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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새들과 물고기를 부러워하며…

#마음풍경 1   매년 유월이 되면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노랫소리가 가슴을 울린다. 아리고 쓰리다. 우리에게는 통일(統一)도 중요하지만, 더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통일(通一)이라고 신영복 교수는 강조했다. 외교적 군사적 정치적 통일(統一)과 함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통일(通一)이야말로 진정한 ‘하나 됨’이라는 말씀이다. 공감이 간다. (신영복이란 이름을 거론하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되는 현실이 참 아프다.)   어느 통일이든 좋으니, 하루라도 빨리 되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내 생전에 이루어지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안타깝고 슬프다.   #마음풍경 2   38이라는 숫자가 화투판에서는 막강한 힘을 쓴다는데, 민화투도 칠 줄 모르는 내게는 그저 조국을 둘로 갈랐던 38선으로만 아프게 읽힌다. 목숨 걸고 삼팔선을 넘은 삼팔따라지의 후손이 느끼는 강박관념 때문일까? (지금은 휴전선으로 과거의 38선과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부디 이런 푸념이 어린 시절 어머니 등에 업혀 삼팔선을 넘어와 살아남은 자의 처량한 넋두리이기를 빈다.   #마음풍경 3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0년 넘는 세월이 흘렀다. 전쟁을 직접 몸으로 겪었던 국민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달리 말하면 전쟁을 모르는 세대가 국민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런 세대 변화에 따라 통일에 대한 생각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전쟁을 겪지 보지 않은 세대를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해보면, 통일을 꼭 해야 하나? 이대로 살면 되는 거 아닌가? 통일을 하면 오히려 더 골치 아파지는 거 아니냐? 이런 의견이 만만치 않게 나온다고 한다.     지독한 반공교육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젊은 세대는 과거 세대와 생각이 전혀 다른 것이다. 세월이 조금 더 지나 전쟁세대가 더 없어지면 생각은 더 달라질 것이다.   #마음풍경 4   북한은 걸핏하면 미사일을 쏘아댄다. 아슬아슬 무섭다. 궁지에 몰려서 그런다고 하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다른 시각으로 보면 미사일은 돈 덩어리다. 돈뭉치를 하늘로 쏘아 올리는 셈이다. 그것 때문에 죄 없는 북한 주민들은 굶주려야 한다. 북한에서는 굶어 죽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데, 남쪽에서는 한없이 먹어대는 ‘먹방’이니 맛집 탐방 따위가 인기를 끌고 있단다. 참 마음이 아프다. 대체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늘 배가 고팠던 피난 시절이 떠오른다. 그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전 국민이 필사적으로 일했고, 드디어 세계적으로 잘 사는 나라로 빛나게 되었다. 하지만 북녘은 아직도 가난하다. 그런데 도울 길이 없다.   #마음풍경 5   대북 정책은 정권마다 바뀐다. 열렸다 닫혔다 변덕이 많고, 일관성이 없으니 앞날을 예측하기도 어렵다.   개성공단도 문을 닫았고, 금강산 관광도 막힌 지 오래다. 남북 교류 자체가 끊기고 사방이 꽉 막혔다. 언제 다시 열릴지 알 길도 없다.   남쪽에서도 사람들은 이념에 따라 날카롭게 나뉘어서 무섭게 대립한다. 생각을 말하기도 극히 조심스럽고, 통일을 염원하는 글 한 줄 쓰기도 어렵다. 답답하다.   김민기의 노래 ‘철망 앞에서’를 들으며, 제 마음대로 자유롭게 넘나드는 새들과 물고기 떼를 부러워한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물고기 새들 신영복 교수 노랫소리가 가슴 금강산 관광

2023-06-08

[문화산책] 어린이의 창조적 호기심

“나에 대한 최고의 찬사는 귀엽다는 말이야. 유치한 구석이 있으시네요, 귀여우세요 하면 기분이 아주 좋아. 반대로 어른스럽다, 인격자다, 원로답다, 노숙하십니다란 건 칭찬으로 들리지 않지. 어린아이의 마음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 나에겐 인삼 녹용이나 마찬가지예요.”   이어령 선생이 생전 인터뷰에서 하신 말씀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창조적 지식인의 말씀이니 믿을 수밖에 없다. 80을 훌쩍 넘은 나이에 귀엽다는 칭찬을 듣고 싶어하는 마음이 참 귀엽다.   “세상 모든 아이는 지적 호기심이 있지만, 어른이 되면서 이 호기심을 잃어버린다”는 것이 선생의 주장이다. 그리고, 학교를 비롯해서, 등수를 매겨 줄 세우기를 하는 사회가 그런 호기심과 창조적 능력을 죽이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만큼 어린이의 순수한 마음이 소중하다는 말씀이다.   영국 시인 윌리엄 워즈워드는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노래했고, 피카소는 “모든 아이들은 예술가이다. 다만 문제는 그들이 성장하면서도 여전히 예술가로 남아 있는가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분들의 말씀이나 이어령 선생처럼 세상 어린이들의 순수한 마음을 소중하게 여긴다면 세상이 한결 창조적이고 예술적으로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세상은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정반대로 돌아가고 있다.     가장 큰 원인은 부모들의 욕심 때문인데, 그 욕망이 간단히 사라질 전망은 거의 없어 보인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멋지게 포장되어 있는 데다가, 자기 자식은 훌륭한 인간이라고 믿는 오해와 과대망상이 있기 때문이다.   빛나는 창조적 능력을 죽이는 또 하나의 큰 원흉은 학교 교육이다. 학교는 창의력의 싹을 무자비하게 잘라버리는 곳이다. 달달 외우게 하고, 사지선다형이나 OX 문제 시험을 쳐서, 성적순으로 줄 세우기를 하는 교육은 창의력과는 별 관계가 없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아쉽게도 나는 희생자인 셈이다. 고지식하고 엄격한 가정교육 탓에 나는 어릴 적부터 애늙은이, 어른이로 자랐다. 초등학교 때는 어머니가 선생님으로 계시는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모범생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전형적인 모범생답게 학교 공부와 숙제 착실하게 잘하고, 시험 잘 치는 재주가 좀 있었는지 성적은 꽤 좋았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그러니까, 창조적 능력과는 거리가 먼, 지식은 좀 있지만 지혜는 없는 규격품이었던 셈이다.   정서적인 면에서도 그랬다. 가령 나와 내 동생들은 ‘엄마’라는 말을 모르고 자랐다. 말을 배울 때부터 ‘어머니’라는 말만 배웠기 때문에, 평생 어머니를 엄마라고 불러보지 못했다.     어머니와 엄마는 뜻은 같은 낱말이지만, 정서적 밀도는 크게 다르다. 부모님을 탓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점은 못내 아쉽다.   그처럼 틀에 갇힌 범생이가 예술 쪽으로 방향을 튼 것을 생각해보면, 참 신기하다. 아마도 어린 시절, 아버지가 책 빌려주는 가게를 운영한 덕에 이런저런 책을 닥치는 대로 읽은 것이 예술 소양의 원천이 된 것 같다.   하지만, 틀을 벗어나 용감하게 창조적으로 살지는 못했다. 주어진 규격을 벗어나면 큰일 나는 줄 알았던 것이다. 비유하자면, 길든 가축으로 안전하게 살았을 뿐, 새로운 세상을 찾아 헤매는 자유로움은 모르고 산 셈이다. 그러니 예술가답게 창조적인 날개를 마음껏 펼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이 많이 들어서도 어린이 마음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이들이 참 부럽다. 나도 그러고 싶다. 어린아이의 순수한 마음을 되찾기는 불가능하겠지만, 고약한 꼰대가 되는 것만이라도 피하고 싶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어린이 호기심 창조적 호기심 어린이 마음 창조적 능력

2023-06-01

[문화산책] 거북한 호칭, 이상한 존댓말

살다 보니 엄청난 자식 부자가 되어 있어 참 황당하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어 있으니 속수무책이다. 식당에서, 상점에서, 병원에서….여기저기서 아버님이라고 불리니 정신이 하나도 없다. 아버님이라고? 내가 언제 저런 자식이나 며느리를 두었나? 아무리 더듬어 봐도 기억이 없다.   나이 먹은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을 담은 존칭이라는데, 그런 존대어가 무차별적으로 난무하니, 듣는 사람은 전혀 고맙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을 거침없이 아버님 어머님이라고 부르는 고약한 풍조는 한국에서 시작된 것인데, 태평양을 건너 한인사회에까지 전해진 것이다.   손님은 왕이기 때문에 존대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인 모양이다. 물론 존댓말이 나쁜 것은 아니다. 사전의 설명은 이렇다. “존댓말은 이야기의 주체가 되는 인물이나 듣는 이들에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쓰는 언어 표현이다. 경어 또는 높임말이라고도 부른다. 자신보다 듣는 이가 나이가 더 많거나 높은 계급에 있는 경우나, 혹은 만난 지 서로 얼마 되지 않아 친분이 없는 경우 쓰게 된다.”   우리말의 존댓말은 참으로 어렵다. 글쟁이인 나도 모르는 것이 많아 부끄럽다. 젊은 세대의 존댓말 사용은 더 엉망이다. 요새는 요상한 존댓말도 당당하게 사용되고 있다. “고객님, 주문하신 커피 나오셨습니다. 뜨거우시니 조심하세요. 오천 원 되시겠습니다.”   걱정스러운 큰 문제는 이런 존칭의 남용 때문에 인간관계와 친척 촌수가 이상하게 얽혀버리는 현실이다. 모르는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아버님 어머님이라고 부르며 부모 자식 관계로 얽히고, 식당에 가면 이모님이 반긴다. 어중간한 사이의 남자는 삼촌이 된다.   그뿐이 아니다. 젊은 세대들은 남편을 오빠라고 부른다. 그 이전 세대에서는 아빠라고 부르는 이들이 많았다. 아빠나 오빠와 같이 살며 식구를 늘리는 것을 전문용어로 ‘근친상간’이라고 부른다. 그러다 보니, 온 나라 전 국민의 촌수가 대단히 복잡다단해진다. 온 백성이 모두 친척이다.   사실 우리말의 호칭은 참 애매하고 무질서하다. 적당한 호칭이 없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그래서 촌수의 혼란이 생기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말은 대체로 주어도 생략된 데다가 맺고 끊음이 분명치 않은 경우가 많다.   존댓말도 까다롭기 그지없다. 한글은 세상에서 가장 발달한 존대법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는 자랑한다. 하지만, 학자들은, 한국어는 존대법 이상으로 하대법도 세상에서 가장 발달한 언어라고 지적한다. 한국어 반말이 담고 있는 무례함과 폭력성은 대단하다는 이야기다. 지금 우리 삶의 현실에서 생생하게 드러나는 사실들이다.   한쪽에서는 “아버님, 커피 나오셨습니다. 뜨거우십니다. 조심하세요”라는 식의 얄궂은 과잉 존대어가 설치고, 다른 한편에서는 잔혹한 욕지거리가 거침없이 난무한다. 정치판의 막말과 거짓말은 이미 수위를 넘었고, 온라인 공간의 욕지거리 댓글은 차마 옮기기도 낯 뜨거울 지경이라고 한다. 양쪽 극단의 혼란이 도를 넘어도 한참 넘었다.   이 같은 혼란은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문장의 주어는 ‘나는’이다) 넘치는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過猶不及)는 옛 말씀이 새롭다. 우선, 촌수의 혼란부터 바로잡았으면 좋겠다. 남편을 아빠나 오빠라고 부르는 잘못된 버릇부터 고치자고 주장하고 싶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북한 존댓말 존댓말 사용 아버님 커피 친척 촌수가

