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검토 현직 교사들도 다 틀려…'킬러 문항' 실체 드러났다 [사교육 카르텔 감사결과]

대입 수학능력시험(수능)에 출제되는 초고난도 문제인 ‘킬러 문항’이 현직 교사조차 풀지 못하는 수준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정답률도 턱없이 낮아 찍는 것보다 못한 수준이어서 변별력 확보라는 애초 출제 목적도 달성하지 못했다.
감사원은 18일 ‘교원 등의 사교육시장 참여 관련 복무실태 점검’ 감사 공개문을 공개했다. 2023년 6월 윤석열 대통령이 “약자인 아이들을 가지고 장난치는 불공정한 행태”라며 킬러 문항 출제와 이를 통한 사교육 조장을 비판하며 사교육 카르텔(이익 독점) 혁파를 강조하자 착수한 감사였다. 지난해 3월 중간 감사 결과 발표에서 사교육 업체에 문제를 판매해 청탁금지법(금품 수수)과 국가공무원법(겸직 위반)을 위반한 혐의로 고교 교사 27명과 사교육업체 관계자 23명을 수사 의뢰한 지 1년여 만에 최종 결과가 나왔다.
이번 감사에선 수능 킬러 문항의 실체가 일부 드러났다. 감사원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수능 출제 과정에서 현직 교사로 구성된 검토위원 전원이 오답을 낸 수학 문제가 출제된 걸 확인했다. 문항별 예상 풀이 시간이 수험생에게 주어진 시간보다 30분을 초과하고, 정답률이 2~3%대(고난도 문제 목표 정답률 5%)에 불과해 문제를 풀지 않고 찍는 게 외려 답을 맞출 확률이 더 큰 경우도 있었다. 결국 변별력 확보를 출제 이유로 대면서도 실제 변별력 확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문제였던 셈이다. 감사원 관계자는 “수능에 킬러 문항이 연이어 출제되며 출제 능력을 가진 현직 교사에 대한 학원가의 수요도 함께 뛰었다”고 말했다.
현직 교사가 사교육 시장에 문제를 내다 팔아 돈벌이에 나선 사실도 확인됐다. 감사원은 최근 5년간(2018년~2022년) 교원 249명이 학원 강사들에 수능과 유사한 문제를 팔아 총 212억9000만원(1인당 평균 8500만원)의 매출을 올린 것으로 파악했다. 문항당 단가는 10~20만원 수준이었고, 어려울수록 비쌌다. 사교육 업체로부터 5000만원 이상을 수취한 교원을 중점적으로 추려 조사한 결과여서 실제로는 더 많은 교사가 이같은 행위를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대부분은 수능과 국가 모의고사 출제 및 EBS 교재 집필 경력이 있어 겸직이 엄격히 금지된 현직 교사였다. 하지만 실제 겸직 신고는 드물었다. 문항 거래는 지역으론 서울 대치동과 목동 등 대형 사교육업체가 집중된 송파(23억8000만원)·강남(23억)·양천(21억5000만원)에, 과목으론 과학(66억2000만원)·수학(57억1000만원)에 각각 집중됐다. 감사원은 수사 의뢰와 별개로 비위가 중대한 교원 29명에 대해선 해임 등 징계를, 비위 혐의가 비교적 약한 220명에 대해선 적정 조치를 각각 교육부에 요구했다.

감사원에 따르면 문항 거래는 교사 및 학원 강사 사이의 인맥과 학연 등으로 시작됐다. 함께 골프를 치는 등 끈끈한 인연을 이어갔고 금전과 맞물리며 실제 카르텔과 같이 움직였다는 게 감사원 지적이다. 특히, 교사들이 수능과 모의고사 출제를 위해 함께 합숙해 쌓은 친분은 수억 원의 수익을 올리는 문항 거래 조직 형성의 발판이 됐다. 교육부의 관리 부실 속에 현직 교감이 교사들을 섭외해 문항제작팀을 꾸리고, 현직 교사가 아예 아내와 함께 출판사를 차려 문제를 팔거나 소득세를 탈루하기 위해 아내 명의로 계약을 맺은 경우가 허다했다. 학원가에 판 문제를 학교 내신에 그대로 출제한 교사들도 적발됐다.
감사원은 일부 교원들이 출제 능력이 있는 핵심 교사들을 섭외한 뒤 알선비를 챙겼고, EBS 교재를 연구 명목으로 사전에 빼돌려 강사에게 넘긴 사례도 찾아냈다. 문제 판매 사실을 숨긴 채 수능과 국가 모의고사 출제위원으로 참여한 경우도 지적했다.
서울 강북의 한 과학교사는 수능 직전인 2020년 10월 사교육 관계자에게 “한 달간 연락이 안 될 것”이라며 사실상 수능 출제 참여 사실을 흘렸다. 업무 복귀 직후엔 계약서를 변경해 20개 문항당 단가를 300만원에서 350만원으로 올렸다. 송파구의 한 고등학교 영어 교사는 “보안이 강화돼 EBS 파일을 빼 오는 게 쉽지 않다”며 문항당 거래 단가를 10만원에서 14만원으로 인상했다. 수능 출제와 EBS 집필 경력을 거래의 무기로 사용한 셈이다.
2022년 11월 치러진 2023학년도 수능의 영어 23번 문항의 사전 유출 논란의 실타래도 일부 풀렸다. 23번 지문은 캐스 선스타인 미국 하버드대 교수의 책 『투 머치 인포메이션』 79쪽에서 발췌됐다. 하지만 똑같은 지문이 ‘일타 강사’ 모의고사 문제집에 포함돼 논란이 컸었다.

감사원에 따르면 해당 지문은 2023년 1월 출간 예정이던 EBS 교재에 포함될 예정이었다. 출제자는 현직 고교 교사 A씨였다. 조사 결과 당시 수능 출제에 참여한 대학교수 B씨는 2022년 8월 해당 EBS 교재를 감수한 뒤 이 문제를 수능에 출제했다. 공교롭게도 A씨와 EBS 집필진으로 친분을 맺은 C씨가 일타 강사에게 같은 지문으로 만든 문제를 판매한 것도 2022년 8월이었다. 관련자들은 감사원 조사에서 “우연의 일치”라 주장했지만, 감사원은 EBS 교재 유출 및 유착 정황이 의심돼 지난해 이들을 수사 의뢰한 상태다.
감사원은 적중 논란이 벌어진 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 이의 신청이 215건이나 접수됐지만, 평가원 관계자들이 “해당 문제집은 수강생만 접근할 수 있었다”거나 “지문이 같아도 문제 유형이 다르면 문제가 없다”는 취지로 거짓 설명을 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이 때문에 아예 내부 이의심사위원회에 상정되지 않고 종결되는 등 관련 사안을 묵살한 사실도 적발했다. 감사원은 평가원 관계자들에 대한 수사 의뢰와 함께 해임 등 중징계를 요청했다.
대통령실 고위관계자는 이날 감사 결과와 관련해 "윤석열 정부의 강력한 대응 의지 속에 의혹만 무성했던 킬러문항과 사교육 이권 카르텔의 실체가 낱낱이 드러났다"고 밝혔다. 교육부도 “제도 개선과 함께 관련자들에 대한 조치를 추진하고, 재발 방지를 위해 지도·감독을 철저히 하겠다”고 밝혔다.
박태인([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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