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주의 고려, 또 다른 500년] 상대국 힘이 섬기는 기준, 힘 빠지면 사대 접었다
냉정하게 판세 읽은 실리 외교

송·거란·금 얽힐 때 현실주의 노선
사대는 했지만 사대주의는 아냐
송 밀려나자 외교 담판 거란 섬겨
고립 우려한 송 고려 관계 못 끊어
금 들어서자 거란과 관계 단절
광해군 “고려처럼 하면 나라 보전”
사대는 했지만 사대주의는 아냐
송 밀려나자 외교 담판 거란 섬겨
고립 우려한 송 고려 관계 못 끊어
금 들어서자 거란과 관계 단절
광해군 “고려처럼 하면 나라 보전”
맹자의 사대론, 대국 의무도 강조
![송의 수도 카이펑(開封)의 청명절 풍경을 그린 청명상하도(부분). 고려 사람들도 카이펑을 자주 왕래했다. [사진 이익주]](https://news.koreadaily.com/data/photo/2025/02/28/2dc97bb7-f92a-485d-9f52-f49f9f9ca433.jpg)
맹자의 사대론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길게 영향을 끼쳤다. 조선은 물론이고 고려도 중국 왕조에 대한 사대를 외교의 기본으로 삼았다. 맹자를 그저 붙좇아서가 아니라 중국에 강대국이 들어서 있는 상황에서 현실적인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려의 사대는 조선과 달랐다. 우선 사대할 나라를 선택하는 것부터가 달랐다. 고려 전기에는 중국에 두 개의 나라가 들어서 있었다. 10~11세기에는 남쪽의 송과 북쪽의 거란, 12세기에는 남쪽의 남송과 북쪽의 금이 대립했다. 송과 남송은 한족(漢族)이 세운 나라이고, 거란과 금은 오랑캐 나라였다. 송·남송에는 받아들일 만한 선진문화가 있지만, 북쪽에는 없었다. 하지만 군사력은 거란과 금이 더 강했다.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송의 시인이자 정치가였던 동파 소식. 소식은 고려는 물론 조선 문인들의 사랑을 받은 뛰어난 시인이었으나 거란과 내통한다는 이유로 고려에 적대적이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https://news.koreadaily.com/data/photo/2025/02/28/0f3fa67b-aca5-4d31-9e58-bbe5f6032288.jpg)
담판을 통해 거란군을 돌아가게 한 서희 외교의 핵심은 사대의 대상을 송에서 거란으로 바꾼 데 있었다. 그게 쉬운 일이었을까? 조선과 비교해보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병자호란 때 조선은 청의 사대 요구를 거부했고, 그 결과는 남한산성의 고난과 삼전도의 굴욕이었다. 오랑캐에게 사대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으니, 서희라도 조선에서는 환영받지 못했을 것이다. 고려는 사대의 대상을 혈통이나 정당성이 아니라 힘의 강약을 기준으로 선택했고, 그랬기 때문에 오랑캐라고 여기던 거란에 사대할 수 있었다. 고려사람들에게 사대는 대국을 섬긴다는 뜻을 표함으로써 침략을 막기 위한 외교정책이었다. 1019년 귀주대첩으로 거란에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고려는 곧바로 거란에 사대해서 더 이상의 전쟁을 피하는 길을 택했다.
거란에 사대하며 송에서는 실리
거란의 힘에 밀려 송에 대한 사대를 중단했지만, 고려 사람들은 여전히 송의 문화를 동경했다. 고려와 송의 상인들이 수도 없이 왕래했고, 고려로 오는 그들 손에는 각종 서적과 차·비단·도자기·약재가 들려 있었다. 의천은 송에 가서 불교 성지를 찾아다니며 고승들과 교학을 토론했고, 권적처럼 송에 유학해서 그 나라 과거에 급제하는 사람도 있었다. 1080년 송에 사신으로 간 김근은 그곳 문인들과 어울리고 돌아와 두 아들의 이름을 소식(蘇軾)·소철(蘇轍) 형제의 이름자를 따서 김부식(金富軾)·김부철(金富轍)이라고 지었다. 그러나 이것은 김근의 짝사랑일 뿐 정작 소식은 고려를 싫어했다. 그는 ‘고려에서 책을 사가는 일의 이해득실을 논한 상소문’을 올렸다. 고려 사신을 접대하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며, 고려 사람들이 거란과 내통하고 송의 허실을 살피고 있으니 왕래를 금지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고려시대 청자기린장식향로. 뚜껑이 상상의 동물인 기린 형상이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https://news.koreadaily.com/data/photo/2025/02/28/027bdda3-23ec-471b-9dc1-aa60533c211e.jpg)
![거란의 문자가 새겨진 거울. 거란 문자는 대자(大字)와 소자(小字)가 있는데, 이 거울에는 소자가 새겨졌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https://news.koreadaily.com/data/photo/2025/02/28/285fae28-c629-4e09-99d4-0133ae54b349.jpg)
17세기 여진족이 다시 일어나 후금을 세우고 명과 싸우고 있을 때 광해군은 이런 말을 했다. “중원의 형세가 참으로 위태롭다. 이럴 때 안으로 자강(自强)하면서 밖으로 기미(羈縻, 견제)하는 계책을 써서 고려가 했던 것처럼만 하면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보면 일에 힘쓰지 않고 밖으로 큰소리치는 것만 일삼고 있다. 끝내는 큰소리 때문에 나랏일을 망칠 것이다.” 이것이 예언이 되었을까. 이 뒤로 15년 동안 명과 청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한 조선은 병자호란을 당해 나랏일을 망치고 말았다.
명·청 교체기 조선 경직된 사대 고집
사대할 나라를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고려의 행운이었다. 조선은 전기는 명, 후기는 청에 사대하는 것 말고 대안이 없었다. 하지만 외부 환경만 탓할 일은 아니다. 아주 짧은 기간이지만 선택의 기회가 있었다. 바로 명·청 교체기다. 그때 조선은 경직된 친명 사대를 고집했다. 조선 건국 후 200년 넘게 명에 사대하면서 현실적인 외교정책으로서 사대의 의미를 망각한 때문일 것이다. 정책으로서의 사대가 현실과 괴리되어 이념화된 상태를 사대주의라고 하는데, 조선의 명에 대한 태도가 그랬다. 그리고 그것이 조선의 외교를 망쳤다.
지금은 옛날과 다르다. 근대 이전에는 국가 간 대소·강약의 차이가 상하 관계로 이어지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국가 주권의 개념이 생긴 뒤로는 모든 주권국가가 평등하다는 것이 상식이 되었다. 이 체제에서는 대소·강약의 차이가 상하 관계로 연결되는 것을 결단코 거부해야 한다. 그와 동시에 고려가 한 것처럼 국력 차이를 현실로 인정하면서 국익을 추구하는 냉정함을 지켜야 한다. 외교는 감정으로 할 일이 아니다.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