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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고] '실천적 무신론자'

구약 성경 사무엘상서 2장은 경건하게 보이는 이스라엘의 제사장이었던 엘리 가문에 엄청난 비극이 일어났던 것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엘리의 사랑하는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여 엘리 가문의 대가 끊어지게 된 것이었다. 성경은 그 원인에 대해 엘리의 아들들이 "불량자로 살아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삼상 2:12). 엘리의 두 아들은 모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제사장이 되었기에 결코 지식적으로는 "하나님을 몰랐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이 그들에 대해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해 우리는 깊은 관심을 가지지 아니할 수 없다. 이 말의 뜻은 제사장이 되어 거룩한 옷을 입고 성전에서 종교의식을 집행하는 일을 한다고 해서 그가 언제나 하나님을 알고 믿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거룩한 회막 안에서 백성들이 드리는 제물에 손을 대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경멸하였고 심지어 회막 안에서 섬기는 여인들을 추행하기도 하였다. 한 마디로 그들 모두는 세습에 의해 제사장이라는 종교인이 되었지만 실제로는 무신론자처럼 살았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신론자는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이론적 무신론자'이며 또 다른 하나는 '실천적 무신론자'이다. '이론적 무신론자'들은 "자신들이 왜 무신론자일 수밖에 없는지" 이론의 체계를 세우고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설명을 들으면 무신론자들도 굉장한 설득력이 있는 것처럼 들린다. 칼 막스 같은 사람은 유물사관을 주장하는 자로 대표적인 이론적 무신론자의 범주 안에 있으며 철학자 니체도 "신은 죽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스스로 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론적 무신론자의 길을 걸었던 사람이다. 그 반면에 '실천적 무신론자'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잘 믿는 것처럼 말하고 때로 종교의식에 참여하며 경건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 그의 삶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간다. 너무 쉽게 거짓을 말하고 하나님이 보시지 않는 것처럼 상상을 초월하는 악을 행하면 살아간다. 오늘 날 이 시대의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 "혹시 나는 엘리의 두 아들처럼 교회 안에서 봉사는 열심히 하지만 직장이나 가정에 돌아가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실천적 무신론자를 양산하고 있지는 않는지" 깊이 고민하게 된다. 이 시대 교회의 비극은 교회 나가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가 문제가 아니다. 교회는 많고 교회에 열심히 나가는 사람들은 주변에 많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실천적 무신론자'들이 많기 때문에 일어나고 있다. 이런 엄청난 사실 앞에 이 시대의 교회는 주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다.

2010-08-10

[변화] 열공신앙과 실전신앙

요즘 한국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영어의 'Support'(지지후원하다)라는 말을 '좋아하는 연예인에게 선물을 준비해 준다'는 뜻으로 사용하며 이를 '조공'이라고도 부른다. 공식 팬클럽에서부터 소규모 모임 개인 등으로 서포트를 하는데 팬이 내는 비용은 보통 1인당 5000원에서 3만 원 정도. '서포트 문화'는 팬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로부터 가족과 같은 대우를 받기위해 생겨났다고 대중문화평론가들은 진단한다.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좋아하는 연예인에 대해 열심히 공부하며 그를 알기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그에 대해 열심히 공부를 한다고 해서 그를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가족처럼 그를 겪어보아야 그를 알게되기 때문에 서포트 문화가 더욱 활성화 되고 있는 것이다. 공부 좋아하는 우리 스타일(?)대로 최근 유행하는 신앙스타일은 '열공 신앙'이다. 강남에 유명 강사가 있는 학원을 찾듯 말씀 좋다는 목사가 있는 교회를 우르르 찾아 다니며 열심히 공부한다. 그 어려운 문제를 척척 풀어준다는 연봉 20억씩 버는 이른바 '스타 강사식' 설교도 목사들 사이에서 유행이다. 알레고리(비유상징적)적 해석과 각종 원어를 들먹이면서 될수있으면 어렵게 성경을 접근해서 쉽게 풀어주면 사람들은 열광한다. '말씀 좋은 목사님'이라고 소문이 난다. 그러나 그 좋은 말씀을 듣고 들어도 왜 하나님은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일까? 너무 크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일까? 기가막힌 설교를 많이 듣거나 여러 성경공부 코스를 수강해도 성경을 매일 읽고 묵상하면서 말씀이 지시하는대로 말씀을 겪으며 살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수가 없다. '제자훈련'만하고 움직이지 않으면 하나님에 대한 정보와 지식만 쌓여가는 것이다. '열공 신앙'은 우리의 머리와 귀만 커지게할 뿐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기위해서는 하나님을 삶에서 매일 경험하는 '실전 신앙'이 되어야한다. 간증이란 무엇인가? 죽었다가 살아난 기적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하나님을 일상에서 체험하는 생생한 얘기들이다. 말씀을 일상에서 겪는 간증있는 삶을 매일 살아야 한다.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6:3)

