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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 '진돗개 하나'

전쟁 소문이 돌고있다. 12월중에 북의 공격이 한번 더 있을 것이라는 추측성 보도 때문에 최근 한국을 다녀온 사람들은 긴장된 조국의 분위기를 흥분된 표정으로 쏟아놓고 있다. 전쟁 소문은 다름 아닌 일본 언론들 때문으로 알려지고 있다. 도교신문은 북한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의 말이라며 "북한 정찰총국 간부가 새해가 되기 전 경기도에 포격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곧 전쟁이 일어난다는 뜻이다. 산케이신문도 한반도 정세에 밝은 한 관계자의 말을 내세우며 얼마 전 북한이 사정거리 3000㎞에 이르는 탄도미사일 무수단을 몇 달 안에 쏠 채비를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북한 사정에 밝다는 사람들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사실을 보도해야 할 신문들이 확실한 근거도 없는 추측보도로 온 대한민국 국민을 걱정 모드로 몰아넣고 있다. 전쟁이 발발하면 가장 신속하게 움직이고 명령을 내려야할 리더들이 우왕좌왕하면서 시간을 보내 군수뇌부마저 불안을 가중하고 있다. 이번 연평도 사태 이후 가장 많이 등장하는 금언은 '천일양병 일일용병'라는 말이다. 하루를 써먹기 위해 천 날 동안 준비한다는 뜻이다. 전쟁준비는 특별한 날을 잡아서 하는 집중훈련이 아니라 매일이 전쟁 준비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늘 긴장하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어떻게 준비를 해야하는가. 우리의 적은 휴전선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것이 힌트이다. 영적 전쟁도 마찬가지이다. 우는 사자처럼 달려들 태세를 취하고 있는 마귀가 대상이 아니라 나 자신과 전쟁을 하는 것이다. 매일 하는 새벽기도와 QT가 우리에게 형통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매일 먹는 평범한 밥과 초라한 반찬이 나의 건강을 보장하듯 천일양병의 정신으로 매일 나와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한다. 사건이 터져야 비로소 금식하고 철야하고 난리를 피우는 나쁜 습관을 버리고 평안할 때 오히려 국지도발 최고 경계태세인 '진돗개 하나'를 스스로 발령하고 깨어있어야 한다.

2010-12-07

[생활속에서] 외모 중심의 사회의 이면

젊은이 사역을 하다 보면 방학 때 2개월간 실종되었다가 신학기에 갑자기 나타나는 젊은이들을 만날 때가 있다. 처음에는 무척 놀랐는데 몇 번의 경험 끝에 그 후로는 놀라지 않았다. 듣지 않아도 이유를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만날 때 곤란한 것은 성형을 하신 분들의 특징이 아는 척하면 싫어하고 몰라주면 섭섭해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가장 좋은 말을 찾았는데 그것은 "몰라보게 아름다워졌군요"였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너무나 좋은 일이고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풍요와 과다'의 관계처럼 우리의 아름다움이 지나치면 그것은 결코 아름답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먼저 전제할 것은 사람에게 치유 성형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단순하게 사람들에게 결코 말할 수 없는 깊은 고통이 분명코 존재하기에 성형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빵은 영적인 문제가 될 수 있듯이 우리는 성형의 필요성을 절대 공감해야 한다. 그러면 미용성형은 절대 안 되는가? 그럴 수 없다. 분명코 미용성형에도 치유적 측면을 우리는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이것을 단순하게 도식화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서 성형하고 싶다며 신앙적인 질문을 던지는 젊은이들에게 목회자로서 두 가지 태도를 갖는다. "꼭 성형외과를 가 보라"고 하는 사람이 있고 반면에 "가급적 가지 말라"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오히려 외모를 보고 내린 판단이 아니라 내면을 보고 내리는 판단이다. 그러므로 성형의 문제는 절대적 기준을 가진 문제가 아니라 매우 개인적인 문제이기에 단순하게 논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 오히려 말하고 싶은 것은 성형이 문제가 아니라 '성형을 부추기는 사회'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는 말을 넘어 다홍치마면 모든 것이 된다는 식의 사회 분위기이다. 사람을 면접하고 뽑을 때에도 철저하게 사람의 가치를 외모에 기준하는 공감대가 더 위험스럽다. 소위 말하는 할리우드식의 코드가 모든 것의 가치를 결정하는 분위기는 매우 심각하다. 잘 생긴 남자와 아름다운 미인은 항상 똑똑하고 용감하고 다재다능하며 용감하며 로맨틱하기까지 한 것으로 만들어진 이미지가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분위기다. 어쩌면 한국 사회에서 인종차별 보다 성차별 보다 더 강한 것이 있다면 외모 차별이다. 외모의 치유를 받고 싶은 열망이 크면 클수록 내면의 상처를 함께 치유해야 한다. 그래서 외모를 중시하는 한국사회를 보면서 얼마나 깊은 내면의 치유가 필요한 사회인지를 다시금 발견한다.

