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변화] '명품 리더십'

월드컵이 열릴때 마다 각나라 감독들의 리더십이 주목을 받아왔다. 특히 2002년 '히딩크'의 리더십이 전세계적으로 화제가 된바있다. 올해 남아공월드컵에서도 한국의 허정무 아르헨티나의 마라도나 일본의 오카다 감독들의 각기 다른 독특한 리더십이 연일 매스컴에 오르내린다. 과연 2010년의 주목받는 리더십 스타일은 어떤 것일까? 한국에서는 '박지성의 명품 리더십'이 화제다. 홍명보이운재 김남일등 역대 주장들의 '카리스마 리더십'이 아닌 '소통의 리더십'이 위기 때마다 선수들을 하나로 묶었다고 칭찬이 자자하다. '소통의 리더십'의 키는 '경청'에 있다. 박지성은 늘 동료 선수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대화를 통해 문제 해결을 했으며 허정무 감독 역시 과거의 '장군형 리더십'을 버리고 선수들의 의견을 일일이 경청하면서 이번 대회를 준비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리더십의 주 무기가 입에서 귀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토크쇼의 황제' '멜빵맨'으로 유명한 '래리 킹'은 명문 대학출신의 수재가 아니다. '고졸'이 그의 학력의 전부이다. '하나님을 인터뷰해보고 싶다'는 그는 토크쇼의 성공 비결을 '경청'에서 찾는다. 좋은 질문을 하는 것 보다 더 위력있는 것이 '경청의 기7술'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토크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 역시 '경청'을 강조 한다. '듣기'(Hearing)가 아니라 '경청'(Listening)하는 것에는 실력이 필요하다. 이 기술은 '사람과의 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모든 비즈니스에 필수불가결한 기술이다. 말 잘하는 재주를 가진 사람은 어디에고 넘쳐난다. 그러나 잘 들어주는 기술을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인생 문제에 봉착한 사람 중에 답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들에게는 들어줄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왜 인간이 태어나면 '오감'중에 가장 먼저 '청각'이 기능을 하게하시고 생을 마감할 때도 가장 마지막까지 '청력' 만은 남겨두실까? 어쩌면 우리가 지금 당면 하고 있는 교회 내의 많은 문제들은 부족한 '경청의 실력' 때문일지도 모른다. 목사와 성도 사이에 성도와 성도 사이의 문제 해결의 열쇠를 '설교'를 통해서가 아니라 '경청'하는 것에서 찾아보면 어떨까?

2010-06-29

[생활 속에서] 믿었던 가치를 파는 세일즈맨

'웬디스라'는 미국의 대표적인 햄버거 체인 식당이 있다. 이 회사를 창업했던 데이브 토마스는 유명한 기업의 회장의 풍모라기보다는 늘 앞치마를 두른 옆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었다. 푸근하고 자상한 모습으로 자사 광고에 800회 이상 출연하여 자신의 회사를 따뜻하고 친근한 이웃의 이미지로 만들었으며 그의 회사를 연간 1260억 달러의 매상을 올리는 맥도널드 다음가는 유명한 체인점으로 끌어올렸던 사람이었다. 소비자들 사이에 그의 인기가 얼마나 좋았는지 그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날 6000개나 되는 웬디스 체인점에는 손님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그 회사의 홈페이지는 너무 많은 방문자로 인해 다운이 되어 버렸다. 그의 어린 시절은 매우 불행하였다. 뉴져지주 아틀란틱 씨티에서 부모도 모르는 채 태어난 그는 6주 만에 양부모에게 입양되었고 그나마 그를 길러주던 양어머니는 다섯 살 때 세상을 떠났다. 그 이후 양아버지는 그가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 세 번이나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면서 열 두 번이나 집을 옮기는 등 그가 보낸 소년 시절은 매우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 데이브 토마스는 결국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식당에 취직하여 일하기 시작했다. 외롭고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던 그는 어느 날 식당에서 온 가족이 즐겁게 식사하는 모습을 보고 너무 부러워 장차 깨끗하고 즐거움이 넘치는 식당을 차리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목표를 정한 후 그는 더욱 열심히 일했고 1969년 드디어 자신의 희망대로 '웬디스'라는 조그만 햄버거 가게를 창업하였다. 친절한 서비스와 함께 결코 얼지 않은 프레쉬한 고기로 햄버거를 만들었던 그의 식당은 입소문을 타고 급성장하게 되었다. 데이브 토마스의 성공은 "사람이 성공하는 것은 그가 태어날 때 가지고 있던 어떤 특별한 환경에 기초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었다. 1993년 60세가 되던 해에 비로소 데이브 토마스는 검정고시를 거쳐 겨우 고등학교 자격증을 따게 되었다. 입양아 출신이었던 그는 사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특히 "모든 어린이는 누구나 안정된 가정과 사랑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하면서 입양 옹호 운동을 꾸준히 전개하였다. 그는 1992년 '데이브 토마스 재단'을 만들고 "특별한 아이를 입양하십시오. 그들이 자라서 특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장애인 아동의 입양을 강조하였다. 데이브 토마스는 결코 햄버거를 팔던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이 믿었던 가치를 팔았던 세일즈맨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기독교의 선교도 단지 복음의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선교는 삶 그 자체이다. 자신의 삶이 메시지가 될 수 없다면 아무도 그가 전하는 복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오늘 날의 기독교의 선교 운동은 너무 말이 앞서고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크레딧을 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 땅의 모든 기독교인들의 평생의 삶 그 자체가 주변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메시지로 남기를 간절히 기도드린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선교의 삶이 될 것이다.

