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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에서] "작은 교회여 일어나라!"

개척 교회를 섬기는 친구 목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는 깊은 대화가 가능한 친구이기에 그의 전화는 늘 반갑다. 그러나 그가 전하는 최근의 소식은 내 마음에 진한 아픔을 주었다. 그는 출판사를 경영하다 뒤늦게 목사 안수를 받고 작은 교회에 부임하였다. 열정도 있고 영성도 갖춘 목회자였기에 그를 향한 주변의 기대감은 매우 컸다. 그러나 일 년도 못되어 교회는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주변의 큰 교회가 서면서 특별한 이유 없이 교인들이 하나 둘 떠나 버린 것이다. 40여명 모이던 교회가 이제는 5명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목회자가 윤리적으로 문제가 될 때 혹은 목회자가 영적으로 잘 준비되어 있지 않은 경우 자신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 떠날 수 있다. 또한 교회의 비전이 분명치 않을 경우에도 교회를 옮길 수 있다. 그러나 최근 이민 교회 안에는 비생산적인 이유로 교회를 떠나는 사람이 늘고 있다. 담임 목사의 설교가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거나 혹은 방송 매체를 통해 듣는 어느 유명한 목사의 설교에 비해 은혜가 없다고 떠나는 사람도 있다. 또한 교회가 너무 작아 부담이 된다고 교회를 옮기는 실속파 교인들이 있다. 최근에는 교회 시설이나 건물이 시원치 않다고 떠나는 사람도 있다. 이 시대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점은 빈익빈 부익부의 양육강식의 현상이 교회 안에도 밀려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보며 작은 교회의 목회자들은 깊은 절망을 느낀다. 대부분의 작은 교회 목회자들은 사례비를 많이 받지 못해도 개의치 않는다. 교회 시설이 부족해도 낙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작은 교회 목회자들의 절망은 어렵게 전도하여 공들여 키웠던 교인이 어느 날 뚜렷한 이유없이 큰 교회로 옮기는 것이다. 또한 작은 교회에서 목회자의 도움을 가장 많이 받았던 교인들이 어느 날 갑자기 큰 교회로 옮기는 것이다. 더 이상 기대할 도움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대형 교회도 긍정적인 면이 있다. 그러나 문제가 더 많다. 가장 큰 문제점은 주변의 작은 교회를 희생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작은 것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어서 그런지 큰 것을 좋아한다. 사람도 커야 하고 자동차도 커야 하고 백화점이나 식당도 커야 잘 된다. 집도 커야 하고 교회도 대형교회를 좋아한다. 그러나 대기업 몇 개가 있다고 국가 경제가 사는 것이 아닌 것처럼 대형 교회 몇 개가 있다고 교회 전체가 사는 것은 아니다. 이 시대의 대형 교회들은 과감하게 '다운 사이징'을 해야 한다. 건물도 줄이고 교인도 줄이고 예산도 줄여 작은 교회와 과감하게 나누어야 한다. 작은 교회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더 이상 절망하지 않도록 속히 결단을 내려야 한다. 이런 상태로 계속 나가면 대형교회는 비대해져도 작은 교회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지구 상에 작은 교회가 사라지면 교회의 미래는 없을 것이다.(mission300@yahoo.co.kr).

2010-09-07

[변화] 인가의 로망 vs 하나님의 꿈

40대 총리가 태어나는가 했더니 양파껍질처럼 까면 깔수록 드러나는 얼룩진 비리가 결국 그의 발목을 잡았다. 장차 대권까지 넘볼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너무나 안타까운 멈춤이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30-40대 엘리트들의 삶이 어떤지가 여실히 드러난 것 같아 부끄럽기 그지없다. 가난했던 우리 민족은 성숙보다는 성장에 너무 목을 매고 살아왔다. 경제도 사회도 성과주의에 바쳐 온 세월 때문에 결과만 좋으면 동기와 과정의 오류도 얼마든지 용서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청와대는 물론 교회 내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게되었다. 엊그제 한국교회의 기둥 한분이 하나님 곁으로 가셨다. 제자훈련으로 한국 교회의 체질을 바꾸는데 큰 역할을 하신 분이다. 9명으로 개척된 교회는 수만명으로 성장했고 '제자훈련'이라는 단어는 교회 내에서 가장 흔히 쓰이는 용어가 되었다. 제자훈련의 본질은 '성숙한 제자'를 만드는데 있다. '제자훈련으로 교회성장을 추구한 것이 아닌데 성장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성장 때문에 진정한 제자 훈련에는 많은 지장이 생겨났다'는 옥한흠 목사님이 남기신 아쉬움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볼 때다. 성장은 결론이 아니라 과정이다. 어느정도 성장이 이루어진 후에 성숙의 때를 놓치게되면 두뇌는 주먹만한데 덩치만 비대해진 미련한 공룡이 된다. 성숙과 성장은 비슷한 것 같지만 너무나 다른 것이다. 성장은 많은 열매를 맺지만 성숙은 오히려 열매를 잃는 것이다. 내 성장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손해를 보지만 성숙을 통해서는 내가 손해보고 오히려 주위사람들이 득을 보게된다. 성장은 인간의 로망이지만 성숙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로망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장을 위해 몸부림 친다. 성장의 단계가 머리로 배우고 습득하는 단계라면 성숙의 단계는 가슴과 삶으로 실험하고 습득하는 단계이다. 많은 교회가 성장을 위해 몸부림친다. 각종 프로그램으로 거대한 몸집을 갖는 꿈을 꾼다. 그러나 이것이 목회자의 로망인지 하나님의 꿈인지 잘 구별하지 못하면 교회도 수천년전 멸종된 공룡처럼 계속되는 분열과 갈등으로 무너져 내릴 것이다.