2010-08-10

[사목의 향기] 제 갈길 묵묵히 가며 도전해야

알래스카 타키트나 마을의 조용한 숲 속에서 젊은 두 청년을 만났다. 그들은 고상돈(30)이일교(24)이다. 대한민국 청년 고상돈은 한국인 최초로 1977년 9월 15일 에베레스트를 등정했다. 그는 다시금 새로운 도전을 위해 동료 이일교와 더불어 해발 6194 미터의 맥킨리봉 원정을 떠난다. 그리고 두 사람은 1979년 5월 29일 등정 후 하산 도중 1000 미터 아래로 추락한다. 77 K.E.E.(Korea Everest Expedition.대한민국 에베레스트 원정대). 2002년 우연히 발견된 77 K.E.E! 그들이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뒤 북미에서 가장 높은 디날리 산맥의 최고봉 맥킨리봉을 오르며 가져왔던 깃발이다. 그들의 산 여정과 함께 했던 깃발이 뜻하지 않게 발견되었던 것처럼 또 그들을 기리는 추모비와 그들의 삶의 여졍을 전혀 모르던 사람이 그들을 만났다. 젊은 시절 산이 좋아 산 사나이란 별명을 좋아했지만 진짜 멋진 산 사나이들을 먼 이녁 하늘 아래에서 만나다니 너무나 감개무량하다. 먼저 간 동료들을 기리기 위해 히밀라야 정상 에베레스트에 '성경'과 '동료사진'을 묻으며 "여기는 정상! 더 오를 곳이 없습니다!"라고 외친 고상돈 청년의 꿈과 동료애 그리고 도전! 젊은 한 때 제 갈 길을 가고 오를 길을 오른 가장 진솔한 발걸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으로 그들이 꿈꾸던 길을 삶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던 그들의 여정은 비록 우연한 만남이었지만 분명 나에게 새로운 영감과 힘을 준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억지로 찾아가는 것 만이 새로운 도전은 아닐 것이다. 이미 누군가 그 길을 걸어가지만 가끔은 지쳐서 혹은 삶의 이런 저런 이유로 기운이 빠지고 혹은 걸어가는 길이 너무나 익숙하여 아무런 의욕이 생기지 않을 때 우리들은 지칠 수 있다. 이런 우리에게 두 등반가의 삶은 우리에게 치유적인 메시지를 던져준다. 사람들은 저마다 가야할 길이 있겠지만 산이 있어 산에 오르고 물이 있어 물을 건너고 해야 할 일이 있어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축복이다. 가톨릭 사제로서 "오늘도 내일도 또 그 다음 날도 계속해서 나의 길을 가야한다"(루카 1333)는 스승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해야 할 생각 말 행동 속에서 갈 길을 제대로 걸어갈 것을 다짐해 보고 맥킨리와 에베레스트의 산 사나이가 된 고상돈 청년처럼 새로운 도전을 꿈 꿔 본다. 제 갈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모든 발걸음에 축복이 함께 하길 바라며.

