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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첫 업소록, 50년전 우리를 만나다

여기 오래된 책 한 권이 있다. UC리버사이드 도서관에서 입수한 ‘한인록’이다. 반세기 전인 1972년 발간됐다. 최초의 한인 업소록(옐로 페이지)으로 인명별 전화번호부(화이트 페이지)까지 합본 인쇄됐다. 출간사에 따르면 ‘나성지역 교민 수가 4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지난해 센서스 통계에서 LA와 OC의 한인 인구가 혼혈을 포함해 34만명을 넘고 가주 전체는 55만명, 전국적으로는 196만명에 이르니 상전벽해가 따로 없다. 현재 업소록의 시조 격인 당시 한인록에는 이민 선배들의 삶의 모습이 그대로 투명 돼 있다. 우여곡절 끝에 시작한 업소록은 발전을 거듭해 본지가 펴낸 2022년 ‘중앙일보 업소록’에 오른 한인 업소는 2만4500개 이상으로 크게 늘었다. 역사서로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 한인록에서 출발한 업소록은 매년 전수조사를 통해 가장 생생한 모습으로 한인사회를 보여주고 있다. 중앙일보는 1974년 오늘(9월 22일) 창간한 뒤 한인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하며 한인 여론을 선도했고, 한인들에게 양질의 광고 기회를 제공하며 동반 성장했다. 특히 업소록은 한인 비즈니스와 한인 고객을 연결하는 통로로서 어느 곳을 가든지 항상 눈에 보이는 자리에서 한인들의 손길을 기다리며 한결같은 모습으로 본분을 다해왔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삶의 터전을 지키고 결실을 이뤄낸 한 사람 한 사람 한인들의 뚝심이 이런 든든한 파트너십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미주 한인사회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중앙일보는 자만하지 않고 항상 독자들의 직언·직설을 새겨들으며 한인들이 원하는 뉴스를, 한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전달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빠르게 디지털 시대로 전환하는 가운데 업소록도 2010년 첫 모바일 앱을 선보인 후 누적 기준 20만 다운로드 이상을 기록할 정도로 인기를 끌며 전국적으로 6만2000개 이상의 업소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중앙일보는 한인 언론사 중 유일하게 토요일도 종이 신문을 발행하고 있으며 웹사이트(koreadaily.com), 모바일 앱과 유튜브 채널(미주중앙일보)을 운영한다. 특히 MZ세대 문화소통 채널로서 유튜브·인스타그램·틱톡(@katchup_official)을 통해 차세대까지 품겠다는 비전을 실천해 나가고 있다. 창간 48주년을 맞은 중앙일보는 한인들과 긴 세월 함께 해온 업소록을 통해 한인사회의 발전상을 재조명한다. 1972년 한인록을 시작으로 25년 후인 1997년의 중앙일보 업소록과 다시 25년을 건너뛴 올해 업소록까지 한인들의 삶의 흔적이 그대로 묻어있는 소중한 자료와 업주들의 이야기, 독자들이 느낀 감회까지를 다채롭게 담았다. 관련기사 315페이지에 담은 50년 전 한인 역사 LA한인회 역사…반세기 세월 넘어 한인사회 대표 단체로 한인 업종 변화…식당 다양해지고 전문직은 더욱 세분화 독자 인터뷰…"읽을거리 없다는 말 듣지 않게 해달라" “업소 장수 비결은 고객서비스와 신용” “중앙일보 광고와 25년 영업 함께 했죠” “가족은 나의 힘…전국 최고 딜러로 우뚝 서겠다” “3대째 가업 잇는 자부심으로 진료합니다” 타운 경제의 산 역사, 디지털로 거듭난다 류정일 기자창간특집

2022-09-21

LA한인회 역사…반세기 세월 넘어 한인사회 대표 단체로

LA한인회는 누가 뭐래도 한인사회 대표기관이다.   1대 회장단부터 현 35대 회장단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한인 인사가 몸담고 일하며 한인사회 발전에 기여했다. 한인사회에서 가장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단체로도 알려졌다. 이는 그만큼 한인회가 한인사회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중요하고 크기 때문이다. 한인회 공식 홈페이지(kafla.org)에 따르면 한인회는 주류사회와 한인사회 연결, 한인 권리와 공익 보호, 이민자 지원서비스, 분쟁 해결 및 중재 차세대 한인 지도자 양성에 나선다. 이 밖에 소비자 관련 문제 상담, 통역 및 서류작성 지원, 차세대 한인 지도자 양성, 정보제공 및 확인, 고용추천, 법률 및 사회복지 제도 상담, 세미나 및 워크샵, 사회복지 신청 지원 서비스를 제공한다.   어느새 한인회는 60주년을 맞이했다. 한인회의 역사를 돌아본다.     1960년대: 유학생 중심으로 태동해 한인센터와 통합   1970년대: 건물 구입하고 주류사회와 본격 교류 시작 1980년대: 회장선거 문제 등으로 내분 겪으며 갈등 심화 1990년대: 한인사회와 협력해 동포 특례법 제정에 앞장 2000년대: 한때 협회 갈리고 29~35대 회장 무투표 당선 2010년~: 진정한 봉사기간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총력     ▶1965년 태동 한인회는 원래 유학생 출신이 주축이었다. 1965년 5월 1일 결성한 ‘남가주 한인회’로 출범했다. 당시 LA 한인 인구는 유학생이 대부분이었다. 남가주 한인회 창립멤버는 한국에서 유학 와 1960년대 초반 UCLA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조용삼씨, 육사 교관 생활을 접고 1956년 텍사스 주립대로 유학 왔던 이경동씨, 역시 유학생 출신의 김하태 목사, 애국부인회 회장을 지낸 이화목씨, 한인타운에서 주유소를 운영했던 송영창씨, 송씨 처남으로 의사였던 김창하씨, 그로서리 가게를 운영했던 유재신씨 등이 있었다.   남가주 한인회 설립 목적은 이보다 3년 먼저 창립한 ‘남가주 한인센터’(이사장 김호·회장 송철, 1962년 6월 비영리법인 등록) 지원 성격이 강했다. 한인센터는 1963년 2525 버논 애비뉴에 7만 달러를 주고 매입한 자체 건물이 있었으나 재정난으로 융자금 상환이 어려워 1967년 6월에 매각했다. 여기서 남은 4만 달러는 ‘건물 매입 때에만 사용한다’는 조건 속에 센터기금 관리위원회로 넘겨진 뒤 나중 현재의 한인회관 매입 때 종잣돈이 됐다. 