2010-09-07

[사목의 향기] 겉 치장보단 '인생의 본질' 들여다 볼때

"인생 뭐 있나요!" 얼마 전 신부들 모임에서 이런 저런 의견이 엇갈릴 때 결국 뜻을 모으고는 웃으면서 한 말입니다. 인생에 대한 지독한 무관심이 묻어나는 푸념 같은 이 표현은 동시에 굴곡진 인생의 심오한 깊이를 깨달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인생의 본질을 관통하고 있는 지혜가 담긴 표현으로도 느껴졌습니다. 인생의 푸념과 본질을 동시에 드러낼 수 있는 이 표현의 매력에 빠져 입버릇처럼 사용했던 기억이 납니다. '푸념'이 패배자의 것이라면 '인생 뭐 별거 없다지만 그래도 참 좋은 것이다'라며 살아가는 이들은 삶의 주인공들입니다. 각자 인생에 있어서 자신이 주인공이 아닌 경우가 어디 있냐고 생각하며 살아가지만 사실은 조연 혹은 엑스트라로 살아가면서 주연으로 착각하고 살아가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주연임에도 불구하고 엑스트라라고 비관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내 인생의 주연이 되느냐 엑스트라가 되느냐는 내가 가진 훌륭한 출신성분이나 학력이나 재력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내가 이 사회에 얼마나 굉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얼마나 높은 인지도를 지니고 있다거나 사회에 대한 기여도나 공헌도가 높다는 것에 달려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사회의 지도층은 주연이고 일반 서민들이나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엑스트라들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럼 각자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살아가면서 어떤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를 가정해 봅시다. 그 문제를 잘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의 핵심을 파악해야 합니다. 그 문제가 정말 무엇이 문제인가를 알아야지 부수적인 것에 매달려 해결하려고 한다면 결코 올바른 해결책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부수적인 것은 해결되었다 해도 여전히 그 문제는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의미 있는 인생을 살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무엇이 인생일까?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후회 없는 인생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고민을 하게 됩니다. 결국 인생을 인생답게 하는 가장 중요한 것 이것을 인생의 본질이라고 한다면 그 본질을 깨닫고 그것을 나의 것으로 만들 때 각자는 각자 인생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이고 인생의 비본질적인 부분 즉 부수적인 것들에 집착해서 살아간다면 자기 인생의 엑스트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인생을 중요한 것들로만 채울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인생은 본질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중요하지 않은 것들 부수적인 것들과 함께 이루어져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흔히 '인생을 헛되이 살았다'라는 표현을 듣게 됩니다. 인생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비본질적인 면을 붙잡고 시간을 허비했다는 뜻일 겁니다. 허무한 생각이 드는 가장 중요한 이유를 생각해 봅니다. 옷을 잘 차려입고 거울 앞에 서면 멋져 보입니다. 멋진 장신구를 달면 더 멋져 보입니다. 이렇게 치렁치렁 장신구들로 자신을 꾸며도 그 순간은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 장신구들처럼 아름답지 못한 나의 인생은 숨길 수가 없습니다. 화려한 배역을 맡았던 연극배우가 화려한 의상을 벗고 화장을 지우고 거울 앞에 앉아서 현실을 보는 느낌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인생에 대한 허무함은 이런 느낌일 것입니다. 화려한 명품들로 자신을 꾸밀 수는 있지만 나의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나'는 본질이고 나를 치장하는 갖은 명품들은 나의 액세서리에 불과합니다. 인생의 허무함은 본질이 아닌 액세서리에 치중함에 있습니다. 온갖 명품으로 치장한다 해도 명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 후회하지 않는 삶을 위해서 인생의 진정한 명인을 꿈꾸며 '인생의 본질' 문제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부터 그 본질의 문제를 들여다 봅시다.