2010-08-10

[지혜의 향기] 죽고 나서도 돌고 도는게 인생사

한참 전 일이지만 조영남이 불러서 히트 한 노래 가운데 돌고 도는 물레방아 인생 어쩌고 하는 흥겨운 외국 노래가 있었다. 인생이란 돌고 돈다. 지금이 다가 아니다. 부자가 가난뱅이가 될 수도 있고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 이런 노래가사를 흥얼거리면 자신의 현재 위치가 영 못마땅하고 처지가 불행하다고 느껴 울적해진 기분 같은 것을 일시적이나마 덜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인생사라는 것도 다 살아 있을 때 얘기다. 죽어 버린다면 그 다음엔 어떻게 될까? 그리고 살아 있을 때를 보더라도 꼭 물레방아처럼 되는 것은 아니다. 팔자 좋은 친구는 끝끝내 팔자가 늘어지고 안 되는 친구는 지지리 궁상만 떨다가 삶을 마감하는 일도 많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 조영남의 노래는 그저 듣기 좋자고 흥얼거리는 마취제에 불과한 것일까? 이럴 땐 천생 부처님께 여쭙는 수밖에 없다. 부처님이야말로 그 열 가지의 별호 중에 하나가 가리키듯 정변지 곧 세상 이치를 두루 아시는 분이 아니시던가! 그 분의 가르침은 이러하다. 살아 있는 인생사만 삐걱삐걱 돌고 있는 게 아니다. 죽고 나서도 돌고 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죽음이란 없다. 싫어도 곧 어딘가에 다시 태어난다. 그런데 죽고 나서 다시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보장은 없다. 인간의 아래 세상으로는 차례로 아수라 축생 아귀 지옥이 있다. 아수라는 힘세고 능력은 있지만 서로 늘 으르렁거리며 싸움판이 벌어지는 곳이다. 싸움 좋아하는 친구들이 예약해 놓은 곳이다. 그리고 짐승 같은 마음을 품고 짐승 같은 행동을 하면 곧바로 축생의 세계로 직행할 수 있다. 아귀는 늘 배가 고파 못 사는 곳이니 남의 밥 빼앗은 자가 가야 할 곳이다. 지옥은 말 그대로 땅 속의 감옥 같은 곳인데 최신식 찜질방은 저리 가랄 정도로 여러 방으로 나뉘어져 있어 죄과에 따라 조금도 에누리 없이 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인간 세상 위로는 천상인데 불교의 하늘나라는 단순하지가 않다. 고층 아파트처럼 28층으로 돼 있다. 1층부터 6층까지는 저 아래 지옥에서부터와 마찬가지로 욕계에 속한다. 욕망이란 참 무섭다. 하늘나라도 아랫도리는 욕망에 젖어 있다니. 그 위의 열여덟 층은 색계에 속한다. 욕망은 떨쳐 버렸지만 물질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는 곳이다. 그리고 25층부터 맨 위층까지 네 층은 무색계다. 정신만이 남아 있는 깨끗하고 자유로운 세계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땅 속 지하층으로 내려가기보다는 고층 아파트로 오르려 할 것이다. 어떤 입주 자격을 갖추고 어떻게 청약을 해야 하며 맞돈 주고 사려면 프리미엄은 얼마일까? 혹시 재건축은 하지 않을까? 그런 것 없다. 오로지 우리가 하는 짓거리 즉 오랜 전생에서부터 이때까지 세세생생 쌓아 온 업과 지어 온 공덕에 의하여 점수를 보태거나 까먹고 남은 그 알짜배기 점수를 가지고 공평하게 위로 아래로 한 계단 한 계단 결정 된다. 몸이 한 짓거리 입이 한 짓거리 그리고 내 생각이 한 짓거리의 총합 점수다. 하지만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처럼 아파트 맨 꼭대기 층에 입주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서도 자칫하면 미끄러져 내려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천상에서부터 지옥까지 여섯 영역의 세계를 돌고 도는 이 삶과 죽음의 고리를 아예 벗어나 아파트고 뭐고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날아가 버리는 것이 목표다. 즉 하늘나라가 목표가 아니라 하늘마저 떠나 버리는 영원한 해탈이 수행의 마지막 목표인 것이다.

