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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에서] 우상을 섬기지 말라

구약성경의 율법에서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규정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땅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다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것도 그들의 우상숭배 때문이었고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멸망당한 것도 이 계명을 어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계명과 관련해서 이런 얘기가 구약에 있음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시리아에 나아만이란 장군이 있었는데 그는 문둥병자였다. 그는 자기 집에 있는 이스라엘 출신 여종에게 이스라엘 예언자 엘리사를 소개받았다. 그의 말대로 하면 병이 나을 것이란 얘기였다. 나아만이 이스라엘 왕에게 가서 자기 왕의 친서를 내밀었지만 이스라엘 왕은 나아만의 병을 고쳐달라는 편지 내용에 격분했다. 왕이 무슨 수로 문둥병을 고친단 말인가? 엘리사가 이 얘기를 듣고 나아만을 자기에게 보내달라고 했다.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요단강물에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했다. 그가 엘리사의 말대로 했더니 몸에 새살이 돋고 몸이 깨끗해졌다. 이에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이스라엘 밖에는 온 세상에 신이 없음을 이제 알았다"고 말하며 엘리사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후로 자기는 "여호와 외에 다른 어떤 신에게도 번제나 희생 제사를 드리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종교의 자유가 있던 때도 아니니 그의 결단은 매우 특별했다고 하겠다. 요즘 말로 하면 '개종'을 한 것이다. 그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자기는 여호와 이외에 다른 신에게 절하지 않겠지만 시리아의 신하로서 왕이 림몬 신에게 절할 때는 그를 부축해서 같이 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곧 우상인 림몬 신에게 절한다 해도 그것은 자신의 의사가 아니므로 그 사정을 이해해달라는 얘기였다. 이에 엘리사는 요즘 말로 '통 크게' 대답했다. "걱정 말고 가시오." 그는 나아만이 우상에게 절해도 괜찮다고 말한 셈이다. 요즘 뉴스는 온통 일본에서 일어난 지진과 그에 따른 참변 얘기이다. 전례 없는 대지진과 해일이 일어나 일본의 전 국민이 사투를 벌이는 판이니 그럴 수밖에 없겠다. 전 세계에서 애도와 도움의 손길이 답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때에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의 원로목사가 이 참사를 일본 사람들의 우상숭배와 무신론과 물질주의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라고 말했다. 무신론과 물질주의는 일본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니 이 분은 일본종교 신도(神道)를 문제삼았던 모양이다. 우상숭배는 구약과 신약을 막론하고 성경이 금하는 죄다. 하지만 전례 없는 참변으로 말할 수 없이 고통당하고 있는 백성을 가리켜 굳이 '지금' 그 말을 했어야 했을까? 이 말을 하고 싶었어도 나중에 사태가 수습된 후에 할 수는 없었을까? 성경이 우상숭배 금지 못지않게 강조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남을 심판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물론 목사는 세상이 잘못된 길로 가면 엄히 경고하고 눈물로 외칠 의무가 있다. 하지만 이 경고와 외침에 긍휼과 동정의 눈물이 담겨 있어야 그는 참 예언자다. 더욱이 그분 집안에서 지금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그는 이 경고를 집안에 먼저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2011-03-22

[변화] 하나님의 뜻과 우연

얼마전 풀러신학교를 방문한 기독교 윤리학의 세계적 권위자 '스텐리 하우어워스' 교수는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답 없이 사는 것을 배우는 것이고 믿음이라는 것은 답을 모른 채 계속 살아간다는 것이다. 너무 쉽게 말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인생이 왜 대단히 흥미로운지에 대한 답변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신령한 그리스도인들도 매사에 답을 모르고 살아가기는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일본 대지진과 같은 재앙이 생겼을 때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근본적인 차이가 생겼으므로 해석의 차이가 생겨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 우연' 가운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을 비그리스도인들은 '우연'이라는 렌즈로 사건을 바라볼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기로 작정했다는 말이다. 일본 대지진을 그리스도의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다. 지난번 뉴올리언즈에 카트리나가 들이닥쳤을 때도 그랬고 이번 일본 대지진도 그렇고 그리스도인의 눈에는 결코 우연일 수 없는 일들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사건들을 설교단에서 언급할 때 빛과 소금 되어야할 그리스도인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용도가 아니라 비그리스도인들의 죄를 정죄하는 도구로 쓸 때마다 하나님이 대신 욕을 먹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군사정보 사이트 인포워즈닷컴(Infowars.com)에 따르면 일본 정부가 후쿠지마 제1원자력발전소에 40년 동안 폐 핵 연료봉 60만 개를 비밀리에 저장해왔다고 주장한다. 일본정부가 이들 폐 핵 연료봉에서 언젠가 다량의 플루토늄을 추출해 핵무기를 만들려고 비밀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진압 초기에 미국정부의 도움을 뿌리친 것도 의심스럽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번 대지진에 대한 해석이 사뭇 달라질 수도 있다. 돌이킬 수 없는 인류의 대재앙을 미리 차단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재앙은 우연히 일어나지 않는다. 맏아들 된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이다. 이제 그 화살을 그리스도인에게 돌려야 한다. 회개할 사람들은 우상 숭배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것이 죄임을 가르쳐주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이다.

2011-03-22

[사목의 향기] '마리아를 본받는 수도자들'