2010-06-29

[사목의 향기] 감사할 것 많은 행복한 삶

많은 사람들이 성공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성공을 원한다. 그렇다면 과연 인생에서 성공이란 무엇일까? 개인마다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무어라고 꼬집어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인생에서의 성공은 바로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 이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부귀영화 (富貴榮華)와 관계없이 우리 주위에는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요즈음은 우울증으로 병원이나 상담소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추세이고 심지어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많아졌다. 이는 신앙인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우리는 소위 종교를 가진 사회의 유명인사들 가운데서 여러 가지 이유로 생을 포기한 사람들을 보면서 안타까워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언젠가 서강대학교 영문과 교수였고 지난해 5월 세상을 떠난 고(故) 장영희(마리아) 교수의 '좋은 사람'이란 수필을 읽은 적이 있다. 세상에서 유명한 사람이 되는 것 보다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삶의 행복이라고 글은 이야기 하였다. 나는 글을 읽으면서 '나는 좋은 사람인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 보았지만 그 대답은 내가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역할이며 누구보다도 하느님께서 주실 응답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행복한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윤향기 목사가 불렀던 '나는 행복합니다!' 라는 가사가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얼마 전 발표한 한국 사람의 평균 수명을 기준으로 볼 때 하늘이 허락한다면 앞으로도 가야할 시간들이 많지만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고 또 현재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감사할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하느님에게 그리고 세상을 향해서 감사할 것이 많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성공에 대해서 물어보면 재산이 많고 지위가 높으며 귀하게 되어서 세상에 드러나 온갖 영광을 누리는것이라고 대답한다. 이 기준으로 볼 때 내 인생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평생을 선교사로서 떠돌아 다녀서 모아 둔 재산이 없고 지위가 높거나 귀하게 되어서 높은 자리에 앉은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밖에 나서도 알아보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 말이다. 게다가 "신부(神父)님 사는 게 힘들어요. 먹고 살기가 힘들어요. 진료비가 없어서 치료를 못 받아서 죽을 것 같아요. 제발 도와주세요!"라고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응답하지 못해서 오는 무력감 때문에 가슴이 답답할 때가 있으니 수양이 부족하고 믿음이 약한 신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 중에 있는 자매형제들의 두 손을 꼬옥 잡으며 기도를 약속하고 미사를 봉헌할 때마다 그들의 행복을 빌어줄 수 있으니 나는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일등만을 기억하려는 경쟁 사회에서 나보다 남의 행복을 빌어 주는 사람이 더 많이 생기길 희망한다. 그래야만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사람'이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불어날 것이고 온 세상 사람들이 하나 되기를 바라는 기도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질 것이다. 중학교 때 배웠던 윤동주 시인의 서시(序詩)가 오늘도 나의 심장을 찌른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행복하게 살자!

2010-06-29

[지혜의 향기] 음력으로 쇠는 불교 4대 명절

사람이 모여서 살아가는 곳이라면 이르든 늦든 어디서나 문화라는 것이 생겨나 꽃피게 마련이다. 사람들은 차차 절기의 순환을 알게 되고 해가 길어지고 짧아진다든지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을 살펴서 달력을 만드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리하여 명절이라든가 축제 기간 같은 것이 생겨나 자리잡히면서 시간의 흐름에 강약의 매듭을 주면 사람들의 정신과 행동은 한 차원 높게 간추려지고 가슴에는 한 무리 되어 헤쳐 나가려는 설렘의 맥박이 뛰기 시작한다. 이런 현상은 한 부족이나 민족 나라의 경계를 넘어 퍼져나가 커다란 문화권이 형성 되기도 하는데 때로 이웃 문화권에서 퍼져나오는 물결과 섞이기도 하고 맞부딪히기도 한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철이 들면서 왜 내 생일이 음력과 양력으로 각각 다른 날짜에 꼽아질 수 있는지 어느 날이 진짜 내 생일인지 의아해 한 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라에서 기리는 현충일이나 제헌절 같은 기념일은 거의가 양력을 따르고 마을이나 집안에서 지키는 단오나 추석 같은 명절이라든가 제삿날은 음력이었다. 명절 하나만 보아도 눈앞에 놓인 세상은 단선이 아니라 색깔과 그늘이 영 다른 두 줄기 복선이었다. 그런데 미국에 오니까 이게 얼추 단선으로 파악 되었다. 메모리얼 데이나 추수감사절이 거의 같은 코드다. 그리고 여기선 한 줄기의 굵은 주류 문화에 여러 소수 민족의 문화가 색다른 가닥들로 함께 섞여 있다. 그래선지 사람들도 비교적 복선이 적고 단순 명쾌해 보인다. 자신감에서이겠지만 자기들 하고 색깔이 다른 문화에 대해서도 덜 배타적이며 포용하는 편이다. 이리하여 풍부하고 다양성이 있는 열린 문화 쪽으로 가고 있는데 이는 미국의 국익이나 세계 평화 각 문화의 주인공인 소수 집단들의 행복을 위해서도 참 좋은 일이다. 이런 미국 문화의 다양성에 빛깔을 보태면서 유태인들이나 중국인들이 하듯 우리 한국 불자들이 자기 종교의 명절을 지킨다는 것은 뜻있는 일이다. 하지만 음력으로 정해진 이 날들을 꼬박꼬박 챙기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교세가 아직 미약하고 불교도의 숫자가 상대적으로 적어 전체적인 분위기가 잘 일지 않는 것이 일차적인 어려움이다. 그러나 이런 속에서도 부처님의 사대명절이라도 잊지 않고 그 날의 깊은 뜻을 새기는 것이 불자 된 도리일 것이다. 먼저 부처님이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나신 사월 초파일이다. 하늘 위 하늘 아래 나 홀로 존귀하다. 온 세상이 괴로움에 빠졌으니 내 마땅히 이를 건져 내리라. 고통에 허덕이는 사바의 중생을 구하러 오신 날이다. 불자들은 이날에 즈음하여 연등을 밝히고 절에 찾아가 부처님께 경배한다. 다음이 싯다르타 태자가 카필라 왕궁을 떠나 구도에 나서신 출가재일로서 음력 2월 8일이다. 나이 스물아홉이셨다. 이리하여 여섯 해의 뼈를 깎는 수행이 이어지고 샛별이 동녘하늘에서 반짝이는 순간 보리수 아래에서 위없는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셨다. 12월 8일 성도재일이다. 이렇게 서른다섯에 부처가 되시어 법을 전하신지 어언 마흔다섯 해 마침내 쿠시나가라의 두 그루 사라나무 사이에 여든이 된 고단한 몸을 누이셨다. 마지막 설법을 하신 후 돌아가시니 2월 15일 열반재일이다. 한국과 중국에선 이에 더하여 7월 15일 우란분절을 기념한다. 목건련이 지옥에 떨어진 어머니를 구하고자 청했을 때 부처님께서 일러 주신 대로 조상들을 천도하고 스님들께 공양을 베풀어 올리는 날이다. 백중이라고도 한다.

