공약품을 파는 회사의 고참 세일즈맨이므로 드라이크리닝 비누나 얼룩 제거용 케미컬을 팔러 왔을 터인데 올 때마다 약품 이야기는 안하고 딴청만 피우는 것이다. 이번에도 결국 비즈니스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은 내 쪽이었다. 드라이크리닝 비누가 바닥 났으니 5갤런짜리 하나를 갖다달라고 주문을 한 것이다. 마이크는 단수가 높은 세일즈맨이다. 그는 제품을 팔기 전에 먼저 고객의 마음부터 산다. 고객이 불경기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으면 1960년대 폴리에스터가 등장해서 드라이크리닝 업계가 극심한 불경기를 겪고 있었을 때 선배들이 그 어려움을 어떻게 헤쳐 나갔는지 이야기를 들려줘 용기를 심어 준다. 옷에 묻은 얼룩이 잘 빠지지 않아 고심하고 있으면 소매를 걷어부치고 직접 얼룩제거 작업을 해 보여줘 자사 제품에 대한 신뢰도를 자연스레 높인다. 이렇듯 고객과 허물없는 친구처럼 인간관계를 맺어 놓으면 제품은 사라는 말을 안 해도 자연히 팔리게 된다. 먼저 판매한 제품이 다 떨어져 갈 무렵에 고객을 찾아가서 다시 주문을 받고 신제품이 나오면 한 번 써보라면서 작은 병에 든 샘플을 놓고 간다. 세탁소 경기가 안 좋다 보니 세탁소 용품을 판매하는 업체들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데 회사가 어렵다고 마이크 같은 고참 세일즈맨을 해고시키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 든다. 평생을 세탁소 용품 판매 이외에 다른 일이라곤 해본 적이 없는 마이크가 실직하게 된다면 다른 직장을 구하기도 힘들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아들 사이먼은 어떻게 보살필 것인가. 마이크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바람처럼 가 버렸다. '잘 가게 마이크, 2∼3개월 후 바람처럼 꼭 다시 오게나.'

2011-03-28

[살며 생각하며] 카드·자동차만?…영어도 해야

대학 영문과에 입학한 이래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영어와 관련된 일을 하면서 살고 있다. 그런데 영어를 할 수 있어서 가장 보람을 느꼈던 것은 20여 년 전 한국에서 어느 가족을 도와줬던 일이다. 동네 이웃이었던 그분은 내가 ‘영어 선생’이라는 것을 알고는 아주 어렵게 우리 집 문을 두드렸다. “동생이 미국 사람하고 결혼해서 미국에 갔는데 요새 전화도 안 오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가 없다. 동생네 집에 전화를 걸면 미국인 신랑이 전화를 받는데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고.” 결국 내가 그 미국인과 통화해 이웃과 미국에 살고 있던 동생의 전화 통화가 이루어졌다. 그 자리에 와서 함께 전화 통화를 하던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내게 고맙다고 치하를 했다. 내게는 영어가 별것이 아니었지만 어느 가족에게 영어는 담벼락같이 아득한 장애물이었으리라. 대학원 재학 중에 부속학교의 ESOL 교사로 일을 했다. ESOL 교사의 역할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학생들이 학교에서 영어 때문에 장애를 겪는 일이 없도록 도와주고 영어도 가르쳐주는 것이다. 학생 중에는 미국 학교에 다닌 지 4년이 넘는 중국인 남매들도 있었다. 오누이가 하이스쿨 10학년들이었는데 오빠는 기본적인 의사소통이 힘들었고 누이동생은 그럭저럭 기초 의사소통이 되어서 둘이 힘겹게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미국 공립학교 학생으로 여러 해를 보내면서도 기초 영어 의사소통 능력이 안 되는 이유는 복합적이다. 대부분의 미국 공립학교에서는 학생들이 교실에서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지각 결석을 하지 않고 자리만 꼬박꼬박 지켜도 이를 존중해주는 편이다. 이렇게 그림자처럼 세월을 보내다 보면 학년은 올라가고 영어 실력은 늘지 않는다. 한국계 이민자 가족 중에도 이와 비슷한 사례는 많이 있다. 나는 종종 주변의 지인들로부터 자녀의 학교와 관련된 도움을 요청받는 편이다. 가족 중에 영어 소통이 되는 이가 아무도 없다고 해서 학교에서 급한 일이 있을 때 내게로 연락을 취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그 집은 이민온 지 수 십 년이 되었고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기초적인 영어 소통이 불가능하다. 미국에서 은행카드와 자동차만 있으면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영어 한마디 못해도 은행카드로 물건 사고 차 끌고 돌아다니면서 자유롭게 살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젊은 나이에 이민 와서 고생해 식품점이나 식당, 세탁소 그 밖의 자기 사업을 일구고 자녀 교육도 성공적으로 하고 안정된 삶을 살아가는 중·장년층 이민자중에서 ‘영어’를 아예 손에서 놓아 버리는 사례도 많이 보인다. 영어는 해도 늘지 않고 이제는 먹고 살 만하니까, 자식들도 다 잘 컸으니까, 더 이상 영어 신경 안 쓰겠다는 판단을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미국 땅에 살고 있는 한 영어를 반드시 해야만 하는 상황은 얼마든지 닥칠 수 있다. 영어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취직을 위해서, 사업을 하기 위해서, 그럴 때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내가 사회의 구성원으로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자유롭게 이웃과 친구 되기 위해서도 영어는 필요하다. 아주 사소한 전화 통화라도, 성장한 자식이나 혹은 영어 잘하는 이웃에게 의지하기보다 나 혼자 힘으로 해결하는 기쁨은 얼마나 클 것인가. 영어 고민에서 해방되는 길은 영어책을 집어 던지는 것이 아니고 영어를 익혀서 ‘정복’하는 것이리라. 봄이 왔다. 가을 추수를 위하여 밭을 가는 농부의 마음으로 이제 다시 영어책을 찾아 들고 지역에서 운영하는 무료 영어 교실을 노크해 보심은 어떠하신지.