수도자들은 예수님을 추종하면서 그분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나를 따르려고 제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백 배의 상을 받을 것이며 또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마태 1929). 이 말씀을 우리는 하늘나라를 위한 청빈 정결 순명의 서원을 하는 수도자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으로 해석한다. 그들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영적 투쟁을 하는데 무엇보다도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면서 덕을 쌓아 나가는데 재물의 욕심을 버리고 검소하게 사셨던 예수님을 본받아 청빈의 삶을 혼인을 포기하고 정결하셨던 그분을 본받아 정결의 삶을 아버지 하느님께 순종하셨던 그분을 본받아 순종의 서원을 발하면서 덕을 쌓아가는데 그들은 성모 마리아를 피조물 중에서는 가장 높은 성인으로 공경하며 훌륭한 덕을 쌓아 성인이 되도록 성모님의 도우심을 청한다. 그들에게 성모 마리아는 정결하신 모후 순명하신 모후 만덕을 갖추신 모후이시다. 성모님께 관한 아름다운 시와 성가들이 거의 모두 수도원의 작품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의 마음이 천상을 향해 맑고 순수했던 것처럼 가사와 곡들도 모두 맑고 순수해 이를 읽고 노래하는 이들의 마음을 천상으로 향하게 한다. 예를 들면 일반 신자들에게도 익숙한 성모님 찬가 'Salve Regina'는 수도원에서 하루 일과가 끝난 후 잠자리에 들기 전에 바치는 끝기도 후의 성가인데 하늘과 땅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던 중세기 풍의 아름다운 성가이다. 평생 동정녀이신 성모님은 우리의 희망이자 변호자이시므로 우리를 위해 전구해 주시옵고 특별히 이 찬류 세상이 끝난 다음 구세주이신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뵙게 해달라는 천상에 대한 그리움으로 되어 있다. 이를 노래하는 수도자들은 마음을 하느님 계신 천상으로 향하고 있어 비록 이 세상을 살면서도 마음을 성모님과 천사들과 성인들이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천국에 두고 있으니 얼마나 복된 삶을 살고 있는가? 하지만 그들도 인간인지라 유혹과 나약한 인간성으로 인해 고통을 느낀다. 그 고통을 인류의 죄악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으로 오르신 예수님과 그 분의 뒤를 성실히 따라 가신 성모님의 고통을 바라보고 묵상하면서 수용하고 극복하며 승화시키려고 노력하지 않는가? 십자가 옆에 서 계시던 성모님(요한 19 25-27)에 관한 묵상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위안을 주지만 수도자들에게도 예외는 아니리라. 모자의 비통한 고통은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음미하는 신앙인에게는 큰 위안이 된다. 그 고통은 목적이 아니었다. 고통은 고통으로 끝나지 않고 영광스러운 부활로 이어졌다. 예수님 십자가의 고통과 영광스러운 부활의 그 신비를 깨달은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으로 눈을 돌려 새로운 차원에서 현실을 직시한다. 하느님이 나에게 이 삶을 주신 이상 나는 현실에 충실할 것이다. 수시로 나에게 일어나는 크고 작은 십자가는 고통으로 끝나지 않으리라. 성모님처럼 아드님의 고통에 동참하면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성실히 찾을 때 나에게도 부활의 기쁨이 주어질 것이라는 확신과 희망으로 살아가지 않겠는가?

2011-03-22

[지혜의 향기] 외세에 저항한 베트남 스님의 '자두의 향기'

프랑스에는 자두 마을이 있다. 베트남 출신의 틱낫한 스님이 이끄는 플럼 빌리지인데 그 자두 향기가 프랑스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 스며들고 있다. 남가주에도 샌디에고 근처 에스콘디도에 스님이 세운 사슴 공원 즉 디어 파크가 있다. 거기엔 베트남 사람들도 있지만 다수가 아니다. 주류 미국사람들을 비롯하여 민족과 인종 심지어는 종교마저 초월한 많은 이들이 이 21세기의 녹야원을 찾아오기 때문이다. 무엇을 위해 오는 것일까? 우선 마음의 평안이다. 스님의 지도에 따라 나 자신이 화를 누르는 방법을 익힌다. 나의 숨쉬기를 지켜보며 내 마음과 몸이 움직이고 바뀌는 것을 내려다본다. 이를 비롯하여 일반인들에게 쉽고 알맞은 여러 단계적 수행을 통하여 마음의 평화를 찾고 부처님의 진리에 조금씩 다가가는 것이다. 불교 대중화의 좋은 본보기로서 베트남 불교가 세계에 끼치는 향기로운 과실이다. 그런데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베트남이라면 먼저 월남전이 주로 떠오를 것이다. 월남 파병이라든가 그에 따른 기업체와 인력의 진출인데 요즘 와서는 관광이나 투자 농촌 신부 수입 한류의 전파 따위도 있을 것이다. 주로 돈과 이익과 물질에 치중한 것으로 다소 우월감에 젖어 일방적이고 피상적인 인식을 해 온 점이 없지 않다. 반면에 그 나라 문화의 핵심인 종교를 비롯한 정신문화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잘 모르다 보니 좀 낮추어보는 경향마저 있어 온 게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우리는 선입견을 버리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균형 잡힌 '바로 봄'이 필요하다. 다른 점도 많지만 베트남이야말로 역사와 문화 그 운명에 있어서 한국과 비슷한 점이 참으로 많지 않은가! 수천 년 동안 중국 옆에 붙어 있으면서 끈질기게 저항하면서 독자성을 유지해 온 민족이 한국과 베트남밖에 더 있는가. 나머지 다른 민족들은 거의 중국에 녹아 없어졌거나 멀리 도망가 버렸다. 베트남은 지리상으로는 동남아이지만 불교는 한국처럼 주로 중국을 통해 받아들여서 대승불교권에 속한다. 또한 우리처럼 유교를 했으며 수많은 한자말을 받아들였다. 틱낫한도 한자로는 석일행(釋一行)이다. 교육을 중시하는 것도 닮아서 미국 학교에도 뛰어난 베트남 학생들이 많다. 이렇듯 두 나라 사람들이 서로 일깨우며 도와 줘야 할 일이 많다. 이제 우리는 베트남에 꽂았던 그 모든 쇠붙이는 거두고 그 땅의 향기로운 흙가슴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때가 온 것이다. 그런데 베트남의 불교는 한국보다 더 치열하게 겨레와 자신의 운명에 정면대결을 펼쳤었다. 전세계에 큰 충격을 준 틱쾅둑 스님의 소신공양은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애꿎게 죽어가는 수많은 중생들을 대신한 과감한 항변이었다. 틱낫한 스님도 부처님의 자비를 실천하기 위하여 떨쳐나섰던 많은 스님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부패와 잔학을 일삼던 월남 정부를 피하여 이전의 식민 종주국인 프랑스로 망명의 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 망명의 땅 원한의 구덩이마다 사랑의 자두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몇 해 전 돌아가신 한국의 숭산 스님과 캄보디아의 마하 고사난다 스님 그리고 달라이 라마와 더불어 살아있는 부처님으로 일컬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불이 어디 이 네 분뿐이랴. 자두의 향기를 맡든 '이뭣고?'를 하든 세상을 바로 보며 몸소 자비를 실천에 옮기면서 자신이 바로 부처임을 깨달은 이 그 누구나 생불인 것을!

2011-03-22

[변화] 어떻게 원수를 갚을 것인가?

