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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이민의 역사는 반복된다

불법이민자들을 모조리 감옥에 집어넣자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백인우월주의자들은 “우리 조상들은 미국에 합법적으로 이민 왔는데, 너희들도 법을 지켜라”는 소리를 한다. 그러나 미국의 역사, 특히 이민의 역사를 알게 된다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조상이 100, 200년 전 미국에 이민 왔을 때는 ‘이민법’이라는 게 아예 없었고, 따라서 합법 이민, 불법이민이라는 개념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최근 예일대학 출판부에서 나온 ‘이민: 미국의 역사(Immigration: An American History)’라는 책은 현재 미국의 이민 문제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사실은 여러 차례 되풀이된 일임을 설명한다. 예를 들어 미국 건국 직후만 하더라도 이민법은커녕, 미국 시민에 대한 법률 규정도 없었다. 건국 5년 후에 제정된 시민권법(Naturalization Act of 1790)은 일단 미국에 도착해 2년을 살면 시민권을 주었다. 물론 ‘도덕적인 품성을 갖춘 자유민 백인’에게만 시민권을 준다는 인종차별적 조건도 빼놓지 않았다.     남북전쟁 후 노예해방을 위해 제정된 1866년 민권법(Civil Rights Act of 1866)은 흑인에게 시민권 부여를 허가했지만, 중국인 등 아시아계는 거주할 권리만 주어졌을 뿐 시민권을 취득할 권리는 없었다. 중국계가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1898년 연방대법원의 ‘United States v. Wong Kim Ark’ 판례부터였다. 이렇게 백인이 아닌 이민자들은 ‘합법적 미국인’이 될 길이 원천봉쇄됐던 것이 미국 이민법의 역사다.   이 책의 저자인 하샤 다이너 뉴욕대 역사학 교수에 따르면,  1차대전 직후 몰려드는 중국, 일본, 한국계 이민자들을 노란색 위험(yellow peril)이라며 경계했다. 결국 미 의회는 잇단 반이민법을 통과시킨다. 1920년 긴급 이민쿼터법(Emergency Quota Act)은 중국,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계 이민자들의 이민 쿼터를 엄격하게 제한했고, 1924년 아시안 배제법(Asian Exclusion Act)은 이들 국가의 이민을 원천 봉쇄해버렸다. 트럼프 행정부 시절 중동 7개 국가 입국 금지 명령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미국 영사가 이민 희망자를 인터뷰하고 비자와 영주권을 발급하기 시작한 것도 1920년대부터다. 미국 입국 전부터 법적 장벽이 생긴 것이다. 다이너 교수는 “비자와 인터뷰가 생기면서 1930년대 나치 독일의 탄압을 피해 출국한 유대인들의 미국 입국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었다”며 “그런 유대인들이몇 년 후 어떤 최후를 맞이했을지 상상해보라”고 지적했다.   이 책의 공동저자인 알바니 대학 칼 본 템포 교수에 따르면, 멕시코 국경 문제도 원래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그에 따르면 1970년대만 해도 미국-멕시코 국경 경비는 동네 경찰이 했고 예산도 충분치 않았다. 국경 경비가 강화된 것은 9·11을 계기로 테러와의 전쟁, 그리고 마약과의 전쟁 등 정치적 이유 때문이다.     기후변화와 경제난으로 인한 이민자들의 캐러밴 행렬도 미국 역사에 몇 번이나 반복되던 일이다. 19세기 중반 아이리시 이민자들은 감자 전염병 창궐로 굶주림에 시달리다 미국으로 이민을 시도했고, 1890년대에는 이탈리아 북부 흉작으로, 1850년에는 리투아니아의 기아로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몰려왔다. 오늘날 경제난으로 밀입국을 시도하는 중남미 국민과 다를 바가 없다. 이들 국가의 출신 조상을 둔 백인들이 멕시코 국경 캐러밴을 ‘밀입국자’라고 비난하는 것은 ‘개구리 올챙이 때 모르는 꼴’이다.   템포 교수는 “미국의 이민제도는 절대 불변이 아니고, 우리가 만든 것이며 우리가 고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의 말대로, 한인을 포함한 이민자들의 의지를 모으면 투표와 정치 참여로 더욱 좋은 이민법과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이종원 / 변호사중앙시평 이민 역사 동아시아계 이민자들 한국계 이민자들 긴급 이민쿼터법

2022-10-03

[중앙시평] 잘못된 가주의 ‘성전환 피난처’

