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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 마당] 내가 보이면 세상도 보인다

당나귀와 같은 근성에 휘두르는 회초리가 있다. 예수가 예루살렘 입성 때 탔던 당나귀를 패러디한 것이지만 의미가 있는 교훈이다. 당나귀 가는 길에 몸에 두른 옷을 벗어 깔아 놓고 빨마 가지(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호하는 군중을 보면서 당나귀는 착각 현상에 빠져 붕 뜰만도 하지 않았겠는지?   칭찬과 자화자찬을 조심하라는 뜻에서 옛 성인들이 제자를 가르치는 데 사용한 것이 당나귀 회초리다. 일반적인 의미의 회초리가 아니고 나처럼 나르시시즘이 다분한 사람에게 필요한 약이다. 세속적 도발성과 충동을 제어하는 것에 약하다 보면 자신의 본질을 놓아버리게 된다. 눈길을 따라 들락날락하는 마음이라니! 그래서 휩쓸리는 짓거리가 보이면 즉시 두문불출로 대응한다.   내면으로 숨어드는 내공의 연습도 필요하다. 깊이 가라앉는 마음의 바닥이 보일쯤이면 어느새 1시간의 침묵이 흐른다. 그리고 명상 중에 흘러갔던 것들을 기록한다. 때로는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아우성, 오래전에 있었을 법한 무의식에서 걸어 나오는 어린아이라고 해야 할지? 본적도 느낌도 없는 관계지만 마음의 언저리에서 서성인다. 때로는 시공을 넘어와 포개 앉은 다리에 무릎을 부치려는 순간 나도 모르게 손으로 쳐내 버린다.   삶과 피안의 세계 경계를 확실히 해두고 싶은 손짓이었는데 마음은 무거워진다. 튀어나온 존재는 무엇이었을까? 왜 아우성처럼 느꼈는지? 곱씹으려 해도 실마리가 잡히지 않는다. 영적 지도자는 어린 시절 나의 자화상이라고 했다. 까불고 팔랑거리다 못해 촐싹거리는 어린아이가 나의 자화상이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누군가가 규정지어 주는 것이 싫다. 그대로 붙들려 그것처럼 내가 되어버릴 것 같아서이다.   별스러운 자화상 없이도 과거에 붙들림 없이 잘 지내왔다. 사람은 믿고 의지할 존재라기보다는 용서하고 덮어 주는 것이 회복의 길임을 알아챘기 때문일까? 그래서인지 사람을 대하는 마음이 훨씬 편안하다.   “ 눈이 예쁘네, 어디서 했수?” “아, 내 눈요? 아무것도 안 했는데….” 탐색의 코드부터 엇갈리기 시작하면 차라리 용모 지상주의 선전포고를 인정하여 맞장구를 치는 재미도 있다. 숨어있던 자화상이 기어 나와 나 역시 침을 튀길 기회다.     젊은 날의 초상까지 보여 주면 대화는 지속한다. “리모델링한 거 아니지?” “나, 40대에도 교인 할머니가 자기 아들 중매 서겠다고 찍힌 거 알아?” “알지, 저이가 누구누구 차 타고 교회에 왔다가 그이 누이한테 딱 걸려서 노총각 혼삿길 막을 셈이냐고, 그때 그런 일이 있었거든” “남편의 부탁으로 타고 온 것이 그렇게 된 거지 뭐….”   나의 인정하기 싫었던 자화상이 바로 나르시시즘이다. 포장으로 부풀리는 거짓 자아다. 이 때문에 당나귀 회초리는 모욕을 가하는 무기가 되어 준다. “헤이, 주책없는 당나귀야, 주인공은 네가 아니야. 히힝거리지 말아라.” 때로는 “이 늙어빠진 당나귀야 나대지 말고 잠잠해라” 하면 신기하게도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다소곳해진다.   다른 누군가에게 그런 모욕적인 언사를 들었다면 어땠을까? 독이 오른 뱀처럼 눈에 불을 켰을 것이다. 그러나 갚으려고 기회를 노릴 것도 괜한 감정 낭비로 밤잠을 설칠 필요도 없게 된다   마음과 의지만으로 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아는 길들여야 한다. 길들이지 않는 자아는 분노에 휘말릴 확률이 높아진다. 자아는 상처받는 것을 아주 싫어하기 때문에 인정하는 것에 인색하고 방어기제에는 능하다. 무의식의 지배를 받지 않도록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다.   조용한 시간에 촛불을 마주하고 내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자아를 길들인 사람은 앉아 있는 한 시간이 무척 평화롭고 빠르다. 그러나 초보자는 단 십 분도 견디기 힘들 것이겠지만 분노 오해 등 부정적 속성인 자아의 주도권을 잡으려면 감내해야 한다.   무조건 앉아야 하는 일은 처음부터 어렵다. 몸이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분심 잡념의 방해도 심하다. 자아를 길들이는 일이 수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의 통제를 받는 자아는 충고와 모욕에 순응하며 주인을 알아본다. 최경애 / 수필가문예 마당 수필 당나귀 회초리 아우성 오래전 부정적 속성인

