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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동화 읽는 늙은이

동화작가 김태영 님이 얼마 전에 발간한 동화집 ‘할리우드 불러바드의 별’을 반갑고 재미있게 읽었다. 이 동네 아동문학이 시름시름 빈사 상태(?)인 것으로 보여 매우 안타깝던 참이어서 더욱 반가웠던 것 같다.   책에 실린 12편의 작품마다 흥미진진하고 시원하게 펼쳐지는 꿈과 상상의 세계에 함께 하는 동안, 고달프게 살면서 속절없이 삭막해진 마음 밭에 단비가 내린 듯 촉촉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련한 어린 시절이 그리워지며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바로 이런 것이 동화의 힘이다. 나이 든 늙은이가 동화를 읽으며 기쁨을 느끼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태영의 동화는 우리를 신바람 나는 꿈과 환상의 세계로 안내한다. 할리우드 배우가 되고픈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춤 연습을 하는 강아지와 미남 거지, 밤이면 공룡으로 변신해서 흥겹게 나들이 가는 팜트리, 작은 배만큼이나 커진 물고기와 휠체어를 탄 소년의 만남, 데스밸리에 사는 짱구돌맹이와 화석이 된 분홍 새우의 사랑, 갑자기 내린 비를 맞아 잔디밭에 떨어진 별 가족 이야기, 인디언 마을의 인형과 당나귀의 우정 등등….   막연한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사는 이곳을 무대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라서 한층 친근감이 느껴진다. 현재 할리우드 불러바드의 한 아파트에 사는 작가가 그 거리에서 살면서 만나고 느낀 이야기를 동심의 세계에서 새롭게 엮어 쓴 창작동화들로, 작가의 상상력은 그 할리우드 불러바드에서 어릴 적 놀던 영산강을 오가며 펼쳐진다. 작가 자신이 직접 그림까지 그려 실감을 더 했다.   김태영의 동화에서는 사람과 동물, 식물, 바위, 별 등이 서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며, 서로를 돕고 의지하는 우주적 사랑이 자연스럽게 펼쳐진다. 그러면서 인생을 곱씹게 하는 힘을 가진 ‘어른을 위한 동화’다.   미주 이민사회에서 아동문학이 설 자리가 마땅치 않은 것은 독자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태어나 자란 우리 2세들은 한글 문학작품을 자유롭게 읽고 공감할만한 한국어 실력을 갖추지 못했다. 그리고 동화책보다 훨씬 더 재미있고 짜릿한 것이 주위에 널려 있다. 그러니 어른들이라도 읽어주면 좋으련만, 그걸 기대하기는 어렵다. 엄마가 아이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동화를 읽어주는 장면은 정말 꿈과 같다.   이렇게 척박한 현실에서도 미주 아동문학계는 한동안 활발하게 움직였다. 좋은 작품도 상당히 나왔다. 1980년대 초반 고(故) 오영민 선생을 비롯해 남소희, 황영애 같은 분들이 활발하게 의미있는 작품을 발표했고, 2003년에는 ‘미주 한국아동문학가협회’가 발족하여 회원작품집 ‘미주아동문학’을 10호까지 발간했다. 김사빈, 김정숙, 박사라, 박심성, 백리디아, 이송희, 이희숙, 한혜영 같은 여러 작가들의 개인작품집도 활발하게 출간되었다.   내 개인적인 소견을 말한다면, 이민문학사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작품으로 오영민 선생의 ‘이민 간 아이’, 남소희의 ‘보석상자’, 황영애의 ‘내가 누구예요’, 홍영순의 ‘팬케이크 굽는 아이들’, 한혜영의 ‘뉴욕으로 가는 기차’, 신정순의 ‘착한 갱 아가씨’, 정해정의 ‘빛이 내리는 집’ 등을 빼놓을 수 없겠다. (물론 그 밖에도 내가 모르는 중요한 작품들이 더 있을 것이다.)   아동문학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란다. 어린이는 어른의 선생이고, 어릴 적 기억은 평생을 가기 때문이다. 삶이 팍팍하고 답답할 때면 나는 동화를 찾아 읽는다. 톨스토이의 우화나 알퐁스 도데, 마해송의 동화를 읽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새로운 힘이 솟는다. 어린이 마음, 꿈의 힘을 믿는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늙은이 동화 동화작가 김태영 미주 한국아동문학가협회 미주 아동문학계