지난주 일본에서 발생한 지진은 천년에 한번 일어날까 말까한 지진으로 1995년의 한신지진의 약 180배 그리고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지의 약 7000배 이상의 위력이었다고 한다. 국내총생산의 10%에 육박하는 재정적자와 심각한 고령화의 최악의 상황에서 발생한 최악의 사태라고 뉴욕대 루비니 교수는 평가했다. 최근 일본은 일본식 '모노즈쿠리(혼이 담긴 제조)'의 고가품 생산 전략 대신 신흥국의 중간소득계층 '볼륨존(Volume Zone)'을 집중공략하면서 경제적 중흥을 꿰고 있었기에 이번 지진으로 큰 타격을 입을 것이 분명하다. 한편 지난주에 '마에하라 세이지' 외상이 사퇴를 했다. '마에하라'의 사퇴가 우리의 이목을 끄는 이유는 재일교포가 관련되어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외국인들에게 정치 헌금을 받는 것이 불법으로 되어 있다. 대부분의 재일교포가 한국식 이름이 아닌 일본식 이름을 쓰고 있기 때문에 국적추적이 거의 불가능하다. 게다가 그 재일교포가 대기업의 사업가가 아니라 고깃집을 운영하는 같은 동네 아줌마였고 지난 5년간 한 달에 겨우 4000엔(약 40달러)을 받았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사퇴를 한 것이다. 일본은 지난 3년간 4명의 총리가 바뀌는 극심한 정치적 혼란 또한 겪고 있었다. 3.1절을 맞이하며 가수 김장훈이 독도 공연을 감행했다. 여전히 남의 땅을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를 확실히 뿌리 뽑아 버리고 싶은 강한 충동을 참석한 350명의 젊은이와 온 국민이 함께 느꼈을 것이다. 스포츠마저도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반일감정은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중국과 필리핀 등 주변국도 만만치 않다. 이런 가운데 일본은 2차대전 이래 최악의 사태를 맞이했다. 어떻게 원수를 갚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중에 수렁에 빠져 헤매는 가문의 원수를 우리가 발견한 것이다. 이웃을 향해 총칼을 들이대던 일본에 이제 주변 이웃들과 열방이 적극적인 사랑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 성경은 원수 갚는 확실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라"(롬12:20) 일본의 800만 우상을 무너뜨리고 영적 DNA를 바꾸는 유일한 길은 사랑의 힘뿐이다. 예수님이라면 당장 지갑을 여셨을 것이다.

2011-03-15

[생활속에서] 눈부신 날개로 날리라

"이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가장 행복하게 사는 사람일까?" 우리는 가끔 이런 질문을 마음에 던진다. 요즘처럼 실업률이 높아 일자리를 얻기 힘 든 때에는 조그만 일이라도 일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 사람은 작은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의 시인 괴테는 "이 세상에서 가장 기쁘고 훌륭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한평생을 바칠 수 있는 일을 갖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국 사람들은 행복을 정적인 개념으로 이해한다. 다른 사람보다 뭔가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거나 가만히 앉아서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 살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성경이 보여주는 행복의 개념은 동적인 개념이다. 움직이는 자가 행복하다는 것이다. 성경 시편에 보면 행복 인생은 "자신의 손으로 수고하고 또한 자신이 수고한대로 먹는 것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행복한 인생의 특징은 "자기 손을 놀리지 않고 작은 일이라도 최선을 다하는 데 있고 또한 수고한 만큼만 먹는 데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혀 수고하지 않고 먹으려 하는 인생도 불행한 것이고 더 나아가 수고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무리하게 소유하려고 하는 것도 불행한 인생이라는 것이다. 곤충 학자가 누에고치를 연구하는데 어느 날 연구하는 중에 고치 속에서 뭔가 고치 벽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누에가 나비가 되어 나오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감옥 같은 고치 벽을 뚫어 보려는 누에가 갑자기 불쌍하게 생각되어 그 곤충 학자는 껍데기를 뜯어 나올 수 있는 구멍을 내 주었다. 그런데 그 속에서 그 속에서 나온 것은 아름다운 날개를 가진 한 마리의 나비가 아니라 아직 제대로 기어다니지도 못하는 겨우 꿈틀거리기만 하는 흉측하게 생긴 벌레 한 마리였다. 누에가 남의 도움으로 너무 일찍 세상에 나온 것이다. 누에가 컴컴하고 비좁은 고치 속에서 몸부림치는 것은 단지 길고 어두운 고통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다. 밝고 아름다운 미래를 내다보며 창공을 날 수 있는 아름다운 날개를 준비하는 의미 있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힘이 아니라 누군가의 도움으로 너무 일찍 세상에 나오면서 누에는 창공을 날을 수 있는 날개도 채 달지 못하고 또한 밝은 세상을 힘 있게 살아갈 수 있는 아무런 준비도 못한 채 흉한 모습의 벌레로 죽게 된 것이다. 때로 우리 인생이 고치 속에서 몸부림치는 누에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좁고 답답한 어두운 곳에서 몸부림 칠 때가 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외로운 현장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좁은 고치 안에서 인내의 시간을 보내며 미래를 준비하는 한 마리의 누에처럼 기다릴 수 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으로 살게 될 것이다. 아무리 고통스러운 곳에서 머물러 있을지라도 끝까지 인내하고 견디면 곧 눈부신 날개를 달고 세상을 힘차게 날아가게 될 날 이 올 것이다.

