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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Trust

모두 눈을 감고 깊은 명상을 하고 있을 때였다. “Trust, Trust, Trust.” 요가 선생의 나지막하면서도 울림이 있는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그녀는 아주 힘든 요가 자세 중에 “Listen to your body, don‘t over do but trust yourself. Trust makes everything possible”이라고, 한다. 정말 믿기 어렵게도 그동안 힘들었던 tree pose가 훨씬 수월하다.     깊은 상념에 빠진다. 맞다. 스스로 자신을 믿지 않으면 누가 믿겠는가. 스스로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사랑하겠는가. 그동안 우리 인류사는 모두 사랑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모든 예술과 문학 작품은 사랑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지금 생각해 보니 trust(믿음, 신뢰)가 없는 사랑은 왠지 늘 불안정하다. 신뢰가 쌓인 다음에 사랑의 싹이 피어오르면 그 사랑은 오래 지속할 것이다. 사람은 원래 태어날 때 모든 가능한 성품의 씨앗을 갖고 태어난다. 마치 여성이 이미 수억 개의 난자를 갖고 태어나듯이 말이다. 이 씨앗은 적절한 환경을 만나면 발아가 되어 꽃을 피울 수도 있고 아니면 그대로 사장될 수도 있다.     Trust는 또한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개인의 삶을 떠나 대인관계에서 신뢰는 가장 기본 중의 기본이다. 가족 간에, 친구 사이에서, 그리고 직장에서 신뢰는 building block이라 할 수 있다. 거의 20년 전에 요가 강사 수련회가 베어마운틴에서 있었다. 그중 한 프로그램으로 둘씩 짝을 지어 산행하고 있었다. 갑자기 우리에게 눈가리개가 주어지면서 둘 중 한 사람의 눈을 가리게 했다. “자 이제부터 눈이 보이는 사람은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을 저 산의 정상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눈가리개를 쓴 사람은 상대방을 100% 신뢰하고 그의 지시에 따라야 합니다”라는 지시가 있었다. 우리 모든 일행은 너무나 황당한 이 지시에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잠시 짝꿍과 상의를 한 후 서로의 역할을 정했다. 지금은 곳곳에 계단을 만들어 산행이 훨씬 수월하지만 2003년에는 제대로 길이 나 있지 않아 바위, 돌, 자갈, 쓰러진 나뭇가지들, 튀어나온 뿌리들이 진흙더미와 범벅이 되어 눈을 뜨고도 조심해야 할 상황이었다. 거의 40명이 되는 우리 일행은 단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모두 땀범벅이 된 채 상기된 얼굴로 정상에 올랐다. 실로 Trust의 아름다운 결실이었다.     인도하는 자와 따르는 자 사이의 완전한 믿음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믿음, 신뢰, 신념, 신용, 신탁으로 번역되는 Trust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 중요한 자산이다. 당신이 누군가를 믿는다는 말은 그는 정직하고 성실해서 고의로 당신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대인관계에서 신뢰는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상대방의 좋은 의도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려 할 때 깨지게 된다. 특히 금전 관계에서 실패하게 되면 영원한 불신을 초래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법적인 의미의 Trust는 자신이 평생 모아둔 자산을 다음 세대로 넘기는 준비 과정으로 생전에 ‘Trust’를 설립해 두지 않는다면 ‘Probate’라는 법원을 통한 상속 절차를 거쳐야 하며 이에 드는 경비와 시간은 비효율적으로 많이 들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 ‘Trust’는 이런 점을 고려하여 만든 재산을 보호하고 유산관리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제도이다.     지금까지 세종류의 Trust를 생각해 보았다. 자신에 대한 믿음, 대인관계에서의 믿음. 그리고 법적인 용어인 Trust까지,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인간이 갖고 태어나는 자산 중에 성실을 최고로 삼는다. 가장 쉽고도 순박한 누구나 할 수 있는 소박한 자산이다. 나는 성실한 사람과 금방 친해질 수 있다. 성실한 사람은 당신을 배반하지 않는다. 성실은 신뢰를 얻게 한다. 신뢰는 모든 것의 기본으로 시작을 만들 수도 있고 끝을 예고할 수도 있다. 정명숙 / 시인삶의 뜨락에서 trust trust makes trust yourself trust trust

2024-07-29

Charitable Lead Trust (CLT) 부연 설명 [ASK미국 재산/상속/트러스트-크리스 정 변호사]

