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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잔인한 달 4월을 보내며

2022년 4월 30일, 4월의 마지막 날이다. 이달 내내 천로역정 이야기에 몰두하며 세월을 잊고 살았던지 길 건너 이웃집 울타리를 장식한 노란 빛 개나리의 만개가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늦게나마 둘러보니 사방이 봄치례로 한창인데 내일이면 벌써 5월이다. 이대로 4월 보내기가 민망하다.   4월 하면 흔히 잔인한 달로 치부한다. 기독교에서 4월은 십자가와 죽음이 있는 잔인함도 있지만 소망의 부활이 혼재한 고마운 달이다. 그러나 한국인에게 4월은 제주 4·3사건, 4·19의거,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참혹하기 그지없는 달이다. 4월이 ‘잔인한 달’로 자리매김 당한 원인은 미국 태생 영국시인 엘리옷(T.S Eliot 1888~1965)이 쓴 시 ‘황무지(The Waste Land)’ 때문이다. 여기에 2005년 결성된 한국 인디 록밴드 ‘브로콜리너마저’가 ‘4월을 잔인한 계절’이라고 덧칠을 해 재론의 여지를 봉쇄해 버렸다.   “사월은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우며, 추억과 욕망을 섞으며, 봄비는 생기 없는 뿌리를 깨운다. 겨울은 따뜻했었다. 대지는 망각의 눈으로 덮어 주고, 가냘픈 목숨을 마른 구근으로 먹여 살려주었다….” 433행에 이르는 황무지의 시작 부분이다.   “거짓말 같던 사월의 첫날, 모두가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는데, 왠지 나만 여기 홀로 남아, 가야 할 곳을 모르고 있네… 나만 가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없는 나의 지금은, 깊어만 가는 잔인한 계절, 봄이 오면 꽃들이 피어나듯, 가슴 설레기엔 나이를 먹은, 아이들에겐 갈 곳이 없어, 봄빛은 푸른데.”   브로콜리 너마저 의 ‘잔인한 사월’ 노랫말이다.   흔히 엘리옷의 ‘황무지’를 두고 방향과 의욕을 잃은 채 의미 없이 살아가는 서구 현대인들의 모습과 정신세계를 적절히 묘사한 시대의 넋두리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다. 시의 핵심은 4월이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들어 깨우지만… 겨울은 우리를 따뜻하게 하고,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어주고, 가냘픈 목숨을 구근으로 먹여 살려주니… 겨울이 더 좋다는 귀여운 억지 논리와 인위적 역설이 전체를 아우르는 시다.   사실 20세기 초반 서구를 강타한 종교적인 불신(不信), 기쁨조차 사라진 불모(不毛) 재활의 희망조차 없는 듯 한 불활(不活)의 시대에, 희망없이 퀘세라 세라 하며 겨울같이 살던 사람들에게, 아니야! 아직 소망이 있어, 아직 가능성의 문은 열려있어 하며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기를 독려하는 4월의 모습은 교활한 희망 고문이자 그들을 한없이 볼품없게 만드는 잔인한 처사가 아니냐는 것으로 지금도 상당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엘리옷은 1910년 프랑스 유학 시절 장 베르드날이란 한 의대생을 만나 깊은 우정을 나눴다고 한다. 두 살 아래였던 베르드날은 제1차대전에 참전, 1915년 갈리폴리 해전에서 전사한다. 슬퍼할 기력조차 잃었던 엘리엇은 쫓기듯 한 무용수와 결혼했지만 생활은 불행했다. 고민 끝에 1921년 스위스 로잔으로 요양을 갔고 거기서 ‘황무지’를 완성한다. 따라서 시에 등장하는 라일락, 추억과 욕망, 봄보다는 겨울이 따뜻하다는 등의 역설은 친구 베르드날을 떠나보낸 뒤 찾아온 아픔과 인생의 허망함을 토했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김도수 / 자유기고가살며 생각하며 잔인 라일락 추억 19의거 세월호 서구 현대인들