2010-09-07

[지혜의 향기] 경전 읽으며 헝클어진 마음 가다듬어야

내가 어렸을 때 우리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가마니를 많이 짰다. 주로 늦가을부터 이른 봄까지 애고 어른이고 다들 이 일에 매달려 온 동네가 쿵덕쿵덕 바디질 소리였다. 가마니는 집에서 쓰기도 하지만 농협에 납품하여 얼마간의 귀한 목돈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그러자면 제대로 짜서 가마니 한 귀퉁이에 종지만한 푸른 도장을 받아야 했다. 웬만한 꼬맹이들도 날새끼를 꼬거나 짚단을 축이고 나르는 등 일을 거들었다. 짚가리에서 짚단을 고르는 일에서부터 정말 손이 많이 갔다. 나무로 만든 가마니틀을 비롯하여 이젠 이름도 가물가물한 몇 가지의 연장이 쓰였지만 전기든 뭐든 쓰지 않고 순전히 사람 힘만 가지고 했다. 그 때만 해도 벌써 전통적인 베짜기는 한물이 가서 삼베든 무명이든 집에서 짜는 일은 드물었다. 반질반질 손길이 났던 나무 베틀의 부품들은 차마 버리지도 못하고 헛간에 처박혀 먼지를 쓰고 있었다. 미국 농가에 버려져 삭아 가고 있는 옛날 마차나 나무바퀴들처럼. 그런데 이런 물건들이 천대를 받아 시나브로 다 흩어져 없어지고 몇 해가 지나자 이번엔 장사꾼들이 몰려와 돈 주고 사겠다고 야단이었다. 아마 이젠 가마니틀도 없어진 지 오래일 것이다. 가마니나 삼베 바구니나 멍석도 마찬가지지만 무릇 천을 짜는 기본은 세로로 드리운 날줄들 사이를 엇갈라 가로줄인 씨줄을 엮어 치는 것이다. 현대화 된 공장에서도 베 짜는 원리는 꼭 같다. 날줄이 한 가닥이라도 끊어지거나 꼬이면 기계를 멈추고 다시 잇거나 바로잡아야 한다. 이 날줄이 한문으로는 경선이고 씨줄이 위선이다. 그리고 이 경선과 위선이 헝클어지듯 무슨 일이 꼬이면 경위를 잘 살펴서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다. 지도상에도 경도와 위도가 있어야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다. 옛날 지도처럼 땅모양만 대충 비슷하게 그린 것도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이런 엉터리에 기대어 가령 점보제트기를 몰거나 현대전을 치를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데에도 날줄과 씨줄이 있다. 내 마음속 날줄이 헝클어지면 안 된다. 제대로 고루 내리뻗은 가지런한 정신의 날줄들 사이로 여러 가지 건강한 생활의 재료가 씨줄처럼 가로 먹혀져야 날마다 튼튼하고 아름다운 삶의 피륙이 짜인다. 무엇이 이러한 내 마음의 날줄 즉 경선이 될 것인가? 바로 수트라요 경이요 경전들이다. 부처님의 진리를 받아 적은 불경인 것이다. 불경에는 크게 세 무더기가 있다. 부처님의 진리를 구슬처럼 내리 꿴 경장 교단의 규칙을 다룬 율장 그리고 경과 율을 논한 논장이다. 이 셋이 삼장이며 삼장을 다 모아 놓은 것이 대장경이다. 하지만 일반인이 평생을 바치더라도 대장경을 몽땅 읽어 내기는 어려울 것이고 그럴 필요도 없다. 우리 한인 불자들에게 친숙한 경전으로는 천수경 반야심경 금강경이 있다. 그 밖에 법화경과 화엄경이 대표적인 대승 경전이지만 다 읽기는 또한 벅찰 것이다. 그것뿐인가? 근본 불교 쪽으로는 아함경도 있고 법구경도 있다. 물론 다들 경장에 속한다. 불경은 과연 숲과 같이 많다. 이 숲의 모든 나무를 다 오를 수는 없다. 인연이 있어 와 닿는 쉬운 경전 마음에 드는 구절만 골라 읽어도 우선은 별 상관이 없다. 단 한 줄의 말씀 단 한 마디의 구절일지라라도 헝클어진 내 마음의 날줄들을 찬찬히 빗어 내리는 얼레빗이 되면 족하기 때문이다.

2010-09-07

[변화] 교회는 방학 없어요?

이번 8월11일부터 9월 9일까지 한달간이 이슬람의 라마단 기간이다. 라마단은 금욕과 명상으로 알라를 경배하고 자신을 수양하는 그들만의 경건한 종교의식이다. 한 달 동안은 해가 떠서 질 때까지 물도 음식도 아무것도 먹지 않으며 하루에 5번씩 기도를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세계에서 크리스마스 다음으로 물건이 잘 팔리는 때가 바로 라마단이다. 전 세계 15억 이슬람 인구가 해가 진 다음 집에서 먹는 '이프타르' 음식 판매에 식당과 패스트푸드점들이 대목을 맞는다. 중동의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와 인도네시아 TV의 시청률도 피크를 맞이해 광고 수입이 25~30% 증가한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신과 인간이 'Give & Take'의 관계를 맺고있다. 인간은 열심히 정성을 드리고 신은 정성의 크기만큼 복을 주는 식이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드는 질문이있다. 도대체 왜 교회는 방학이 없을까? 좀 쉬고 싶은데 잠시 멈추면 안될까? 그 이유는 하나님과 우리의 특별한 관계 때문이다. 인간의 관계는 3가지의 단계가 있다고 한다. 쌍방이 정보를 교환하는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 그리고 좀더 깊어지면서 서로를 이해하는 관계 그리고 가장 깊은 커뮤니언(Communion.연합)의 단계가 있다. 성찬식을 하면서 주님이 나를 위해 피흘리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기념하는 것을 커뮤니온 이라 부른다. 가장 깊은 단계 즉 주님과의 연합이라 부른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피흘리시면서 조물주와 인간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의 혈연관계로 변한 것이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사건을 시작으로 인간과 깊은 사귐(Fellowship)을 만들어가기 원하신다. 사귐에는 종점이 없다. 사귐에 쉼이 어디에 있는가? 이웃집 아저씨와는 사귐에 종점이 있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의 사귐에 종점이 어디에 있겠는가? 교회 안에서 우리가 더욱 강조해야 할 단어는 '믿음(Believe)' 보다는 '사귐(Fellowship)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귐'안으로 부르신 것이다. '사귐'에는 상호이익관계가 없다. 부자간에 무슨 계산서가 필요한가? 교회마다 '40일 특별기도'는 무엇 때문에 하는지 궁금하다.

