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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믿음]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아이티 대지진이 나던 2010년에 처음 만난 브니엘고아원은 이후로 우리의 집중적인 지원 대상이 되었다. 원장인 마담 도리스는 워낙 신실하게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고, 자주 이사를 하는 형편 가운데서도 늘 아이들을 공부시키는 일에 누구보다도 적극적이었다. 아이들에게 엄격했지만 그만큼 또 아이들을 바르게 키우고 있어서 믿음이 더 가기도 했다.   우리가 식량 공급만큼 중점을 두는 교육 지원은 적잖은 예산이 필요하다. 해마다 여름이면 가을학기 수업료와 아이들 교복, 교과서 등이 큰 부담이 되었다. 브니엘고아원의 마담은 돋보기를 쓰고 재봉틀에 앉아 아이들 교복을 만들어 입혀 우리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고 했다. 하지만 해마다 50명 아이의 학비는 1만 달러를 넘었고, 이 금액은 정말 우리가 감당해야 할 교육비 중에서 큰 부분이기도 했다.   코로나 사태가 터지고, 고아원 왕래가 힘들어지더니, 갱단 때문에 길이 막히고 연락이 끊어졌다. 그때 마담 도리스는 디렉터와 스태프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도미니카공화국을 거쳐 미국 마이애미로 갔다고 했다. 갱단 때문에 우리 지원을 고정적으로 받기 어려워졌고, 연락 두절이 잦아지자, 마담은 미국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하며 한때 65명까지 늘어났던 아이들의 생계와 학비를 책임지고 있었다.   캐나다로 간 우리 스태프 스티브가 한동안 애써서 마침내 마담과 연락이 되었을 때, 마담은 아이들 31명이 학교에서 쫓겨났다는 소식과 함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칼로레아를 패스한 아이들 세 명이 아이티 북부 캡헤이션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대학에 간 아이들도 일단 수업료를 다 못 내서 계속 학교에 편지를 보내어 미루고 있다고 했다. 대학생 세 명이 캡헤이션의 마담 친구 집에 머무는데 한 달에 식비와 아이들 교통비 등으로 200달러가 든다는 이야기도 듣게 되었다.   우리와 연락이 끊어진 사이에 졸업해야 하는 고학년 아이들 학비는 마련했지만, 중학교와 초등학교 아이들 학비는 외상으로 했었는데, 학교에서 해가 바뀌면서 그만 나오라는 통보를 받은 것이다. 게다가 고아원 아이들 밥 먹이느라 모처럼 대학에 보낸 아이들 학비는 생각도 하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우리가 좀 더 열심히 연락하고, 어떻게든 돌아가는 상황을 꼼꼼하게 알아보아야 했는데, 연락이 안 되자, 잘 있겠거니 하고 있었다. 마담이 미국에 갔다는 소식을 풍문처럼 듣고 난 후에는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렇게 우리 짐을 더는 것이라고 무의식 속에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마담은 친척 집에 얹혀 허드렛일도 마다치 않으면서 그렇게 얻은 수입으로 50명 아이의 먹거리와 교육을 오롯이 책임져야 했고, 아이들을 대학에도 보냈지만, 대학생 한 명당 800달러도 안 하는 일 년 학비를 버거워하고 있었다.   아이티 고아원은 외부의 도움이 없으면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 고아원의 홀로서기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우리는, 고아원 아이들을 먹이고 가르치려고 마담이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막연히 하나님께서 돌보시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담이 수완이 좋으니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고 그냥 믿고 있었다.   마담에게 아이들 학비를 송금한다고 스티브에게 연락하면서 하나님께, 아이들에게, 마담 도리스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어졌다. 늦었지만 다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라고 하면서 까닭 없이 부끄러웠다. 조 헨리 / 선교사·더 코너 인터내셔널 대표삶과 믿음 미안 마담 도리스 마담 친구 아이티 고아원

2025-02-13

[신 영웅전] 마담 롤랑

여자의 운명은 남편을 만나며 결정된다지만, 내가 보기에 남자의 운명은 한 아낙의 마음 먹기에 달린 것 같다. 아테네 정치가 테미스토클레스의 말처럼 남자는 여자에 의해 몰락하고, 여자는 자식에 의해 몰락한다. 위대한 남자였든, 몰락한 남자였든, 그 뒤에는 여인이 있었다. 어머니의 경우가 가장 흔하고, 그다음은 아내이고, 그다음은 혈육이고, 그다음은 연인이거나 친구다.   프랑스혁명 와중에 부르봉 왕조의 법부대신은 장 마리 롤랑(1734~1793) 자작이었다. 활동적이라기보다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그는 신부가 되고 싶었던 귀족이다. 아내 마리(1754~1793)는 몹시 적극적이고 드센 여자였다. 이 여인이 스무 살 연상의 남편을 대신해 지롱드당을 이끌며 흑막 같은 존재로 ‘지롱드파의 여왕’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뛰어난 미모와 지성 그리고 교양을 갖추고 있었지만, 평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귀족의 푸대접을 받으며 공화주의자가 됐다.   혁명과 함께 로베스피에르 치하에서 루이 16세 국왕이 처형되자 남편 롤랑은 도망치고 마담 롤랑 혼자 남았다. 5개월의 옥중 생활을 거친 뒤 단두대에 섰다. 처형 직전에 그는 문득 형리에게 종이와 연필을 달라고 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좋은 시상(詩想)이 떠올랐다는 것이었다. 형리가 그냥 죽으라는 말투로 핀잔을 주며 거절하자 마담 롤랑은 후세에 말로라도 전해 달라며 이렇게 읊었다.   “오! 자유여, 인간들은 너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죄를 저지르는가?(Oh Liberty, what crimes are committed in thy name!)” 그리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틀 뒤 피난처인 노르망디에서 아내의 처형 소식을 들은 롤랑은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권위주의 시대를 거친 뒤 민주화라는 미명 아래 자유가 넘쳐 마치 혼돈과 같은 시대를 살면서 왜 자꾸 롤랑 부인의 말이 떠오르는지….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 영웅전 마담 롤랑 마담 롤랑 남편 롤랑 롤랑 부인

2024-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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