2011-03-22

[살며 생각하며] 지진, 쓰나미, 원자로 폭발

진도 9의 지진도 모자라 20미터 파도의 쓰나미를 보내 아름다운 센다이 바닷가 마을을 초토화하더니, 그것도 모자라 원자력 발전소를 폭발하게 한다. 하나님, 비극을 어디까지 보여주려 하십니까. 일본의 비극이 아니라 지구의 재앙이다. 우주 속에 생명이 살고 있는 유일한 천체도 재앙이나 비극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렇지 않다면 지구가 천국일 것이다. 일본이 40년 조선을 식민지화 했어도 오늘의 분단도 일본의 식민지 유산에서 비롯되었음을 알아도 이 재앙을 끝없이 보이는 동영상으로 보고나서 다 잊어버릴 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 일본이 원자탄의 희생자라고 주장하던 제자의 얼굴도 지워버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들, 고등학교 체육관에서 자고 먹는 사람들, 폐허를 파헤치며 죽은 자를 찾아 나선 사람들. 어느 전쟁이 그렇게 참혹할 수 있단 말이냐. 한국의 한류 연예인들이 거기서 번 돈을 모두 돌려보낸다. 독도를 자기 섬이라고 주장하는 나라에 독도가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거둔 1000만원을 보낸다. 대학생들이 이재민을 위해 거리 모금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 비극, 재앙 전에 있었던 두 나라 과거는 이제 쓰나미처럼 사라졌다. 오직 살아남은 자에 대한 동정과 연민이 있을 뿐이다. 어느 순간 다시 지진이 일어나고, 쓰나미가 쳐들어올지 모르는 지구의 한 모퉁이에서 우리들은 죄 짓고 살지 말자. 그리고 인간이웃의 사랑을 전하며 살아가자. 살았다 할 것도 없는 삶을 살면서 남을 미워하지 말고 남을 해치지 말자. 파도, 15미터 높이의 파도가 몰려오니 빨리 피신하라던 동사무소 아리따운 처녀가 마이크를 쥐고 파도에 쓸려나갔다. 폭발하고 있는 원자로를 지키기 위해 살신성인하는 50인의 기술자를 보았다. 비극 앞에서 조용히 눈감고 있는 사람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사는 삶을 가르쳐온 사람들을 보았다. 천왕도 조용조용히 말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새 생명이 태어나는 기적을 보았다. 나는 희망을 보았다. 내가 다닌 그 나라 관광지에는 지옥계곡이 너무 많았다. 이제 그 말뜻을 알겠다. 얼마나 많은 재앙을 겪었기에 그들은 지옥이란 말을 여기저기 붙였던가. 백제유민이 세운 나라, 나라에서 시작해 교토를 거처 도쿄로 수도를 옮겨간 나라. 그래서 절이 많은 나라, 성황당이 많은 나라. 이제 조금 그 나라를 알겠다. 계백의 후예가 사무라이가 되어 원자로로 들어가는 사람들. 그 비장함 뒤에서 나도 눈을 감는다.