2010-12-07

[사목의향기] 아름다운 효행으로 부모님 공경

아름다운 효행으로 부모님 공경 전달수 안토니오 성 마리아성당 주임신부 얼마 전 뉴스에 아들이 아버지를 제대로 대하지 않는다고 거액 7억원을 배상하라는 청구소송을 낸 사건이 있었다. 그 동안 공부시킨 돈을 모두 갚고 죽은 다음에 제사를 지낼 필요도 없고 부자지간의 인연을 끊자고 했다니 이 소식은 노인들에게나 젊은이들에게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동방예의지국으로 일컬어지던 우리나라의 현실을 걱정하는 글들이 보도매체를 통해 가끔 소개되는데 그 중의 하나는 효도다. 이는 분명 큰 덕목인데도 어찌된 셈인지 요즈음은 부모 공경 경시 풍조가 만연하여 효도란 말을 하면 코웃음을 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가 하면 3년 전 어느 신문의 기사에 아름다운 효행이 소개되어 각계 각층에서 칭찬이 자자하여 국보금 효성이라고들 했다. 충청도 양반답게 홀로 된 아버지에게 지극 정성으로 효행을 실천한 40대 아들의 행적은 부모를 공경하는 미덕을 보여주어 우리 모두를 흐뭇하게 한 좋은 뉴스였다. 아흔이 넘은 아버지가 금강산 구경을 하고 싶다고 하셨다. 7남매의 막내까지 모두 대학을 보내신 아버지의 고생이 얼마나 컸을까? 평소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막내아들은 자신의 현실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연세 지극한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릴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금강산 관광은 많이 걸어야 할 텐데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를 걷게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휠체어로는 산을 오를 수 없으니 궁리 끝에 생각해 낸 것이 어릴 때 집에서 사용하던 지게였다. 지게 자체도 무게가 있으니 가벼운 플라스틱 제품을 이용하여 특수 지게를 만들었다. 자신이 직접 고안한 후 용접공에 부탁하여 겨우 하나를 튼튼하게 만들었다. 북측 안내원이 갑자기 등장한 지게를 보고 무엇이냐고 물었다. 아버님 모실 지게라고 하니 그들도 감동하여 순순히 허락하여 여행 내내 아버지를 지게에 모시고 관광을 즐겼다. 어깨는 피 멍이 들었다. 지게 무게가 적어도 15킬로 이상이었고 아버지 몸무게를 합치면 70킬로 이상이나 되니 그랬을 것이다. "산행이 이어지면서 무게를 이기지 못한 어깨와 팔이 뻣뻣하게 굳고 허리가 아파와도 어린애 마냥 좋아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 피로가 가시고 힘이 나더라"고 한 효성 지극한 아들의 회고담은 듣는 이들을 모두 감동시켰다. 하지만 지게에 관한 다른 이야기도 있다. 아버지를 지게에 지고 산으로 가고 있을 때 따라가던 꼬마 아이들이 물었다. "아버지 지금 할아버지를 지고 어디 가세요?" "할아버지를 산에 버리러 간다." "그러면 나도 커서 아버지를 지고 산에 가서 버려야하니 지게를 버리지 않고 잘 보관할게요." 깜짝 놀란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다시 집으로 모시고 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대대로 전해져오던 고려장이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여기서 유래한다고 한다. 지게에 아버지를 지고 버리러 가던 그 지게가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는 금강산 관광 도구가 되었으니 같은 지게라도 용도에 따라 천양지차가 난다. 성경은 "얘야 네 아버지가 나이 들었을 때 잘 보살피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슬프게 하지 마라. 아버지에 대한 효행은 네 죄를 상쇄할 여지를 마련해 주리라. 네가 재난을 당할 때 네가 기억되리니 네 죄가 따뜻한 날 서리처럼 녹아버리리라. 아버지를 버리는 자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자와 같고 자기 어머니를 화나게 하는 자는 주님께 저주를 받는다"(집회서 312-16)라고 가르친다.

