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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의 영향력 인물 500인'에 한인 8명

LA 비즈니스 저널(LBJ)이 최근 선정한 '2022년 LA의 가장 영향력 있는 500인'에 한인 기업가 등 8인이 포함됐다. 500인은 정치 경제 문화 등 14개 분야를 망라해 선성하는데 한인들은 모두 경제 관련 분야에서만 나왔다.   올해로 7회째를 맞은 500인 리스트에서 뱅크오브호프의 케빈 김 행장과 BAM 벤처스의 브라이언 이 매니징 디렉터는 7년 연속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김 행장에 대해 LBJ는 최근 임기가 2027년 3월까지 연장됐다며 지난해 순익 83% 증가의 호실적을 이뤘다고 전했다.   LBJ는 이 디렉터를 설명하며 이미 '리걸줌' '어니스트' '슈대즐' 등 이전에 이미 여러 기업을 성공시킨 전례가 많다고 소개했다.   2014년 벤처 캐피털 회사인 BAM 벤처스를 설립한 이 디렉터는 소비자 중심 테크놀로지 스타트업에 주로 투자하는 3번째 펀드를 추진 중이며 동시에 LA의 블록체인 기술 및 암호 화폐 관련 기업 등으로 투자 영토를 확대하고 있다. LBJ는 이 디렉터와 함께 BAM 벤처스를 공동 설립한 리처드 전 디렉터도 500인 리스트에 3년 연속 선정했다.   부동산 분야에서는 제이미슨의 제이미·개럿 이 남매가 나란히 꼽혔다. 올해로 5년 연속 뽑힌 제이미 이 제이미슨 리얼티 CEO는 100여개의 빌딩을 관리하며 2018년 이후 LA항 항만위원회 의장, 올림픽 조직위원회 'LA2028' 이사회 멤버, USC 출강 등의 활동을 펼치고 있다.   개럿 이 제이미슨 프로퍼티스 사장은 프로젝트 총괄로 신축과 함께 기존 빌딩의 용도 전환 등을 통해 남가주 지역 3100유닛의 아파트를 포함, 1800만스퀘어피트의 주거용 및 상업용 부동산 개발을 지휘하며 4년 연속 500인 리스트에 포함됐다.   한미은행의 바니 이 행장도 4년 연속 선정됐다. 이 행장은 4분기 기준 2020년 2660만 달러였던 은행 순익을 지난해 3330만 달러로 키웠고 신규 대출 등 주요 지표 목표치를 초과 달성했다. 지난 3월에는 'S&P 글로벌 마켓 인텔리전스'가 선정한 톱 퍼포밍 커뮤니티 뱅크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AG 진' '빅스타 1974' 등 의류 브랜드를 가진 '구스 매뉴팩처링'의 구우율 대표는 사우스게이트에 500명 이상을 고용한 생산공장과 함께 전국 17개 스토어에서 250여명을 채용하고 있다. 1985년 회사를 설립한 뒤 주로 하청 생산을 하다가 2000년 AG 브랜드를 런칭하고 프리미엄 시장에서 꾸준히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올해 새롭게 이름을 올린 한인은 4대 회계법인인 언스트앤영(EY)의 앤디 박 LA 매니징 파트너로 LA 권역 2300여명의 직원을 관리한다. 2005년 인턴으로 EY에 입사한 뒤 고위직까지 오른 케이스로 LA 오피스는 포천 1000대 기업의 40%에 대해 서비스하고 박 파트너는 각 분야에서 기업공개(IPO)를 추진하는 기업들의 자문을 맡고 있다.   한편 지난해까지 3년 연속 리스트에 포함됐던 CBB 은행의 조앤 김 행장은 최근 CBB를 떠나 대만계 은행으로 옮기면서 올해 최종 명단에는 들지 못했다. 류정일 기자영향력 인물 한인 기업가 bam 벤처스 부동산 분야

2022-06-22

인물 모형 관찰해 회화로 승화

샤토 갤러리(관장 수 박)가 시카고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안다빈(사진) 작가의 회화와 조각 작품 개인전 ‘원-오프’를 갤러리 B에서 다음 달 16일까지 개최한다.     안다빈 작가의 가장 최근 작품과 대규모 조각 작품을 모은 이번 전시회에서 로열 코펜하겐 피규어(인물 모형), 즉 작가가 화두로 삼았던 개인의 아카이브를 집중 조명한다   이번 전시에는 작가가 유년시절부터 보고 자란 코펜하겐 피규어로부터 영감을 얻은 회화 작품 6점, 대형 조각품 4점, 벽 설치작품 1점이 소개된다.     수 박 관장은 “인물모형의 특이한 얼굴 표정을 담은 새로운 작품 세계를 소개한다”며 “피규어의 원래 크기보다 10~15배 확대한 작품 뿐만 아니라 35개 마리아상을 모은 작품 등도 감상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안 작가 작품은 일상적인 사물에 대해 예리한 관찰을 하면서 인물 모형의 배경과 거기에 담긴 이야기들을 캔버스에 담고 실제 크기의 폼으로 조각 작품을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여러 작업단계를 거쳐 탄생한 다양한 모습과 표정을 지닌 인물 모형을 관찰해 특이한 점을 회화로 승화시킨다.     전시 작품 ‘님프에게 키스하는 프로메테우스’는 두 캐릭터가 키스하는 모습을 클로즈업해 광택 효과를 주고 신비한 색으로 표현하여 동화 속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회화적 공예작품 ‘미소’는 미묘한 배합의 물감 작업을 캡슐화해 나비 모양의 스티커 및 창틀을 결합해 신비의 미학을 창조했다.   박 관장은 “사실적인 관찰과 내러티브를 결합한 수준 높은 회화적 기교를 보여준다”며 “안다빈 작가의 예술적 주체성이 드러나는 작품을 볼 기회다”고 설명했다.     LA에서 첫 개인전을 여는 안다빈 작가는 배우 안성기씨의 아들로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회화를 공부했다.     뉴욕, 시카고, 서울 등 개인전 및 시카고 아트페어 등 그룹전도 열며 활발하게 비주얼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강의하고 있다.     ▶장소: 3130 Wilshire Blvd. LA     ▶문의: (213)277-1960 이은영 기자회화로 인물 시카고 아트페어 인물 모형 회화적 공예작품

2022-06-19

신약의 인물 탐구: 서른여덟 해 된 병자

 요한복음 5장에는 ‘서른여덟 해 된 병자’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흔히 ‘38년 된 병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기록한 4복음서(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는 유난히 병자가 많이 나오고, 병자가 치유되는 기사 많습니다. 당시에는 의술이 발달된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고, 또한 이런 병으로 인해서 고통 받고, 많이 죽기도 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병 고치는 사역을 통해서 예수님의 구원의 사역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38년이 된 병자’ 우리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38년 동안 낫지 않는 병에 사로잡힌 삶은 암흑 그 자체였을 겁니다. 그런 그에게 희망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평생을 그런 고통 가운데 살았다면 이제 그의 삶에서는 더 이상의 희망도 희미해진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그에게 한 가지 희망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베데스다’라는 연못에서 물이 동할 때에 그 곳에 가장 먼저 들어가면 어떤 병에 걸려 있다고 해도 낫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베데스다’ 연못을 찾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미 수많은 병자들이 자리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요한복음 5장3절.  ‘그 안에 많은 병자가 있었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많다’는 ‘프레토스’로 ‘수많은 사람’, ‘무리’, ‘백성’의 뜻입니다. 한두 명의 병자가 아니라, 엄청나게 많은 병자들이 연못가에서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는 상태였습니다. 38년 동안 낫지 않는 병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희망이란 것이 사라진 상황에서 하나 남은 희망마저도 그렇게 쉬운 환경은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만약에 물이 동한다고 해도 연못 안으로 가야 하는데 이 사람의 병도 매우 중한 상태였기 때문에 스스로 물에 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요한복음 5장7절.         혼자 힘으로는 움직일 수 없는 병자가 자신을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는 상태로 연못가에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어쩌면 그는 자신의 병이 가장 중하기 때문에 연못의 물이 동할 때에 사람들이 자신을 제일 먼저 들어 갈 수 있도록 배려해 줄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닐까요? 오늘 날 사람들은 각자의 문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문제가 가장 중요하고, 심각하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맞습니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문제가 가장 크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누군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그 문제는 별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구에게든 지금 겪고 있는 상황은 그 사람에게 가장 클 수밖에 없습니다. 38년 된 병자, 병을 앓은 지 38년이 되었기 때문에 심각한 것이 아니라 그 병으로 인해서 그가 가장 어렵게 생각하는 상황이 중요한 겁니다. 그가 병을 앓은 지 3개월이 되었다고 심각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병으로 고생하고, 더욱이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단 하나의 희망마저도 얻을 수 없는 상황인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한복음 5장6절.  ‘예수께서 ... ‘보시고’에서 ‘보다’는 ‘호라오’로 ‘찾아내다, 주목하다’의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병자를 우연하게 보신 것이 아닙니다. 그를 주목해 보셨습니다. 오늘 날 우리는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 어떤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혹시 영혼의 문제를 깨달았다고 해도, 그것을 해결할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쩌면 38년 된 병자와 같이 우리 스스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문제를 알고, 분석하지만 해결책은 찾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런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호라오’, 찾아 내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그 분께서 우리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병이 얼마나 중한지를 아십니다. 얼마나 오래 된지도 아십니다. 말하지 않아도,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아십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얼마나 아파하며, 힘들어 하는지도 아십니다. 병자가 자신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소망을 가지고 바라본 것처럼 우리의 인생에 찾아오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간 병자가 경험한 은혜를 목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문제든, 어떤 상황이든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 앞에 오면 해결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시는 주님께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회칼럼신약 인물 병자가 자신 병자 맹인 인물 탐구

2022-04-25

[독자 마당] 11월의 인물들

2021년의 새해 인사를 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1월이다.     11월에 어떤 인물들이 태어났을까.     세계 최초로 마취제를 사용한 의사 크로포드 롱이 1815년 11월 첫날에 태어났다. 1842년 의료 역사상 최초로 외과 수술에 에테르 성분의 마취제를 사용했다.     1839년 펜실베이니아 대학 의대를 졸업했다. 조지아주 제퍼슨카운티에 소재한 ‘크로포드 W 롱 의학박물관’에 그의 연구 서적과 국부 마취제 견본이 소장돼 있다.     11월 마지막 날에는 영국의 수상을 지낸 정치가 윈스턴 처칠이 출생했다. 1874년 태어난 그는 웅변가, 저자, 화가, 군인, 기자로 활동했다.     제2차 대전 때 영국은 홀로 나치 독일에 맞서 싸워야 했다. 처칠은 그의 용기, 언변, 자신감 등으로 나치에 대항해 전쟁 영웅이 됐다.     작은 키에 시가를 문 모습과 손가락으로 표시했던 ‘V’자 제스처는 그의 매력을 더해 주었다. 또한 그는 역사와 전쟁을 기록했고 자서전을 펴내기도 했다. 1953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1965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1월 24일 숨을 거뒀다. 향년 90세다.     1890년 11월 22일에는 프랑스의 정치가이면서 레지스탕스 운동가인 ‘샤를 드 골’이 태어났다. 1911년 프랑스의 유명 사관학교 ‘생시르’를 우등으로 졸업했으며 나중에 교관으로 군사학을 강의했다. 임시정부 주석을 거쳐 제5 공화국의 대통령이 됐다.     드 골이 우렁찬 목소리로 “프랑스 병사들이여! 그대들이 어디에 있든지 힘차게 일어서라”고 외치는 연설에 프랑스 청년들은 열광했다. 드 골은 1970년 11월 9일 세상을 떠났다.     의학계 발전에 획기적인 공헌을 했던 의사와, 영국과 프랑스의 역사를 이끈 두 명의 정치인이 이번 달에 태어났다.   윤경중·연세목회자회 증경회장독자 마당 인물 프랑스 청년들 프랑스 병사들 의사 크로포드

2021-11-12

[2018 올해의 인물] "내년은 한인사회 정치력 총집결할 때"

올해 셸터·방글라 구획안은 역량 시험하고 표출한 기회 보궐선거·대선·센서스 등 내년부터 정치 이슈 이어져 유권자 등록으로 힘 키워야 차갑고 뜨거운 한 해였다. 지난 4월 허브 웨슨 LA시의장이 LA한인타운 심장부에 갑자기 노숙자 임시 셸터를 세운다고 발표를 하면서 한인들의 공분을 불러 일으켰다. 비슷한 시기 방글라데시 커뮤니티는 한인타운을 사실상 반토막 내는 한인타운 분할안을 추진했다. 한인들은 주말 윌셔 불러바드에 나와 피켓을 들었고 아침부터 투표장에 나와 한인타운 분할안 반대에 표를 던졌다. 한인타운 분할안 반대에 앞장선 한 로라 전 LA한인회장(사진)의 1년을 들었다. -2018년 LA한인사회를 총평해달라. "한인사회 스스로를 재점검하는 해였다. 잠재적 능력을 발견하고 스스로 뭉칠 수 있는 기회였다. 도약할 수 있는 시간을 얻었다." -무엇을 재점검했다는 것인가. "한인사회는 정치, 경제적으로 축적된 역량이 있었다. 그 역량을 시험하고 표출하는 해였다. (한인타운 셸터 설치, 방글라데시 한인타운 분할안 반대 등) 사태를 통해 어떤 점이 강하고 약한지 점검했다. 한인사회의 맨얼굴을 봤다." -즐거운 일도 있었다. "방글라데시 커뮤니티의 한인타운 분할안이 오히려 한인들을 뭉치게 하는 기회가 됐다. 한인타운을 지키기 위해 이민자 1세부터 1,5세, 2세까지 의기투합해 반대 운동을 펼쳤다. '멀티제너레이션'이 커뮤니티를 함께 가꾸는 것은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다. 이번 일로 한인 2세들과의 접촉면이 넓어져 다양한 사업을 모색할 수 있게 됐다." -2019년 신문지면에는 어떤 일들이 소개될까. "내년엔 LA시의회 보궐선거가 있고, 2020년에는 대선, 인구 센서스 조사가 있다. 2021년에는 4개 지역으로 쪼개진 한인타운 선거구 재조정이 있다. 내년부터 한인 유권자 등록을 해야 커다란 정치적 이슈를 대비할 수 있다. 유권자 등록은 한인들의 집결된 힘을 가장 직접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일이다. 미주에서 가장 큰 한인회 조직으로서 모범 사례를 만들겠다." -한인타운이 좀 더 깨끗하고 안전했으면 좋겠다. "LA시 커뮤니티 플랜에 한인의 목소리가 제대로 전달 되도록 힘쓰겠다. 수년에 한 번씩 LA시가 커뮤니티의 장기 계획을 짠다. 내년 장기 플랜이 다시 세워진다. 한인타운은 개발이 가장 빠르게 일어나는 지역이며 상업 활동이 활발한 지역이다. 한인타운의 도로와 녹지, 복지시설 등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측면에서 우리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어가도록 뛰겠다." -한인사회가 어떻게 하면 더 살기 좋아질까. "일생 생활이 바쁘다. 하지만 우리가 소수민족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주류사회가 알아서 챙겨주는 것은 없다. 우리가 주장하고 차지하고 지켜야 한다. 자발적인 정치 참여가 필요하다. 밖에서 비판하기는 쉽지만 참여해 바꿔나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다음으로는 관심과 후원이다." 황상호 기자 hwang.sangho@koreadaily.com

