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입은 하나, 귀는 두 개인 이유
귀가 어두워지고 있다. 의사의 진단으로는 돌발성 난청이다. 어느 날부터인가 귀에 물이 찬 듯하더니소리가 울리면서 작은 말소리가 정확히 들리지 않았다. 아직 활발하게 일하는 내가, 어눌한 귀 때문에 졸지에 늙은이로 전락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된다. 무심한 공기 같아서 존재조차 관심 밖이었던 귀. 세상 이야기들은 메아리 모양의 귓바퀴를 돌아, 귓속 동굴의 비밀스러운 길을 지나 내게 전해졌다. 하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어렵게 들어온 세상 이야기들을 나는 얼마나 마음의 문을 닫고 등한시하였던가. 세상은 온통 말로 이루어진 것 같다. 우리의 삶은 말로 시작되어 말을 부리며 살다 말이 끊어지면서 생(生)도 막을 내리는 것은 아닐까. 영혼 속의 생각들은 언어라는 장치를 통해 매 순간 세상에 태어난다. 영혼의 숫자만큼, 세월의 길이만큼 더해지는 언어와 말들. 말은 소리 내는 사람의 생각이며 사상이며 나름대로의 인생관이기도 하다. 그런데 말은, 귀를 통해 누군가에게 들려주기 위해서 생겨난 것은 아닐까. 어찌 보면 두 귀는 고운 체를 가슴에 품은 둥근 항아리를 닮았다. 삶의 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의 모든 언어가 두 귀를 통해 담기기 때문이다. 귀는 이것들을 모아 사고(思考)라는 자신만의 가는 체에 정성스럽게 걸러, 삶의 정수가 될 것만을 추려낸 후 둥근 가슴에 저장한다. 귀가 감지할 수 있는 말에는 삶의 단맛, 신맛, 짠맛, 쓴맛, 감칠맛들이 있다. 단맛은 귀에 달콤하고 기쁜 감정을 주는 말이고, 쓴맛은 비판이나 비난 같은 귀에 거슬리는 언어들일 듯 싶다. 신맛은 기운이 없고 느슨할 때 잡아 주는 말일 것이고, 감칠맛은 귀에 착착 달라붙은 언어들이지 않을까. 듣는다는 것은 나의 소리를 뒤로하고 상대방의 마음을 먼저 받아주는, 존중과 배려이기도 하다. 입이 하나이고 귀 두 개가 존재하는 것은 말을 하기보다는 들으라는 의미가 아닐까. 청진기가 몸속 소리를 듣고 병을 파악해 내듯, 두 귀를 영혼의 상처에 가깝게 밀착시키고 주의 깊게 경청하면, 상대방이 느끼는 삶의 통증과 아픔을 감지할 수 있게 되리라. 생각해 보면 내 귀가 어두워지는 것은, 세속의 소리보다는 자연의 소리에 영혼을 열고 그것의 이야기를 들어보라는 메시지일 듯 싶다. 언제 한번 자연의 소리를 진지하게 들으려 해본 적이 있었던가. 만약 자연이 인간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어땠을까. 인간끼리의 경쟁과 이권을 내세워 순수한 자연을 마구 훼손하고 파괴하는 인간의 사악한 소리를 자연은 어떻게 정의 내릴까. 내 귀가 어눌해진 또 다른 이유는 자연의 순리에 따라 잘 들리지 않는 작은 나뭇가지의 삶에 연연하지 말고, 사고하며 성찰하여 인생이라는 큰 숲의 의미를 깊은 내면의 소리로 헤아리라는 의미 같기도 하다. 아니면 세월의 연륜에 맞추어 잘 들리지 않는 소소한 세속적인 말에 휘둘리지 말고, 소신을 갖고 꿋꿋하게 삶을 걸어가라는 뜻인지도 모른다. 김영애 / 수필가이 아침에 쓴맛 감칠맛들 단맛 신맛 세상 이야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