2010-12-07

[법률스님의 즉문즉설] 복을 받으려면 복을 지어야

Q. 절에 다니기 전에는 항상 복이 와주기를 바랐고 지을 생각은 전혀 못 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 귀의하고부터는 복을 지어서 받을 수만 있다면 복을 지어서 받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복을 받아서 정말 잘살고 싶은 게 저의 간절한 소망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하고 그로 인해서 자식이나 남편에게 좋은 일이 생기는 그런 일을 하고 싶습니다. A. 복을 받고 싶다 이것은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복은 받고 싶다고 해서 받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 않고 거두려고만 한다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심지는 않고 거두려 할 때 거둘 게 없으니까 괴로운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복을 받으려거든 복을 짓고 복을 짓지 않았으면 복 받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복을 짓지도 않고 복을 받으려고 하거나 또는 복을 짓더라도 조금 지어놓고 받는 것은 많이 받으려고 합니다. 그런 마음이니 늘 내가 제대로 복을 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복을 짓고 복을 받기를 바라는 것은 복을 안 짓고 복 받기를 바라는 것보다는 낫지만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왜 괴로움에서 벗어나질 못할까요? 복을 짓고 복을 받는데 따르는 기준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또 지어놓은 복을 받는데 시차가 있기 때문에 언제까지를 계산해야 되는지에 따라서 투자만 하고 소득이 없다는 결론이 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손해인 것 같은 생각 이익을 보려고 복을 지었는데 오히려 손실이 난 느낌 때문에 괴로움에서 못 벗어납니다. 그렇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받을 생각 없이 복을 지을 뿐이라야 합니다. 그러면 복을 안 받겠다고 하면 복이 오지 않느냐? 그래도 옵니다. 복을 짓지 않고 복을 받고자 해도 복은 오지 않듯이 복을 지어놓고 안 받겠다고 해도 복은 옵니다. 지어놓은 복은 인연과보로 당연히 돌아옴으로 받을 생각을 안 해도 돌아오고 받겠다고 해도 돌아오는데 받으려는 생각을 하면 손해난 것 같은 생각 때문에 오히려 괴로움이 생기고 받을 생각이 없으면 항상 좋은 일만 생기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인연과 복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지어놓은 복은 받기 싫어도 돌아오고 지어놓은 악업도 받기 싫어도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만 복은 지을 뿐이고 악은 멀리할 뿐입니다. 즉 선한 행위는 할 뿐이고 나쁜 행위는 안 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내가 복을 짓되 복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에게 돌아온 복을 내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그 복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을 회향이라고 합니다. 그 수확을 나누어주어 중생을 이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중생을 이롭게 하면 더 큰 결과가 또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고 그럼 그것 또한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또 나누어주니 더 큰 투자가 되겠지요. 이렇게 계속 확대 재생산 선순환이 되어 관세음보살님처럼 자꾸 그 능력이 커지게 됩니다. 그리고 아들과 남편에게 어떻게 하면 도움이 되겠느냐? 남편이 어떤 행동을 하든 '그래서 그랬구나. 당신이 그래서 이렇게 했구나.' 이렇게 남편의 마음을 이해해 주는 마음을 내면 그것이 가장 남편을 돕는 길이고 나의 기도입니다. 남편 기도 따로 있고 자식 기도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내가 남편에게 내 억센 마음을 조금 부드럽게 숙여주면 집안이 편안해지고 내가 생각하지 않았던 큰 복 부처님의 가피가 집안에 내리게 됩니다.

