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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군목 은퇴에 지역사회 아쉬움…22년 복무 사이먼 장 중령

미 육군 개리슨 피카티니 아스널에서 22년간 군목으로 근무했던 한인 사이먼 장(사진.60) 중령 목사의 은퇴 소식에 지역 커뮤니티가 아쉬워하고 있다고 인터넷 육군 소식지 ‘유에스아미(US Army)’가 22일 전했다.     소식지에 따르면 2번의 이라크 파병, 현역과 예비역을 모두 마친 장 목사는 오는 7월 은퇴한다.   장 목사는 유학생 출신이다. 생화학을 공부하기 위해 펜실베이니아주에 있는 스크랜턴 대학으로 유학을 왔다가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다. 신학 공부를 마친 후 일반인을 대상으로 목회해나갔던 그는 미국 시민으로 귀화하면서 덜컥 미군에 입대했다. 한국 남성이라면 피할 수 없는 한국의 3년 의무 복무도 마친 후였다.   장 목사는 유에스아미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에서 자라면서 민주주의와 자유를 지키기 위한 미국의 기여에 항상 감사했다. 시민권 취득 절차를 마치고 미국의 시민이 되어 군에 입대하는 건 내게는 당연했다”고 설명했다.   미군에 입대했을 때 그의 나이는 38세. 자신보다 나이가 2배나 어린 동기들과 함께 훈련을 마치면서 군대 생활에 적응했지만, 이라크에 두 번이나 배치되면서 경험한 전쟁의 참혹함에 군대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전투 현장 순찰을 앞둔 동기들이 군목을 만나 기도를 받고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는 이야기에 장 목사는 군목으로 새 삶을 시작했다.     장 목사는 “나는 내 동료 군인들이 자랑스럽다. 그들은 18세부터 20세 초반의 어린 나이였지만 자유를 지키기 위해 매일 새로운 위험과 도전에서도 바그다드 거리를 순찰했다”며 “그들과 함께 복무할 수 있어 영광이었고 특권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 다음으로 이 나라를 섬기는 일이 가장 소중하다. 나라와 미래 세대를 위해 조금이나마 기여했다는 데 보람을 느낀다”며 “전쟁터에서 군인들이 임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었다면 그걸로 만족한다”고 덧붙였다.   장 목사는 은퇴 후 일반 목회를 다시 할 계획하지만, 그의 세 아들은 아버지의 유산을 잇는다. 현재 큰아들은 해군 장교로 복무 중이며 둘째와 셋째 아들은 각각 육군과 해군 사관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다.     장 목사는 “아시안 청년들이 미국에서 자라면서 정체성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본다. 그들이 자신들의 커뮤니티 안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공동체 밖으로 나가 더 큰 것을 경험하며 성장하길 바란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장연화 기자 chang.nicole@koreadaily.com은퇴 한인 한인 군목 군목 생활 은퇴 소식

2024-05-27

[리얼 시니어 스토리] "50세가 넘어 민간 군목으로 갔던 이유는"