▶문= Charitable Lead Trust (CLT) 부연 설명을 해주세요.       ▶답= Charitable Lead Trust (CLT)는 비가역적 트러스트가 맞습니다. 하지만 CLT의 비가역성은 기부자가 트러스트에 자산을 기부하고, 그 자산에서 발생하는 소득을 정해진 기간 동안 자선 단체에 지급하며, 트러스트 기간 종료 후 남은 자산을 기부자의 가족이나 다른 수익자에게 반환하는 구조를 의미합니다. 즉, CLT는 기부자가 자산을 트러스트에 기부한 후 자산을 다시 돌려받을 수는 없지만, 트러스트 기간이 끝난 후에는 트러스트의 남은 자산이 기부자의 가족이나 다른 수익자에게 이전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 비가역성: CLT의 비가역성은 자산이 트러스트에 기부된 후에는 기부자가 자산을 다시 돌려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트러스트에 기부한 자산은 트러스트가 관리하고 자선 단체에 소득을 지급하며, 트러스트가 설정된 기간 동안 자산을 돌려받을 수는 없습니다. - 남은 자산의 반환: CLT의 특징 중 하나는 트러스트 기간이 종료된 후, 트러스트에 남아 있는 자산이 기부자의 가족이나 다른 지정된 수익자에게 반환된다는 점입니다. 기부자는 트러스트의 소득을 자선 단체에 기부하면서도, 트러스트 기간 종료 후 자산을 가족에게 물려줄 수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CLT는 기부자가 자산을 트러스트에 기부하고 그 자산의 소득을 자선 단체에 지급하면서, 트러스트 기간 종료 후에는 자산이 가족에게 반환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자산을 트러스트에 기부한 후 기부자가 직접 자산을 다시 돌려받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문의:(833)256-8810   미국 트러스트 트러스트 기간 비가역적 트러스트 lead trust

2024-07-29

Charitable Lead Trust (CLT)의 장단점 [ASK미국 재산/상속/트러스트-크리스 정 변호사]

▶문= Charitable Lead Trust (CLT)의 장단점이 궁금합니다.       ▶답= Charitable Lead Trust (CLT)는 자산을 트러스트에 기부하고, 트러스트에서 발생하는 소득을 정해진 기간 동안 자선 단체에 지급한 후, 남은 자산을 기부자의 가족이나 다른 수익자에게 돌려주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CLT는 자선 기부와 가족 자산의 이전을 동시에 고려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합니다.   장점 - 상속세 절감: CLT는 트러스트 자산의 미래 가치를 기준으로 세금 혜택을 받을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상속세를 절감할 수 있습니다. 이는 자산을 효과적으로 세금 부담 없이 이전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합니다. - 자선 기부: CLT를 통해 자선 단체에 정기적으로 기부할 수 있으며, 이는 사회적 공헌을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 유연성: CLT는 기간과 지급 금액을 조정할 수 있어 자산 배분에 대한 유연성을 제공합니다. 이는 기부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기부와 자산 관리를 조정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 자산 증식: CLT의 자산은 투자 수익을 통해 증식될 수 있으며, 이는 장기적으로 자산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단점 - 비가역성: CLT 역시 비가역적 트러스트로, 자산을 트러스트에 기부한 후에는 자산을 다시 돌려받을 수 없습니다. - 복잡성: CLT의 설정과 운영은 법적 및 재정적 복잡성이 있으며, 이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전문가의 조언이 필요합니다. - 불확실성: 트러스트 설정한 기간 동안 자산 가치가 하락할 경우, 예상한 만큼의 세금 혜택이나 자산 증식을 얻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는 자산 관리의 불확실성을 동반할 수 있습니다.   Charitable Remainder Trust (CRT)와 Charitable Lead Trust (CLT)는 각각의 구조와 목적에 따라 상속 및 자산 계획에서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는 도구입니다. CRT는 기부자가 정기적인 소득을 받을 수 있는 반면, CLT는 자산을 자선 기부에 활용하면서 가족에게 자산을 물려줄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합니다. 각 트러스트의 장점과 단점을 고려하여, 기부자는 자신의 재정 상황과 목표에 맞는 트러스트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변호사로서, 이러한 트러스트의 설정과 운영에 대한 조언을 제공하며, 기부자에게 최적의 상속 계획을 수립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습니다.     ▶문의:(833)256-8810    미국 트러스트 트러스트 자산 비가역적 트러스트 lead trust

2024-07-29

Charitable Remainder Trust (CRT)와 Charitable Lead Trust (CLT): 구조와 장단점 비교 [ASK미국 재산/상속/트러스트-크리스 정 변호사]