2018-12-20

2018년 올해의 인물 (3) "한인 청년들 멘토로 공직 진출 돕겠다"

지난 중간선거에서 '20년 만에 한인연방의원 탄생'은 의외의 지역구에서 앤디 김(민주·36) 당선인이 이뤄냈다. 올해 초 연방하원 뉴저지 3지구에 앤디 김 당시 후보가 출마를 한다고 선언했을 때 그는 많은 주목을 얻지 못했다. 뉴저지주에는 현역 3선 톰 맥아더 의원이 건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 당선인의 지역구인 '뉴저지 연방하원의원 3선거구'는 유권자 65만명 가운데 백인이 85%에 달하는 지역으로, 한국인은 300여 명에 불과하다. 하지만 김 후보는 열정적인 선거운동을 이어갔다.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맥아더 의원이 오바마케어를 대체 할 '트럼프 케어'의 설계자로 불릴 만큼 트럼프와 친밀한 관계기 때문에 뉴저지 3지구가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심판대' 역할을 할 것이라고 봤다. 물론 김 후보 개인의 역량과 경력도 선거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오바마 전 대통령 시절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이라크 담당 디렉터로 활동하는 등 화려한 경력을 갖췄다. 오바마 전 대통령의 공식지지를 받으며 '반 트럼프' 성향을 부각하기도 했다. 앤디 김 후보는 선거전이 본격화된 하반기부터 서서히 지지율 격차를 좁히기 시작해 오차범위 내에서 접전을 펼쳤다. 주류매체에서도 전국에서 가장 치열한 선거구로 꼽을 정도였다. 이후로 상대후보 측에서 인종차별적인 내용을 담은 홍보물을 배포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하지만 그는 "유권자들이 보는 것은 아시안으로서 앤디 김이 아닌 뉴저지 남부에서 평생을 살아오면서 가정을 꾸린 두 아이의 아빠 앤디 김을 봐줄 것"이라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결국 당당하게 현역의원을 꺾고 당선을 기쁨을 거머쥐었다. 김 당선인은 본지와의 인터뷰를 통해서 "한인들의 성원 덕에 당선이 된 것을 잘 알고 있다"며 "한인 청년들이 공직에 출마할 수 있도록 많은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2019년 본격적으로 의정활동을 시작하는 당선인은 중간선거 이후 처음으로 18일 뉴욕 한인 커뮤니티를 방문했다. 김 의원은 맨해튼 소재 뉴욕 한인이민사박물관을 방문해 "정치, 외교 등 사회의 다양한 분야의 꿈꾸는 학생들이 미국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최대한 많이 다가가 그들의 멘토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또 "피부색이나 인종, 출생과 무관하게 모두가 '아메리칸 드림'을 이룰 수 있어야 한다"며 "미주 한인 이민 역사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이날 김 의원은 뉴욕 한인이민사박물관의 위안부 소녀상 및 전시된 100여년 이상의 한인 역사를 둘러봤다. 그는 "이민사박물관을 통해 코리안아메리칸의 역사를 배울 수 있어 감사하다"며 "우리 가족을 포함한 1세대들의 삶을 느끼는 계기가 돼 기쁘다"고 소감을 전했다. 내달 3일부터 임기를 시작하는 김 의원은 지역구 주민들을 살피는 것에 가장 우선순위를 둘 것이라고 했다. 그는 "어려운 주민과 가족들에게 건강보험의 기회를 마련하겠다"며 "지역의 가족을 지키고 자녀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커뮤니티를 만들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2019회계연도 아시안아메리칸 연방 상·하원의원= 2019년 시작되는 새 의회에 아시안 아메리칸이 연방 상·하원의원에 12명인 전체의 6%를 차지했다. 퀸즈칼리지가 발표한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아시안아메리칸의 연방상·하원의원은 각각 1명, 11명으로 총 12명이다. 전체 수는 지난 2016년의 15명(상원 12명, 하원 3명)에 비해 3명 감소했지만, 한인에 앤디 김 의원이 포함돼 코리안아메리칸이 1명이 추가됐다. 인종별로는 아메리칸원주민(3명)·일본계(3명)·중국계(2명) 등이다. 조원희·박다윤 기자

2018-12-19

2018 '올해의 인물'…"자금에서 밀렸을 뿐 2년뒤에는…"

남가주 한인 정치 일번지로 통하는 오렌지카운티. 오렌지카운티에서도 대표적 한인 정치인 중 한 명으로 영 김(56.공화.사진)을 꼽을 수 있다. 지난 2014년에 현역의원이었던 섀런-쿼크 실바를 누르고 캘리포니아 주의회에 입성하는 기염을 토했던 영 김은 20년 만의 한인 연방의원 탄생에도 도전했으나 결국 역전패를 당하며 고배를 마셨다. 지난 11월7일 현장투표 집계가 끝난 직후만 해도 영 김은 5000여 표를 앞섰지만 우편투표 집계가 시작되자 격차가 줄기 시작해 결국 리드를 빼앗겼다. 캠페인 관계자는 "영 김씨는 발로 뛰는 선거를 했다"며 "지역구 모든 행사에 참석하고 가가호호 방문하는 등 그 이상 열심히 뛸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상대후보의 엄청난 물량공세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영 김도 "패인은 후원금 대결"이라고 인정했다. 2억6600만 달러 로토에 당첨돼 실탄이 많았던 길 시스네로스(민주)에 맞설만한 후원금을 모금하지 못했다는 설명이다. 그는 "상대후보가 정치 초년생이지만 로토 당첨금이 뒷받침돼 돈을 쓸 수 있는 힘이 있었다"며 "또 민주당은 2년 전에 이 지역에서 힐러리가 이긴 지역이라 자신감을 얻었고, 이를 후원금 모금으로 연결했다. 우리 캠프보다 5배의 선거자금을 쏟아부어 재정적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다. 영 김은 250만 달러를 모금한 반면, 시스네로스는 사재 1000만 달러 이상을 투입했다. 특히 민주당은 정치활동후원회(PAC)를 통해 마이클 블룸버그와 톰 스타이어 등 유명 억만장자들까지 오렌지카운티 일대 하원선거에서 막대한 후원금을 투입했다. 그러나 영 김은 오뚝이처럼 일어서겠다고 다짐했다. 최근에는 한인행사에도 자주 모습을 드러내며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트럼프 시대 들어 캘리포니아는 '파란 물결'이 강하게 불어닥쳤다. 일각에서는 공화당이 이번 중간선거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면서 파란 물결이 더욱 강하게 몰아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하지만 아직 공화당에서 포기하기 이르다는 지적도 나온다. 제프리 프랑 LA카운티 재산세 산정관 캠페인에서 일했던 다비 르빈은 본지와 통화에서 "2년 뒤에는 공화당이 이길 것으로 본다. 2년 뒤에는 대선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절대로 올해만큼 선거자금을 오렌지카운티에 집중투입하지 못하리라고 본다"며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과연 영 김이 2년 뒤 시스네로스를 상대로 재도전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원용석 기자 won.yongsuk@koreadaily.com

2018-12-18

[인물 오디세이] 3랩 에리카 정 대표, 아름다운 완벽주의자, 성공신화 쓰다

대학 재학 중 미국 유학 한국기업 뉴욕 지사장 10년 남편과 화장품 가게로 출발 소매체인, 제조업까지 확장 03년 고가 브랜드 3랩 론칭 3년 만에 고급 백화점 입점 광고비 안 쓰고 품질로 승부 작년 매출액 4천만불 달성 사진 속 그녀는 천상여자였다. 단아함과 여성스러움이 물씬 풍기는. 그러나 웬걸, 직접 만나보니 그녀가 이미 전화상으로 선전포고(?)했듯 대장부도 이런 대장부가 없다. 바로 화장품업계에서 독보적인 성공신화를 써내려가고 있는 3랩(3LAB) 에리카 정(61) 대표다. 대화가 시작되고 10분도 채 안 돼 그녀의 카리스마는 빛을 발했다. 좋고 싫음이 분명한 화통한 성격에 타고난 친화력으로 좌중을 휘어잡는 본새는 그녀가 어떻게 지금의 자리까지 왔는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대화 도중 간간히 튀어나오는 대구 사투리가 매력적인, 이 타고난 사업가를 전나무 숲이 우거진 그녀의 뉴욕주 주말 별장에서 만나봤다. #대구 아가씨, 뉴요커 되다 대구에서 나고 자란 그녀는 계명대 작곡과 재학 중이던 1979년 일리노이주 소재 어거스타나 칼리지로 유학 와 정치학과 미술을 복수 전공했다. 미술 공부를 시작한 것은 한국 추상화가의 개척자이며 계명대 미술대학장을 지낸 부친 고(故) 정점식 화백의 영향이 컸다. "한국에서 음대에 간 건 졸업 후 시집 잘 간다고 믿었던 어머니의 반 강요 때문이었고(웃음) 저는 어려서부터 꿈꿨던 좁은 한국을 떠나 보다 더 넓은 세계에서 살고 싶어 부모님을 졸라 오빠가 유학 중이던 미국으로 왔죠." 대학 졸업 후인 1985년 그녀는 뉴욕 리먼칼리지에서 정치학 석사과정을 시작했다. 그러나 객지에서 혼자 지내는 혼기 꽉 찬 막내딸 걱정에 모친은 그녀를 한국으로 불러들였고 1986년 귀국한 그녀는 신라호텔 공채 경력직으로 입사, 1년6개월간 VIP담당자로 근무했다. 이후 1987년 연세대 행정대학원에 진학해 공부하던 중 동국방직 뉴욕 지사장직 제안을 받고는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다. 1988년 어느 봄이었다. "그곳에서 일하며 세계 각국의 패션 관계자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는데 그러면서 언젠가 꼭 성공해 저들처럼 자가용 비행기를 타며 살고 싶다는 꿈을 꿨던 것 같아요.(웃음)" #그녀의 성공시대 1990년 그녀는 현 잉글우드랩 데이비드 정 대표와 결혼했다. 1년 뒤 부부는 뉴저지에 화장품전문점 '모나스'를 오픈했다. 부부의 타고난 비즈니스 수완 덕분에 사업은 승승장구했고 인수당시 하루 매출 500달러이던 것이 6000달러로 껑충 뛰어올랐다. 여세를 몰아 1년 뒤 부부는 뉴욕과 LA에 '코스메틱 월드'도 오픈했다. 그러다 1997년 데이비드 정 대표가 '엘리자베스 아덴'의 한국 총판권을 따게 되면서 부부는 한국행을 결심하고 그녀는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한국에 가 얼마 지나지 않아 IMF가 터져 1년 뒤 막대한 손실만 입은 채 부부는 다시 뉴욕으로 돌아왔다. 이후 심기일전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든 그녀는 2000년 온라인 화장품 쇼핑몰 '마이디바닷컴'을 론칭했다. 주로 한국 고객들을 상대로 화장품을 배송해 줬는데 요즘 한국에서 유행하는 해외 직구의 원조였던 셈. 쇼핑몰은 대히트를 쳤고 이를 계기로 그녀는 오래 전부터 꿈꿔왔던 자체 브랜드 론칭에 착수, 2003년 3랩을 선보였다. 제조는 뉴저지 소재 한 화장품 제조공장에 맡겼고 판매는 '코스메틱 월드'에서 시작했다. 당시 3랩 제품의 소매가는 100~400달러 선. 처음 하는 브랜드 사업인데 안전하게 중저가 브랜드부터 론칭할 생각은 안했냐는 질문에 그녀가 호탕하게 웃는다. "그러게요. 수익만 놓고 보면 당연히 중저가를 만드는 게 낮죠. 그런데 뭘 하나 하더라도 완벽하게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보니 론칭 전부터 제가 쓰고 싶은, 세상에서 최고로 효과 좋은 화장품을 만들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웃음)" 론칭 후 반응은 좋았다. 여타의 광고 없이 오로지 샘플로만 승부했음에도 이 신생 브랜드는 입소문을 타고 불티나게 팔려 나가 매장 한곳 당 연 매출액이 60만달러를 넘어설 정도였다. #이 여자가 사는 법 2005년 부부는 화장품 제조업체인 '잉글우드랩'도 설립했다. 1년 뒤 3랩은 뉴욕 삭스핍스애비뉴 백화점에 입점했고 이듬해엔 바니스 전국 매장에, 2009년엔 노스트롬의 전국 22곳 매장에도 3랩 간판을 걸 수 있었다. 또 2006년 독일을 시작으로 영국, 홍콩, 두바이, 러시아 등 18개국에 진출했다. 이처럼 3랩이 론칭 3년 만에 고급 백화점은 물론 해외시장까지 진출 할 수 있었던 것은 할리우드 스타들의 입소문 공이 컸다. 당시 제니퍼 로페즈, 힐러리 스윙크, 파라 포셋 등 유명 배우들이 3랩 'WW크림'의 열혈 팬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주류사회 '부잣집 사모님'들의 이목을 잡아 끈 것이다. 이후 3랩은 수퍼세럼, 수퍼크림, H세럼 등 연이은 히트작을 내놓으며 매년 20%이상의 매출신장을 보이며 성장해 지난해엔 연 매출 4000만달러를 돌파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늘 꽃길만 걸어 온 것은 아니다. 믿었던 직원들에게 배신을 당해 큰돈을 날리기도 수 차례였고 2005년 한국에 진출해서는 '가짜 명품' 논란에 휘말리며 방송에까지 오르내리는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 "사업을 하다 보면 별별 사람, 별별 일을 다 겪게 돼요.(웃음) 그러다보니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 공부를 시작했고 그 길에서 불교를 만나게 됐죠. 그러면서 있는 그대로의 세상과 사람을 보는 눈이 생긴 것 같아요. 물론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요.(웃음)" 처음엔 그녀가 불자가 된 것을 탐탁지않게 여겼던 사춘기 아들 피터씨는 NYU 국제정치학과에 진학해 명상 수업을 듣는 등 수행에 관심을 갖다 5년 전 출가해 백담사를 거쳐 얼마 전 김천 직지사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아무리 불심 깊은 신자라 해도 외아들의 출가를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터.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구도자의 삶을 살겠다는 데 말릴 이유가 없죠. 그래서 남편이나 저나 모두 응원 중입니다.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게 인생인데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주변 사람들에게든 좋은 에너지를 나눠주며 살고 싶거든요. 그래서 앞으로 젊은이들에게 좋은 멘토가 되고 벤처 기업도 설립해 그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은 게 꿈이기도 합니다." 오호라, 그녀 이미 평상심 한가운데에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평상심이란 본디 원래부터 고요한 마음이 아닌 흔들리는 물결 위에서도 고요한 것이니 그녀 즉심즉불(卽心卽佛, 마음이 곧 부처)의 경계 어디쯤에서 서성이는 것은 아닐는지. 그 경계 무장무애 하니 깨달음이 지척이 아니겠는가.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2018-04-15