2023-05-25

[문화산책] 우리가 미처 모르는 기념일들

우리가 잘 모르고 지나쳐서 그렇지, 뜻깊은 기념일이 참 많다.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기념일은 공휴일로 지정되어 달력에 빨간색으로 표시돼있다. 그런가 하면, 삼겹살 데이(3월3일)니 빼빼로 데이(11월11일), 짜장면 먹는 블랙데이(4월14일)처럼 재미로 만들었거나, 업자들의 농간 냄새 물씬한 기념일도 많고, 자꾸만 새로 생겨난다. 세계 행복의 날(3월20일), 세계 강아지의 날(3월23일), 지구의 날(4월22일), 한국 김치의 날(11월22일)도 있다. 그것 참, 무슨무슨 날이 참 많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생일이나 결혼기념일 등은 잊어버리면 큰일 나는 중요한 기념일이고, 가족적으로는 제삿날이나 부모님 기일 등이 있고, 민족적으로는 설날이나 추석 같은 명절에는 며칠을 내리 놀아야 한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일 년 365일이 모두 기념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날마다 축제처럼 즐겁게 살자는 뜻이라면 나쁠 것도 없겠지만, 일은 언제 하나 싶다. 하기야, 어느 하루인들 소중하지 않으랴만….   기억하고 의미를 되새겼으면 좋을 것 같은 기념일도 적지 않다. 5월21일은 ‘부부의 날’이다. 한국의 정부 차원에서 그렇게 지정했다고 한다. 이 날만이라도 부부의 의미를 되돌아보고, 사랑을 다지자는 뜻인 모양이다. 부부의 날을 5월 21일로 정한 이유는 가정의 달인 5월에 둘(2)이 하나(1)가 된다는 심오한(?) 뜻이 담겨 있다는 설명이다. 국민의 사랑까지 챙기는 정부의 깊은 뜻이 참으로 고맙다. 눈물겹다. 그런데, 대부분의 국민은 이 거룩한(?) 기념일을 그냥 지나치는 모양이다. 안타깝다.   3월8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 여성의 날’이다. 역사가 아주 깊은 기념일이다. 세계적으로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왜 여성의 날만 있냐고 투덜대는 남성들을 위해 ‘세계 남성의 날’도 있다. 11월19일이다. 1990년대에 시작된 이 날은 유엔이 지정한 공식 기념일은 아니지만, 영국을 포함해 약 80개국에서 기념한다고 한다. “남성들이 이 세계와 가족, 그리고 지역사회에 가져다주는 긍정적인 영향”을 기념하고, 남성과 여성의 관계 개선 등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날이라는 설명이다. 그것 참!   ‘세계 여성의 날’은 단순히 축제로 기념하는 것으로는 모자란다. 1911년 오스트리아, 덴마크, 독일과 스위스에서 처음으로 기념한 이래 지난 100여년간 전 세계 많은 사람이 3월8일을 여성들을 위한 특별한 날로 기념해왔다.   역사적 기원을 살펴보면, ‘세계 여성의 날’은 여성 노동자들의 운동에서 유래됐다. 여성들이 사회, 경제, 정치 등 전반에 걸쳐 얼마나 많은 것들을 싸워서 쟁취했는지를 축하하고 기념하는 날이다. 당시 여성 노동자들은 간절하게 거리에 나와 동등한 권리를 위해 투쟁했다.   여성의 날을 최초로 만든 클라라 체트킨(1857~1933)은 이날을 국제 기념일로 만들어야 한다고 1910년 코펜하겐에서 열린 여성 노동자 국제 콘퍼런스에서 제안했고, 회의 참석자들은 만장일치로 그녀의 제안에 찬성했다. 그리고 1975년 유엔이 3월8일을 공식적으로 ‘여성의 날’로 지정했다. 무려 65년의 세월이 걸린 것이다.   ‘세계 여성의 날’이 3월8일로 정해진 것은, 1917년 러시아 여성 노동자들이 ‘빵과 평화’를 내세우며 벌인 대규모 파업이 성공하여, 정부로부터 여성 참정권을 얻어낸 역사적 사건에 연유한다고 한다. ‘빵과 평화’ 시위가 시작된 날이 3월8일이었다.   생각해보면, 참 까마득하다. 우리 인류가 인류의 절반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무지막지한 짓을 그렇게도 오래 저질러왔다니….사회 전반에서 그랬고, 예술계에서도 그랬다. 긴말 할 것 없이, 미국에서 여성의 참정권이 인정된 것이 1920년 수정헌법 19조를 통해서였으니….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기념일 국제 기념일 공식 기념일 모두 기념일

2023-05-18

[문화산책] 아름답고 따스한 손의 표정

한동안 예술가의 손을 집중적으로 관찰한 적이 있다. 관심을 가지고 유심히 살펴보니 보면 볼수록 풍부하고 아름다운 손의 표정에 감탄하게 된다. 손이 말을 하고 음악을 만들고 춤을 춘다. 말이 안 통하면 손짓 발짓으로 소통한다. 수화의 세계는 한층 깊다.   젊은 시절 연극에 미쳐 지낼 때도 손의 다채로운 표정이 보여주는 표현력과 설득력에 감탄하며 소중하게 여겼지만,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한 부분이 너무 많았다. 손이 건네는 말과 표정은 정말 넓고 깊고 그윽하다.   예술세계에서는 거의 절대적이다. 음악가의 손은 아름답고 신비롭다. 오케스트라를 통솔하여 조화로운 음을 만들어내는 지휘자의 손도, 악기를 애무하는 연주자들의 손도, 가수의 손놀림도 깊고 그윽하다. 황제 카라얀의 손짓은 철학적이고,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손은 음악과 하나로 어우러지며 춤춘다. 지휘자마다 추구하듯 음향이 다르듯 손짓도 그렇게 다르다.   피아니스트의 현란한 손놀림, 바이올린 연주자의 섬세한 손 움직임, 하프 어루만지는 우아한 손길, 기타 고수의 현란한 손길…. 가야금 튕기는 손, 대금 연주자의 운지, 타악기 두드리는 신명의 손….   미술작품에 그려진 손들도 다양한 표정으로 많은 말을 한다. 볼수록 정겹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서 신과 인간이 서로 마주하며 소통하는 손, 알프레드 뒤러의 기도하는 손, 로댕이 조각한 손… 그 수많은 명작…. 명화에서 손 부분만을 따로 떼어서 감상해도 감동적이다. 정말 많은 것을 속삭여준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손, 도자기를 빚는 도공의 흙 묻은 손, 붓을 잡은 서예가의 손, 허공을 가르는 춤꾼의 손짓….   예술작품에서만이 아니다. 우리 삶에서도 손은 아름답다. 돈벌이를 위해 마지못해 컴퓨터 자판 위를 정처 없이 헤매는 손, 습관적으로 무표정하게 휴대전화를 두드리는 손, 돈을 세는 손…. 그런 고달픈 손 말고 아름다운 손이 많다. 열심히 일하다가 구슬땀 닦는 손, 책장을 넘기는 손, 정성껏 손글씨로 편지 쓰는 손, 화초에 물 주는 손, 아내의 젖은 손 같은 고맙고 거룩한 손…. 그중 으뜸은 아무래도 어머니의 거칠어진 손일 것이다.   우리 인간이 두 발로 걷는 직립보행의 삶을 시작하면서 손은 신체에서 가장 요긴한 부분으로 진화했다. 문명 발전의 가장 효율적 연장으로 아름답고 편리하게 진화했다. 그렇게 진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더러워지기도 했다. 그리고, 드디어 지금은 ‘손’전화(휴대폰)의 시대다. 그러다 보니, 영화 ET의 손가락처럼 이상하게 변해버린 손도 점점 많아진다.   안타깝게도 우리네 현실에는 나쁜 손, 더러운 손이 훨씬 더 많다. 그래서 매우 어지럽고 아슬아슬하다. 무섭다. 방아쇠를 당기는 피 묻은 손, 아무 의미 없는 괴성을 내지르며 허공을 찔러대는 정치가의 검은 손, 불러주는 대로 받아쓰기에 바빠서 정의라는 말조차 잊어버린 기자의 창백한 손, 같은 반 친구의 인생을 폭력으로 뭉개버리는 젊은 청춘의 잔인한 손, 무슨 판결문이라는 걸 읽으며 공허하게 방망이 두드리는 손, 똑같은 말을 꼭 세 번씩 되풀이하며 내 질러대는 시위대의 손, 훔치는 손, 걸핏하면 파이팅 외치며 흔들어대는 주먹손, 때려 부수는 파괴의 손….   이렇게 부정적이고 어두운 손 그림자가 짙어질수록, 아름다운 손, 착한 손이 건네는 다정한 말이 그리워진다. 손을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것은 사랑이다. 세상에서 가장 맛나는 엄마의 손맛, 엄마손은 약손 같은 근원적 사랑의 손길, 진정성과 체온이 그득 담긴 예술가의 손길, 인공지능에는 없는….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표정 손길 인공지능 손길 진정성 대금 연주자