▶문= Charitable Remainder Trust (CRT)와 Charitable Lead Trust (CLT): 구조와 장단점 비교가 궁금합니다.      ▶답= Charitable Remainder Trust (CRT)은 자산 기부와 세금 혜택을 결합하여 자산 관리와 기부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입니다. 이 중에서도 CRT와 CLT는 두 가지 주요 유형으로 각각 고유의 구조와 장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본 칼럼에서는 CRT와 CLT의 차이점과 각각의 장점 및 단점을 살펴보고, 이들 트러스트들이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를 설명하겠습니다.   Charitable Remainder Trust (CRT) : Charitable Remainder Trust (CRT)는 기부자가 자산을 트러스트에 기부하고, 트러스트 자산에서 발생하는 소득을 일정 기간 동안 수익자에게 지급한 후, 남은 자산을 자선 단체에 기부하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CRT는 기부자가 세금 혜택을 얻으면서도 정기적인 소득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합니다.   장점  세금 혜택: CRT에 자산을 기부하면 기부자는 기부 시점에서 자산의 공정 시장 가치에 대한 소득세 공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는 기부자의 현재 세금 부담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됩니다.  전문적 자산 관리: CRT의 자산은 전문 자산 관리자에 의해 관리되며, 이를 통해 투자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 이는 기부자의 자산을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 연금 대체: CRT는 기부자가 정기적으로 소득을 받을 수 있도록 설계될 수 있으며, 이는 은퇴 자금을 마련하거나 생활비를 충당하는 데 유용합니다.  자산 보호: CRT에 기부된 자산은 채권자의 손길에서 보호되며, 법적 분쟁에서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단점  비가역성: CRT는 비가역적 트러스트로, 자산을 트러스트에 기부한 후에는 트러스트 자산을 다시 돌려받을 수 없습니다. 이는 기부자가 자산을 돌려받을 수 없는 불가역적인 결정임을 의미합니다.  복잡성: CRT의 설정과 운영에는 법적 및 재정적 복잡성이 존재합니다. 트러스트 설계와 규정 준수를 위해 전문가의 조언이 필요합니다.  제한된 유동성: 트러스트 자산은 정기적인 소득 지급 외에는 접근할 수 없습니다. 이는 기부자가 자산을 유동적으로 활용하는 데 제약을 줄 수 있습니다.     ▶문의:(833)256-8810   미국 trust remainder trust 트러스트 자산 lead trust

2024-07-29

Charitable Remainder Trust (CRT) vs. Charitable Lead Trust (CLT): 비교 도표 [ASK미국 재산/상속/트러스트-크리스 정 변호사]

 Charitable Remainder Trust (CRT) vs. Charitable Lead Trust (CLT): 비교 도표                                                                                                                                                 특성        Charitable Remainder Trust (CRT)        Charitable Lead Trust (CLT)       구조     기부자가 자산을 신탁에 기부하고, 트러스트에서 발생하는 소득을 일정 기간 동안 수익자에게 지급 후 남은 자산을 자선 단체에 기부     기부자가 자산을 트러스트에 기부하고, 트러스트에서 발생하는 소득을 일정 기간 동안 자선 단체에 지급 후 남은 자산을 가족에게 반환     세금 혜택     기부 시점에 자산의 공정 가치에 대해 소득세 공제     신탁 자산의 미래 가치에 대해 세금 혜택 (상속세 절감)     소득 지급     기부자가 정기적으로 소득을 받음     자선 단체에 정기적으로 소득을 지급     자산의 최종 수혜자     자선 단체     가족 또는 다른 수익자     자산 관리     전문 자산 관리자의 관리 하에 있음     자산은 트러스트에 투자하여 증식 가능     비가역성     비가역적, 자산을 트러스트에 기부 후 다시 돌려받을 수 없음     비가역적, 자산을 트러스트에 기부 후 다시 돌려받을 수 없음     복잡성     트러스트 설정과 운영에 법적, 재정적 복잡성이 있음     트러스트 설정과 운영에 법적, 재정적 복잡성이 있음     유동성     트러스트 자산은 정기적인 지급 외에는 접근 불가     트러스트 자산의 유연한 기간과 지급 금액 조정 가능     자산 보호     자산은 채권자에의해 보호됨     자산은 트러스트가 관리하며, 가족에게 반환될 때까지 자산 증식 가능     이 도표는 CRT와 CLT의 주요 차이점과 장단점을 간략하게 비교하여 각 신탁의 특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기부자는 자신의 재정 상황과 목표에 맞는 적합한 신탁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미국 remainder remainder trust lead trust 비교 도표

2024-07-29

Charitable Remainder Trust (CRT)의 이점 [ASK미국 재산/상속/트러스트-크리스 정 변호사]