2011-03-21

[살며 생각하며] 통일의 그 날을 꿈꿔 본다

오늘 통일의 그 날을 꿈꿔 본다. 지금부터 머지 않은 어느 날, 북한에 급변사태가 발생한다. 김정일의 건강악화로 정권 장악력이 떨어지면서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 세습 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북한 주민들은 나이 어린 김정은의 권력승계에 반발하고 주민 여론을 의식한 북한군부 역시 3대 세습에 등을 돌려 결국 김정은 권력이양은 무산되고 만다. 권력의 공백기를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과 김영춘 인민무력부장 등 김정일의 측근과 군부세력이 메우려 한다. 그러나 중동에서 발원된 민주화 바람은 아시아 대륙을 가로질러 결국 평양에까지 불어 닥친다. 남한에서 풍선을 타고 끊임없이 날아가는 전단지와 여행객들을 통해 중국으로부터 유입되는 정보로 외부세계에 눈을 뜨게 된 북한주민들은 극심한 생활고와 60년 세습독재에 항거하며 곳곳에서 주민봉기를 일으킨다. 군부는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진압하여 사상자가 속출한다. 그러나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는 북한주민들의 민주화 요구에 군부도 어쩔 수없이 손을 들게 되고 김씨 일가와 장성택은 중국과 쿠바 등지로 망명한다. 북한사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던 중국은 치안유지를 명분으로 북한에 군대를 파병하고 괴뢰정부를 세우려 한다. 그러나 또 다른 사회주의 독재국가의 출현을 원하지 않는 주민들의 저항과 국제사회의 여론에 밀려 중국은 결국 유엔 평화유지군에게 자리를 내주고 북한에서 철수한다. 북한의 장래를 북한주민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는 국민투표가 유엔 감시 하에 실시된다. 개표결과 북한주민 대다수가 중국에 추종하는 또 다른 사회주의 체제보다는 남한과의 통일을 원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진다. 이로써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있던 한반도는 마침내 대한민국 주도하에 통일이 된다. 한국은 현재의 휴전선과 비무장지대를 당분간 그대로 유지하면서 서서히 남북한 국민의 동질화 작업에 착수한다. 남북융합 10개년 계획을 세우고 이 기간 동안 남한과 북한의 소득격차를 현재의 20대 1에서 2대 1 이내로 줄이기 위하여 북한지역에 대대적인 투자사업을 벌이는 한편 낙후된 도로, 항만, 통신, 철도 등 사회간접자본 건설에 박차를 가한다. 헐벗은 북한의 산림을 녹화하기 위하여 거국적인 식수사업을 추진하고 새마을운동을 통하여 60여 년간 공산독재에 세뇌 당한 북한주민들에게 근면, 자조, 협동의 정신을 불어넣어 준다. 북한 곳곳에 산재해 있는 김일성, 김정일의 동상과 개인숭배 슬로건은 모두 제거된다. 주체사상탑은 철거되고 김일성의 시신이 안치된 주석궁은 통일박물관으로 활용한다. 영변과 평양근교의 핵 처리시설은 평화로운 핵 연구시설로 바뀌고 이미 제조된 핵폭탄은 국제원자력기구의 감독 하에 분해하여 폐기처분 한다. 비무장지대는 매설된 지뢰를 모두 제거한 후 그대로 보존하여 세계적인 생태 관광지로 개발하고 유네스코 사적지로 등록한다. 남북한 주민들은 남과 북을 자유롭게 왕래는 할 수 있으나 10년 동안 거주 이전의 자유는 제한된다. 그러나 남북한 남녀간에 결혼이 성행하여 60여 년간 막혔던 혈연의 물꼬가 트인다. 통일 10년 후, 대한민국은 인구 8000만의 경제, 군사, 산업 대국으로 국제사회에 확고히 자리잡게 된다. 북쪽으로는 중국,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대륙국가로서, 동쪽과 남쪽으로는 일본, 미국, 호주로 통하는 해양국가로서 아시아의 번영과 세계평화에 이바지하는 선진강국이 된다. 경부선 철도는 좁은 한반도를 벗어나 광활한 시베리아를 거쳐 유럽으로 달리고 경부, 호남 고속도로는 만주벌판을 지나 실크로드를 따라 터키 이스탄불까지 연결된다. 인천, 김포, 순안, 김해 공항 등은 중국, 일본, 러시아, 미주, 유럽으로 연결되는 세계 항공교통의 요충지가 된다. 통일 10주년을 기념하여 서울 예술의전당과 평양 동평양 대극장에서는 통일 음악제가 열린다. 뉴욕 필하모닉의 평양공연을 지휘했던 로린 마젤이 특별지휘자로 초청돼 국립교향악단과 평양시립교향악단을 지휘하고 감격의 아리랑이 삼천리 강산에 울려 퍼진다.

2011-03-21

[살며 생각하며] 백남준과의 우주적 대화

예고해 드린 바와 같이, 지난 일요일에 국립미술관의 타워 전시실에서 백남준의 특별전이 시작되었다. 이번 전시회에는 중앙 홀에 세 가지 비디오 아트 작품이 설치되었고, 부속 전시장에 달마도를 주제로 전등을 삽입한 작품과 그의 작업 아이디어를 스케치한 듯한 평면적 회화 소품들이 걸렸으며, 백씨의 일대기 다큐멘터리 영상이 쉼 없이 흘러가고 있다. 전시장에 들어섰을 때, 우리를 강하게 사로잡는 것은 One Candle(하나의 촛불, 1988~2005), 한 손을 내밀고 서있는 부처상(2005), 그리고 Three Eggs(세 개의 알, 1975~1982). 이 세 작품은 주제 면에서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하나의 촛불이 연약하게 흔들리고 있을 때, 실내에 설치된 프로젝터들을 통해 반사되는 각기 다른 크기와 색상의 불꽃들도 흔들린다. 이는 얼핏 ‘초의 불꽃’을 논한 ‘바실라르’를 떠올리게 한다. 혹은 벽에서 흔들리는 아름다운 불꽃들에 취하여 본래의 불꽃의 존재를 잊고 마는 나는 마치도 플라톤이 ‘동굴의 우화’에서 논한, 그림자를 실체라고 믿고 있는 사람과도 같다. 우리는 허상에 취하여 본질로 눈길조차 보내지 못할 수도 있다. 촛불도, 초의 그림자도 외면한 듯, 부처는 벽 쪽을 향해 서 있다. 부처 앞에 포개져 있는 네 대의 텔레비전에 부처의 모습이 비쳐지고, 빙빙 돌아가는 세상이 비쳐지기도 한다. 부처 등에 낙서처럼 백남준이라고 한자로 한글로 휘갈긴 서명은 스스로를 부처로 만들어버리는 백남준의 익살처럼 보이기도 한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1975년에 아이디어를 처음 냈다는 ‘세 개의 알’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여러 가지 상념에 빠지게 된다. 지난 3월 9일자 중앙일보에 ‘요한복음 강해’를 새로 발간한 김흥호 목사의 이야기가 실렸었다. 김씨는 “예수라는 계란이 그리스도라는 병아리가 되었다”고 설명했다. 하나의 알을 영원히 지켜보는 저 비디오카메라와 조명등은 구원자의 기다림인가? 혹은 해탈의 기원인가? 만약에 정말로 하나의 유정란에 적당한 조명을 보내면서 지속적으로 촬영을 한다면 그 알은 깨어나지 않을까? 기독교적 관점에서의 구원자의 탄생인가, 혹은 불교적 관점에서의 해탈인가 하는 종교적 논의는 접어두고라도 이 세 개의 알 작품은 들여다볼수록 신비롭기만 하다. 평범해 보이는 달마도에 손도장을 꾹 찍고 그 손 자리에 전등을 설치해 놓은 그의 작품은 선사시대의 인류가 동굴벽화 속에 남겨 놓은 무수한 손자국의 하나처럼 보인다. 액자에 낙서처럼 담긴 그의 평면적 회화 작품들도 들여다볼수록 놀라운 영감으로 가득 차 있다.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떠오르는 이런저런 생각들을 고등학생 아들과 나누는데 아들이 묻는다. “엄마가 작품을 보면서 느끼는 것들을 작가가 의도한 것일까요? 엄마의 자의적인 해석이 아닌가요?” 관객이 작가가 의도하지도 않은 것을 멋대로 침소봉대로 해석하고 호들갑을 떠는 것이 아닌가 묻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들에게 말해줬다. “예술작품은, 그것이 미술이건 문학이건 음악이건, 작품이 작가의 품을 떠나 관객에게 갔을 때 ‘감상자’와 함께 호흡하며 새로운 생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의도를 들여다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지만, 나의 시각으로 작품을 발견하는 것 역시 새로운 창조 작업과 같은 것이다.” 백남준씨의 비디오 아트를 감상하실 때 특히 두 가지를 유념하시면 예술과 담을 쌓고 사는 분들도 유쾌해 질 수 있다. 첫째, 작품의 ‘현재성 (here and now)’이다. 모든 것은 ‘현재 진행 중’인 것이다. 둘째, 관객이 작품 속에 들어갈 수 있는 ‘참여성’이다. 서있는 부처 작품 속에 내가 들어갈 수 있다. 백남준씨의 비디오아트는 벽에 걸린 정지된 그림들과는 달리, 지금 현재 일어나는 ‘현상’이고, 내가 그 ‘현상’을 비틀거나 변형을 가할 수도 있다. 관객 역시 생산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정말로? 서있는 부처 뒤에 가서 확인해 보시길. 그의 작품 속에선 우리도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촛불은 끄지 마시길.