회관 매각은 한인센터와 한인회 통합 계기가 됐다. 1968년 1월 남가주 한인회와 한인센터는 ‘재미한인거류민회’로 통합했다. 재미한인거류민회는 1972년 남가주한인회로 명칭을 변경했고 1982년부터 LA한인회가 공식명칭이 됐다.     ▶1970년대 초반 정착기 1960년대 후반 한인사회에는 가발 업이 붐이었다. 또 국적 항공사의 LA 취항과 함께 본격적인 한인 이민자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1971년 4대 회장 선거에서 소니아 석 여사가 박준환 후보를 누르고 선출돼 최초의 여성 한인회장이 됐다. ‘여장부’로 알려진 석 회장은 부동산업에 종사했다. 하지만 이사진과의 불협화음으로 임기 3개월을 앞두고 자진해서 사퇴해 5인 대책위가 잔여 임기를 채웠다. 1972년 5대 회장 조지 최씨는 한인 부동산 업계 대부였다. 훗날 한인회관 건물 매입에도 깊이 관여했다. 최씨의 뒤를 이은 6대 회장 김종식씨는 한국화약 집안 출신이었다. 그는 회장직을 마친 뒤 귀국해 유정회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했다. 한인회장 출신 정치인 1호다.   ▶1970년대 중반 도약기 1974년 11월 16일과 17일 양일간에 걸쳐 실시된 7대 한인회장 선거에 양회직씨가 차기 회장으로 선출했다. 양 회장은 취임 직후 한인회관 매입에 박차를 가해 1975년 10월 8일 30만 달러 매입 절차를 마무리했다. 11월 22일에 역사적인 개관식을 가졌다. 현 한인회관 건물 구매를 둘러싼 유명한 일화가 있다. 1971년 4대 회장 소니아 석 여사가 1975년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각하, 한인회관 마련을 위한 돈 좀 주세요”라고 요청해 지원을 받아냈다. 석 여사 배포에 깊은 인상을 받은 박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15만 달러 지원을 약속했다. 이후 석 여사를 위원장으로 한인회관건립위원회가 구성돼 건물 물색에 나섰다. 당시 위원회 구성원 중 조지 최 전 회장은 웨스턴가의 현재 건물을, 석 여사는 윌셔가 건물, 상공회의소 측은 7가와 알바라도 길 건물을 원하는 등 의견충돌이 일어났다.   양회직 회장은 당시 LA총영사였던 박영씨에게 도움을 청했다. 박 총영사는 석 여사 등을 설득해 웨스턴가 건물 매입을 결정했다. 이후 30만 달러에 매입이 완료됐다.   ▶주류사회와 교류   1975년은 LA한인회가 최초로 LA 시장실과 공식 채널을 만든 해다. 주류사회와 첫 교류였다. 당시 양회직 회장은 LA 최초 흑인 시장 톰 브래들리와 만난 자리에서 LA에 한인이 약 8만명 거주한다며 시 차원의 관심을 촉구했다.   ▶1980~90년대 격동기 1980년대는 한국 민주화 운동 열기와 맞물려 한인회도 변화와 갈등의 시기를 겪었다. 12대 이민휘 회장은 친 박정희파로 분류돼 야당 지지자들과 대립했다. 또 12~15대 한인회는 잦은 내부 갈등과 부정선거 여파로 사실상 업무중단 사태에 빠졌다. 1984년 LA올림픽 때 한인사회가 한국 대표선수단을 지원하며 한인회도 힘을 보태 정상화되는 듯했다. 하지만 1987년 18대 회장 선거 당시 투표소에 경찰이 출동하는 등 갈등은 점차 심화했다.   이때부터 ‘LA한인회는 논란단체’라는 딱지가 붙었다. 툭하면 권력싸움을 하는 분열단체 이미지가 부각됐다. 한인사회 대표 단체장이 되기 위한 경쟁이 극에 달하면서 선거철마다 극심한 갈등을 겪었다. 1992년 폭동 당시에는 특별히 한 게 없다는 비판을 받았다. 20대 이종원 회장과 21대 김영태 회장은 21대 회장직을 놓고 소송전을 벌였다.   21대 김영태와 22대 장성길 회장은 퇴임 후 한국 국회의원 도전에 나섰지만 낙선했다. 1998년 24대 서영석 회장은 한인사회와 합심해 한국 국회에서 ‘재외동포 특례법’이 제정되도록 앞장섰다.   ▶21세기 한인회 2000년대 한인회는 회장 선출을 둘러싼 분쟁의 연속이었다. 2002년 26대 회장 선거는 출마 후보 간 자격 논쟁이 있었다. 28대 회장 선거 이후 한인회선거관리위원회는 매번 공정성 시비에 휘말렸다.   2010년 30대 회장 선거 때는 결과에 불복한 박요한씨가 다른 한인회를 출범하는 유례없는 해프닝을 벌였다. 결국 법원 판결에 따라 스칼렛 엄 회장이 이끌던 한인회가 계속 인정됐다. 29~35대 한인회장은 모두 무투표 당선돼 논란이 됐다.   ▶한인회의 미래 제임스 안 35대 회장은 최초의 풀타임 한인회장 기록을 세웠다. 봉사직이지만, 팬데믹으로 인한 한인들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봉사개념을 넘어 책임감을 갖고 SBA, EDD 등 전문적인 서비스를 직접 제공하기 위해 이사회에서 급여 개념 회장(CEO) 시스템을 정착했다.  안 회장은 “영어가 불편한 한인 분들은 무조건 한인회에서 도움받아야 한다. 언어 문제로 정부 재정 지원을 놓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면서 "팬데믹 기간에도 한인회를 통해 재정 지원을 받은 분이 무수히 많았다. 한인회는 앞으로도 계속 주류사회는 물론 다른 소수계 커뮤니티와도 연대를 강화해 중요한 정보를 상호교류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관련기사 315페이지에 담은 50년 전 한인 역사 LA한인회 역사…반세기 세월 넘어 한인사회 대표 단체로 한인 업종 변화…식당 다양해지고 전문직은 더욱 세분화 독자 인터뷰…"읽을거리 없다는 말 듣지 않게 해달라" “업소 장수 비결은 고객서비스와 신용” “중앙일보 광고와 25년 영업 함께 했죠” “가족은 나의 힘…전국 최고 딜러로 우뚝 서겠다” “3대째 가업 잇는 자부심으로 진료합니다” 타운 경제의 산 역사, 디지털로 거듭난다 1972년 첫 업소록, 50년전 우리를 만나다 원용석 기자창간특집 한인회 한인회관 매입 약속 la한인회 한인회 역사

2022-09-21

'한국인의 보약' 설렁탕으로 뉴욕 문화 살찌우다