2010-08-31

[생활 속에서] 사오정 시리즈가 생각나는 계절

한 시대를 풍미하는 해학적인 이야기 시리즈에는 동시대의 국민들의 기대와 실망이 담겨있다. 그 실망과 기대가 해학과 풍자로 나타나 국민들을 웃게하고 여러 이야기들을 함께 만들어낸다. 이처럼 사오정 시리즈 역시 국민의 기대와 좌절이 담겨있고 그 좌절을 풍자와 희망으로 풀어내고 있다. 필자는 사오정 시리즈의 등장배경에 2007년의 한보 청문회가 있었다고 생각해본다. 한보 청문회에 깊은 실망이 넘칠때 사오정 시리즈가 그 실망을 담아내었다고 본다. 애매한 것은 답변을 회피하고 틈만 나면 문맥과 질문의 의도는 무시한 채 자기 해명과 입장만 떠벌이는 모습만 실컷 보았다. 원하는 것만 선택적으로 듣고 모든 것을 자기 관점에서 해석하고 이야기만 하는 모습을 보며 국민들은 사오정 이야기에 열광하고 웃은 것은 아니었나 싶다. 이처럼 사오정 시리즈에는 허탈하게 웃음으로 고개를 떨구던 국민들의 냉소와 실망이 담겨있었다. 최근 또다른 청문회 정국을 보며 다시금 사오정 시리즈가 시작될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해본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듣고 싶은 말이 없는 사람들 해명할 것은 많은데 귀기울일 것은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작은 소리도 크게 들어주면 좋을텐데 큰 소리도 작게 듣는 사오정들이 너무 많다. 성인군자를 뽑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잘 감당할 능력있는 사람을 뽑아야 된다고 강변하는 소리는 참으로 어지럽다. 능력이 있기에 도덕성은 더욱 중요하다. 무능한 도덕성 보다 부패한 엘리트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 문제를 일으킬 수 있기에 더욱 위험한 일이다. 최근 미국 최고의 실적을 올린 CEO들이 도덕성문제로 자리를 물러나는 일을 보면서 정말 능력이 최우선인지 우리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어쩌면 이것이 세상의 정치 이야기이기만 할까 싶다. 어쩌면 세상이 기독교를 보면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을지 모르겠다. 오직 자기들 하고 싶은 말만 하며 전혀 들으려 하지 않는 오만한 기독교에 느끼는 심정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친절한 금자씨가 "너나 잘하세요" 하는 말속에는 더이상 실망할 것도 없다는 혐오감이 담긴 듯하다. 하지만 더 가슴아픈 것은 사람들도 아니라 하나님마저 기독교를 사오정처럼 여기시는 것은 아닐지. 열심히 힘을 다해 요구하는 것은 많은데 도무지 귀기울이지 않는 모습이 영락없는 사오절같아 마음이 아프다. 하나님은 입은 없고 귀만 가진 존재로 여기는 것같다. 오늘 기독교 영성에 필요한 것은 폭발적인 입술의 영성이 아니라 잠잠히 듣는 귀의 영성이라 믿는다. 정치나 교회나 듣지 않으면 말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필요한지 모르겠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 전에 들으시는 분이셨고 들으시는 분이시게에 말씀하시는 분이셨다. 말 잘하는 목사와 교회보다 잠잠히 하나님의 뜻을 아는 기독교를 하나님은 더욱 원하신다 생각해본다. 사오정이 유난히 많이 생각나는 지금의 계절에 다시금 열린 입술보다 열린 귀를 생각해본다.

2010-08-31

[사목의 향기] 영적으로 균형잡힌 신앙인들 필요

소임지가 바뀔 때마다 다양한 신자들을 만나게 된다. 아침 미사에 나와서 하루 종일 성당에서 사는 분도 있다. 성당 행사 때마다 나와서 봉사를 하는 분도 있다. 여러 단체에서 항상 만나는 분도 있다. 흔히 말하는 성당을 이끌어 나가는 핵심신자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성당에서 형제님이 참으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단체의 장을 맡으면서 열심히 봉사하고 신앙생활을 했지만 부인은 볼 수가 없었다. 남편의 열심에 부인이 너무 질려서 나오지 않는다는 소문이 들렸다. 또 어떤 자매는 하루 종일 성당에서 사는 것 같았다. 집안일은 어떻게 하는지가 궁금했다. 너무 성당 일에 매달리면 정작 가족들은 성당을 멀리하게 된다. 무엇이 먼저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성당 일을 좀 줄이라고 말하면 눈이 동그래지면서 "신부님 신부님 맞아요?"하고 묻는다. 아마도 '어떻게 신부님이 성당에 자주 나오지 말라고 말하느냐?'는 뜻일 것이다.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성당이 또 신앙생활이 현실에서의 도피처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물론 성당에 나오고 성당 안에서 기도하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고 위안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인 어려움에서 피하려고 신앙생활에 몰두한다면 그 위안을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통해서 얻게 되는 위안과 평화는 세상의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용기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신앙생활도 균형이 잡혀야 한다. 그래서 신앙은 구름에 뜬 이야기가 아니다. 신앙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이야기이다. 아니 나의 이야기이다. 신앙이 현실과 동떨어진 먼 나라의 이야기라면 지금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지금 내가 믿고 있는 신앙이 지금 나의 삶에 힘이 되지 않는다면 여기에서 우리가 힘을 얻지 못한다면 신앙은 힘든 현실을 잊고자 하는 망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신앙과 생활의 합성어이다. 신앙이 따로 있고 생활이 따로 있어서는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 없다. 현실을 살아가는 나의 생활이 신앙화될 때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나의 삶을 신앙의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나의 행동 언행 인생관이 신앙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먼저 해야 하는 작업이 있다. 포기하는 것이다. 포기할 때 우리는 성숙할 수 있다. 먼저 과거에 대해 포기해야 한다. 지난 시절에 대한 얽매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새로움을 찾기 위해서는 내가 새롭게 되기 위해서는 과거를 버려야 한다. 지나온 시간들을 버려야 한다. 거기에 묶여서는 앞으로 갈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묻는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1916이하) 그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망보다는 가진 재산으로 편하게 살 수 있는 현실에 더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가진 것을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늘나라의 보물을 차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복음말씀은 비단 재물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나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포기의 고통이 나를 더 성숙하게 만드는 것이다. 버릴 때 새로운 것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쉽지 않은 작업이다. 그러나 많은 갈등의 고통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게 된다. 감추어지고 가려진 모습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 작업은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누구나 피해가고 싶은 작업이다. 그러나 이 고통을 통해서만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더 성숙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시대는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균형 잡힌 건강한 신앙인들이 필요하다. 열심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아는 신앙인들이 많이 있어야 이 사회를 바꾸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2010-08-31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남편 미워할때 자식에 끼칠 영향 알아야