2011-03-15

[살며 생각하며] 흔들리는 일본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46분. 일본 도쿄에서 동북쪽으로 231마일 떨어진 해저 17마일 지하에서 지구 표층을 이루는 거대한 암석판 중의 하나인 태평양판이 갑자기 요동 치며 북아메리카 판 밑으로 파고들어 갔다. 태평양판은 보통 1년에 3.25인치 정도 서쪽으로 이동해 왔으나 이날 따라 급작스런 움직임을 보이며 북아메리카 판과 충돌한 것이다. 두 개의 암석판이 충돌하면서 진도 9의 강진이 일본열도를 흔들었다. 수퍼마켓 진열대가 넘어지고 물건들이 쏟아져 내렸으며 사무실 벽에 걸려있던 액자와 시계가 바닥에 떨어졌다. 곧 이어 정전이 되고 전화마저 한동안 불통되었다. 그러나 지진보다 더 무서운 것은 바로 뒤에 닥쳐온 쓰나미였다. 북아메리가판이 융기하면서 함께 들어올려진 바닷물은 충격파를 이루며 시속 500마일의 엄청난 속도로 사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진앙지 가까이에서는 충격파의 파장이 길고 파고가 낮았으나 해안에 가까워 지면서 바다 깊이가 얕아지자 파장은 짧아지고 파고는 10m 높이까지 치솟았다. 일본 동북부 해안을 강타한 쓰나미는 평화롭던 해안마을들을 순식간에 집어삼키며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만들었다. 바닷물은 내륙지방 깊숙이 파고들면서 앞에 있는 모든 것들을 사정없이 휩쓸었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지진과 해일에 대한 대비가 철저한 일본이었지만 눈 깜짝할 사이 몰아 닥친 엄청난 자연재해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수많은 자동차들이 장난감처럼 떠내려가고 논밭은 형체도 없이 사라졌으며 가옥들은 급류에 휩쓸려 무너져 내리거나 통째로 떠내려갔다. 항공기와 선박들이 물위에 떠다니다가 마을의 지붕 위에 올라앉는가 하면 컨테이너 야적장에 쌓여있던 색색의 수많은 컨테이너들이 뒤죽박죽 뒤엉킨 채 겹겹이 쌓여 마치 설치미술을 보는 듯하였다. 다음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제1호기가 폭발하였으며 3일 후에는 3호기마저 폭발하였다. 이 사고로 누출된 방사능에 이미 200여 명이 피폭되었다는 소식이다. 무엇보다도 가슴 아픈 것은 미처 대피하지 못하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한 순간에 희생된 것이다. 그들은 차가운 탁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다 끝내 숨을 거두고 어딘가 모를 뻘밭 속에 묻혀 버렸다. 그렇게 희생된 사람들의 숫자가 수천인지 수만인지 아직 아무도 모르고 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가족과 집을 잃은 슬픔을 삭이기도 전에 난방이 안된 대피소에서 추위에 떨며 밤을 지새고 있다. 전기와 수도가 없는 것은 물론 먹을 것과 마실 것, 입을 것과 덮을 것 등 모든 생필품이 부족한 실정이다. 일본정부는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했고 가장 먼저 한국에서 119 구조대가 급파되었다.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 때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이 우물에 독약을 풀고 상점을 약탈하며 부녀자를 겁탈하고 있다는 헛소문을 퍼뜨리며 재일 한국인 2500여 명을 죽창과 몽둥이로 닥치는 대로 살해하였다. 자연재해를 입은 일본인들의 화풀이 대상이었던 한국인들이 이제는 국제사회의 중요한 일원이 돼 재해를 입은 이웃나라 일본을 돕는데 앞장서고 있다.