'물 좀 주소' '행복의 나라로' 등 1970년대 한국인들의 가슴에 깊은 울림을 남긴 '한국 포크록의 대부' 한대수는 뉴욕에 살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한대수의 마이뉴욕'을 통해 자신의 뉴욕 생활과 연예인 게스트들의 이야기를 엮어 나가는 그가 이번에는 특이하게도 뉴저지 포트리의 설렁탕 전문점 감미옥 최형기 대표를 게스트로 초대했다네요. 왜 한식당 사장님이 한대수의 팟캐스트에 등장하게 됐을까요? 10월 15일 일요일 포트리 감미옥에서 공개 녹화하는 '한대수의 마이뉴욕 -최형기 감미옥 대표 편'을 살짝 공개합니다. 이번 지상 팟캐스트의 사회는 '뉴욕중앙일보'입니다. "지난 2월 말 갑작스런 사고로 포트리 감미옥 가게가 완전히 박살났어요. 한인 할머니의 운전 실수로 그리 됐는데 경찰이 와서 조사하고 난리가 아니었어. 길 건너편에 앉아서 그 장면을 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한 3년 전부터 저걸 부숴야 새로 뭔가를 하지, 하고 있었는데 쉽지 않았거든요. 매일 오는 손님들을 생각하면 문 닫는다는 게 정말 쉽지 않죠. 그런데 사고가 모든 걸 정리해 버린 거예요. 그래, 전부 뒤집자, 설계도를 그리고 인테리어 구상이 다 되어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7개월 만에 재오픈 기념으로 마련한 이벤트가 '한대수의 마이뉴욕' 팟캐스트입니다. 감미옥의 오랜 고객 여러분과 직접 소통하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1990년 맨해튼에서 감미옥을 오픈한 이후 서울의 대표 음식 설렁탕을 세계인(뉴요커)의 음식으로 승화시킨 최형기(63) 대표. 한식 셰프 출신의 설렁탕집 사장이 포크록의 레전드 한대수와 호형호제하는 이유가 먼저 궁금했다. 먼저 최형기 대표의 변. "이번에 제가 한대수의 마이뉴욕에 출연하게 된 건 포트리 감미옥의 오프닝 기념 행사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이어온 오랜 인연 덕분에 대수 형이 저를 도와 주시려는 뜻도 있습니다. 이런 기회를 통해 제 가게가 좀 더 널리 알려지고 더 많은 손님들이 와서 좋은 분위기에서 식사를 즐기시면 좋지 않겠습니까." -최 대표는 한대수씨와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 (최형기 대표, 이하 최) "맨해튼에 감미옥을 열기 전 1985년부터 플러싱에서 버드나무집이라는 토속음식점을 시작했었어요. 그때 한대수씨를 비롯한 '예술인 삼총사'를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굉장했죠." (한대수, 이하 한) "1958년에 할아버지(한영교 전 연세대 신학대학원장)를 따라 뉴욕에 와서 초등학교를 다녔고, 한국으로 갔다가 아버지(한창석)와 같이 살고 싶어 고등학생 때 다시 뉴욕으로 왔었죠. 대학 중퇴하고 한국 가서 노래 하다가 다시 돌아온 후에 알게 됐죠." -그때 이야기는 한번도 공개한 적이 없던데. (최) "제가 LA 거쳐서 뉴욕까지 와서 패션 주얼리 행상을 하다가 번 돈으로 플러싱에서 한식당을 하게 됐는데… '토속음식점'이라는 컨셉으로 맷돌 갖다 놓고 녹두 갈아 빈대떡도 부치고 순댓국 끓이고. 아마 순댓국은 처음이었을 걸요, 뉴욕에. 그 당시만 해도 한국 사람들 고향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처지라 고향 생각 간절할 때였으니까. 그런데 대수 형 알고 보면 굉장히 서민적이더라구요. 부산 사람이라 순댓국, 감자탕 이런 걸 좋아해요." (한) "제가 어릴 때 와서 살던 뉴욕 시절에는 맨해튼에 한국 음식점이 유엔본부 근처에 아리랑하우스라고 하나 있었어요. 그런데 그게 외국인과 외교관들을 위한 음식점이라 비싸기도 하고 가기가 쉽지 않았어요. 저희 할아버지가 굉장히 큰 집에 사셨는데, 그때 할머니가 유학생들을 위해서 설날 파티를 하면 캐비지 김치에 불고기, 이런 걸 먹으면서 정말 좋아했거든요. 제가 한국 갔다가 다시 뉴욕 왔을 때 마침 버드나무집 소식을 듣고, 진짜 코리안 음식이라는 순댓국을 한다잖아요, 그래서 친구들과 '한번 가 보자' 이렇게 된 거죠. 적어도 일주일에 한두 번은 갔던 것 같아요. 순댓국 먹으면 땀 쫘악 흘리고, 얼마나 맛있어요. 제대로 된 한국 음식에 푹 빠졌죠." -당시 '버드나무집 삼총사'라고 했는데 어떤 분들인지. (최) "1994년에 작고하신 전위예술가 정찬승씨, 대한민국의 백남준과 함께 전위예술의 새 장을 연 분이죠. 그리고 그림 하셨던 변종곤 화백, 한대수, 이렇게 세 분. 정찬승씨는 가죽 재킷에 장화 신고 옷에는 자기가 만든 소품 잔뜩 붙여서 나타나고, 변종곤 그 양반도 단발머리 패션, 한대수씨는 이렇게 장발. 이런 분들이 가게에 한꺼번에 몰려 와서. 난 처음 본 사람들이잖아요, 얼마나 궁금하겠어요. 그렇게 만남이 시작됐죠. 1990년 맨해튼에 감미옥을 열면서부터는 더 자주 만나게 됐죠." (한) "아, 그때 분위기 정말 좋았어요. 막걸리도 팔았지." (최) "그때 막걸리를 만드는 분하고 마침 연결되어서 그리 되었죠. 그리고 당시 신문에 만화광고를 냈는데, 일주일마다 버드나무집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유명 만화가에게 의뢰해서 광고로 만든 거예요. 자유의 여신상에다가 양산박에 나오는 노지심이 '주모, 한 잔 더~' 하는 컷까지, 엄청나게 히트를 쳤죠. 정말 가게 문을 걸어 놓고 장사를 할 정도로 그렇게 분위기가 좋았어요." -플러싱 버드나무집은 '먹고살기 위해' 한 일이라고 했는데 맨해튼 감미옥 오픈 이후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설렁탕은 임금이 백성을 위해 만든 음식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래서 문화예술인들에게 '퍼 주는' 사장이 된 건가. (한) "그 당시 한국 음식점은 아리랑 색동저고리 한두 개 붙여 놓고 한복 입은 여자 탤런트 달력 걸어놓고, 그런 정도가 인테리어의 전부였어요. 최 사장은 한식당을 하면서 여러 분야의 문화예술가들과 친해졌고 또 세련된 감각을 이해하는 사람이야. 32가에 감미옥 처음 오픈할 때는 소호에 있는 아티스트들 불러와서 가게 디자인을 소호 분위기로 바꾸고 그랬어요. 지금 한국 음식점들이 인테리어에 신경 쓰게 된 게 최 사장 덕분이라고 해도 될 정도예요." (최) "그때 감미옥은 밥 한 그릇 먹으려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 집이었어요. 이재용 삼성 부회장(당시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유학 중)도 그때는 반바지 차림에 티 안 나게 이어폰을 귀에 꽂고 줄 서서 기다리는데 대수 형은 '형기야~~' 하면서 문을 벌컥 열고 손을 흔들면서 들어오는 거야. 사람들이 '저 친구 뭐야' 하는 표정으로 보면 '아~ 반갑습니다' 하면서 정신 없게…. 그런 열정으로 우리 감미옥에 기운을 불어 넣어 주셨지. 그런데 그때 우리 가게에 '스페이스 감미옥'이라고 전시 공간이 있었어. 뉴욕에서 공부한 화가 지망생들이 한국에 돌아가려면 경력이 있어야 하잖아. 그래서 우리가 전시회 오프닝 파티도 해 주고 큐레이터도 쓰고 하면서 만든 건데 변종곤 화백 같은 분이 전시회에 와서 격려해 주고 멘토링을 해 주니까 후학들에게 큰 힘이 됐지. 