▶문= Charitable Remainder Trust (CRT)의 이점이 있나요?     ▶답= 빌 게이츠와 멜린다 게이츠 부부, 워렌 버핏, 영화 제작자이자 '스타워즈' 시리즈를 만든 조지 루카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모두 Charitable Remainder Trust (CRT)를 통해 자산을 자선단체에 기부한 유명인들이라는 점입니다. 빌 게이츠와 멜린다 게이츠 부부는 Bill & Melinda Gates Foundation을 통해 대규모 기부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CRT와 같은 재정 전략을 통해 자산을 기부하고, 기부금이 지속적으로 자선사업에 투자되도록 하고 있습니다. 워렌 버핏은 Berkshire Hathaway의 주식으로 큰 부를 축적하였고, 자선사업에 상당 부분을 기부하고 있습니다. 버핏은 CRT와 같은 재정 전략을 활용하여 자산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기부를 지속적으로 실천하고 있습니다. 영화 제작자이자 '스타워즈' 시리즈를 만든 조지 루카스는 자신의 부동산을 CRT를 통해 기부하였습니다. 이러한 기부는 그의 자선적인 목적을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렇듯Charitable Remainder Trust (CRT)는 자선단체에 자산을 기부하면서 세금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재정 전략입니다. 여기에 대한 부연 설명과 예시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세금 혜택. CRT를 통해 기부한 자산의 현재 시장 가치에 대해 세금 공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Sarah는 $500,000 가치의 주식 포트폴리오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 주식을 판매하면 장기 세금 부담이 예상되지만, Sarah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CRT를 설정합니다.     CRT에 주식을 기부하면서, Sarah는 기부한 $500,000의 공정 시장 가치에 대한 세금 공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Sarah의 연간 소득세 부담이 $100,000일 경우, CRT를 통해 이 금액을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소득 지속. CRT는 수익자에게 일정 기간 동안 지속적인 소득을 제공합니다. 예를 들어, Mr. Hong이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 부동산의 현재 시장 가치는 100만 달러입니다. Mr. Hong은 CRT를 설정하여 부동산을 트러스트에 기부합니다. 트러스트는 부동산을 판매하고, 이로 인해 발생하는 장기 세금 이익을 회피하면서, Mr. Hong은 판매 수익에 대한 지속적인 소득을 받게 됩니다.     아울러 수익자 Mr. Hong은 CRT에서 설정된 기간 동안 매년 일정 금액을 받습니다. 이 소득은 일반 소득으로 간주되며, Mr. Hong은 이 소득에 대해 세금을 지불해야 합니다. 그러나 Mr. Hong은 부동산을 CRT에 기부한 대가로 세금 공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CRT의 수익자로 설정된 자선단체는 Mr. Hong이 선택한 자선사업을 지원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Mr. Hong은 자신의 재산을 보호하면서도 자선사업에 기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자선단체 지원. CRT는 기부자가 선택한 자선단체에 지속적으로 기부를 지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특히 자선단체 트러스트는 일반적인 트러스트와는 다르게 특정 목적을 가진 자선단체에 수익을 제공하기 위해 설립됩니다. 이는 해당 단체들이 사회적 봉사와 공익 목적을 위해 수익을 올리는 것을 장려하기 위한 정부의 세금 혜택 정책의 일환입니다.   예를 들어, 재산을 자선단체 트러스트에 기부하면 해당 트러스트가 발생시키는 소득에 대해서는 소득세가 면제될 수 있습니다. 이는 기부자가 자선활동을 지원하면서도 세금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자선단체 트러스트는 일반적으로 정부의 세법에서 명시된 조건을 충족해야 하며, 특히 수익의 일부 혹은 전체가 자선활동에 사용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습니다. 이러한 조건을 만족시키면서도 세금 혜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기부자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전략 중 하나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CRT는 기부와 세금 절감을 동시에 추구하는 효과적인 전략으로, 자산 관리와 자선활동을 지속적으로 지원하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CRT 설정에는 자산의 종류와 가치, 기부의 목적, 법적 요구사항 등을 고려하여 신중하게 계획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개인의 재정 상황과 목표에 맞춰 최적의 결정을 내리기 위해 상속법 변호사와 협력하는 것이 좋습니다.     ▶문의:(833)256-8810 크리스 정 변호사미국 remainder 자선단체 트러스트 remainder trust 자선단체 지원

2024-06-18

Charitable Remainder Trust (CRT) [ASK미국 재산/상속/트러스트-크리스 정 변호사]

▶문= 자선단체 트러스트(Trust)를 설립함으로써 기부자가 자산을 기부한 후 일정 기간 동안 수익을 받을 수 있는 구조라는데요 이것에 관해 설명해 주세요.     ▶답= Charitable Remainder Trust (CRT)는 비영리 자선단체가 관리하는 트러스트로, 기부자가 자산을 기부한 후 일정 기간 동안 수익을 받을 수 있는 구조로 CRT의 기본적인 작동 방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트러스트 설립: 기부자는 자신의 자산(예: 주식, 부동산 등)을 CRT에 기부합니다.   수익 지급: CRT은 기부자로부터 받은 자산을 관리하고, 일정 기간 동안 기부자에게 수익을 지급합니다. 이 수익은 일정한 금액(고정 지급) 또는 투자 수익에 따라 변동할 수 있습니다.   세법상 혜택: 기부자는 CRT에 자산을 기부함으로써 세금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기부 시점에서 기부자는 일시적으로 양도 소득세를 지불하지 않아도 됩니다. CRT에서 받는 수익은 일부 세금을 면제받거나 세금 감면을 받을 수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선 기부: CRT의 수익 지급 기간이 종료되면, 남은 잔여 자산은 사전에 지정된 자선단체에게 기부됩니다. 이 방식으로 CRT은 기부자와 자선단체 모두에게 혜택을 제공합니다.   다양한 CRT 유형: CRT에는 여러 유형이 있으며, 주요 유형으로는 단순 자선 잔여금 트러스트 (CRAT, Charitable Remainder Annuity Trust)와 자선 잔여금 단기 변동 트러스트 (CRUT, Charitable Remainder Unitrust)가 있습니다. 각 유형은 수익 지급 방식과 세금 혜택에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CRT은 퇴직 수입을 보충하거나 가족을 위해 지원하고자 하는 기부자에게 매우 유리한 구조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CRT의 설계와 관리에는 전문가의 조언이 필요하며, 법적 및 세법적인 측면에서도 신중함이 요구됩니다.     ▶문의:(833)256-8810미국 remainder remainder trust 자선단체 트러스트 트러스트 설립