2010-12-07

[변화] '소명'의 우격다짐

세상의 문제가 소금이 되지 못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문제이듯 교회의 문제는 결국 리더의 문제이다. 요즘 밖에서 목회자들을 만나면 '같은 목회자로서 부끄럽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목회자들이 여자문제 술 문제 그리고 돈 문제로 어물전 망신시키는 꼴뚜기로 전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목사가 탄생하는 과정을 보면 '은혜'라고는 표현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몇 년의 간단한 신학 교육을 통해 수천 명의 영적인 삶을 책임지는 목회자 한 명이 태어나는 것이 현실이다. 목회자를 세우는 데 있어 '소명'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지 '소명'을 수행하기 위해서 준비하고 거쳐야할 과정은 그다지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야말로 '소명의 우격다짐'이다. 목회자들과 교제를 하다 보면 존경스러운 목회자들을 많이 만나지만 한편으로는 한눈에 보아도 교인들은 물론이요 하나님도 엄청나게 곤란하시겠다 싶은 목회자들도 부지기수다. 카톨릭은 한 사람의 신부를 탄생시키기 위해 최소 10년이라는 세월을 투자한다. 그중에 상당수가 '소명'에 대한 여과를 스스로 하게 되면서 중도하차한다. 그들은 단체 생활을 하면서 목회에 가장 중요한 공동체와 사람을 배운다. 지덕체 그리고 영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전문 교육 또한 철저히 받게 된다. 그러고도 사역에 뛰어들면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데 개신교의 목사 양성과정은 그야말로 너무 열악하다 아니할 수 없다. 오늘날의 목회자는 잠시 메시지를 외치다 일상으로 복귀하는 선지자가 아니다. 일상을 교인들과 함께하면서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목자의 역할을 함께 감당하는 신분이다. 그러기에 목회자가 되기 전에 '소명'만큼 중요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 교회 생활이 힘들어질 때 그리스도인의 삶은 만신창이가 된다. 그러면서도 교인들은 자신들의 목회자에 대한 투자를 꺼린다. 그저 잘 준비된 목사를 만나기만 원한다. 목사를 위해 늘 기도해야 한다. 좋은 것을 만나거든 목회자에게 권해보라. 좋은 책을 만나거든 목회자에게 선물하라. 좋은 것만 있으면 첫 번째로 목사님에게 드리며 평생 행복한 교회 생활을 하셨던 우리 어머니에게 보고 배운 삶의 지혜이다.

2010-11-23

[생활 속에서] '빼딱한 것'과 '비판적 의식'의 차이

스머프 만화에 등장하는 캐릭터 중에 '투덜이'가 있다. 그리고 백설공주의 일곱난장이 중에도 항상 투덜거리는 캐릭터가 존재한다. 투덜이와 비평가는 분명히 다르다. 건강한 자아상을 갖고 있다고 해서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탄 듯 하는 것이 긍정적인 삶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만사 불평투성이의 인생을 산다고 해서 비판적 인식이 높다고 평하지 않을 것이다. 교회나 이민사회 안에서 극복해야 할 과제가 있다면 '만사 빼딱하게 보면서도 비판적 인식이 결여된 것'이라 여겨본다. 빼딱하다는 것은 사실관계를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기호와 감정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것이며 특히 타자와의 '비교의식'이 전제된 경우가 많다. 논리와 사실은 중요하지 않고 불편한 감정에서 초래되는 '의도적 왜곡'이 가득하다. 그러므로 빼닥한 것에는 논리적 일관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경우 내면의 깊은 상처가 동반된 경우가 많다. 무너진 자존감이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빼닥함은 가장 지적인 작업처럼 보이지만 가장 감정적인 반응에 기초한다. 가장 어른스러워 보이지만 상처받은 어린 자아가 울고 있는 경우가 많다. 사실과 원칙보다 이런 상처에 기초한 빼딱함이 공동체를 주장할 때 될 일도 안되고 안될 일도 되는 어처구니 없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결국 빼딱한 것에는 대안이 없으며 지나치게 좋은 관계와 지나치게 상한 관계만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비판적인 인식은 개인적인 관계와 감정을 떠나서 사실 관계에 기초한 문제점을 분석하고 미래 대안을 찾는데 집중한다. 역사적 문화적 시대인식을 통해 현재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발전적 제안을 지향하게 된다. 쉽게 이것을 긍정적이며 밝게 사는 인생관과 대립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해서 무비판적 예스맨(Yes Man)은 아닐 것이다. 밝고 긍정적인 삶의 자세를 갖는 사람이 누구보다 비판적인 인식을 할 수 있다. 아니 비판적인 인식을 하는 사람이 밝고 긍정적인 삶의 자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양자는 결코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다. "난 맛있는 게 싫어"하는 투덜이의 불평 앞에 그렇다고 '맛없는 것'을 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빼딱함이 가득한 공동체는 진보가 불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내면의 상처와 어린 자아의 무분별한 표출은 자제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비판적 인식이 항상 발목 잡는 걸림돌로 여기는 부정적 태도도 극복되어야 한다. 비판적 인식은 오늘 우리 안에 쏠린 태도를 바로 보게 하고 사고의 전환을 요청하며 삶의 영역을 풍성하게 하는 통로다. 자신의 빼딱함을 비판적인 것으로 스스로 속이지 말고 타인의 비판적 인식을 빼딱하게 받아들이지도 않는 그래서 내면의 성숙이 지적 성숙으로 이어지는 열린 소통을 기대해본다.