  "지금은 한인타운이 LA의 손꼽히는 명소 지역이 됐지만 45년 전에는 정말 볼품 없는 거리였습니다. 차이나타운에 비교하기 부끄러운 그렇고 그런 거리였죠. 이렇게 발전하게 된 것은 한국정부도 미국 정부도 아닌 한인들의 힘이었습니다."   한인으로 구성된 경제 단체중에서 가장 오랜 된 곳 중 하나가 바로 '봉제협회'다. 그 중요성이 예전만 못하지만 한때 한인타운.한인사회로 들어오는 2가지 큰 '돈줄'을 시니어들의 웰페어(SSI)와 봉제분야서 벌어오는 자금으로 인정하던 때도 있었다. 지금은 한국에서 자유롭게 집도 팔고 투자도 받고 해서 한인사회에서 한인을 상대로 한 비즈니스가 가능하지만 초창기 한인타운, 올드타이머들은 맨손으로 주류사회에서 돈을 벌어와 한인타운을 먹여 살렸다.   초창기 봉제협회를 이끈 인물중 한 사람이 바로 박철웅 일사회장이다.     1949년생이지만 남들보다 조금 일찍 올드타이머가 된 덕분에 다양한 인생을 살아왔다.   1985년 봉제협회장을 맡았다. 한인 여성들이 '밟아라 삼천리'라는 유행어가 있었듯이 누구나 이민 초기에는 봉제공장에서 포장, 실밥 뜯기 등 뒷일로 시작해 싱글 재봉틀, 오버로크, 커버 스티치까지 배워 돈을 벌었다. 다른 일에 비해서 돈벌이가 나았던 덕분에 한인들은 대졸자도 재봉틀 앞에 앉았다. 원래 손재주가 좋았기에 돈이 몰리자, 시샘하는 정부를 등에 업은 타인종들의 견제가 들어오고 "이러다 안되겠다!" 싶어서 권익단체를 만든게 '봉제협회'다.   박 회장은 그래서 돈도 벌고 권익을 지키기 위해서 협회를 만들었다. 그는 "30대 중반인데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면서 "다운타운 라이온스클럽 회장, 평통위원 등 여러가지 기회가 쏟아져 들어왔다"고 말했다. 상훈도 따라왔다. 제리 브라운 주지사 공로상(1982), LA톰 브래들리 시장 공로상(1985)을 받았다. 협회와 한인 사회를 지키기 위해서 정치인들을 후원했던 덕분이다.   하지만 한인사회와 한인타운은 지켰는데 자신의 비즈니스는 그렇지 못했다.   1994년 대구에서 목사 안수(대한 예수교 장로회 경북노회)를 받았다. 1996년 남가주한인교회 담임 목사가 됐다. 2002년엔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는 신앙 간증집도 냈다.   2005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민간 군목이 됐다. 통일전망대교회와 22사단 새생명교회 담임 목사로 봉사했다. 미국으로 돌아와서는 2011년부터 봉제 및 의류업 사업자들을 돕는 '파커 비즈니스 컨설팅'을 운영했고 2020년 팬데믹을 계기로 은퇴했다.   오전 6시 기상과 함께 3마일을 걷는다. 신문을 보고 아침을 먹고 성경을 1시간 읽는다. 기도하고 평통 출신들을 모아서 만든 일사회 모임을 준비한다. 캠핑에도 진심이어서 계절마다 캘리포니아 구석구석을 누볐다.     부인(1956년생)과 1남 2녀들을 뒀다. 자녀들에게는 신앙생활을 권면한다. 혼란스러운 세상이지만 지속적으로 신앙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한국어 교육을 강조한다. 한글과 한국어를 잘해야 뿌리에 대한 정체성이 확실해진다고 믿고 있다.     1987년 제 4기 평통위원을 역임했고 2009년엔 LA평통 부회장을 맡았던 박 회장이라 세상에 바라는 것은 역시 한국의 미래다. 예전에 비해서 너무 좌우가 분열돼 있고 심지어는 좌우 모두 속에서 또 분열돼 있는 양상이어서 우려스럽다는 것이다. 그는 "통합해야 하는데 그저 말뿐인 것같다"면서 "상대의 생각을 듣고 대화로 공통 분모를 찾아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공통 분모는 조국에 대한 사랑인데 지켜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런 통합의 정신을 기조로 노력하면 결국엔 북한도 변화하고 평화통일도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2010년 통일교재도 집필했다)   "젊은이들이 비전을 갖고 있어도 이끌어 줄 사람, 멘토가 없습니다. 이제 한인사회를 위해서 성공한 선배들이 더 많이 멘토가 되야 합니다."   막상 지나고 보니 후회되는 순간도 있게 마련. 박 회장은 "너무 일찍 성공한 것이 오히려 독이 됐다"면서 "젊어서 또 어려서 그랬지만 너무 일찍 성공에 취했던 것같다"고 말했다. 또 "인생을 길게 보고 큰 뜻을 품고 탄탄하게 세워 부를 쌓아서 도모했어야 했다"며 "세상을 너무 좋아했고 세상을 즐긴 것같다"고 말했다. 그래서 후배들을 만나면 뜻을 세우고 현실에 만족하지 말고 앞으로 걸어나가라는 조언을 한다.     인터뷰를 마치려는데 민간 군목으로 갔던 이유를 들었다.     "한국이 선교사를 해외로 많이 파송하는 나라중 하나인데 막상 한국의 농어촌에는 빈 교회가 많습니다. 미자립교회다 보니 목사가 없어서 신앙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많습니다."   한편 박 회장은 지난 2008년부터 시작한 중앙일보 오피니언 지면에 연재중인 칼럼 등 그동안 써온 글을 정리해 출간할 예정이다. 장병희 기자리얼 시니어 스토리 민간 군목 초창기 한인타운 민간 군목 한때 한인타운

2023-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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