캘리포니아주가 어린이 및 미성년자의 성전환(transgender) 피난처 주가 될 조짐이다. 부모 허락 없이는 성전환수술을 못하는 타주 미성년자들의 성전환 수술을 가능하게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법안이 캘리포니아주 상하원을 모두 통과했다. 개빈 뉴섬 주지사는 오는 30일까지 서명 혹은 거부권을 행사해야 하는데 서명할 확률이 거부권을 행사할 확률보다 높다.  찬성표를 던진 의원들은 모두 민주당이다.     민주당은 어떻게 하다 이 지경이 됐을까. 민주당은 사회적 약자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온 정당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과 존슨 대통령의 가난과의 전쟁이 떠오르는 당, 19세기 가난한 백인 남성을 시작으로  20세기 들어와 도시 이민자, 흑인과 유색인종, 여성,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투쟁하며 사회적 진보를 이끌어낸 당,  비록 각종 추문과 부패 스캔들에 휩싸이고 패션좌파라는 오명을 뒤집어써도 그들이 추구하는 숭고한 가치만은 외면하지 않았던 당이 민주당이다.  민주당의 이런 투쟁 덕에 지금 한인들도 백인들이 북적거리는 쇼핑몰, 해변, 식당, 골프장에 가서 한국말로 크게 떠들며 돈에 상응하는 서비스를 받게 된 것이다. 기업과 비즈니스에 친화적이라고 해도 태생이 이민자인 한인 비즈니스 업주들 역시 이민자 친화적인 민주당에 더 많은 표를 찍어줬다.     처음 내가 변호사 생활을 시작한 아시아계 민권단체인 아태법률센터에선 저소득층 이민자, 유색인종, 노인, 여성을 위한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민주당의 철학과 많은 부분을 공유했다.  사회의 그늘진 곳에 빛을 비춘다는 민주당이 어느 때부터인가 이상한 곳으로 주파수를 맞춰나가기 시작했다. 처음 게이,레즈비언이라고 불리는 동성애자에 대한 평등권을 사회적 이슈로 크게 부각할 때 보수적인 한인문화에서 성장한 나로선 약간의 거부감도 있었지만 단순히 동성애자란 이유로 그들이 사회적 차별을 받고 그 차별을 허용하는 것은 잘못됐다는 데에 동의했다.  기독교계의 반발 속에서도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금지는 사회적 공감대를 얻어갔다.  교회에 다니는 많은 지인도 이 부분에선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민주당은 단순히 동성애자에 대한 평등권을 넘어 성전환에 대한 이슈를 사회적으로 부각하면서 아주 이상한 방향으로 정책들을 짜고 있다.  동성애자, 성전환자의 평등한 권리를 인정해주는 부분과 동성애와 성전환을 권장하는 건 완전 다른 문제이다. 앞에 부분은 인권, 민권의 문제지만 뒷부분은 사회가 정상이냐 비정상이냐의 문제다.       캘리포니아주의 공립학교 성교육이 이상하게 흐른다는 지적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단순히 남녀 간의 성행위를 적나라하게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동성애, 성전환과 관련한 성행위 부분도 교과과정 속에 들어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할 정도의 충격적인 예기까지 들린다.  논란이 된 책자들을 직접 읽어보지 못해 사실 여부를 판단하긴 어렵지만 민주당이 성전환자 문제를 밥 먹는 문제, 사회안전 문제보다 앞에 내세우는 건 사실로 보인다.     사람이 공부를 너무 많이 하고 경제적으로 배가 부르면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는 걸까. 이 법을 만들고 찬성표를 던진 민주당 의원들, 이해를 해보려 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미성년자가 성전환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한 법을 과연 제정신으로, 그리고 무슨 목적으로 추진한 건지 캘리포니아주와 미국의 미래에 대한 걱정이 앞선다. 차라리 하던 데로 노동자를 위한답시고 비현실적이고 비상식적인 노동법을 만들어 통과시키는 것까진 애교로 봐줄 수 있겠다. 김윤상 / 변호사중앙시평 가주의 성전화 동성애자 성전환자 피난처 주가 동성애 성전환