그래서 감미옥이 점점 더 아티스트들이 들어오기 쉬운 공간이 된 거죠." -문화예술계 사람들에 관심이 깊은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최) "고등학교 때 밴드 만들어 활동하긴 했지만 존재감이 크진 않았어요. 여러 가수들 앨범 만들 때 참여도 해보고 했지만 빛을 보진 못했고. 그러다 대학을 나오고 공군에 입대하게 됐는데, 그때 나훈아가 군악대장과 함께 공군예술단을 만들려고 했어요. 제가 가수 오디션을 봐서 최종 합격했는데 일이 꼬이는 바람에 군예단 이야기는 없던 걸로 되고 그냥 군악대에서 복무하다 제대했죠." -최 대표 노래 솜씨는 들어줄 만합니까. (한) "저는 많이 들었는데요, 가수 수준입니다. 이번 팟캐스트에서 노래 부를 기회가 있으니 기대하십시오. 사실상 내가 보기에는 감미옥이 크게 성공을 해버렸기에, 성공 못 했으면 가수가 되었을 거야. 돈 아니면 음악!" -한 선생님은 '물 좀 주소' '행복의 나라로' 같은 노래로 히트를 쳤는데. (한) "최 사장에게는 돈을 줬고 나한테는 음악을 준 거죠. 그런데 저는 음악은 있는데 화폐가 없어. 우리 둘이가 친구가 되니까 고맙죠. 그리고 이 두 노래는 다 사연이 있어요. '행복의 나라로'는 고등학생 때 뉴욕 와서 아버지랑 같이 살 때 만든 거고, '물 좀 주소'는 대학(뉴햄프셔 수의대) 중퇴하고 한국 가 있을 때 만든 거예요. 둘 다 집에서 쫓겨나고 만든 공통점이 있네. 나는 뭔가 좋은 환경에서 살다가 한번 뜨려고 하면 꺾이는 거 같아. '물 좀 주소'는 성균관대 뒤 달동네에서, '행복의 나라로'는 로어이스트사이드 빈민굴에서 탄생했죠." -최 대표는 처음 사업할 때부터 문화예술인 후원자인 셈인데. (최) "한대수씨와 인연 중에 중요한 모멘텀이 있었는데, 90년대 중반에 '사는 것도 제기랄 죽는 것도 제기랄'이라는 자서전을 낸 적 있거든요. 저한테 그 책을 줬는데 LA 출장 다녀오는 길에 비행기에서 읽고 바로 전화를 걸었어요. '대수 형, 앨범 하나 만듭시다' 하고. 그래서 나온 게 대수 형의 스무 장 남짓한 앨범 중 유일한 영어 앨범 '이성의 시대 반역의 시대'입니다. 제가 투자자 겸 제작자로 만든 감미레코드에서 휘트니 휴스턴의 '보디가드' 영화로 그래미상을 받은 존 롤로 프로듀서가 만들었어요. 그 이후 한국에 재즈를 전파하는데 전환점이 됐죠." (한) "그 앨범 덕분에 저는 일본에서 초청 공연까지 하게 됐어요. 당시 맨해튼 다운타운에 최신 시설을 갖춘 녹음 스튜디오도 있었죠. 최 사장은 음악가들을 도와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돈 벌어서 페라리 타는 게 아니고 음악가들을 도와준 거죠. 재즈가 한국에 씨를 뿌린 게 1980년 말쯤인데 그 시초가 최형기씨거든요. 제 아내 옥사나가 몽골계인데 몽골 음악을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하게 도와준 것도 최 사장이고요." -포트리 감미옥 가게 안에 이일 화백의 작품이 걸려 있다고. (한) "지금은 유명 화가이지만 날 볼 때마다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자기가 1970년대 브루클린 그린포인트에 사는 무명일 때 최형기씨가 자기 작품을 사 줬다는 거야. 그 돈을 누런 봉투에 넣어서 집까지 가는데, 전철 안에서 누가 볼까봐 품에 꼭 안고 갔다는 이야기를 몇 번씩이나 하는 거야. 최 사장은 일찍부터 사업가로서 한국 정부보다 더 많은 도움을 줬어요. 거기다가 유명 화가들 작품을 가게 안에 거니까 외국인 손님들도 한국인들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는 거야. 어, 코리안들은 음식점에도 작품을 거네, 이러는 거지. 한국 사람들을 아주 수준 높게 보게 되는 거예요." -그동안 설렁탕을 하면서 한식 세계화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최) "솔직히 한식 세계화는 여기서 해야 돼요, 한국에서 이야기할 게 아니라. 뉴욕이 곧 '세계'이거든요. 제가 생각하기로는 매니지먼트가 영어로 가야 된다, 우리 음식을 변형해서 모던화하고 퓨전화하고 하는 건 어떤 것이든 되는 거지만 우리 직원이 전부 영어로 해야 로컬화되는 것 아니냐, 이런 거죠. 외국인 손님이 왔을 때 자기가 이 집 단골인가, 의문이 들 정도로 이질감을 느낀다면 문제인 거죠. 또 한국 사람이 가장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건 한식 아닌가요. 한국에서 유학 와서 서양 요리 배워서 호텔에 취직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한식당에 오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고요. 우리 감미옥 셰프는 CIA 요리학교 한인학생회장 출신입니다. 후배들도 방학 중에 인턴으로 오기도 하고요. 한식 세계화는 결국 '사람' 문제인 셈이죠." -포트리 감미옥은 이런 여러 장점을 다 보여주는 기회가 될 것 같다. (최) "32가에 처음 감미옥을 열었을 때 재즈를 틀어 놓곤 했는데, 손님들 중에는 항의하는 분들도 있었어요. 설렁탕집에 웬 재즈냐고. 이곳 포트리 감미옥은 모던하게 리모델링해서 재즈를 틀어놔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느낌이 들어요. 이제 설렁탕을 강조하기 보다는 여유있게 저녁을 즐길 수 있는 공간, 와인을 한 잔 기울이면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그런 공간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30여 년 한식당을 운영하다 보면 개인적으로도 새로운 감회가 있을 것 같은데. (최) "하하, 저는 내년이 안식년입니다. 와이프한데 허락 받아 제가 관심 있는 음식과 음악에 대해 탐구하고 개인적으로 힐링하는 시간을 가질려고 해요. 먼저 부탄에 가서 한 달 동안 걸어볼 생각입니다. 지금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지만 걷다 보면 생각이 나겠지요. 중국과 일본에도 좀 오래 머물 생각입니다만, 뭘 하게 될지는 모르겠어요." -문재인은 네팔의 히말라야 산기슭을 걷고 나서 대통령이 됐다. 최 대표는 부탄에서 걷고 난 후에 음악과 밥 중에서 뭘 선택할 것 같은가. (최) "안식년을 통해 생각을 정리할 계획인데, 한식 컨설팅 같은 것도 괜찮을 것 같고, 밴드 하나 만들어서 커뮤니티에 봉사하는 것도 고려 중입니다. 아직은 뭐라 할지…." 김일곤 기자