[인물 오디세이] 현대차 미주 디자인스튜디오 최수민 매니저, 상상 그 이상을 디자인하다

중2때 뉴욕 가족이민 독일유학 후 유럽서 활동 포르셰·오펠·폭스바겐 거쳐 05년 미국 BMW로 와 2012년 현대차 입사 ‘이오니크’ 론칭해 주목 2015년 고성능 콘셉트카 독일 오토쇼서 선보여 극찬 대개 직업에 대한 판타지는 실제 그 직함을 가진 이를 만나는 순간 십중팔구는 깨지기 마련. 그러나 이 불문율을 보기 좋게 배신한 이가 있다. 현대자동차 미주 디자인스튜디오 최수민(53) 크리에이티브 매니저다. 180cm가 훌쩍 넘는 큰 키에 청바지와 진녹색 스웨터, 스니커즈를 무심한 듯 시크하게 매치한 그에게선 한 눈에도 디자이너만의 아우라가 느껴졌다. 게다가 지천명을 넘겼다고는 믿기지 않는 동안까지. 그러나 이보다 더 마음을 잡아 끈 것은 지칠 줄 모르는 그의 열정이었다. 이제 막 사랑에 빠진 로미오의 눈빛이 이러하려나. 차 이야기만 나오면 볼 빨간 사춘기 소년마냥 설렘 한 가득이다. 듣는 이까지 덩달아 그 설렘이 전염될 것만 같았다. 포르쉐와 폭스바겐, BMW 등 세계 명차 브랜드를 거쳐 6년 전부터 현대 차에서 새로운 꿈을 꾸고 있는 그를 현대차 어바인 스튜디오에서 만나봤다. #소년, 차와 사랑에 빠지다 그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차라면 껌뻑 죽었다. 또래 친구들이 만화책에 빠져 있을 때 소년은 서울 청계천 헌책방에 앉아 미국 자동차 전문잡지를 뒤적였고 방과 후엔 동네 폐차장을 놀이터 삼아 자동차 부품 구경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당시 국산차로는 현대 포니가 유일했는데 포니를 몰던 택시기사님들이 너무 멋져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어린 시절 제 장래희망은 늘 택시기사였습니다.(웃음)” 이처럼 평범한 유년생활을 보내던 중 농구 국가대표 선수였던 부친이 사망하면서 가족은 1978년 뉴욕으로 이민 왔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어린 그에게 이민생활이 녹록할 리 없었지만 어려서부터 해온 농구 덕분에 그는 퀸즈 소재 고교 농구팀 창단 역사상 최초의 아시안 선수로 발탁될 만큼 화려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고교졸업 후 1985년 뉴욕 소재 프랫인스티튜트에 진학,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졸업 후 잠시 가구 디자이너로 일하다 한국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에 1991년 서울로 가 쌍용자동차 디자인팀에 입사했다. “당시 회사가 벤츠와 함께 합작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는데 벤츠 책임자가 제게 자동차 디자인 공부를 제대로 해보라며 독일 유학을 권유했죠.” 1년간의 유학준비 끝 그는 1994년 독일 포르츠하임대학교 대학원 자동차디자인학과 준석사(post graduate)과정에 입학했다. #세계를 무대로 승승장구 방학 때도 학교에 남아 공부할 만큼 악착스레 학업에 매달린 덕분에 졸업 무렵엔 독일 유명 자동차 제조사들의 인턴십 제안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중 오펠과 포르쉐에서 인턴쉽을 마친 그는 1995년 포르쉐에 계약직 디자이너로 입사했다 1년 뒤 오펠사가 그에게 대학원 학비전액 후원 등 파격적인 제안을 해와 고심 끝 이직했다. 회사의 후원으로 1996년 그는 패서디나 아트센터 대학원 자동차디자인학과에서 석사과정을 시작해 2년 뒤 학위를 취득했고 쌍용차 후배인 아내 김민경(46)씨와 결혼 했다. 이후 독일 프랑크푸트르로 건너가 오펠 본사에서 2년6개월을 근무하면서 그는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냈다. 특히 그가 디자인한 오펠의 5도어 ‘아스트라 해치백’과 스포티하면서도 실용적인 ‘벡트라 왜건’은 큰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2001년 그는 폭스바겐이 야심차게 추진해 바르셀로나 인근 소도시에 설립한 어드밴스드 콘셉트 스튜디오로 자리를 옮긴다. 그 스튜디오는 당시 자동차 디자이너들이라면 누구나 입사하고 싶어 하는 꿈의 직장이었는데 폭스바겐사는 그와 오펠이 체결한 5년 근무계약을 지키지 못해 발생한 위약금까지 물어줄 만큼 그의 영입에 공을 들였다. 그곳에서 수퍼바이저 디자이너로 근무한 그는 2001년 북미 오토쇼에서 호평 받은 크로스오버 차량인 ‘마젤란’을 비롯해 폭스바겐 자회사인 아우디의 수퍼카 R8, 부가티 쿠페 등을 디자인해 주목받았다. 그리고 2005년 그는 캘리포니아 사우전드오크스 소재 BMW 미국 디자인스튜디오로 자리를 옮겨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근무했다. 2000년대 중후반 마니아들에게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던 고성능 차량 X5M과 X6M, 미니 등이 그의 손끝에서 탄생했다. #한국차에 대한 오랜 꿈 이처럼 커리어에 있어 황금기를 구가하던 2012년 그는 돌연 현대차로 이직한다. 그의 상사였던 BMW 디렉터가 미주 현대차로 자리를 옮기며 그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해 온 것. “좀 고민을 했죠. 그러다 마지막 커리어를 한국 회사와 함께 하는 것도 의미 있을 거란 생각이 들더군요. 유년시절 포니를 보며 막연하게 꿨던 꿈이 이뤄지는 순간이었죠.(웃음)” 현대에 와서도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은 계속됐다. ‘프리우스 킬러’라는 슬로건을 내건 아이오닉(IONIQ)이 지난해 출시돼 좋은 반응을 얻고 있으며 2015년엔 프랑크푸르트 오토쇼에서 콘셉트카 ‘N 2025 비전 그란투리스모’를 선보여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원래 그 모델은 소니 플레이스테이션과 공동제작한 게임용 레이싱카가 원조인데 최근 현대가 론칭한 고성능 브랜드 N의 방향성과 개발잠재력을 보여주기 위해 실제 모델로 제작한 거죠. 예산만도 15억원이 투자됐고 수작업 공정까지 만만치 않은 프로젝트였죠.” 이 콘셉트카가 오토쇼에서 베일을 벗자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현지 관계자들은 물론 영국 유명 오토매거진 ‘톱기어’ 등 전문가들의 찬사가 쏟아졌다. “전문가들의 극찬보다 더 좋았던 건 한국의 자동차 마니아들의 호평이었어요. 한국에서 이런 차가 탄생해 너무 감격스럽다는 평가들을 보니 너무 뿌듯했죠.” 24시간 자동차 생각으로 가득 찬, 열정으로 똘똘 뭉친 이 남자의 다음 목표는 무엇일까. “N브랜드 개발에 박차를 가해 고성능 차 개발에 헌신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한국 차라 하면 값싸고 대중적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대한민국 국민과 전 세계 한인들이 자부심을 가질만한 탁월한 고성능 차를 만들어보고 싶어요. 소울이 깃든 차 말입니다.” 그에게 자동차란 꿈이며 종교라 했다. 30년 세월 그 바닥에서 잔뼈 굵으면 지겨울 법도 한데 차에 대한 열정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었다. 천재 화가 파울 클레는 말했다. ‘예술은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다’라고.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지금 그가 꿈꾸는 차가 언젠가 그 베일을 벗고 우리 앞에 서는 날이 올 것이다. 그리 오래지 않아, 위풍당당하게.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2018-04-08

[인물 오디세이] 나눔 실천 앞장서는 이의진씨 "나누는 삶이 내 행복의 원천"

한국서 잘나가던 사업가 IMF때 망해 무일푼 LA와 청소·식당·목수 헬퍼 전전 6년전 LA에 분식집 오픈 어려운 이웃·노숙자 위해 작년 한해만 1만불 기부 "죽을 고비 넘긴 인생 이웃 도울 수 있어 행복"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치른 고희(古稀)를 목전에 둔 사내의 순수한 마음이라니.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그 마음이란 게 누구나 한 번쯤 삶의 고비를 겪으며 다짐했던 '언젠가 지금의 나와 같은 어려운 처지에 처한 이를 보면 꼭 돕겠다'는 일견 평범한 결심이라는 걸 알게 된다. 다만 대부분의 이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어버리는 걸 그는 기어코 지켜내고 있는 것일 뿐. 바로 이의진(68)씨다. 롤러코스터처럼 부침 심한 LA살이 20년이었지만 그 누구보다 행복한 시간을 통과하고 있다는 그의 인생이야기를 들어봤다. #잘 나가던 사업가에서 가난한 이민자로 부산에서 나고 자란 그는 일찍 부모님을 여위어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건설현장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리고 1982년 그간의 경험을 밑천삼아 건설 사업에 뛰어들었다. 주로 4~5층 규모의 상가 건물이나 주거용 빌라를 시공해 팔았는데 당시 부동산 경기 붐을 타고 사업체는 성장가도를 달렸다. 덕분에 90년대 중반 그가 소유한 부동산만도 빌라와 상가 등 10여 채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역시 1997년 터진 IMF사태를 비껴갈 순 없다. 공들여 추진한 30억 규모의 공사 계약 건이 은행융자 불발로 엎어졌고 IMF로 일자리를 잃은 세입자들의 앞 다퉈 전세금을 빼달라는 독촉전화가 이어졌다. "당시엔 제 정신이 아니었죠. 그래서 모든 부동산과 재산을 처분하고 아내에게 살집 하나 간신히 장만해 주고 무작정 서울로 갔어요. 죽을 각오였죠." 그리곤 다음 날 아침 그냥 무작정 인천공항으로 가 LA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항공권을 끊고 나니 수중에 남은 돈은 620달러가 전부였다고. "당시엔 삶의 의욕이 없었어요. 그냥 무조건 한국을 뜨고 보자는 생각뿐이었죠." LA공항에 도착해 한인택시를 잡아 탄 그는 택시 기사의 소개로 월 400달러짜리 LA한인타운 하숙집에 짐을 풀었다. 짐이라고 해야 세면도구와 속옷이 든 배낭 하나가 전부였다. 1998년 6월의 어느 날이었다. #산전수전 LA살이 20년 이후 용접공 보조로, 목수 헬퍼로도 일했지만 기술이 없다보니 번번이 잘리기 일쑤였고 결국 하숙비를 내지 못해 쫓겨나게 됐다. 이후 LA인근 소도시를 전전하며 식당 일에 하우스 청소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 그리고 한국에 있는 아내도 데려왔다. "한 2년쯤 그렇게 일했는데 정말 힘든 시간이었죠. 약속한 월급을 못 받기도 하고 인격적인 모독도 비일비재했으니까요. 같은 한인들끼리 그러는 게 더 화나고 야속했습니다." 이후 우연찮게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그간의 힘든 시간을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방송이 나간 후 일자리를 알선해주겠다는 청취자들이 온정이 답지했다. 그래서 그는 LA한인타운 소재 아파트 매니저로 취직할 수 있었고 아파트도 제공받았다. 덕분에 한국에 있는 아들과 딸도 데려 올 수 있었다. "다시 LA한인타운에 정착하곤 정말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이곳저곳에서 일자리를 주겠다는 이들이 생겼고 응원과 격려도 아끼지 않으셨죠." 가족들은 재기를 위해 힘을 합쳤다. 온 가족이 돈을 벌기 시작하니 금세 돈이 모였단다. 덕분에 2002년엔 LA베벌리센터 인근에 작은 샌드위치숍을 인수했고 그해 LA한인타운에 주택도 장만할 수 있었다. 주택을 리모델링해 하숙 사업을 시작했고 아들은 햄버거 가게를 열었다, 그러나 얼마 안가 아들의 사업에 문제가 생기면서 사업체와 집까지 날린 그는 다시 아파트 매니저로 취직했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다시 열심히 일한 그는 2012년 LA한인타운에 '김밥천국'을 오픈할 수 있었다. 2016년엔 토런스에 2호점도 오픈해 딸네 부부에게 맡겼다. 그리고 최근 그는 LA점을 팔고 현재는 딸네 부부의 식당일을 도와주고 있다. #나누면 행복 두 배 이처럼 평범한 식당 주인이었던 그가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지난 2016년 연말 본지에 노숙자들을 위해 써달라며 2000달러를 기탁하면서다. "어휴 정말 부끄러웠죠. 그저 할 일은 한 건데요 뭘. 그 무렵 중앙일보에 게재된 노숙자 심층기사를 읽고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 그 사람들도 그렇게 되고 싶어선 된 게 아니거든요. 제가 겪어봐서 그들의 사정을 너무 잘 아니까요." 순간 그의 눈가가 붉어지더니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 눈물의 의미를 물어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저 지난했던 20년 LA살이가 주마등처럼 지나간 탓이리라 짐작만 해 볼뿐. "죽을 생각까지 했던 제게 지금의 삶은 보너스죠. 게다가 많은 한인들의 도움으로 지금에 이르렀으니 저도 보답하는 의미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며 살고 싶을 뿐입니다." 그의 기부와 이웃돕기는 하루아침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아파트 매니저로 일할 땐 형편이 어려워 쫓겨나게 생긴 세입자들을 위해 렌트비를 대신 내주고 식료품까지 사 들려줘야 발 뻗고 잠을 잘 수 있었단다. 또 식당 앞에 노숙자라도 오면 입던 옷을 벗어주는 건 물론 다음날 집에서 이불까지 챙겨왔다고. 이후 식당 사업이 자리 잡으면서는 한인사회 크고 작은 봉사단체에 기부를 해왔고 작년 봄엔 한국에서 입양한 7남매를 키우다 어려운 사정에 처한 김영란씨 관련 본보 기사를 읽고 2000달러를 쾌척하기도 했다. 그렇게 기부한 돈이 작년 한해만 1만달러가 넘는다. 그리고 지난 1월에도 노숙자들을 위해 2000달러를 본지에 쾌척했고 조만간 1만달러를 또 기탁할 예정이란다. 도대체 무엇일까. 부침 심했던 인생인 만큼 만일을 대비해 쌈짓돈이라도 모으려 드는 게 인지상정일터인데 기부라니. "힘든 이들에게 작은 도움이나마 될 수 있다 생각하면 얼마나 뿌듯한데요. 그래서 요즘은 돈 버는 것보다도 누군가를 도와주려 돈 쓰는 게 훨씬 더 행복합니다." 그에게 물었다. 행복하냐고.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행복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요 근자에 자신의 행복을 이토록 확신하는 이를 본적이 있었던가. 돈과 명예가 넘쳐나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이들조차 미래를 걱정하느라 현재를 불안에 저당 잡혀 사는 각자도생의 시대에 이 김밥집 사장님의 확신은 묘한 힐링을 건넸다. 톨스토이의, 아니 인류의 오래된 물음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답이 스치는 순간이었다. 단언컨대 유레카.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2018-04-01