2011-03-14

[살며 생각하며] 실수열전

찢고, 태우고, 녹이고…. 세탁소를 7년째 하면서 실수 참 많이 했다. 그 중에서도 단연 압권은 3년전 5000달러짜리 웨딩드레스를 통째로 망가뜨렸다. 일이 벌어지려니 그 날 따라 공교롭게도 웨딩드레스 세 벌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폴리에스터 재질에 구슬장식이 잔뜩 달려있고 와인 얼룩이 여기 저기 묻어있기에 물 세탁을 하기로 하고 드레스를 그물 백에 담아 세탁기에 넣고 손빨래 모드로 돌렸다. 구슬장식이 신경이 쓰여 건조할 때도 온도를 저온으로 맞추고 오랫동안 말렸다. 세탁과 건조가 끝난 후 걸어놓고 보니 와인 얼룩도 말끔히 빠졌을 뿐 아니라 흰색이 눈부실 정도로 살아나고 구슬장식 또한 말짱했다. 이렇게 두 벌을 연거푸 빨고 나서 마지막 한 벌도 같은 방식으로 세탁했는데 건조기에서 꺼낼 때 왠지 촉감이 좀 이상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뻣뻣하고 주름이 심하고 크기가 많이 줄어있는 것이 아닌가. 화들짝 놀라 다시 ‘케어 레이블’을 보았더니 '100% Silk, 드라이크리닝 온리'로 돼 있었다. 아뿔싸, 실크 웨딩드레스를 물로 빨다니. 다른 두 벌의 드레스가 폴리에스터 재질이고 촉감이 비슷하기 때문에 그것도 폴리에스터로 착각했던 것이다. '아이쿠 죽었구나.' 갑자기 눈앞이 노래지고 입 속이 바짝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을 어찌하랴. 나는 줄어든 크기만이라도 좀 늘려보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웨딩드레스 자락을 두 손으로 잡고 양 옆으로, 아래 위로 힘껏 잡아 당겨 보았다. 그랬더니 실크 천이 트면서 자글자글 수도 없이 많은 줄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줄어든 데다 트기까지 하다니. 다른 것도 아니고 갓 결혼한 젊은 부부가 평생을 추억으로 간직해야 할 소중한 웨딩드레스를 망쳐 놓았으니 이 일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손님한테 말하지 않고 그대로 다려서 박스 속에 넣어두면 아마도 오랫동안, 어쩌면 평생 다시 열어보지 않을지도 몰라' 하는 음흉한 유혹이 마음속에서 똬리를 틀었으나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똑같은 모양의 드레스를 사주기로 하고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았다. 그러나 그 드레스는 디자이너 브랜드라서 같은 모양의 드레스는 찾을 수 없었다. 하는 수없이 드레스를 들고 우드브릿지몰과 쇼트힐몰 등지를 돌아다녀 보았으나 같은 드레스는 아무 데도 없었다. 걱정 속에 일주일이 흘렀다. 나는 고객이 드레스를 찾으러 올 때까지 기다리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저녁때 고객의 집으로 찾아갔다. 갑자기 집으로 찾아온 세탁소 주인을 보고 의아해 하는 고객에게 나는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말을 꺼냈다. "드, 드레스를 망쳐 놓았습니다. 모두 제 잘못이므로 끝까지 책임지도록 하겠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내 말을 듣고 있던 고객은 가게로 드레스를 보러 갈 것이니 그 때가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다음날 고객 부부가 찾아와 다림질 해 걸어놓은 드레스를 보더니 "많이 망가졌네요. 어떻게 하시겠어요?""제가 돈을 드릴 터이니 똑같은 드레스를 한 벌 사십시오.""똑같은 드레스는 있지 않아요. 가격도 5000달러가 넘는걸요.""그럼 제가 5000달러를 물어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은 작은 소리로 무언가 서로 상의하더니 어쩔 줄 모르고 서있는 내게 말하였다. "200달러만 물어주세요. 현금은 필요 없고 크레딧으로 주시면 되요."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2000달러도 아니고 200달러이라니. 그것도 크레딧으로…. "이 드레스는 결혼식 때 이미 입은 옷입니다. 드레스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념이 되기에는 충분하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상황을 솔직히 말해줘서 고맙습니다. 어서 200달러 크레딧 메모를 써주세요." 망가진 드레스를 들고 아무 일 없었던 듯 가게 문을 나서는 젊은 부부에게서 나는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2011-03-10