2024-07-04

희망과 절망 사이, 당나귀가 관찰한 인간세상

매번 자신에게 불리하게 달라지는 순간의 주어진 운명을 순순하게 받아들이는 당나귀에게서 인생을 배운다. 당나귀의 울음소리에서 따온 EO라는 이름의 당나귀가 주인공이다. 그의 슬픈 눈동자에 비치는 세상은 동물의 세상이 아닌 인간들의 세상이다. 사람들의 탐욕이 그를 우울하게 하고 그에게 상처를 준다. EO는 상황의 서술자가 아닌 신중한 관찰자다.     당나귀는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상징한다. 영화는 많은 부분, 예수를 태우고 그와 수난을 함께 했던 성경 속 당나귀를 연상시킨다. 폴란드에서 이탈리아로 이어지는 EO의 여정은 흡사 예수 수난 때처럼 시련의 연속이다.       영화 ‘EO’는 붉은 조명 아래 당나귀와 여자가 교감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들 사이의 기류에는 묘한 성적 함의가 느껴진다. 트레이너인 카산드라와 EO는 서커스단에서 함께 생활하고 함께 무대에 올라 관객들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서커스장 밖에는 동물권 운동가들의 동물 서커스 반대 시위가 한창이다. 때마침 당국은 서커스단 주인의 세금 문제로 EO를 동물 보호소로 이동시킨다. 카산드라와의 이별.     프랑스의 거장 로버트 브레송 감독의 1966년작 ‘당나귀 발타자르(Au hasard, Balthazar)’를 모티브로 한 ‘EO’는 60년대에 로만 폴란스키와 함께 ‘폴란드 학파’ 세대를 대표하던 폴란드의 거장 예르지스콜리모프스키 작품이다. 지난 5월, 33년 만에 칸영화제에 최고령감독으로 컴백하여 이 작품으로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폴란드의 95회 아카데미상 국제영화 부문 출품작.       ‘EO’는 당나귀가 주인공이지만 어린이들에게 교훈을 주는 ‘옥자’나 ‘베이브(Babe)’와 같은 류의 동물영화는 아니다. 스콜리모프스키 감독이 동원하는 상상력은 오히려 인간이 동물 학대에 있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폴란드를 순회하는 삶의 여정에서 EO는 선한 사람들보다 악하고 짓궂은 사람들을 만나 재앙과 절망을 경험한다. 축구경기장 밖을 배회하던 EO는 술 취한 훌리건에게 무자비하게 얻어맞고 의식을 잃는다. 초현실적인 이미지 창출의 대가 스콜리모프스키 감독은 죽음의 순간을 오가는 EO의 무의식을 마치 연옥의 한 장면인 것처럼 표현한다.     프랑스의 대배우 이자벨위베르가 후반부에 예기치 않은 역으로 등장하고 동물 보호 차원에서 6마리의 당나귀가 번갈아 가며, 절망의 굴레 속에서도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는 EO를 연기한다. 김정 영화평론가온라인 영화 당나귀가 인간세상 재앙과 절망 당나귀 발타자르 절망 사이

2022-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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