2024-09-19

[잠망경] 꼰대

초등학교 때 ‘김대곤’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별명이 ‘꼰대’였다. 놀리기 좋아하는 또래들이 ‘대곤’을 ‘곤대’라 거꾸로 부르다가 꼰대로 바꿔 불렀다.   꼰대가 어른이나 아버지를 뜻하는 것으로 알았던 나는 왜 그 말이 우스웠는지 잘 몰랐다. 마침 또 대곤이는 어딘지 어른스러운 데가 있는 아이였다. 같은 나이 친구를 꼰대라 불러대며 아버지를 연상하는 게 재미있었겠지.   네이버 사전은 ‘꼰대’를, “은어로 늙은이를 이르는 말”이라 풀이한다. ‘꼰대스럽다’는 형용사를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하여 그것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남을 가르치려 든다는 뜻”이라고 해석한다. 꼰대들은 훈장 기질이 농후한 노인네들이다.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잘났다고 믿는 사람들.   꼰대는 젊은이를 얕잡아본다. 때때로 깔보는 태도를 취한다. 연장자들이 연소자들을 대할 때 매양 그런 편이다. 당신은 이것을 강자가 약자를 도와주고 싶어하는 보호본능이라는 해석을 내리겠지. 그 대가로 강자는 약자의 존경을 받고 싶다. 어르신네에게서 인생을 배우는 나이 어린놈이 건방지게 굴면 좋지 않다고 꼰대는 믿는다. 굳게, 또는 고집불통으로.   아니다. 꼰대들만 나무랄 수는 없다. 애당초 젊은것들이 노인네들을 업신여기고 걸핏하면 핀잔을 주며 구박하지 않았던가. 자기들의 진로를 꼰대들이 방해한다며 투덜대지 않았던가. 선배가 후배 출셋길을 막는다면서! 하루빨리 은퇴하여 더는 내 앞에서 거치적거리지 말고 어디 다른 데 가서 후배양성이나 했으면 참 좋을 텐데, 하지 않았던가.   이런 묵시적 압박에 대항하려고 늙은이는 꼰대가 되는 수밖에 없다. “내가 젊었을 때는…” 하고 자신의 젊음을 회상하며 젊은이를 대적하는 것이다. 처절한 속마음으로. 당신은 구조조정이라는 행정방침 때문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조기 은퇴를 한 중장년층 늙은이들의 사연도 숱하게 듣지 않았던가.   2019년 7월 21일자 영국 공영방송 BBC 웹사이트에 게재됐던 ‘Kkondae’라는 제목의 기사를 읽는다. 꼰대 이야기다. 기자 이름이 ‘SooZee Kim’. 아무래도 한인 2세 같다. 이런 구절에 공감이 간다. “In Korean, Kkondae loosely translates as ‘condescending older person’…” - “한국어로 꼰대는 대략 ‘거들먹거리는 연장자’로 해석된다…”   어머니 태생이 경상도라서 어릴 적에 경상도 토박이말을 자주 들었다. 갓난아기 내 조카를 귀여워하시면서 어머니는 “아이구, 우리 꼰데기!”라는 간투사를 쓰셨다. 내 귀에 꼰데기는 최상의 애칭이었다. 얼마 전 ‘꼰데기’가 ‘번데기’의 영남 방언임을 알았다. 그리고 ‘꼰대’는 번데기처럼 주름이 많은 늙은이라는 뜻에서 꼰데기라고 불리다가 꼰대가 됐다는 설도 인터넷에서 읽었다.   하나 더 있다. 일제강점기에 프랑스어로 백작을 칭하는 콩테(Comte)의 일본식 발음이 ‘콘테’였고, 이완용 같은 친일파들이 백작 등 작위를 받고 으스대며 자신을 콘테라 부른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꼰대의 어원으로 나는 ‘콩테’설보다 ‘꼰데기’설을 신봉할까 하는데. 노인네들은 번데기 같은 주름이 자글자글 생기면서 그들의 몸 또한 꼰데기처럼 작아진다. 심리적으로도 아이가 된다.   사실 노인네들이 사람을 졸졸 쫓아다니며 잘난 척 충고하고 잔소리하는 데는 좀 귀여운 구석이 있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 별명이 꼰대였던 대곤이처럼. 천도복숭아만큼 포동포동하던, 어머니가 그토록 귀여워하시던, 그때 그 시절 내 조카, 꼰데기처럼.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중장년층 늙은이들 은어로 늙은이 나이 친구