2010-06-29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백만 송이 장미' 꽃이 피려면

#풍경1 : 얼마 전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에서 중요한 행사가 있었죠. 서울교구장인 김근상 주교의 '사제서품 30주년 및 주교서품 2주년 기념예배'가 열렸습니다. 행사 도중 사제와 교인이 함께 축가를 불렀습니다. 참석자들은 거룩한 성가나 성악을 부르지 않을까 싶었죠. 그런데 라이브로 성당에 울려 퍼진 노래는 '백만 송이 장미'였습니다. 러시아 원곡에 가수 심수봉씨가 우리말 가사를 붙인 노래죠. 궁금했습니다. 왜 엄숙한 예배에 트로트 노래를 불렀을까.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김근상 주교는 뜻밖의 말을 하더군요. "그 노래를 자세히 음미해보지 않았군요"라며 '백만 송이 장미'의 첫 노래 소절을 읊었죠. '먼 옛날 어느 별에서/내가 세상에 나올 때/사랑을 주고 오라는/작은 음성 하나 들었지~'. 그 말끝에 한 마디 던지더군요. "이건 완전히 예수님이잖아요!" #풍경2 : 간담회가 끝난 뒤 집에 가서 그 노래를 찾았습니다. 가사를 음미하며 천천히 들었죠. "~사랑을 할 때만 피는 꽃/백만 송이 피어오라는/진실한 사랑을 할 때만/피어나는 사랑의 장미~" 가사를 곱씹을수록 진국이 우러나더군요. 그만큼 울림이 컸던 거죠. 사람들은 묻습니다. "왜 예수가 세상에 왔느냐?"고 말입니다. 이 노래는 그 물음에 답을 합니다. "꽃을 피우기 위해서"라고 말이죠. 그런데 그 꽃은 각별한 꽃입니다. 봄이 왔다고 여름이 왔다고 그저 피는 꽃이 아닙니다. 왜일까요? 진실한 사랑을 할 때만 피는 꽃이니까요. 그래도 좀 애매모호하네요. 진실한 사랑이라니 대체 어떤 게 진실한 사랑일까요?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간절하고 비극적인 사랑이 진실한 사랑일까요? 아니면 춘향과 이몽룡처럼 신분과 고난을 뛰어넘는 사랑이 진실한 사랑일까요? 우리는 헷갈리죠. 그리고 혼동하죠. 사랑과 집착 집착과 사랑을 말입니다. 혹자는 아예 '사랑=집착'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랑은 움켜쥐는 걸 좋아하고 놓치는 걸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늘 기쁨의 바퀴와 두려움의 바퀴가 동시에 굴러가죠. 그런 바퀴에서는 꽃이 피질 않습니다. 그럼 꽃은 언제 필까요? '백만 송이 장미'를 다시 들어보세요.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꽃은 피고/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 나라로 갈 수 있다네~." 예수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마태복음 5장 44~45절) 그때 꽃이 핀다는 거죠. 아하 그렇군요. 이제야 알겠네요. 왜 미워하는 마음 없이 사랑을 줄 때 꽃이 피는지 말이죠. 그게 하느님(하나님)의 마음이군요.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군요. 하느님의 마음을 닮으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꽃이 한 송이 두 송이가 아니라 백만 송이인 거군요. 햇빛을 받고 피어나는 꽃이 어디 한두 송이겠어요? 백만 송이 천만 송이 일억 송이도 넘겠죠. 이쯤 되면 사람들의 반박이 날아옵니다.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하느님의 마음이 되겠어? 그게 안되니까 우리가 인간이지." 과연 그럴까요. 우리가 성경을 읽고 날마다 기도를 하고 회개를 하는 이유가 뭔가요? 나의 마음을 허물고 하느님의 마음을 채우기 위해서죠. 그래서 예수께서 악인도 선인도 사랑하는 하느님의 마음을 말씀하신 거죠. 그 이정표를 보고 그 길로 가라고요. 왜냐고요? 그때 꽃이 피기 때문이죠.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말입니다. 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꽃이 피는 거죠.

2010-06-29

[변화] '자블라니'

2010 FIFA 공인구의 이름 '자블라니'는 남아공의 '줄루어'로 '축하하다'라는 뜻이다. '자블라니'는 기존의 공인구보다 훨씬 공기의 저항을 덜 받는다고 한다. 특별히 고지대에서 자블라니는 어디로 튈지 몰라 골키퍼들의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FIFA의 공인구 탄생은 이렇다. 1930년에 최초로 개최된 월드컵 결승전에서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가 격돌하게 된다. 당시는 공인구가 없었기 때문에 두 나라는 누구네 공을 쓸 것인가로 대립각을 세웠다. 치열한 논쟁 끝에 전반전은 아르헨티나 후반전은 우루과이가 만든 공을 쓰기로 했다. 결과는 전반전은 아르헨티나가 2:1로 후반전은 우루과이가 4:2로 역전승을 거두었다. 자국의 공을 사용했을 때 더 좋은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FIFA는 결국 공인구를 만들게 된다. 공인구 '자블라니'의 특성에 맞는 축구화도 새로 만들어지고 있다. 이제 스포츠도 열심히 땀만 흘린다고 좋은 결과를 보장받는 시대는 지났다. 첨단과학과 경제력 그리고 훌륭한 코칭 스텝의 도움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시대의 분위기가 이렇다보니 선수보다 종합예술가로써의 감독의 역할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이번 월드컵의 첫 골을 넣은 이정수 선수의 이야기가 화제가 되고 있다. 그는 원래 이동국과 함께 투톱으로 국제대회까지 출전했던 촉망받던 공격수였다고 한다. 그는 처음 프로로 데뷔할 때 감독이었던 조광래 감독의 권유에 따라 수비수로 전향했다. 공격수더러 수비수로 포지션을 전향하라는 것은 자칫 선수에게 굉장한 좌절과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처사이다. 어려운 결정을 겸손하게 받아들였던 이정수는 첫 골을 넣는 순간 부모님도 생각이 났지만 조감독의 얼굴이 떠올랐다고 한다. 이정수는 '골 잘 넣는 수비수'라는 별명도 갖게 되었다. '자블라니'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불완전한 인생들에게 감독은 반드시 필요하다. 다행히 그리스도인들은 완벽한 감독을 모시고 있다. 다만 우리에게는 감독의 말을 절대 신뢰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화려한 공격수가 되고 싶어도 감독이 수비수를 시키면 감독을 믿고 따라야 한다. 지금 성공할 때 같아 성공을 달라고 할 때 감독이 좀 더 기다리라고 하면 참을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자블라니'의 인생이 되는 지름길이다.

