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인성의 시선] 반값 등록금 그늘에 갇힌 대학들
“비가 새고 화장실 문짝이 떨어져도 다 수리할 수 없을 정도다.”(양오봉 전북대 총장)
지난달 22일 열린 한국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 총회의 마지막 행사인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과의 대화’에서 총장들이 쏟아낸 발언이다. 2009년 이후 계속된 등록금 동결 기조에 대한 불만이 어느 해보다 거셌다. 공교롭게도 이 부총리는 첫 임기 때인 이명박 정부 시절 등록금 인상 여부와 국가장학금 지원을 연계한 ‘반값 등록금’ 정책의 도입을 주도했다. 이 부총리는 “내년엔 대학 사정을 (반영해) 완화할 수 있는 기반을 닦자고 준비 중”이라면서도 “대학이 한해 더 참아달라”고 인상 자제를 요청했다. 반응은 냉담했다. “올릴 수밖에 없는 한계에 와있다”며 인상 의사를 밝히는 총장도 있었다.
등록금 인상 대학에 재정 지원상 불이익을 주는 정부 규제가 등장한 지 17년째인 올해, 대학들이 ‘반란’에 나섰다. 침묵 속에 정부·정치권의 눈치만 보던 10여년 전과는 달리 행동에 나섰다. 지난 4일까지 2025학년도 학부 등록금 인상을 결정한 대학은 총 56곳으로, 전국 4년제대(199곳)의 28.1%에 이른다. 나머지 대학이 등록금심의위 심의를 마무리하는 다음 주엔 80곳 정도로 불어날 듯하다. 이전에도 등록금을 올리는 대학이 일부 있긴 했다. 하지만 대개 정원이 많지 않은 대학, 재정지원에서 소외된 비수도권 대학이라 주목 받지 못했다.
올해는 차원이 다르다. 연세대·고려대·성균관대·한양대·서강대 등 ‘주류’로 불리는 서울 대형 사립대들이 인상을 단행했다. 서울교대·경인교대 등 국립대는 물론 2012년 박원순 당시 서울시장의 주도로 등록금을 깎아 ‘반값 등록금’의 대명사가 됐던 서울시립대도 인상 대열에 합류했다.
16년간 유지된 동결 기조가 왜 올해 흔들리는 걸까. 누군가는 “계엄 사태, 탄핵 정국이 대학가에 가져온 나비 효과”라고 했다. 정국 혼란으로 정부의 ‘그립’이 느슨해지지 않았다면 등록금 인상 대학이 이리 늘지 않았을 거란 얘기다. 올해 법정 인상 한도가 유난히 크기 때문이란 분석도 나온다. 법적으로 등록금은 직전 3개년도 소비자 물가상승률 평균의 1.5배까지 올릴 수 있는데, 대개 2%대를 넘지 않던 한도가 올해 5.49%로 뛰었다. 팬데믹·전쟁의 영향으로 물가가 급등했던 2022년(5.1%)이 한도 산출에 포함된 마지막 해라서다.
계기가 무엇이든 ‘대학 반란’의 근본 원인은 대학을 반값 등록금의 ‘그늘’에 너무 오래 방치했기 때문이다. 2000년대 사립대 등록금이 매년 평균 5% 이상 오르자 청년들의 시위가 이어졌고, 놀란 정부와 표심을 의식한 정치권은 등록금 동결과 국가 장학금 확대를 축으로 한 반값 등록금 정책을 내놨다. 정책이 학비 부담 완화에 어느 정도 기여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정부가 대학에 반대급부로 약속했던 고등교육 재정 확대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2000년대 ‘미친 등록금’이 학생·학부모의 부담을 강요했다면 반값 등록금은 대학의 희생을 담보로 유지됐다.
대교협에 따르면 1인당 연평균 등록금은 2008년 673만원에서 2022년 679만4000원으로 1% 올랐다. 같은 기간 물가 상승을 고려하면 23% 깎인 셈이다. 등록금이 수입의 50~70%를 차지하는 사립대로선 재정난을 피할 수 없다. 그러니 실험·실습시설은 물론 화장실마저 제때 손보기 어려워 “초중고보다 못하다”는 원성이 나온다. 급여를 못 올리니 우수 연구자가 기업이나 외국으로 떠나고 있다. 인력과 시설 확보에 큰돈이 드는 인공지능(AI) 등 첨단 분야 투자는 엄두도 못 낸다. 당연히 교육의 질, 연구 경쟁력 하락은 피하기 어렵다. 2023년 국내 대학의 교육경쟁력은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이 조사한 60여 개국 중 하위권(49위)에 머물렀다. 등록금 동결 직후(2011년, 39위)보다 10계단 떨어졌다.
저비용으로 고성능 모델을 개발해 세계를 놀라게 한 중국 AI 스타트업 딥시크의 연구자 대부분은 해외 유학 경험이 없는 ‘토종 인재’다. 중국 본토 대학을 갓 졸업했거나 대학 연구소에서 석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20~30대다. 2018년부터 시작된 중국 정부의 과감한 투자로 대학 역량이 성장한 덕분이다. 동결된 등록금처럼 제자리걸음도 버거운 국내 대학들이 AI 시대에 걸맞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을까. ‘딥시크 쇼크’에 여야 정치인들이 앞다퉈 AI 투자와 인재 육성을 외치고 있다. 특별법 제정, 추경을 운운하기 전에 10년 넘게 동결된 국내 대학의 현실부터 들여다볼 일이다.
천인성([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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