2017-10-12

"한국의 좋은 술, 저렴하게 즐기세요"

"한국인들은 신비한 마법의 초록색 병에 든 걸 먹으면 비밀을 막 털어놓는다." 소설가 김영하가 전주국제영화제에 참가한 외국인 심사위원들이 한 말이라며 인기 버라이어티 쇼 '알쓸신잡(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에서 공개한 일화다. 이 '신비한 마법의 초록색 병에 든 것'은 바로 소주, 우리가 일상에서 즐겨 마시는 소주의 신비한 효과(?)를 외국인들은 이렇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그렇다면 이건 또 어떤가. 가수 싸이가 "오빤 강남 스타일"을 부르짖으며 "난 소주파"라고 외칠 때, 유튜브를 타고 '소주'의 위력이 전 세계로 전파될 때, 싸이는 확실히 '소주 한류'의 일등공신일 터. 그러나 유튜브를 통해 전 세계로 날아가는 소주는 '그림'일 뿐, 그 소주를 외국인들이 직접 마실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소주 한류' 원조는 누구 결국 누군가 소주를 전 세계로 실어 옮기고 팔아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그가 누구일까. 당갑증(70). 1986년 진로 소주를 뉴욕 등 미 동부 지역에 처음으로 들여와 판매하기 시작한 대선아메리카(옛 탕스리커) 사장. 퀸즈 매스페스의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차분한 표정, 수줍은 미소,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이웃집 아저씨였다. 미수복 지구인 강원도 김화 태생으로 위로 누나 셋, 아래로 남동생 셋인 7남매의 장남. 네 살 되던 해 온 가족이 충북 괴산으로 피란해 살다가 인천으로 이주. 태권도 사범인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 온 막내누나의 초청으로 7남매 모두 미국에서 살게 됐다고. 1977년 도미, 필라델피아에 정착해 작은 수퍼마켓을 운영하던 그는 86년 우연한 기회에 친구를 통해 진로소주 미동부 판권을 매입하면서 본격적으로 주류 유통업에 뛰어들었다. 주류 도매 면허를 받은 그는 필라델피아 집과 플러싱을 오가며 회사를 꾸려 나갔다. 한인 밀집 지역인 플러싱 일대 식당과 리커스토어를 직접 누비며 판매망을 확장했다. 이때 162가에 있는 리커스토어(Leiser's Wines & Liquors)에 납품하기 시작했는데 지금도 최대 고객사의 하나로 소주 한 품목만 일주일에 150박스 이상 판다. -뉴욕에서 소주를 처음 팔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그 전에는 소주가 없었나. "그럼. 내가 뉴욕에 진로 갖다 팔기 전에는 소주가 없었던 셈이지. 여기 사는 사람들 고향 생각에 소주 한 잔 하고 싶어도 한국서 올 때 들고 온 것 아니면 없는 셈이지. 그러니까 내가 뉴욕에, 아니 미국 전역에 소주를 유통시킨 장본인이야." -초창기 에피소드를 들려준다면. "진로 소주 처음 팔 때 본사에서 광고 포스터나 판촉물 이런 거 지원이 하나도 없었어요. 업소에서 달라고 하면 내가 포스터 만들어서 갖다 주고 그랬어. 추가 비용이 드니 수익을 내기가 쉽지 않았지. 한인 상권이 크지 않으니까 매출도 많지 않았고. 소주 갖고만 힘들기에 경주법주를 들여와 맨해튼과 플러싱의 룸살롱에 납품했는데 업소에 직접 팔고 수금하는 게 힘들어 결국 포기했지." 진로 소주 총판이라고 해서 돈이 그냥 굴러 들어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수익 구조를 개선하게 된 건 뉴욕의 주(酒)법을 알게 되면서였다. "2~3년 소주를 수입해서 판매하다 보니 알게 된 건데, 뉴욕주에서는 주세가 알코올 도수에 따라 차이가 크게 나는 거야. 처음에는 몰랐지. 그때 들여와 팔던 소주가 25도였는데, 이게 하드리커로 분류돼서 지금 기준으로 치면 리터당 세금이 무려 1.7%나 붙거든. 그런데 1도 낮춰 24도로 하면 0.67%니까 세금이 거의 안 붙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소주 도수를 낮춰서 세금이 내려가면 박스당 9불 이상 더 남는다는 계산이 나오자 그는 서울로 가서 직접 진로의 사장을 만났다. 기술적인 면에서 볼 때 도수를 낮추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전부 25도로 생산되는 소주 가운데 뉴욕으로 보낼 24도짜리만 별도의 탱크에 보관해야 하는 것이 문제였고 해외영업부에서도 추가 비용이 들어간다며 난색을 표했다. 그는 출고가에 2달러를 더 얹어 주어 이 문제를 단박에 해결했다. "9달러에서 2달러를 떼어 주더라도 7달러가 남잖아. 그렇게 해서 뉴욕으로 오는 소주만 24도짜리가 되었지. 그런데 이게 웬떡! 24도짜리 소주가 불티나게 팔리는 거야. 뉴욕에서 잘 팔리니까 서울 본사에서 뉴욕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 나가는 소주를 전부 다 24도로 바꿔 버렸어." 따지고 보면 주정에 물을 섞어 만드는 희석식 소주는 도수를 낮추면 생산원가를 낮추는 효과도 있었다고. "내가 진로에 도움을 좀 준 셈이 되었지." 위기는 '기회'의 또 다른 이름 이와 함께 1990년대 초부터 플러싱을 중심으로 한인 상권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면서 사업은 더 좋아졌고 96년에는 백세주도 들여와 점입가경. 이때가 최고였다. 탕스리커는 절대적인 시장 점유율을 기록했고 1년에 40만~50만 달러씩 세금보고를 하는 등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그런데 99년께 한국의 진로 본사가 경영 위기를 겪으면서 문제가 생겼다. 2001년 기준 소주 시장의 90%를 점유하고 있던 진로의 '참이슬' 판권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것. -잘하고 있는데 왜 계약을 해지했나. "내 사업이야 잘 됐지. 그런데 99년부터 계약을 갱신해야 하는데 자꾸 미루고, 그러다가 나중에는 1년만 연장해 주겠다고 하고, 이상한 낌새를 보이는 거야. 자세한 건 아직도 모르지만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 넘겨줘야 할 사정이 있었겠지." 그러던 차에 독립기념일 연휴에 여행을 떠나는 날 아침 통관업체에서 "새로 들어온 소주를 다른 곳에 입고시킨다"는 전화를 받았고 이것으로 진로 총판과는 이별을 했다. 