2010-06-22

[생활 속에서] 16강은 천국의 맛보기

2010 남아공 월드컵으로 전 세계가 들썩거리고 있다. 특히 한국과 미국 내 한인 사회는 지난 몇 달 동안 대한민국 축구팀의 16강 진출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리스전에서 2-0으로 승리하고 천국을 경험했으며 아르헨티나에 1-4로 참패한 후 지옥을 맛봤다. 월드컵은 남녀노소할 것 없이 천국과 지옥의 맛보기 이벤트라고 할 수 있다. 1994년 월드컵에서 에스코바르라는 선수는 자책골을 허용한 후 자국에서 피살되었다. 당시 콜롬비아인들에게 월드컵은 지옥의 행사였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은 천국의 기운을 조금이라도 맛본 행사였다. 이웃과의 벽이 허물어지고 열정을 불사르며 "대~한민국"을 외친 행사였다. 전 세계가 단일 행사를 통해 천국과 지옥을 경험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물론 미국만은 조용한 편이다. 히스패닉 커뮤니티가 아니면 월드컵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나라다. 미국을 제외하면 전 세계 스포츠 팬들은 월드컵 결과에 울고 웃고 화내고 기뻐한다. 나는 이런 특별한 경험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죽음 이후에 우리가 경험할 천국과 지옥의 미리보기(preview)이기 때문이다. 월드컵에서 천국은 어떤 기분을 주는가. 신나고 즐겁고 흥겹고 그 순간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긴다. 월드컵에서 지옥은 어떤 기분을 주는가. 화나고 짜증나고 스트레스가 되고 답답하고 욕하고 싶고 책임을 누군가에 전가하고 싶고 옆에 있는 사람이 밉고 이 시간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긴다. 우리가 생을 마감하고 반드시 가게 될 천국과 지옥도 비슷하다고 한다. 천국에서 90분 동안 있었다는 침례교 목사 돈 파이퍼는 '천국에서 90분'이라는 책에서 천국 시민들은 얼굴에 행복한 표정이 가득했고 완전한 평온함이 있었고 생명으로 충만했고 찬란한 기쁨을 드러냈다고 증언했다. 파이퍼 목사는 상상을 초월한 기쁨과 흥분과 온정과 총체적인 행복이 표현되는 곳이 천국이라고 했다. 반면 지옥을 체험했다는 여의도 순복음교회의 조용기 원로목사는 "지옥은 고통스러워서 말로 다할 수 없다. 안 태어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옥의 유황불이 타오르고 구더기가 득실거리고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 마음 속에서 끓어 올랐다"고 증거했다. 한국 축구팬들은 한국의 16강 진출로 약간이나마 천국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16강 진출이 천국을 경험하는 중요한 업적인 것이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진출이 천국을 경험하는 결정적인 교두보다. 축구에 관심 없는 미국인은 16강 진출에 기뻐하고 흥분하고 행복해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게 천국과 같은 기분을 느끼는 원인 제공자가 되는지 도무지 알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도 그런 것 같다. 아는 사람만 아는 게 바로 천국과 지옥 그리고 그 길로 가는 인생의 여정인 것이다.

2010-06-22

[사목의 향기] '나'를 버리게 한 에니어그램

미국에 도착하여 사목을 시작한 후 여러 가지 교육을 실시하였는데 그 중에 기억남을 만한 교육은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에니어그램 교육입니다. 에니어그램 교육이라고 하면 미국에서는 많이 연구한 분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래 에니어그램 교육은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글이나 책을 통하여 전수된 것이 아니라 은밀하게 극소수의 인원에게 말과 경험으로 전수된 것이기에 거의 20세기 초반까지 알려지지 않은 교육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에니어그램의 시작이 이슬람이냐 유대교냐 그리스도교냐 아님 그리스 신비주의냐고 따지는 것은 그리 큰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다만 이 에니어그램이 특정 종교 단체에서 소속 회원들을 자신들이 믿는 신께로 올바르게 인도하기 위한 하나의 영적 지도의 수단이었을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미국에 아무리 거룩하고 영성적인 것이 들어온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상업적인 도구 즉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바뀌어 버린다." 사실 에니어그램의 본질은 종교적이고 영적인 차원을 다루면서 신비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에니어그램이 여러 가지 사정과 경유를 통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만은 미국에서의 에니어그램은 자기 자신과 이웃의 성격 유형 파악으로 거의 고착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종교적인 차원 교육적인 차원 사업적인 차원 인간관계의 개선을 위한 프로그램 활용 등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물론 에니어그램은 자기 자신의 모습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을 가장 근본적인 목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처와 욕망과 집착 그리고 방어기제 등을 정확하게 바라봄으로써 자신 안에 있는 참된 평화와 사랑과 기쁨을 발견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리고 자신이 본 모습을 통하여 이웃을 판단하는 것을 중지하고 자신이 받았다고 생각하거나 아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질과 재능을 이웃과 함께 나눔으로써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참된 자아를 발견하여 이를 함께 누릴 수 있게 해 줄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에니어그램 교육입니다. 그러기에 에니어그램 교육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1차 교육 2차 교육 3차 교육 그리고 연구반 등의 순서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지만 이번 미주 에니어그램 교육은 1차 2차 교육으로 마무리 하였습니다. 물론 한국에서 강사님을 초대하여 남가주 뉴욕 워싱턴에서 교육을 실시한 관계로 2년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이번 교육에 참석한 분들이 많은 것을 깨달았고 기뻐하셨습니다. 가장 먼저 자신이 왜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는지 그리고 나의 집착 때문에 주변사람들에게 얼마나 강하게 강요하면서 상처주며 살아 왔는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가족이나 직장 동료들 특히 본당 신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나의 생각과 판단 뜻이 올바르고 좋은 것이며 그들이 잘못되었다면서 내 것을 끊임없이 강요하며 살아 왔습니다. 특히 종교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내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가 체험한 하느님의 모습만이 참된 하느님의 모습이고 이렇게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겨야 하며 이웃에게 이렇게 봉사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살아 온 것이 거의 모두 다 나의 방식이고 나의 생긴 모습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듣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신앙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신앙 또한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그 또한 올바르고 합당하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에니어그램 교육을 통하여 배우고 익힌 것을 매일의 삶 안에서 자신을 돌아보면서 꾸준히 시간을 가지고 인내하며 실천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라 본다는 것은 가장 큰 아픔 중에 하나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과 판단과 욕심을 버린다는 것은 큰 십자가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아픔의 도가니"를 통하여 우리는 순수한 인간 올바른 신앙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에니어그램 또한 하느님께로 가는 하나의 방법이고 수단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2010-06-22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학교서 인기있는 학생이 되고 싶어요

