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J네트워크] 왜 쓴맛은 제각각일까

인간에게는 모두 저마다의 쓴맛이 있다. 단맛 수용체는 딱 한 종류다. 하지만 쓴맛을 감지하는 수용체는 25종이나 된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 그대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이유로 불행하다.”   자몽의 쓴맛에 민감한 사람이 있고 IPA 맥주의 쓴맛에 민감한 사람이 있다. 요즘 인기가 상승 중인 제로칼로리 음료를 마시고 나서도 어떤 사람은 쓴맛을 느낀다. 유전적으로 혀의 쓴맛 수용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설탕은 단맛 수용체만을 자극하지만 사카린·아스파탐 같은 감미료는 단맛 수용체에 더해 쓴맛 수용체와도 결합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쓴맛 수용체는 사람마다 다르다. 나는 제로칼로리 음료를 마시면 단맛 뒤에 쓴맛이 남는데 다른 사람에게는 그저 달콤하게만 느껴질 수 있다는 거다.   쓴맛 수용체는 개인에 따라 발현 정도에도 차이가 크다. 식품공학자 최낙언은 ‘맛의 원리’에서 그 차이가 최대 1000배까지 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쓴맛 감각이 이렇게 개인 차가 큰 이유는 뭘까. 과학자들의 추측에 따르면 쓴맛을 피하는 게 인류의 생존에 중요했기 때문이다.     야생에서 쓴맛이 나는 식물은 독성을 가진 것일 가능성이 높다. 집단 내의 사람 모두가 쓴맛을 동일하게 감각한다면 생존 확률이 떨어진다. 채집한 식물을 쓴맛 때문에 안 먹는 사람은 혹시라도 그 식물이 독성이 있는 것이었을 때 생존할 가능성이 높다. 쓴맛 수용체의 다양성은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에서도 관찰되는 특성이다. 개구리는 사람보다 쓴맛 유전자 종류가 두 배로 많다.   어린이가 채소를 싫어하는 현상도 쓴맛 때문이다. 이제 막 기어 다니기 시작한 유아가 만약 쓴맛에 둔감하다면 무엇이든 입에 넣고 삼킬 위험이 있다. 집이 아닌 들판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결과는 더 끔찍하다. 특히 슈퍼테이스터로 불리는 일부 사람은 쓴맛에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 이들은 혀에 버섯 모양 돌기가 많아서 맛을 더 강하게 느낀다. 달면 더 달고 시면 더 시고 쓰면 더 쓰다.   이런 현상을 처음 발견하고 슈퍼테이스터란 이름을 붙인 심리학자 린다 바토슉에 따르면 슈퍼테이스터는 전체 인구의 25% 정도이다. 이들은 채소를 싫어하고 편식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렇게 미각이 민감한 사람이라도 새로운 음식을 탐험하길 좋아하는 성향이 있다면 다르다. 맛이 자극적이거나 쓴맛이 나더라도 도전을 반복하면 그 음식을 즐기게 된다.   쓴맛은 다양하다. 옆자리에 앉은 미식가가 느끼는 쓴맛을 나는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남들은 다 좋아하는 음식을 나는 쓰다고 싫어할 수도 있다. 우리는 각자 다르게 세상을 감각한다. 쓴맛은 말한다, 다양성을 존중하고 현실로 받아들이라고. 정재훈 / 약사·푸드라이터J네트워크 제각각 쓴맛 쓴맛 수용체 쓴맛 유전자 단맛 수용체

2022-07-20

[이 아침에] 입은 하나, 귀는 두 개인 이유

귀가 어두워지고 있다. 의사의 진단으로는 돌발성 난청이다. 어느 날부터인가 귀에 물이 찬 듯하더니소리가 울리면서 작은 말소리가 정확히 들리지 않았다. 아직 활발하게 일하는 내가, 어눌한 귀 때문에 졸지에 늙은이로 전락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된다.    무심한 공기 같아서 존재조차 관심 밖이었던 귀. 세상 이야기들은 메아리 모양의 귓바퀴를 돌아, 귓속 동굴의 비밀스러운 길을 지나 내게 전해졌다. 하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어렵게 들어온 세상 이야기들을 나는 얼마나 마음의 문을 닫고 등한시하였던가.   세상은 온통 말로 이루어진 것 같다. 우리의 삶은 말로 시작되어 말을 부리며 살다 말이 끊어지면서 생(生)도 막을 내리는 것은 아닐까. 영혼 속의 생각들은 언어라는 장치를 통해 매 순간 세상에 태어난다. 영혼의 숫자만큼, 세월의 길이만큼 더해지는 언어와 말들. 말은 소리 내는 사람의 생각이며 사상이며 나름대로의 인생관이기도 하다.    그런데 말은, 귀를 통해 누군가에게 들려주기 위해서 생겨난 것은 아닐까.  어찌 보면 두 귀는 고운 체를 가슴에 품은 둥근 항아리를 닮았다. 삶의 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의 모든 언어가 두 귀를 통해 담기기 때문이다. 귀는 이것들을 모아 사고(思考)라는 자신만의 가는 체에 정성스럽게 걸러, 삶의 정수가 될 것만을 추려낸 후 둥근 가슴에 저장한다.    귀가 감지할 수 있는 말에는 삶의 단맛, 신맛, 짠맛, 쓴맛, 감칠맛들이 있다. 단맛은 귀에 달콤하고 기쁜 감정을 주는 말이고, 쓴맛은 비판이나 비난 같은 귀에 거슬리는 언어들일 듯 싶다. 신맛은 기운이 없고 느슨할 때 잡아 주는 말일 것이고, 감칠맛은 귀에 착착 달라붙은 언어들이지 않을까.      듣는다는 것은 나의 소리를 뒤로하고 상대방의 마음을 먼저 받아주는, 존중과 배려이기도 하다. 입이 하나이고 귀 두 개가 존재하는 것은 말을 하기보다는 들으라는 의미가 아닐까. 청진기가 몸속 소리를 듣고 병을 파악해 내듯, 두 귀를 영혼의 상처에 가깝게 밀착시키고 주의 깊게 경청하면, 상대방이 느끼는 삶의 통증과 아픔을 감지할 수 있게 되리라.   생각해 보면 내 귀가 어두워지는 것은, 세속의 소리보다는 자연의 소리에 영혼을 열고 그것의 이야기를 들어보라는 메시지일 듯 싶다. 언제 한번 자연의 소리를 진지하게 들으려 해본 적이 있었던가. 만약 자연이 인간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어땠을까. 인간끼리의 경쟁과 이권을 내세워 순수한 자연을 마구 훼손하고 파괴하는 인간의 사악한 소리를 자연은 어떻게 정의 내릴까.      내 귀가 어눌해진 또 다른 이유는 자연의 순리에 따라 잘 들리지 않는 작은 나뭇가지의 삶에 연연하지 말고, 사고하며 성찰하여 인생이라는 큰 숲의 의미를 깊은 내면의 소리로 헤아리라는 의미 같기도 하다. 아니면 세월의 연륜에 맞추어 잘 들리지 않는 소소한 세속적인 말에 휘둘리지 말고, 소신을 갖고 꿋꿋하게 삶을 걸어가라는 뜻인지도 모른다. 김영애 / 수필가이 아침에 쓴맛 감칠맛들 단맛 신맛 세상 이야기들

2022-07-12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