Q: 이혼한 뒤 두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아빠의 실상을 알려주고 싶어 사실을 이야기했더니 첫째도 아빠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고 둘째는 제 성을 따르겠다고 합니다. 한편으로는 고소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식을 잘못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도 됩니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아직도 남편을 원망하는 마음이 올라오면서 아이들 걱정도 많이 됩니다. A: 남편을 미워할 때 자식에게 끼칠 영향을 정확히 아셔야 합니다. 내가 남편과 헤어지더라도 아버지에 대해 훌륭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지 않으면 아이들의 무의식에 자기 부정으로 남아 아이들이 훌륭해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식 때문에 앞으로 내가 속 썩어야 할 일은 남편 때문에 속 썩는 것에 최소 열 배는 넘는다는 각오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두 자식은 앞으로 반드시 엄마 곁을 떠납니다. 내가 남편을 떠날 때 도저히 너하곤 못 살겠다며 떠났듯이 아이들도 그렇게 떠날 겁니다. 지은 과보는 반드시 받는다는 것을 알고 살아야 합니다. 인도의 못 배운 아이들을 공부시키고 병 치료해 주고 옷 입혀줘도 나중에 은혜로 돌아오기보다는 원수로 돌아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원하는 대로 다 해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10년 20년 후에는 그들에게 은인이 되기보다는 원수가 된다는 것을 훤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합니다. 나중에 비난을 받더라도 못 배운 아이들은 일단 가르쳐야 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주면 분명 내 보따리 내놓으라고 할 것을 알아도 생명을 우선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좋은 일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과보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일을 해도 나쁜 과보가 생기니 나쁜 일을 하면 나쁜 과보가 생기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정말 그것이 좋은 일이라면 나쁜 과보가 생겨도 해야 됩니다. 좋은 일 하고도 욕먹을 것을 내다보고 하는데 나쁜 과보가 생길 일을 하면서도 욕은 안 듣겠다는 것은 무슨 심보입니까? 나쁜 일을 하고 나쁜 과보 받는 것을 당연한 줄 알면 이 세상에 아무런 두려움이 없습니다. 즉 걸림이 없어진다 이 말입니다. 이것이 불법입니다. 남편 입장에서도 할 말이 많습니다. 그러니 남편 입장으로 돌아가 생각해서 내가 하나하나 다 참회해야 합니다. 내가 잔소리한 것 반론 제기한 것 그것이 다 그 사람에게는 상처가 되었습니다. 나는 진실이라고 밝힌 것이 그 사람에게는 자신을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억울함을 밝히지 말라 억울함을 밝히면 원망하는 마음을 도운다'라는 말이 보왕삼매론에 있습니다. 어린 자식들에게 "나는 이렇게 바르게 했고 너희 아빠는 이렇게 잘못했다"라고 말할 때 결국 아버지를 나쁜 사람 만들게 되지요. 오늘 이후로는 자식들이 나한테 어떻게 하더라도 그것을 기꺼이 받겠다라는 각오를 하십시오. 그리고 과보 받을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앞으로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 진심으로 남편에게 참회를 해야 합니다. 내가 정말 잘못했다고 뼛속까지 느끼게 되면 애들이 좀 괜찮을 것이고 아무리 해도 내 마음 속에 '아니야 이건 아니야 어떻게 내가 잘못했어 그 인간이 문제지' 하면 애들이 정신적으로 건강해지기 어렵습니다. 매일 108배 절을 하세요. 108배를 해서 참회가 잘 안 되면 300배 절하고 그래도 안 되면 1000배 절하고 그래도 안 되면 3000배를 하세요. 그러면 됩니다. 그렇게 딱 하면 아직 아이들이 사춘기니까 기회가 있어요. 아이들이 20살이 넘으면 잘 안 됩니다. 그 전에 하세요.

2010-08-31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진정한 공덕 어떻게 쌓을 수 있을까요