효자 상품이던 진로 참이슬 판권을 순식간에 잃고 고전하던 그때, 소주에 백세주를 섞어 마시는 '오십세주' 바람이 불면서 백세주 판매가 크게 늘었다. 그는 백세주로 재기를 노리면서 참소주를 들여와 새로 출시했다. -참소주를 들여오게 된 계기는. "이전에 경주법주를 취급하면서 인연을 맺었는데, 진로를 못하게 됐으니까 자매 브랜드인 참소주를 달라고 했어. 미국 시장에서 광고나 프로모션 같은 건 내가 전부 다 할테니까 본사가 손해 보지 않을 정도로만 공급해 주면 열심히 해 보겠다고 했지. 보통 한국 주류업체들은 판촉을 해 주는 대신 출고가를 올리는데, 나는 그걸 다 빼고 원가 수준에서 달라고 한 거야. 바로 이것 때문에 타 업체는 우리 참소주 가격을 따라올 수가 없는 거지. 게다가 나는 포트폴리오를 잘했거든. 이동막걸리, 마음의 궁, 지리산 복분자 등 다양한 제품을 취급했지." -위기 때 발빠르게 대처한 게 효과를 본 셈이네요. "우리 회사에서 물건을 받으면 식당에서 필요한 술 다 있고, 리커스토어에서 팔 술 종류별로 다 있거든. 그런데 다른 업체에서 물건 받으면 한두 종류뿐이란 말이지. 결국 우리 회사에서 다른 술을 받아야 돼. 그래서 플러싱 일대는 우리 회사가 꽉 잡고 있지." 당 사장의 대선아메리카는 중국 고량주부터 한국의 백세주.생막걸리.참소주 등 다양한 종류의 술을 취급하고 있다. 때문에 식당이나 리커스토어 등 거래선들도 선호하고 시장 점유율을 끌어올리는 데에도 유리하다는 설명이다. 뉴욕에 부는 '소주 한류' 최근 들어 뉴욕 일원에서는 시중에 유통되는 제품이 점점 다양해지면서 '소주 한류'가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했다. 당 사장이 진로를 들여와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 그 시초라면 이제는 여러 수입업체들이 경쟁적으로 다양한 품목을 들여와 한국과 동시에 즐길 수 있게 된 것. 또 한 가지 특이한 현상은 한국에서 한국식 소주 제조법을 배운 미국인이 브루클린에 공장을 차려놓고 생산 판매하는 '토끼 소주'와 업스테이트 뉴욕에서 생산하는 한국식 '여보 소주'도 나오는 등 그야말로 '소주의 전성시대'가 열린 것이다. 인터뷰 도중 당 사장은 창고에서 꺼내온 프리미엄 소주 '화랑'을 소개했다. 화랑은 경주법주와 같은 유형의 술로 고가인 경주법주를 대중화하기 위해 저렴한 가격대에 내놓은 것. "이게 참 좋은 술인데, 싸게 만든다고 했는데도 한국에서는 비싸거든. 근데 이게 여기서는 싸요. 왜냐, 이걸 와인으로 등록해서 들여오거든. 화랑은 제조 과정이 일반 소주랑 달리 와인 제조 방법과 비슷해서 그렇게 등록했는데, 세금이 아주 낮게 나와서 싸게 팔 수 있게 된 거지. 내가 술 장사를 하지만 무작정 이윤 많이 남기려고 하는 게 아니라 소비자들이 좋은 술을 저렴하게 즐길 수 있게 하려고 노력하죠." -이달에 증류주인 '제왕(帝王)'을 출시하는데. "한국 고유의 안동소주 제조법에 따라 만든 증류주인데 한국에서는 21도와 25도짜리 두 종류가 있어요. 그런데 21도짜리는 일반 소주 병에 넣어서 파니까 품격이 떨어져. 안동소주라면 정말 귀한 술인데 말이지. 게다가 안동소주는 독해야 제맛이 나는데 가격 때문에 21도로 나오는 것도 좀 그렇고. 그래서 우리는 24도로 해 달라고 했어. 안동소주 맛을 제대로 내면서 세금을 줄이는 방법으로 24도를 선택한 거지." -뉴욕주의 별칭이 '엠파이어 스테이트'이니 뉴요커들에게 딱 맞는 술인 셈이네요. "듣고 보니 그렇군. 제왕도 큰 부담 안 되는 가격대에 내놓을 예정이니 많이 즐기시면 좋겠어." -맨해튼에서 참소주가 약하다고 했는데. "우리는 참소주가 주력 제품이고 화랑과 제왕 같은 프리미엄 소주는 시장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우리가 플러싱에서는 시장 점유율이 아주 높은데 맨해튼에서는 별로거든. 우리가 맨해튼 판촉을 별로 안 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거긴 젊은이들이 많고 소주 값을 비싸게 받아요. 그런데 우리 참소주는 플러싱에서는 한 병에 8.99달러 이렇거든. 이걸 맨해튼이라고 비싸게 받으면 주인이 욕을 먹고. 다른 데서는 싸게 파는데 이 집은 왜 이렇게 비싸냐고. 다른 소주는 비싸게 팔아도 그려러니 하는데 참소주는 욕을 먹으니… 거 참." -화랑이나 제왕 같은 프리미엄 소주로 공략하면 되지 않나. "우리가 식당에 직접 넣기는 힘들어. 업소용 냉장고가 별로 크지 않은데 여러 종류의 술을 다 갖춰 놓기가 사실 힘들거든. 그래서 화랑 같은 건 손님이 찾으면 식당 직원이 리커스토어에 가서 사오는 경우가 많아." 일흔에도 당당한 '현역' -10년 전 인터뷰 때 조만간 은퇴한다고 했는데. "내가 법적으로 이미 은퇴한 나이이지만 아직까지 일을 하고 있는데, 주류 도매업이라는 게 사업을 물려주기가 쉽지 않아. 수입부터 유통까지 다 하기 때문에 연방정부부터 주정부, 로컬정부까지 라이선스를 전부 다시 내야 해서. 내년에는 큰아들이 합류하기로 했으니까 알아서 하겠지." 대학에서 컴퓨터사이언스를 전공하고 IT 업체에서 20년 가까이 다닌 큰아들 현덕(43)씨는 그동안 근무하던 회사가 내년 플로리다로 이전하는 바람에 갑자기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기로 했다고. 아들 이야기가 나오자 그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큰아들이 IT 전문가니까 아버지로서 기대가 클 텐데. "큰애가 술.담배를 전혀 몰라요. 부모가 사업하느라고 어렸을 때부터 사립학교 보내서 한국인 친구들도 없고. 직장도 펜실베이니아의 소도시에서 다녀 한국 사람과 어울릴 기회가 없었지. 한국어로 말하고 알아듣고 하는 건 하는데 한글을 아직 몰라. 사업 물려받으면 한글부터 배워야 돼요, 매출장부를 읽으려면. 사업은 자기가 알아서 하는 거지, 뭐." 당 사장의 사무실 벽 한켠에는 액자에 고이 모셔진 10년 전 중앙일보 인터뷰 기사가 걸려 있었다. 그 사진 속 당 사장과 지금 의자에 앉아 있는 그는 똑같은 모습. 10년의 세월이 흐름을 멈췄다, 그에게만. 김일곤 기자

2017-10-02

"자동차 대륙횡단, 여러분도 도전해 보세요"