2011-03-15

[사목의 향기] 동상에서 일어난 기적

우리나라에서도 마리아를 통하여 여러 기적이 일어났다는 실화들이 전해지고 있다. 그 중의 한 장소는 충청북도 감곡이라는 작은 마을이다. 원래 장호원이라고 하였으나 경기도 장호원과 구분하기 위하여 본래 전해져 오던 고을 이름인 감곡으로 바뀌어 '감곡 성당'이 마리아의 성지로 유명하다. 조선 말기 대원군의 권불십년이 끝났을 때 프랑스 선교사 부이용 신부가 여주에서 본당신부로 있었는데 감곡은 시골 마을이라 그분이 관리하던 공소였다. 공소는 사제가 상주하지 않는 작은 교회를 말한다. 그 곳을 다니면서 지형을 보니 산 중턱의 그 땅이 너무 좋게 보이고 빛이 나는 것 같아 그 땅에 성전을 지으려는 열망이 생겼다. 그래서 기도하면서 그 곳을 지나 다녔고 기적의 패를 던지곤 했는데 그 곳에 있던 집은 명성황후의 삼촌이 거하던 109칸 짜리 저택이라 도저히 살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그 분 삼촌이 한양으로 끌려갈 때 그 집에 불이 나는 바람에 헐값에 매입하여 성당으로 수리하여 첫 미사를 지낸 후 꾸준히 노력하여 전교가 잘 되고 있었는데 문제가 생겼다. 일본인들이 그 곳에 신사를 지으려 한 것이다. 유명하다는 목수를 불러와서는 신당을 멋있게 지어 놓고 날을 받아 헌당식을 거행하려던 전날 밤 청천하늘에 번개가 쳐 그 신당을 무너뜨려 버렸다. 너무도 놀란 일본 관리들은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지난 번보다 더 멋있게 신당을 지은 후 날을 받아 헌당식을 거행하려던 그 전날 밤에도 구름 한 점 없는 청천하늘에 번개가 내리쳐 신당을 부수어 버렸다. 놀란 일본 관리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혼미한 상태에 있을 때 일본에 원자폭탄이 떨어져 항복을 하자 일본인들은 개다짝 신고 일본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부이용 신부는 바로 그 장소에 성모당을 지으려고 공사를 시작했다. 교회의 대축일에 봉헌식을 한다는 공지를 하자 이상한 소문이 돌기시작했다. 사람들은 혹시나 했다. 지난 번에 두 번이나 청천하늘에 날벼락이 일어났으니 혹시나 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예수님 어머니의 동상을 모시는 거룩한 장소에 부정이 탈 수 있겠는가? 봉헌식을 성대히 거행하고 나자 성모당에서 크고 작은 기적들이 일어나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 기적 앞에는 약한 인간들이 꼼짝할 수 없지 않은가?. 6.25 전쟁 당시 인민군들은 그 성당을 빼앗아 장교들 숙소로 삼고 진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 모두들 꿈자리가 어지러워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성당 내부를 둘러보니 위에 성모상이 하나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총을 쏘아 없애 버리려고 하였으나 끄덕도 하지 않았다. 따발총을 쏘아도 총알이 모두 옆으로 피해가 버린 것이다. 군인들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망치로 그 상을 없애려 하자 석고로 만든 동상에서 피눈물이 막 쏟아져 도저히 동상에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모두들 혼비백산하여 부대를 성당에서 철수시키고 말았다. 인민군들이 후퇴할 때 사람들이 북으로 끌려갔는데 감곡의 청년들은 모두 성당으로 숨어들어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었다. 인민군들이 성당 밖에서 위협해도 청년들은 성당에서 안전하게 숨어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분들이 모두 90대가 되어 그 당시의 이야기들을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있으니 얼마나 흐뭇한가? 감곡 성당! 그 곳에 모셔둔 성모상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하니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다.

2011-03-15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참회한뒤 성취 대신 시련 다가와…본인 책임 기도에 떠넘기면 안돼

Q: 삼년 전에 참회와 미래의 진로에 대한 발원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 정진했습니다. 회향 후에 한 동업자를 만나서 약간의 의심은 있었지만 진로 기도를 했다는 착각에 동업을 추진했고 그 결과는 너무나 큰 시련으로 다가왔고 정신적 물질적 손실이 컸습니다. 보통 기도하면 기도 성취를 한다고 하는데 저의 경우는 오히려 시련으로 다가온 것이지요. 앞으로 제가 어떻게 기도해야 되는지 스님께 여쭙습니다. A: 기도를 열심히 하고 기도 믿고 사업을 벌였더니 사업이 안 됐다는 이야기인데 학생이 대학 가려면 기도를 열심히 해야 됩니까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됩니까? 학생에게는 '대학시험에 합격하게 해주세요' 하고 열심히 절하는 게 기도가 아니고 대학시험에 합격하도록 열심히 공부하는 게 기도입니다. 그런 것처럼 사업을 하려면 사업에 관계되는 일 시장조사라든지 동업자에 대한 신용조사라든지 뭔가 사업에 합당한 것을 열심히 했다면 기도가 성취되었을 텐데 질문자는 사업하고는 아무 관계 없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래놓고는 기도했다는 핑계로 준비도 없이 사업을 시작해서 망해놓고는 기도했는데 영험이 없다면서 자신의 책임을 기도에 전가시키고 있습니다. 예부터 '하늘도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습니다. 불교신자는 특히 부처님 가르침의 원리 지은 인연이 있으면 그 과보가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인연이 있어야 과보가 있지 인연이 없는데 어떻게 과보가 있겠습니까. 복을 받으려면 복을 지어야 합니다. '복 주세요' 하고 기도하는데 복을 짓지 않고 복주세요 하면 복이 어디서 올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그냥 복을 달라고 비는 기도는 이리 맞추고 저리 맞춰도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내가 복을 받고 싶으면 복을 지어야 된다. 신이 있고 없고를 떠나 복을 지으면 복을 받는다. 이래야 이치에 맞습니다. 오늘 우리가 받는 고통은 바로 이런 잘못된 생각과 행동에서 빚어지는 겁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적인 요지는 인연과보입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원인이 있어서 결과가 일어나지 원인 없이 일어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질문하신 분은 이 사건을 통해서 '내가 바보 같은 짓을 했구나. 신앙도 아닌 걸 신앙이라고 생각하고 종교도 아닌 걸 종교라고 생각하고 불교도 아닌 걸 불교라고 생각하고 기도도 아닌 걸 기도라고 생각하고 엉뚱한 짓을 했구나' 이렇게 반성하는 계기로 삼으세요. 이번에 이렇게 사업이 일찍 망했기에 그나마 요 정도에서 어리석은 행동을 그만뒀지 만약 사업이 좀 잘 됐으면 앞으로도 사업 관련 공부는 안 하고 기도만 하고 재만 지내면서 사업이 잘될 거다 하면서 더 크게 사업을 벌리다가 더 크게 망했을 겁니다. 세상에 그렇게 요행수나 바라고 도박하는 사람들에게 성공이 있을 리 없습니다. 그러니 이미 일어난 일은 감사히 받아들이고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원한다면 그런 인연을 짓지 않으면 됩니다. 이번 일이 학습비라고 생각하세요. 몸 건강히 살아 있다는 것만도 감사한 일입니다. 살아 있으니 또 도전을 할 수 있지요. 그리고 새로운 도전을 할 때에는 지난번처럼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108배 절을 한다면 '부처님 저는 사업에 성공하기 위해 열심히 연구하고 노력하겠습니다. 함께하는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고 맞추겠습니다.' 이런 원을 세운다면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기도다운 기도를 하셔야 합니다.

