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학번 태우고 출발합니다, 21년 만에 돌아온 '춘식이'
‘재개통 한달’ 경기 북부 교외선 여행

지난 9일 대곡역. 이호영(7)군 가족은 의정부로 향했다. “(경)전철도 타보고, (제일)시장도 가서 맛난 것 먹고요.” 이군의 엄마와 아빠는 “의정부 부대찌개도 먹고요”라며 거들었다. 승객들은 21년 만에 다시 달리는 교외선 무궁화호를 촬영하기에 바빴다. 드디어 “열차 출발합니다.” 2607 열차는 몸 풀듯 느리게 움직였다. 덜컹덜컹. 예전의 그 소리를 내면서.
일제가 삽 뜨고 미군이 완성한 옛 철길
지난달 11일 재개통한 교외선은 2004년 4월 1일 운행을 중단했었다. 같은 해 관광열차가 2008년까지 짧게 오갔고, 군용 화물열차가 지나갔다는 목격담도 2017년까지 들렸다. 애초에 교외선 건설은 군용으로 출발했다. 일본이 첫 삽을 떴고 미국이 마무리했다. 태평양전쟁 와중인 1942년. 현재의 중앙선인 경경선(서울 청량리~경주)이 완성됐다. 경의선에서 내려오는 물자를 남쪽까지 실어야 했는데, 서해 쪽 미군의 함포사격을 두려워한 일제는 경부선보다 내륙인 경경선을 택했다. 경의선과 경경선을 이어주기 위해 교외선 건설에 들어갔다. 그러나 해방이 되면서 올 스톱.
![1963 교외선 개통식. 능곡역에서 의정부역까지 이어진 '능의선'은 서울과 연결돼 '서을교외선'으로 불렀다. [중앙포토]](https://news.koreadaily.com/data/photo/2025/02/16/8af8c51b-2a2d-4e9d-ac63-deaa4688d9db.jpg)
![2019년 5월 20일 당시 운행이 중단돼 있던 교외선 구간인 경기도 고양시 벽제역 폐터널을 일본 관광객들이 찾은 모습. 북한산이 보인다. [중앙포토]](https://news.koreadaily.com/data/photo/2025/02/16/6017a3b6-a0ed-4e75-b588-e500980981d0.jpg)
이후 교외선이 필요했던 건 주한미군이었다. 6·25 전후 복구를 원조한 미국 주도의 국제협조처(ICA)가 자금 61만1000달러를 제공해 1963년 개통했다. 능곡역에서 시작해 의정부까지 이어져 ‘능의선’으로 불렀다. 서울역과 신촌역·왕십리역 등과 이어진 순환선이 만들어졌다. 청춘들은 청바지 입고 통기타 들고, 조금 뒤에는 손잡이 달린 도시락통 세 배 크기의 카세트플레이어를 들었다. 그리고 MT(멤버십트레이닝)를 빙자한 야유회를 즐기려 이 교외선에 올랐다.
“뭐야. 자리가 없네.”
원릉역에서 올라탄 60대들이 입을 쩍 벌렸다. 78학번이라는 이 사람들. 뭔 착각을 했는지, “50분이니까 뭐”라며 의정부까지 입석도 마다치 않았다.
덜컹덜컹. 노란색 무궁화호는 평균 시속 50㎞로 느릿느릿하게, 졸음을 부르는 백색소음을 냈다. 꾸벅꾸벅하면 어느새 의정부에 닿는다. 이 열차의 예명은 ‘춘식이’다. 노란색과 갈색의 위아래 배색이 카카오 캐릭터 ‘춘식이’를 떠오르게 하기 때문. 열차는 소싯적 교외선 3대 천왕으로 일컫는 곳을 지난다. 일영·장흥·송추. 그새 강산이 두 번 변한다는 20여 년이 흘렀다.
“에구, 송추·장흥이 뭐야. 일영이 최고였지.”
기존 교외선 11개 역 중 ‘신(新)’교외선은 6개 역에서만 선다. 그 중 일영이 가장 번성했다는 주명자(83)씨의 말이다. 주씨는 일영에서 60년 가까이 살았다. 그는 “국가공무원(옛 철도청 직원)이었던 남편이 일영역에 근무한 게 1971년이었으니, 교외선의 흥망성쇠를 누구보다 관심 있게 지켜봤다”고 했다. 한 번 열차가 들어오면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역 진입로를 가득 메우고 인근 유원지로 몰려갔다고 한다. 장흥 토박이 이병헌(69)씨도 “일영이 워낙 인기가 좋았다”라며 인정했으니, 반박할 여지는 없다. 김모(86) 할머니는 이 진입로 목 좋은 모퉁이에서 슈퍼를 꾸렸다. 김씨도 “참 좋았던 때”라고 했다. 현재는 그렇지 않다는 반어법적 표현일까.