2024-06-17

[상속법] DST(Deferred Sales Trust)

재산 계획은 재무 관리의 중요한 측면으로, 세금 연기와 재산 보존을 극대화하는 전략은 매우 중요하다. 이와 관련하여 인기를 얻고 있는 혁신적인 도구 중 하나가 DST(Deferred Sales Trust)다.     많은 사람들이 1031에 대해선 익숙할 것이다. 1031이란 국세청 코드를 말하는데 보통 상업용 부동산을 팔았을 시 양도소득세를 국세청에 내지 않고 비슷한 금액에 상업용 부동산을 구매하게 해서 양도소득세 지불을 연기하는 것을 말한다. 문제는 1031은 부동산에만 해당이 되며 정해진 기간 안에 새로운 부동산을 찾고 구매해야 하는 제약이 있다.   여기서 DST의 장점이 나온다. DST는 부동산, 사업, 주식, 암호화폐 같이 가격이 많이 오른 자산의 양도소득세를 연기할 수 있도록 설계된 법적인 트러스트이다.     세금 부담을 연기하고 시간적으로 분산시킴으로써 판매자는 재투자나 다른 재정 목표를 위해 더 많은 자금을 활용할 수 있고 부동산 투자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니 다양한 자산 투자로 다각화할 수 있는 유연성을 얻을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리스크를 줄일 수도 있다. 이런 투자는 미래 세대를 위한 투자로 초점이 맞춰질 수도 있으며 채권자와 소송으로부터 보호받을 수도 있다.   그럼 DST는 어떻게 운영이 될까? 먼저 가치가 오른 자산의 소유자가 DST를 설립하며 이를 관리할 트러스티 혹은 관리인을 지정한다. 소유자는 자산 구매자에게 자산을 판매하는 대신에 자산을 트러스트에 옮겨 트러스트가 판매하게끔 하고 그 대가로 약속 어음(promissory note)을 받는다.     트러스트는 자산의 소유권을 얻은 후 실질적인 구매자에게 판매한다. 그 후 트러스트에서 약속 어음대로 할부로 지정된 금액을 자산 소유자는 오랜 시간 안에 나눠서 받고 받은 만큼에 세금만 지불하면 되는 시스템이다.   예를 들어보자. 존이라는 사람이 비즈니스를 200만 달러에 사서 500만 달러에 판매했다고 가정하자. 존은 300만 달러의 자본 이익을 얻었고 양도소득세가 20%로 가정했을 시 60만 달러에 세금 부담이 있을 것이다. 60만 달러를 지불하고 나머지 440만 달러로 투자해서 연간 7% 수익을 냈다면 30.8만 달러 소득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DST를 활용할 경우 존은 양도소득세를 연기하고 전액 500만 달러를 트러스트에 투자할 수 있다. 트러스트에 투자된 500만 달러로 위와 같이 7% 수익을 냈다면 35만 달러 소득이 생기는 것이다. 차이를 볼 수 있듯이 세금을 연기함으로써 수익률을 극대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존은 세금을 언제 지불하게 될까? 트러스트 설립 시 트러스트는 존에게 할부로 나눠서 지급하게 설정이 되었을 것이다. 존은 실질적으로 트러스트에서 금액을 받았을 때만 액수에 따른 연기된 세금을 지불하면 되는 것이다.   DST는 세금 연기와 재무 계획을 위한 강력한 도구이다. 가치가 올라간 자산의 매출에서 발생하는 양도소득세를 연기함으로써 개인은 재산을 보존하고, 다양한 투자 기회를 탐색하며, 재산 이전을 전략적으로 계획할 수 있다. 그러나 IRS 규정 준수, 전문적인 지도, 포괄적인 재무 계획 등을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경험이 있는 전문가들의 도움을 통해 DST를 설립하는 것을 권장한다.   ▶문의: (213)459-6500 스티븐 채 변호사상속법 sales trust 양도소득세 지불 sales trust 부동산 투자