[인물 오디세이] LA한인타운 시니어커뮤니티센터 이영송 이사장, 인생 최고의 황금기는 지금부터다

작년 센터 이사장 취임 활성화 위해 동분서주 "은퇴 후 인생 후반전 도전하며 행복 찾고파" 인생이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닌 경험해야 할 여정임을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래서일까. 삶의 힘든 고비에서도 서두르는 법 없이 침착했고 길 떠난 소년의 유쾌함마저 엿보였다. LA한인타운 시니어커뮤니티센터(이하 시니어센터) 이영송(74) 이사장이다. 잘나가는 치과전문의로, 사업가로, 또 한인사회 유명인사로 어느새 40년 세월이지만 꽃길만 즈려밟는 인생이란 있을 수 없듯 그 역시 행복과 시련을 들실 날실 삼아 오늘에 이르렀다. 그리고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이 희로애락 속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건 아닌 인생을 통찰할 수 있는 지혜를 손에 쥔듯 했다. 그 지혜를 발판삼아 자신만의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는 그를 시니어센터에서 만나봤다. #잘 나가는 치과전문의 되다 평안북도 태천 출생인 그는 한국전쟁 통 유년시절 대부분을 대전과 경북 경산 등지에서 피란생활을 하며 보냈다. 전쟁이 끝난 후 내과의였던 부친은 서울 후암동에 병원을 개원했고 그는 1963년 서울대 치대에 입학했다. "진로를 결정하는 데 아버지의 영향이 컸죠. 피란 생활을 하면서 아버지는 늘 의사가 되면 밥은 안 굶는다고 하셨거든요.(웃음)" 대학 졸업 후 세브란스 병원에서 인턴과 레지던트를 거친 그는 병원 후배였던 아내와 함께 1975년 LA로 왔다. 이듬해 USC 치대에 입학해 보철전문의가 된 그는 1979년 가을 이스트LA 위티어에 병원을 개업했고 1981년부터는 USC 치대 임상 조교수로도 6년간 근무했다. 병원은 오픈과 동시에 문전성시를 이뤘다. "치대 시절 제 별명이 골드 핑거였어요.(웃음) 개원 후 아프지 않게 치료한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환자들 소개로 베이커스필드, 롱비치에서까지 환자들이 몰려들었죠." 당시 그의 월수입은 5만달러를 넘어섰고 개원 두 달 만에 그는 패서디나에 25만달러짜리 저택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83년 16유닛 규모의 투자용 아파트 매입을 시작하며 본격적인 부동산 투자에 뛰어들었다. "대학생 때 부친께서 후암동 3층집을 제게 상속하셔서 그 세를 가지고 대학 학비 내고 용돈까지 썼죠. 아마 그때 부동산 투자의 이점을 알게 된 게 아닌가 싶어요.(웃음)" #아메리칸 드림을 일구다 이후 LA와 세리토스, 오렌지카운티 소재 건물들을 사고팔면서 그는 부동산 투자로 승승장구했다. 90년대 초반엔 300만달러를 투자해 LA한인타운 버몬트 길에 있는 2에이커 규모의 반스마켓 건물과 대지를 매입하는가 하면 동부에 있는 부동산까지 사들였다. 그러면서 베벌리힐스에 250만달러 저택으로 이사도 했다. 미국 이민 20년 만에 일군 아메리칸 드림이었다. 그러나 1994년 4·29 LA폭동이 터지면서 부동산 경기가 악화됐고 그의 사업체도 큰 타격을 받게 된다. "경기악화로 세입자들이 렌트비를 안내니 더 이상 페이먼트를 못하게 됐고 6개월 만에 은행 차압이 들어왔죠. 결국 모든 부동산은 은행으로 넘어갔고 그 후유증은 꽤나 컸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 경험은 그의 인생에 소중한 자산이 됐다. "투자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관리를 제대로 못했다는 걸 절감했죠. 이렇게 실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겸손해져요. 그러면 또 다른 길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실패했다 낙담 말고 이를 인정하고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사업뿐 아니라 그는 LA한인사회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LA올림픽 라이온스 클럽 회장(1984)을 거쳐 LA상의 이사장(1987)과 회장(1988), 남가주상공인총연 회장(1988), 재미한인치과협 회장(1989)을 맡았고 1992년엔 한미문화교류재단을 창립해 '6·25참전 미군용사 위안의 밤'을 개최하며 한미 우호를 다지는데 노력했다. 사업이 힘들어져도 그의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그가 사업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1994년 가을 그는 박찬호 선수의 LA다저스 입단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닌 것은 물론 이후 박찬호 후원회 회장으로도 활동했다. "당시 4·29 LA폭동으로 한인사회가 크게 침체됐던 시기였어요. 그때 LA구단주와 식사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가 박찬호 선수에게 관심을 보이길래 영입을 제안했죠. 힘든 한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는 일이라 확신했으니까요." 이후 반년 간 한국을 세 번씩 오가며 영입을 추진해 결국 그해 연말 박 선수의 입단을 성사시켰다. 뿐만 아니다. 한국중소기업 LA추진위원회 위원장(1996), 평통 회장(1997), 미주예총 고문(1997) 등도 그가 사업적으로 가장 힘든 고비를 넘길 때 맡은 직함이다. 선뜻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내 코가 석자인데 단체 활동할 정신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래도 집도 있고 병원도 있잖아요.(웃음) 당시 건강만 잃지 않게 해 달라 기도했는데 그래서 의기소침하기보다는 더 열심히 사람들을 만나려 노력했던 것 같아요. 워낙 제가 사람들 만나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요.(웃음)" #행복한 인생 후반전을 위해 현재 그는 시니어센터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2008년 대한노인회미주총연합회 회장에 취임한 이래 시니어들의 복지에 관심을 가져온 그는 2013년 시니어센터 개관 당시 이사장으로 취임했지만 아내의 입원과 그 역시도 심장협착증 수술로 넉 달 만에 사임해야 했다. 그러다 지난해 다시 이사장직을 맡아 센터 활성화에 공을 들이고 있다. 그의 이런 열정은 그의 아픈 개인사와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8년간 치매를 앓던 소아과 전문의였던 아내가 2015년 세상을 떠난 것. 이후 그는 1년간은 집과 치과만을 오가며 두문불출했다. "당시엔 왜 먹는지 왜 사는지 무의미하게 느껴질 만큼 우울했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인생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더군요. 사별 후 못해 준 것에만 연연해하기보다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을 때 열심히 돕는 게 의미 있는 인생이란 걸요. 그래서 작년에 갑작스러운 이사장직 제안을 수락했죠." 그는 내년엔 은퇴해 그동안 못했던 일들을 해보고 싶다 했다. 20년 전 입문했다 중단한 사진촬영부터 세계 여행까지 그동안 바쁘게 사느라 뒷전으로 밀어뒀던 진짜 해보고 싶었던 일에 도전할 계획이란다. 소설가 오스카 와일드는 말했다. 나이 드는 게 비극적인 이유는 우리가 사실은 젊기 때문이라고. 맞다. 청춘이 뭐 별거던가. 하고 싶은 일로 인해 여전히 가슴 뛰며 내일을 기대하는 한 그는 여전히 청춘의 한때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리라.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2018-03-25

[인물 오디세이] 강령탈춤 해외전승자 강대승…우리가락 대중화 좇은 50년 예인 인생

고교 때 탈춤에 매료 10년 전수, 이수자 돼 시·국립 수석무용수 거쳐 사물놀이 '두레패' 창단 2000년 LA 이민 와 14년 해외전승자 선정 전승관 열고 후학 양성 작년 미주예총 회장 취임 혹시 기억 하는지. 90년대 후반 LA한인타운 웨스턴가 한인회 건물의 대형 벽화 속 농악패 복장을 하고 상모 돌리며 장구치고 있던 청년을. 그 사내가 바로 황해도 강령탈춤 해외전승자인 강대승(66)씨다. 당시 벽화 속 갓 서른을 넘긴 청년은 강산이 세 번 바뀌는 동안 흰머리 희끗희끗한 초로의 신사가 됐지만 그 춤사위와 소리는 더 농익어 깊어졌다. 연기 전공자에 한국무용과 탈춤까지 섭렵하고 사물놀이에 미쳐 오늘에 이른 그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타고난 예인(藝人)이다. 그는 이를 운명이라 했다. 그 운명을 따라 산 넘고 물 건너 오늘에 이른 그를 만나봤다. #한국무용에서 사물놀이로 연극 연출가 부친과 한국무용가 어머니의 예술적 끼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그는 어려서부터 예술방면에 두각을 나타냈다. 중학교 때 밴드부에서 활동하며 색소폰과 클라리넷을 연주했고 안양예고 연극과에 진학해선 배우를 꿈꿨다. 고교 졸업 후 극단 '산하'에서 활동하다 1973년 국립가무단(현 서울시뮤지컬단) 1기 무용수로 발탁돼 입단했다. 가무단 활동을 하면서 명지전문대 무용과에 입학해 한국무용을 전공했다. 군복무를 마친 후 1978년 시립무용단에 수석 무용수로 입단했는데 당시 20명 단원 중 유일한 남성 무용수였던 그는 이후 주연을 도맡아 한국 무용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이처럼 전도유망한 무용수였던 그가 1985년 돌연 안정적인 직장인 무용단을 사직하고 사물놀이 공연단 '두레패'를 창단했다. 밖에서 보기엔 갑작스러운 결정처럼 보였지만 그가 국악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고교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연히 신문에 난 '제 1회 봉산탈춤 강습회' 공고를 보고 연기공부에 도움이 될까 싶어 갔다 무형문화재 34호인 강령탈춤 보유자 고(故) 양소운 선생과 운명적으로 조우한 것이다. 그의 실력과 열정을 높이 산 양소운 선생의 권유로 문하생이 된 그는 10년간 스승에게 탈춤을 전수받아 1980년 강령탈춤 이수자가 됐다. 이후에도 꾸준히 우리가락과 춤을 연구하다 1985년 우리 소리에 미친 다섯 남자와 의기투합해 '두레패'를 창단한 것이다. 두레패 대표직을 맡은 그는 경기도 송추에 연구소를 마련하고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마침 당시가 86서울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우리 소리와 춤에 관심이 고조되던 터라 두레패는 국내는 물론 한국관광공사 홍보사절단으로 미국, 유럽, 일본, 중국, 호주 등 전 세계를 무대로 순회공연을 하며 우리 소리를 널리 알리는데 일조했다. #LA는 제2의 고향 이처럼 잘나가던 그에게도 시련이 찾아왔다. 바로 1997년 터진 IMF 사태다. "IMF 여파로 공연기획사들이 줄줄이 문을 닫으면서 1년간 잡혀있던 공연도 모두 취소됐죠. 한 달이면 6~7회 잡혀있던 국내공연은 물론 연 2회 이상 잡혀 있던 해외공연까지 줄줄이 취소됐으니까요. 그 상태론 두레패 식구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건 불가능했죠." 그래서 그는 두레패를 해산하고 1999년 호주 이민을 계획하고 가족과 함께 호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러나 낯선 땅에서 생활인으로 살아가는 건 녹록지 않았다. 페인트 기술을 배워 일을 시작했지만 급여를 제때 못 받는가 하면 일부 한인들의 차가운 시선에 속앓이를 하기도 했단다. 그러다 그해 가을 빙부상을 계기로 아예 이삿짐을 꾸려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심기일전 2000년 2월 LA에 왔다. "LA에 올 땐 정말 비장한 각오로 왔죠.(웃음) 호주에서 실패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엔 국악인이라는 이름을 벗고 진짜 이민자로 살아 보자고 단단히 각오했으니까요." 그러나 팔자 도둑질은 못한다고 오랜 가톨릭 신자인 그가 출석한 한인성당에서 지휘자가 단박에 그를 알아보면서 미사 때 장구 연주를 요청해 와 매주 국악미사를 이끌게 됐다. 그 소식이 LA와 타지역 성당들에까지 알려지자 그에게 탈춤 및 사물놀이를 가르쳐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이후 그는 낮에는 페인트 작업을 하고 저녁엔 LA, 풀러턴, 토런스, 롤랜드하이츠, 발렌시아 등에서 사물놀이 소모임을 이끌었다. 또 성당 지인의 도움으로 스왑밋을 돌며 건어물 장사도 시작했다. "정 많고 친절한 한인들 덕분에 잘 정착할 수 있었죠. 우리 전통문화를 사랑하고 관심 있는 이들도 많아 사물놀이를 꾸준히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행복했고요." #강령탈춤 해외전승자 되다 그는 2005년 필랜으로 이사했다. "한국에서도 그랬고 LA 와서도 늘 시골생활을 꿈꿨어요. 필랜은 눈보라가 칠만큼 사계절이 뚜렷하고 공기가 좋아 두 번 생각 않고 이사를 결심했죠." 2.5에이커 대지가 딸린 주택을 구입한 그는 그곳에 연습실을 마련하고 농사도 시작했다. "홍매실과 도라지 농사를 주로 했는데 홍매실은 키우기가 까다로운 작물이지만 약용작물로 인기가 높죠. 일부는 한약재로, 일부는 매실액을 담가 판매했는데 워낙 인기가 좋아 없어 못 팔정도였죠.(웃음)" 그렇게 농사일과 국악 교습으로 바쁘게 지내던 그는 2014년 강령탈춤 해외전승자로 발탁됐다. 당시 무형문화재 해외전승자는 북미 5명을 포함, 전 세계에서 10명만이 선정됐다. 그리고 이듬해 LA한인타운 8가 길에 강령탈춤 전승관을 열었다. 전승관은 회원들의 회비로 운영되고 있는데 현재 60여명이 모여 사물놀이, 탈춤 등을 배우고 있다. 무형문화재 49호 송파산대놀이 이수자인 아내 이현숙(64)씨도 그와 함께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이후 활발한 활동을 펼친 그는 2016년 LA다운타운 노숙자를 위해 봉사한 공로를 인정받아 오바마 대통령 봉사상을 수상했고 지난해 9월부터는 미주예총 회장직을 맡아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우리 소리와 춤을 한인들에게 전수하고 싶어요.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세계적인 탈춤축제와 타악축제를 LA에서 개최하고 싶기도 하고요. 그러나 이보다 더 오랜 꿈은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노부부들에게 한국전통 혼례를 무료로 올려주는 겁니다." 아마도 그가 건네고 싶은 건 우리가락과 춤사위에 덧입힌 그의 따스한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제 땅 떠나 사는 게 얼마나 고단한 일인지 잘 알기에 아프고 상처받은 이들의 마음을 가락으로, 춤으로나마 그렇게 토닥여주고 싶었나보다. 태초부터 예술이 걸어온 길은 위로의 역사였으니.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2018-03-18