2011-03-15

[생활 속에서] 기술과 예술

저녁 스포츠 뉴스 시간에 15살 난 어린 소녀가 피겨 스케이트를 타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동계 아시안 경기랍니다. 연기가 끝나고 덕 아웃에서 자신의 코치와 함께 아직 식지 않은 뜨거운 숨을 몰아 쉬며 점수 발표를 기다리는데 참 앳된 모습이 너무도 안쓰러웠습니다. 카메라에 잡힌 작은 눈망울이 긴장과 기대감으로 들 떠있습니다. 잠시 후 점수가 발표되자 펄펄 뛰며 코치를 껴안고 기뻐합니다. 최고 점수입니다. "1등을 했나 보군!" 생각했는데 갑자기 또 다른 점수를 발표합니다. 무슨 운동이 점수를 두 번이나 발표하나 의아해 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점수가 발표되자 이 어린 소녀 아이가 크게 낙심하며 고개를 떨굽니다. 그 모습을 보자 그 아이가 내 딸이라고 되는 양 갑자기 부아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세상에 무슨 점수 발표를 두 번이나 해! 나쁜 놈들!" 경기 방식을 모르니 당연히 "무식이 단독 드리블을 해서 덩크 슛하는 소리"를 한 것입니다. 처음에 발표한 점수는 '기술점수'였고 나중에 발표한 점수는 '예술점수'였습니다. 이 두 점수를 합쳐서 승부를 내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 소녀는 기술 점수 만으로는 금메달인데 예술 점수가 많이 떨어져서 결국 동메달에 머물고 만 것입니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나의 목회를 저렇게 둘로 나누어 평가하시면 어떻게 될까? 사람들과 더불어 살면서 말하는 기술 비위를 맞추는 기술 그리고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다루는 기술은 많이 발전했는데 정작 목회자의 생명 같은 능력인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전달하고 표현하는 신앙의 예술성'은 밑바닥으로 떨어져서 기준에도 못 미친다면 얼마나 허탈하고 절망적일까? 기술이 겉모습이라면 예술성은 내용물입니다. 눈에 보이는 훌륭한 기술도 중요하겠지만 그 보다 더 우선되어야 할 것은 몸에 배어 있는 예술성입니다. 결국 화려한 테크닉은 그 속에 담겨 있는 예술성을 잘 표현하려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예술성은 그 사람의 뇌리 속에 깊이 베어져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야 합니다. 갑자기 급조되거나 돌출되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꾸준한 연습과 사랑 그리고 소위 '끼'라고 하는 것이 합쳐져서 만들어집니다. 행위자의 '혼과 넋'이 담겨 있는 것이 예술입니다. 예전에 '서편제'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양딸(Stepdaughter) '송화'를 명창으로 만드려고 광기 어린 노력을 기울이던 미친 소리꾼 '유봉'은 급기야는 송화에게 약을 먹여 그녀를 실명시킵니다. 세상과 단절된 송화의 철저한 고독감은'한'이 되어 '절묘한 소리'로 승화됩니다. 그리고 비로소 예술의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철이 들고나서 그것이 예술을 생명처럼 여기는 '예능인'들의 '살신성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책을 많이 읽어 생각의 틀을 넓히고 많은 사람을 사귀어서 좋은 인맥을 형성하고 부단한 노력으로 연예인 뺨치는 말재주와 행동 테크닉을 갖추었어도 가장 중요한 하나님과의 깊은 교감이 빠진다면 결코 아름다운 신앙인도 그리고 목회자도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모양만 그럴듯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기보다는 '그리스도의 혼'이 살아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011-03-08

[번화] 감성 코드

샌프란시스코에서 지난 2일 열린 애플의 제품발표회에 스티브 잡스는 여느 때 처럼 검은색 터틀넥에 청바지차림으로 등장했다. 내셔널인콰이어러가 보도한 '6주 시한부설' 때문에 그의 등장은 더욱 극적이었다. 그는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1시간 11분을 소화했다. "애플의 DNA는 기술만이 아니다. 우리의 DNA는 기술과 인문학의 결혼이다." 이날 잡스가 내세운 애플 철학이다. '아이패드 2'의 발표회는 '기술(Technology)'과 '인문학'(Liberal arts)이라고 적힌 이정표를 보여주면서 끝을 맺었다. 지난 9개월간 아이패드 1500만 대를 팔아 95억 달러의 이익을 남긴 것은 '기술과 감성'의 합작 덕분이라는 잡스의 결론이다. 요즘 우리는 '감동'이라는 단어를 부쩍 자주 듣는다. '우리는 음식을 팔지 않습니다. 감동을 주는 식당입니다'라고 선전하는 식당이 있을 정도다. 현대 마케팅의 가장 기본은 '감성코드'이다. 감동을 받지 않으면 물건을 사지 않는다. 이해가 안 되어도 감동을 받으면 지갑이 열린다. 심지어 코미디 프로에도 눈물 흘리는 장면이 꼭 들어가는 것을 보면 현대는 감동에 심히 목말라 있다. 인간은 밥을 충분히 먹어야 하는 것처럼 감동을 충분히 받아야 우울증 같은 마음의 병에 안 걸린다. 우리의 삶은 가장 원초적 감성의 근원인 자연과 멀어졌고 흙을 밟은 지 오래되었다. 그러다 보니 감성은 메마르고 어디서 감동을 준다면 기를 쓰고 찾아간다. 그러고 보면 여러 교회를 기웃거리는 사람들은 성경을 배우러 가는 것이 아니라 감동을 찾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해 보다 감동되는 것이 더 중요한 우리는 다른 민족보다 감성적으로 더 예민한 민족이다. 이해가 안되어도 감동만 되면 일단 지르고 보기 때문에 '엣지 있는 행동'을 기대하기 어려운 눈물과 연민의 '한(恨) 민족'이 된 것은 아닐까. 시대의 요구가 이렇다 보니 요즘 설교들은 주로 감성 코드를 중심으로 엮어진다. 설교에 감동이 필요하지만 감동이 메인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과다한 양념이 원래 음식의 맛을 해치듯 과다한 감성코드는 '은혜의 감정'은 만들어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본질을 흐리게 된다. 은혜는 많이 받는데 삶이 바뀌지 않는 원인이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2011-03-08