#풍경 1:중국의 도오 선사는 오랫동안 방문을 닫은 채 참선만 했죠. 아무도 그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한 사람만 빼고 말이죠. 바로 호떡 장사였습니다. 호떡 장사는 매일 호떡 10개를 도오 선사에게 공양했습니다. 그런데 이튿날이면 도오 선사는 어김없이 호떡 하나를 되돌려 주었죠. 그러면서 "내가 그대에게 호떡 하나를 주어서 공덕을 쌓노라"라고 말하는 겁니다. 이런 일이 몇 해나 계속됐죠. 하루는 호떡 장사가 물었습니다. "아니 스님. 이 호떡은 제가 드린 겁니다. 그런데 그걸 다시 주면서 어째 제가 아닌 스님께서 공덕을 쌓는다 하십니까." 이에 도오 선사가 말했습니다. "네가 가지고 온 것을 네게 돌려주는데 무엇이 잘못됐느냐." #풍경 2:고우 스님을 아세요? 한국 불교의 대표적 선지식이죠.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도에 있는 갠지스강의 모래알이 얼마나 될까요. 갠지스강의 모래알 수만큼 또 갠지스강이 있다고 합시다. 그리고 그 강들의 모래알은 또 얼마나 될까요. 그 모래알 수만큼의 봉사를 하더라도 아무런 공덕이 없는 겁니다." 흔히들 말하죠. "공덕을 베풀어라" "공덕을 쌓아라." 그런데 고우 스님은 갠지스강의 모래알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공덕을 베풀어도 결국 '무(無)공덕'이라고 합니다. 도오 선사에게 호떡 장사가 1년간 올린 호떡 수는 얼마나 될까요. 3650개입니다. 그걸 3년간 올렸다면 무려 1만 개가 넘습니다. 그런데 도오 선사는 그 중 하나씩만 다시 내주고도 '유(有)공덕'이라고 했습니다. 유공덕과 무공덕 도대체 그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어째서 갠지스강 모래알 수만큼 많은 봉사에는 없던 공덕이 달랑 호떡 하나에는 있는 걸까요. 먼저 선(禪)의 세계를 알아야겠네요. 선의 세계에서 '인생'을 어떻게 볼까요. 그렇습니다. 일장춘몽(一場春夢)이죠. 짧디 짧은 꿈입니다. 깨고 나면 없는 존재죠. 그래서 선의 세상에서 삶은 '허(虛)'가 됩니다. 원래 없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지지고 볶는 이 삶 속에서 지지고 볶는 마음으로 주는 호떡도 '허'가 되는 거죠. 호떡이 1000개든 1만 개든 말이죠. 그런데 도오 선사의 자리는 다릅니다. 그는 허를 딛고 일어선 실(實)의 세계에 있는 거죠. 삶이 허임을 깨닫고 그 너머의 삶을 살고 있는 거죠. 꿈을 깬 '꿈 밖의 세상'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가 주는 호떡은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이죠. '허'가 아니라 '실'인 거죠. 그게 호떡에 공덕이 있는 까닭입니다. 복잡한가요? 실은 간단합니다. '호떡을 줬다'하는 뿌듯함이 내 마음에 남으면 호떡은 '허'죠. 반면 '호떡을 줬다'하는 뿌듯함조차 없으면 호떡은 '실'이 되죠. 마음이 있으면 무공덕 마음이 없으면 유공덕이겠죠.

2010-08-31

[변화] 고수

무협지의 고수들은 하늘을 붕붕 날며 세상의 자연법칙을 거스르며 산다.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중원을 등지고 초야에 묻혀 오랫동안 도를 닦고 수련을 해야 한다. 오랜 시간 수련하고 뼈를 깎는 고생 끝에 얻은 신통한 능력 때문에 고수는 만인의 부러움의 대상이된다. 교회 안에서도 영적인 고수가 되기를 사모하는 사람을 많이 본다. 하늘의 신비를 세상의 삶속에 그대로 옮겨다 놓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열심히 능력을 달라고 부르짖는 사람이 많다. 성경에도 영적 고수들의 활약상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구약의 대표적인 영적고수가 엘리야 엘리사이다. 그들이 손대는 것 마다 신비한 하늘의 능력이 나타났다. 신약에는 베드로 바울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영적 고수들(?)이 요즘 타운에 많이 등장해 천상의 소리를 전해주기도 하고 하늘의 능력으로 불치의 병을 고치기도 한다는 소문을 적잖이 듣는다. 과연 하나님 보시기에도 그들이 우리보다 한 단계 높은 영적 고수일까? 하나님이 인간의 미래를 함구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위한 배려이다. 인간이 내일을 알게된다면 틀림없이 가장 밑바닥까지 타락할 것이다. 손만 대면 병이 낫는 능력의 소유자가 있다고 해보자.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는데왜 굳이 하나님을 찾겠는가? 사람의 생각과는 달리 영적고수는 이적과 기사를 일으키는 능력에 달려있지 않다. 그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하나님보시기에 영적 고수는 하늘의 신비한 능력을 경험하지 않아도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할 수 있고 병든 몸에 치료의 광선을 비춰주지 않아도 신음 중에 주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영적 고수이다. 다이아 반지가 없이도 '이수일'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실한 '심순애'의 사랑이 아니겠는가? 이웃의 실수와 죄를 참고 용납하는 것 이웃의 잘못 때문에 생기는 고통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은 훨씬 높은 영적 고수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예수님도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지만 십자가 지는 일이 오병이어의 기적보다 훨씬 어려웠기에 '제발 이 잔을 내게서 옵기시옵소서!'라고 처절하게 기도하신 것이다.

2010-08-24

[생활 속에서] 사이버 공간에 백만 대군을!