2010-08-10

[변화] 로맨스보다 언약

구약시대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고 복 받을 사람들에게 언약의 증표를 갖도록 요구하셨다. 이 증표 중에 하나가 할례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99세에 할례를 행할 것을 명하셨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요단을 건너자마자 모두가 약속의 증표를 받도록 명하셨다. 그들은 약속의 증표를 가지고서야 가나안을 향해 진군했다. 왜 하나님은 인간에게 언약의 증표를 남기기를 원하신 것일까? 하나님을 위해 언약의 증표를 요구하신 것이 아니다. 인간을 위한 배려였다. 인간은 기억력도 짧지만 늘 감정대로 기분대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기분 좋을 때는 세상을 다 뒤집을 듯 열정적으로 움직였다가 기분 잡치는 일이 생기면 금방 딴 사람이 된다. 요즘 '사랑'이라는 감정 없이 결혼하는 사람은 없다. 사실 인류사에서 로맨스가 결혼의 전제조건이 된것은 얼마 안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영원히 꺼지지 않을듯 '불타는 로맨스'로 결혼을 하고나서부터는 한집 걸러 한집이 이혼을 한다는 사실이다. 로맨스 전에는 무엇으로 결혼했는가? 약속으로 했다. 결혼식날 처음 서로를 보았지만 '언약'으로 굳게 맺어진 결혼은 '로맨스'보다 훨씬 더 생명력이 강했다. 하나님은 불안정한 '감정'이 아니라 '언약'으로 인간을 대하신다. 옆에 있는 성도가 꼴보기 싫고 목사가 미워졌다고 교회를 옮기는 사람을 너무나 많이본다. 목사와 성도사이가 '언약'이 아니라 '감정'에 휘둘릴 때 교계는 더욱더 분열로 몸살을 앓게될 것이다. 목사들 사이에서는 공항에 처음 영접나온 사람을 조심하라는 속설이 있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목사를 섬겼다가 로맨스에 금이 가면 금세 원수로 돌아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도 감정이 아니라 언약에 근거해 사랑하신다. 어리석은 짓만 골라서 하고 새까만 죄를 지을 때도 분노의 감정이 아니라 '언약'으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다. 하루에도 열두번 롤러코스터를 타는 '감정'이 아니라 '언약'으로 사랑하자!

2010-08-03

[성서인물열전] 나오미와 룻, 이상적인 시어머니와 며느리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 즉 고부(姑婦) 간의 갈등은 가정불화 원인의 3위를 차지할 만큼 여전히 고질적인 사회병폐 가운데 하나이다. 더군다나 한국 농촌 남자들에게 시집 온 동남아 신부들이 온갖 학대를 당하는 기사를 심심찮게 본다. 구약성서는 타국의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에서 꽃 핀 한 편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시어머니 나오미와 며느리 룻의 이야기가 그러하다. 나오미의 애환서린 이력은 이러하다. 그녀가 모압 지방으로 이민간지 얼마 후에 그녀의 남편인 엘리멜렉이 죽고 두 아들인 말론과 기룐과 함께 남게 되었다. 그리고 그 두 아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아내를 취하여 결혼하였는데 그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또 하나의 이름은 룻이었다. 나오미의 불행은 거기에서 멈추지 아니하였다. 그곳에 거한지 십 년 즈음에 나오미는 두 아들의 시신을 하늘이 무너지는 애절한 심정으로 거두어 마음에 묻어야 했다. 고대 근동사회에서 여인들의 보호자는 결혼 전에는 아버지요 결혼 후에는 남편이요 남편이 떠난 늘그막에는 아들이었다. 나오미는 자신을 보호해 줄 모든 안전장치가 제거되었으니 가장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그러기에 나오미는 자신과 같이 이제는 홀로된 두 자부를 "내 딸들아"라고 다정하게 불러서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권하였다. 평생 과부로 사느니 고향 땅 모압에서 새 출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려는 나오미의 애정 어린 배려가 아니겠는가? 시어머니 나오미의 세 번째 설득에 룻은 진실된 효심으로 다음과 같이 청한다.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는 곳에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사랑은 '내리사랑'이라 했는가? 어쩌면 룻의 시어머니에 대한 구구절절 효심어린 고백은 언제나 딸처럼 대했던 나오미의 사랑에 대한 메아리가 아니겠는가? 나오미의 계보를 통해 예수님이 탄생하셨으니 나오미와 룻의 사랑은 결국 보다 큰 하나님의 사랑을 위한 전주곡이 된 셈이다.