[인물 오디세이] 뮤지컬 배우 임규진…뚝심의 악바리, 기적을 만들다

'판타스틱' 주연 발탁 주목 '뮬란' '미스 사이공'서 열연 영어발음 한계 극복하고 '왕과 나'로 브로드웨이 데뷔 현재 텁팀역 맡아 전국 투어 11일까지 코스타메사서 공연 참 매력적이다. 그녀. 조막만한 얼굴 큰 눈망울의 이국적인 마스크도 그러했지만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그녀만의 털털하고 진솔한 출구 없는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어떻게 그 짧은 시간동안에 브로드웨이를 사로잡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2016년 가을부터 전국투어 중인 브로드웨이 뮤지컬 '왕과 나'에서 버마공주 텁팀 역을 맡아 열연하고 있는 배우 임규진(29)씨다. 최근 브로드웨이에 한인 2세들의 돌풍이 거세다곤 하지만 한인 1세가 주조연급 배역을 맡아 무대에 서는 것은 흔치 않은 일. 휴가차 LA를 방문한 이 어메이징한 여배우와의 대화 혹은 수다는 시간 가는 줄 모를 만큼 유쾌하고 즐거웠다. 한 편의 뮤지컬처럼. #발레리나에서 뮤지컬 배우로 서울출생인 그녀는 세 살 때부터 발레를 시작했다 중2 때 아킬레스건을 다쳐 발레리나의 꿈을 접어야만 했다. 그러다 대학입시를 두 달여 앞두고 뮤지컬 배우가 되겠다고 결심했단다. "당시 뮤지컬 한 편을 봤는데 그 느낌이 너무 강렬했어요. 워낙 어려서부터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 받는 걸 좋아해서인지 뮤지컬 배우의 매력에 푹 빠졌죠." 그래서 2008년 1월 언니가 유학 중인 롱아일랜드 소재 파이브타운칼리지(FTC) 뮤지컬학과에 입학했다. "입학해선 엄청 고생했죠. 수업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요. 게다가 영어가 완벽해도 힘든 연기 수업은 정말 악몽이었죠. 덕분에 매일 울며 지냈어요." 이후 언니와도 영어만 하고 계절학기까지 들으며 독하게 영어공부에 매달린 그녀는 2009년 실질적인 뮤지컬 공부를 위해 명문 뮤지컬학교인 AMDA(American Musical and Dramatic Academy)에 편입한다. #꿈은 이뤄진다 편입 후 그녀의 악바리 기질은 더 심해졌다. "춤은 어려서부터 췄지만 노래는 영 소질도 자신도 없었거든요. 그래도 어려서부터 연습벌레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노력하는 건 자신 있어서 헛구역질이 나올 때까지 노래 연습에 매달렸죠." 노래 연습만큼이나 그녀가 독하게 파고든 것은 영어 발음 교정. "뮤지컬 배우가 되려면 정확한 발음과 대사전달은 기본이에요. 그래서 저처럼 스무 살에 미국에 와 영어발음이 서툰 배우가 주조연급을 맡는다는 건 브로드웨이에선 거의 불가능하죠. 그래서 전문가를 찾아 교정 레슨을 받고 혼자서도 열심히 연습했죠." 순간 의아했다. '이 바닥' 현실을 이토록 잘 아는 그녀가 무슨 배짱으로 주조연급을 목표로 큰돈 들여 노래며 영어레슨을 받고 잠 못 자 가며 노래와 발음연습에 매달린 걸까. "저도 모르겠어요.(웃음) 제가 미국 가서 뮤지컬 배우가 되겠다했을 때 격려해주신 부모님 말고는 다들 미쳤다고 했죠. 그래서 오기가 생긴 것도 있고…(웃음) 그런데 그보다는 당시 노래가 너무 좋았고 이왕 시작한 거 영어 공부를 제대로 해보자 싶어 하루하루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에요. 그러다 보니 오늘에 이르렀네요." 그렇게 독하게 '열공'한 끝 그녀는 동기들보다 한 학기 빠른 2011년 2월 졸업했고 그 해 뮤지컬 배우 지망생들에겐 최고의 무대인 뉴욕 타운홀에서 개최되는 뮤지컬 콘서트 '브로드웨이 라이징 스타'에 선발되는 영예를 안았다. 이후에도 그녀의 눈부신 활약은 계속된다. 2011년 그녀는 미주리에서 공연된 뮤지컬 '판타스틱스' 오디션에 응시해 당당히 여주인공 루이자역을 따냈다. "루이자는 그동안 백인배우들이 해왔던 역할이고 무엇보다 영어가 완벽해야 할 수 있는 배역이어서 붙을 거라곤 정말 기대 안했어요. 그저 AMDA 재학 시절 제일 해보고 싶었던 역할이어서 떨어질 각오를 하고 본 오디션이었죠. 덕분에 그동안 시달렸던 영어 콤플렉스에선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죠." 이후 그녀는 디즈니크루즈 무대에서 뮬란, 자스민 공주, 포카 혼타스 역을 맡아 선상에서 10개월여를 보냈다, 또 '미스 사이공'에선 앙상블, '디스인챈티드!(Disenchanted!)'에선 뮬란 역을 맡아 플로리다와 뉴저지 등에서 공연하며 뮤지컬 배우로서 입지를 다져갔다. #브로드웨이에 데뷔하다 그리고 2014년 여름, 그녀는 운명적인 작품과 조우한다. 브로드웨이에서 20년 만에 다시 공연된다는 것만으로 화제를 몰고 온 대작 '왕과 나'다. 그 유명세에 걸맞게 오디션엔 수천 명의 지원자들이 몰려들었고 석 달간 총 8번의 오디션 끝 그녀는 앙상블 겸 텁팀 언더스터디(유사시 배역을 연기할 수 있게 준비된 배우)에 발탁됐다. 텁팀은 시암 국왕에게 조공으로 바쳐진 버마 공주로 국왕과 여주인공 안나 다음으로 비중 있는 역할. 연습기간을 거쳐 2015년 5월 그녀는 그토록 꿈에 그리던 링컨센터 무대에 올라 브로드웨이에 입성한다. 그리고 그해 9월 텁팀 역으로 무대에 오른 이래 공연 기간 동안 수 십 차례 텁팀 역을 연기하며 주목받았다. 1년 6개월 뒤 공연은 성황리에 막을 내렸고 뒤이어 브로드웨이 제작팀이 론칭한 전국 투어팀에서도 그녀는 앙상블과 텁팀 언더스터디로 선발됐다. 그리고 투어 1년만인 지난해 10월 텁팀 역을 맡은 배우의 건강이상으로 그녀가 그 역을 맡게 됐고 지금까지 텁팀으로 열연 중이다. 현재 투어팀은 지난달 27일부터 코스타메사 시걸스트롬 극장에서 공연 중인데 이번 공연은 11일까지 계속된다. 이처럼 1년이 넘는 장기투어 덕분에 2014년 결혼한 뮤지컬 배우이며 성우인 남편과는 떨어져 지내고 있다. 그러나 오는 8월이면 캐나다 공연을 끝으로 그녀는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 신혼의 단꿈을 꿀 수 있지 싶다. 게다가 브로드웨이에서 그 실력을 인정받은 만큼 앞으론 탄탄대로만 펼쳐지지 않겠는가. "어휴 아니에요. 다음 작품을 하려면 또 오디션을 봐 수백 대 일의 경쟁을 뚫어야 해요. 그때까진 낮엔 연습하고 오디션 보러 다니고 밤엔 또 아르바이트를 하지 싶어요.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불투명한 미래가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도 지금 이 무대를 즐기려고요. 수년전 제가, 그리고 지금 누군가가 그토록 서고 싶어 하는 소중한 무대니까요." 이제 막 입신(立身)에 접어든 이 전도유망한 여배우에게 어떤 응원의 말을 건네야 할까. 그저 미래를 불안해하느라 현재의 행복을 놓치진 말길. 1년 뒤 혹은 10년 뒤 어느 하루가 오늘 하루보다 더 가치 있다 말할 수 없으니. 행복은 언젠가 이뤄야 할 목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것이니까.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2018-03-04

[인물 오디세이] 자생한방병원 미주분원 이우경 대표원장…만능 스포츠맨을 꿈꾸는 한의사

서울 국제진료센터 거쳐 6년 전 LA 분원장 부임 서핑, 마라톤, 격투기에 극단 연극배우로도 활동 영어권 석·박사 과정 강의 통해 후학 양성 한국서부터 의료봉사 5년째 캄튼서 무료 진료 이토록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라니. 딱딱한 한의사인가 했는데 한때 연극에 빠져 연극배우를 꿈꿨고 여전히 그 꿈 아쉬워 무대에 오르는 아마추어 배우라고. 그렇다면 꽤나 감수성 풍부한 예술가이겠거니 했는데 웬걸, 서핑에 이종격투기까지 못하는 운동이 없는 만능 스포츠맨이란다. 바로 자생한방병원 미주분원(jasengusa.com) 이우경(41) 대표원장이다. 그러나 거듭되는 이 반전과 균열이 그리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건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그가 삼라만상 곳곳에 관심 많은 르네상스맨임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이민 6년차 직장인이기도 한 그와의 대화는 이민 초년병들이 겪는 고민부터 어떻게 살 것인가를 넘나드는 '알아두면 쓸모 있는 신비한 잡학사전'처럼 신나고 유쾌했다. #연극배우 꿈 접고 한의사로 서울 출생인 그는 어려서부터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었다. 고교시절 연극배우를 꿈꿨지만 고교 교사인 부친의 권유에 따라 1995년 세명대 한의대에 진학했다. 대학 진학 후 연극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연기를 시작했고 학교 행사 때마다 사회자로 불려 다니는 등 그동안 꽁꽁 감춰뒀던 끼를 발산했다. 그러면서 그는 다시 대학입시를 봐 연극과에 진학하겠다며 휴학계를 내고 대학로 극단에 입단하기도 하는 등 나름 파란만장한 청춘의 한때를 보냈다. 이후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 한 그는 그의 표현대로 죽어라 공부만 해 2005년 한의사 면허를 취득하고 졸업했다. 졸업 후 그는 '사부'를 찾아 말 그대로 괴나리봇짐 달랑 둘러메고 전국을 다니기 시작했다. 무협지에나 나올법한 이야기 같다 했더니 그가 웃는다. "당시로선 새로운 한의학 기술인 봉침, 추나, 약침, 비만치료·관리 등을 배우고 싶어 이 분야의 대가들을 찾아 다녔죠. 학교에서 배운 것만으론 한계가 있어 현장에서 제대로 배우고 싶었거든요." 그렇게 서울은 물론 부산, 마산, 평택 등지를 돌며 수련을 마친 그는 2005년 인천에 한의원을 개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은 입소문을 타고 하루 평균 30~40명의 환자가 다녀갈 만큼 북적이며 승승장구했다. 그리고 2006년엔 경희대 동서의학대학원에 진학해 석·박사 학위를 취득하기도 했다. #미국에 한국 한의학을 알리다 그렇게 잘 나가던 그가 2009년 돌연 한의원 문을 닫고 자생한방병원에 입사한다. "한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하면서 해외에 한국 한의학을 제대로 알리고 싶었어요. 한국엔 한의원이 포화상태라 블루오션을 개척해 보고 싶기도 했고요. 그래서 당시 미국을 오가며 가주 한의사 면허도 취득해 놨죠. 그런데 마침 막 미주 분원을 개원한 자생한방병원에서 한의사를 뽑길래 지원해 국제진료센터에서 근무하게 됐습니다." 이후 2012년 자생한방병원 LA분원 원장으로 발령이 나 미국에 온 그는 샌호세 분원을 거쳐 2013년부터 미주분원 대표원장을 맡고 있다. 그의 부임 후 병원을 찾는 타인종 환자들은 꾸준히 늘어 현재 전체 환자의 30%에 이를 만큼 그의 오랜 포부도 차곡차곡 실현되고 있다. 또 그의 환자들 중엔 유명 스포츠 스타들도 있어 눈길을 끈다. 바로 LA다저스 류현진과 텍사스 레인저스 추신수, PGA 프로골퍼 최경주 등이다. 특히 추신수 선수와는 텍사스 자택에 왕진도 가고 LA 원정경기가 있으면 어김없이 만나 식사를 할 만큼 막역한 사이가 됐다고. 이처럼 환자 진료 외에도 그가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건 후학 양성. 그동안 그는 동국대학교 LA캠퍼스와 라스베이거스 원구한의대에 재학 중인 영어권 석·박사 과정 학생들을 대상으로 임상특강을 진행하며 학생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가르치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소질도 있는 것 같아요.(웃음) 그래서 앞으론 보다 더 활발히 미국 한의대 강단에 서 한국 한의학이 지금껏 이뤄낸 과학적 성과들을 가르치고 싶어요. 그러다보면 제가 가르친 학생들을 통해 한국 한의학이 미국에 더 빨리 전파되리라 믿습니다." #만능 스포츠맨의 나눔 실천 아무리 미국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지만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클 법도 싶었다. "처음엔 돌아갈 계획이었죠. 수입과 사회적 지위만 놓고 보면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더 나으니까요. 그런데 지난해 결혼해 가정을 꾸리기도 했고 시간이 갈수록 한국에서의 지나치게 경쟁적인 삶보다는 지금의 저녁이 있는 삶이 좋아 정착할 계획입니다." 돈과 명예를 이기는 '저녁이 있는 삶'이란 게 언뜻 이해가 안됐지만 그의 꽤나 방대한 취미생활을 듣다보면 무슨 말인지 금세 수긍이 간다. 일견 책상물림처럼 보이는 그는 반전 있게도 자타공인 만능 스포츠맨이다. 대학 시절 입문했다 한동안 작파했던 마라톤을 미국에 와 다시 시작한 이래 그는 LA, 헌팅턴비치, 롱비치, 샌프란시스코 등 크고 작은 마라톤 대회에 꾸준히 참가할 만큼 마라톤에 푹 빠져 있다. 뿐만 아니다. 주말이면 서핑에 스키, 스노보드, 이종격투기까지 다양한 스포츠를 즐긴다. 매일 아침 3~5마일씩 조깅을 하고 주말이면 여름엔 바닷가를, 겨울이면 어김없이 스키장을 찾는 것이다. "매일 진료실에 앉아 환자들을 보다 보면 지치게 마련인데 이처럼 운동을 하면 활동적이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생겨 스트레스 해소와 정신건강에 좋죠, 그리고 결국엔 이 좋은 에너지가 환자에게 전달돼 진료에도 도움이 되고요." 그리고 젊은 시절 매료됐던 연극도 다시 시작해 재작년부터 '굿모닝겨자씨' 극단에 가입해 맹활약을 펼치고 있다. 이처럼 동분서주하면서도 그는 의료봉사에도 열심이다. 미국에 오기 전까지 인천 소재 지적장애인 재활원에 5년간 정기 의료봉사를 다녔고 LA에 온 뒤론 캄튼 소재 한 무료 클리닉에서 5년째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뭐 대단한 건 아니고… 그저 지금껏 운 좋게 제가 받은 걸 나누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의사라는 직업이 시간이 갈수록 타성에 젖고 교만해지기 쉬운데 봉사활동을 하다보면 왜 의사가 되고 싶었는지 초심을 돌아보게 돼 오히려 제가 얻는 게 더 많아요." 쑥스러운 듯 웃는 그를 보고 있노라니 한국사회 올해의 키워드라는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저녁이 있는 일상에 행복을 느끼고 베푸는 삶이 결국은 받는 삶이라는 일견 소소해 보이지만 확실한 행복을 이미 그는 손에 넣은 것이다. 그러나 소소하다기엔 그 행복 멀리서도 알아볼 만큼 크고 반짝거렸다.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2018-02-25