Q: 학교에서 인기 있는 학생이 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좋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A: 내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가 나에게 어떻게 대해주는 사람을 좋아하는가를 먼저 생각해 보세요. 친구들이 좋아하는 사람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사람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친구들끼리 어울릴 때는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는 학생을 좋아하지요. 또 공부 잘하는 학생도 인기가 있지요. 그런데 노래도 잘 못하고 춤도 잘 못 추고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면서 인기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대부분 상대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입니다. 상대의 말에 면박주지 않고 귀 기울여 얘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입니다. 또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마음을 써주는 사람도 인기가 있고 경제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사람도 인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혼자 청소하고 있는 사람을 거들어주는 친구가 있다면 누구나 그를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나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고 도움을 주려는 사람은 누구나 좋아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인기 있는 사람이 되려면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인기를 얻고 싶은 분야에 관한 재능을 익히는 것입니다. 노래 잘하는 학생이 부럽다면 노래 연습을 하고 춤 잘 추는 학생이 부럽다면 춤 연습을 하고 공부 잘하는 학생이 되고 싶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렇게 재능을 익혀서 인기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첫 번째 방법입니다. 배우나 가수나 운동선수 같은 사람들이 그런 경우고 또 과학자 중에서도 인기를 끄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특별한 재능으로 인기를 끄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 각 분야에 많이 있습니다. 두 번째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친구들에게 무언가 도움을 주고자 하면 사람들은 나를 좋아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특별한 재능이 없이도 인기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시면 됩니다. 어떤 특정한 분야에서 인기 있는 사람이 되고 싶으면 그 분야의 기술을 열심히 익혀야 하며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이 두루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면 그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친구들 얘기도 잘 들어주고 친구들이 어렵다면 가서 도와도 주고 그렇게 늘 친구들에게 마음을 써주면 사람들은 자연히 나를 좋아하게 됩니다. 누군가 나에게 자꾸 관심을 갖고 마음을 써줄 때 나도 그를 좋아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처럼 내가 먼저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마음을 써주면 그들도 나를 좋아하기 시작합니다. 내게 필요한 것은 하나도 도와주지 않으면서 나를 좋아한다며 계속 따라만 다니는 사람에게는 귀찮은 마음이 듭니다. 그런 식으로 감정을 표현하며 관심을 갖는 것만으로는 인기 있는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계속 귀찮게 여김을 받을 뿐입니다. 상대가 나를 필요로 할 때 도와주어야 합니다. 무작정 찾아가서 "내가 네 말을 들어줄 테니까 네 속의 마음을 나한테 다 얘기해라" 한다고 해서 상대가 나를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나에게 털어놓으려 할 때 그런 때 내 일은 좀 접어두고라도 "그래 무슨 일인가 이야기 해 봐" 이렇게 들어주어야 합니다. 바쁘다 그런 얘기 듣기 싫다고 거절해버리면 상대가 마음을 상하게 됩니다. 부모자식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마가 자식의 이야기를 편안하게 잘 들어주면 자식들이 엄마를 좋아하지만 야단만 치는 엄마는 싫어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수행적 관점에서 볼 때는 남의 말 잘 들어주고 남의 마음 잘 알아주고 남에게 도움을 줌으로써 자연히 인기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인기입니다. 노래 잘하는 사람은 목을 다치고 나면 노래 할 수 없고 운동선수는 발이나 손을 다치면 더 이상 운동을 할 수 없고 얼굴 예쁜 사람은 얼굴을 다치게 되면 인기가 없어져 버리지만 마음 씀씀이를 잘 해서 인기 있는 사람은 팔이 하나 없어도 인기가 있고 눈이 멀어도 인기가 있고 도무지 누가 어떻게 해볼 수가 없습니다.

2010-06-22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깨달음의 이야기 '심청전'

'심청전'을 읽다 보면 참 놀랍습니다. 옛 이야기로만 치부하기엔 은유의 메아리가 너무 깊기 때문이죠. 그래서 심청전의 주인공을 '심청(沈淸)'이 아니라 마음 심(心).맑을 청(淸) 해서 '심청(心淸)'이라 불러봅니다. 왜냐고요? 심청전의 스토리를 마음을 맑히는 이야기 다시 말해 깨달음을 향한 구도기로 보기 때문입니다. 심청의 아버지는 심봉사죠. 앞을 못 보는 장님입니다. 그건 우리들 자신에 대한 비유입니다. 우리는 봄날의 꽃 여름의 녹음 가을의 바람 겨울의 눈발을 '있는 그대로' 보질 못하죠. 늘 거기에 '나의 감정'을 대입해서 바라봅니다. 그래서 꽃은 슬픈 꽃 녹음은 절망의 녹음 바람은 외로운 바람 눈발은 두려움의 눈발이 되고 말죠. 결국 세상과 우주는 희로애락으로 범벅 된 비빔밥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늘 스스로 만든 창(窓)을 통해 바깥을 보니까요. 그런데 성현들은 말합니다. "있는 그대로 보라!" 도통 감이 잡히질 않죠. 그런데 '심청전'은 그 방법을 일러주죠. 그래서 '현문우답'에게 '심청전'은 하나의 경전입니다. 우리에게 '눈 뜨는 법'을 일러주기 때문이죠. 잘 들어보세요. 심봉사는 눈을 뜰 수 있다는 얘기에 공양미 300석을 부처님께 시주하겠다고 약속하죠. 그 말을 들은 심청은 깜짝 놀랍니다. 가난한 처지에 공양미 300석은 '심청의 목숨'을 뜻하니까요. 결심하죠. 자신의 목숨을 내려놓기로 합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끔 말이죠. 혹자는 이런 심청을 비난합니다. "부친 시봉이 힘들어서 죽음을 택한 것 아니야?" "심청은 현실도피주의자"라고 몰아치죠. 그러나 '현문우답'의 생각은 다릅니다. 왜냐고요? 그걸 '심청의 출가(出家)'로 보니까요. 머리 깎고 산으로 가는 게 출가가 아니죠. 나의 집착이 내려지는 순간 그게 바로 출가의 순간이죠. 심청의 가장 큰 집착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앞 못 보는 아버지에 대한 걱정과 보살핌 책임감과 자책감이었겠죠. 바다에선 풍랑이 '우르르!' 몰아칩니다. 집채만한 파도가 뱃전을 '탕!탕!' 칩니다. 큰 배가 휘청휘청합니다. 왜 그럴까요? 심청의 마음이 그런 겁니다. 심청이 틀어쥐고 있던 그 모든 집착과 소망 그리고 불안이 요동치기 시작한 거죠. 심청은 배 위에 엎드려서 "나 죽기는 서럽지 않으나 홀로 계신 아버지는 뉘에게 의지한단 말이오?"라며 통곡을 합니다. 그리고 결심하죠. 자신이 움켜쥔 모든 집착을 놓기로 말입니다. 그리고 치마를 둘러쓰고 인당수로 '훌~쩍' 뛰어내리죠. 그렇게 몸이 떨어지면서 마음(집착)도 떨어진 겁니다. "푸웅~덩!" 그 순간 바다가 '촤~악'하고 가라앉습니다. '현문우답'은 이 대목에 주목합니다. 왜 바다가 '촤~악!'하고 가라앉았을까요? 그렇습니다. 색(色)이 공(空)으로 들어간 거죠. 심청의 집착은 '색(色)'입니다. 그 색이 바다로 들어간 겁니다. 바다는 '공(空)'을 뜻하니까요. 색이 공으로 들어갔으니 색즉시공(色卽是空)이 이뤄진 겁니다. 그래서 이 우주가 고요해진 거죠. 왜 고요할까요? 바람도 파도도 심청의 집착도 원래 비어있기 때문이죠. 색즉시공의 순간 심청이 그걸 봤던 겁니다. 이로 인해 심봉사는 결국 눈을 뜹니다. 심봉사뿐만 아니죠. 맹인잔치에 왔던 봉사들이 다 눈을 뜹니다. 내가 눈 뜰 때 세상이 눈을 뜨죠. 우리도 틀어쥐고 있는 집착을 인당수에 하나씩 둘씩 풍덩 풍덩 내려놓으며 가다 보면 결국 눈을 뜨게 되죠. 그때는 나만 눈을 뜨는 게 아닙니다. 이 세상이 이 우주가 동시에 눈을 뜨는 거죠. 그때 탄성이 터집니다. "여기가 불국토구나!" 그러니 '심청전'이 얼마나 값진가요. 눈 뜨는 법 그 핵심 중의 핵심을 일러주니까요.