2010-08-03

[특별기고] "주님은 나의 생수통"

나는 요즘 어머니들만 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성경 공부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그 모임에서 '주님은 나의 OO이다'라는 명제를 놓고 빈 칸을 채워 넣는 시간을 가진 적이 있었다. 먼저 어떤 어머니가 학창 시절 자신의 슬픔과 기쁨.분노와 좌절을 고스란히 받아주었던 그 자리와 거기에서 늘 눈물범벅이 된 채로 만났던 주님을 기억하면서 '주님은 나의 버스 뒷좌석'이라는 고백을 하였다. 남편과의 관계에 어려움을 안고 있는 어떤 어머니는 '주님은 나의 생명줄'이라며 눈시울을 붉혔고 고달픈 이민 생활에 지쳤다는 또 다른 어머니는 '버팀목'이라는 단어를 채워 넣었다. 이른 아침에 나가 늦은 밤에야 돌아오는 남편을 기다리며 종일토록 어린 아들과 씨름한다는 젊은 엄마는 '주님은 나의 활력소'라는 고백을 하였고 오랜 타국 생활 덕분인지 누군가가 '주님은 나의 된장'이라고 고백할 때는 모두 공감의 웃음보를 터트리기도 햇다. 나는 '주님은 나의 생수통'이라는 고백을 했다. 수년 전 북인도로 단기 선교 여행을 갔을 때 혹독한 무더위에서 나를 살려준 생수통이 생각나서였다. 너무나 습한 더위 때문에 오히려 온 몸을 덮는 옷을 입어야 했는데 그래도 팔은 새까맣게 그을렸었다. 그 당시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네들이 주는 식수에는 백발백중 탈이 났던 탓에 귀하게 구하게 된 1리터짜리 생수통을 들고 다녔다. 나는 그 생수통이 나를 살린다는 생각에 무겁다는 생각도 잊은 채 온 산지산천을 그 통을 끼고 다녔던 것이다. 이런 고백들이 주님을 너무 폄하하는 표현이라 말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개개인이 쏟아내는 주님을 경험한 귀한 스토리들 하나 하나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겠다. 이러한 고백이야말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만나는 생생한 성경 이야기가 아닌가. 어머니들의 이런 고백들이 야곱이 말한 '베델의 하나님'과 다름없는 현대판 고백이라 한다면 너무 지나친 생각일까. 베델에서 하나님을 만난 야곱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베델의 하나님을 기억했으며 그곳으로 돌아갔고 거기서 새로운 시작을 하였다. 어쩌면 오늘 이들의 고백 또한 그러한 역할을 할 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주님에 관한 온갖 고상하고 거룩한 표현보다도 투박한 어머니들의 이런 고백들이 내게 더 감동을 주는 것이다. 사실 성경은 초라한 우리네 이야기를 보태지 않아도 그 자체로 이야기가 넘쳐나는 책이다. 그렇지만 성경은 대하면 대할수록 이상하게도 끊임없이 새로운 성경 이야기를 우리에게 요청한다. 그것이 성공 사례인지 실패 사례인지는 중요치 않다. 성경은 주님과 함께 한 나 자신의 이야기가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 들은 색다른 주인공들의 새로운 성경 이야기는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 같다.

