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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인의 근대 일본 산책] 유럽 가는 동남아·중동 기항지에서 제국주의 선행학습

문명항로가 제국항로로
윤상인 전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교수
웃자란 팽창 욕망
러일전쟁은 발발 후 1년 반만인 1905년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백인 국가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극동의 섬나라 일본이 새로운 제국으로 등장했음을 세계무대에 알렸다. 그것도 이른바 유색(有色)의 제국이다. 반세기 전만 해도 일본은 미 해군 페리 제독의 군사적 위협에 굴복하여 6개의 항구를 구미 열강에 내어줘야 했던 처지였다. 식민지로 전락할 위기에 처해 있던 나라가 50년 만에 식민지를 거느리는 제국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지배는 통쾌, 피지배는 고통”
홍콩 등의 낙후 지역서 혐오감

“도덕적인 조선, 문명화 부적합”
도덕 빠진 자리 제국 열망 채워

대작가 소세키도 자업자득론
한 번도 제국주의 비판 안 해

청일전쟁 개전 직후인 1894년 8월 8일 일본의 시사신보에 실린 만평. 권총으로 청나라 군인을 쏘는 일본군의 왼팔에 삿갓 쓴 조선 어린이가 안겨 있다. [사진 윤상인]
제국주의는 정책이기에 앞서 욕망의 산물이다. 일본은 어떻게 해서 제국주의를 욕망하게 되었는가. 1860~70년대의 일본은 산업화 이전의 상태였다. 산업혁명을 통한 대량생산과 상품시장의 확보를 노리던 상업자본 등의 내발적 요구에 부응했던 서구 제국주의와는 조건과 환경이 판이했다. 예를 들면 1893년에 수에즈운하를 통과한 국가별 선박 수는 영국 2405척, 프랑스 272척, 일본 1척이었다.

그런 상황임에도 이미 10년 전인 1880년대 일본에서는 남방 해로에서 일본의 경제적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동남아시아로 진출해야 한다는 ‘남진론’이 분출했다. 쓰시마 해협에서 러시아 발트함대를 격파한 일본해군은 세계를 놀라게 했지만, 정작 일본의 주력전함들은 영국 및 프랑스, 이태리에서 건조한 것들이었다. 1900년대까지도 일본은 대형전함 건조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국가의 생존을 위한 문명화의 의지와 제국주의의 욕망이 거의 시차를 두지 않고 동시에 공존했다는 사실은 근대 일본의 압축 근대화 스토리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지배와 피지배 사이에서
1909년 4월 14일 요미우리 신문만평. 욱일기 문양의 기모노를 입은 일본 여성이 한국 관광단에게 ‘문명’이라고 새겨진 호리병의 술을 따르는 장면에 ‘문명의 접대’라는 제목을 붙였다. [사진 윤상인]
19세기 후반 유럽에 파견된 일본인들이 남긴 여행 기록은 일본인들의 제국의식이 어디에서부터 기원했는지를 가늠하게 해준다. 일본인들은 기록을 남기는 일에 능하다. 19세기 후반 50년간 일본인에 의해 기록된 유럽 여행기는 수백 편에 달한다. 당시의 시대 상황 탓인지 기록자들이 독립된 개인으로서가 아닌 ‘일본인의 한 사람’이라는 입장에서 관찰하고 적었다는 점도 제국주의와 관련된 집단의식을 살펴보는 데 유효하다.

구미회람사절단(1871~73)의 모습. 오른쪽에서 둘째가 이토 히로부미. [사진 윤상인]
19세기 중반부터 개항장이었던 요코하마를 통해 유럽으로 향하는 고위관료 및 군인·실업가·학자·종교인·예술가·유학생 등이 끊이지 않았다. 승선해서 한 달 반 이상을 줄곧 서쪽으로 향해한 후 종착지인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항구에 도착했기 때문에 당시의 일본인들은 이 경로를 ‘서항(西航)’이라고 불렀다. 탑승객은 항해 중에 상해·홍콩·싱가포르(또는 사이공)·페낭·콜롬보·아덴 등의 기항지에 일시 상륙했다. 당시 이 항구들은 모두가 영국의 식민지이거나 관할통치 지역이었고, 배에서 내린 일본인 탑승객은 먼저 항구를 에워싸는 아름답고 웅장한 서양식 건물들을 바라보고는 인도 태평양 해역을 장악한 대영제국의 위세를 실감했다. 그 반면에 해안에서 떨어진 도시의 후미진 곳에 펼쳐지는 현지인들의 생활공간은 일본인 여행객들의 눈에 더없이 불결하고 무질서한 광경으로 비쳤다. 여행기록 속에서 많은 기록자는 현지인 거주구역의 악취를 언급하며 혐오감을 숨기지 않았다.

동남아 및 인도양의 기항지를 둘러본 일본인들의 반응은 크게 다음 두 가지였다. 첫째는 백인 지배하에서 밑바닥의 삶을 이어가는 동남아·중동 지역 기항지의 상황은 머지않아 일본에서도 그대로 재현될 수 있다는 두려움과 경각심, 둘째는 현지인들이 피지배 상태에 놓인 것은 그들의 나태함과 고루함에서 비롯된 ‘자업자득’의 결과로 치부하고 비하하는 것이 그것이다. 전자가 약자의 입장에서 서양에 대한 저항의식을 내포하고 있다면, 후자는 강자의 입장에서 문명화되지 않은 피지배 민족들에 대한 우월의식을 담고 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후자로 수렴되어갔다.