2022-09-21

[중앙시평] 맥주가 일으켜 준 덴마크의 과학 전통

세계 각국에는 즐겨 마시는 고유의 맥주가 있다. 특히 유럽에서는 아무리 작은 나라라도 특유한 맥주의 전통을 자랑한다. 그 한예가 덴마크의 칼스버그(Carlsberg)이다. 그런데 이 칼스버그는 단순한 맥주 회사가 아니다. 창업자 야콥슨(Jacob Jacobsen)이 1876년에 설립한 칼스버그 재단은 자연과학을 중심으로 모든 학문의 연구를 지원하는 덴마크에서 가장 중요한 민영재단으로 꼽힌다. 칼스버그에서 지원해 온 굵직한 연구 프로젝트들이 수없이 많다. 그렇게 재정이 풍부한 것은 매년 칼스버그 회사에서 내는 이익의 일정 비율이 재단으로 넘어가도록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역사상 덴마크가 낳은 가장 중요한 과학자라 할 수 있는 물리학자 닐스 보어(Niels Bohr)는 다년간 철저히 칼스버그 재단의 뒷받침을 받았다. 양자역학을 정립하는데 결정적 공헌을 한 보어는 덴마크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칼스버그 재단에서 받은 연구비를 가지고 2년간 영국 케임브리지와 맨체스터 대학에서 연구할 수 있었다. 그 연구 내용은 1913년에 발표되어 물리학의 전통을 뿌리째 뒤흔들었던 양자역학적 원자 구조 모델이었다. 영국에서 돌아와 코펜하겐 대학 교수로 취임한 보어는 그 후 매년 칼스버그 재단에서 크고 작은 연구비 지원을 받았다.   또한 여러 나라에서 촉망되는 젊은 학자들이 코펜하겐에 와서 보어의 지도 하에 연구할 수 있도록 칼스버그 재단은 지원했다. 그리하여 보어가 초대 소장으로 있었던 코펜하겐 대학의 이론 물리학 연구소는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는 양자역학의 메카가 되었다. 그렇게 이루어진 공동 연구의 결과로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도 탄생하게 되었다. 지금은 닐스 보어 연구소로 명명된 이 연구소가 더 커지고 실험 시설도 제대로 갖출 수 있도록 칼스버그 재단에서는 계속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야콥슨은 그렇게 재단을 설립하여 다른 과학자들의 연구 활동에 재정적 뒷받침을 했을 뿐 아니라 맥주를 과학적으로 생산하기 위한 연구를 하는 칼스버그 연구소도 동시에 설립하였다. 19세기 당시의 양조업은 전수받은 전통 기술로 잘 하다가도 어떤 예기치 못한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고 맥주가 망쳐져서 버리는 일이 허다했다. 그러한 한계를 극복하고자 야콥슨은 과학적 맥주 연구소를 세운 것이다. 그 효과는 1880년대에 크게 나타났다. 그 당시 아무도 이해할 수 없게 칼스버그 맥주의 맛이 이상해 지기 시작했다. 그 상황에 투입된 칼스버그 연구소의 헨슨(Emil Hansen)은 맥주를 발효시키는 이스트에 여러 종류가 있고, 그중 특별한 한 종류의 이스트만이 맛있는 맥주를 만들어 준다는 것을 알아냈다. 헨슨의 공로로 그 특종 이스트를 순수하게 배양하고 다른 종류의 이스트가 들어와서 오염되지 않도록 하는 공정을 개발한 칼스버그 회사에서는 그 기술을 독점하지 않고 각국의 양조장에서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도록 무료로 배포하였다.   또 한가지 중요한 과업은 맥주의 산도를 조절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잘 안되면 발효 과정에도 문제가 있고 맛도 제대로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뭔가를 과학적으로 조절하려면 우선 정밀한 측정이 필요하다. 20세기초 까지만 해도 물질이 얼마나 강한 산성을 띠고 있는지를 간편하게 수치로 표현하는 방법이 없었다. 칼스버그 연구소의 화학부 부장으로 1901년에 취임한 사른슨(Søren Sørensen)은 그 상황을 개선하기 위하여 “수소이온 농도 지수”라는 개념을 만들어 내었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상당히 생소하겠지만, 그것은 바로 중고등학교 화학 시간에 다들 배우는 pH(피에이치, 또는 독일어 발음으로 페하)이다. 중성이면 pH 7도이고, 산성일수록 그 숫자가 낮아진다. 사른슨은 원액의 pH가 5.5도일 때 칼스버그 맥주가 가장 잘 빚어진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래서 칼스버그 회사의 맥주 생산공정이 개선된 것은 물론이고 그보다 훨씬 더 일반적인 중요성을 지닌 기초 화학 개념을 만들어 내게 된 것이다. 그 후에 미국의 베크만(Arnold Beckman)은 오렌지 쥬스로 유명한 썬키스트(Sunkist)회사에서 의뢰를 받아 pH를 간편하게 측정할 수 있는 측정기를 발명하였다. 화학과 생물학에 관련된 모든 실험실에서는 pH측정이 거의 필수적으로 되어있다.   칼스버그 연구소와 재단의 역사를 잘 뜯어 보면 아직도 부러운 것이 많다. 소박한 일상생활의 일부인 맥주를 만드는 것부터 그 옛날부터 오랫동안 체계적인 과학적 연구에 기반했다는 점. 거기서 나온 과학적 지식과 기술적 노하우를 다른 곳에서도 쓸 수 있도록 나누어 주었다는 점. 재단에서는 자회사의 업종에 직접 관련된 분야를 훌쩍 넘어서 모든 학문분야가 번성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는 점. 또 그러한 좋은 일을 하는 재단과 연구소가 이미 150년 가까이 창업자의 정신 그대로 유지되어 왔고 아직도 계속 커가고 있다는 점이다. 장하석 /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 과학철학중앙시평 덴마크 맥주 과학적 맥주 맥주 회사 역사상 덴마크