2024-01-10

[잠망경] 꼰대

초등학교 때 ‘김대곤’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별명이 ‘꼰대’였다. 놀리기 좋아하는 또래들이 ‘대곤’을 ‘곤대’라 거꾸로 부르다가 꼰대로 바꿔 불렀던 것이다.   꼰대가 어른이나 아버지를 뜻하는 것으로 알았던 나는 왜 그 말이 우스웠는지 잘 몰랐다. 마침 또 대곤이는 어딘지 어른스러운 데가 있는 아이였다. 같은 나이 친구를 꼰대라 불러대며 아버지를 연상하는 게 재미있었겠지.   네이버 사전은 ‘꼰대’를, “은어로 늙은이를 이르는 말”이라 풀이한다. ‘꼰대스럽다’는 형용사를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하여 그것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남을 가르치는 데가 있다”고 해석한다. 꼰대들은 훈장 기질이 농후한 노인네들이다.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잘났다고 믿는 사람들.   꼰대는 젊은이를 얕잡아본다. 때때로 깔보는 태도를 취한다. 연장자들이 연소자들을 대할 때 매양 그런 편이다. 당신은 이것을 강자가 약자를 도와주고 싶어하는 보호본능이라는 해석을 내리겠지. 그 대가로 강자는 약자의 존경을 받고 싶다. 어르신네에게서 인생을 배우는 나이 어린놈이 건방지게 굴면 좋지 않다고 꼰대는 믿는다. 굳게, 또는 고집불통으로.   아니다. 꼰대들만 나무랄 수는 없다. 애당초 젊은것들이 노인네들을 업신여기고 걸핏하면 핀잔을 주며 구박하지 않았던가. 자기들의 진로를 꼰대들이 방해한다며 투덜대지 않았던가. 선배가 후배 출셋길을 막는다면서! 하루바삐 은퇴하여 더 이상 내 앞에서 거치적거리지 말고 어디 다른 데 가서 후배양성이나 했으면 참 좋을 텐데, 하지 않았던가.   이런 묵시적 압박에 대항하려고 늙은이는 꼰대가 되는 수밖에 없다. “내가 젊었을 때는…” 하고 자신의 젊음을 회상하며 젊은이를 대적하는 것이다. 처절한 속마음으로. 당신은 구조조정이라는 행정방침 때문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조기 은퇴를 한 중장년층 늙은이들의 사연도 숱하게 듣지 않았던가.   2019년 7월 21일 자 영국 공영방송 BBC 온라인의 “Kkondae”라는 제목의 글을 읽는다. 꼰대 이야기다. 기자 이름이 ‘SooZee Kim’. 아무래도 한국인 2세 같다. 이런 구절에 공감이 간다. “In Korean, Kkondae loosely translates as ‘condescending older person’…” - “한국어로 꼰대는 대략 ‘거들먹거리는 연장자’로 해석된다…”   어머니 태생이 경상도라서 어릴 적에 경상도 토박이말을 자주 들었다. 갓난아기 내 조카를 귀여워하시면서 어머니는 “아이구, 우리 꼰데기!”라는 간투사를 쓰셨다. 내 귀에 꼰데기는 최상의 애칭이었다. 얼마 전 ‘꼰데기’가 ‘번데기’의 영남 방언임을 알았다. 그리고 ‘꼰대’는 번데기처럼 주름이 많은 늙은이라는 뜻에서 꼰데기라고 불리다가 꼰대가 됐다는 설도 인터넷에서 읽었다.   하나 더 있다. 일제강점기에 프랑스어로 백작을 칭하는 콩테(Comte)의 일본식 발음이 ‘콘테’였고, 이완용 같은 친일파들이 백작 등, 작위를 받고 으스대며 자신을 콘테라 부른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꼰대의 어원으로 나는 ‘콩테’설보다 ‘꼰데기’설을 신봉할까 하는데. 노인네들은 번데기 같은 주름이 자글자글 생기면서 그들의 몸 또한 꼰데기처럼 작아진다. 심리적으로도 아이가 된다.   사실 노인네들이 사람을 졸졸 쫓아다니며 잘난 척 충고하고 잔소리하는 데는 좀 귀여운 구석이 있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 별명이 꼰대였던 대곤이처럼. 천도복숭아만큼 포동포동하던, 어머니가 그토록 귀여워하시던, 그때 그 시절 내 조카, 꼰데기처럼.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중장년층 늙은이들 은어로 늙은이 나이 친구

2024-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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