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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는 남 인생 도둑질, 69년간 배웠지”

중앙일보에서 만난 배우 김영옥은 “저는 그냥 할머니다. 가장 평범한 할머니상이다. 그렇게 표현해 주면 좋겠다”며 활짝 웃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하나도 대단할 거 없어. 닥치는 대로 사는 거죠.”

아흔 목전이라곤 믿기지 않는 힘 있는 목소리였다. 연기 인생 69년 차, 국내 최고령 현역 여배우 김영옥(87)을 지난 22일 중앙일보에서 만났다.

미세먼지가 안개처럼 자욱한 날이었다. 평소엔 잘 안 쓴다는 마스크를 벗자, 세월에 농익은 미소가 드러났다. 지혜와 신중함, 도약의 에너지를 상징한다는 푸른 뱀의 해(乙巳年), 건강한 활동 비결부터 물었다.

“50대 때부터 되도록 하루 6~8시간은 자고 편식 안 하고 무리 안 하려 그러죠. 하지만, 우리 일이 밤새고 불규칙할 때도 있잖아요. 근데 그렇게 살아도 큰 지장은 없는 것 같으니, 그냥 명이 긴가 봐요.”

그의 ‘최고령 현역’ 직함은 그저 나이 때문이 아니다. 솔직한 태도로 동시대와 소통해온 젊은 감각이 토대다.

‘오징어 게임’(2021, 넷플릭스), ‘파친코’(2022~2024, 애플TV+) 등 글로벌 OTT 히트작을 비롯한 200여 편의 드라마·영화 출연작, 삶의 이야기를 노랫말에 실어낸 JTBC ‘뜨거운 씽어즈’(2022), ‘힙합의 민족’(2016) 등 음악 예능, EBS 다큐멘터리 ‘건축탐구 집’ 내레이션(2020년 한국방송대상 내레이션 상 수상)까지….

일도, 생각도 마음 가는 대로 솔직하게 좇아왔다.

지난달 수상의 겹경사도 그런 행보의 결실이다. 영화 ‘소풍’(2024)으로 공동 주연 나문희와 나란히 서울국제영화대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SBS 연말 연기대상 시상식에선 드라마 ‘지옥에서 온 판사’로 공로상을 받았다. 배우 박인환과 연상연하 부부로 코믹 호흡을 발휘한 주말드라마 ‘다리미 패밀리’(KBS2)는 부동의 ‘시청률 1위’ 자리를 지켰다.

그는 1938년 경기도 경성부(현 서울 종로구)에서 태어나 8·15 해방을 맞았다. 6·25 전쟁 땐 연세대에 다니던 큰오빠가 인민군에 강제징집 됐고, 작은오빠는 국군으로 참전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2004)가 흡사 그의 가족사였다. “어릴 때 살던 종로 사직동에 돌아와 사는데, 폭탄 파편 맞지 말라고 어머니가 솜 모자를 씌워준 기억이 여태 생생하죠.”

“우리 민족이 참 대단하다”고 운을 뗀 그가 가만히 덧붙였다. “그 시대를 버텨온 나라인데, 지금 왜들 이러나. 참 슬픕니다.”

혼란한 시절마다 돌파구를 찾아내온 그의 삶이다. 연기 대본이 그에겐 ‘학습지’였다. “연기하며 남의 인생을 도둑질해보면 어떻게 살아야겠다 대처법을 배우죠.”

고교 시절 연극반을 하다가 1957년 연극 ‘원숭이손’ 무대로 데뷔했다. 대학을 다니며 한국 최초 TV 방송국 HLZK-TV 탤런트, 춘천방송국 아나운서를 거쳤지만, 기어코 연극판에 돌아갔다. 당대 최고 극작가 차범석의 극단 ‘산하’에 28년간 몸담았다. 그 때 배운 연기의 기본기로 성우(CBS 5기, MBC 1기)를 거쳐 다시 배우가 됐다.

“돈 한 푼 안 받고 1년에 한두 편 훈련과정으로 연극을 했어요. 연극 하느라 오밤중에 들어가고, 아이들 홍역을 앓을 때도 못 들여다보고. 근데 일이 들어오면 욕심이 나. 지금도 설레요.”

그는 30대 때 일찍부터 노역을 시작해, KBS ‘옛날의 금잔디’(1991)에선 한국 드라마 최초로 치매 연기를 했다. 할머니 전문 배우의 영역을 확장한 게 시트콤 ‘올드미스 다이어리’(2004~2005, KBS2)부터다. 무례한 식당 주인에게 속사포 응징을 퍼붓는 장면에 ‘할미넴’(할머니+미국 래퍼 에미넴)이란 별명이 생겼다. 젊은 팬과 소통하는 재미도 맛봤다. 음악예능 ‘뜨거운 씽어즈’에서 그가 부른 커버곡 ‘천개의 바람이 되어’는 유튜브 조회수가 300만을 넘었다.

2년 전 그는 샤워 중 미끄러져 응급실에 실려 갔다. 뼈에 금이 가 한 살 많은 남편이 소변까지 받아냈다. “이대로 못 일어나는 거 아닌가” 두렵기도 했지만, “그게 고쳐지고, 회생할 때 희열이 남달랐다”고 했다. “삶이 다 좋기만 한 사람은 하나도 없더군요. 사람이니까 이런 일도 겪는 거고. 그냥 훌훌 털어버리는 걸 내가 잘해요.”

그는 음악 경연 프로그램 ‘현역 가왕 2’(MBN)에서 얼마 전 작곡가 윤명선이 한 참가자에 했던 칭찬을 언급했다. “삶의 경험이 (가창력에) 영양제가 됐다고, 하늘에 감사하라 그랬는데 꼭 나한테 하는 얘기 같기도 했어요. 타고난 재능도 중하지만, 경험이 밑바탕이 되면 가슴을 울릴 수밖에 없으니까요.”

독보적인 영역을 개척해온 장수 명배우의 진짜 비법이었다.



나원정([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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