2022-08-22

[중앙시평] 맥주가 일으켜 준 덴마크의 과학 전통

세계 각국에는 즐겨 마시는 고유의 맥주가 있다. 특히 유럽에서는 아무리 작은 나라라도 특유한 맥주의 전통을 자랑한다. 그 한예가 덴마크의 칼스버그(Carlsberg)이다. 그런데 이 칼스버그는 단순한 맥주 회사가 아니다. 창업자 야콥슨(Jacob Jacobsen)이 1876년에 설립한 칼스버그 재단은 자연과학을 중심으로 모든 학문의 연구를 지원하는 덴마크에서 가장 중요한 민영재단으로 꼽힌다. 칼스버그에서 지원해 온 굵직한 연구 프로젝트들이 수없이 많다. 그렇게 재정이 풍부한 것은 매년 칼스버그 회사에서 내는 이익의 일정 비율이 재단으로 넘어가도록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역사상 덴마크가 낳은 가장 중요한 과학자라 할 수 있는 물리학자 닐스 보어(Niels Bohr)는 다년간 철저히 칼스버그 재단의 뒷받침을 받았다. 양자역학을 정립하는데 결정적 공헌을 한 보어는 덴마크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칼스버그 재단에서 받은 연구비를 가지고 2년간 영국 케임브리지와 맨체스터 대학에서 연구할 수 있었다. 그 연구 내용은 1913년에 발표되어 물리학의 전통을 뿌리째 뒤흔들었던 양자역학적 원자 구조 모델이었다. 영국에서 돌아와 코펜하겐 대학 교수로 취임한 보어는 그 후 매년 칼스버그 재단에서 크고 작은 연구비 지원을 받았다.   또한 여러 나라에서 촉망되는 젊은 학자들이 코펜하겐에 와서 보어의 지도 하에 연구할 수 있도록 칼스버그 재단은 지원했다. 그리하여 보어가 초대 소장으로 있었던 코펜하겐 대학의 이론 물리학 연구소는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는 양자역학의 메카가 되었다. 그렇게 이루어진 공동 연구의 결과로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도 탄생하게 되었다. 지금은 닐스 보어 연구소로 명명된 이 연구소가 더 커지고 실험 시설도 제대로 갖출 수 있도록 칼스버그 재단에서는 계속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야콥슨은 그렇게 재단을 설립하여 다른 과학자들의 연구 활동에 재정적 뒷받침을 했을 뿐 아니라 맥주를 과학적으로 생산하기 위한 연구를 하는 칼스버그 연구소도 동시에 설립하였다. 19세기 당시의 양조업은 전수받은 전통 기술로 잘 하다가도 어떤 예기치 못한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고 맥주가 망쳐져서 버리는 일이 허다했다. 그러한 한계를 극복하고자 야콥슨은 과학적 맥주 연구소를 세운 것이다. 그 효과는 1880년대에 크게 나타났다. 그 당시 아무도 이해할 수 없게 칼스버그 맥주의 맛이 이상해 지기 시작했다. 그 상황에 투입된 칼스버그 연구소의 헨슨(Emil Hansen)은 맥주를 발효시키는 이스트에 여러 종류가 있고, 그중 특별한 한 종류의 이스트만이 맛있는 맥주를 만들어 준다는 것을 알아냈다. 헨슨의 공로로 그 특종 이스트를 순수하게 배양하고 다른 종류의 이스트가 들어와서 오염되지 않도록 하는 공정을 개발한 칼스버그 회사에서는 그 기술을 독점하지 않고 각국의 양조장에서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도록 무료로 배포하였다.   또 한가지 중요한 과업은 맥주의 산도를 조절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잘 안되면 발효 과정에도 문제가 있고 맛도 제대로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뭔가를 과학적으로 조절하려면 우선 정밀한 측정이 필요하다. 20세기초 까지만 해도 물질이 얼마나 강한 산성을 띠고 있는지를 간편하게 수치로 표현하는 방법이 없었다. 칼스버그 연구소의 화학부 부장으로 1901년에 취임한 사른슨(Søren Sørensen)은 그 상황을 개선하기 위하여 “수소이온 농도 지수”라는 개념을 만들어 내었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상당히 생소하겠지만, 그것은 바로 중고등학교 화학 시간에 다들 배우는 pH(피에이치, 또는 독일어 발음으로 페하)이다. 중성이면 pH 7도이고, 산성일수록 그 숫자가 낮아진다. 사른슨은 원액의 pH가 5.5도일 때 칼스버그 맥주가 가장 잘 빚어진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래서 칼스버그 회사의 맥주 생산공정이 개선된 것은 물론이고 그보다 훨씬 더 일반적인 중요성을 지닌 기초 화학 개념을 만들어 내게 된 것이다. 그 후에 미국의 베크만(Arnold Beckman)은 오렌지 쥬스로 유명한 썬키스트(Sunkist)회사에서 의뢰를 받아 pH를 간편하게 측정할 수 있는 측정기를 발명하였다. 화학과 생물학에 관련된 모든 실험실에서는 pH측정이 거의 필수적으로 되어있다.   칼스버그 연구소와 재단의 역사를 잘 뜯어 보면 아직도 부러운 것이 많다. 소박한 일상생활의 일부인 맥주를 만드는 것부터 그 옛날부터 오랫동안 체계적인 과학적 연구에 기반했다는 점. 거기서 나온 과학적 지식과 기술적 노하우를 다른 곳에서도 쓸 수 있도록 나누어 주었다는 점. 재단에서는 자회사의 업종에 직접 관련된 분야를 훌쩍 넘어서 모든 학문분야가 번성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는 점. 또 그러한 좋은 일을 하는 재단과 연구소가 이미 150년 가까이 창업자의 정신 그대로 유지되어 왔고 아직도 계속 커가고 있다는 점이다. 장하석 /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 과학철학중앙시평 덴마크 맥주 과학적 맥주 맥주 회사 연구비 지원