2023-07-25

전 연방의원, 한국전에 대한 미국 실책 5가지 사과

  ━   “미국, 한국 분단에 5가지 책임”    맥클로스키 전 의원 연설 관심     한국전 참전용사인 피트 맥클로스키(94·민주) 전 연방하원의원이 미국이 한국 분단을 야기한 5가지 실책을 주장해 관심을 모은다.     맥클로스키 전 의원은 지난 25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72주년을 맞은 6·25 관련 연설을 통해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오만함과 부족한 정보력이 중국(중공)의 참전을 초래했고 이로 인해 한국이 통일의 기회를 놓친 것이 가장 뼈아픈 실책”이었다고 지적했다.     한국 전문가로도 널리 알려진 맥클로스키는 2014년 도널드 그렉 주한 미국대사 등과 함께 방북했으며 북한의 경제개발을 통해 한국과의 관계를 보다 밀접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맥클로스키는 1945년 미 해군에 입대해 1950년~1952년 해병대에서 근무했고, 한국전과 월남전에 참전했다.        ━   “중국 개입 부른 맥아더의 오만함 뼈아팠다”   맥클로스키 전 의원, 한국 분단 '미국 5가지 실책론'    “일본에게 한국 장악 기회 러시아 북한 점령 초래 한국군에 방어 무기만”   한국전 참전용사 출신인 피트 맥클로스키(94·민주.사진) 전 연방하원의원이 지난 주말 샌프란시스코에서 6.25 한국전쟁 72주년 관련 연설을 통해 미국이 한국 분단을 야기시킨 5가지 실책을 제시했다. 일종의 사과문 성격을 띠고 있어 관심을 모았다.     그는 “나의 이러한 생각을 윤상수 샌프란시스코 총영사에게 겸허한 마음으로 전달했다”며 “미국의 오점을 정확하게 짚고 있다고 본다”고 했다.     맥클로스키 전 의원은 미국의 첫 번째 실책이 1905년 테디 루즈벨트 대통령이 러시아를 견제하면서 한국을 일본에 넘긴 과정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했다. “루즈벨트는 러일전쟁 종식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지만, 일본이 한국을 야만적으로 점령한 일을 간과했다”며 “일본은 한국을 발판으로 1931년 만주를 침공했다. 이어 중국 본토까지 공격했다”고 했다.     두 번째 실책으로 그는 얄타 회담 때 노쇠했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서거 직전인 1945년 4월 독일이 항복했을 때, 러시아에 일본과의 전쟁을 종용한 점을 들었다. 이것이 러시아가 북한을 장악하는 일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 미국은 순진하게도 한국을 통일시킬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고 했다.     세 번째 실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호전적인 성향임을 우려해 미국이 한국에 수비형 무기만 안겨준 점을 지적했다. 이는 한국군이 김일성이 이끈 북한의 러시아제 T-34 탱크에 무방비 상태로 놓이게 했다는 것이다. 그는 “수많은 젊은 한국군이 T-34 탱크를 막지 못하고 전사했다”며 “북한은 T-34만으로 1950년 8월 한국 대부분을 점령할 정도였다”고 했다.     네 번째 실책으로 그는 1950년 1월 미국 국무장관(딘 애처슨)이 미국의 태평양 방어선에 한국은 포함되지 않았다고 선언한 점을 꼽았다. 이 같은 결정은 김일성에게 남침하라는 초대장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그는 “당시 북한은 남한보다 훨씬 강력한 군사력과 무기가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북한을 상대로 공격해야 한다고 UN에 촉구하는 용기 덕분에, 16개국이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펼쳐 북한을 막고 남한을 구할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다섯 번째 실책으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오만함과 부족한 정보력을 비판했다. 그는 가장 결정적인, 뼈아픈 실책이었다고 강조했다.     맥아더 장군에 대해 그는 “9월에 인천과 서울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뒀으나 이는 그에게 오만함을 심어줬다”며 “이후 맥아더는 중국 리더 마오쩌둥의 경고를 무시했다. 마오쩌둥은 미군이 38선을 넘어 한국과 중국 사이에 있는 압록강까지 침투하면 중국도 전쟁에 나설 것이라고 경고했던 터”라고 했다. 이어 “결국 중국이 전쟁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됐다. 만약 맥아더 장군이 한국군의 북한 점령으로 일을 끝냈다면 중국이 개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은 통일돼 있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맥클로스키 전 의원은 과거 미국의 여러 실책으로 한국이 분단돼 북한과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는 현실이 된 게 안타깝다면서 연설을 마무리했다.   ※맥클로스키 의원은   1927년 캘리포니아주 로미린다 출생. 스탠포드 로스쿨 졸업. 해병대 멤버로 한국전에 참전해 네이비 크로스와 실버 스타 수상. 공화당원으로 1967년~1983년에 연방하원 활동. 1972년 월남 참전 반대 카드로 공화당 대선 경선 출마해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 패배. 연방의회에서 닉슨 대통령 사임을 가장 먼저 촉구. 이라크전 반대하면서 2007년 탈당해 민주당에 입당.   현재 비영리단체 퍼시픽 센추리 학회(Pacific Century Institute) 이사.    정리=원용석 기자     ━   다음은 연설문 전문.     I have been honored by the request of my long-time friend of 60 years, Judge Quentin Kopp, to make a few remarks on this occasion. Because physical infirmity may prevent me from speaking more than a few words, I am taking the liberty of exercising a historic privilege given to Members of Congress to “revise and extend” their remarks. I’m particularly honored to be able to pay tribute to the late John Stevens, Captain of one of the twelve understrength Marine rifle companies who are credited with saving the Naktong Perimeter in August, 1950, and to the Directors of the Presidio Trust, who made this Memorial possible. I would also like to express thanks to the three Democrat Congressmen, Clem Miller, Phil Burton, and John Burton, who caused the creation of the Point Reyes National Seashore and Golden Gate Recreation Area. John Stevens is the primary creator of this Memorial where we sit today, and more than any other American, has well earned the enduring respect of both the Korean and American people. I’m particularly proud of the wisdom and generosity of the members of the Board of the Presidio Trust for their decision to make this Memorial a part of California’s long history. I am even prouder of the progress the South Korean people have made since 1950, establishing a robust economy and a democratic government not dissimilar to our own. I take note that the fact the California Republican Members of Congress include two Korean Americans, one born at Inchon and one in Seoul, Korea. John Stevens’ and my battalion of the Fifth Marine Regiment landed at Inchon on September 15th, 1950, and were successful in recapturing Seoul on September 28, 1950. I have long reflected on the similarity of California’s geography to that of Korea’s, and the good fortune which we have enjoyed