2023-05-18

[문화산책] 아름답고 따스한 손의 표정

한동안 예술가의 손을 집중적으로 관찰한 적이 있다. 관심을 가지고 유심히 살펴보니 보면 볼수록 풍부하고 아름다운 손의 표정에 감탄하게 된다. 손이 말을 하고 음악을 만들고 춤을 춘다. 말이 안 통하면 손짓 발짓으로 소통한다. 수화의 세계는 한층 깊다.   젊은 시절 연극에 미쳐 지낼 때도 손의 다채로운 표정이 보여주는 표현력과 설득력에 감탄하며 소중하게 여겼지만,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한 부분이 너무 많았다. 손이 건네는 말과 표정은 정말 넓고 깊고 그윽하다.   예술세계에서는 거의 절대적이다. 음악가의 손은 아름답고 신비롭다. 오케스트라를 통솔하여 조화로운 음을 만들어내는 지휘자의 손도, 악기를 애무하는 연주자들의 손도, 가수의 손놀림도 깊고 그윽하다. 황제 카라얀의 손짓은 철학적이고,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손은 음악과 하나로 어우러지며 춤춘다. 지휘자마다 추구하듯 음향이 다르듯 손짓도 그렇게 다르다.   피아니스트의 현란한 손놀림, 바이올린 연주자의 섬세한 손 움직임, 하프 어루만지는 우아한 손길, 기타 고수의 현란한 손길…. 가야금 튕기는 손, 대금 연주자의 운지, 타악기 두드리는 신명의 손….   미술작품에 그려진 손들도 다양한 표정으로 많은 말을 한다. 볼수록 정겹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서 신과 인간이 서로 마주하며 소통하는 손, 알프레드 뒤러의 기도하는 손, 로댕이 조각한 손… 그 수많은 명작…. 명화에서 손 부분만을 따로 떼어서 감상해도 감동적이다. 정말 많은 것을 속삭여준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손, 도자기를 빚는 도공의 흙 묻은 손, 붓을 잡은 서예가의 손, 허공을 가르는 춤꾼의 손짓….   예술작품에서만이 아니다. 우리 삶에서도 손은 아름답다. 돈벌이를 위해 마지못해 컴퓨터 자판 위를 정처 없이 헤매는 손, 습관적으로 무표정하게 휴대전화를 두드리는 손, 돈을 세는 손…. 그런 고달픈 손 말고 아름다운 손이 많다. 열심히 일하다가 구슬땀 닦는 손, 책장을 넘기는 손, 정성껏 손글씨로 편지 쓰는 손, 화초에 물 주는 손, 아내의 젖은 손 같은 고맙고 거룩한 손…. 그중 으뜸은 아무래도 어머니의 거칠어진 손일 것이다.   우리 인간이 두 발로 걷는 직립보행의 삶을 시작하면서 손은 신체에서 가장 요긴한 부분으로 진화했다. 문명 발전의 가장 효율적 연장으로 아름답고 편리하게 진화했다. 그렇게 진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더러워지기도 했다. 그리고, 드디어 지금은 ‘손’전화(휴대폰)의 시대다. 그러다 보니, 영화 ET의 손가락처럼 이상하게 변해버린 손도 점점 많아진다.   안타깝게도 우리네 현실에는 나쁜 손, 더러운 손이 훨씬 더 많다. 그래서 매우 어지럽고 아슬아슬하다. 무섭다. 방아쇠를 당기는 피 묻은 손, 아무 의미 없는 괴성을 내지르며 허공을 찔러대는 정치가의 검은 손, 불러주는 대로 받아쓰기에 바빠서 정의라는 말조차 잊어버린 기자의 창백한 손, 같은 반 친구의 인생을 폭력으로 뭉개버리는 젊은 청춘의 잔인한 손, 무슨 판결문이라는 걸 읽으며 공허하게 방망이 두드리는 손, 똑같은 말을 꼭 세 번씩 되풀이하며 내 질러대는 시위대의 손, 훔치는 손, 걸핏하면 파이팅 외치며 흔들어대는 주먹손, 때려 부수는 파괴의 손….   이렇게 부정적이고 어두운 손 그림자가 짙어질수록, 아름다운 손, 착한 손이 건네는 다정한 말이 그리워진다. 손을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것은 사랑이다. 세상에서 가장 맛나는 엄마의 손맛, 엄마손은 약손 같은 근원적 사랑의 손길, 진정성과 체온이 그득 담긴 예술가의 손길, 인공지능에는 없는….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표정 손길 인공지능 손길 진정성 대금 연주자

2023-05-11

[문화산책] 배우 박상원의 사진, 연극적 매력

배우 박상원이 LA에서 연 사진작품 초대전은 여러 면에서 묵직하게 가득 찬 느낌을 준다. 전시장을 가득채운 60여점의 대표작과 신작이 압도적이다. 연기자의 작품답게 연극적이고 시적(詩的) 울림이 크고, 연극 특유의 입체적 깊이도 만만치 않다. 연극과 사진을 조화시킨 배우 특유의 작품이 주는 매력이 즐겁다.   우선 흑백 위주의 큰 화면이 주는 안정감이 믿음직스럽다. 편하고 예쁘장한 사진이 아니어서 좋다. 개성적 화면을 통해 작가가 낮은 목소리로 걸어오는 진지하고 철학적인 대사에 귀 기울이게 된다. 악기 소리로 치자면, 바이올린보다는 첼로나 콘트라베이스의 묵직한 저음이 전시장을 감싼다. 우리 악기로 비유하면, 가야금보다 거문고 소리에 가깝다.   소리도 소리지만, 작가가 올곧게 이야기하려는 삶의 냄새가 반갑다. 한 작가가 자기 색채를 선명하고 고집스레 유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끈기도 필요하고, 작가의 철학적 신념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작가 박상원의 경우, 연극적 시선과 에너지가 그런 힘의 근본을 이루는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이것을 ‘연극적 상상 창조적 망상’이라고 요약한다. 더 적극적으로는 ‘사진은 또 다른 연기’라고 말한다.   “나에게 사진은 어쩌면 연기입니다. 찡그리고 바라보는 또 하나의 장면인 것입니다. 그 속에서 혼자 소리로 노는 것입니다. 사진적 상상과 창조적 망상으로 혼돈스럽게 뛰어노는 것입니다.”   흔히 사진을 일컬어 ‘결정적 순간의 포착’이라고 말한다. 배우 박상원의 사진은 거기에 더해 ‘극적 순간’이라는 입체적 긴장감을 갖는다. 사진작가들이 말하는 ‘조형적 순간’ 포착을 넘어서 이야기의 줄거리 연결, 시간의 흐름을 포함하는 것이다. 연극적 표현의 강점이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제가 배우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저에게 사진은 여백의 미를 가진 일상적인 사진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소리가 멈추어 있는 동영상의 일시정지 모습에 가깝습니다. 그 속에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고! 또 다른 느낌의 동영상을 상상으로 이어갑니다.”   화가들 중에 연극 활동을 경험한 작가들이 더러 있는데, 그들의 작품을 보면, 이야기의 입체감과 생각의 깊이를 매우 중요하게 드러낸다. 무대 위에서 하나의 인물이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설득력 있게 표현하려면 깊이 있는 관찰과 입체적 분석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관객의 시선도 적극적으로 배려해야 한다. 그래서, 그림을 통해 보는 이들에게 말을 걸게 된다. 예를 들어 황창배, 임옥상, 민정기, 김병종 같은 화가들의 작품이 그렇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당신의 생각은 어떠시냐고 묻는다.     박상원의 사진도 그렇다. 박상원의 경우 연극과 사진은 바람직한 조화를 이루며, 강력한 상승효과를 빚어낸다. 전시회의 전체 제목인 모놀로그(A Monologue), 장면(A Scene) 등은 연극의 핵심을 이루는 중요한 용어들이다.   박상원의 사진작품에는 사람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빗방울이 떨어지고, 눈발이 휘날리고, 꽃이 만발한 자연의 연극적 장면들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어쩌다 사람이 나와도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는다. 그래서 어찌 보면, 무대장치처럼 보인다. 연극이 시작되기 직전의 팽팽 긴장감이 가득한 무대…. 곧바로 배우가 등장해서 연기를 시작할 것 같다. 배우는 사람이 아니라 자연을 향해 말을 걸고 대화를 이어갈 것이다. 그 배우는 바로 작가 박상원 자신이다.   물론, 사진을 감상하는 사람들도 뛰어들어 ‘창조적 망상’을 발휘하며, 자연과 하나로 어우러져 연기를 할 수 있다.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첫 사랑을 만날 수도 있고,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 이별의 아픔을 노래할 수도 있다. 그런 어울림의 마당이 펼쳐지기를 작가는 희망한다. 그 희망이 사진의 매력으로 이어진다.      장소현 / 미술평론가·극작가문화산책 박상원 배우 배우 박상원 연극적 표현 연극적 시선