2022-08-12

[중앙시평] 부활절, 무신론자의 십자가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역사상 가장 거대한 거짓말일 것이다.” 라디오에서 들은 어느 성직자의 단언이었다. 오래전 미국 유학 시절의 부활절 아침이었다. 2022년의 금요일이라는 달력 표기는 선명한 기독교 영향의 증명이다. 우리의 도시 풍경에도 기독교의 흔적은 충만하다. 석양이면 교회 첨탑의 십자가들이 빨갛게 떠오른다. 그런데 십자가들 아래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는 건축전공의 무신론자도 묻혀 살고 있을 것이다. 그가 십자가를 물리적 구조물로 해석하는 건 직업병일 수도 있겠다.   십자가라는 단어에는 형태가 선명하나 막상 학자들의 의견은 분분하다. ‘+’ 모양이 아니고 ‘T’ 형태였다는 주장, 그냥 수직 막대기였다는 의견도 있다. 신약성서의 그리스어 ‘stauros’가 굳이 십자가 형태를 지칭하지 않기 때문이다. 로마의 형벌이니 라틴어가 중요할 텐데 ‘crux’ 역시 형태의 의미가 없다. 그런데 건축적 관점에서 이들의 공통 문제는 불안정 구조체라는 점이다.   일단 재료부터 살펴보자. 이 지방은 목재수급이 좋지 않은 건조기후대다. 성서에는 고급건물 시공 목재로 레바논 삼나무를 수입하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고난 성화에 등장하는 깔끔한 목재는 사형장에 쓰기 아까운 사치재다. 더구나 사람의 하중을 버텨야 할 구조재면 한 사람의 운반 중량을 초과한다. 올리브나무라고 가정해서 20㎝ 각재로 개략 계산해도 200㎏을 넘나든다. 수평부재만 형장까지 지고 갔으리라는 짐작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십자가를 세우려면 기초를 확보해야 한다. 탁자 위의 젓가락이 그렇듯이 십자가를 맨땅 위에 세워 놓을 수는 없다. 고정하려면 땅을 파야 한다. 십자가는 하중상 가분수 구조체다. 무게중심이 높을수록 구조 깊이가 깊어져야 한다. 어림잡아 지상 노출 길이의 절반 정도는 지반에 묻어야 고정이 가능하겠다. 그 깊이면 사람이 들어갈 너비로 작업공간을 확보하며 파나가야 한다. 그런데 십자가가 세워졌다는 골고다는 바위 지형이다. 석회암이 무르다 해도 바위다. 물론 처형장의 상설 구덩이도 짐작할 수는 있으나 십자가형은 수백 명 단위로 이루어진 기록도 있다.   시공이 본격적 문제다. 못 박은 사실은 명시되어 있다. 합리적 순서는 일단 십자가를 눕혀놓고 못질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확보한 구덩이에 하단부를 넣고 십자가를 세운다. 이때 십자가를 임시 고정할 가설장치가 필요하다. 넓게 파야 했던 구덩이는 흙으로 메우려면 엄청나게 잘 다져야 하고 돌로 채우려면 필요량이 너무 많다. 수직부재가 이미 설치되어 있다고 가정해도 거기 수평부재를 걸어 연결하는 것은 어렵다. 두 부재는 확실한 고정, 구조역학 전문용어로 ‘모멘트컨넥션’을 이뤄야 하는데 고난도 기술이다. 더구나 매달린 사형수들은 고통으로 몸부림을 칠 테니 이 방법은 선택 가능성이 낮다.   