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마음읽기] 환한 세상에서 살다 가야 해

그저께와 어제 제주에는 찬바람이 불고 싸라기눈과 함박눈이 내렸다. 산죽 푸른 잎에 싸라기눈이 떨어지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들었다. 바람에 회오리가 있어서 담장 아래 수선화의 꽃대는 꺾여 있었다.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서 버팀목으로 받쳐주었다.   시골 마을의 겨울밤은 더 적막하다. 그래서 작은 소리 하나도 벼락이 치는 듯이 크게 들려온다. 육지의 고향집에서 호두를 보내온 것이 있었는데, 어젯밤에는 호두를 깠다. 호두는 껍데기가 울퉁불퉁하고 단단해서 깨기가 쉽지 않았지만, 속이 꽉 차도록 잘 여문 것을 볼 적에는 흐뭇함이 있었고 또 그걸 겨울밤에 하나씩 까고 있으니 한적한 마음이 찾아왔다. 그러면서 한가한 마음의 한구석에는 이런저런, 소소하지만 인상적이었던 지난 일의 무늬가 만져지기도 했다.   개중의 하나는 “환한 세상에서 살다 가야 해”라는 말이었다. 이 말은 제주도 출신인 문충성 시인의 시집을 읽다 ‘생명(生命 1)-콩밭에서’라는 제목의 시에서 발견한 시구였다. 시인은 우리가 “차가움 속에 나자빠져 얼마만 한 세월을 속 썩혀 왔나”라며 탄식했다. 그러면서 마치 한 알의 콩이 어둠의 땅속에서 “눈부신 빛”을 기어코 찾으려고 하듯이 그리하여 싹트듯이 “자그마한 기쁨의 씨앗들”이 깨어나게 하라고 당부했다. 이 시구를 접했을 때 혹시 나는 나를 스스로 비탄과 절망의 흙 속에 자꾸자꾸 가두려고 하지 않았는지를 자문했다.   다른 일화도 떠올랐다. 지난달에 초등학교 동기들을 만나 함께 밥을 먹은 적이 있었다. 그날은 몇몇 동기가 송년회 모임을 갖고 난 며칠 후였다. 송년회에 참석했던 친구 가운데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송년회에 안 나온 사람 안부를 묻지 말고, 나온 사람 안부를 물어야 되는 거 아냐?”그 친구의 말에 따르면 송년회를 갖자고 모여선 정작 모임에 나오지 않은 사람들 안부만 묻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 친구의 말은 모임에 오지 않은 사람의 안부를 묻는 것이 쓸모나 득이 될 것이 없다는 뜻은 아닐 것이었다. 그런 의미보다는 내 눈앞에 있는 사람에 대한 인사와 반가움을 표현하는 일을 뒤로 미루지 않았으면 한다는 의미일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나도 누군가를 만나 내 앞에 그 사람을 마주하고서도 그와 속마음을 더 충분하게 얘기하지 않은 탓에 그와 헤어지고 돌아올 때면 아쉽고 미안한 마음이 들 때가 있었다. 이런 경우는 가령 내게 큰 기쁨이 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게 온 큰 기쁨을 내 마음이 온전하게 즐길 수 있도록 그 시간을 넉넉하게 주지 않을 때가 많았다. 여기 있으면서도 딴 데를 자꾸 서성이는 그런 마음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생각난 것은 얼마 전 모임에 갔다 주고받는 대화 중에 우연히 들은 말이었다. 연장자인 그 어른은 글을 쓰는 분이었는데, 연세가 팔순이 넘었다.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이가 드니까 심심해져요. 바다를 보아도 세 해 전 바다와 달리 이제 아무 느낌이 없어요.” 그러자 그 말을 듣고 있던 한 사람이 말했다. “그게 잘 사신 겁니다. 나이가 들면 감정과 욕망에서 벗어나야 해요.” 그 어른께서 말씀하신 심심하다는 것의 의미가 어쩌면 요즘에 도통 감흥이 적어 시심(詩心)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걱정의 고백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지만, 감정의 동요 없이 만사를 그저 예사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안목을 얻은 것이라면 그것이야말로 노경(老境)에 성취할 만한 높은 경지의 시심이기도 할 테니 분명 부러운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바라봄은 수평선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앞서 소개한 문충성 시인은 ‘수평선(水平線)’이라는 시에서 “인간이 사는 땅을 자애(慈愛)의 손길로 재우고 있는 수평선(水平線)”이라고 멋지게 썼다. 격랑 너머에서 한 줄 흰 줄로 세상의 둘레가 되는, 자애의 둘레가 되는 수평선처럼 감정과 욕망을 덜어낸 그 묵묵한 자리, 덤덤하게 된 그 마음씨라면 지혜와 깨달음의 식견이 아닌가 싶었다.   우리는 마음이 한적한 때에 이르러 그동안 알게 모르게 마음에 새겨진 여럿의 무늬를 읽기도 한다. 그 무늬는 흐릿하고 잔잔한 것도 있고 짙고 격렬한 것도 있다. 화로의 불씨 같은 것도 있고 요즘의 바깥처럼 차가운 얼음 같은 것도 있다. 어젯밤에 나는 이 무늬 몇 개를 손으로 쓸어 어루만졌다. 그리고 기억의 무늬를 쓰다듬고 있노라니 무늬는 삼가게 하고 엄숙하게 해 삶에 성스럽게 머무르게 했다.   밤이 제법 깊어서야 호두를 까는 일이 끝났다. 바람 소리는 비탈이 쏟아지는 듯이 훨씬 거칠어졌다. 그러나 앞의 세 가지 일을 떠올리고 나니 내 마음도 집도 환한 빛이 감싸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그리고 내면에 천리향 화분 하나를 기르고 있는 듯이 그윽한 향기가 감돌았다. 문태준 / 시인마음읽기 가야 마음속 송년회 모임 문충성 시인 사람들 안부