2010-06-22

[변화] '복음의 증폭제'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성경시대의 소금은 그 쓰임새가 오늘과 많이 달랐다고 한다. 오늘날의 소금의 주 역할이 간을 맞추는 조미료라면 당시의 소금은 번개탄(?) 역할을 했다고 한다. 당시의 이스라엘은 목재가 귀했기 때문에 빵을 굽는 화덕의 재료는 나무가 아니라 동물의 대변을 말린 것이었다. 이때 소금은 화덕의 제일 밑바닥에 깔려있다가 화덕에 불이 붙으면 화력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여러번 쓰다가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즉 그 기능을 다하면 길가에 버려졌다. 활활 타는 불에 소금을 한번 뿌려보면 소금의 기능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이 2000년 전에 무리들을 모아놓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되어라!'라는 말씀을 하실 때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부패방지' '간 맞추기'라는 단어를 떠올리기 보다는 '복음의 번개탄'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것이다. 소금의 여러 가지 역할 중에 가장 중요한 기능이 화력을 증폭시키는 기능인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여러 기능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역할은 '복음의 증폭' 기능이다. 요즘 미주의 많은 목사님들이 한국행을 하신다. 이것이 한때의 유행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준비하심인지 평신도 뿐만 아니라 목회자들도 궁금하다. 과연 정답은 무엇일까? 미주의 대표적인 교회의 한 목회자가 한국의 큰 교회로 부임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그 결정을 내리게된 중요한 원인은 '선교의 사명'이외의 다른 이유가 없다고 한다. 그것이 사실일진데 떠나보내는 아쉬움과 서운함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보내야함이 마땅하다. 눈물로 사도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보낸 가이사랴 형제들처럼 말이다(행21:14) 왜냐하면 우리는 이땅의 '복음의 증폭제'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오는 앉은뱅이는 기도도 할 수 있고 성경도 읽을 수 있고 정상인이 할 수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앉아 있을 때는 정상인 같지만 막상 무언가 하려고 하면 행동할 수 없는 장애가 있다. 우리 교인들 중에도 앉은뱅이가 많다. 다른 것은 다 잘하는데 복음을 전하는 데만은 장애를 가진 영적 앉은뱅이들이 허다하다.

2010-06-15

[생활 속에서] 교회는 선교의 공동체

교회는 '선교 공동체'이다. '선교 공동체'라는 말은 "교회는 선교사를 보내는 기관"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교회는 선교 없이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블로우(Johannes Blauw)는 "세상에 보내심을 받지 않은 교회는 없다"는 표현을 쓴다. 우리가 신약의 초대교회를 선교하는 교회라고 할 때 그것은 바울과 바나바와 같은 위대한 영웅적 선교사를 배출했던 교회라는 말이 아니다. 초대 교회 구성원 모두가 선교 정신으로 살아가던 교회였다는 뜻이다. 초대교회가 300년 만에 로마제국을 정복했던 것은 모든 크리스쳔이 선교사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스미스(George Smith)는 "초대교회는 모든 크리스쳔이 선교사였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전 세계 교회는 선교의 위기를 강하게 느끼고 있다. 그 위기의 본질은 교회가 선교의 모든 것을 파송 받은 선교사에게만 맡기려 하는 데서 기인하고 있다. 대표 선수로 뽑은 해외 선교사 몇 사람에게 선교의 모든 것을 맡겨버리고 대부분의 교인들은 선교의 부담감을 전혀 느끼지 않으면서 편하게 지내고 있다. 선교사에게 선교 모든 것을 맡겨버리는 교회는 미래가 없다. 선교는 몇 사람의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일이기 때문이다. 몇 사람이 선교하던 시대는 이제 지나갔다. 모두가 선교에 참여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참여하는 선교가 아니면 그것은 주님의 선교가 아니다. 우리는 해외에 선교사를 파송할 때 그에게 "선교지에 뼈를 묻고 오라"고 권면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요청하려면 우리도 지역 선교사로 '뼈를 묻는 정신'으로 매일의 삶 속에서 선교하며 살아야 한다. 아프리카 선교에 불을 붙였던 리빙스톤은 아프리카에 자신의 심장을 묻은 사람이었다. 그는 1841년 처음으로 아프리카를 향해 첫발을 내디딘 이후 1873년 32년간 아프리카와 함께 숨을 쉬면서 아프리카의 검은 영혼을 위해 헌신하였다. 1873년 5월1일 이른 아침 리빙스톤의 집에서 일하던 하인이 그의 침실을 들렀을 때 그는 리빙스톤이 침대 옆에서 기도하는 자세로 무릎을 꿇고 숨져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죽었을 때 그를 사랑했던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그의 심장을 꺼내 아프리카 므푼두 나무 밑에 묻고 그의 시신은 뜨거운 햇볕 아래 말려 미이라로 만들었고 2400km가 넘는 긴 여정을 통해 해안까지 운반하여 영국으로 옮겨 국장으로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리빙스톤은 떠났지만 지금 그의 심장은 지금도 아프리카 어느 구석에선가 뛰고 있는 것이다. 파송 받은 해외 선교사에게 "선교지에서 뼈를 묻으라"고 권하려면 우리도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리빙스톤처럼 뼈를 묻을 각오로 선교하며 살아야 한다. 선교에 면제받은 크리스천은 없기 때문이다.