2010-08-03

[사목의 향기] 재물 멀리하고 하느님 섬겨야

수년 전에 성당을 짓게 될 일이 있었다. 너무 막연한 일이었지만 하느님께서 도와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일을 시작하였다. 여러 가지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건축비가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여러 성당으로 다니면서 강론을 통하여 신자들의 도움을 청하였고 물건을 팔면서 건축비를 모았다. 그리고 아는 신자들에게 개인적으로 도움을 청하기도 하였다. 성전건축을 계획하던 저에게 이미 성전을 지어본 경험이 있던 동료 사제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모금을 하다보면 누가 내 편이고 누가 반대편인지를 알게 됩니다." 처음에는 이 말뜻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지만 모금을 하고 성당을 지으면서 그 말뜻을 차츰차츰 알게 되었다. 평소에 그렇게 자주 만나자고 하고 저녁식사와 술자리를 가졌던 신자들에게서는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였다. 반면에 평소에 잘 모르던 신자들로부터는 기대 이상의 도움을 받았다. 내가 어렵고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주는 사람이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남의 속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재물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이다. 어느 정도가 필요한지를 말할 수는 없지만 재물이 없어서 괴로워하고 이를 비관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있으니 재물이 어느 정도 필요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성경은 재물이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말하면서도 재물이 영원한 생명의 길로 가는 구원의 길에서 크나큰 걸림돌임을 경고하고 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524)라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일찍이 경고하지 않았던가? 또한 부자청년의 이야기를 통해서 재물이 영원한 생명의 길에서 얼마나 큰 걸림돌인지를 알려주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복음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마음에 잘 새기지 않는다. 복음의 말씀과 세상의 가치는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복음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마음이 부족한 것이다. 우리는 그만큼 세상에 팽배한 물질주의 물질이 사람보다 더 인정받는 사고에 젖어서 사는 것이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지향하는 사람들이다. 영원한 생명은 복음대로 살 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이 복음화되고 복음화된 우리의 삶이 세상을 바꾸어 나가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우리 신앙인들을 바로 그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해야 하는 우리들이 세상의 가치관인 재물이라면 무엇이던지 할 수 있고 재물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면 어떻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늘 계산을 하면서 살고 있다. 앞뒤를 재고 나에게 돌아올 이익이 무엇인지를 계산하면서 행동한다. 이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라면 적어도 신앙생활을 하면서는 이러한 방법을 버려야 한다. 계산을 하면 믿고 맡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은 하느님께 의탁하고 맡기는 것이다. 우리가 넘어야 할 것은 결국 나의 머리 나의 계산 나로부터 나오는 그 모든 것들이다. 이것을 버리지 못할 때 우리는 하느님이 아니라 결국 나를 섬기고 재물을 섬기는 것이다. 그러면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뻔뻔하게 자랑하게 된다. 우리는 늘 살면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루가 1216)를 기억해야 한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2010-08-03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바라는 마음' 내려놓기 힘듭니다

