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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백수와 반백수

남편은 반백수, 나는 백수다. 백수와 반백수가 함께 사는 집은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 아침에도 전혀 바쁠 일이 없다. 커피 내려지는 모습을 여유롭게 기다릴 수 있다.     남편은 응급실을 두 번 갔다 온 후로 일을 줄여 반백수가 되었고, 나는 일찌감치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백수가 되었다. 건강이 나빠져 일 년여를 한국에서 보낸 후 자연스럽게 하던 일을 놓았다.     백수 생활이 길어지다 보니 백수를 진정으로 즐기기 위해서는 건강이 필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잊지 말고 해야 할 것이 운동이다. 체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이제야 많아진 시간을 누릴 수 없다. 백수가 되고 나서 정해진 시간 안에 꼭 해야 하는 일들이 많이 줄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때는 방학이나 휴일에만 여행이 가능했다.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주중에 불현듯 떠날 수도 있다. 젊은 날보다 멀리 가는 것은 어렵다. 일주일 정도만 예정해도 챙겨야 할 약이 한 보따리가 된다.     지난주 목요일에는 늦은 아침을 먹고 빈둥거리다 세코이아 국립공원을 다녀왔다. 계획했던 일이 아니므로 11시쯤 늦게 출발하게 되었다. 왕복 400 마일이 넘는 만만치 않은 길이다.     중간쯤 갔을 때 즐겨가는 햄버거 가게에 잠시 멈췄다. 점심시간이라 줄이 길었다. 입구에 있는 키오스크에서 주문해 보기로 했다. 햄버거 종류가 화면 가득하다. 햄버거와 치킨너깃을 주문하고 소스를 선택하고 음료를 정했다. 선택해야 할 것이 생각보다 많았다. 몇 번 실패하고 우여곡절 끝에 주문을 완료했다. 줄 서는 것이 오히려 빠를 뻔했지만 이렇게 신문물을 하나씩 배워 간다. 대단한 것을 이룬 것처럼 우쭐해졌다.     세코이아 박물관에 도착하니 4시 45분이었다. 입구에 5시에 닫는다고 쓰여 있었다. 서둘러 대충 보고 나왔다. 시간이 넉넉했으면 좋았겠지만 언제든 다시 올 수 있으니 많이 아쉽지는 않았다. 이것이 백수의 특권 아니겠는가.   백수가 시간을 보내는 데는 어떤 기준이 없어 좋다. 무리한 계획을 세우지도 않는다. 내 속도로 가면 된다. 사부작사부작 하찮은 일을 하면서 산다.     백수가 되자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많아졌다. 깊은숨을 쉬며 내 안을 들여다본다. 익숙한 내가 낯선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고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될 수 있는 시간이라서 좋다.   특별한 일이 없는 일상에 감사한다. 그날이 그날인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젊은 날에는 알지 못했다. 하늘까지 올라갔다가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경험을 수차례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 일이다. 진정한 백수는 가진 시간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사람이다. 이미 살아버린 세월의 아쉬움과 나이 들어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를 앞날에 대한 불안을 접어두고 오늘을 기쁘게 살아가려 한다. 그래야 삶을 즐기는 백수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박연실 / 수필가이 아침에 반백수 백수 백수 생활 햄버거 가게 햄버거 종류

2022-09-19

[이 아침에] 백수와 반백수

남편은 반백수, 나는 백수다. 백수와 반백수가 함께 사는 집은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 아침에도 전혀 바쁠 일이 없다. 커피 내려지는 모습을 여유롭게 기다릴 수 있다.     남편은 응급실을 두 번 갔다 온 후로 일을 줄여 반백수가 되었고, 나는 일찌감치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백수가 되었다. 건강이 나빠져 일 년여를 한국에서 보낸 후 자연스럽게 하던 일을 놓았다.     백수 생활이 길어지다 보니 백수를 진정으로 즐기기 위해서는 건강이 필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잊지 말고 해야 할 것이 운동이다. 체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이제야 많아진 시간을 누릴 수 없다. 백수가 되고 나서 정해진 시간 안에 꼭 해야 하는 일들이 많이 줄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때는 방학이나 휴일에만 여행이 가능했다.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주중에 불현듯 떠날 수도 있다. 젊은 날보다 멀리 가는 것은 어렵다. 일주일 정도만 예정해도 챙겨야 할 약이 한 보따리가 된다.     지난주 목요일에는 늦은 아침을 먹고 빈둥거리다 세코이아 국립공원을 다녀왔다. 계획했던 일이 아니므로 11시쯤 늦게 출발하게 되었다. 왕복 400 마일이 넘는 만만치 않은 길이다.     중간쯤 갔을 때 즐겨가는 햄버거 가게에 잠시 멈췄다. 점심시간이라 줄이 길었다. 입구에 있는 키오스크에서 주문해 보기로 했다. 햄버거 종류가 화면 가득하다. 햄버거와 치킨너깃을 주문하고 소스를 선택하고 음료를 정했다. 선택해야 할 것이 생각보다 많았다. 몇 번 실패하고 우여곡절 끝에 주문을 완료했다. 줄 서는 것이 오히려 빠를 뻔했지만 이렇게 신문물을 하나씩 배워 간다. 대단한 것을 이룬 것처럼 우쭐해졌다.     세코이아 박물관에 도착하니 4시 45분이었다. 입구에 5시에 닫는다고 쓰여 있었다. 서둘러 대충 보고 나왔다. 시간이 넉넉했으면 좋았겠지만 언제든 다시 올 수 있으니 많이 아쉽지는 않았다. 이것이 백수의 특권 아니겠는가.   백수가 시간을 보내는 데는 어떤 기준이 없어 좋다. 무리한 계획을 세우지도 않는다. 내 속도로 가면 된다. 사부작사부작 하찮은 일을 하면서 산다.     백수가 되자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많아졌다. 깊은숨을 쉬며 내 안을 들여다본다. 익숙한 내가 낯선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고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될 수 있는 시간이라서 좋다.   특별한 일이 없는 일상에 감사한다. 그날이 그날인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젊은 날에는 알지 못했다. 하늘까지 올라갔다가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경험을 수차례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 일이다. 진정한 백수는 가진 시간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사람이다. 이미 살아버린 세월의 아쉬움과 나이 들어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를 앞날에 대한 불안을 접어두고 오늘을 기쁘게 살아가려 한다. 그래야 삶을 즐기는 백수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다음 주는 또 어디로 떠나볼까 궁리 중이다. 요즈음처럼 뜨거운 여름은 아무래도 바닷가가 제격일 듯싶다. 반백수와 백수의 취향이 얼추 비슷해졌다. 다행이다. 박연실 / 수필가이 아침에 반백수 백수 백수 생활 햄버거 가게 햄버거 종류

2022-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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