2010-11-23

[사목의 향기] 하느님 나라가 건설되는 신비

사람들이 곧잘 묻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이것이 하느님을 그리워한다는 뜻 같아서 반가운 질문이기도 하지만 찾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지 싶어서 미련하다는 생각이 또한 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라는 뜻이니 '어디에'라고 장소를 묻기보다 '어떤 것'인지 그 존재양식을 따라 찾아야 하지 싶어 하는 말입니다. 그 신비를 이해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셨던 예수님께서는 그 비밀을 알고 계셨으니 예수님께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하셨습니다. 그분의 출생에서부터 나자렛 생활과 공생활을 거쳐 십자가의 죽음의 시간까지 그리고 무덤에 묻히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시고 다시 오시기를 약속하신 지금까지 그 중에 아버지 하느님의 뜻밖에서 행하신 것이 아무 것도 없으십니다. 요르단 강에서 물로 세례를 받으시고 일어서실 때 성령께서 내려오시고 예수님께 머무셨습니다. 성경은 이 그림으로 하느님 뜻 받들기의 삶이란 어떤 것인지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곧이어 이 세례의 의미를 광야에 나아가 유혹을 받으신 예수님의 이야기로 풀이한 것입니다. 세가지 유혹을 받으셨는데 첫째는 빵의 유혹이고 둘째는 부귀와 권력의 유혹이고 셋째는 자만의 유혹이었습니다만 유혹자 사탄에게 예수님께서는 한결같이 그리고 단호하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하시며 서로 하나로 묶여 있는 이 유혹들을 한번에 물리치셨습니다. 여기 하느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예수님 삶의 행동 양식이 보여주듯이 하느님의 말씀대로 다스려지는 삶 자체가 곧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런 뜻에서 '부자 권력가'(루카 18 18-27)가 하느님 나라에 들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가 구원에 이르는 길을 예수님께 여쭈었을 때 십계명을 지키라 하시니 그가 다 지켜왔노라 했고 다시 주님께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 하시니 "…그는 이 말씀을 듣고 매우 슬퍼하였다. 그가 큰 부자였기 때문이다"라고 했고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 하셨던 것인데 그가 하느님의 말씀에 승복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가 부자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반면 자캐오라는 세관장이던 부자는 성경이 부자라고 했으니 얼마나 부자였겠습니까만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시고 나서 너무나 기쁜 나머지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했습니다. 이 사람을 예수님 때문에 재산을 던져 버릴 수 있었습니다. 이 두 인물의 대조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가 건설되는 신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돈의 힘에 의존하여 키 작음 같은 허약함을 극복하려고 부정 때문에 증오의 대상이 되는 것을 감수하는 사람이 느끼는 허망함 같은 것이 여기 있습니다. 저 광야의 사탄이 유혹하면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현존의 힘으로 자캐오는 이 얽매임과 덧없음에서 해방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전파되는 순간입니다. 더 이상 돈의 힘에 의존할 이유가 없어진 것입니다. 하느님의 통치하심으로 진정한 자유와 평화와 기쁨이 넘쳐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가 건설되는 신비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저기서 찾을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니 이제 탐욕으로 하던 모든 거짓말을 그만두십시오. 예수님의 말씀을 팔아서 제 배를 채우려는 유혹을 떨쳐버리십시오. 그리고 단순하지만 단 한 마디 말씀만이라고 구체적으로 실제적으로 실천하려고 애쓰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삶이 하느님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남을 다스리려 하지 말고 여러분 자신이 먼저 하느님의 말씀으로 다스려지십시오. 그 분의 통치에 여러분이 승복하십시오.

