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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력설은 ‘일본설’, 음력설은 ‘중국설’? [문소영의 문화가 암시하는 사회]

문소영 중앙SUNDAY 문화전문기자
설 연휴에 하루 평균 13만 4000명의 해외여행객이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출국했다고 한다. 지난해보다 14% 늘었다. 농촌진흥청 설문조사에 따르면 수도권에서 설 차례를 지내는 가구는 절반에 못 미치는 48.5%라고 한다. 음력설은 점차 “그냥 노는 날”이 되어가고 있다.

모든 전통 명절에는 그 날이 명절인 이유가 있다. 한가위의 어원은 ‘큰 보름날’로서 (조항범 충북대 교수) 보름달을 보며 추수의 시작을 축하하는 날이니 음력 8월 15일에 쇠는 게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설날은? 그 어원으로 ‘(나이를 세는)살’ ‘설다(낯설다)’ 등 여러 학설이 있는데 모두 ‘새해 첫날’과 관련된 것이다. 설날의 다른 이름인 원일(元日)·원단(元旦)도 ‘한 해의 첫날’을 뜻한다.

고종 도입 양력설 ‘일본설’ 매도
휴일 지정 음력설 ‘중국설’ 논란
고려 땐 동지가 설, 역법 따라 변천
새해 첫날과 분리된 설 의미 있나

미국 캘리포니아 디즈니랜드의 마스코트인 미키와 미니 마우스가 2025년 ‘음력설’을 맞아 한복을 입은 모습. [사진 인스타그램]
이제 2025년 달력을 보자. 1월 1일 아래에는 ‘새해 첫날’, 29일 아래엔 ‘설날’이라고 씌어 있다. 둘이 분리되어 있으니 이상하지 않은가. 『동국세시기』(1849)에 나오는 차례·세배·덕담·세화(歲華) 등의 세시풍속은 모두 새해 첫날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양력 1월 1일을 새해 첫날로 인식해 새해 인사를 하고 새해 결심을 적는다. 그러면 전통 세시풍속도 양력설에 하면 안 되는가.

동아시아 음·양력 절충 태음태양력
사실 음력으로 설을 쇠는 전통은 조선시대에 한정된 것이다. 고려 후기 “충선왕(1309년 즉위) 이전까지는 동지(冬至)를 설로 지낸 것으로 짐작된다.” (국립민속박물관『한국민속대백과사전』) 1년 중 해가 가장 짧은 날인 동지는 태양의 운행 주기에 따른 24절기의 하나로서 ‘양력’이다. 동아시아에서는 예부터 달의 주기에 따른 음력에다 양력인 24절기를 절충한 태음태양력을 썼다.

동지를 기점으로 해가 다시 길어지기 때문에 중국 주나라부터 로마 제국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태양과 생명력이 부활하는 날’로서 동지를 축하했다. 특히 주나라는 동지를 설날로 삼았고 당나라도 이 전통을 따랐다. 우리나라는 고려 후기까지 당나라 역법서인 ‘선명력’을 썼으니 동지가 설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와 근대에도 동지를 ‘작은설’이라 불렀고 “동지 팥죽을 먹어야 한 살 더 먹는다”는 말이 있던 게 바로 그 흔적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공식 설은 중국의 바뀐 역법에 따라 음력 정월 초하루였다. 즉 역법이 바뀌면서 설날이 바뀐 것이다.

1895년 음력 9월 9일 고종 임금이 “정삭(正朔·책력)을 고쳐 태양력을 쓰되 개국 504년 11월 17일을 개국 505년 1월 1일로 삼으라”(『고종실록』)는 조칙을 내렸다. 처음으로 서구의 양력인 그레고리력이 도입되는 순간이었다.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하는 일본의 입김도 있었지만, 서구와 본격 교류해서 근대화를 이루겠다는 조선 개화파들의 의지도 작용했다. 그래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으로서 자주적 근대화 운동에 힘썼던 독립신문은 양력과 양력설 전파에 앞장섰다. “양력설은 일제 잔재”라는 일각의 주장은 오해이다.