일영역은 광역전철망도 겸한 대곡역·의정부역을 제외하고 가장 공들여 다시 태어났다. 레트로 감성이 묻어난다. 이전 공식 영업 마지막 날이었던 2004년 3월 31일까지 사용한 이정표와 안내판, 설비들을 전시하고 따뜻한 느낌의 목재로 내부를 단장했다. 옛 역사처럼 슬레이트로 대합실과 승강장 지붕을 마무리했다.
일영역은 교외선 중 유일하게 복선 구간이다. 상·하행선 열차가 만난다. 딱 1분간이다. 이 ‘만남의 광장’에서 상봉 장면을 찍기 위해 열차에서 내렸다가 다시 못 탈 수도 있는 짧은 시간. 방법은 있다. 어느 역에서 타도 2600원인 탑승권을 사느니, 4000원에 무제한으로 이용 가능한 ‘하루 패스’를 이용하는 것. 단 열차 시간을 잘 살펴봐야 한다. 오전 일찍 4회, 오후 늦게 4회 이렇게 하루 왕복 8회만 운영한다. 왜 BTS가 2017년 ‘봄날’ 뮤직비디오의 촬영지로 택했는지 주변을 둘러보는 것도 괜찮다.
일영(日迎). 이름 그대로 이른 아침 해가 역 앞 아름드리나무 너머에서 맞이해 줬다. 며칠 전 별세한 가수 송대관의 ‘해뜰날’이 떠올랐다. ‘쨍하고 해 뜰 날’이 일영에 돌아올까.

지난 한달 찾은 사람만 2만명에 달해
모습은 역 중 가장 남루하지만, 장흥역을 놓치면 안 된다. 큰길인 권율로(371번 도로)로 나가면 식당들이 먼저 인사를 건넨다. ‘부흥식당’에는 하루 일을 마친 사람들과 여행객들로 왁자지껄했다. 생선구이·동그랑땡 등 9000원짜리 백반이 알뜰하고 쏠쏠하다. 1만3000원짜리 제육정식은 밥을 제육 양념에 비벼 먹으라고 유혹한다. 백기 들고 항복할 수밖에. 건너편 55년 된 노포 ‘장흥할머니추어탕집’도 지나치기는 힘들다.
부른 배를 꺼트리려면 해발 443m 송암스페이스센터까지 가보는 것도 괜찮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야 하니, 부른 배가 꺼질지는 미지수. 수많은 하늘의 별을, 국내 기술로 처음 만든 600㎜ 주망원경으로 볼 수 있다. 대보름이 막 지난 큰 달을 집 마당처럼 가깝게 당겨 볼 수 있다. 일·월요일은 휴관. 평일은 예약제이고 현장 발권은 토요일 오후에만 가능하니 꼭 확인해야 한다.


바로 밑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에는 개관 10주년 기념 ‘완전한 몰입’이 전시 중이다. 9월까지 이어진다. 장욱진(1918~1990)은 박수근과 이중섭·김환기 등과 함께 한국의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2세대 서양화가다.
맞은편 민복진미술관에서는 ‘앉거나 서거나 누워있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한국 현대조각에 큰 족적을 남긴 민복진·강태성·김세중·전뢰진의 작품을 다룬다. 6월까지다. 장욱진미술관 표로 무료입장이 가능하다. 머리에 문화적 감성을 안고, 기안84가 다녀갔다는 장흥참숯가마에서 몸을 지지면 금상첨화다. 아니면 ‘가나아트파크’까지 들러 문화적 감성을 제곱시킬 수 있다. 탤런트 임채무가 만든 복고풍 놀이동산 ‘두리 랜드’도 있다.

송추역에서 내린다면 송추계곡을 한 바퀴 돌거나 내친김에 송추남능선을 통해 여성봉까지 올라갔다가 크게 U자도 돌며 얼어붙은 송추폭포를 본 뒤 내려와도 된다. 아이젠 필수. 카페 ‘헤세의 정원’에서 따뜻한 커피 한잔. 중국식당 ‘진흥관’에서 추위만큼 독한 고량주 한잔. 취향 따라 저격하면 된다. 그마저 섭섭하면 ‘평양면옥’이 있다. 갈비·국밥
이어서 의정부역. 등산객들은 이 역을 환승 지점으로 삼고 1호선에 올라 더 북쪽의 고대산(연천역)이나 소요산(소요산역)·불곡산(양주역)으로 향하기도 한다. 고양시 원당에서 온 김모(61)씨는 “소요산 입구에 가려면 이전에 대중교통으로 2시간이나 걸렸는데, 시간이 40분이나 단축돼 부담이 줄었다”고 했다.


의정부역에서 대곡역으로 향하는 2613 열차. 아이들은 계속 무엇인가를 궁금해했고, 부모들은 졸음이 왔지만 눈을 부릅뜨고 설명해 주고 있었다. 여전히, 덜컹덜컹.
김홍준([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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