[인물 오디세이] 덴톤스 로펌 박재균 변호사,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꿈꾼다

12세 때 이민 온 1.5세 직장생활하다 법대 진학 65개국, 변호사 8천명 대형 글로벌 로펌 근무 10년째 무료법률 봉사 청소년 멘토링도 앞장 전미아태변호사협 선정 '무료법률 변호사' 영예 진중함과 유쾌함을 오가는 이 남자, 나지막한 저음으로 조근 조근 이야기를 풀어낸다. 직업병인건지 선천적 기질인지 단 한마디도 허투루 내뱉는 법 없었지만 대화가 깊어질수록 그 솔직함에 놀라게 된다. 적당히 가리고 적당히 부풀린다고 한들 '슬기로운 사회생활'이라는 명목 하에 미덕으로 봐줄 법도 할 터인데 그는 극구 끈질기게 솔직했다. 세계 최대 글로벌 로펌 덴톤스(Dentons US LLP) 박재균(44) 변호사다. 그 솔직함 덕 세계 최대 로펌 변호사니 인권변호사니 하는 자극적인 겉모습 뒤 소외된 이웃들과 함께 사는 법을 고민하며 고군분투하는 평범한 한 남자의 민낯을 엿볼 수 있었다. 뚝심 있게 묵묵히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고 있는 박 변호사를 덴톤 LA지사에서 만나봤다. #역사학도에서 변호사로 서울 출생인 그는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에 재직 중인 부친 덕분에 어려서부터 부친의 발령지인 호주와 인도에서 8년여를 거주하는 등 한국과 외국을 오가며 살았다. 그리고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86년 샌호세로 가족이민 왔다. 미국에 와 부친은 부동산 에이전트와 비즈니스 컨설팅을, 어머니는 피아노 교습을 시작했다. 중학교 졸업 무렵 가족은 LA 밸리로 이사했고 그는 채츠워스 고교 졸업 후 1992년 UCLA 사학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 진로를 고민하다 교수가 되겠다 결심한 그는 대학원 학비를 모을 요량으로 UCLA 법대 행정관리팀에 취직했다. 2년 예정으로 시작한 직장생활이었지만 그곳에서 4년여를 근무했다. "대학입학 무렵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집안 형편이 어려웠어요. 그래서 대학원 진학도 미루고 있었는데 한 교수가 법대가 적성에 맞아 보인다며 진학을 권유했죠. 사실 어려서 장래희망도 변호사였지만 막상 대학시절 로펌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해 보니 이상과 현실이 달라 포기했었는데 그 교수의 말이 자극이 됐죠. 그러나 법대에 가려면 당시 10만불 학비융자가 필요했는데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았어요. 그래도 오랜 고심 끝 일단 저를 믿고 도전해 보기로 했죠." 그리고 그는 2001년 샌디에이고 대학(USD) 법대에 진학했다. #진짜 행복을 좇다 2004년 가주 변호사시험에 합격한 그는 그해 샌디에이고 소재 중형 로펌에 취직했다. 1년 뒤 로스쿨 선배의 추천으로 샌디에이고 유명 로펌으로 이직한 그는 2006년엔 법대 동기인 캐시 박(40)씨와 결혼해 슬하에 남매를 두고 있다. 2013년 재직 중이던 로펌이 글로벌 로펌 덴톤스와 합병했는데 현재 덴톤스는 전 세계 65개국 지사에 총 8000명이 넘는 변호사를 거느린 세계 최대 로펌이다. 그의 전문 분야는 상법과 노동법. 그중에서도 건설공사 관련 케이스를 주로 담당했는데 지금껏 그는 미국 내 통신사, 대기업, 정부기관 등에서 의뢰받은 굵직굵직한 사건에서 승소를 이끌어내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 현재 그는 시간 당 600달러에 육박하는 몸값 귀한 변호사가 됐지만 대나무 천장(bamboo ceiling)을 뚫고 이곳까지 오는 여정이 그리 녹록지만은 않았지 싶었다. "제가 근무 중인 샌디에이고 지사나 LA지사에 동양인 변호사는 몇 안 됩니다. 백인 변호사가 대다수죠. 그러나 보이지 않는 대나무 천장이 있다하더라도 열심히 하다보면 실력이 쌓이고 그러다보면 좋은 평판도 따라오게 됩니다."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그는 돈 잘 버는 변호사이기 보다는 좋은 남편이며 아빠이길 원했고 무엇보다 세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회구성원이고 싶어 했다. "변호사라는 직업이 워낙 스트레스가 심해 돈 벌 목적으로만 하면 매일이 불행하거나 오래 버티지도 못하죠. 제 주변에서도 행복하게 일하는 변호사들을 보면 누군가를 돕는데 소명의식이 있는 분들이거든요. 저 역시 변호사라는 직업을 지금껏 계속 할 수 있는 건 제 의뢰인을 돕는 보람과 무엇보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무료 법률서비스인 프로보노(pro bono) 활동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하여 변호사가 된 후부터 꾸준히 프로보노 활동을 펼쳐오고 있는 그는 지난해 11월 전미아태변호사협회(NAPABA)가 선정한 '올해의 무료법률봉사 변호사'로 선정됐다. 또 2016년엔 인권피해자를 돕는 비영리재단인 카사코넬리아 법률센터로부터 '올해의 무료법률봉사 변호사상'을 수상할 만큼 법조계에선 이미 인권 변호사로 유명하다. "변호사자격증으로 사회적 약자를 도울 수 있는 게 뭘까 찾다 시작한 일입니다. 처음 맡은 케이스가 에티오피아 난민 신청이었는데 법원에서 난민신청이 받아들여지자 의뢰인이 '당신이 내 생명을 구했다'고 울며 감사를 건넨 그 순간의 기쁨과 보람이 저를 지금까지 오게 했습니다." 이후에도 그는 남미, 중동, 아프리카 난민들을 돕기 위해 케이스당 적게는 1년 많게는 2~3년의 시간을 들여 그들을 도왔다. 이뿐만 아니다. 그는 지역사회 봉사에도 팔 걷고 나서 2007년 샌디에이고 한인변호사협회 창립에 앞장섰고 2009년엔 샌디에이고 팬아시안변호사협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저소득층 청소년 및 소수민족 청년들의 멘토링에 관심이 크다. 그래서 5년 전 로펌 내 동료 변호사 9명과 팀을 꾸려 비영리재단과 함께 저소득층 고교생들의 법률공부 및 법조계 커리어 계발을 적극 지원해오고 있다. 또 2014년엔 본보 샌디에이고 지사와 함께 한인청소년들을 위한 멘토링 및 자기계발 프로그램 'TYP'를 발족시킨 이래 지금까지 봉사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무엇일까. 그를 돈도 안 되고 그리 빛나지도 않는 자리로 이끈 건. "말도 통하지 않고 시스템도 다른 나라에서 고생하는 이민자들을 보면서 어려서부터 그들을 돕고 싶었어요. 특히 진로문제에 있어 적절한 조언을 해줄 이들이 없는 소수민족과 저소득층 청소년들에게 인생선배로서 멘토가 돼주는데 큰 보람을 느낍니다. 제가 그들과 나눌 수 있는 무언가를 갖고 있다는 게 오히려 감사할 따름이죠." 루쉰은 말했다. '희망이란 것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이나 마찬가지다. 원래 땅 위에는 길이란 게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된다'고. 각자도생이 미덕이 돼버린 21세기,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는 그의 한 걸음 한 걸음이 더 특별해 보이는 이유다.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2018-01-28

[인물 오디세이] 역사학자·작가 이자경 "나와 같은 세상의 아웃사이더 위로하고파"

77년 LA로 가족 이민 극작가·미술평론가 활동 88년부터 멕시코 이민사 취재 96년 '해외한인 기록물' 대상 4·29·인종차별·위안부 문제 등 사회성 짙은 희곡 꾸준히 발표 "한 시대 힘들게 살다 간 이들 이야기 전하는 게 평생 소명" 그녀에게선 68혁명 냄새가 났다. 그해 5월, 흑백사진 속 파리의 거리를 살펴보면 금방이라도 그녀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으니까. 극작가이며 역사학자인 이자경(73)씨다. 고희를 넘긴 노(老) 작가에게서 탈권위와 저항의 상징이었던 60년대 파리의 앙팡 테리블(무서운 아이들)을 떠올리다니. 68세대들은 '서른이 넘은 사람을 믿지 마라'했지만 고희를 넘긴 노(老) 작가의 눈빛은 청년처럼 서늘했고 여전히 68세대들이 그토록 외쳤던 '금지된 것을 금지하기'위한 창조적 파괴의 지난한 여정에 서 있었다. #시대를 앞서 간 허무주의자 함북 회령 출신인 그녀는 1966년 서라벌예대 문예창작학과 입학했다. 고교동창들은 대학을 졸업하던 무렵인 스물 셋 되던 해 대학에 진학한 것이다. "중·고교 때부터 학교 가길 싫어했어요.(웃음) 제도권 교육에 대한 반감도 있었고 학교에서 배울게 없다는 생각도 했죠. 대학은 부모님이 원해서 갔지만 대학 이후에도 아카데미즘엔 별 매력을 느끼진 못했어요." 대신 그녀는 책속으로 파고들었다. 데카르트, 칸트, 쇼펜하우어를 지나 카뮈, 사르트르, 볼테르 등 유럽 사상가와 철학가가 그녀의 스승이 돼줬다. 또 대학시절엔 연극에도 관심이 많아 '극단 가교'에서 연출 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1968년 한국정부가 실시한 한국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래머 양성 교육에 홍일점으로 참가하는 등 새로운 기술과 신문물에도 관심이 많았다. 대학 졸업 후 행정 전문잡지 '월간 중앙행정' 기자로 취직한 그녀는 워터게이트 등 세계 정치사에 한 획을 그은 굵직굵직한 사건분석 기사로 실력을 인정받아 입사 1년도 안 돼 편집장으로 고속 승진했다. "당시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많지도 않았고 한국 사회전반에 만연한 성차별로 직장생활이 쉽지 않아 2년 뒤 사직서를 냈죠. 이후 미국행을 결심한 것도 답답한 한국사회를 떠나 자유롭게 공부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1972년 결혼한 그녀는 파트타임으로 출판·잡지 관련 일을 하다 1977년 남편, 어린 딸과 함께 LA로 와 재봉일과 건물청소 등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렇다고 글쓰기를 작파한 건 아니었다. 한국 여성지 통신원으로 기사를 보내고 소설 공모전에도 응모하는 등 이역만리 타국에서도 창작열은 여전했다. #한인사회 문화부흥기를 주도하다 당시 그녀의 아파트는 LA에 거주하거나 LA를 방문하는 한국 예술가라면 반드시 들러야하는 사랑방이 됐다. 특히 미술과 연극계 인사들과 왕래가 잦았던 그녀는 1981년 LA 연극인들과 의기투합, '극단 1981'을 창단하고 그해 연작 '곡(哭) 1·2·3'을 선보여 LA타임스 등 주류 언론의 극찬을 받았다. 이외에도 그녀는 '20세기 고객 여러분'(1979) '단혈'(1983) '산타마리아 애비뉴의 살인'(1992) '니느웨로 가라'(1999), 4.29LA폭동 10주년 기념극 '블랙 아메리카'(2002) 등 사회의식 짙은 다양한 희곡을 발표해 무대에 올렸다. 또 그녀는 미술평론가로도 활발한 활동을 했다. "80년대 LA 한인사회는 문화 부흥기였어요. 특히 실력 있는 한인 미술가들이 많았는데 평론가가 없다보니 이들이 제게 평론을 부탁해왔죠. 그래서 그때부터 독학하며 평론을 쓰기 시작했죠." 이처럼 극작가로 미술평론가로 왕성한 활동을 하던 그녀에게 잊을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온다. 1988년 멕시코를 방문했던 친한 지인으로부터 그곳에 한인 3세, 4세가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된 것이다. "노예로 팔려간 이민자들의 후손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가슴이 뛰기 시작했죠. 피가 당긴 거라 할까요. 당시엔 무조건 만나봐야겠다는 생각밖엔 없었어요. 그래서 일단 배낭 하나 달랑 메고 멕시코 행 비행기에 올랐죠." 한 달간의 취재를 마치고 돌아온 그녀는 1년 뒤 이 취재기를 '일요뉴스'에 연재했고 독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멕시코 한인 이민사와 운명적 만남 이후 10년간 그녀는 틈만 나면 멕시코를 찾아 멕시코 이민 후손들의 발자취를 추적했다. 한인 2세, 3세 가정을 찾아 그들을 얼싸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밤새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주 멕시코 한국대사관 및 한인회 창고에서 옛 자료를 뒤지기도 했다. 그리고 그 10년 간의 기록은 1996년 문화일보와 SBS, 지식산업사가 공동 주관한 '광복50주년 기념 해외 한국인 기록문화상'에서 대상을 받게 된다. 그리고 1998년 '한국인 멕시코 이민사'(지식산업사)가 세상에 나왔다. 그동안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잊혀졌던, 1905년 에네켄(용설란)농장에 노예처럼 팔려갔던 1000여명의 한인들과 이후 100년 간의 비극적인 멕시코 이민사에 대한 재조명에 한국 언론과 학계는 뜨거운 관심을 보냈다. 이후 멕시코 이민 100주년을 맞아 한국정부와 대기업의 후원으로 2006년 그녀는 '멕시코 한인 이민 100년사'를 출판했다. 그러면서 소설 및 시 창작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위안부 문제를 다룬 '할로윈 파티'(2000), 80년대 군사정권을 비판한 '육손이'(2001), 일본계 회사의 인종차별에 항의하다 자살한 고 이명섭씨 사건을 다룬 '어느 한국인을 위한 보고서'(2010), 성경을 모티브로 현대사회를 비판한 시 바벨론별곡(2012) 등 대한민국 현대사와 미주 한인사회의 아픔을 다룬 작품들을 꾸준히 발표했다. 젊은 시절 허무주의와 실존주의 철학에 빠져 자살충동에 시달린 그녀는 스스로를 아웃사이더라 부른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평생을 자신과 같은 아웃사이더와 그들의 연대기를 기록하는 데 바쳤다. "한 시대를 힘들게 살다 간 이들에 대한 연민이랄까 동질감이 저를 이곳까지 끌고 왔죠. 그들과 눈 맞추고 그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는 일이 결국 제 평생의 소명이지 싶습니다." 젊은 시절 그녀가 탐독했던 '아웃사이더'의 저자 콜린 윌슨은 '아웃사이더는 인간이 붐비는 곳에서 태어났지만 어떤 알 수 없는 정열적인 동경이 그들을 사막 속으로 몰고 간다'고 말했다. 그래서인가. 그녀는 오늘도 황량한 사막 속을 터벅터벅 걷고 있다. 그 여정 어디쯤에선가는 오아시스를 만날 수 있게 될까. 아니면 이미 그녀 오아시스 어디쯤에 도달해 그 주위를 배회하고 있는 걸까.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2018-01-21