[살며 생각하며] 백남준, 국립미술관 '타워' 에 온다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 백남준(1932~2006) 기획전이 국립 미술관의 동관에서 오는 13일부터 10월 2일까지 열린다. 워싱턴 디씨의 국립 미술관(National Gallery of Art)은 서관(West Building)과 동관(East Building)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관에는 세계 고전 미술이 망라되어 있고, 동관에는 현대미술이 주로 전시되고 있다. 국립 미술관에서는 2009년부터 In the Tower(탑에서)라는 타이틀로 타워 전시장에서 장기 기획전을 시작했다. 첫해인 2009년에는 미국 현대 추상미술의 대가인 필립 거스톤 (Philip Guston)을 선보였고, 지난해에는 추상표현주의 작가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기획전이 있었다. 이들에 이어 올 봄에 세 번째 기획전으로 백남준씨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6개월 이상 관객들과 대화를 하게 된다. 이전에 소개된 필립 거스톤이나 마크 로스코는 특유의 자신만의 화법으로 미국 미술을 세계 미술계에서 한 단계 도약시킨 유태계 거장들이고, 한국계 백남준은 시청각 예술과 테크놀로지와 세계의 신화를 융합시킨, 미국이 두고두고 자랑할 만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거스톤과 로스코가 전시되는 중에도 나는 이 곳을 여러 차례 방문하였었는데, 그 자리에서 백남준씨의 기획전을 보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지난 2월 국립미술관에 갔던 나는 백남준씨의 전시회를 준비 중이라는 안내 포스터 앞에서 한국에 두고 온 친정 오라비를 만난 듯한 각별한 기쁨을 느꼈다. 그리고는 달력의 3월 13일에 빨간 동그라미를 쳐 두었다. 개관하는 날 가서 그의 작품들을 보려고. 그리고 학생들과 필드트립을 갈 계획도 세워두었다. 이 전시회에서는 백남준의 입체적 비디오 아트 작품들 이외에 그의 회화나 스케치 작품도 별도로 공개가 될 것이고, 그의 삶과 예술과 관련된 영화도 한편 틀어준다고 한다. 그러므로 설령, 백남준에 대하여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다고 해도 관객이 현장에서 그를 만나고 그를 이해하는 데는 큰 문제가 따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난 1월 5일자 칼럼에서 국립미술관에 있는 그의 ‘엄마’라는 작품과, 2월 2일자에서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소장품인 Megatron/Matrix라는 작품을 소개한바 있다. 이번 기획전에서 국립미술관은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거나 임대해온 작품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스미소니안 미국 미술관에서는 백남준을 위시한 현대 비디오아티스트들의 작품들을 한 전시장에서 선보이고 있기도 하다. 리치먼드에 있는 버지니아 미술관(Virginia Museum of Fine Arts)에서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부처(Buddha, Watching TV)’를 만나 볼 수 있고, 버지니아 남부 해안도시 노폭(Norfolk)에 있는 크라이슬러 미술관(Chrysler Museum of Art)에서는 햄릿 로보트 (Hamlet Robot)도 만나볼 수 있다. 지난해 6월 한국을 방문했을 때, 덕수궁 미술관에서 열린 ‘달은 가장 오래된 시계’라는 기획전을 관람한 적이 있는데, 그 곳에서도 백남준의 예술 세계를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를 ‘비디오 아티스트’ 정도로 알았지만, 그 당시 전시장에서 만난 그의 회화 작품들이 내게는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왜냐하면 1970년대 초반에 그가 스케치하듯 그려낸 작품들 속에 오늘날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스마트 폰’의 화면 같은 장면들이 흘렀기 때문이다. 그 때 백남준씨가 내 뒤통수를 한대 가격한 듯 한 충격을 받았다. 백씨는 오십 년 혹은 백년 후의 세계를 앞서 간 예술가처럼 보였던 것이다. 평생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공부를 멈춘 적이 없으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번개 같은 아이디어를 말로 천천히 표현하지 못해서 말이 종횡무진 건너뛰었다는 백남준. 그가 3월 13일, 우리 곁에 온다. 미국이 자랑하는 국립 미술관의 타워에 부처처럼, 선지자처럼, 그의 작품들이 온다. 전시회는 10월 2일까지 계속될 것이고, 그의 예술은 영원히 우리 기억에 남을 것이다.