2022-04-29

[삶의 뜨락에서] 추억 속에 잠들 수 없어라

오늘은 뽕나무를 잘랐습니다. 요리조리 자르다 보니 몽땅 나무가 됐습니다. 섭섭하기도 하고 보기에도 흉한 것이 마음마저 상하려 합니다. 하여 자르다 말고 뜰 안에 내려앉은 낙엽을 밟았습니다. 낙엽이 종알댑니다. 사각사각, 바삭바삭, 한참 소란스럽습니다. 그 수다가 듣기 좋아 일부러 발길질해가며 뜰 안을 걸어보았습니다. 왠지 낙엽과의 작별을 생각하니 쓸쓸해 옵니다. 어쩌면 다시 가을이 오기 전에 이 집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현실입니다.    남편이 설계해서 몇만 개의 못을 손수 박아 지은 집, 저희 식구에겐 소중하고 뜻깊은 집입니다. 이제 나이에 맞춰 집을 줄이고자 그만한 보금자리를 찾아 몸 편히 살라는 외침이 커지고 있습니다. 그 종착역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집에 말뚝을 박고 아이들 건강히 키워 날려 보냈고, 안팎으로 제 손이 아니 간 곳이 없는 나의 Home Sweet Home입니다.    아이들이 모종해 온 저희 손가락만 한 단풍나무, 이웃에서 하나둘 얻어다 심었던 라일락, 등나무, 무화과, 여기저기에서 삐죽 나와주었던 뽕나무, 야생 복분자, 멀리 서쪽에서 실려 온 앵두나무, 은행나무, 그중에도 우리 식구들이 가장 사랑하는 대추나무, 늘 우아하고 탐스럽게 피어주는 수국, 얘네들 모두를 지극정성, 사랑으로 키웠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두고 어찌 떠나갈 수 있느냐?”고 이 아이들이 조잘조잘 농성을 핍니다. 대추를 따며 마음이 싱숭생숭했습니다. 너를 버리고 내 어찌 떠나겠는가? 그러나 한편 내 몸도 너무 힘들다고 투덜댑니다. 나, 라는 사람이 아주 손 놓고는 살 수가 없을 것이라는 내 버릇을 저 아이들이 더 잘 알고 있는 듯합니다. 추억과 미련 같은 것이 한꺼번에 밀려오며 내 마음이 부산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내 몸의 주인은 나이고, 이 집의 주인도 나입니다. 결정도 나의 것입니다.     요즘에 와서는 척척 버리는 사람이 엄청 부럽습니다. 철 가리 옷 정리를 하다 또 놀랐습니다. 망설여도 여기에 머물고 싶은 이 마음을 어찌하리오? 해결책이란 단지 내 인격을 향상하는 길밖에 없다고 제 머리가 한마디 하네요. 이제 봄이 오면 저 몽땅 뽕나무에 다시 연푸른 새싹을 피울 터이고 누에고치 먹일 일은 없을 터이니 뽕잎 새순을 따서 떡도 해 먹고 말려서 차도 나무 밑에 서서 입술이 새까맣도록 따먹을 기대나 걸어보려고요! 온화하면서도 오늘 일은 오늘, 내일 일은 내일로 살아가라는 노인들을 향한 제1의 모토(Motto), 오늘 나는 노인을 위한 제2의 모토로 “추억 속에 잠들지 말지어다!”를 넣어보겠습니다.     머리가 파 뿌리 되도록 길렀던 자식들이 간직한 추억이며 정성껏 키웠던 뜰에 나무들을 버리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음 어떤 사람에게 넘겨줄 것이 집과 뜰 안에 아주 많이 생겼습니다. 버리고 떠나는 것이 아닌 내 정성, 내 사랑, 나의 보물! “이 모두를 젊은? 다음 세대에게 아낌없이 넘겨주리라!”가 저의 제3의 모토가 되겠습니다. 오늘 낙엽들이 저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곱게 가르쳐 주고 갔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가을을 남기고 가는 저 단풍잎이 그리도 고운가 봅니다. 저도 저 고운 단풍잎을 닮고 싶습니다. 남순자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추억 뽕나무 야생 앵두나무 은행나무 라일락 등나무

2021-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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