2024-01-28

[마음읽기] 평화로운 체념이냐, 두려운 분노냐

지난해부터 독서모임 커뮤니티 스타트업인 트레바리에서 클럽장을 맡아 두툼한 ‘벽돌책’을 읽는 클럽을 부정기적으로 운영한다. 한 시즌이 4개월인데, 그 기간에 벽돌책 읽기 클럽 회원 10여 명과 한 달에 한 번 만나 내가 고른 벽돌책을 놓고 독서토론도 벌이고 사는 얘기도 한다. 다른 회원들은 어떻게 느낄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모임이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고, 배워가는 것도 많다.   벽돌책이라는 말이 공식 용어도 아니고, 그냥 ‘700쪽 이상’을 기준으로 잡았다. 클럽 주제를 벽돌책으로 정한 데에는 이기적인 이유가 있었다. 한 신문 북섹션에 ‘장강명의 벽돌책’이라는 독서 칼럼을 쓰고 있는데 연재를 이어가려면 매달 벽돌책을 한 권씩 읽어야 한다. 기왕 읽는 책, 이걸로 독서토론도 해보자 싶었다. 고로 아직 읽지 않은 책을, 표지와 출판사에서 작성한 소개 자료만 보고 북클럽 주제도서로 고른다.   지난달에는 영국 경제사학자 애덤 투즈의 『붕괴』를 골랐다가 회원들의 원성을 샀다. 964쪽이나 되는데 분명 의미는 있지만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책이다. 낯선 이름과 경제용어도 꽤 나와서 다들 고생하며 읽었다. 한 회원은 독후감 제목을 영화 ‘헤어질 결심’의 유명한 대사,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로 적었다(정작 독후감은 매우 정연했다). 그래서 우리는 독서토론 시간에 ‘헤어질 결심’ 이야기도 조금 나눴다.   책은 쉽지 않았지만 책 얘기는 즐거웠다. 『붕괴』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원인과 여파를 집중 분석하는 책이다. 저자는 2008년 금융위기가 세계 곳곳의 정치와 사회에 길고 깊은 영향을 미쳤다고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 영국이 유럽연합을 탈퇴한 것, 유럽에서 온건 좌파 정당들이 몰락한 현상의 뿌리는 모두 2008년 금융위기다.   독후감에서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금융위기, 혹은 2020년대의 팬데믹으로 자기 삶이 어떻게 흔들렸는지를 감동적으로 쓴 회원들도 있었다. 맞아, 그때 세상이 확 바뀌었어,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1990년대에 태어난 회원은 외환위기 이전 한국 사회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궁금해했다. 40대 이상인 회원들이 “어휴, 완전히 달랐죠” 하며 자기 기억들을 이야기했다. 취업이 쉬웠고,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있었고, 회사원들이 낮에 사우나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던 시절을 말하는데 어째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장기 불황이 오면 한국 사회는 또 어떻게 변할 것인가. 독서토론 후반부에는 그 얘기를 했다. 다들 저성장은 이제 필연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나는 몇 가지를 메모해 갔는데 이런 것들이었다. 일자리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젠더 갈등과 세대 갈등이 심해진다, 포퓰리즘이 득세한다, 계층 간 격차가 벌어지고 부가 세습되며 ‘귀족 계급’이 등장한다, 외식이 줄고 홈파티 문화가 뜬다. 한 회원이 “전망이 아닌 것 같다, 이미 현실화된 내용들 아니냐”고 지적했다.   회원들의 의견이 다 일치하지는 않았다. 외적인 성공이나 소비보다 내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분위기 속에서 오프라인 동호회 문화가 뜰까, 아니면 사람들이 온라인 공간에 머무는 시간이 더 늘어날까. 귀족 계급을 바라보는 시선들은 어떨까. ‘내가 질투할 이유가 없다’며 그러려니 여길까, 아니면 ‘나는 왜 저렇게 될 수 없나’ 하고 분노하게 될까. 분노는 중산층에서 나올까, 빈곤층에서 나올까. 고령화는 여기에서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가. 저성장 국면에 들어갈 중국 청년들의 분노야말로 우리가 진짜 두려워해야 할 대상 아닐까. 중국 정부는 그 분노의 화살을 외부로 돌리고 싶다는 유혹을 받을 테니 말이다.   한 회원이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다들 어떤 사회를 원하세요? 차분하게 가라앉는 사회? 아니면 분노하는 사회?” 경제적 불평등은 커지고 단단해질 것이다. 사회에 대한 불만을 먹고 극단주의 세력이 자란다. 그렇게 거대한 폭력의 기운이 스멀스멀 퍼진다 …. 그보다는 사람들이 다들 조금씩 체념하고 내향적이고 소극적으로 사는 평화로운 계급 사회가 나은가? 아니면 때로 갈등과 충돌을 빚더라도 격렬하게 항의하는 정신이 활력과 모색을 낳고 거기에서 희망이 싹틀까?   어렵지만 중요한 질문이고, 집에 돌아와서도 아내와 한참 얘기를 나눴다. 『붕괴』 뒷부분에 이런 문장이 있다. “이른바 ‘정치경제’의 시대에서 정말 중요하게 다뤄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정치 부분이다.” 경제가 정치적 문제들을 일으키더라도 공론장이 건강한 사회는 그걸 슬기롭게 해결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한국은 어떤가. 정치 리더십은 고사하고 시민들이 진지하게 의견을 나눌 공간조차 잘 보이지 않는 듯해 가슴이 답답해진다.마음읽기 체념 분노 한국 사회 장강명의 벽돌책 클럽 회원

2023-06-11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