2011-03-08

[살며 생각하며] 죽어가는 가축, 슬픈 산하

“우리가 생존을 위하여 육류를 먹는 일은 도의적으로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바르게 행동해야 한다. 우리는 가축들에게 마땅한 삶을 제공해야 하며, 고통 없이 목숨을 끊어야 한다. 우리는 가축들에게 경의를 표해야 한다.” 가축 행동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콜로라도 주립대 교수로 재직 중인 템플 그랜딘 (Temple Grandin)박사는 2010년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명의 인물에 선정되기도 하였는데, 그는 두 가지 이유로 유명하다. 첫째는 그가 ‘자폐증’을 딛고 최고의 학문 경지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둘째는, 남성 중심의 미국의 축산계에 여성의 몸으로 뛰어든 그가, 고기로 넘겨지는 동물들을 위해 고통 없는 죽음, 평화로운 죽음을 돕는 시스템을 개발해 냈다는 것이다. 템플 그랜딘 박사는 심신 장애인에게 역할 모델이 될만한 횃불 같은 존재로 존경을 받고 있다. 말 못하고 인간의 식탁에 오르기 위해 죽어가는 동물들에게도 그이는 영웅일 것이다. 그는 짐승의 고기를 먹는 일은 어쩔 수 없지만, 그들을 무참하게, 고통스럽게 도살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다. 지난 해 가을부터 한국에 구제역이 번지면서 해를 넘긴 2월 말 현재도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고, 이제는 매몰된 가축의 처리마저 큰 근심이 되고 있다. 봄기운이 도는 우리나라의 여기저기서 산채로 매장된 돼지의 시체가 땅 위로 솟아오르거나 그 잔해가 지하수를 오염시키는 또 다른 재앙이 발생하고 있다는 국내 기사가 암울하다. 구제역 발생 초기에 축산 농가에서 정성 들여 키운 소와 송아지들을 죽여야 했던 축산 농가 사람들과 도살을 담당한 공무원들의 가슴 아픈 사연이 알려질 때, 나 역시 이 상황이 너무나 슬퍼서 기사를 제대로 읽을 엄두를 못 냈었다. 그런데 구제역이 확산되면서 돼지 떼를 일일이 해결하지 못하고 한군데에 몰아넣고 생매장을 시켰다는 대목에서는, 멀리서 편안하게 살아가는 나의 존재 자체가 죄스럽고 참혹했다. 이 문명시대에 아무 죄도 없는 돼지들을 속수무책으로 생매장해야 했던 사람들은 얼마나 비참했을 것이며, 영문도 모르고 발버둥치며 죽어간 돼지들은 또 어떠했을 것인가? 나는 시골 농가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할머니는 정성 들여 키우던 우리 개 ‘누렁이’도 한여름 때가 되면 동네에 돌아다니는 ‘개장수’에게 팔아 넘겼는데, 떠나가는 개를 자식처럼 쓰다듬으며 “좋은 세상으로 가라”고 몇 번이고 축수해 줬다. 닭장의 닭들도 집에 귀한 손님이 오시면 살집 좋은 놈으로 잡아다 그 자리에서 백숙을 만들었지만, 닭들을 돌보는 할머니의 손길은 손자인 우리들을 돌보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정성 들여 키운 소 역시, 집안에 큰 돈이 필요할 때 수원장에 끌고 나갔다. 소를 우시장에 끌고 나가는 것은 할아버지의 몫이었는데, 막걸리 냄새를 풍기며 저녁나절에 돌아온 할아버지는 텅 빈 외양간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어릴 때, 학교 앞에서 파는 병아리를 사다가 키웠는데, 그 중에 네 마리가 무럭무럭 자라 어른이 되었다. 나는 날이 궂고 추워지면 그 닭들을 커다란 새장에 모두 담아가지고 내 방에 들여놓기도 했다. 내 닭들은 나의 ‘친구’였으며, 그 닭들은 나를 어미처럼 따라다녔다. 사람들은 닭이 머리가 나쁘다고 하지만, 내가 키운 닭들은 사람만큼이나 영리해 보였다. 한여름이 되자 이들은 단체로 삼계탕으로 변신하여 밥상에 올랐다. 나는 내 친구들이 떼죽음을 당한 것을 슬퍼하며 며칠을 울었는데, 삼계탕으로 영양을 보충한 식구들의 표정은 기름지고 즐거워 보였다. 그것이 인생이었고, 나도 하는 수 없었다. 어찌되었건 가축과 우리는 가족으로 공존을 했다. 그래서 ‘먹을 때 먹더라도 잔인하게 죽이지는 말자’는 그랜딘 박사의 주장에 나는 깊이 공감한다. 죄 없는 가축들이 생매장 당하는 상황도 딱하고, 이를 눈뜨고 바라 봐야 하는 축산농의 상황도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이로 인해 오염되는 우리의 산하도 슬프다. 한국 정부에서 이 가축 생지옥 같은 구제역 사태를 현명하게 수습하여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2011-02-22

[살며 생각하며] 섹스프리 관광? 국회의원의 '오렌지 영어'

