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세 현역 배우 김영옥 비결 "대본이 학습지, 경험이 영양제"
아흔 목전이라곤 믿기지 않는 힘 있는 목소리였다. 올해로 연기 인생 69년 차. 국내 최고령 현역 여배우 김영옥(87)을 지난 22일 중앙일보에서 만났다.
미세먼지가 안개처럼 자욱한 날이었다. 평소엔 잘 안 쓴다는 마스크를 벗자, 세월에 농익은 미소가 드러났다. 지혜와 신중함, 도약의 에너지를 상징한다는 푸른 뱀의 해(乙巳年), 건강한 활동 비결부터 물었다.
“그냥 할 수 있는 대로 움직이는 거지, 무슨 비결이 있나요? 50대 때부터 되도록 하루 6~8시간은 자고 편식 안 하고 무리 안 하려 그러죠. 하지만 우리 일이 밤새고 불규칙할 때도 있잖아요. 근데 늦잠 자고 그렇게 살아도 큰 지장은 없는 것 같아.”
지난 6일이 그의 생일이었다.
“그냥, 명이 긴가 봐요.”
글로벌 OTT 성공작마다 있다…최고령 현역 여배우
글로벌 OTT 히트작 ‘오징어 게임’(2021, 넷플릭스), ‘파친코’(2022~2024, 애플TV+) 등 시대와 호흡해온 200여 편 드라마‧영화 출연작, 삶의 이야기를 노랫말에 실어낸 JTBC ‘뜨거운 씽어즈’(2022), ‘힙합의 민족’(2016) 등 음악 예능, 동시대 사람들의 보금자리를 들여다본 EBS 교양 방송 ‘건축탐구 집’ 내레이션(2020년 한국방송대상 내레이션 상 수상)까지….
일도, 생각도 마음 가는 대로 솔직하게 좇아왔다.
"존엄사 허용" 지지한 '소풍' 68년만에 여우주연상
이어 SBS 연말 연기대상 시상식에선 드라마 ‘지옥에서 온 판사’로 공로상을 받았다(SBS 공로상은 2011년 받고 두 번째다). “100세 시대니, 그때까지 건강해서 (젊은 후배들도) 열심히 다방면으로 재주를 보여주길 바란다”는 소탈한 덕담으로 수상 소감을 대신했다. 이어 탄핵 정국 속 끝인사도 화제에 올랐다. “안개 속에 있는 연말 같은데 내년에는 모두 좋고 아름답고 행복한 한 해가 되길 기원합니다.”
역사의 산 증인이 건넨 뼈 있는 당부였다.
"안개 속 연말" 탄핵시국 수상 소감
“우리 민족이 참 대단하다”고 운을 뗀 그가 가만히 덧붙였다. “그 시대를 버텨온 나라인데, 지금 왜들 이러나. 참 슬픕니다.”
"연기 대본이 학습지, 아픈 경험이 영양제였죠"
고교 시절 연극반을 하다가 1957년 연극 ‘원숭이손’ 무대로 데뷔했다. 대학을 다니며 한국 최초 TV 방송국 HLZK-TV 탤런트, 춘천방송국 아나운서를 거쳤지만, 기어코 연극판에 돌아갔다. 당대 최고 극작가 차범석의 극단 ‘산하’에 28년간 몸담았다. 그 때 배운 연기의 기본기로 성우(CBS 5기, MBC 1기)를 거쳐 다시 배우가 됐다.
“돈 한 푼 안 받고 1년에 한두 편 훈련과정으로 연극을 했죠. 연극 하느라 오밤중에 들어오고, 아이들 홍역을 앓을 때도 못 들여다보고. 우리 어머니, 남편도 고생했죠. 어쩌면 그렇게 철없이 했나, 그땐 그것도 모르고 지나왔죠. 근데 일이 들어오면 욕심이 나. 지금도 설레요.”
K드라마 치매 연기 1호…'올미다' 할미넴이 전환점
할머니 전문 배우의 영역을 확장한 게 시트콤 ‘올드미스 다이어리’(2004~2005, KBS2)부터다. 본명을 딴 캐릭터를 만나, 호탕한 본모습이 튀어나왔다. 무례한 식당 주인에게 속사포 응징을 퍼붓는 장면에 ‘할미넴’(할머니+미국 래퍼 에미넴)이란 별명이 생겼다. 젊은 팬과 소통하는 재미도 맛봤다.
“배우로서 터닝포인트였습니다. 그때 팬들이 여태까지 15주년, 20주년이라고 파티를 열어주는 게 늘 감사하죠.”
"내 일기장이 너희 역사책" 할미판 자작 랩 화제
중장년 배우 합창 예능 ‘뜨거운 씽어즈’에서 그가 부른 커버곡 ‘천개의 바람이 되어’는 유튜브 조회수가 도합 400만을 넘었다. 먼저 떠난 이가 남은 사람에게 위로를 전하는 노랫말이 백발 노배우의 지극한 음성과 만나 “먼저 간 아이가 불러준 노래 같다” “돌아가신 엄마가 생각난다” 등 공감 댓글이 잇따르면서다.
김용림‧정혜선 “언니 노래는 후벼 파는 게 있다”
“내가 박치에요. 음정‧실력을 떠나서 대중도 어떤 할머니가 그냥 앞날을 환상적으로 얘기해준 것 같지 않았을까. 나는 또 그러면 된다고 생각해요.”
‘뜨거운 씽어즈’도 “배우들이라 그런지 전해오는 감정이 다르다”는 반응이 흐뭇했다고 한다. “연기도 똑같아요. 대사 안 틀리고 해내는 게 사명이 아니거든. 얼마만큼 시청자를 사로잡아야 하나. 배우는 평생 그 욕심을 내고 살아야죠.”
반신불수 손자 10년째 돌봐…"매사 긍정적, 잘 늙으려 노력"
그러고 보면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지는 게 이상하다” 할 만큼 깊은 슬픔을 겪어도, 곰삭힌 후의 깨달음까지 보태어 고백해온 그다. “삶이 다 좋기만 한 사람은 하나도 없더군요. 잘 살고 못 살고는 차이가 없고 불만은 어디에나 있어요. 사람이니까, 이런 일도 겪는 거고, 그냥 훌훌 털어버리는 걸 내가 잘해요. 잘 늙으려고 노력하는 건 있죠.”
그는 음악 경연 프로그램 ‘현역 가왕 2’(MBN)에서 얼마 전 작곡가 윤명선이 한 참가자에 했던 칭찬을 언급했다. “삶의 경험이 (가창력에) 영양제가 됐다고, 하늘에 감사하라 그랬는데 꼭 나한테 하는 얘기 같기도 했죠. 타고난 재능도 중하지만, 경험이 밑바탕이 되면 가슴을 울릴 수밖에 없으니까요.”
독보적인 영역을 개척해온 장수 명배우의 진짜 비법이었다.
나원정([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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