2023-05-04

[문화산책] 인스턴트 라면의 사회문화학

라면이라는 신기한 음식이 한국사회에 등장한 것은 1963년 가을이었다. 60년 전 일이니 환갑을 맞은 셈이다. ‘삼양라면, 즉석에서 뚝딱 끓여먹을 수 있는 꼬부랑 국수! 한 봉지에 단돈 10원’. 가난한 살림에 단비 같은 희소식이었다.   시대가 라면을 원한 현실도 있었다. 그 무렵 흉작이 이어지며 해마다 쌀이 부족해지자, 정부는 혼식 분식을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그런 나라의 도움도 받은 덕에 라면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그리고, 60년 사이에 인스턴트 라면은 한국 사람의 삶을 지배하는 ‘소울 푸드’가 되었고, 세계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다. 이제는 원조인 일본의 라멘을 제치고 정상을 차지했다고 한다. 어찌 보면, 라면의 역사는 곧 대한민국 현대사라고 할 수도 있겠다. 라면의 인기는 통계 숫자가 말해준다.   세계라면협회(WINA)의 ‘2021년 세계 라면시장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1인당 라면 소비량이 연간 73개로 세계 2위를 기록했다. 1위는 베트남으로 1인당 연간 87개의 라면을 소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이 줄곧 1위였는데, 베트남에게 1위를 내준 것이다. 3위는 네팔.   라면 전문 사이트 ‘라면 완전 정복’에 따르면, 현재 한국 내에서 시판 중인 라면 종류만 무려 555가지라고 한다. 굉장하다. 지난해 해외로 수출된 라면은 26만톤, 면발 길이만 약 1억㎞로 지구를 2670바퀴나 감을 수 있는 길이라고 한다. 즉석 면류 수출액은 지난해 처음으로 1조원을 돌파했다.   한국 사람들은 배고파서, 심심해서, 즐거워서, 해장으로, 먹고살기 위해서, 오늘도 라면을 끓여 먹는다. 해외에 사는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이런저런 사연을 담은 라면은 오늘도 다양한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지금은 매운맛 경쟁이 치열한 모양이다.   “라면이나 짜장면은 장복을 하게 되면 인이 박인다. 그 안쓰러운 것들을 한동안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지 않아도 공연히 먹고 싶어진다. 인은 혓바닥이 아니라 정서 위에 찍힌 문양과도 같다. 이래저래 인은 골수염처럼 뼛속에 사무친다.” 김훈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에서   나도 줄기차게 라면을 먹으며 살아왔다. 지금도 한국인 평균보다는 훨씬 많이 먹는 편이다.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하는 동안에 인이 박인 모양이다. 혼자 살면서 끼니를 때우기엔 라면만한 것이 없어서 지겹게도 먹었다. 그동안 내가 먹어치운 라면은 얼마나 될까? 한국인 평균인 75개로 쳐서 60년이면, 무려 4500봉지를 먹었다는 계산이 된다. 어머어마하다.   라면에 대한 가장 큰 걱정은 영양가는 별로 없고, 건강에 해롭다는 점이다. 하지만, 뜻밖에도 라면 마니아 중에는 장수 사례가 많다. 가령, 일본 닛신식품 창업자 안도 모모후쿠는 컵라면을 발명한 1971년부터 2007년 97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매일 라면을 먹었다. 또, 젊은 시절 장 질환을 앓은 뒤 30년 넘게 하루 세끼 ‘안성탕면’만 먹어 유명했던 고(故) 박병구 옹은 92세까지 살았다.   이쯤에서 내 개인적 생각을 말하고 싶다. 라면만 먹는 생활은 어찌어찌 견딜 것 같은데, 그렇지만 문화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 끼 대충 때우는 식의 인스턴트 문화예술이 자꾸만 많아지는 현실은 매우 안타깝다.   우리의 문화가 기계 문명의 눈부신 발달과 함께 하루가 다르게 작고 가볍고 재미있고 얄팍하고 달콤하고 자극적으로 변해가는 현실을 위험하게 봐야한다. 에를 들어, 그런 흐름으로 가면 인공지능의 무서운 기세를 막을 방법이 없다.   인공지능이 시를 쓰고, 작곡을 하고, 그림을 그려서 공모전 최고상을 받고, 소설을 써서 문학상 후보가 되고, 신문기사를 쓰고 하는 그런 세상이다. 이런 현실에서 문화예술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 진지하게 물어야 할 때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사회문화학 인스턴트 인스턴트 라면 한국 사람들 한국인 평균

2023-04-27

[문화산책] 종교와 예술의 온전한 화합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뉴스를 접하고 기가 탁 막히고 혈압이 확 올랐다.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 공연이 무산되는 사건이 한국의 문화도시(?) 대구에서 벌어졌는데, 그 이유는 종교 편향 때문이라는 것이다. 문제의 기사를 옮겨보면 이렇다.   ‘대구 시립예술단의 베토벤 교향곡 공연이 종교 편향을 이유로 무산됐다. 시 조례로 설치 운영되는 종교화합자문위원회가 가사 중 ‘신’이라는 단어를 문제 삼았기 때문이다…. 대구의 시립예술단은 공연 전 조례 규정에 따라 자문위 심의를 거쳐야 한다. 단 한 명의 반대에도 공연은 부결된다. 자문위원 9명 중 1명이 이번 공연에 대해 신을 찬양하는 내용이 담겼다는 의견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신(神)’이라는 낱말이 특정 종교를 찬양한다는 주장이라는데, 참 어처구니가 없다. 문제의 ‘신’이라는 단어는 베토벤 9번 교향곡 4악장 합창에 나오는 ‘환희여, 아름다운 신들의 불이여, 낙원의 딸이여’ 등을 말하는 것인데, 이건 독일의 대문호 프리드리히 실러의 유명한 시 ‘환희의 송가’의 한 구절이다.   이런 결정에 대한 문화계의 반응은 “황당을 넘어 망신”이라는 것이다. 특히, ‘합창’의 가사를 종교적으로 해석하는 게 말이 되느냐는 비판이 지배적이라고 한다. 당연하다. 참으로 서글픈 코미디다.   “예술을 종교로 접근하면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예를 들자면 국악 연주라든지 오페라 연주라든지…. 오페라도 종교적으로 관련된 것이 거의 대부분이거든요.” 대구음악협회장의 말이다.   대구시의회 관계자는 ‘만장일치가 아니면 부결이 된다’는 조항이 문제라고 판단하고, 관련 조례 개정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대구에서 예술공연을 놓고 논란이 제기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라고 한다. 지난해 대구예술제에 유네스코 인류 무형유산으로 등재된 제주 칠머리당 영등굿이 공연되자 개신교 측이 반발했고, 이보다 앞서 시립합창단 40주년 공연에 찬송가가 포함되자 불교계가 들고 일어나기도 했다. 이전에도 대구에서는 종교화합 심의위 일부 위원의 반대로 헨델의 대표곡인 ‘메시아’ 공연이 무산된 바 있다고 한다.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에서 종교를 빼고 나면 뭐가 남는지 묻고 싶다.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종교 편향이라고 보는 편협한 시각으로 도대체 뭘 하겠다는 건지 정말 답답하다.   물론 종교와 예술, 그리고 사회 사이의 갈등은 인류 역사상 항상 있어온 일이고, 지금도 완강하게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종교는 언제나 그런 갈등을 사랑과 화합으로 슬기롭게 극복해왔다.   이런 답답한 현실을 대할 때마다, 떠오르는 아름다운 분들이 있다.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 스님이다. 두 어른은 생전 종교의 벽을 허물고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 큰 감동을 안긴 것으로 유명하다. 김수환 추기경은 법정 스님이 창건한 길상사 개원법회에 방문해 축사를 했다. 법정 스님은 이에 대한 화답으로 이듬해 명동성당에서 특별강론을 했다. 법정 스님은 천주교 수녀원과 수도원에서도 자주 강연했고, 길상사 마당의 관음보살상 제작을 독실한 천주교 신자 조각가인 최종태 서울대 교수에게 맡기기도 했다.   “인간의 추구는 영적인 온전함에 있다. 우리가 늘 기도하고 참회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깨어지고 부서진 영혼을 다시 온전한 하나로 회복시키는 것, 그것이 종교의 역할이다.”   김 추기경이 선종하자 법정 스님이 쓴 추모사의 한 구절이다. 참 종교란 이런 것이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종교 예술 종교화합 심의위 대구 시립예술단 종교 편향

2023-04-20

[문화산책] 예술 장르 사이의 소통

통섭(統攝)이라는 낱말과 개념에 관심이 모인 적이 있었다. 학문 사이에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벽을 칸막이를 걷어내고 건강하게 소통을 해야 우리의 밝은 미래가 열릴 것이라는 이야기다. 상생(相生)의 진리다.   통섭이라는 낱말을 꺼내서 불을 지핀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과학이나 경제 등 사회 각 분야의 소통과 인문학의 보급이 시급하다고 한다. 최 교수는 통섭이란 낱말을 자기가 찾아낸 줄 알고 스스로 대견해 했는데, 알고 보니 신라시대 원효 스님께서 이미 설파하신 섭리였다고 고백한다. 통섭의 역사가 그렇게 길고 근본적이라는 이야기다.   그 뒤로 우리 사회에서 통섭이 얼마나 제대로 이루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상당히 도움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것만으로도 큰 소득이다.   사실, 통섭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분야는 예술계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그 벽은 상당히 완고하고 옹졸했다. 시인이 소설을 발표하면 안 되고, 조각가가 그림으로 개인전을 열면 영역 침범이고, 외교관이 시를 써서 시집을 내면 업무태만이고…. 뭐 그런 식으로 답답했다. 얼마 전 세상 떠난 성악가 박인수 교수는 유행가를 불렀다고 국립오페라단에서 쫓겨나는 웃픈 일을 겪었다. 따지고 보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은 현대사회에 와서 경쟁이 치열해지고, 분야마다 제 밥그릇 챙기기 싸움에만 몰두하는 바람에 벌어진 것들이다.   긴말 할 것 없이, 다양한 예술 장르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장벽과 칸막이를 하루빨리 걷어내야 한다. 옛날에는 그랬으니, 되살리면 된다. 그렇다고, 갑자기 르네상스시대로 돌아가 팔방미인이 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각 분야가 문을 열고 서로 주고받으면서 돕고 자극을 주고 격려하면 한결 풍성하고 튼실해질 것이라는 말이다. 가령, 문학과 미술, 미술과 음악 사이의 격의 없는 소통 같은 것….   동양의 전통에서는 그림과 문학의 근원은 본디 하나라고 생각했다. 글과 그림의 말뿌리(語源)는 같다는 생각, 시서화일체(詩書畵一體)…. 그러니 서로 통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여겼다. 특히 선비들의 문인화(文人畵)에서 그러했다. 오늘의 현실에도 되살리고 싶은 바람직한 전통이다. 화가가 시를 쓰고, 시인이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지어 부르고….   실제로 그렇게 소통한 좋은 예는 많다. 가령, 김환기 화백의 대표작인 전면점화 첫 작품의 제목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다. 친한 친구인 김광섭 시인의 시 ‘저녁에’의 마지막 구절이다. 또 ‘항아리와 시’라는 작품에는 서정주 시인의 ‘기도 1’ 전문을 써넣기도 했다.   좋은 미술 작품의 바탕에는 시가 있다. 추상미술의 대표적 작가인 잭슨 폴록의 작품 중에도 시적인 제목이 붙어 있는 작품이 뜻밖에 많다. 밤의 소리, 달의 여인이 원을 자르다, 달의 그릇, 비밀의 수호자들, 열 속의 눈, 청색의 무의식, 어떤 과거, 매혹의 숲, 도깨비불의 발광, 바다의 변화, 라벤더 미스트, 가을의 리듬, 거미집에서, 메아리, 검은 흐름, 달의 진동 등등….   노벨문학상을 받은 시인, 소설가인 헤르만 헤세는 훌륭한 화가이기도 했다. ‘데미안’ 등으로 우리와 친숙한 그는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가 하나임을 몸으로 증명해준 고마운 예술가이기도 하다. 그림 그리기를 통해 자신의 문학 세계도 발전했으며 자신의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림 그리기 없이, 나는 지금의 작가가 될 수 없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내가 쓰는 문학도 한 단계 발전되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그림뿐만 아니라 내 마음의 깊이도 깊어짐을, 내가 예술을 보는 안목도 깊어짐을 알 수 있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예술 장르 예술 장르 미술 작품 그림 그리기