34년간 맨해튼 32가서 '뉴욕곰탕' 운영 부부 동반으로 산타페 타고 49일 여행 "남에게 유익 주고 배려하면 성공한 삶" 뉴욕중앙일보가 창간 42주년을 맞아 뉴욕·뉴저지 일원 한인 1세들과 한인 기업의 성공 스토리를 연재합니다. 머나먼 이국 땅에 뿌리를 내리고 성공을 일궈낸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한민족의 저력과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기회로 삼았으면 합니다. "김 장로님, 그 연세에 대륙횡단을 했다고?" "현대차 모델이 되신 건가?" 지난 9월 2일 중앙일보를 펼쳐 든 독자들은 수상한(?) 광고를 만났다. 맨해튼 32스트리트 한복판에서 뉴욕곰탕을 운영했던 김유봉·김송현 사장 부부가 느닷없이 현대차 광고 모델(?)로 데뷔했기 때문. 2013년 11월 업소 문을 닫고 은퇴한 후 소식이 뜸하던 그가 갑자기 한인들의 화제 중심에 떠오른 것이다. 뜨거운 김이 무럭무럭 솟아나는 맛있는 곰탕 한 그릇으로 한인들의 향수를 달래주고 새해 설날이면 무료 떡국 잔치를 열어 타국 땅에서의 고단한 삶을 위로해 주던 뉴욕곰탕집 김유봉 사장. 자체 생산한 곰탕 캔을 한국 유수의 백화점에 수출한 기업가, 뉴욕 한식당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32가 코리아타운번영회 회장, 미동부 한식세계화추진위원회 이사 등 다양한 이력을 지닌 그가 일흔의 나이에 느닷없이 대륙횡단을 마치고 돌아왔다고 동포 사회에 알리고 나선 이유가 궁금했다. 대륙횡단 자동차 여행 맨해튼 32스트리트 한인 타운 한복판에 자리 잡고 명성을 날리다가 지난 2013년 문을 닫은 뉴욕곰탕. 김유봉 사장이 현업에서 물러나 은퇴하기까지 34년간 구수한 곰탕 한 그릇으로 한인들에게 엄마의 손맛을 전해온 생업의 터전이었다. 또 뉴저지 한소망교회에서 봉사하는 김유봉 장로는 사업과 인생을 지탱해 온 근간은 신앙의 힘이었다고 말한다. 교회의 성전 건축 헌금에 사재를 아끼지 않은 신앙인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신앙의 힘으로 기반을 일구고 사업을 키우고 이런저런 단체의 직무를 맡으며 세상에 이름을 알리며 만족해 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는 법. 그러나 은퇴 후 소박하게 신앙 생활에 몰두하던 칠순의 그가 부부 동반으로 무작정 대륙횡단 자동차 여행을 떠난 것은 너무나 의외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중앙일보에 실린 산타페 광고는 어떻게 나온 건가. “이번 여름에 집사람과 함께 49일 동안 미 대륙과 캐나다 일부 지역을 직접 운전하며 1만3500마일에 달하는 여행을 마쳤어요. 현대 산타페를 몰고 다녔는데 이번 여행길을 안전하고 만족스럽게 마치게 해준 데 대한 보답으로 하는 감사 인사라고 할 수 있겠죠. 내가 직접 광고를 디자인하고 문구도 직접 썼어요.” -‘확신의 마음으로 감사하여…’라는 문구는 무슨 뜻인지. “한국 사람으로서 한국 차에 대한 불신 같은 게 있었는데 이번 여행에서 산타페를 직접 운전해 보고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1980년대에 현대 엑셀이 처음 미국 시장에 출시됐을 때 곧장 한 대 구입했었는데, 겉모습은 한국 차가 분명한데 일부 부품이 일제인 걸 알고 나서 크게 실망한 경험이 있거든요. 제네시스도 잘 만든 차라는 걸 알지만 운전해 보진 않아 그리 미덥지 못하던 차에 이번에 산타페를 직접 타 보고 뛰어난 성능에 더 기뻤던 것 같습니다.” -고령에 먼 길 떠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내가 수술을 해서 허리가 별로 좋지 않은 편이에요. 평소에도 장시간 운전은 잘 안 하죠. 이번에 여러 은혜 가운데 집사람과 함께 무사히 여행을 마치게 되어 기쁘답니다.” -대륙횡단 여행을 떠나게 된 계기는. “사실 이런 일은 그냥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나요. 여러 여건이 성숙되어야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이 나를 선택해서 지금까지 이끌어 주신 것처럼 이번 여행길도 인도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애초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 이유는 매년 할애비 집에 와서 재미있게 지내던 손녀딸들이 이번 여름에 한국 여행을 갔기 때문이라 할 수 있는데, 애들이 여기 없으니 갑자기 올여름에는 할 일이 없어져 허전해진 거지.” -부인이 말리지 않았나. “여행을 부부 동반으로 다녀 오니까 부부애도 살아나고 좋은 일이 많아요. 부부 둘밖에 없는 상황이라 서로 돕고 위해 주고 하니까…. 그동안 사업 하느라 사회활동 하느라 가정에 소홀했던 것도 보상하는 기분이고. 서로 도와가면서 여행해야 하니까 아주 좋아요. 친구들에게도 한번 도전해 보라고 말하고 다니죠.” -그런데 어떻게 해서 산타페를 타고 떠난 건지 궁금하다. 더 좋은 차도 탈 수 있는 재력이 되는데. “올여름에 여행을 떠날 계획으로 일제 차를 한 대 구입했었죠. 그런데 집사람이 몰고 다니다가 접촉 사고를 냈는데, 이걸 수리하려면 6월 15일 출발하려던 날짜에 맞출 수 없는 상황이 된 겁니다. 아, 여행 가지 말라는 뜻인가 보다 하고 마음을 다 내려놨어. 그런데 우리 교회 장로님이 바디샵을 하는데, 여기 맡겨서 빨리 수리해 달라고 했더니 도저히 시간을 맞출 수 없다면서 차를 한 대 렌트해 주겠다고 하더라고.” 현대 산타페에 반하다 내심 BMW나 벤츠 같은 고급 승용차를 기대하며 렌터카를 보러 간 그에게 바디샵 사장은 현대 산타페를 권했다. 그래도 실망한 마음을 내색할 수 없어 이리저리 차를 조사하던 그는 의자를 젖히고 뒤로 누워서 차가 얼마나 편안한지 체크해 봤다고. “아, 그런데 이게 내 키에 딱 맞는 거야. 차 안에서 누워도 널찍하더라고. 나중에 급할 땐 차 안에서 자도 되겠다 싶어서 그냥 산타페로 하기로 하고 6월 26일 그대로 출발했죠.” -현대차에서 무슨 연락 같은 건 없었나. “현대차 광고 에이전시에서 편지를 보내 왔어요. 누가 얘기해 줘서 내 광고를 봤는데 깜짝 놀랐다고. 내가 직접 디자인했다고 했더니 ‘두 손 다 들었습니다’ 그러더라고. 원래 식당 장사 오래 하다 보니까 광고를 재미있게 해서 손님들 시선을 끌려고 노력했는데, 몇 개는 제법 화제거리가 되기도 했거든. 80년대에는 국제 항공우편 봉투 디자인을 이용해서 한국에 있는 어머니가 뉴욕에 사는 아들에게 곰탕을 권하는 광고를 낸 적 있어요. ‘외국에서 고생하고 있는 아들에게. 아들아, 곰탕은 한국 고유의 전통음식으로 영양가가 높고 맛도 아주 좋단다. 뉴욕곰탕에 가서 맛있게 먹고 건강하게 지내라.’ 이런 식으로.”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식당 운영을 하던 그의 특기가 이번 현대차 광고에서도 빛을 발한 셈이었다. 미국으로 가자! 1947년생, 아직 철이 채 들기 전 6·25를 겪었고 보릿고개에 배를 곪던 시절을 겪었을 김 장로. 그는 어떻게 정든 고향을 떠나게 되었을까. -미국에 오게 된 동기는. “경기도 여주가 내 고향인데 우리 사촌들이 잘 살았어요. 