최근 선교 학자들은 선교개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주목하고 있다. 그것은 선교지를 말할 때 지리적인 개념에서 공간적인 개념으로 그 패러다임이 전환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지금까지는 선교를 말할 때 지리적으로 먼 곳에 있다는 생각을 했다면 이제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없고 진정한 예배가 존재하지 않는 모든 공간을 선교지로 보는 것이다. 영국의 선교학자 레슬리 뉴비긴은 30년간의 인도 선교를 마치고 자신의 조국으로 돌아왔을 때 놀랍게도 영국이야말로 최대의 선교지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기독교의 나라라고 보았던 자신의 모국에 기독교는 쇠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 교회가 깊은 관심을 갖고 접근해야 하는 매우 중요한 선교 공간이 있다. 그 곳은 전 세계 40억 네티즌이 매일 같이 방문하는 사이버 공간이다. 현대인은 서서히 이 공간을 통하지 않고 일상의 생활을 영위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끼고 있다. 필자가 판단하기로는 21세기 최대의 선교지는 사이버 공간이나 모바일 공간이 될 것이며 얼마 안 있어 현대인은 대부분의 시간을 온라인에서 사람을 만나고 교제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측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특히 스마트 폰의 등장과 함께 활성화된 트위터 페이스 북을 통해 현대인들은 순간적으로 서로 네트워크 되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마치 앞에 마주 보고 있는 것처럼 교제를 나누고 있다. 그런데 현대인의 삶을 서서히 잠식해오는 이러한 소셜 네크워크 공간이 기독교 선교에 있어서 철저히 외면되고 있다. 그 이유는 교회가 선교를 이해 할 때 지나치게 지리적 신화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즉 선교는 먼 곳에 있고 그 곳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만 선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우스 클릭 한번으로 전 세계가 열리고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네트워킹 되는 이때에 우리는 먼 곳만 바라볼 수 없다. 이미 가깝게 열려있는 사이버 세계의 수많은 이방인들은 마게도냐 환상처럼 "와서 복음을 전해달라"고 숨 가쁘게 요청하고 있다. 필자는 이런 때 인터넷 강국인 한국 교회가 적어도 100만 명 이상의 인터넷 선교사를 양성하여 사이버 공간에 선교사로 파송할 것을 제안한다. 그들은 전문적인 IT 교육과 선교사 훈련을 받은 후 자신의 컴퓨터와 모바일 폰을 통해 불신자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파격적인 방식으로 디자인되어진 홈페이지를 열고 주변 사람들을 꾸준히 초청하여 온라인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을 시도하게 된다. 또한 온 라인에서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을 오프라인에서 만나 양육해야 한다. 21세기 최대의 선교 공간으로 떠오르는 사이버 공간에서 사이버 주권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영적 전투가 진행되고 있다. 이것은 시간을 다투는 매우 급한 일이다. 사이버 공간이 사탄의 무차별 공격으로 초토화되는 것을 막고 적극적인 선교의 장으로 바꾸는 작업은 미래 선교의 사활이 걸린 중대한 문제가 될 것이다.

2010-08-24

[사목의 향기] 세상에 관심 가져야 빛·소금 될 수 있다

'차카게 살자!' 조폭들이 팔뚝에 새기는 문신의 문구라고 한다. 그들도 내심으로는 착하게 살고 싶은가 보다! 주일학교 어린이 미사 강론의 결론은 항상 같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죠?" "착하게 살아야 해요!" "어떻게 하는 것이 착하게 사는 거죠?" "친구들과 싸우지 말고 부모님 말씀을 잘 들어야 해요." "약속할 수 있어요?" "예!!" 주일마다 이런 결론으로 끝난다. 그런데 어른들도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성당에 나오는 것이 신자가 된다는 것이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이 착하게 살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신앙이 없는 사람은 착하게 살 수 없는 것인가? 아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도 착하게 살 뿐만 아니라 자신을 희생하면서 사회를 위해서 인류를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럼 우리와 차이는 무엇인가? 그리스도교 신앙은 윤리종교가 아니다. 착하게 사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영원한 생명이면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 안의 기성세대라고 할 수 있는 신앙생활이 틀에 박혀있는 분들과 사회문제에 대해서 대화를 하면 항상 가로 막히는 것이 있다. 신앙과 세상을 별개로 생각한다. 신앙생활은 교회 안에서만 하는 것이고 개인의 구원을 위해서 하는 것이고 세상일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그렇다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513-14)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예수님의 제자라고 자처하는 우리들은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는가?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는가?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가 세상 안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에 관심을 가져야만 세상의 빛이 될 수 있고 소금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 살면서도 세상에 발을 딛고 사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을 외면할 수는 없다. 세상 일은 우리 신앙인들의 관심대상이다. 그러나 세상 일에 대해서 모든 것을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하느님의 섭리대로 창조질서대로 제대로 가고 있는가를 살펴 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사셨던 시대를 보자. 그 당시도 소외계층과 기득권을 누리던 계층들이 있었다. 사회지도층이라고 하는 원로 대사제 바리사이 율사들은 기득권층이었다. 그들은 누리던 권력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 권력들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욕심을 채웠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었다.'(루가 1614) 그들은 자신들을 꾸짖고 비난하는 예수님의 말씀들이 몹시 귀에 거슬렸던 것이다. 또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예수님이 눈에 가시처럼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가야하는 길을 가셨다. 비뚤어진 세상을 바로 잡으려 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바로 이 것이다. 나에게 필요한 것만 나에게 유리한 것만 보고 따른다는 것은 온전히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내가 열심히 기도만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과연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살았는가?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의 역할을 했는가? 하는 것이다. 드러나는 신앙 행동하는 신앙이 필요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 513)