2010-06-15

[사목의 향기] 미국에서의 교포 사목

미국 한인 가톨릭 신자들을 위한 특수 사목을 미국에서 시작한 지 벌써 2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미국에서 사목해야 할 시간도 1년 정도 남지 않은 지금 새삼 지난 온 시간 긴 시간은 아니지만 정신 없이 달려 온 것 같아 길게 숨을 한 번 내쉬어 봅니다. 사실 미국에 온 이유야 복잡하지만 그대로 열심히 일해 보겠다고 그리고 이왕 온 김에 영어라도 한마디 배워 보겠다는 굳은 결심과 각오를 하고 이 땅에 왔었지만 지금은 사목은 몰라도 영어는 아직도 한마디도 못하고 살아 가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미국 온 지 벌써 2년이 지났지만 전화 벨이 올리면 미국사람일까 걱정이 앞서고 이상한 영수증이나 청구서가 날라 오면 영어하는 신자 분들 찾기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실 그동안 영어를 할 기회는 거의 없었습니다. 2년 동안 미국 레스토랑에 가 본적은 2번 1달에 2번이나 1번 정도 맥도날드에 가서 아침 빵과 커피 정도 마십니다. 이것도 선임자가 만들어 놓은 미국 신자들을 위한 토요 영어미사 덕분입니다. 지금은 조금 수월해졌지만 영어미사를 드려야 할 날이 다가오면 영어 기도문과 복음을 읽어 보고 전자사전에서 원어민 발음을 들어보면서 발음을 연습해 보는 것이 지금까지의 모습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길게 말씀드린 이유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와서 영어 한마디도 하지 않으면서도 살아 갈 수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신기하고 놀라워서입니다. 보통 교포 사목을 담당하게 되면 거의 이런 이야기들을 듣게 됩니다. "교민들은 한국 사람이지만 미국사람이다. 먼저 많은 시행착오를 겪을 것이고 지금까지 한국에서의 정서나 생각들을 가지고 대하면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교포들을 다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할 형편입니다. 오히려 이런 생각이 간혹 들기도 합니다. "이분들은 한국 사람도 아니고 미국 사람들도 아니다." 여기서 제가 여러 가지를 느끼지만 지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어떤 이유로 미국에 왔던지 간에 주어진 일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어느 정도의 영어와 미국 사회와 문화를 배우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항상 머리에서 맴돌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다 못해 저는 썩 좋아하지 않지만 미식 축구나 야구 혹은 아이스 하키라도 TV로 나마 봐야겠다고 마음을 먹곤 합니다. 우리가 선교사로 다른 나라에 파견되면 그 나라의 언어와 문화와 풍습을 먼저 배워야 하고 그 나라 생활 수준에 맞추어 살아야 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미국에 사목하러 오더라도 아무리 한인 교포 사목이지만 영어와 미국 문화와 사회적 정치적 상황들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한인 교포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미국이라는 거대하고 복잡한 나라에서 살아 가고 있는 한인들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한국에서 체험한 하느님과 예수님과는 다른 주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른 하느님과 예수님의 체험 안에서 틀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의 모습이 볼 수 있고 이에 따라 하느님을 섬기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한국에서 하느님을 섬기던 방법이나 모습을 미국에 와서도 미국 신자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와는 달리…

2010-06-15

[지혜의 향기] 죽음·장례 관한 불교의 의식

죽음이란 것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부자에게도 가난한 사람에게도 찾아오고 국적 인종 불문이다. 때로는 나이도 챙겨 보지 않는 건지 새파랗게 젊은 애들에게도 느닷없이 찾아든다. 이리하면 아침저녁 씻고 바르며 애지중지 가꾸던 몸뚱어리는 며칠 사이에 허물어지고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만 어딘가에 남는다. 이 마음덩이는 시공을 넘나들며 흩어졌다 모였다 살아남은 이들에게 찾아와 가슴을 저미기도 하고 애태우게도 하지만 이윽고 세월 따라 빛이 바랜다. 불교에서는 남아 떠돌며 윤회하는 이 마음 또는 넋을 영가라고 한다. 죽음과 장례에 관한 불교의 의식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하기야 한국의 시사 뉴스에도 더러 나오는 말들이지만 이런 건 상식으로라도 알아 두는 게 좋겠다. 옛날 인도에서는 서민이나 하층민들이 죽어 가는 사람들을 포대기에 둘둘 말아 숲에다 그냥 갖다 버렸는데 이런 추운 숲을 시다림이라고 하였다. 인도판 집단 고려장이다. 부처님도 이런 데서 수행을 하셨는데 생지옥이 따로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시다림이란 말이 한국에서는 누가 상을 당했을 때 스님이 돌아가신 이를 위하여 설법을 하는 의식을 뜻하게 되었다. 돌아가신 이의 귀에다 '오호 무상계는 열반으로 가는 문이요 고해를 벗어나는 자비의 뱃길일세' 하는 무상계를 일러 준다. 망자의 영가가 이제는 빈껍데기인 자기의 남겨진 몸과 평소에 놀던 이승을 그만 잊고 애착을 놓아 버리도록 권고한다. 그리고 주검을 관에 넣기 전에 목욕을 시키고 수의를 입히는데 매 단계마다 보통 아미타경이나 금강경 반야심경을 읊는다. 이는 영가가 부처님께 귀의하여 좋은 곳으로 가도록 밀고 이끌어 주기 위함이다. 불교의 전통적인 장례법은 화장인데 다비라고도 한다. 끝나면 남은 뼛조각을 모아 납골당에 모시거나 곱게 빻은 뼛가루를 원래의 고향인 대지에 흩뿌린다. 그리고 반혼재를 모신 다음 사십구재를 지내 영가의 극락왕생을 기원한다. 본래 우리 중생의 마음이란 애착이 많아서 웬만하면 죽어서도 잘 떠나지를 못하고 미혹에 싸여 주위를 헤매기 쉽다고 한다. 그런데 이레에 한 번 씩 일곱 번째인 막재까지 지내면 대개는 애착을 놓고 떠나간다고 한다. 이렇게 탈상을 한 다음부터는 전통에 따라 차례와 제사를 모시기도 한다. 한국은 유교 전통이 강해서 불교와 유교 의식이 서로 영향을 주었고 일부 섞이기도 했다. 지금도 혼동이 있는데 본래 불교와 유교의 의식은 한글 한자 모두 글자부터 다르다. 불교에서는 재계할 재(齋)며 유교에서는 제사지낼 제(祭)다. 불교식의 재는 본래 깨끗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려 공덕을 닦는 것으로 주로 스님들의 공양 의식이었는데 나중에는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에게 베푸는 일체의 불교 의식을 뜻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요즘 한국 불교에서 행해지는 중요한 재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먼저 천도재라는 것이 있다. 잘 보내 드리는 재다. 죽은 조상이라고 아무 흠결이 없을까! 살아남은 자손들이 정성으로 재를 모시어 돌아가신 이들이 생전에 지은 모든 나쁜 업을 없애거나 가벼이 하여 좋은 곳에 태어나게 하는 의식이다. 다음은 수륙재다. 물과 뭍에 있는 외로운 귀신이나 굶주리는 아귀들에게 공양하는 의식이다. 이 세상에 못 먹어 굶주리는 것보다 더 서러운 일이 어디 있으리요! 영산재는 영축산에서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하시는 모습을 재현한 재며 예수재는 다른 뜻이 아니라 내가 죽은 뒤를 생각하여 스스로 미리 닦는 재다. 우리가 평소에 행하는 모든 신행은 어찌 보면 예수재의 한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2010-06-15