사촌형이 대학을 나와 여행업을 하셨고, 돌아가신 매형은 1935년생으로 5·16 멤버였는데 75년에 일본 유학을 다녀오시더니 ‘유봉아, 일본 한번 가 볼래’ 하시는 거라. 그래서 군대에서 제대하고 직장 생활을 막 시작했던 28살 때 일본 오사카에 가게 됐지. 그때 우리나라는 서울 지하철 1호선이 막 개통했는데 오사카 거리는 전철이고 네온사인이고 정신 없이 번쩍거리고 붐비더라고. 거기서 교포 여성 만나 결혼하고 정착하려고 했는데, 직업도 없고 돈도 없는 처지라 번번이 퇴짜를 맞았죠. 비자 기한이 6개월이어서 다시 한국에 돌아왔는데 이제 한국서 못살겠다는 생각뿐이더라고.” ‘외국 바람’이 든 그는 그때부터 미국에 갈 꿈을 꾸기 시작했다. 시골 농사 짓는 집안, 7남매의 장남인 그는 당시 관습대로라면 아버지 따라 농사 짓는 게 당연했지만 일제 시대 때 교편 생활을 했던 어머니는 그의 그런 꿈을 이해해 주셨다고. -미국 비자는 어떻게 받았나. “어머니한테 일본어는 배워서 좀 할 줄 알았지만 영어는 할 줄 모르니까… 소니 녹음기 하나 사서 영어 선생한테 영사 인터뷰 하는 내용 녹음해 달라고 해서 연습했지. 대사관에 가서 인터뷰 하는데 처음에는 잘 됐어. 그런데 네 번째 질문이 모르는 게 나왔는데 연습을 안 한 거야. 나중에 알고 보니 ‘애비뉴가 뭐냐’고 물어본 건데... 네브라스카 오마하에 가서 호텔에 머물 겁니다, 이렇게 동문서답을 했던 거지. 영사가 서류를 휙 던지면서 나가라고 하더라고.” 첫 번째 비자 인터뷰가 실패하고 전전긍긍하던 그는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신문에서 읽었던 사연이었다. 파독 한인 광부가 미국 대사에게 편지를 써서 LA에 무사히 입국한 일, 미국 소년이 냉전 시절임에도 모스크바 당국에 편지를 써서 초청 받아 소련을 방문한 일. 두 가지 사건의 공통점을 바로 ‘편지’였던 것. 두 번째 비자 인터뷰 때 그는 정성 들여 쓴 편지를 번역한 후 비자 신청서와 함께 내밀었다. 당시 한국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진행되고 있어 여기에 맞추어 미국에서 배울 기회를 달라고 썼다고. 일본을 다녀온 출입국 증명서까지 미리 준비해 간 덕분에 영사도 비자 스탬프를 흔쾌히 찍어 주었다. 마침내 미국으로 가는 길이 열린 것이다. 뉴욕곰탕의 탄생 여행업 하는 형님이 예전에 비자 발급을 도와준 친지가 버지니아에 살고 있어서 일단 그곳으로 향했다. 알링턴에 머무르는 동안 한국에서 온 총각이라고 소문이 나서 중매가 여럿 들어왔지만 신분도 없고 영주권도 없는데다 직업도 없는 처지라 모두 거절당하고 결국 뉴욕으로 올라오게 된 처지. 1976년 2월 꽁꽁 얼어붙은 겨울날, 그는 그레이하운드 고속버스를 타고 뉴욕으로 향했다. 겨우 일자리를 얻은 게 5월, 영주권 스폰서를 해준다는 식당에서 주급 90불을 받으며 접시를 닦는 일이었다. “그때 맨해튼에는 한식당이라곤 아리랑, 호심, 삼복 세 곳뿐이었어. 내가 일한 호심 식당 주방장이 노덕수씨라고, 플러싱 세계박람회 때 한국관 주방장을 하셨던 분이셨어. 실력이 대단하신 분인데, 그분 밑에서 일을 하는데 실수도 하고 티격태격 대들기도 하면서 일을 배웠지.” 그러는 동안 성실히 일하며 능력을 인정받아 부주방장으로 승진했다.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그를 눈여겨 본 이의 소개로 부인 방송현씨를 만나 그해 결혼에도 골인, 신분 문제도 해결돼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됐다. 이어 1979년에는 27스트리트의 단칸 가게 하나를 1만불에 인수해서 테이블 3개짜리 초미니 곰탕집을 열고 부인과 함께 4년여 밤낮 없이 일했다. “내가 뉴욕에 처음 왔을 때는 한인 교포들이 4000명 정도였어요. 한식당 세 곳 하고 46가에 조그만 수퍼마켓 하나가 전부였으니 지금과는 천양지차. 그때는 조그만 가게 안에 곰탕 가마를 걸어 놓고 화씨 90도가 넘는 열기와 싸우며 죽고 살기로 일했죠.” 1982년에는 인파가 더 붐비는 32스트리트로 자리를 옮겨 이전 기념으로 ‘뉴욕’을 상호에 덧붙여 ‘뉴욕곰탕’ 문을 열었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록 솟아나는 뽀얀 곰탕 국물에 하얀 쌀밥 한 그릇이면 세상 부러울 게 없던 시절. 가난한 유학생도, 지상사 주재원도 모두 그의 단골이었다. 하루 24시간 영업을 하는 곰탕집은 늘 사람들로 북적였다. 32스트리트로 옮긴 이후에는 곰탕의 인기가 하늘로 치솟아 1997년 USDA 허가를 받아 브루클린에 곰탕 캔 공장을 세우고 한국 유명 백화점에 수출까지 했다. 그야말로 곰탕 하나로 우뚝 일어선 셈이다. 성공한 인생이란 “제가 그동안 살아온 걸 되돌아보면 내가 살아온 길이 성경 속에 다 있는 것 같아요. 1976년에 결혼하면서 집사람을 따라 교회를 나가게 됐는데, 사업이 잘 되면 믿음이 오히려 떨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지금 아들 하나, 딸 둘에 손주가 7명 있는데 우리 연배에 이렇게 자손 많은 사람 드물죠. 나름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고 여기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그는 ‘성공’의 의미를 되짚으며 ‘지금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남에게 유익을 주고, 하나님이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 성공이라고 강조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성공하고 싶어하죠. 일반적으로 성공이라 하면 부귀영화, 출세, 돈 많이 벌고, 이런 걸 생각하는데 내 생각에는 자기 인생을 자기 페이스대로 잘 살아가는 게 성공이다 싶어요. 제가 식당을 할 때 두부를 대주는 중국 사람이 있었는데 두부 한 통에 5불이니까 5불, 10불 때문에 매일 아침 우리 식당에 오는 셈이죠. 한 10년 가까이 배달해 주던 이 사람이 어느 날 은퇴한다고 하는 겁니다. 오, 그러냐고,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고 말았는데 내가 이 나이가 되고 보니까 그 사람이 성공한 사람 같더라고요. 성공은 높고 크고 화려한 것이 아니더란 말입니다.” 김일곤 기자

2017-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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