지난주 한국에서는 한 여당 의원의 발언이 물의를 빚었다. 그는 “한국은 의료와 관광을 특화시켜야 한다. 섹스 프리하고 카지노 프리한 금기 없는 특수지역을 만들어 중국과 일본 15억 명의 인구를 끌어들여야 한다”고 발언했는데, 이에 한 야당 의원이 그를 비난했다는 것이다. 기사를 읽던 나는 잠시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아니 여당의원이 섹스프리(sex-free)하고 카지노프리(casino-free)한 아름다운 관광 특구를 만들겠다는데 왜 반대를 하는가? 이야말로 김구 선생님이 꿈꾸시던 아름다운 문화의 나라가 아닌가? 그런데 기사를 마저 읽다 보니 슬슬 윤곽이 잡혀왔다. 그러니까 그가 의도한 본래 뜻은 ‘free-sex’, ‘free-casino’ 쯤이었으리라. 섹스도 자유롭게 카지노도 자유롭게, 그런 신나는 관광 특구를 한국 어딘가에 조성을 하시겠다는 발상이렷다. 그분의 생각도 기이하지만, 그분이 사용한 영어도 참 자유분방하셔서 쓴 웃음을 짓고 말았다. 한나라의 입법기관, 국회의원이라는 분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생각도, 언어도 참 한숨이 나온다. 영어에서 어떤 어휘에 잇대어서 ‘-free’라는 어휘를 붙이면 새로운 뜻이 형성되는데 이 때에도 일정한 규칙이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요즘은 건강을 지키기 위하여 식이요법에 관심을 가진 이가 많고, 그래서 식품점에서도 꼼꼼하게 성분표나 칼로리를 점검해보는 경우가 많다. 설탕이 들어가지 않는 음료를 고르는 사람은 무가당 음료(sugar-free drink)를 찾는다. 비만이나 고혈압이 염려스러울 때는 지방질이 제거된 식품(fat-free food)에 관심이 많다. 직장 중의 으뜸은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 일터(stress-free job)가 될 것이다. 요즘 금연 운동이 범사회적으로 진행되면서 비흡연 구역(smoke-free zone)이 늘어나는 추세라서 흡연자들의 애로가 많다. 미국의 초 중 고등학교에서는 정기적으로 학생들을 대상으로 마약의 위험성을 알리는 교육을 실시한다. 마약 없는 학교(drug-free school)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운전 중 핸드폰으로 사용하면 주에 따라서는 교통경관이 발부하는 티켓을 받을 수도 있다. 이 경우에는 핸즈프리 (hands-free) 모바일폰을 사용하면 된다. 손을 사용할 필요가 없는 도구들을 가리킬 때 hands-free라는 형용사를 붙인다. 위에 열거된 예문에서 어떤 규칙성을 발견하신 독자라면, 장담컨대 ‘언어학자’가 될 소질을 갖고 태어나셨다고 할 만 하다. 어떤 어휘에 ‘-free’를 이어 붙이면 ‘무엇이 제거되거나 금지되거나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형용사’가 된다. 그렇다면, 이 원리를 sex-free, casino-free에 적용시켜 보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자연스럽게 우리는 ‘섹스 산업이 없는’, ‘카지노 산업이 없는’ 상황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아쉽게도, 섹스프리, 카지노프리를 주장한 의원님의 영어는 그 반대 뜻이었던 모양이다. 섹스산업과 카지노 산업이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관광 특구. 내가 나이 사십을 넘긴 어른이 된 후에도 도통 이해를 못하는 현상이 몇 가지 있다. 가령, 마약은 위험하다고 금지시키면서, 역시 인체에 해롭다는 담배는 왜 버젓이 팔리는 것일까? 카지노를 사행성 오락장으로 보면서 왜 그런 사업을 합법화하고 영업을 허가하는 걸까? 성매매가 부도덕한 행위임을 알면서 어떻게 성매매 자유구역을 선포할 생각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인가? 물론 내가 지대한 도덕주의자라서 모든 것을 다 없애버리자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가끔 사회가 지탄하는 대상을 사회가 허용하는 것을 보면, 나의 판단력에 자신감을 잃게 된다. 그 ‘섹스프리, 카지노프리’ 의원께 묻고 싶다. “당신은 가족과 더불어 떳떳하게 카지노에서 놀고, 자유 성매매를 하고 싶은가? 정말 그러고 싶다면 당신이 좋아하는 그 자유 충만한 도시로 ‘프리하게’ 가라. 하지만 한국을 당신의 몰상식한 놀이터로 만들 궁리는 접으시길.”

2010-11-09

[살며 생각하며] 아내들의 이유있는 '파업'

영국의 유명한 삽화가이자 동화작가인 앤서니 브라운의 작품 중에 '돼지책'이 있다. 남편과 아이들은 엄마만 보면 매일 돼지처럼 먹을 것을 해달라는 얘기만 하고 엄마는 외롭게 집안일만 하다가 지쳐간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너희들은 돼지야'라는 메모를 남기고 집을 나간다. 엄마가 집을 나가자 남은 가족들은 엄마가 하던 일을 하는데 결국 집안은 돼지우리처럼 지저분해지고 결국 그 동안 엄마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를 깨닫게 된다. 엄마는 묵묵히 가족을 위해 희생했지만 가족은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엄마의 존재를 오히려 무시했다. 어른들이 이 동화를 읽고 내린 결론은 '주기만 하면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부부관계도 마찬가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헌신적으로 하되 상대에게 그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상기시켜 주는 것도 중요하다. 생색을 내라는 것이 아니라 고마움을 알고 그 마음을 표현하게 하라는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외국인 부부가 겪은 일이다. 남편은 직장에 다니고 아내는 세 아이를 돌보며 살림을 하는 전업주부다. 아내는 명퇴나 구조조정의 칼바람을 피해 열심히 일하는 남편에게 고마워하고 그래서 늘 헌신적이다. 하지만 남편은 아내의 일을 당연하게 여기고 자신이 대단한 일을 한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남편의 독단적인 행동에도 아내는 '뭘 몰라서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도무지 나아지지 않는 그의 오만에 지치고 말았다. 그녀의 선택은 '돼지책'의 엄마와 같은 가출이 아니라 보다 현실적인 접근이었다. 그녀는 남편에게 폭탄선언을 했다. 한달 동안 남편을 위해 하던 일들을 중단한다는 것이다. 식사준비 세탁 청소 약속을 알려주는 것 매일 챙겨야 하는 일들을 준비해주는 것 등을 남편 스스로 하라는 것 다만 아이들은 부부문제와 별개이니 그녀가 돌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파업은 일주일 만에 끝났다. 며칠 동안 혼자 밥하고 다림질을 하던 남편이 항복을 한 것이다. 나가서 돈을 버는 일은 대단하고 집에서 내조하는 일은 하찮게 여기던 남편은 처음에는 아내의 행동에 큰 충격을 받고 화를 냈지만 점차 아내의 일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고 한다. 물론 이 부부의 얘기는 흔치 않은 경우다. 아내의 해결방식이 모든 사람들에게 다 효과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자신의 가치 혹은 자신이 하는 일의 중요성을 스스로 아는 것이야말로 꼭 필요한 삶의 자세다. 이기적이거나 잘난척하라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 대한 당당함은 남녀관계를 탄력있게 만든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어떤 이유에서든 상대의 가치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상대가 그런 생각을 하더라도 자신이 스스로를 방어하는 적극성이 있어야 한다. 자신이 얼마나 특별하고 멋진 사람인지 상대가 알게 하라. 한편으로 상대의 존재도 귀하게 여겨라. 정말 사랑하는 사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두 사람이 함께 한다는 그런 충만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2009-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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