2023-04-17

[문화산책] 예술 장르 사이의 소통

통섭(統攝)이라는 낱말과 개념에 관심이 모인 적이 있었다. 학문 사이에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벽을 칸막이를 걷어내고 건강하게 소통을 해야 우리의 밝은 미래가 열릴 것이라는 이야기다. 상생(相生)의 진리다.   통섭이라는 낱말을 꺼내서 불을 지핀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과학이나 경제 등 사회 각 분야의 소통과 인문학의 보급이 시급하다고 한다. 최 교수는 통섭이란 낱말을 자기가 찾아낸 줄 알고 스스로 대견해 했는데, 알고 보니 신라시대 원효 스님께서 이미 설파하신 섭리였다고 고백한다. 통섭의 역사가 그렇게 길고 근본적이라는 이야기다.   그 뒤로 우리 사회에서 통섭이 얼마나 제대로 이루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상당히 도움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것만으로도 큰 소득이다.   사실, 통섭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분야는 예술계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그 벽은 상당히 완고하고 옹졸했다. 시인이 소설을 발표하면 안 되고, 조각가가 그림으로 개인전을 열면 영역 침범이고, 외교관이 시를 써서 시집을 내면 업무태만이고…. 뭐 그런 식으로 답답했다. 얼마 전 세상 떠난 성악가 박인수 교수는 유행가를 불렀다고 국립오페라단에서 쫓겨나는 웃픈 일을 겪었다. 따지고 보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은 현대사회에 와서 경쟁이 치열해지고, 분야마다 제 밥그릇 챙기기 싸움에만 몰두하는 바람에 벌어진 것들이다.   긴말 할 것 없이, 다양한 예술 장르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장벽과 칸막이를 하루빨리 걷어내야 한다. 옛날에는 그랬으니, 되살리면 된다. 그렇다고, 갑자기 르네상스시대로 돌아가 팔방미인이 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각 분야가 문을 열고 서로 주고받으면서 돕고 자극을 주고 격려하면 한결 풍성하고 튼실해질 것이라는 말이다. 가령, 문학과 미술, 미술과 음악 사이의 격의 없는 소통 같은 것….   동양의 전통에서는 그림과 문학의 근원은 본디 하나라고 생각했다. 글과 그림의 말뿌리(語源)는 같다는 생각, 시서화일체(詩書畵一體)…. 그러니 서로 통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여겼다. 특히 선비들의 문인화(文人畵)에서 그러했다. 오늘의 현실에도 되살리고 싶은 바람직한 전통이다. 화가가 시를 쓰고, 시인이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지어 부르고….   실제로 그렇게 소통한 좋은 예는 많다. 가령, 김환기 화백의 대표작인 전면점화 첫 작품의 제목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다. 친한 친구인 김광섭 시인의 시 ‘저녁에’의 마지막 구절이다. 또 ‘항아리와 시’라는 작품에는 서정주 시인의 ‘기도 1’ 전문을 써넣기도 했다.   좋은 미술 작품의 바탕에는 시가 있다. 추상미술의 대표적 작가인 잭슨 폴록의 작품 중에도 시적인 제목이 붙어 있는 작품이 뜻밖에 많다. 밤의 소리, 달의 여인이 원을 자르다, 달의 그릇, 비밀의 수호자들, 열 속의 눈, 청색의 무의식, 어떤 과거, 매혹의 숲, 도깨비불의 발광, 바다의 변화, 라벤더 미스트, 가을의 리듬, 거미집에서, 메아리, 검은 흐름, 달의 진동 등등….   노벨문학상을 받은 시인, 소설가인 헤르만 헤세는 훌륭한 화가이기도 했다. ‘데미안’ 등으로 우리와 친숙한 그는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가 하나임을 몸으로 증명해준 고마운 예술가이기도 하다. 그림 그리기를 통해 자신의 문학 세계도 발전했으며 자신의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림 그리기 없이, 나는 지금의 작가가 될 수 없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내가 쓰는 문학도 한 단계 발전되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그림뿐만 아니라 내 마음의 깊이도 깊어짐을, 내가 예술을 보는 안목도 깊어짐을 알 수 있다.”  장소현 / 미술평론가·시인문화산책 예술 장르 예술 장르 미술 작품 그림 그리기

2023-04-13

[문화산책] 정신의 주름살, 영혼의 곰팡내

“노년이 되면 얼굴보다 정신에 더 많은 주름살이 생긴다. 늙으면서 곰팡내 나지 않는 영혼이란 없으며, 있다 해도 매우 드물다.”   늙어감에 관해 이야기할 때 자주 인용되는 유명한 글이다. 16세기 프랑스 철학자 미셸 몽테뉴의 격언이다. 영원한 고전 ‘에세(수상록)’를 통해 에세이라는 장르를 탄생시킨 분의 말씀이니 가볍게 넘길 수 없다. 깊이 생각하게 된다.   정신의 주름살, 영혼의 곰팡내 같은 절묘한 표현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나도 모르게 스스로의 꼴새를 되돌아보고 깊은 부끄러움에 잠기게 된다. 나도 이 말씀에 공감하여 “그러니까 마음주름살이 생기지 않도록 평소에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런 글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주름살은 겁부터 내고 피하기만 할 대상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인생 연륜의 훈장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나무의 나이테가 아름답듯 주름살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믿음…. 그러니까, 주름살을 없애려고 무리하게 애쓰기보다는 보기 좋고 멋지게 주름지는 편이 자연스럽고 바람직할 것이라는 말이다.   근본적으로 주름살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동안(童顔)이라는 말이 칭찬이 아니고, 순리에 맞게 나이에 걸맞는 모습이 가장 자연스러울 것이라는 이야기, 그렇게 늙었으면 좋겠다. 주위를 둘러보면 실제로 그런 주름살을 가진 이들이 있다. 부럽다.   정신이나 마음에 주름살이 생기는 원인은 물론 여러 가지 다양하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스트레스나 화병 등일 것이다. 그러니까 상식적으로 말하자면, 세상이 아무리 각박하게 돌아가도 화를 내지 말고 웃으며 긍정적으로 살면, 사랑으로 베풀고 남을 도와주며 살면, 마음이 마구 꾸겨질 일도 없다는 식의 해답이 나온다. 아주 간단한 것 같은데 실제로 실천하기는 무척 힘든 해답이다.   영혼의 곰팡내를 다른 말로 하면 꼰대 냄새다. 늙었느냐 낡았느냐, 발효냐 부패냐의 차이를 말해주는 냄새, 본인은 전혀 못 느끼는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고약한 냄새….   그런 고약한 냄새를 없애고 잔주름살을 없애려면 마음근육을 키워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마음은 우리 몸에서 가장 강력한 근육 중 하나이고, 마음의 근육이 튼튼한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행복의 지름길이라고 한다. “행복이란 건강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충만한 느낌”이기 때문이다. 행복도 훈련하면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전문가들이 권하는 마음근육 키우기 방법은 다양하다. 자기 자신의 내면을 관찰하고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정서적 균형 상태 유지하기, 부정적 생각 떨쳐버리기, 친절이나 자비 같은 정신적 습관 만들기, 감사하는 마음과 유머를 통해 회복탄력성 키우기, 일상에서 즐거움 훈련하기 등등 참으로 많다.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자신을 객관적으로 관찰하여 감정과 자기 자신을 분리해서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한다. 하나같이 말은 훌륭하지만 실천하기는 어려운 것들이다.   얼핏 드는 내 생각에는, 자연과 어우러지기, 책 읽기나 음악 듣기, 미술 감상 같은 예술 즐기기 등이 현실적으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것 같다.    내가 바라는 것은 조금이라도 좋은 사람, 아주 조금이라도 멋진 늙은이가 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나이 들수록 마음과 정신을 튼튼하게 하는 운동을 해야겠다고 다짐하곤 한다. 내가 하는 예술, 창작활동에 필요한 순발력과 지구력, 창의력과 포용력 등이 모두 튼튼한 마음근육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결심은 잘도 하는데, 번번이 마음뿐으로 끝나고 만다는 것이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주름살 곰팡내 주름살 영혼 정신적 습관 부정적 생각