[지혜의 향기] '비폭력의 힘' 보여준 달라이 라마

티베트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 잘 모르는 이들도 달라이 라마라는 이름은 들어 보았을 것이다. 불교계의 인물로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1959년 이래 인도에 있는 티베트 망명 정부를 이끌고 있는데 티베트 사람들뿐 아니라 전세계 많은 불교도들의 정신적 기둥이 되었다. 그 뿐 아니다. 유럽을 비롯해 많은 주류 미국 사람들도 종교의 벽을 넘어 그를 너무나 좋아한다. 그의 말 한 마디에 영감을 얻고 그 가르침에 심취한다. 싸지 않은 강연 티켓은 서둘러 매진이며 유명 무명의 인사들이 후원의 행렬에 가담한다. 속된 말로 인기 짱이다. 중국으로서는 목에 걸린 생선뼈요 눈엣가시지만 어서 세월이 흘러 이 골치 아픈 존재가 사라지기만을 바라고 있다. 달라이라마가 불러일으키는 이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한 마디로 참의 힘이다. 폭력을 쓰지 않는 평화의 힘이요 솔직함과 천진함의 힘이다. 그 여리고 잔잔한 웃음지음과 부드러운 말의 조각들이 퍼져나가 무심했던 사람들의 가슴을 흔든다. 지성의 물결을 일렁이게 하고 인류 양심의 차원을 끌어올린다. 이 모든 것의 밑바탕에는 티베트 불교가 있고 그 원천인 부처님의 진리가 있다. 유교 불교 이전 한국에는 샤머니즘에 해당하는 선교가 있었고 일본에도 신토의 전신이 있었듯 티베트에도 본래 '뵌'교 라는 토속 신앙이 있었다. 이러다 7세기에 인도에서 불교가 전해졌다. 770년에 국교가 된 이래 부침은 있었지만 티베트는 최근까지 특색 있는 불교국으로 이어왔다. 그런데 이 아름답고 소중한 나라와 민족이 문화와 종교가 이제 마지막 심지를 태우며 꺼져 가는 촛불이 되었다. 서울인 라싸에는 티베트 사람들보다 중국 사람들이 더 많아질 참이다. 2차 대전에서 중립을 지킨 티베트는 전쟁후 독립 정부를 세우려고 하였지만 공산화 된 중국이 무력침공을 했다. 달라이 라마는 유엔과 영국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철저히 외면당했다. 그리하여 1951년 중국의 종주권과 티베트의 자치권 인정을 골자로 하는 협정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 인민해방군이 진주해여 500년간 계속되던 겔룩파의 정권을 무참히 짓밟으니 이것이 티베트가 서장 자치구라는 이름으로 중국에 강제 합병된 과정이다. 왜 세계는 서구 열강은 티베트를 그토록 외면했을까? 불행히도 티베트에는 열강이 탐낼만한 핵심 이익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동 같은 석유나 아니면 엄청난 우라늄광 같은 것도 없었다. 세계 교역의 길목도 첨예하게 대립되는 전략의 요충지도 아니었다. 엄청난 인구의 잠재 시장도 아니었고 자기네 문명의 고향 종교의 발상지도 아니었다. 위험과 손실을 무릅쓰고 십자군을 일으킬만한 아무런 건덕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 사정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혹시 달라졌더라도 이미 때는 좀 늦은 것 같지만 그렇다고 티베트가 전적으로 모든 것을 잃기만 한 것은 아니다. 바람에 흩날리는 고원의 민들레 씨앗처럼 지구의 지붕 위에 꽃피웠던 부처님의 가르침은 색다른 모습으로 멀리멀리 세계로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자비와 평화! 티베트의 그 모든 희생 속에서 건져 올린 부처님의 소중한 메시지다. 그 메시지는 오늘도 퍼져나간다. 세계 곳곳 크고 작은 티베트 사원의 불탑을 감돌아 애절하게 매달린 기도깃발에 나부끼며 달라이 라마의 잔잔한 미소에 실린 채 우리 모두의 가슴 속으로.

2011-03-08

[생활 속에서] '다른 사람'과 공존하기

'템플 그랜딘'은 2010년 에미상 7개 부문에서 상을 받은 TV 영화로서 자폐인 템플 그랜딘의 일생을 그린 영화다. 템플이 자폐 진단을 받은 때는 자폐를 정신분열로 막연히 생각했고 교육방법을 몰라 자폐아를 시설에 수용했던 1950년대였다. 당시에 자폐아 엄마를 '냉장고 엄마'라고 불렀던 이유는 자폐가 부모가 아이와 놀아주지 않아 생긴 병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템플의 엄마는 냉장고 엄마가 아니었다. 그는 딸에게 최적의 교육환경을 마련하려고 애썼고 덕분에 템플은 자기에게 가장 잘 맞는 학교에서 자기를 이해해주는 교사에게 교육받을 수 있었다. 그녀는 동물들과 같이 생활하는 자연학교에 다녔고 거기서 받은 교육 덕분에 나중에 획기적인 발명을 했다. 대학원 때 그녀는 도살장에서 실습하다 도축당하는 동물들이 극도로 불안해하고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오랜 관찰과 연구 끝에 동물의 불안과 두려움을 없애는 시설을 발명했다. 그녀는 훗날 인터뷰에서 자신은 육식을 반대하지는 않지만 식용으로 사육되는 동물도 존엄한 삶을 살 권리와 고통 없이 죽을 권리가 있음을 강조했다. 요한복음 9장은 나면서부터 시각장애인인 사람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을 전한다. 당시 사람들은 불행의 원인이 죄라고 믿었기 때문에 불행하게 태어난 사람은 누구의 죄 탓으로 그렇게 됐는지가 궁금했다. 부모의 죄 탓인가 본인의 죄 탓인가? 예수는 "자기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요한 9:3)라고 말씀했다. 나는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이 당신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었다가 불행을 해결해준다고는 믿지 않는다. 말씀의 뜻이 뭔지 정확하게 몰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먼저 불행을 겪거나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불행과 불편의 원인을 따지지 말고 그저 나와 '다른 사람'으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불행과 불편을 죄의 결과로 단정하지 말고 그들을 차별하지 말자는 얘기다. 천재지변을 회교도나 동성애자를 벌하기 위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지 말자는 뜻이다. 예수는 장애인을 '죄인'으로 낙인찍고 차별하는 세상의 시선이 불편하셨던 것 같다. 차별에 대해 불편을 느끼는 일이 인권운동의 시작이다. 불편을 느끼는 사람이 많아질 때 차별은 고쳐질 수 있다. 흑인에 대한 차별에 불편을 느꼈던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그 차별을 고친 것처럼 장애인에 대한 차별도 그것에 불편을 느끼는 사람이 많아져야 고쳐질 수 있다. 템플은 도살당하는 동물들이 느끼는 불안과 두려움에 공감해서 그들이 편히 죽을 수 있는 시설을 발명해냈다. 자폐아로 사회의 온갖 차별을 받고 자랐던 템플이 그 일을 했다는 사실이 부끄럽다면 이것도 일종의 차별일까?