십자가라는 구조물은 집행 이후 철거해야 한다. 십자가를 눕히려면 기초를 해체해야 하니 이때 기초는 연약해야 하는 모순에 빠진다. 십자가를 세워두고 사다리로 예수를 내리는 성화가 많다. 그러나 허공에서 못을 빼고 인체 무게를 부담하는 공정은 건축적으로는 난공사다. 역학·시공 지식보다 신앙·열정이 앞선 화가들은 물리적 현실을 초월하곤 했다. 그 신심에 따라 십자가는 길고 높아졌다.   건축적 상상력으로 처형자 입장에서 재구성하면 십자가 형태는 ‘+’보다 ‘x’가 훨씬 합리적이다. 우선 역학적 안정구조이므로 얇고 굽은 목재로도 충분히 만들 수 있다. 별도의 기초·가설공사도 필요 없다. 문제는 지게처럼 뒤를 받치는 부재가 하나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수가 지고 간 것은 바로 이 부재가 아니었을까.   1968년에 예수 시대의 유태인 유골 무덤에서 대못 박힌 발뼈 조각이 발견되었다. 어느 쪽 발뼈인지 이견이 있으나 못이 복숭아뼈 뒤를 관통한 상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 비례도 모습처럼 다리를 벌리면 가능해지는 자세겠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고 치욕적 모습이다. 그러기에 처형장치로는 더 적합했을 것이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는 처형을 자원했다는데 ‘x’ 모양이었다면 이해가 쉽다.   그런데 왜 십자가는 ‘x’ 아닌 ‘+’ 모양으로 알려졌을까. 우선 기독교 전파로 부활의 상징이 필요했는데 그게 텅 빈 무덤이기는 어려웠겠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메시아가 갑옷의 전사가 아니고 무력하게 처형된 죄수였다는 걸 설명하는데 곤혹스러워하곤 했다. 그래서 그들은 덜 치욕적이고 상대적으로 우아한 ‘+’ 모양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을까. 십자가는 다만 고난의 표현이되 굳이 수모의 재현일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곧 부활절이다. 인간이 만든 가장 큰 십자가는 건물이다. 직사각형으로 시작된 대성당의 평면이 중세를 지나며 십자가 모양으로 변모해갔다. 부활이 없었다면 건축사도 죄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건축전공 무신론자 입장에서도 ‘x’가 아닌 ‘+’ 모양의 십자가가 다행스럽기는 하다. 도시 야경 곳곳에 빨간 ‘x’가 떠있다고 상상해보자. 섬뜩하지 않은가. 서현 /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중앙시평 무신론자 부활절 이때 십자가 십자가들 아래 고정 구조역학

2022-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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