of having peace here, since California became a state in 1850. By comparison, South and North Korea suffered the loss of over two million people during the three-year period of the Korean War, together with the devastation of nearly all of their cities, villages and countryside during that period. I am not so proud, however, of five actions of United States’ leaders which ultimately led to the terrible division of Korea which all Koreans suffer today. I want to convey to Consul General Sangsoo Yoon my personal apology for those five tragic mistakes. Let me try to list them here. 1. In 1905, President Teddy Roosevelt was awarded the Nobel Peace Prize for his leadership in negotiating the Portsmouth Treaty of 1905 between Japan and Russia. The Japanese Navy had virtually destroyed the Russian Navy, and President Roosevelt acquiesced in awarding Korea to the Japanese. The Japanese would thereafter cruelly occupy Korea, and later use Korea as a base for the invasion of Manchuria in 1931, and, later still, its invasion of mainland China. I doubt that President Roosevelt was aware that Japan had long coveted control of Korea, and that some 300 years earlier, between 1592-1598, the weak Ming dynasty in China had permitted Koreans to have what amounted to their own independent government. A Japanese warlord had invaded Korea with 300,000 men but was ultimately driven out by the famous Korean Admiral Yi Sun-sin using the famous “turtle ships” to defeat the Japanese in sixteen separate naval battles. 2. The second great mistake was at Yalta in February, 1945, when an ailing President Franklin D. Roosevelt, shortly before his death, encouraged Russia to agree to enter the war against Japan, following the surrender of Germany, which followed in April, 1945. American Army officers and diplomats were authorized to divide Korea at the 38th Parallel, to permit the Russians to occupy North Korea with its population of roughly ten million, while the United States would install a democratic form of government for the twenty million Koreans living south of the Parallel. In our naivete, we expected the country to be subsequently united by some sort of plebiscite. 3. Fearful, however, that the militant South Korean President Syngman Rhee would invade North Korea if he were furnished offensive weapons including tanks and artillery, the U.S. limited arms to the South Koreans to defensive weapons, which were incapable of stopping the Russian-built T-34 tanks which Russia furnished Kim Il-sung, the seasoned military leader who had successfully fought the Japanese in Manchuria. A lot of brave young South Korean soldiers would die attempting unsuccessfully to stop those T-34 tanks, which nearly overran all of South Korea in August 1950. 4. In January, 1950, the American Secretary of State announced that South Korea was not within the American “defense perimeter” in the Pacific. This was a virtual invitation to Kim Il-sung to attempt to reunify Korea, with his vastly superior army and weaponry. Only the courage of President Harry Truman in seeking and obtaining immediate United Nations action against North Korea, and the participation of sixteen other nations in ultimately stopping the North Korean advance by the landing at Inchon on September 15, 1950, saved South Korea. 5. Perhaps the most significant error was through the arrogance and lack of good intelligence on the part of General Douglas MacArthur, who, after his smashing September victories at Inchon and Seoul, led him to ignore the clear warning of the China’s leader, Mao Tse Tung, that if American troops crossed the 38th Parallel and moved to the Yalu river border between Korea and China, China would enter the war. Had MacArthur limited the reoccupation of North Korea only by the resuscitated South Korean army divisions, it is entirely possible that China would not have entered the war, and Korea would be a united, single nation today. I tender these thoughts to Consul General Sangsoo Yoon with some humility and sadness, but believe they accurately reflect the mistakes of an otherwise great nation, my own. So much for the history of a war that might not have necessarily been fought. A Geographical Comparison Between Korea and California From a geographic standpoint, we should not forget that the 38th Parallel, crossed by John Stevens’s Marines three times and thrown back across the Parallel twice, runs through some of California’s most beautiful landscape, starting a few miles north of here at Point Reyes and extending from San Rafael on the north across through Stockton, the Tioga Pass and Yosemite National Park to Mono Lake on the east side of the Sierras. The Presidio Trust has quietly appreciated and preserved the history that for many years, a few hundred yards west of this spot, our Coast Artillery mounted batteries of 16-inch guns to defend against potential battleships of the Japanese Navy. Luckily those 16-inch guns were