2011-03-01

[변화] 닫힘도 은혜이다

연초부터 불기 시작한 튀니지발 '재스민 혁명'이 이집트의 '시민혁명'으로 번져 무바라크를 넘어뜨리고 북아프리카와 중동지역 전체로 번지고 있다. 현재는 리비아에서 가장 강력한 폭발음을 내고 있지만 주변국 바레인.알제리.수단 등지에서도 심상치 않은 혁명의 기운이 감돌고 있다고 한다. 아프리카 대륙과 중동을 거친 민주화의 기운이 이제 곧 중국과 북한에도 상륙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성령의 바람이 한반도로 불어오고 있다. 성령님이 하시지 않고서야 어찌 한 나라의 운명이 뒤바뀔 수 있다는 말인가! 북한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은 북한의 문이 수년 내에 열릴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한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해야할까. 북한의 문이 열리자마자 자본주의의 물결이 북한 형제자매들을 휩쓸기 전에 전세계에 흩어져있는 모든 선교사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잠시 자신의 일을 내려놓고 북한에서 2개월만 전폭적으로 복음을 전한다면 굶어 죽고 도망가고 남은 2000만도 안되는 북한 주민 대부분이 복음을 먼저 듣게 될 것이다. 통일이 되면 어떻게 정치적 경제적 균형을 맞출 것인가? 어떻게 중국에 맞서 진정한 국토의 통일을 이룰 것인가?를 고민하고 준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성령님이 문을 여실 때를 기다려 어떻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를 준비해야 한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성령님의 사역은 때로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 강력하게 때로 강물처럼 유유히 역사하셨다. 성령에 민감하지 못했던 많은 교회가 성령님의 리듬과 템포를 읽어내지 못해 엇박자를 내면서 성령님의 사역에 오히려 불협화음을 내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나님께 순종 여부에 따라 이스라엘이 망하기도 하고 흥하기도 했던 것처럼 교회 역시 성령께서 부흥케도 하고 망하게도 하실 것이다. 잘 생각해보자. 교회가 분열되는 것이 어찌 마귀의 장난 때문이란 말인가. 마귀는 어디까지나 주변인물이다.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님이 자신의 몸이 분열되는데도 막지 못하는 무능한 분이라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교회의 분열이나 문닫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엇박자만 내는 교회는 빨리 없애야 지체들을 위해서도 더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더 중한 성령 훼방 죄를 짓기 전에 말이다. 닫힘도 은혜이다!

2011-03-01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착해도 어리석으면 화 자초해 괴로워져

Q: 제게는 농장이 하나 있습니다. 친척 되는 사람이 3년 전에 농장을 돈 200만 원에 빌려달라고 해서 빌려줬습니다. 5년 계약인데 있을 데가 없으니 농장 옆에 하우스를 짓고 살겠다고 하길래 보기가 딱해 농장에 딸린 집에서 거저 살라 했습니다. 그런데 제 딸이 방이 필요해져 집을 비워 달라 하니 못 비워주겠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그곳에 핵심 도시가 들어온다고 하니 보상이라도 받을 수 있을까 해서 같이 살지도 않는 아들 주소까지 옮겨놓았습니다. 퇴거시키기 위해 변호사 비용을 알아보니 500만 원이나 들고 전입 말소도 한 달이나 있어야 한다니 가슴이 답답합니다. A: 좋은 마음을 내도 어리석으면 괴로움이 따릅니다. 괴로움은 착한가 악한가에 따라 일어나는 문제가 아니고 어리석으면 괴로움이 일어나고 지혜로우면 괴로움이 사라집니다. 착한 마음을 냈지만 어리석었기 때문에 화를 자초했다는 말입니다. 일가친척 간에 돈을 빌려줄 때 이자 없이 빌려주거나 이자를 아주 작게 빌려주면 돈을 못 받을 확률이 높습니다. 채무자가 돈을 갚을 때 이자 높은 것부터 먼저 갚는 게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이자가 높은 것부터 갚고 이자가 없는 돈은 제일 나중에 갚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자가 없는 돈은 못 받을 확률이 높습니다. 이것은 이치입니다. 사람 마음이 다 이렇습니다. 그러면 내가 빈 집이 있어 남에게 빌려줄 때 월세를 많이 받고 빌려주면 돌려받기 쉽겠어요 아니면 월세 한 푼도 안 받고 빌려주면 돌려받기 쉽겠어요? 월세를 안 받고 빌려줬기 때문에 돌려받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다 그렇다 이 말입니다. 그 사람 입장에서는 월세를 안 내고 집을 빌렸으니 가능하면 오래 사는 게 유리하잖아요. 그러니까 이걸 나쁘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특히 돈이 없는 사람일수록 어쩔 수 없다 이 말이에요. 이런 이치를 잘 알아서 굳이 퇴거를 시키고 싶으면 변호사 비용 500만 원을 들여서라도 퇴거시키세요. 하지만 지금 내가 농장이 필요한 게 아니고 딸이 살 집만 필요한 거니 그 사람을 그냥 놔두고 500만 원을 주고 딴 데 방을 얻는 게 나을지 아니면 500만 원 들여서 내보내고 딸이 집에 들어가는 게 낫겠는지 판단하고 일을 진행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되지 가슴앓이를 할 일은 아닙니다. 그 사람이 나쁘다고 생각하니 내가 가슴앓이 하지요. 그 사람이 나쁘다고 생각할수록 내 가슴만 답답해집니다. 그러면 내가 손해입니다. 지금 변호사 비용을 아까워하는 것도 내 욕심입니다. 그 사람도 2년만 더 버티면 소유권자가 아니라도 거주권을 가지고 이전 보상을 받을 수 있잖아요. 그걸 노리고 거기 들어와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사람도 지금 물러설 수가 없는 입장입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돈이 생기기 때문에. 그러니 그걸 나쁘다고 생각하면 나만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사람이 이익을 위해서 저렇게 노력하는구나 그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그렇듯이 나도 내 이익을 위해서 대한민국 헌법에 보장된 권리를 행사하는 거는 괜찮아요. 아 저렇게라도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구나 이렇게 마음을 내서 그래 너 벌어먹고 살아라 이렇게 빌려 주든지 아니면 이런 상황은 나중에는 내가 땅을 팔 때도 문제가 생길 수가 있으니 지금 더 이상 거주를 못 하게 신속한 조치를 취하든지 그러면 됩니다. 지금처럼 돈은 돈대로 들고 인정은 인정대로 잃고 나는 나대로 잠 못 자면 세 가지 손실을 보는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법적인 조치를 취하든 안 하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어떤 마음을 가져야 되느냐가 중요합니다.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2011-03-01