2023-04-06

[문화산책] 더 좋은 세계를 만들기 위한 예술

배울 점이 많은 이들을 스승으로 모셔 존경하기로 마음먹으니, 모셔야 할 스승이 계속 늘어난다. 온 세상만사가 스승님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면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내 꿈도 조금씩 깊어가는 것 같은 착각(?)도 든다.   첼리스트 요요마도 그렇게 스승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물론, 전부터 좋은 연주자로 여기며 즐겨 들었지만, 언제부터인가 제대로 깊이 배워야겠다는 마음이 일었다. 아마도, 이민사회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정체성 혼란을 겪는 우리 디아스포라 예술가들을 생각하노라니 자연스레 요요마가 떠오른 것 같다. 요요마는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그런 고민을 넘어선 멋진 인간이다. 인문학, 실크로드 앙상블, 바흐 프로젝트….   요요마는 중국인 부모 사이에서 파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고, 미국에 이민 와서 성장하며 자기 음악 세계를 열어갔다. 당연히 심각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신 차려보니 이미 촉망받는 첼리스트가 되어 있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음악을 하는가? 이런 근본적 의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요요마는 하버드대학에 들어가 인류학을 전공했다. 흔히 자기 발전을 바라는 음악가들은 지휘나 작곡 등으로 음악 안에서 자기 영역을 넓혀가는 것이 보통인데, 요요마는 인문학 공부를 택한 것이다. 탁월한 선택이다.   요요마는 10대 시절부터 음악만큼이나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해와 탐구에 많은 호기심을 가졌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예가 한국전쟁이다. 모두가 끔찍한 전쟁을 경험한 세대가 있지 않나. 당신은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두려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그들이 정신적 상처와 싸우고 극복한 과정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사회와 역사, 특히 그 안의 사람들에게 주목할 때 당신이 누구며 이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된다. 그 후에는 자신이 하는 일을 비관하거나 낙담할 수가 없어진다. 내가 하버드 대학에서 인류학을 선택해 공부한 이유이기도 하다.”   인문학 공부를 통해 요요마는 자기 음악 세계를 넓혔고, 음악과 사회의 관계에서도 새로운 신념의 지평을 열었다. 그리고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행동으로 실천했다. 무엇보다도 부러운 것은 연주 활동과 사회활동의 균형을 훌륭하게 맞추고 있는 그의 탁월한 능력이다.   “나는 첫째로 한 사람이고, 둘째로 음악가이며, 셋째로 첼리스트다.” 요요마의 말이다. 예술보다 인간이 먼저라는 신념은 인문학의 기본 정신이다. 그런 믿음과 진심 어린 사람사랑이 실크로드 앙상블이나 바흐 프로젝트의 기초가 되었고, 숱하게 다양한 음악가들과의 크로스오버 작품의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길….   첨예하게 대립하는 분쟁지역에서 홀로 첼로를 연주하는 요요마의 모습은 진지함을 넘어 숭고해 보인다. 미국과 멕시코를 가로막은 장벽 앞에서 연주하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장벽이 아니라 다리”라고 말하고, 세계 각지에서 이민정책, 지역 사회의 문화, 노숙자 문제를 비판하는 ‘행동의 날’에 연주회를 열고, 코로나19 백신주사를 맞고 그 자리에서 첼로를 연주해 역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바흐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한국의 DMZ에서 열린 ‘평화음악회’에 참가하고….     ‘착한 인간’ 요요마의 모습은 문화와 예술에는 경계가 없고, 나누는 마음에는 한계가 없음을 웅변으로 말해준다. 스승 요요마에게서 가장 배우고 싶은 것은 치열한 노력과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력이다. 우리 젊은 예술가들에게도 함께 배우자고 권하고 싶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세계 예술 스승 요요마 첼리스트 요요마 세계 각지

2023-04-03

[문화산책] 더 좋은 세계를 만들기 위한 예술

배울 점이 많은 이들을 스승으로 모셔 존경하기로 마음먹으니, 모셔야 할 스승이 계속 늘어난다. 온 세상만사가 스승님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면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내 꿈도 조금씩 깊어가는 것 같은 착각(?)도 든다.   첼리스트 요요마도 그렇게 스승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물론, 전부터 좋은 연주자로 여기며 즐겨 들었지만, 언제부터인가 제대로 깊이 배워야겠다는 마음이 일었다. 아마도, 이민사회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정체성 혼란을 겪는 우리 디아스포라 예술가들을 생각하노라니 자연스레 요요마가 떠오른 것 같다. 요요마는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그런 고민을 넘어선 멋진 인간이다. 인문학, 실크로드 앙상블, 바흐 프로젝트….   요요마는 중국인 부모 사이에서 파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고, 미국에 이민 와서 성장하며 자기 음악 세계를 열어갔다. 당연히 심각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신 차려보니 이미 촉망받는 첼리스트가 되어 있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음악을 하는가? 이런 근본적 의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요요마는 하버드대학에 들어가 인류학을 전공했다. 흔히 자기 발전을 바라는 음악가들은 지휘나 작곡 등으로 음악 안에서 자기 영역을 넓혀가는 것이 보통인데, 요요마는 인문학 공부를 택한 것이다. 탁월한 선택이다.   요요마는 10대 시절부터 음악만큼이나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해와 탐구에 많은 호기심을 가졌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예가 한국전쟁이다. 모두가 끔찍한 전쟁을 경험한 세대가 있지 않나. 당신은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두려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그들이 정신적 상처와 싸우고 극복한 과정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사회와 역사, 특히 그 안의 사람들에게 주목할 때 당신이 누구며 이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된다. 그 후에는 자신이 하는 일을 비관하거나 낙담할 수가 없어진다. 내가 하버드 대학에서 인류학을 선택해 공부한 이유이기도 하다.”   인문학 공부를 통해 요요마는 자기 음악 세계를 넓혔고, 음악과 사회의 관계에서도 새로운 신념의 지평을 열었다. 그리고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행동으로 실천했다. 무엇보다도 부러운 것은 연주 활동과 사회활동의 균형을 훌륭하게 맞추고 있는 그의 탁월한 능력이다.   “나는 첫째로 한 사람이고, 둘째로 음악가이며, 셋째로 첼리스트다.” 요요마의 말이다. 예술보다 인간이 먼저라는 신념은 인문학의 기본 정신이다. 그런 믿음과 진심 어린 사람사랑이 실크로드 앙상블이나 바흐 프로젝트의 기초가 되었고, 숱하게 다양한 음악가들과의 크로스오버 작품의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길….   첨예하게 대립하는 분쟁지역에서 홀로 첼로를 연주하는 요요마의 모습은 진지함을 넘어 숭고해 보인다. 미국과 멕시코를 가로막은 장벽 앞에서 연주하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장벽이 아니라 다리”라고 말하고, 세계 각지에서 이민정책, 지역 사회의 문화, 노숙자 문제를 비판하는 ‘행동의 날’에 연주회를 열고, 코로나19 백신주사를 맞고 그 자리에서 첼로를 연주해 역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바흐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한국의 DMZ에서 열린 ‘평화음악회’에 참가하고….     ‘착한 인간’ 요요마의 모습은 문화와 예술에는 경계가 없고, 나누는 마음에는 한계가 없음을 웅변으로 말해준다. 스승 요요마에게서 가장 배우고 싶은 것은 치열한 노력과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력이다. 우리 젊은 예술가들에게도 함께 배우자고 권하고 싶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세계 예술 스승 요요마 첼리스트 요요마 세계 각지

2023-03-30

[문화산책] 축소지향의 휴대전화, 사람의 크기

자고로 인간에게는 오장육부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현대 인간은 오장칠부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판소리 ‘흥부전’의 놀부에게 심술보가 더 붙어있어서 오장칠부라고 풍자라고 했듯 현대인,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도 장기가 하나 더 있어서 오장칠보라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냐? 휴대전화기라는 물건이다. 미국에서는 셀폰, 한국에서는 핸드폰이라고 부르는 생활필수품이다.   요즘 사람들은 이놈이 없으면 허전해서 못 견딘다고 한다. 허전한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실감과 불안 증세마저 보인다고 한다. 어쩌다가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경기를 일으킨다.   나는 기계를 두려워하는 미개인이라서 잘 모르지만, 이 조그만 물체 안에 전화기는 물론 사진 촬영과 보관, 전송, 녹음기, 비디오 촬영기, 필요한 앱을 깔면 컴퓨터, 카톡,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같은 SNS, 은행 거래, 맛집 찾기, 시계, 달력, 지도, 내비게이션, 계산기, 백과사전, 음악 감상기, 만보기, 회중전등, 다양한 게임 등등등….엄청난 기능을 이용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 이 물건에 익숙해져 인이 박여버리면, 이 물건이 없으면 불안해지는 것도 이해가 간다. 이 정도면 우리 신체의 한 부분처럼 보인다. 오장칠부라는 표현도 과장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중요한 점은 이 물건 때문에 지금 개인의 삶은 물론 인류의 문화구조 자체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각 분야의 근본적 변화도 보인다.   이처럼 휴대전화기가 인간을 지배할 수 있는 막강한 매력과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대단히 편리하기도 하고, 개인주의 취향에도 잘 맞기 때문일 것이다.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면, 우리 주위의 많은 것들이 빠른 속도로 작고 가벼워지고, 개인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영상 화면을 예로 들어보면, 텔레비전 화면→컴퓨터 화면→휴대전화기 화면으로 소형화되면서, 동시에 개인적인 것이 되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손목시계처럼 작은 물건이 등장했다. 이어령 장관의 ‘축소지향 문화론’을 연상시킨다. 앞으로 얼마나 더 작아질까? 기계가 작아짐에 따라 정신이나 마음도 함께 쪼그라드는 것은 아닐까?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이 작아지다 보면 인간들의 생각도 작아지고, 끝내는 인간 자체가 작아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든다.   크기의 변화에 따라 거기 담기는 내용이나 정신도 당연히 달라지게 마련이다. 예를 들면, 문장은 짧아지고, 목소리를 통한 쌍방통행보다 문자로 용건만 전하는 식이다. 소통이라고 하지만, 감정이 실리지 않은 건조하기 짝이 없는 일방통행이다. 우리 삶이 그런 식의 용건 나누기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런 현상은 예술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영화관 스크린, 텔레비전 화면, 컴퓨터, 휴대전화를 비교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사람들이 극장의 대형 스크린에 펼쳐지는 스펙터클보다 개인적이고 편안한 분위기와 편리함을 택하는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사회적 거리 두기 덕에 이런 추세가 한층 많아졌다.   이제는 미술감상까지도 그런 식으로 변해가는 추세다. 팬데믹 상황이 예상보다 오래 이어지자 박물관, 미술관들이 궁여지책으로 전시회를 온라인으로 만들어서 유튜브로 공개하는 것이 일상화되었다.   하지만, 작품의 크기나 질감, 자료, 전시환경 등 다양한 조형적 요소들이 중요한 미술작품에서는 상황이 사뭇 다르다. 영상으로 본 것만으로는 감상했다고 말할 수 없다. 특히 메시지보다는 이미지 전달에 집중하는 추상미술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화가들의 생각은 어떤지 참 궁금하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축소지향 휴대전화 휴대전화기 화면 축소지향 문화론 화면 컴퓨터

2023-03-23

[문화산책]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 아모르 파티!