[인물 오디세이] 방송인 박혜란…여우(女優), 라디오 스타가 되다

고2때 잡지 모델로 데뷔 삼성전자 1대 전속모델 드라마·쇼 MC로 인기절정 95년 1.5세와 결혼 LA행 뉴스앵커·방송 리포터 활약 11년째 라디오 진행자로 인기 "화려한 연예계 생활보다 지금의 행복에 더 만족" 속절없는 세월 속 얼굴엔 주름이 하나 둘 자리 잡고 앉았지만 마음은 그 세월을 덧입어 더 평화롭고 고요해진 듯 했다. 배우 박혜란(52)씨다. 라디오 진행자로 어느새 10년 넘게 잔뼈 굵은 그녀지만 그녀를 기억하는 80·90년대 팬들은 연기자로서의 그녀가 더 익숙한 게 사실. '20대 스타 여배우, 결혼과 함께 도미'라는 어찌 보면 꽤나 진부해 보이는 이 문장 이후 그녀의 삶은 전혀 진부하지 않았다. 그녀의 재능을 아끼는 러브콜로 여전히 LA한인사회 대표 방송인이라는 화려한 수식어를 달고 살지만 그 수식어 너머 그녀의 삶은 더 현명해지고 달큰해졌다. 함께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유쾌한 에너지를 주는 여우(女優), 박혜란씨를 만나봤다. #미녀 고교생 스타의 탄생 서울출생인 그녀는 고교 1학년 때인 1982년 당대 유명 여배우들의 등용문이었던 잡지 '여학생' 표지모델로 데뷔했다. 이후 광고모델 제안이 쏟아져 들어왔고 1년 뒤 그녀는 당시 한국 모델계를 이끌던 '모델센터'가 주최한 모델선발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며 본격적으로 모델 일을 시작했다. 유명 디자이너의 런웨이는 물론 유명제과, 패션, 교복 모델로도 종횡무진 했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스타덤에 오르게 것은 1984년 삼성전자 전속모델로 발탁되면서부터. "고 2때 시작해 3년 정도 했어요. 제가 1대였고 뒤를 이어 허윤정씨, 고 최진실씨가 했죠. 개런티요? 1000만원 정도였던 걸로 기억해요. 그런데 개런티보다 더 기억에 남는 건 서울역 앞 대기업 옥상 빌보드에 제 얼굴이 걸렸던 거예요.(웃음)" 고교졸업 후인 1985년 서울예전 영화과에 진학, 연출을 전공한 그녀는 대학 졸업 후 본격적인 연예계 활동을 시작했다. 1988년 MBC 특채 탤런트로 선발돼 드라마 '푸른 계절' 주연을 비롯해 '겨울새' '3일의 약속' 등 10여 편의 드라마에 출연했다. 그러나 드라마 주인공보다 더 그녀가 빛을 발한 곳은 MC. KBS '신인무대'를 통해 MC로 데뷔한 그녀는 당대 최고 스타 고 이주일과 함께 '쇼 스타 탄생'을, 황인용과 함께 '0시의 초대석' 등을 진행하며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1993년엔 영화감독 이장호와 함께 CBS 라디오에서 '이장호·박혜란의 정보시대'를 진행하며 라디오 진행자로 청취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운명적 사랑 쫓아 LA로 1989년 그녀는 운명적인 사랑과 조우한다. 현재 할리우드에서 엔터테인먼트 업체를 운영 중인 동갑내기 남편 케네스 김(52)씨다. LA 출신의 1.5세인 김 대표는 당시 UCLA를 휴학하고 한국에 와 작곡가겸 음반 기획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고민 많던 연예계 생활에 큰 의지가 돼줬던 '교포 청년'과 사랑에 빠진 그녀는 7년여 연애 끝 1995년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직전 한 지역 민영방송사에서 전속 MC직을 제안하며 연봉 1억원과 주택제공까지 제시했지만 이를 거절하고 LA에 왔다. 인기절정이던 20대 후반이었다. 거절하기엔 너무 아까운 기회처럼 보였다. "그땐 사랑이 먼저였어요.(웃음) 그때로 다시 돌아가면요? 그래도 같은 선택을 하지 싶어요.(웃음) 제가 어려서부터 친정엄마처럼 반듯한 가정을 꾸리는 게 꿈이었거든요. 꿈을 이룬 셈이죠." 1996년 LA로 온 그녀는 한인 외주제작사가 제작하는 MBC와 KBS 여행프로그램 리포터로 활약했고 1998년엔 미주한국방송(KTE) 8시뉴스 앵커로 5년간 뉴스를 이끌며 LA한인사회 간판 앵커로 자리 잡았다. "보람도 있고 재미도 있었어요. 첫아이 출산 후 시작했는데 제가 유부녀인줄 모르고 중매 서주겠다는 분들부터 데이트 신청하는 이들까지 재밌는 에피소드가 많았죠. (웃음)" 둘째 출산 2주전까지 뉴스를 진행했던 그녀는 출산과 함께 사직했고 2005년 연기학원 및 매니지먼트 업체인 'CG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해 신인 연기자 발굴 및 양성에 힘썼다. 그러나 2010년 경기악화로 문을 닫아야만 했다. #라디오와 함께한 11년 현재 그녀는 2008년 중앙방송(JBC) '상쾌한 이 아침에'로 마이크를 잡은 이래 현재 우리방송 '박혜란의 정보플러스'에 이르기까지 햇수로 11년째 라디오를 진행해오며 청취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정보플러스'는 요일별로 부동산, 건강, 커뮤니티, 교육 등 다양한 주제로 진행되는데 게스트 섭외부터 대본, 곡 선정까지 모두 그녀가 직접 한다. "얼마 전 여든이 넘은 청취자께서 삼계탕을 들고 찾아와 방송 잘 듣고 있다며 격려해 주시더라고요. 이런 청취자들의 응원 덕분에 힘든 줄 모르고 지금껏 진행해 올 수 있었죠." 또 최근엔 도요타 한인커뮤니티 라디오 모델로도 발탁돼 2년간의 캠리 시승기를 라디오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할 예정이다. 이처럼 라디오 진행자로, 한인사회 대표 광고모델로 잘 나가는 그녀지만 그렇다고 지난 시간 늘 평탄하기만 했던 건 아니다. 10년 전 남편인 김 대표가 투자사기를 당해 적잖은 돈을 날리며 힘든 시기를 겪기도 했다. "힘들었죠. 그런데 어차피 아무 것도 남지 않으니 마음을 비우게 되더라고요. 처음엔 남편 탓도 했지만 그 남자 맘은 얼마나 더 힘들까 싶으니까 마음이 짠하더라고요. 그때가 성탄 무렵이었는데 그래서 카드를 썼죠. 자기도 많이 힘들었겠다. 그래도 예쁜 아들 둘 있으니까 우리 힘내자. 당신을 응원한다고." 이후 김 대표가 한국에서 비즈니스를 시작하면서 부부는 3년여 간을 떨어져 지내야 했지만 남편은 금세 재기에 성공했다. 이젠 안정적인 삶에, 자녀들도 다 키웠겠다 더 늦기 전 한국에서 방송활동 재기를 생각해볼 법도 싶었다. "그러려면 살부터 빼고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웃음) 그런데 한국 방송활동은 큰 욕심 없어요. 젊은 시절 이미 스타로 살아봤잖아요. 지금처럼 사랑하는 가족들과 일상의 평온한 행복을 누리는 걸로 만족해요." 아뿔싸. 행복이 거창한 그 무엇이 아니란 것을 또 잊었던가. 이 비루한 기억력이라니. 시인 김용택은 말한다. '이 세상의 수많은 별들이 저렇게 반짝이며 살아가듯이 인생도 그러하다. 누구의 삶이 더 빛나고 누구의 삶이 더 희미한 것은 아니다. 삶은 다 반짝인다. 밤하늘의 별빛처럼 말이다. 별이 반짝이듯이 지상의 모든 사람들도 반짝인다' <김용택 '마음을 따르면 된다' 中에서>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2018-01-15

[인물 오디세이] 탑 메디컬그룹 오형원 박사 "끊임없이 배우는 게 늙지 않는 비결"

59년 서울대 의대 졸업 월남전 참전, 무공훈장도 76년 메릴랜드서 개원 81년 LA 와 25년 개업의 무료진료, 인술 펼친 공 인정 미 의회 수여 '올해의 의사상' "저소득층 환자 위해 무료진료 봉사하고파" 그와는 구면이었다. 수 년 전 야간진료센터에서 환자와 의사로 한 번 만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환자입장에서 그날의 만남은 꽤나 강렬했다. 당시 그는 약 처방과 함께 생활습관 교정과 증상에 좋은 식품까지 친절히 설명해 줬다. 환자 진료에 적잖은 시간을 할애하는 그 낯선 노(老)의사와의 만남은 신선하다 못해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바로 가정의학과 전문의 오형원(83) 박사다. 다시 그는 여전했다. 남들은 은퇴할 나이에 진료 현장을 종횡 무진하는 그는 한인 환자들, 특히 자신과 함께 나이 들어가는 시니어 환자들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이달 중 개원을 앞두고 있는 탑 메디컬그룹 진료실에서 오 박사를 만나봤다. #한인사회와 함께 나이 들다 대구 출생인 그는 경북고 1회 졸업생으로 1953년 서울대 의대에 입학했다. 1959년 의대졸업 후 외과전문의가 된 그는 군의관 시절이던 1965년 월남전에 참전해 무공훈장을 받기도 했다. 월남전에서 돌아와 수도육군병원 외과 부장으로 복무했고 제대 후엔 한미병원 외과 과장으로 재직하다 1973년 아내와 어린 두 딸을 데리고 미국에 왔다. 메릴랜드에 정착한 그는 지역 종합병원에서 인턴십과 레지던트를 거쳐 1976년 개인병원(가정의학과)을 개원해 5년여 간 진료했다. 그러다 1981년 처가식구들이 있는 LA로 이주해 라크라센타에 병원을 개원했다. 2년 뒤 LA한인타운 6가 길에 분원을 오픈했고 1987년 라크라센타 병원은 닫고 8가길 동서식품 인근으로 이전해 LA한인타운에서만 20년 넘게 진료했다. 이처럼 진료경험이 풍부하다 보니 요즘도 젊은 한인 의사들이 그에게 한인 환자, 특히 시니어 환자 진료 노하우를 자문해오기도 한다고. "한번은 한 2세 의사가 시니어 환자들에게 어디가 아파서 왔냐고 물어보면 많은 분들이 온 전신이 아파서 왔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럴 땐 너무 당황스럽다고 어떡해야 하느냐고.(웃음) 그럼 제일 아픈 데가 어디냐 부터 차근차근 물어보라고 해요. 그러다보면 원인을 발견할 수 있게 되거든요." LA로 병원을 옮긴 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한인사회에서 다양한 활동을 시작한 그는 재미서울대 의대 총동창회 회장을 비롯, 서울대 남가주 총동창회장, 남가주 한인의사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올해의 의사상'부터 '의료 봉사상'까지 그러나 당시 그가 무엇보다 심혈을 기울인 것은 80년대 중반부터 확산되기 시작한 HMO 한인 가입자들을 위한 한인 의사들로 구성된 IPA(Independent Providers Association)를 조직하는 것. 그래서 그는 뜻 맞는 한인 의사들과 함께 1988년 '유나이티드 MPO'를 출범시켰다. 이후 유나이티드 MPO는 LA 및 오렌지카운티 한인 의사 100여명이 가입된 명실상부 남가주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메디컬그룹으로 성장했지만 몇 년 뒤 여러 한인 IPA가 출범하면서 자연스레 해체됐다. 이처럼 진료하랴 IPA 관리하랴 바쁜 와중에도 그는 보험이 없는 한인들을 위해 각종 의료혜택을 주선하는 것은 물론 이들을 위한 무료진료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노력을 인정받아 그는 2003년 미국 의회로부터 '올해의 의사 상'을 수상했다. 이후 은퇴준비를 시작한 그는 두 딸들이 살고 있는 샌디에이고로 이주를 계획하고 2005년 병원 문을 닫았다. 그리고 2년 여간 한인건강정보센터에서 가정의학과 전문의로 근무하다 2007년 샌디에이고 소재 한 한인 병원의 제안으로 파트타임 진료를 시작한다. 그러면서 샌디에이고 노인회와 연이 닿아 건강 세미나 및 서예 클래스를 이끄는 등 7년 넘게 LA와 샌디에이고를 오가며 살았다. 이처럼 한인 노인들의 건강증진을 위해 힘쓴 공을 인정받아 그는 2013년엔 오바마 대통령이 수여한 '의료 봉사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7년 뒤 샌디에이고 이주를 포기한다. "30여 년 넘게 LA에 살아 이곳에 생활터전이며 친구들이 다 있다 보니 샌디에이고에서 영구 정착이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다 접고 다시 LA로 왔죠." LA로 돌아온 그는 2015년 LA한인타운 야간진료센터에서 1년간 근무했다. #서예는 평생의 길동무 한평생 의사로 살아온 그이지만 그의 인생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서예. 20년 전인 60대에 서예를 배우기 시작한 그는 목판에 붓글씨를 새기는 서각(書刻)까지 섭렵했다. 이처럼 늦은 나이에 붓을 잡게 된 것은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그의 부친은 한국서화가협회 회장을 지낸 고 서관 오해용 선생. 그러다보니 아주 어려서부터 서당에 다니며 집에서 붓글씨 연습을 즐겨했다고. "나이 들어서는 공부하랴 진료하랴 바빠 서예에 대해 생각해 볼 틈이 없었는데 60대에 들어서니 아버지 생전에 서예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당시 아흔을 넘긴 부친께 말씀드렸더니 너무 좋아하셨죠." 한국에 거주하던 부친은 그에게 문방사우를 보내왔고 그는 서예가에게 지도를 받으며 퇴근 후 3~4시간씩 연습에 매달렸다. 이후 미주한인서예협회 회장을 지내기도 한 그는 지난 20년간 협회에서 실시하는 연례 회원전에 참가했고 2년 전 한국 서예공모전에 응모해 오체상(五體賞)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 6년 전엔 먹으로 난초와 꽃, 나무를 그리는 문인화에 입문했다. "끊임없이 새로운 걸 배우는 게 제 건강 비결이라면 비결일 겁니다. 그리고 나이 들어서도 봉사가 됐든 직업이 됐듯 일을 놓지 않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젊음의 비결이 아닐까 싶어요, 그래야 늙을 새가 없거든요.(웃음) 그리고 무엇보다 기회가 된다면 저소득층을 위한 무료 의료봉사활동을 꼭 하고 싶습니다." 문득 히포크라테스 선서 한 구절이 떠올랐다. '이제 의업에 종사할 허락을 받으매 나의 생애를 인류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중략)/나의 양심과 위엄으로서 의술을 베풀겠노라/나의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 <히포크라테스 선서 중에서> 반세기도 훨씬 전 한국의 한 젊은 의학도에게 큰 울림을 줬을 이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이역만리 타국에서 어느새 백발성성 해진 노 의학자에게 여전히, 아니 세월의 무게를 덧입어 더 반짝이고 있었다. 가늠할 수 없는 그 세월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순간이었다.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2018-01-07