[생활속에서] 지족지부(知足知富)

한국에서는 자기 몸매에 만족하는 사람이 100명이면 1명에 불과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현재 한국 사람들이 몸매 관리에 쓰는 비용이 2조원 이상 되는 엄청난 돈이라고 한다. 한국 사회가 몸매 관리에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살 1kg 빼는데 약 100만원 정도 든다고 하니 10kg 빼려면 1000만원이라는 거금이 들어야 한다. 전에는 세끼 밥만 먹어도 감사했는데 이제는 온 국민이 살 빼는 걱정을 하고 있다. 비단 몸매뿐 아니다. 한국인들은 일상의 삶을 살면서도 점점 만족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다. 직장 생활에 만족하는 사람이 30% 정도이고 부부가 결혼 생활하면서 만족하는 경우는 20%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직장 생활도 가정생활도 할 수 없이 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는 것이다. 사자 성어 가운데 '지족지부'(知足知富)라는 말이 있다. '현재의 삶에 만족할 수 있다면 어떤 조건에서도 부자같이 살 수 있다'는 뜻이다. 성경에 보면 우리는 사도 바울의 고백 속에서 지족지부와 유사한 개념이 나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하였다(빌 4:11). 이것은 아마도 우리가 일생을 통해 배워야 하는 삶의 원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지족지부의 삶을 살면 행복은 언제나 우리 가까이에 있음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사실 행복은 많은 것을 소유하는 데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있다고 해도 자신이 처해있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긍정적으로 이해할 수 만 있다면 행복은 바로 그곳에서 시작될 것이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툭하면 원망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원망하는 것도 사실 습관의 일종이다. 원망을 자꾸 하다 보면 원망하는 것이 몸에 배고 는다. 또한 누군가를 원망하기 시작하면 이상하게 내 곁에 원망해야 할 사람이 늘어난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원망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원망하는 것을 중대한 범죄로 보고 있다. 또한 원망하는 것이 멸망으로 가는 첩경이라고 보고 있다. 지도자 모세의 인도를 받아 이스라엘 민족은 노예 생활을 하던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왔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축복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을 당하게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멸망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원망하는 삶이었다. 성경은 원망하는 삶이 단지 문제가 있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의 표현이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 대한 도전으로 보고 있다.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우선 원망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배워야 할 것이 많이 있지만 가장 중요하게 배워야 할 것은 지족지부의 삶이다. 사도 바울처럼 자족하는 삶을 배울 수 있다면 사는 동안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해도 원망보다는 감사가 넘치게 될 것이다. 요즈음 차를 운전할 때 매우 조심스럽게 신중하게 해야 한다고 한다. 불경기로 인해 짜증내는 사람이 늘어 툭하면 사고를 낸다는 것이다. 주변에서 총기 사고도 늘고 있다. 자신의 불만족스러운 감정을 불특정 대상에게 쉽게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원망은 재앙으로 가는 길이다. 사람의 모든 일이 다 그렇듯이 지족지부의 삶도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꾸준한 훈련이 필요하다.

2011-02-22

[변화] 목사와 '양치기 개'

거지 하나가 적선하는 한 신사에게 물었다. "선생님 재작년까지 늘 10달러씩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5달러로 줄었으며 올해는 1달러로 줄었습니까?" 신사가 조심스럽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전에야 내가 총각이었으니 여유가 있었지요. 하지만 작년에 결혼을 했고 이제는 애까지 있으니…" 그러자 거지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니! 그럼 내 돈으로 당신 가족을 부양했단 말입니까?" 피조물이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기 시작하면서 사탄이 되었듯 인간 역시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기 시작하면서 많은 문제와 직면한다. 80년대 개그계를 주름잡던 '밥풀떼기 김정식 목사'의 인터뷰 내용이 새삼 떠오른다. "목사는 섬기는 사람이다. 섬긴다는 건 배려다. 목자는 예수님이고 목사는 양치기 개다. 같은 동물인데 개와 양이 큰 차이가 있는 건 아니지 않나. 양의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는 개가 되고 싶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목사는 원래 목자가 아니라 '양치기 개'가 맞다는 생각이 든다. 목자 예수님이 안 계시니 호랑이 없는 굴의 여우처럼 개가 목자 흉내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개가 목자 흉내를 내다보니 교회 안에서 사건 사고가 끊일 날이 없는 것이다. 교회의 평화는 목사가 원래 자리를 찾을 때 비로소 도래할 것이다. 고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한 지 2년이 되는 지난주 전국 곳곳에서 다양한 추모행사가 열렸다. 명동대성당에서의 추모 미사에는 정관계 인사와 일반 신자 등 1300여 명이 참석했고 매스컴은 고 김수환추기경의 추모행사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스스로를 '바보'라고 불렀던 그는 평생 소외되고 낮은 곳을 향했다. 그가 뿌린 사랑의 씨앗이 전국에 퍼져 지난해 장기기증 희망자가 18만5046명으로 전년도 7만4841명보다 2배 넘게 급증했으며 각막을 기증한 사람도 2배 이상 늘었다고 한다. 10남매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의사가 되어 집안의 희망이 되었지만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아프리카 수단의 톤즈에서 젊음을 쏟아붓고 얼마 전 선종한 이태석 신부의 삶이 여전히 울림이 되고 있다. 그런데 한국 개신교를 대표했던 고 한경직 목사 김준곤 목사 정진경 목사 옥한흠 목사 등의 추모 분위기가 이토록 허전하고 초라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2011-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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