2010-11-23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강박관념 버리고 맡은 일에 충실해야

Q: 저는 스물한 살로 제가 확실하게 뭘 좋아하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영상 편집이나 사진도 좋아하고 또 봉사하는 것도 좋아해서 선재수련도 다녀왔습니다. 여러 가지 경험을 많이 해보면서 좋아하는 걸 찾으려 했는데 뭘 하더라도 좋아합니다. 그래서 제가 무슨 일에든 잘 적응하는 건지 아니면 아직까지 못 찾아서 계속 헤매고 있는 건지 헷갈립니다. 그리고 다음 달에 입대하는데 군 제대 후 뭘 해야 될지 막막하기도 하고 하면 뭐든지 열심히 하는데 딱 무엇을 해야겠다는 게 없어서 혼란스럽습니다. A: 괜찮습니다. 왜 꼭 '나는 무엇을 해야 된다 하는 게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까? 초등학교나 중학교나 고등학교 때부터 난 뭘 하겠다 뭘 했으면 좋겠다 어떤 일을 해야겠다 이렇게 결정이 되면 결정이 되는 대로 좋은 것이고 그런 것이 없으면 없는 대로도 좋습니다. 사람은 다 다릅니다. 다 다르기 때문에 '나도 남처럼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 돼야 하는데'라고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질문자는 지금 나도 남처럼 무언가가 되어야 할 텐데 무언가를 빨리 결정해야 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아직 군대도 안 갔는데 벌써 제대한 이후의 일까지 걱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일 군에 입대한다면 오늘 저녁까지 내 할 일 하다가 가면 됩니다. 내일 아침에 학교 가듯이 그냥 가면 되는 거예요. 그리고 군대에 들어가서는 군대에서 해야 하는 일 놔두고 자꾸 딴 일을 하려고 하지 마세요. 해야 할 일을 놔두고 딴 일을 찾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학교 다닐 때 수학이 재미없다고 수학 시간에 영어 공부나 국어 공부를 한다면 선생님 눈치를 봐가면서 몰래 공부해야 하기 때문에 집중이 안 됩니다. 그러니 선생님이 잘 가르치든 못 가르치든 내가 관심이 있든 없든 수학 시간에는 수학을 공부하는 게 가장 효율적입니다. 군대 갔을 때는 군대 생활에 충실한 게 제일 좋습니다. 그 안에 있으면서 딴 궁리할 필요가 없어요. 훈련을 괴로워하면서 할 필요 없습니다. 달리 생각하면 체력 단련이라고 할 수 있고 추운 데 가서 하루 견뎌보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다 생각할 수 있고 행군하는 것도 재미있고 이렇게 그 안에서 재미를 붙여서 적극적으로 사는 게 제일 잘사는 겁니다. 제대할 때까지 평생 군인인 것처럼 살다가 내일 아침 제대할 때가 되면 보따리 싸가지고 나가라 그러면 그냥 나오면 됩니다. 군대 안에 있으면서 나가면 뭐 할까 계획 세우고 미리 뭐 좀 배워둘 게 없나 살피면서 살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군대 제대해서 나온 뒤에 생각하면 되지 그런 것까지 미리 생각할 것 없습니다. 항상 현재 하고 있는 일에 충실한 것이 가장 좋습니다. 이게 현재에 깨어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 내가 뭘 꼭 좋아해야 된다 나는 좋아하는 게 뚜렷해야 된다 이런 강박관념을 갖지 마세요. 영상 편집을 하게 되면 영상 편집을 하고 누가 봉사 좀 하라고 하면 봉사도 하고 다 해보세요. 그러나 내가 특별히 어떤 것을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않으면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그 처한 상황 속에서 흥미를 붙이면 됩니다. 그러니 그러한 본인의 성향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뚜렷이 있어서 역경을 이겨나가며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해나가도 괜찮고 특별히 좋아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인연 따라서 그저 주어진 대로 살아가도 괜찮습니다. 삶은 이래도 괜찮고 저래도 괜찮아야 합니다.

2010-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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