저는 16살 고등학생입니다. 저는 욕심도 많고 질투심도 많고 바라는 마음도 굉장히 많아요. 그럴수록 제 자신이 힘들다는 걸 알면서도 바라는 마음을 내려놓기가 힘듭니다. 그걸로 인해서 인간관계나 학업 다른 활동에서도 심하게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감정기복도 굉장히 심해서 스님께 질문합니다. 어떻게 하면 제 마음이 조금 편안해질 수 있을까요? 여기 뜨거운 불덩어리가 있는데 이걸 집고서 "어떻게 하면 놓습니까?" 하고 묻는 것하고 똑같습니다. 뜨거워 죽겠어요 어떻게 놔요? 답은 "그냥 놔라". 나도 모르게 뜨거운 물건을 집었다가 엇! 뜨거! 이러면서 그냥 내려놓잖아요. 근데 이걸 쥐고 뜨겁다 고함치면서도 어떻게 놓느냐고 자꾸 묻는 것은 두 가지 이유입니다. 하나는 덜 뜨거워 아직 쥐고 있을 만하든지. 또 하나는 뜨겁지만 갖고 싶든지. 그러니까 첫 번째는 덜 뜨거우면 좀 더 뜨거울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고 두 번째 정말 못 견딜 정도로 뜨겁다고 하면서도 갖고 싶어 쥐고 있다면 손을 데는 과보를 받아야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손은 또 안 데고 갖고 싶다 아닙니까? 하지만 그런 길은 없습니다. 갖고 싶거든 손 데는 과보를 받든지 손 데는 과보를 받기 싫거든 갖고 싶더라도 놓던지. 그 외에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묻는 것은 이것도 가지면서 손도 안 데는 기막힌 방법은 없나 해서 아닙니까? 기막힌 방법을 가르쳐줄 수는 있습니다. 오른손에 쥐고 있던 걸 왼손으로 옮기면 우선 뜨거운 게 해결이 됩니다. 또 왼손에 쥐고 있으니 내가 가지고 있습니다. 갖기도 하고 뜨거운 것도 해결됐단 말예요. 좋은 방법이다 싶겠지만 조금 있으면 또 왼손이 뜨거워집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오른쪽 무릎 위에 놓으면 됩니다. 그리고 또 조금 있다 뜨거우니까 왼쪽 무릎에 놓습니다. 이것은 얼핏 보면 좋은 방법 같지만 이건 방법이 아닙니다. 방법을 계속 찾는 것은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놓기 싫다는 것입니다. 결혼해서 사는 분들 중 자식까지 완전히 애를 먹이고 달리 더 이상 방법이 없어서 온갖 방법 다 해보고 안 되서 오는 사람들은 금방 내려놓습니다. 왜? 더 이상 하루도 견디기가 어려우니까요. 아침에 4시에 일어나기로 했다면 그냥 일어나는 거예요. 눈이 감겨도 일어나고 안 일어나져도 무조건 일어나는 겁니다. 몸이 말을 안 들어요 피곤한데요. 이런 얘기 할 필요 없습니다. 정해놓고 그냥 하는 겁니다. 차선책은 욕심은 못 내려놓더라도 욕심 부리는 나를 알아차리는 겁니다. 그럼 다음에 무슨 과보가 따르겠구나 미리 짐작하는 거예요. 과보가 일어날 때 이미 짐작을 했기 때문에 충격이 덜 옵니다. 사촌 논 사면 배 아픈 거 자기가 보잖아요? 그럼 나 좋은 일 생길 때 남도 배 아프겠다 짐작이 됩니다. 내가 받아야 될 과보가 있다면 한꺼번에 다 와라. 어차피 받을 거 피해 다닐 거 뭐 있어. 이렇게 대담해야 합니다. 다시는 안 하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인생에 변화가 옵니다. 지금까진 이렇게 살았다 하더라도 앞으로는 이렇게 안 살아야지. 이런 결단이 필요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발심을 해서 정진을 해봐요. 자꾸 안 된다 그런 소리 하지 말고. 안 되는 건 없어요. 해버리면 됩니다.