[변화] '출생의 비밀'

요즘 로빈후드의 새로운 영화 버전이 나왔다. 그 영화에는 기존의 도둑들의 두목인 의적 로빈후드가 아니라 새로운 모습이 등장한다. 새 버전은 로빈후드가 전쟁터에서 일개 활 쏘는 궁수로 시작 해서 탈영병 그리고 나중에는 영웅이 되어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탈영 후 어느 날 로빈후드는 자신이 활 잘 쏘는 평범한 일개 궁수가 아니라 아주 유명한 가문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고 나서부터 눈빛이 달라지고 자신을 보는 눈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진정한 영웅의 모습으로 변해가면서 결국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다. 우리에게는 감추어진 출생의 비밀이 있다. 인간은 자신의 본질인 영혼의 출생 비밀에 대한 끊임없는 갈증을 가지고 있다. 내가 어릴 때 큰 누님이 만화방을 했는데 덕분에 수천 권의 만화를 읽을 수 있었다. 기억해보면 그 만화들이 그리고 있는 이야기의 많은 부분들이 출생의 비밀에 관한 것이었다. 주를 이루는 이야기는 자신이 노비나 떠돌이의 신분인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비한 능력들이 자신에게서 나타나는 것이다. 뛰어난 암기력이 있거나 무술을 한번 배우면 스승을 능가한다거나…. 우연히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는데 알고 보니 엄청난 가문의 후손이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뿌리를 알게 되면서는 눈빛부터 달라진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사람이 완전히 변한 것이다. 결국 신분을 회복해서 원수를 무찌르고 원래의 신분으로 돌아가 죽은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고 부를 되찾고… 그런 내용이다. 인간의 삶에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새로운 비전과 꿈을 찾는 것 보다 숨겨진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깨닫게 되면서부터다. 내가 어디에서 왔고 나의 뿌리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면서부터 눈빛이 달라진다. 꿈과 비전도 찾게 된다. 하나님이 구약의 인물들에게 나타나면서 빼먹지 않고 말씀하시는 것이 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다…". 인간의 뿌리가 어디에서부터 나왔는지에 대한 친절한 설명이다. 삶의 지각변동을 원하는가? 새로운 비전을 찾을 것이 아니라 진정한 나의 뿌리를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당신은 하나님에게로부터 왔다.

2010-06-08

[생활 속에서] 주머니속 십자가에서 온 성공

미국 농구계의 큰 별인 존 우든 코치가 2010년 6월 4일 이 땅을 떠났다. 우든 코치는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90년대의 마이클 조던처럼 추앙되던 농구 지도자다. 그는 60년대와 70년대에 UCLA 남자 농구팀을 10차례나 NCAA 챔피언으로 이끈 바 있다. 특히 1967년부터 1973년까지 UCLA를 7년 연속 챔피언으로 이끈 것은 대학농구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이다. UCLA는 우든 감독이 재직했던 시절 4차례나 무패 시즌이라는 기록을 남겼고 88연승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2010년 10월이면 100세가 되는 우든 코치는 지난 5월 26일 탈수증세로 입원했고 6월 4일 세상을 떠났다. 우든은 은퇴 후 30년 이상이 지난 21세기에도 그 영향력이 대단했다. 우든 코치가 만든 '성공의 피라미드(the Pyramid of Success)'는 현재 학교 교사들이 리더십을 가르칠 때 자주 사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성공' 개념은 다른 지도자들과 달랐다. 그가 생각하는 성공의 정의는 '당신이 갖고 있는 능력을 최대한 발휘한 후에 얻은 자족(self-satisfaction)의 결과로 갖게 된 마음의 평화'다. 돈 명예 파워가 성공의 기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은퇴할 무렵 프로농구(NBA) 구단으로부터 연봉 35만 달러(70년대에는 엄청난 금액이었다)의 감독직 제의를 받았지만 거절할 수 있었다. 필자는 90년대 중반 그의 집을 방문해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당시 그의 집은 너무나도 평범해 깜짝놀랐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 있다. LA 북부의 엔시노라는 곳에 거주했던 우든 감독은 "죽은 아내와 함께 살던 곳이라 떠날 수가 없다"며 작은 집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거부가 될 수 있었던 그는 '성공'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었다. '성공의 피라미드'의 저작권 등록으로 돈을 벌자는 제의도 그는 단칼에 거절하고 이 내용을 인쇄해 무료로 제공했다. 그가 색다른 리더십을 보였던 근저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이 있었다. 10차례 NCAA 챔피언이 됐을 때도 88연승을 달렸을 때도 그의 주머니에는 항상 나무 십자가가 있었다. 그가 경기 중 주머니에 손을 넣을 때는 십자가를 만지며 잠시 묵상을 하는 시간이었다. 긴장과 스트레스의 상황에서 그는 십자가를 묵상했다. 십자가가 마술적인 힘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고 그는 고백했다. 십자가를 만지는 것은 그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대한 재확인이었다. 승리를 향한 기도도 아니고 그의 별명처럼 마법사가 되고자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어디에 있든 어떤 순간에서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그는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지도자는 따르는 자의 육체와 마음과 영혼을 훈련하고 개발하도록 돕는 자이며 이는 주님의 소명에 걸맞는 성품을 쌓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지도자로서의 재능을 발휘하는 데 최선을 다했고 그로 인해 자족했고 마음의 평화를 얻은 사람이었다. 그는 진정으로 성공한 자였다.

2010-06-08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