never fired at an enemy, and the guns were scrapped, to be replaced by flower beds after the end of WWII. I well remember, at the age of 11, marveling at the historical pageants at the 1939 World’s Fair at Treasure Island, but also marveling at the huge 16- inch “disappearing guns” mounted at the Presidio. Neither John Stevens nor I were involved in the retreat from the Chosin Reservoir in December 1950, when 16-inch shells weighing nearly a ton were fired by the battleship Missouri at the several Chinese divisions which were attempting to block the retreat of the Marines from the Chosin Reservoir. One young veteran of that retreat later told me of the incredible terror caused by one 16-inch shell fired by the battleship Missouri which burst a few hundred yards away, literally disintegrating a group of nearly frozen Chinese infantrymen. It remains a sobering fact for reflection by those of us here today on a peaceful Saturday, to reflect that the many millions of South Koreans living in Seoul and its environs, are faced with hundreds of North Korean artillery pieces positioned across the present demilitarized zone, capable of reducing the South Korean capitol of Seoul to the same kind of destruction our atom bombs and fire bombing once caused to Hiroshima, Nagasaki and Tokyo. With thermonuclear weapons in the hands of men who may be close to being mentally unstable, we can never be sure that even the beautiful San Francisco Bay Area and this Presidio will remain safe from some madman’s decision to attack and destroy us with thermonuclear weapons. Against that sobering thought, I want to add one personal note, which may be of interest to Consul General Sangsoo Yoon. Some forty years after I had served in Korea, in 1992, I wrote a book mentioning that, in retrospect, we Americans had to admire the courage of the young Chinese and North Koreans against whom we had fought in close combat with rifles, grenades, and machine guns in Korea. Eight years ago, in 2014, I was invited to join a delegation headed by former U.S. Ambassador to Korea Donald Gregg to accompany a small group of businessmen to Pyongyang to offer advice to North Korean businessmen regarding economic development that might bring North and South Korea closer together. When we arrived in the North Korean capitol, I asked if there were any surviving North Korean soldiers from the spring of 1951. The North Koreans produced a retired Lieutenant General, Ji Young Choon, who, at the age of 17, had led a machine gun platoon in the fighting around Inje and Yanggu on the 38th Parallel. He was serving as a docent at the North Korean Military Museum. We learned through an interpreter that each of us had been wounded twice in the bitter fighting in May and June on the steep north-south ridge lines leading up to the famous “Punchbowl.” The late Eddie LeBaron, one of the Korean War Memorial Foundation’s original directors, was also wounded in that fighting as a Marine rifle platoon leader. At the end of two days, General Ji and I ended up embracing and saluting each other, and agreed that there was no glory in war and that we hoped that our grandchildren and great-grandchildren would never fight against each other. Now, 8 years later, I have a 31-year-old grandson teaching English to Korean school children in Taegu, a few miles south of Wonju, from which John Stevens’s company and mine led the first counter-attack against the Chinese on February 21, 1951. I have to assume, regrettably, that General Ji’s grandsons have been drafted into the North Korea army and taught to hate both Americans and South Koreans. Nevertheless, I am led to hope that in the eight years since General Ji and I met in Pyongyang there has been some progress behind the scenes to ultimately allow the North and South Koreans to reach a reconciliation, rather than continue the terribly unproductive pursuit of the development of huge weapons such as the 16-inch guns once mounted to the west of this Monument. In our youth, we fought on both sides in the belief that our respective causes were just. As we age, however, we look for leaders with the wisdom to know that wars are stupid and accept the words of Lincoln’s famous Second Inaugural Address: “With malice toward none; with charity for all.” For the Foundation’s records, I have taken the liberty of attaching the Los Angeles Times article and several photographs of the meeting between myself and the former young North Korean machine-gunner, Ji Young Choon. If John Stevens were alive today, I believe he would join me, Judge Kopp, Presidio Trustee Mark Buell, and Consul General Sangsoo Yoon, in the hope that our great grandchildren will someday see a peaceful reunification of the Korean people.   Respectfully, Paul N. “Pete” McCloskey, Jr미국 연방의원 democrat congressmen 이승만 대통령 presidio trust

2022-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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