2010-08-03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수행자가 '부처의 알' 품는 법

# 풍경 1 : 절집의 '용맹정진'을 아시나요? 하안거나 동안거 때 1주일간 잠을 한숨도 자지 않고 버티며 좌선을 하는 겁니다. 쉽지 않은 일이죠. 그래서 쏟아지는 잠을 쫓느라 온갖 풍경이 벌어지곤 합니다. 어떤 이는 한겨울 눈밭에 나가서 뒹굴기도 합니다. 그렇게 '용맹정진'을 통과하면 사람들은 뿌듯해 합니다. 마치 해병대의 1주일 지옥훈련을 통과한 사람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용맹정진'을 철마다 한다는 사람들 얘길 들어보면 참 애매합니다. 저마다 "어떻게 졸음을 이겼는가?" "어떻게 잠을 안 자고 버텼는가?" 등 무용담처럼 늘어놓죠. 반면 수행의 진척을 말하는 사람을 만나긴 참 어렵습니다. "수행에 대한 속살림은 각자의 몫"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까요? 궁금하더군요. 진짜 '용맹정진'이 무엇인지 말이죠. # 풍경 2 : 화엄경 현수품의 한 대목입니다. "또 광명을 놓으니 이름이 용맹(勇猛)이라/이 빛이 게으른 자를 깨우쳐서/저로 하여금 삼보 중에 공경하고 공양하여/피로하고 싫어함이 없게 하느니라." 그렇군요. '용맹'은 게으름 없이 쉼 없이 공(空)에다 놓고 놓으며(공경하고 공양하며) 가라는 말이군요. 그럴 때 용맹에는 피로함도 싫어함도 없다는 거죠. 예를 들어볼까요. 우리가 정말 좋아하는 일이나 취미를 위해 밤을 샐 때 피로한가요? 싫증이 나나요? 그렇지 않죠. 오히려 즐겁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게 되죠. 그게 바로 '용맹'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용맹!"하고 힘을 줍니다.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움켜쥐죠. 그리고 거대한 철벽을 뚫어야 할 사람처럼 생사의 결전을 눈앞에 둔 사람처럼 긴장하죠. 한판 싸움 용맹이란 이름에 마음이 '착!'하고 달라붙고 마는 겁니다. 머물고 마는 거죠. 그렇게 마음이 머물면 알을 품기가 어렵습니다. 화두를 품기가 어렵다는 말이죠. 설사 화두를 품는다 해도 부화가 안 되죠. 왜냐고요? 알을 품을 때는 적정한 온도와 적정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화두도 마찬가지죠. 어미 닭이 알을 품을 때 어떤 마음으로 품을까요? "내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알을 부화시키고 말 거야"라며 목에 힘을 주고 다리에 힘을 주고 가슴에 힘을 주고 알을 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자연스런 마음으로 자비로운 마음으로 알을 품죠. 그럴 때 품 안에서 온기가 올라옵니다. 왜냐고요? 편안한 마음 즉 머무는바 없는 곳에서 '부화의 에너지'가 올라오기 때문이죠. 편안하게 차분하게 끊김 없이 그 물음을 좇아서 내려갈 때 비로소 우리는 '부처의 알'을 품게 되죠. 살아 숨 쉬는 화두를 품게 됩니다. 그게 바로 용맹정진이죠. 2500년 전 붓다도 그랬습니다. 그는 하루에 곡식 한 톨만 먹으며 고행을 하기도 했죠. 등뼈에 손을 대면 뱃가죽이 만져졌다고 합니다. 결국 목숨을 잃기 직전에 고행을 중지했죠. 그리고 한 여인이 공양한 우유죽을 먹습니다. 함께 고행하던 동료는 그를 "배신자!"라고 불렀죠. 그러나 죽을 먹고 기운을 차린 붓다는 새로운 마음으로 자리에 앉습니다. 그게 무슨 마음일까요? 편안한 마음 자연스런 마음 자비로운 마음이죠. 그 마음으로 붓다는 알을 품었습니다. 그리고 새벽 별을 바라볼 때 품던 알이 부화했죠. 깨달음을 이룬 겁니다. 붓다는 이미 보여줬죠. 어떤 온도로 어떤 마음으로 어떤 알을 품을 건가.

2010-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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