한국어의 세계화가 눈부시다. 세종대왕께서 얼마나 기뻐하실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세계 여러 곳에서 대접을 받는다고 하니 어깨가 으쓱 올라간다.   엄청난 K-팝 열풍 덕분에 한국어를 배우는 젊은이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고, 유네스코가 제정한 문맹 퇴치 공로상 이름이 ‘세종대왕 문해상’이고, 인도네시아 찌아찌아족은 한글을 모국어로 채택했고 등등…. 이런 예를 들자면 정말 많다. 자랑스럽다.   하지만, 내가 지금 말하려는 한글의 세계화는 그런 것이 아니라, 한국어에 들어와 세력을 펼치고 있는 외래어에 관한 것이다. 영어가 우리말처럼 천연덕스럽게 쓰인 지는 벌써 오래되었고, 지금은 불어나 이태리말, 스페인어 등도 많이 쓰이는 모양이다. 게다가 일본말 찌꺼기도 아직 많이 남아 있다. 그야말로 국제적으로 화려하다.   이상야릇한 콩글리시에, 홍수처럼 발명되는 신조어에, 한없이 밀려오는 외래어…. 정말 복잡다단하다. 상업 제품 이름, 가게 상호, 고급 아파트 이름에 사용되고, 언론이 거르지 않고 마구 쓰고, 드디어는 보통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도 저항 없이 사용된다. 그중에는 미국에 사는 나도 모르는 영어도 적지 않다.   죽은 언어(死語)인 라틴어도 있다. 흔히 쓰이는 말 중에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 아모르 파티 같은 멋쟁이(?) 말은 라틴어다. 이제 한국 사람들은 라틴어까지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그야말로 세계인이 된 것이다. 라틴어는 소멸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오래전 죽은 언어다. 라틴어를 모국어로 삼은 나라는 이제 없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부활할 조짐이 보이는 것이다. 얄궂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로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가 지은 시에 나오는 명언으로 유명하고, 이어령 선생이 생전에 강조하던 생명의 진실이기도 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은 ‘현재를 즐겨라’ 또는 ‘이 순간에 충실해라’로 번역되는데, 로빈 윌리엄스가 주연으로 열연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덕분에 널리 알려졌다.   아모르 파티(Amor fati)는 ‘운명을 사랑하라(運命愛)’로 흔히 번역되는데, 철학자 니체의 책 ‘즐거운 학문’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라고 한다. 우리에게는 가수 김연자의 노래 덕에 널리 알려졌다.   하나같이 심오한 뜻의 말씀들이다. 라틴어로 말하면 한결 멋있고 의미심장하고, 뭔가 그럴듯하게 보인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즐겨 사용하는 모양이다.   라틴어를 아는 분에 따르면, 이것 말고도 상당히 많은 라틴어가 우리말처럼 쓰이고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코로나(왕관), 아쿠아(물), 아모르(사랑), 디바(여신), 페르소나, 호모 사피엔스, 보너스, 유비쿼터스, 무시카 등등….   그런데, 이걸 꼭 라틴어로 해야 하는 건지 의심스럽다. 메멘토 모리나 생자필멸(生者必滅)이나 그게 그거고,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라, 운명을 사랑하라는 우리말로도 충분히 통하는데 구태여 라틴말을 써야 하나?   언어는 우선 의사소통의 수단이지만, 생각과 영혼을 담는 그릇이기도 하다. 한 사람이나 나라의 품격을 상징하기도 한다. 말이 곧 정신이다. 그러니까, 민족정신을 올곧게 지키려면 지나친 외국어 사용을 절제하고, 아름다운 우리말을 지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세종대왕께 아부하자는 게 아니다.   어디선가 근엄한 꾸짖음 소리가 들려온다.   “여보슈, 그런 걱정할 시간 있으면 영어공부나 하슈. 재미동포 주제에!”   “아, 소생은 영포중생이 올시다.”   “영포중생? 그건 또 뭐요?”   “영어를 포기한 중생!”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메멘토 카르페 아모르 파티 메멘토 모리 디엠 아모르

2023-03-20

[문화산책]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 아모르 파티!

한국어의 세계화가 눈부시다. 세종대왕께서 얼마나 기뻐하실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세계 여러 곳에서 대접을 받는다고 하니 어깨가 으쓱 올라간다.   엄청난 K-팝 열풍 덕분에 한국어를 배우는 젊은이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고, 유네스코가 제정한 문맹 퇴치 공로상 이름이 ‘세종대왕 문해상’이고, 인도네시아 찌아찌아족은 한글을 모국어로 채택했고 등등…. 이런 예를 들자면 정말 많다. 자랑스럽다.   하지만, 내가 지금 말하려는 한글의 세계화는 그런 것이 아니라, 한국어에 들어와 세력을 펼치고 있는 외래어에 관한 것이다. 영어가 우리말처럼 천연덕스럽게 쓰인 지는 벌써 오래되었고, 지금은 불어나 이태리말, 스페인어 등도 많이 쓰이는 모양이다. 게다가 일본말 찌꺼기도 아직 많이 남아 있다. 그야말로 국제적으로 화려하다.   이상야릇한 콩글리시에, 홍수처럼 발명되는 신조어에, 한없이 밀려오는 외래어…. 정말 복잡다단하다. 상업 제품 이름, 가게 상호, 고급 아파트 이름에 사용되고, 언론이 거르지 않고 마구 쓰고, 드디어는 보통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도 저항 없이 사용된다. 그중에는 미국에 사는 나도 모르는 영어도 적지 않다.   죽은 언어(死語)인 라틴어도 있다. 흔히 쓰이는 말 중에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 아모르 파티 같은 멋쟁이(?) 말은 라틴어다. 이제 한국 사람들은 라틴어까지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그야말로 세계인이 된 것이다. 라틴어는 소멸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오래전 죽은 언어다. 라틴어를 모국어로 삼은 나라는 이제 없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부활할 조짐이 보이는 것이다. 얄궂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로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가 지은 시에 나오는 명언으로 유명하고, 이어령 선생이 생전에 강조하던 생명의 진실이기도 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은 ‘현재를 즐겨라’ 또는 ‘이 순간에 충실해라’로 번역되는데, 로빈 윌리엄스가 주연으로 열연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덕분에 널리 알려졌다.   아모르 파티(Amor fati)는 ‘운명을 사랑하라(運命愛)’로 흔히 번역되는데, 철학자 니체의 책 ‘즐거운 학문’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라고 한다. 우리에게는 가수 김연자의 노래 덕에 널리 알려졌다.   하나같이 심오한 뜻의 말씀들이다. 라틴어로 말하면 한결 멋있고 의미심장하고, 뭔가 그럴듯하게 보인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즐겨 사용하는 모양이다.   라틴어를 아는 분에 따르면, 이것 말고도 상당히 많은 라틴어가 우리말처럼 쓰이고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코로나(왕관), 아쿠아(물), 아모르(사랑), 디바(여신), 페르소나, 호모 사피엔스, 보너스, 유비쿼터스, 무시카 등등….   그런데, 이걸 꼭 라틴어로 해야 하는 건지 의심스럽다. 메멘토 모리나 생자필멸(生者必滅)이나 그게 그거고,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라, 운명을 사랑하라는 우리말로도 충분히 통하는데 구태여 라틴말을 써야 하나?   언어는 우선 의사소통의 수단이지만, 생각과 영혼을 담는 그릇이기도 하다. 한 사람이나 나라의 품격을 상징하기도 한다. 말이 곧 정신이다. 그러니까, 민족정신을 올곧게 지키려면 지나친 외국어 사용을 절제하고, 아름다운 우리말을 지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세종대왕께 아부하자는 게 아니다.   어디선가 근엄한 꾸짖음 소리가 들려온다.   “여보슈, 그런 걱정할 시간 있으면 영어공부나 하슈. 재미동포 주제에!”   “아, 소생은 영포중생이 올시다.”   “영포중생? 그건 또 뭐요?”   “영어를 포기한 중생!”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메멘토 카르페 아모르 파티 메멘토 모리 디엠 아모르

2023-03-16

[문화산책] 소리가 없기에 소리를 포용하는…

 지난 겨울 방학에 콘퍼런스 참석하기 위해 알래스카주에서 플로리다주로 날아갔다. 콘퍼런스가 끝난 후 플로리다주와 가까운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에 사는 옛 친구를 만났다. 마침 마르디 그라(Mardi Gras) 축제 준비가 한창이었다. 뉴올리언스를 감싼 아프리카계·카리브계·프랑스계·스페인계 문화의 열기에 휩싸이면서 내 모국의 경계 밖에서 떠돌았다는 느낌을 떨쳐낼 수 없었다.   언어·예술·악기 등 문화적 요소는 (마치 미세먼지처럼) 지도상의 국경을 넘나들며 부유하고, 출신 국가의 정서와 미학을 공유한다. 그러나 일단 외국에 정착하면 그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존재로 성장하기 마련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뉴올리언스에서 캐나다 앨버타주 에드먼턴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프랑스어 안내방송을 들었을 때였다. 그때 나는 공자가 연주했다는 중국 전통 현악기 금(琴) 연주자인 어느 교수와의 대담에 초청받았다. 우리의 임무는 중국 악기 금과 내가 지난 30년간 한국에서 연주해 온 가야금 간의 철학적·음악적 연계를 논의·시연하는 것이었다. 나는 비행기 안에서 금과 관련된 중국 정서와 미학이 오랜 세월 동안 어떤 식으로 한국 국경을 넘어 새로운 전통을 심었을까 곰곰이 생각했다.   캐나다에서 행사가 있기 몇 주 전 소셜미디어에 프로그램 공지를 했더니, 어느 중국 음악학자가 마치 내가 보리죽과 궁중요리를 비교하기라도 한 듯 “어떻게 가야금과 금을 비교할 수 있느냐”며 반발했다. 금에 내포된 문화·음악·철학적 가치는 중국의 정체성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금도’(琴道)에서 금은 연주 레퍼토리 이상으로, 그것과 관련된 본질을 구현하는 삶의 방식을 상징한다.   중국 죽림칠현(竹林七賢) 고사에서 금 연주자 혜강(223~262)은 ‘금의 미덕’을 관통·고요·불가측(不可測)이라고 봤다. 그는 “금이라는 조화는 고요하여, 완벽하고 심오하다”고 선언했다. 로위예층 교수는 『도의 동반자:도교 철학』 ‘칠현’ 장에서 “소리가 없기 때문에 모든 소리를 포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로 교수에 따르면 이 ‘소리 없는 소리’는 “악기나 인위적인 박자에 얽매이지 않는다.” 혜강과 로 교수의 말은 오른손으로 현을 뜯는 순간 아무리 왼손으로 조절을 해도 점차 사라져가는 소리를 내포한다. 금과 가야금을 비교하는 것은 이 고요한 상상 속 공간(우리의 귀가 아닌 생각 속에서 떨림이 머무르는 곳) 안에 있는 소리다.   서양 언어로 금을 탐구했던 동양학자 로베르트 한스 반 훌릭(Robert Hans Van Gulik)은 1938년 『금도』(琴道, Lore of the Lute)에서 금의 소리 없는 아름다움이 “각각의 음에도, 심지어 음의 연속에도 있지 않다. (…) 같은 음이 서로 다른 현에서 발생하면 다른 색채를 띠고, 같은 현을 검지로 뜯을 때와 중지로 뜯을 때 다른 성격을 지닌다. 이토록 다양한 음색이 발생하는 금 연주법은 극히 복잡하다”고 말했다. 이 구절에서 저자는 가야금에 대해서도 논할 수 있었을 것 같다. 가야금 연주자는 금 연주자와 상당히 유사한 방법으로 현을 뜯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거문고가 양반의 악기로 여겨졌다. 거문고는 금과 달리 술대로 연주했다. 유교 윤리와 도가 철학과 같은 맥락에서 남성적이고 심오한 금도를 구현하며, 남성 학자들의 사색을 돕는 도구로 여겨졌다. 조선시대에는 한시를 번역할 때 이런 맥락을 담아 금을 거문고로 대체해 번역하곤 했다.   그러나 가야금과 금을 비교해 보면 뜯고 퉁기는 기법이 매우 비슷하고, 악기 모양이나 세부 명칭(안족 雁足, 봉지 鳳池 등)에도 유사한 점이 많다. 현을 뜯으며 나는 소리를 꾸미는 왼손이 야생에서 자란 학 날개 같은 모양을 하는 점도 그렇다. 두 악기의 소리판이 상징하는 ‘하늘’과 ‘땅’ 위에 쭉 뻗은 현들을 연주할 때, 금 연주자와 가야금 연주자 모두 온 우주를 바라보고 안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금과 가야금은 매우 상이한 미학적 영토에 거주하면서 매우 상이한 세계관을 지닌 사람들의 마음을 반영한다.   금과 가야금의 이야기는 경계를 넘어 이루어지는 문화 구축의 핵심 원동력을 보여준다. 결국 오랜 시간이 흘러 원래의 것과 각색된 것이 마주치고, 비슷한 철학적 이상을 좇는 두 사람이 전혀 다른 미학적 목적지에 도달한다. 이런 순간은 지도상의 어떤 선보다도 각 나라의 정체성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조세린 / 클라크 배재대 동양학 교수문화산책 중국 소리 가야금 연주자 전통 현악기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