물론 민중은 하루아침에 바뀐 역법에 적응하기 힘들었고 많은 이들이 음력을 고수했다. 일제강점기가 되자 양력에 대한 반감은 민족주의와 결합했다. 일제는 음력이 미신적이라는 얼토당토않은 폄훼를 했는데, 메이지 유신 와중인 1873년에 일본이 양력으로 전환할 때도 같은 논리를 펼치며 일본 민중의 반발을 무시하고 밀어붙인 바 있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이것이 민족 감정을 건드려 더 강한 저항만 낳게 되었다.

그래서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양력 1월 1일을 공식 설날로 삼고 1~3일을 공휴일로 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대다수가 음력설을 쇠는 것을 고집했다. 결국 정부는 두 손 들고 1989년에 음력 1월 1일과 그 전후를 공휴일로 지정해 음력설로 회귀했다. 어떤 이들은 “일본설 대신 되찾은 민족 명절”이라며 환호했다.

그러나 민족 자존심을 내세워 회귀한 음력설이 서구에서는 대개 ‘중국설(Chinese New Year)’로 불리는 게 얄궂은 현실이다. 서구에서는 화교 커뮤니티를 통해 음력설 문화를 접해왔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한국의 문화적 위상이 높아지면서 국제사회는 중국 외에 음력설을 쇠는 한국·베트남 등을 존중해 점차 ‘중국설’ 대신 ‘음력설(Lunar New Year)’을 쓰는 추세이긴 하다.

디즈니랜드의 한복 미키 마우스
런던 영국박물관이 2025년 음력설을 맞아 올린 ‘중국설’ 영상. [사진 인스타그램]
그에 대해 중국인들은 강력하게 반발한다. 최근 미국 캘리포니아 디즈니랜드가 인스타그램에 ‘음력설’ 행사를 소개하며 한복을 입은 미키·미니 마우스의 모습을 선보이자 중국인들이 “중국설이다”라는 항의 댓글을 수없이 달았다. 이처럼 글로벌 기업·기관에서 영어로 ‘음력설’이라고 쓰기만 하면 중국인들이 벌떼처럼 달려든다.

런던 영국박물관의 경우 이번 음력설에 한족 전통 의상을 입은 여인이 중국 전시실을 거니는 영상을 올리고 ‘중국설’이라고 표기했다. 그러자 많은 중국인이 만족감을 표시하며 ‘왜 중국설로 써야 하는가’에 대한 장문의 댓글들을 올렸다. 요약하면 이슬람 국가들도 특유의 음력을 쓰는데 이들의 설날은 다른 날짜이며, 중국·한국·베트남의 음력설 날짜는 중국 역법에 바탕한 것이므로 ‘중국설’로 쓰는 게 마땅하다는 주장이다.

물론 반박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한국·베트남의 음력설 날짜가 청나라 ‘시헌력’에 바탕을 둔 건 사실이나, 설 문화 자체는 각자 고유하게 발달했다. 그런데 ‘중국설’이라는 명칭은 날짜뿐만 아니라 설 문화 자체도 중국에서 수입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이슬람 국가들 특유의 음력은 ‘이슬람력’으로 불린다. 영어로 ‘아시안’이 실제로 동아시아인만 가리키며 서아시아인은 ‘아랍인’으로 불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럼에도 중국인들이 ‘중국설’을 고집하는 이유는 ‘중국 기원의 것들을 한국 같은 타국이 훔쳐간다’는 피해의식 및 중화주의가 결합된 강력한 민족주의 때문이다. 달력 시스템부터 명절 같은 놀이문화까지 민족주의 이념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한국 역시 이런 민족주의가 강해서, 양력을 사용하면서도 새해 첫날과 분리된 음력설을 채택해서 전세계적으로 중화권 국가 외에 음력설을 쇠는 극소수의 나라가 됐다. 그런데 그 결과로 ‘중국설’ 공격을 받고 있으니 아이러니하다.

중국의 과도한 민족주의를 반면교사 삼아서 우리가 민족주의 때문에 실생활과 괴리된 음력설을 고집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볼 때다. 과거 우리나라는 역법이 바뀜에 따라 설날이 신라·고려시대의 양력 동지에서 조선시대의 음력 정월 초하루로 바뀌었다. 그러면 다시 역법이 바뀌었으니 설날이 양력 1월 1일로 바뀌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것이 민족 자존심과 무슨 상관인가? 오히려 설날 세시풍속을 잘 보존하기 위해 실질적 새해 첫날과 일체가 된 양력설을 쇠는 것이 옳다고 주장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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