2010-08-24

[지혜의 향기] 내 마음에 좋은 업 쌓도록 노력해야

다행인지 못난 것인지 나는 아직 공직 선거 같은 데는 나가 본 적이 없다. 친척이나 아는 친구들 중에는 선거판에 뛰어들어 운 좋게 당선이 되기도 했는데 잠깐 동안이지만 세상을 다 얻은 듯이 환희에 젖는 것도 보았다. 아슬아슬하게 떨어지면 미련을 떨치기가 더 더욱 어려운가 보다. 있는 것 없는 것 다 쏟아 부어 또 다시 출마를 감행한다. 마약 중독자처럼 주위에서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표 앞에 장사 없다고 마지막에는 있는 것 없는 것 다 까발려 주고는 기진맥진한다. 그러다 피 말리는 개표의 순간인데 이 때만은 정말 진지하게 조상님이나 부처님 하느님을 찾지만 결국 소용이 없다. 상황을 차마 끝까지 지켜보지 못하고 자지러지는 모습… 고국에 있을 때 내가 본 장면들이다. 선진국이냐 후진국이냐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아무래도 선거라는 것에는 야료가 끼일 틈이 많다. 그러니 우리가 투표를 해서 누구를 하늘나라로 보낼 것인가 지옥으로 보냄이 마땅할까를 결정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 자신이 종교 생활을 하면서 마치 선거에 출마한 사람처럼 처세술만 몸에 익혀 지역구 관리하듯 절이나 어디를 다닌다면 번지수가 틀려먹은 것이고 다 부질없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제대로 하늘나라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을까? 나의 내생은 물거품 같은 바깥의 인기나 여론조사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과 내 마음이 짓는 업과 공덕에 따라 결정된다. 좋은 업을 쌓으면 좋은 점수가 쌓여 천상으로 올라가고 나쁜 업을 저지르면 왕창왕창 점수를 까먹어 저 아래 쪽 아수라 축생 아귀 지옥으로 배치된다. 수험생도 아닌데 이 나이에 또 지긋지긋한 점수 얘기를 꺼내기가 뭣하지만 중요한 대목이니까 안 할 수가 없다. 용서를 빈다. 우리는 다들 인간 세상에 태어났으니 한 테두리 안에 드는 중생이지만 각자 전생으로부터 조금씩 다른 기본 점수를 넘겨받아 태어났다. 부잣집 가난한 집 머리 좋은 아이 저능아… 출발선부터 조금씩 다르다. 불평등하다. 이를 찬양하고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인 부조리로서 제도적으로 개선할 점이 있다면 무리하지 않은 범위에서 적극 고쳐 나가야 한다. 그러자면 각자가 수양과 공덕을 쌓고 다 같이 어울려 공동의 좋은 업을 쌓아 가는 바탕부터 있어야 일이 제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이상적인 지상천국이 건설 되더라도 출발선에서든 경기 중반에든 100 퍼센트 공평한 사회는 있기 어렵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서도 개인적으로나 함께 어울려 끊임없이 착한 업 나쁜 업을 짓고 있을 것이다. 업이란 무엇인가? 쉽게 말해 우리 몸과 입 마음이 저지르는 행위 곧 짓거리다. 점수 잃는 짓거리부터 알아보자. 몸이 하는 살생 훔치기 음탕한 짓거리다. 입이 하는 거짓말 두 말 꾸밈말 욕설이 있다. 그리고 마음이 짓는 것으로는 욕심 성냄 어리석음이 있다. 점수를 따려면 무엇부터 해야 하나? 육바라밀이다. 그 첫째가 보시인데 가지려고만 하지 않고 베푸는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이 주신 계율을 지킨다. 화가 나도 일단 참으며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열심히 노력한다. 마음을 가라앉혀 집중하는 명상을 하고 지혜 곧 공을 아는 반야지를 갖는다. 지금 있는 것 처한 상황 이게 다가 아니다. 상대가 있고 바뀔 수 있다. 그 어떤 것이든 고정불변한 자리란 없고 텅 비어 있음을 아는 슬기가 반야지다.

2010-08-24

[변화] '사람을 찾습니다'

세상에는 영웅이 되고자 하는 사람보다는 영웅을 충실히 섬기고 따르는 팔로우어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문제는 믿고 따를 수있는 리더를 쉽게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할렘에서 태어난 구두닦이 흑인 소년이 미 하원의원이 되었고 40년째 할렘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 술주정뱅이의 아들이었던 소년은 고등학교시절 먹고 살기위해 6.25전쟁에 참전했었다. 혁혁한 전과로 무공훈장을 받은 후 퇴역하면서 그는 새로운 삶에 도전한다. 고등학교를 마저 마친 후 로스쿨을 입학해 변호사가 된다. "한국전쟁이 나의 모든 것을 바꾸었다"고 그는 고백한다. 지난달 개인 비리 등으로 윤리위에 회부된 랭글은 13개항의 윤리규정 위반혐의로 제소 되었다. 정치적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것이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이런 비리에도 불구하고 흑인37% 그리고 히스패닉 46%가 차지하고 있는 할렘은 그를 여전히 자신들의 리더로 섬기며 변함없는 충성심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엊그제 "아무런 배경도 없는 서민 촌놈 출신도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곳이 대한민국임을 20~30대에게 보여주고 싶다"며 '소장수의 아들' 김태호 총리 내정자가 포부를 밝혔다. 그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기대가 남 다른 것은 언론들이 강조하는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그의 서민적 경험 때문보다는 정말로 믿고 따를 수 있는 리더를 기다리는 또 하나의 막연한 희망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담임목회자 밑에서 일하는 많은 부사역자들은 '제대로된 담임목사를 만나기만 하면 내 인생 전체를 불살라 그의 목회를 도우며 일평생 주군으로 모시겠다'는 말을 버릇처럼 한다. 가까이에서 담임목회자를 대하다보면 성도들이 볼 수 없는 많은 인간적인 약점과 연약함을 보기 때문이다. 내가 들어 본 많은 성도들의 고민은 올바른 목사 올바른 교회를 만나면 모든 것을 '올인'하고 싶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찾고 있다. 내 인생을 다 바쳐 내 정렬을 다 바쳐 존경하고 따를 리더를 찾고 있다. 한편 하나님도 사람을 찾고 계신다. 지금 내가 섬기는 미숙한 리더와 교회를 주님이 주신 분복으로 여기고 충성할 수 있는 성도를!

2010-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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