2023-03-12

[문화산책] 행동하는 예술가 뱅크시의 외침

미술계의 악동(?) 뱅크시가 전쟁이 한창인 우크라이나에 잠입해 몇 점의 벽화를 남겨 세계적인 화제가 되었다. 폭격으로 폐허가 된 건물에 그린 벽화를 통해 전쟁반대의 강한 메시지를 세계에 전한 것이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의 침공으로 전쟁이 시작된 지 1년이 되는 지난 2월24일 뱅크시의 작품으로 기념우표를 발행하여 다시 화제가 됐다.   우표에 사용된 벽화는 작은 체구의 어린 소년이 커다란 덩치의 남자를 유도에서 업어치기를 하듯이 바닥에 패대기치는 장면을 그린 통쾌한 작품이다. 덩치 큰 남자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다. 누가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푸틴 대통령의 유도 사랑은 유명하다. 유도 유단자이며, 유도 관련 책을 펴낼 정도로 열렬한 팬으로 알려져 있다.   이 벽화 우표는 ‘푸틴 업어치기’ 우표로 불린다. 아예 우표 왼쪽 하단에는 우크라이나어 약자로 ‘푸틴 꺼져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그렇다면 어린 소년은 우크라이나 국민이다. 어쩌면 젤렌스키 대통령일 수도 있겠다. 다윗과 골리앗 대결의 현대판으로 읽히기도 한다. 아무튼 이 그림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전쟁을 멈추라는 것이다.   이 벽화는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 북서쪽에 있는 보로디안카라는 도시에 그려져 있는데, 이 도시는 지난해 러시아 침공 직후 폭격으로 큰 타격을 입은 곳이다. 러시아군은 이곳을 몇 주간 점령했다가 퇴각했고,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군이 이곳에서 민간인을 살해하는 등의 전쟁범죄를 저질렀다고 비난한 바 있다. 이런 배경으로 뱅크시의 메시지는 한층 선명하고 강렬해진다.   위험을 무릅쓰고 벽화를 그린 뱅크시도 대단하고, 그걸 우표로 만들어 메시지를 막강하게 키운 우크라이나와 젤렌스키 대통령도 만만치 않다. 참고로, 젤렌스키 대통령은 TV 프로듀서와 코미디언 출신이다. 대중의 마음을 잘 읽는 능력을 가졌다는 이야기다.   영국 출신의 뱅크시는 ‘얼굴 없는 거리의 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남의 건물에 벽화를 그리는 행위는 위법이기 때문에 신분을 감추고 활동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1974년생인 것으로 추정된다는 정도가 알려진 전부다.   하지만, 뱅크시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행동하는 예술가’다. 뱅크시가 유명해진 것은 기발하고 다양한 활동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의 작품이 사회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뱅크시의 작품은 우리 사회 속에 우리와 함께 슬퍼하고 기뻐하고 분노한다.   우선, 작품이 있는 곳이 길거리라서 누구나 감상할 수 있다. 그리고 작품 내용을 풍자와 해학, 유머로 이야기한다. 누구나 보면 금방 이해하고 웃을 수 있는, 기발하지만 친숙한 모습으로 표현된다. 그런 점에서, 근엄한 목소리로 어렵게 이야기하는 현대미술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뱅크시의 작품은 마치 시사만화처럼 쉽고 재미있으면서도 메시지는 강렬하고, 분명하다. 전쟁을 멈추고, 사람의 생명을 존중하고, 정치적 억압과 폭력이 없는 행복한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다. 그런 메시지를 아주 쉬운 말로 충격적으로 전한다. 예술과 사회, 우리의 삶은 별개가 아니고, 미술이 삶의 한 부분이라는 믿음을 주는 것이다.   물론, 뱅크시에 대한 비판도 있다. 지나치게 쇼맨십이 강하다, 진지한 주제를 너무 유머러스하게 다룬다는 등의 비판이다. 하지만 뱅크시는 자신만의 표현방법으로 사회적 이슈와 작품을 단단하게 연결시킨다. 거기에 선한 행동이 더해지면 영향력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뱅크시의 힘이다.   예술의 사회적 기능이란 과연 무엇일까? 장소현 / 미술평론가·시인문화산책 예술가 행동 예술가 뱅크시 우크라이나어 약자 우크라이나 정부

2023-03-09

[문화산책] 아름다운 마무리를 꿈꾸며

카터 전 대통령이 병원의 연명 치료를 중단하고, 남은 시간을 집에서 가족과 함께 보내면서 호스피스 보살핌을 받기로 했다는 뉴스를 읽고, 여러 생각이 오갔다.   98세이니 천수를 누린 셈이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벼슬자리에 올랐고,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며 말년을 보람차게 보냈고, 노벨평화상 수상의 영예까지 누렸고, 두루 존경받는 성공적 삶을 살았으니 큰 여한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죽음은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죽음은 삶의 끝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젊은이는 늙고, 늙은이는 죽는다. 피할 수 없다. 그래서 무섭다.   그 마지막 순간을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면서 사랑 안에서 평화롭게 맞이하고 싶다는 소망은 많은 울림을 준다.    ‘좋은 죽음’이라는 말이 성립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품위 있게 죽음을 맞이하려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호스피스 돌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도 그런 현상일 것이다.   카터 전 대통령의 선택은 스콧 니어링이나 지난해 2월26일 세상 떠난 이어령 선생처럼 스스로 택한 방식으로 죽음을 맞은 이들을 연상시킨다. 잘 알려진 대로, 이어령 선생은 맑은 정신으로 글을 쓰고 싶어서 병원 치료를 거부하고 집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책을 쓰고, 강연하고,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인터뷰를 통해 전했다. 몸이 너무 아파서 컴퓨터조차 다룰 수 없을 때는 육필로 글을 썼다. 그런 육필원고를 모은 것이 ‘눈물 한 방울’이라는 책이다. 그 책을 읽노라면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눈물이 난다.   스콧 니어링은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능동적이면서도 평화롭게 세상과 작별하는 아름다운 작별을 꿈꾸었다. 죽음을 피하지 않으면서, 의식이 또렷한 상태에서 삶과 죽음의 조화로운 경계를 맞이하고 싶어 했다. 병원이 아닌 집에서 죽기를 원했고, 어떤 의사나 약물의 도움도 받지 않았고, 어떤 진정제나 진통제, 마취제도 거부했다. 스스로 기꺼이 자연스럽게 목숨을 버리는 평화로운 작별을 꿈꾸었다. 스콧 니어링은 100세가 되던 1983년 서서히 곡기를 끊음으로써 천천히 평화롭게 세상과 작별했다. 그렇게 꿈을 이루었다.   그는 이렇게 부탁했다. 자신이 죽으면 수의가 아닌 평소의 작업복을 입혀 침낭에 넣어 빠르고 조용하게 화장해달라고, 어떤 장례식도 원치 않는다고, 오직 영혼만을 바라보는 땅의 나무 아래 자신의 재를 뿌려주기만 하면 된다고….   스콧 니어링이 한 달간 단식하며 죽음을 맞이하는 마지막 순간은 부인 헬렌 니어링이 쓴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에 사실적으로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헬렌은 남편의 죽음이 얼마나 아름답고 자연스러웠는지를 이야기한다. 곁에서 함께하며 남편의 의연한 죽음을 완성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카터 전 대통령 기사 덕에 스콧과 헬렌 니어링 부부의 책들을 꺼내서 다시 읽는 기쁨을 누렸다. 조화로운 삶과 아름다운 마무리를 진지하게 음미하는 것은 벅찬 기쁨이다. 내 누추한 삶의 모습을 되돌아 살피며 옷깃을 여미고, 부디 나의 마지막이 추하지 않기를 기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잘 죽고 싶거든 잘 살아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생각하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긴다. “잘 보낸 하루가 행복한 잠을 가져오는 것처럼, 잘 살아낸 인생은 행복한 죽음을 가져온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마무리 스콧 니어링 헬렌 니어링 병원 치료

2023-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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