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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병원 갈 때 애벌레 된다"…까막눈 졸업한 늦깎이 129명

21일 전북 전주시 효자동 전북특별자치도교육청 2층 강당에서 열린 '2024학년도 문해 교육 프로그램 초등·중학 학력 인정서 수여식'에서 서거석 전북교육감이 졸업생 129명에게 일일이 학력 인정서를 주며 악수하고 있다. 사진 전북특별자치도교육청
“볼일 있어 은행 갈 때
허리 아파 병원 갈 때
나는 작은 애벌레가 된다”

전북 전주 주부평생학교에 다니는 박순애(70대·여)씨가 “어릴 적 못 배운 한”을 표현한 ‘애벌레의 꿈’이란 자작시다. 박씨는 이 시에서 “글을 읽어야 될 때가 오면 자그만 애벌레처럼 움츠러든다”고 읊조렸다.

전북특별자치도교육청이 문해 교육을 받은 늦깎이 학생들을 인터뷰한 영상 캡처. 전주 주부평생학교에 다니는 박순애(70대·여)씨가 "어릴 적 못 배운 한"을 표현한 '애벌레의 꿈'이란 자작시. 사진 전북특별자치도교육청


문해 교육 ‘학력 인정서’ 수여식

21일 오전 10시30분 전북특별자치도교육청 2층 강당. 박씨처럼 어려운 환경 탓에 한글을 배우지 못한 늦깎이 학생 129명(초등 94명, 중학 35명)을 위한 ‘2024학년도 문해 교육 프로그램 초등·중학 학력 인정서 수여식’이 열렸다. 이들은 군산 늘푸른학교, 무주 민들레학교 등 도내 6개 시·군 10개 문해(文解) 교육 기관에서 초등·중학 과정을 마친 졸업생이다.

문해는 글을 읽고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문해 교육 기관은 배움의 기회를 놓친 성인에게 글을 읽고 쓰는 능력뿐 아니라 일상생활에 필요한 스마트폰·키오스크·컴퓨터 사용법 등을 가르치는 곳이다.

초등학교 과정은 매주 3차례에 걸쳐 연간 240간씩 3년간 국어·수학 등 수업을 들어야 졸업할 수 있다. 1단계(1~2학년), 2단계(3~4학년), 3단계(5~6학년)를 거친다. 중학교 과정은 1~3학년 3단계로, 매주 4차례, 연간 450시간씩 3년간 수업을 받아야 학력이 인정된다.

전북교육청이 운영하는 문해 교육 기관에서 만학도들이 수업을 받는 모습. 사진 전북특별자치도교육청


‘최고령 졸업생’ 90세 이필순씨

이번에 학력 인정서를 받은 졸업생들의 평균 연령은 72세다. 익산행복학교에서 초등 과정을 수료한 이필순(90·여)씨가 최고령이다. 익산시평생학습관 중학 과정을 마친 57세 여성이 제일 어리다. ‘최고령 졸업생’ 이씨는 “못 배운 것이 한이 됐는데 이제는 어지간한 영어도 읽을 줄 알고, 평생 못 입어 본 교복도 교육청에서 입혀주고 졸업식도 해주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고 했다.

전북교육청은 이날 수여식에서 문해 교육을 받은 할머니·할아버지를 인터뷰한 영상을 틀었다. 5분 26초 분량 영상엔 오랜 세월 글을 몰라 주눅 들었던 삶과 숨기고 싶었던 사연 등이 생생히 담겼다.

20일 익산시평생학습관에서 열린 익산행복학교 졸업식에서 이필순(90·오른쪽)씨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2024학년도 문해 교육 프로그램 초등·중학 학력 인정서 수여식' 졸업생 중 최고령이다. 사진 익산시


“연필 잡고 쓰는 것 자체가 기분 좋아”

최모(73·여)씨는 영상에서 “버스를 타려 해도 글을 볼 줄 몰라서 못 타고, 아저씨(남편)가 글을 아니까 적어주면 종이쪽지를 주머니에서 빼서 이렇게 보고 비슷한 번호 (버스가) 오면 타고. 겁나게 답답한 생을 살았죠”라고 토로했다. 박모(73·여)씨는 “돈이라도 찾으러 (은행에) 가면 글을 못 쓰니까 손을 붕대로 감고 갔었어요. (직원에게) 대신 써 달라고 하려고”라며 눈물을 훔쳤다.

문모(67·여)씨는 “시어머니한테 많이 당했죠. 시집 식구들한테 글도 모르고 시집 왔다고. 네가 사람이냐고”라며 설움을 나타냈다. 이모(82·여)씨는 “손녀딸이 ‘할머니 어디 학교 나왔냐’고 해서 ‘나 미국 하버드대학 나왔다’고 돌려먹었어. 어리니까 모르더라고”라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이들 만학도는 배우는 설렘과 기쁨도 감추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가방을) 챙기고 학교에 온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워요”(83세 김모씨), “책상에 앉아서 연필 잡고 쓰는 것 자체가 너무 기분이 좋은 거예요”(71세 양모씨) 등이다.

21일 전북특별자치도교육청 2층 강당에서 열린 '2024학년도 문해 교육 프로그램 초등·중학 학력 인정서 수여식'에서 졸업생 129명과 서거석 전북교육감, 문해 교육 기관 관계자 등이 손을 흔들고 있다. 사진 전북특별자치도교육청


서거석 교육감 “어르신 배움 응원”

정모(83·여)씨는 “비행기 탔을 때 의자에 영어가 쓰여 있어. 선생님한테 배워서 손녀딸한테 ‘야, 이리 와봐. 이게 글자 무슨 자다’고 했더니 ‘할머니 잘 아네’ 그럴 때 좀 기쁘더라고”라며 활짝 웃었다. 이들은 “(처지가) 비슷한 사람끼리 공부하니 숨김없이 속마음을 얘기할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서거석 전북교육감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어려움을 극복한 129명 졸업생에게 깊은 존경과 사랑을 보낸다”며 “교육청은 앞으로도 문해 교육 지원을 통해 어르신들의 배움과 도전을 응원하겠다”고 했다. 전북교육청은 현재 도내 11개 시·군에서 학력 인정 문해 교육 기관 20곳을 운영하고 있다. 올해는 500여명이 교육 과정을 이수할 예정이다.




김준희([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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