‘문명’이라는 이름의 폭력
요코하마항의 구미회람사절단 출항 모습. [사진 윤상인]
당대의 문명 전도사를 자처했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청일전쟁 전후부터 강경한 제국주의 논조를 전개했다. 그 핵심에는 서양 백인 지배에 대한 저항심리와 아시아인의 고루함에 대한 비하 의식이 공존했다. 예컨대 그는 1882년 신문지상에 쓴 논설 서두에 20년 전 유럽을 여행했을 때 인종차별에 해당하는 대우를 받았던 불쾌한 기억을 불러낸 후, 영국 관할 하의 동남아 항구에서 목격했던 백인들의 ‘토인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구미회람실기』(전 5권, 구메구니타케 편, 초판 1878). [사진 윤상인]
“인도지나의 사람들이 이렇게 영국인에게 고통을 당하는 것은 괴로울 터이겠지만, 영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위세와 권력을 마음껏 행사하는 것은 무척 통쾌한 일일 터, 한쪽을 가엾이 여김과 동시에 다른 한쪽을 부러워했던 나는 일본인으로서 언젠가 한 번은 일본이 국위를 떨쳐서 인도지나의 토인들을 통치할 때에 영국인의 전례를 본받아야 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영국인조차도 고통스럽게 해서 동양의 통치권을 우리 손아귀에 넣어야 한다고 혈기왕성한 청년시절에 마음속 깊이 약속한 것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일찍이 후쿠자와는 중국·조선 등은 도덕 지배의 사회이기 때문에 지력(智力)이 요구되는 문명화에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한 바 있다. 우리는 후쿠자와의 윗글에서 ‘도덕’이 빠진 자리를 제국을 향한 폭력적인 ‘열망’이 대신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실제로 동남아 기항지에서 영국인들을 축출하고 동남아 ‘토인’을 지배하고자 했던 청년 후쿠자와의 욕망은 80년 후인 1942년에 욱일기와 탱크를 앞세우고 싱가포르 등 동남아 각지에 입성한 일본군에 의해서 구현되었다. 이를 두고 후쿠자와를 농담으로라도 ‘예언자’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은 우리에게 도덕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적자생존 원리로 팽창 정당화
프랑스 잡지 ‘프티 주르날’ 1898년 1월 16일자에 실린 만평. ‘중국, 왕과 황제들의 케이크’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 독일 빌헬름 2세, 러시아 니콜라스 2세, 프랑스를의 인화한 마리안느와 함께 메이지 천황으로 여겨지는 일본인이 중국을 탐내는 모습이다. [사진 윤상인]
1871년 구미회람사절단이 귀국해서 펴낸 방대한 여행기록(『구미회람실기』, 1878)에서는 동남아시아가 ‘자원의 땅’으로 묘사된다. 일본에 들어오는 서양 수입품들의 원재료는 인도·싱가포르·호주·필리핀에서 생산된 것임에도 너나없이 유럽으로 몰려가느라 인도 및 동남아는 안중에 없다고 지적한 후 이렇게 적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모르는 것이 있다. 국민 모두가 무역에 힘쓰고 공업기술을 융성하게 하면 유럽까지의 중간지점에 엄청나게 많은 이익이 매장되어 있음을!”

다소 중상주의가 가미된 관점이지만, 향후 일본이 공업기술을 발전시키면 식민지의 원재료를 확보해 완제품으로 가공한 후 식민지에 다시 수출하는 유럽 열강과 똑같은 방식을 동남아 지역에 적용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1900년 영국유학 길에 오른 일본의 작가 나쓰메 소세키는 스리랑카의 콜롬보 노상에서 꽃 파는 소녀에게 속아 강매를 당할 뻔했었던 경험을 두고 여행일기에 “망국의 백성은 하등한 것들이다”라고 기록했다. ‘하등’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나라를 잃게 되었다는 이른바 ‘자업자득’론에 안이하게 동참하는 나쓰메는 이미 서구 및 일본 제국주의의 논리에 포섭되었거나 아니면 애초부터 그가 민감한 정치적 사안에 대해 자율적으로 사고하기 어려운 인물이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을 일깨운다. 어찌 되었든 그의 여행일기 속에 보이는 아시아에 관련된 기록들은 그가 후일 작가 생활에 접어든 후 단 한 번도 일본의 제국주의를 비판하지 않았던 내력을 알기 쉽게 설명해준다.

‘문명화의 사명’이라는 말이 있었다.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아프리카나 신대륙을 정복할 때 대의명분으로 내세웠던 구호였다. 일본에서도 제국주의적 욕망이 정치·군사적으로 구체화되었을 때 문명은 평화의 얼굴을 한 무기로 사용되었다. 아울러 19세기 후반에 일본에 소개된 ‘강한 종(種)만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의 원리는 문명화의 필요성을 깨우침과 동시에 제국주의적 팽창을 정당화했다. 일본은 문명화 과정을 밟으면서 제국주의를 선행 학습했다.

일본의 사절단·유학생들의 서항이 시작되었을 때는 서구 제국주의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문명학습을 목적으로 한 서항은 그들에게는 ‘문명항로’였고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선상에서, 기항지에서 제국주의를 먼저 학습한 ‘제국항로’이기도 했다. 근대 일본은 유색인종으로서는 유일하게 서양문명과 거의 동등한 수준을 달성함으로써 국가의 주권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서양문명에 대한 모방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경우 식민지 상태로부터 완전히 탈피했다고 할 수는 없었다. 노예가 스스로 노예 상태에서 벗어났음을 대외적으로 인정받는 방안으로는 다른 노예를 휘하에 노예로 두는 선택도 가능하겠지만, 이 또한 억지스럽고 무모하기는 마찬가지다.

윤상인 전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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