[인물 오디세이] 한유정 미술감독, 영화적 상상력을 현실로 소환하다

한국 대기업 다니다 유학 USC서 무대디자인 석사 선댄스 초청 독립영화로 '영화미술 마이더스' 찬사 방송·영화 종횡무진 할리우드 사로잡아 디자인업체 '본때' 설립 인테리어 분야도 진출 복잡다단한 작가적 상상력과 명쾌한 현실 그 사이 어디쯤 그녀가 서 있다. 바로 할리우드가 사랑한 미술감독 한유정(44)씨다. '베터 럭 투모로우' '허스' '댄싱 닌자'등 수십 편에 달하는 한 감독의 필모그래피만을 봤을 땐 꽤나 콧대 높고 까칠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닐까 지레 짐작했다. 그러나 웬걸,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눈 그녀는 솔직담백함에 유머까지 장착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녀를 더 빛나게 한 건 초심이라 명명하기엔 훨씬 더 재기발랄하고 반짝이는 청춘의 열정이었다. #무대 디자이너를 꿈꾼 소녀 서울 출생인 그녀는 예원중·서울예고를 거쳐 1992년 이화여대 장식미술과에 입학했다. "중학교 3학년 때 만난 한 성악가가 제가 미술 공부를 하고 있다는 걸 알고 대뜸 한국의 무대 디자인이 너무 열악하다며 그 분야를 공부해 보라 권유하더라고요. 운명처럼 그 말이 가슴에 꽂혀 그 후부터 줄곧 미국 유학을 꿈꿨죠." 대학 졸업 후 유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1996년 대기업에 입사한 그녀는 새벽엔 영어학원에 다니고 퇴근 후엔 대학원 입학전형에 필요한 포트폴리오를 만들며 차근차근 유학준비를 했다. 이후 어느 정도 돈이 모이자 미련 없이 사표를 내고 1997년 유학길에 오른 그녀는 USC대학원에서 무대 디자인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오랜 꿈을 이룬 기쁨도 잠시, 그해 겨울 IMF사태가 터졌다. "전액장학금을 받아 학비는 해결됐지만 환율폭등으로 생활비가 문제였죠. 그래서 조교부터 시작해 소품실 관리인까지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어요." 또 집세가 저렴한 곳으로 이사하고 끼니는 고추장에 밥 비벼 김 싸 먹기도 하고 매주 두 차례씩 맥도널드에서 3개에 1불하는 햄버거를 사와 냉동시켰다 데워 먹으며 생활했다.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느라 하루 2~3시간밖에 못자는 고달픈 생활의 연속이었죠. 그래도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어 너무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미쳐도 좋아 그녀가 영화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USC대학원 영화과 학생들에게 단편영화 미술감독 의뢰를 받으면서부터. 이후 입소문을 타고 학생들의 의뢰가 쏟아져 들어왔다. 가뜩이나 모자란 생활비를 저예산 영화 세트 디자인에 쏟아 부으며 미친 듯 일하던 그녀에게 상업영화 데뷔 기회가 찾아왔다. 배우 정우성과 고소영이 주연을 맡고 LA에서 올로케 촬영한 한국영화 '러브'(1999) 제작진이 그녀에게 미술감독을 제안해 온 것이다. "미술감독은 세트뿐만 아니라 영화에 나오는 모든 배경과 소품을 관장합니다. 주인공이 사는 아파트부터 세탁소, 식당에 길거리 장면까지 영화적 상황과 캐릭터에 맞게 디자인하는 거죠. 그러다보니 어떤 배우들은 제 세트에 들어와서 아 이제야 내 캐릭터가 파악 되네요 라고 말하기도 해요. 제겐 최고의 찬사죠." 이후 그녀는 독립영화 '리틀 히어로즈'의 미술감독으로 참여하는 등 학업과 영화 미술감독을 병행하며 2000년 석사학위(MFA)를 받았다. 졸업 후 그녀가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본격적으로 할리우드에 알린 건 영화 '베터 럭 투모로우'(Better Luck Tomorrow, 2001)를 통해서다. 선댄스 영화제 초청작이며 개봉 첫 주 최다관객 동원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이 영화의 미술총감독을 맡은 그녀는 '1만불짜리 세트를 10만불짜리로 돋보이게 하는 마이더스의 손'이라는 찬사를 들으며 할리우드에 화려하게 입성한다. 그리고 2001년엔 2000만 달러가 투입된 영화 '맨 프롬 엘리시안 필즈'(The Man from Elysian Fields)에서 어시스턴트 아트디렉터를 맡아 앤디 가르시아, 믹 재거 등 할리우드 스타들과 작업했고 2003년엔 알리시아 실버스톤과 우디 해럴슨 주연의 '스코츠드(Scorched)'에서 아트디렉터을 맡았지만 촬영 중 복잡한 내부사정으로 인해 우여곡절 끝 중도하차했다. "그러면서 슬럼프가 찾아왔어요. 그때 마침 한국에서 영화 미술감독 제안이 들어와 한국으로 돌아갈까도 생각했지만 거기서 포기할 수 없어 눈물을 머금고(웃음) 미국에 남았죠." #할리우드가 사랑한 미술감독 심기일전한 그녀는 이후 영화는 물론 각종 TV 쇼 미술감독으로 이름을 날렸다. 2002년 파라마운트사가 제작한 TV리얼리티쇼 '제이미 케네디 실험'(JKX)을 비롯해 2007년 케이블채널 코미디센트럴에서 방영된 '하프웨이 홈'(Halfway Home), 영화 '익스포즈드'(Exposed,2003) '웨이스트 딥'(Waist Deep,2006), 라스트 나이트(Last Knight,2012) 등 수 십여 편의 방송과 영화에서 프로덕션 디자이너 및 아트디렉터로 종횡무진했다. 또 제8회 전주주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받은 한미합작 영화 '허스'(HERs,2007)의 미술감독으로 참여하는 등 한국 영화계와도 교류도 꾸준히 이어갔다. 덕분에 그녀는 2006년 KBS '지구촌 한국인 젊은 그대'에 소개되며 한국 청년들의 워너비가 됐고 2010년엔 베스트셀러 '꿈보다 먼저 뛰고 도전 앞에 당당하라'를 출간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무렵 IT업계 종사자인 한인 2세와 결혼해 슬하에 세 살배기 딸을 둔 그녀는 출산 후 육아를 위해 제작 일선에서 잠시 떨어져 지내기도 했다. 대신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다른 일들에 도전했다. 2012년 LA한류체험관 디자인 및 인테리어를 진두지휘했고 2013년부터 올해까지 뉴욕필름아카데미(NYFA)에 출강하기도 했다. 또 한국 드라마 로비스트(2007), 상속자들(2013)의 미국촬영 분 미술감독을 맡기도 했다. 현재 그녀는 디자인회사 '본때'(productiondesigner.tv)를 운영하며 영화, 방송, 광고의 미술 디자인 및 상업 및 주택 인테리어 사업도 병행하고 있다. "아직 구체화 되진 않았지만 조만간 영화와 방송계에서 지금껏 시도하지 않은 실험적인 작업들을 해보려 열심히 구상 중입니다." 지금껏 달려온 것만으로 숨 가쁠 터인데 그녀는 여전히 새 길을 찾느라 여념이 없다. 있던 꿈도 슬며시 접을 나이에, 그렇다한들 하나 이상할 것 없는 지금, 다시 길 떠날 채비라니. 의아해 하는 눈빛에 그녀는 지금껏 쌓은 경험이 가장 큰 자산인데 이 보다 더 좋은 타이밍은 없다며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짓는다. 순간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 위로 반짝이는 햇살 한줄기 내려앉는다. 길 떠나기 딱 좋은 날이다.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2017-12-24

[인물 오디세이] 글로벌원 써니 채 대표…화려하거나 혹은 눈물겹거나

마이클 잭슨 내한공연 등 한미 오가며 사업 키워 올해 비영리재단 설립 노숙자 돕기 사역 열심 빛바랜 컬러 사진 속엔 동양인치고 유달리 팔다리가 긴, 모델 포스 짱짱한 아가씨가 서 있다. 40년 전 그녀다. 그리고 바로 오늘의 글로벌원(globaloneltd.com) 써니 채(59) 대표이기도 하다. 눈물 나게 반짝이는 청춘이 그곳에서 무심한 듯 시크하게 40년이란 세월을 건너 웃고 있었다. 어쩐지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묘한 비현실감 마저 느껴졌다. 흥미진진한 판타지와 냉정한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영화보다 더 화려하게 그러나 그 굽이굽이 역경과 사연도 많았던 그녀의 아주 특별한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당찬 소녀, 모델이 되다 서울이 고향인 그녀는 1973년 유타주 솔트레이크 시티로 이민 왔다. 당시 그녀 나이 열세 살. 혈혈단신 오른 미국행이었다. "제가 사춘기에 들어서면서 새어머니와 갈등이 심해지고 골목대장 노릇 하면서 말썽만 부리니까 당시 육군 장성이던 아버지가 잘 알고 지내던 유타에 사는 미군 장교 댁으로 절 보내셨죠. 저 역시 어릴 때부터 미국에 오고 싶기도 했고요." 어린 나이에 쉽지 않은 이민살이였겠다 싶었는데 웬걸, 이런 걱정을 무색하게 만들 만큼 그녀는 참 씩씩하게 살았다. 오자마자 패스트푸드 체인 점원을 시작으로 8학년 때는 자전거를 타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화장품 방문판매원을 하며 용돈을 벌어 썼단다. 그러다 레스토랑 웨이트리스로 일하던 11학년 때 식당을 찾은 한 고객이 백화점 모델을 해 볼 생각이 없냐는 제안을 해왔다. 요즘으로 치면 길거리 캐스팅인 셈이다. "당시 노스트롬 백화점 본사가 유타에 있었어요. 그래서 매 시즌 카탈로그 촬영을 하는데 동양인 모델이 필요하다며 저에게 캐스팅 제안을 해왔죠." 첫 촬영에서 그녀가 받은 보수는 600달러. 당시 그녀가 식당에서 한 달간 버는 돈의 두 배가 넘는 액수였다. 이후 유타대학교 영문과에 진학한 그녀는 본격적으로 각종 로컬 지면광고 및 TV 광고 모델을 하며 유타주 스타로 떠올랐다. #모델 에이전시로 대박 대학 4학년 때 그녀는 유명 모델 에이전시에서 캐스팅디렉터 어시스턴트로 인턴십을 하면서 에이전시 사업 전반에 대해 익히게 된다. 그러면서 모델 양성교육 사업에 전망을 발견하고 전국을 돌며 모델교육 세미나를 시작했다. 1년여 간의 세미나 사업은 성공적이었고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졸업하던 해인 1986년 본격적으로 모델 에이전시 사업에 뛰어들어 솔트레이크 시티에 '써니 채 인터내셔널' 간판을 내걸었다. 그녀의 명성을 듣고 모델들이 몰려들었고 에이전시는 금세 150여명의 소속 모델을 거느리게 됐다. 그러나 모델 매니지먼트보다 그녀를 더 유명하게 만든 것은 모델 수업. 처음엔 모델 지망생들이 수업을 들었지만 시간이 가면서 입소문을 타고 상류층 자제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모델 교육이라는 게 걸음걸이부터 생활매너, 에티켓 같은 걸 가르쳐서 그런지 부잣집 사모님들이 앞 다퉈 딸들을 보내기 시작했죠. 나중엔 유타뿐 아니라 아이다호, 와이오밍, 덴버에서까지 학생들이 밀려와 감당이 안 돼 수업료를 1인당 3000달러까지 올렸는데도 줄질 않았으니까요. 덕분에 떼돈을 벌었죠.(웃음)" 큰돈을 번 그녀는 솔트레이크 시티 다운타운 소재 4000스퀘어피트 규모의 유서 깊은 랜드마크로 사무실을 이전했고 오프닝 당시 주지사가 와 축사를 해줄 만큼 그녀는 지역사회에서영향력 있는 사업가로 발돋움 했다. "호시절이어죠. 당시 촬영장에 엑스트라 1000명을 보내면 그날 오후 더플백에 10만달러 현금을 담아주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이후 그녀는 한국과도 활발하게 사업적 교류를 가졌다. 1989년 개장을 앞둔 실내 테마파크 롯데월드에 마술사 및 전문 공연단원을 파견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은 그녀는 1996년 마이클 잭슨의 첫 내한공연 당시 한국과 미국 대행사간 다리 역할을 하면서 업계에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90년대 후반 한국에서 큰 화제를 모았던 브룩 쉴즈, 브래드 피트, 피어스 브로스넌 등 할리우드 스타들의 광고모델 계약도 그녀의 손끝을 거쳤다. #노숙자 사역, 꿈을 품다 사업은 승승장구해 그녀는 1998년 시애틀을 필두로 댈러스, 휴스턴, 조지아 등에 연달아 지사를 설립했다. 그러나 2001년 9·11테러 이후 광고시장이 급속도로 냉각되면서 그녀의 사업도 적잖은 타격을 받았다. 그래서 그녀는 전국 지사를 모두 닫고 본사를 LA로 이전하면서 회사명도 '글로벌 원'으로 교체했다. 몇 년 뒤 사업은 안정을 되찾았지만 2008년 그녀는 이혼의 아픔을 겪는다. 마흔 넘어 한 10여 년간의 결혼생활을 정리한 것이다.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죠. 그래도 그때 신앙을 가지면서 이겨 낼 수 있었습니다." 현재 한인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그녀는 지난 10년간 한국어를 제대로 배운 것이 가장 큰 수확이라 말한다. "설교 이해는 물론 교인들과도 소통해야 하니까 한국어 공부가 절실했죠. 그래서 매일 아침 한국어 신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어요. 이젠 한국 아줌마 다 됐죠.(웃음)" 현재 LA다운타운에 본사를 둔 글로벌원은 10대부터 70대까지 모델 및 배우 500여명을 거느린 토털 매니지먼트 업체로 자리매김했으며 시애틀, 휴스턴, 조지아 지사도 다시 오픈했다. 그러나 요즘 사업보다 그녀가 더 마음을 쏟고 있는 것은 바로 노숙자 사역. "지난해 평소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던 노숙자들을 보면서 마음에 소망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이들을 집으로 데려다 씻기고 입혀 이야기도 나누고 자립할 수 있게 일자리를 찾아 주기 시작했죠." 그러나 개인적 도움만으로는 갈수록 늘어나는 LA 노숙자들을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에 그녀는 올해 비영리재단 '리조이스 인 호프'(rejoiceinhope.org)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노숙자 돕기에 팔 걷어붙이고 나섰다. 그녀의 꿈은 노숙자들이 함께 모여 살며 자급자족할 수 있는 캠핑장을 짓는 것. 그래서 그녀는 주정부에 이에 관한 계획서를 제출했고 관련 부서에서도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라고 한다. "요즘 그 어느 때보다 살맛나요. 한 사람을 살리는 일에 작은 힘이나마 보탬이 된다고 생각하니 매일 매일이 행복하고 감사할 따름이죠." 허튼 말이 아니었다. 일견 이 평범한 말이 특별하게 와 닿았던 건 그저 말뿐이 아닌 그녀의 현재 삶이 그 행복을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심만큼 힘이 센 감동은 없는 법이니까.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2017-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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